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9) 위당 정인보(爲堂)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1946년) 본문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9) 위당 정인보(爲堂)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1946년)
대야발 2025. 3. 7. 11:11

정인보(1893년(고종 30)~미상)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 · 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 · 박은식(朴殷植) · 신규식(申圭植) ·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 · 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 · 협성학교(協成學校) ·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 ·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 · 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 · 국사학 ·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정인보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 · 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 · 절의(節義) · 실학 · 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 · 경세(警世) · 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 · 『담원문록(薝園文錄)』 ·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는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생존한 학자 정인보가 단군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특정한 주제를 설정해 통사 형식으로 저술한 역사서. 학술서이다.
원래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서울신문사에서 상(1946.9)·하(1947.7) 두 권으로 간행하였다.
저자는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를 잇는 민족주의 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원래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한 한학자였다. 국치 후에는 한때 중국에 망명해 동제사운동(同濟社運動)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였다. 『성호사설』과 『여유당전서』의 교열·간행 작업에도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실학과 조선학의 배양에 헌신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 한국사, 특히 고대사가 왜곡되어가는 학문적 풍토를 좌시할 수 없어 한국사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 무렵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가 준 자극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것을 보고 일본 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저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더욱 깊이 알아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버리리라.’하였다.
그 뒤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가 들어와 그 안식(眼識)을 탄복하는 일면에 …….”라고 하였다. 뒤늦게나마 국사 연구에 착수하게 된 동기가 식민주의 사학의 타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얼’ 중심의 정신사적인 역사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얼’은 민족정신을 말한다. ‘얼’의 반영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역사요, 역사의 대척주(大脊柱)를 찾는 것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천추만대를 일관하는 ‘얼’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학이란 역사의 대척주인 ‘얼’을 추색(推索)하는 학문으로서, 역사가는 개개의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대척주인 ‘얼’의 큰 줄기를 찾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얼’을 빼놓은 당시의 역사학은 그것이 일제관학자의 것이든 줏대 없이 총독부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자들의 것이든, 쓸데없는 것이요,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문헌고증학을 내세우며 한국 고대사를 난도질하는 식민주의 사학에 정면으로 투쟁하고 있다. 우선 단군을 시조로 인식하였다.
단군의 향수(享壽)에 관한 기록은 단군조선의 전세(傳世)로 파악했으며, 단군의 연원 문제는 단군과 천(天)을 연결시키려는 의식의 반영으로 보았다. 단군의 발상지를 백두산으로, 국도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신채호의 사학을 계승·보완·심화하였다. 즉 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와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 및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설’ 등이 그것이다.
신채호의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백제의 해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그의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를 입증하는 논리는 명쾌하다.
당시 일제관학자들은 평양과 그 부근에서 ‘낙랑태수인(樂浪太守印)’ 등의 명문이 든 봉니(封泥)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하여 평양 근처가 바로 옛 낙랑지역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봉니가 평양 주변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곧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봉니 조각은 비밀문서를 받는 쪽에서 남겨지는 것인데, 평양 지역에서 이러한 봉니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평양이 곧 낙랑의 문서를 받은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평양이 문서를 보낸 주체가 되는 낙랑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사연구』에 나타난 그의 역사학은 전통적인 한학에서 출발해 고고학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한 학문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한계도 없지 않다. 그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으로 ‘문헌고증’에 대한 한계와 역사를 지나치게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 등이라고 하겠다.(2)
■ "얼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민족의식 북돋워
일제때 무기정간까지 440회 연재.. 위당, 광복후 4대 국경일 노래 작사
[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 실린 위당 정인보의 ‘5천년간 조선의 얼’ 첫 회. 동아일보DB |
순종의 인산일, 망국의 황제를 떠나보내는 이 사설의 필자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깨운 근대 국학 연구의 태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1893∼1950)이다. 그는 1924년 5월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논설위원)가 된 이후로 동아일보에 수많은 논설과 기사, 논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위당이 직접 쓴 ‘5천년간 조선의 얼’을 1935∼1936년 무려 440회에 걸쳐 연재했다. 연재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본보가 무기정간당할 때까지 계속됐다.
위당은 이 연재를 통해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를 수립하려 했다. “‘얼’이 없으면 곧 사람이 아니다.…‘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여기 무슨 심오함이 있으며 무슨 미묘함이 있으랴?”(1935년 1월 3일, ‘5천년간 조선의 얼’)
오늘날까지도 연구가 활발한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당대로 불러낸 것 역시 정인보였다. 위당이 동아일보에 1934년 9월 10∼15일 6회에 걸쳐 기고한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은 근대 최초의 실학 연구물로 꼽힌다.
위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사업 등 민족의식을 북돋우려는 동아일보의 사업에도 앞장섰다. 충무공 묘소의 위토 경매 소식이 알려진 뒤 1931년 5월 14일 본보 사설을 통해 “위토와 묘소마저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음은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범죄”라며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한 것도 그였다.
1931년 3월 30일자에는 독자의 요청으로 정인보의 서재 풍경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비록 누더기 되고 좀은 먹었으나 그 속에는 고조선에 빛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온갖 우리의 실물이 들어 있는 금광입니다. 이 광 속에서 작업하는 교수는 옛 보물을 찾기에 눈이 붉은 조선의 귀한 광부입니다”라고 했다.
‘조선의 귀한 광부’였던 위당은 광복 뒤 5대 국경일 중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의 노래를 작사했고, 초대 감찰위원장(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돼 사망했다.(3)
동아일보, 조종엽기자, [아하!東亞]<22> 논설위원 정인보, '조선의 얼' 일깨우다, 2018. 1. 22.
■ '조선사연구' 한글판 첫 발간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인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신채호는 '낭가사상'(家思想)을, 문일평은 '조선심'(朝鮮沈)을 각각 강조하며 조선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했다. 위당 정인보(1893~?)는 같은 맥락에서 '민족 얼'을 강조했다. '얼'은 우리가 잘 아는 '고도리'(가장 중요한 본질)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정인보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사학자들과 1915년 펴낸 '조선고적도보'라는 역사책을 본후 분기탱천했다. 1913년 일제의 고적조사단이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굴하고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해당 비의 발굴은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강변한 것들이 사실인 양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정인보는 일본 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총독정책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깡그리 부숴 버리리라."고 다짐했다. 정인보가 1935년 1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이란 제목으로 단군부터 조선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개괄하는 연재를 시작한 이유다.
1년 7개월 동안 282회 연재되던 중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에서 동아일보 미술기자였던 청전 이상범이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의거'를 벌이자 동아일보가 강제 정간돼 중단됐다.
정인보가 분석하고 고증했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선언했다. 일제의 단군조선 부정론에 대항한 것으로, 신화의 영역에 있던 단군을 역사의 연구영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단군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로 비견되는 최고 통치자에 대한 존호였다는 것이다.
둘째, 기자조선설을 부인했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는 고조선-위만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험독, 지금으로는 요령성 해성현으로 추정했다.
셋째,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거나 임금이라는 뜻이 있는 일종의 존호이며, 고조선과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넷째, 요수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 일대를 흐르는 난하지역으로 추정했는데, '요수난하설'은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이 보충해 개진했다.
다섯째, 한사군의 위치가 낙랑은 요동의 험독, 현토는 우북평, 임둔은 초자하, 진번은 대릉하 지역으로 모두 한반도 너머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하고, 관할 지역이 수시로 변동됐던 한사군에 대해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한사군이 한반도를 400년이나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자들에 반박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도 이미 1930년대 고증해 밝힌 셈이다.
정인보의 연재물 '오천년간 조선의 얼'은 1946년 서울신문에서 단행본 '조선사연구'로 새로 태어났다가, 1983년 '담원 정인보 전집' 중 제3·4권으로 출간됐고, 최근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조선사연구'(문성재 역주)로 한글판을 내놓았다.(4)
서울신문, 문소영기자, 日 식민사학 반박한 정인보의 고조선 역사 고증, 2012. 11. 7.
<자료출처>
(1) 정인보(鄭寅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69
(3) [아하!東亞]<22> 논설위원 정인보, '조선의 얼' 일깨우다 (daum.net)2018. 1. 22.
(4)日 식민사학 반박한 정인보의 고조선 역사 고증 (daum.net)2012. 11. 7.
<참고자료>
정인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6·25 때 납북된 정인보 선생을 추모하며 (daum.net)2019. 7. 20.
광복절에 강진서 만나는 '민족시인 정인보' (daum.net)201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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