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7)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호암전집(湖巖全集) 본문

문일평(1888년 5월 15일~1939년 4월 3일)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문일평(文一平)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중퇴하고 태극학회 일어 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1년 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906년 말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에 「자유론」 등을 발표하였다. 1909년 2월 메이지학원 보통과 4학년 시절 교내 연설회에서 ‘청년과 신세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0년 2학기 평안북도 의주 양실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로 전근하였고,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토요강습소에서 대중 강연 활동을 하였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안재홍(安在鴻) · 김성수(金性洙) · 장덕수(張德秀) · 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학계보』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고, 같은 해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13년 1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대공화일보(大共和日報)』사에 취직하여 논설을 쓰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동제사에서는 청년 유학생과 독립운동가 육성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이 설립되자 박은식 · 신채호 · 홍명희 · 조소앙 등과 함께 지도교수로 활동하였다.
1914년 4월 중국에서 귀국하였고, 1918년 박승빈(朴勝彬) · 오세창(吳世昌)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힘쓰고자 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여 3월 12일 종로 보신각에서 이른바 독립선언사의 일종인 「애원서(哀願書)」를 낭독하였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1월 6일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조선노동대회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 1월 잡지 『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 잡지 『 개벽』 1월호에 「갑자 이후 육십 년간의 조선」을 발표하였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 명의로 「전조선민중운동대회 개최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1924년부터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 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세 번째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역사 서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인 중 1명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2월 신간회 경성본부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기관지 『자활』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외일보사 논설부 기자 및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직하였다.
1928년 5월 잡지 『 별건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을 발표하여 ‘조선심(朝鮮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31년 조선일보사를 사직할 때까지 『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잡지 『 신민』, 『 신생』, 『 문예공론』 등에 조선 문화와 한글, 조선사에 관한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중앙고등보통학교 조선사 담당 교사로 전근하여 학생 · 청년의 역사 교육에 힘썼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1934년 5월에는 조선 문화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정다산의 위적 – 99년기에 제하야」를 발표하여 정약용의 업적과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1935년 7월 16일 다산 정약용 서거 백 주년 기념회를 개최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한글과 조선사에 관한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7년 7월 16일에는 조선방송협회 라디오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성 부근의 탐승에 취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 16일에는 신조선사에서 『 여유당전서』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3일 자택에서 급성 단독(丹毒)으로 사망하여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 · 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 논술이 지니는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가 지닌 궁극적 목적이 역사 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자연 · 사적 · 예술 · 풍속 등 남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해 민족의 미래 개척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논술의 제목 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양조(漢陽朝)의 정치가 군상」, 「사상(史上)의 기인」, 「사(史)의 도(都) 강화(江華), 시(詩)의 도(都) 강화(江華)」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목을 취하였다.
셋째, 발표하는 글은 대부분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미관계 50년사」 등 몇 편은 예외이기는 하나, 대부분 문일평의 글은 단문이다.
넷째, 평이한 문체이다. 문일평의 사풍(史風)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소화해 이를 쉽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 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하였다. 이는 민족사를 우선 반성적으로 고찰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 외교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사에 나타난 파쟁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성리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에 결부하여 식민사학자들의 당파성 문제와는 궤를 달리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사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반면, 문일평은 민족사의 성찰과 반성에 역점을 두었다.
다른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역사 연구의 최종 결집으로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다. ‘조선심(朝鮮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에서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심’의 결정(結晶)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또,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자아(自我)의 재검토 · 재수립으로 보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외교 자세를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문일평의 사학 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구사(舊史) 비판을 통한 독특한 사론(史論)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史實)을 흥미롭게 재구성해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誇大)와 부회(附會), 독단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2. 생애
1888년 5월 15일 평안도 의주부 주내면 서부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의 양반가에서 부농인 아버지 문천두(文天斗)와 어머니 해주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3대조 이래로 의주부의 동북방인 평안도 창성도호부(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세거한 무관 가문으로 선조 여럿이 무관직을 지냈으며 부농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유복하게 자라난 문일평은 12살 때 3살 연상의 김씨와 결혼해 부인으로부터 한글을 배웠고 17세부터 18세까지는 최해산(崔海山)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북경이나 천진 등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건너와 서북 지방에서 선교했는데 의주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 예배당이 세워졌다.[2] 문일평은 17세 때인 1904년 미국에 유학하기로 결심하자 머리를 깎고 교회에 나가 미국인 선교사들과 교제했으며 미국에 유학하여 실력을 쌓은 다음 귀국하여 나라의 동량이 되고자 하는 청운의 꿈을 품었다.
1905년 문일평은 의주 용암포에서 7백톤 급 증기선을 타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문제가 생겼고 인천에서 내려 경성을 거쳐 일본 유학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이유는 여행권과 여권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에 머물던 문일평은 1905년 봄 경성에서 경부선으로 부산을 거쳐 도쿄로 건너갔다.[3] 그는 주일한국공사와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감리교회가 세운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 창강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일본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집중 공부했고 뒤이어 미사노리 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곳에서 홍명희와 이광수 등을 만났다. 이후 일본어가 익숙해진 문일평은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했으며 서북 지방 출신들이 주도한 '태극학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9월 귀국한 문일평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 등 개신교 미션스쿨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부인 김씨를 정신여학교로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 경신학교 교장이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학감 김규식과 교류했고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와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최남선은 상동청년회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문일평은 지리를 가르쳤다. 그는 의주의 양실학교에서 재임하고 있을 때 신민회에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의주에서 체류한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했다. 문일평은 서양 선교사 및 기독교인들과 교제하면서 다시 미국으로 유학가기를 강력히 원했으나 당시에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미국공사관이 철수해버렸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에 한국 침탈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투서를 보냈다가 투옥되는 바람에 여행권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행을 포기한 문일평은 1911년 봄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1912년 가을 동 학부의 정치경제과에 진학하여 1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과 교유 관계를 가졌다.
문일평은 정치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역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1929년 5월 <신생>의 '역사가 문일평 씨와의 문답기'에서, 문일평은 자신이 역사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루는 땅콩을 사가지고 와서 종이 봉지를 펴니까, 그것을 싸가지고 온 헌 신보지에 '동양의 호레이쇼 넬슨, 이순신'이라는 책 광고가 있더군요. 일찍이 넬슨이 유명한 장군인줄은 알았는데, 조선의 역사란 것도 알아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문일평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단지 '통감'을 배울 때 중국 역사를 들은 것이 전부였으며 일본에 가서야 비로소 조선 역사를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학의 서양사 강의를 들었으며 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문학 강의를 즐겨 들었다. 당시 교우였던 이광수는 문일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문의 힘도 많고 역사의 지식이 넉넉해서 내가 모르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찬양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부러워하였다. 그는 시세가 영웅을 짓느냐, 영웅이 시세를 짓느냐하는 문제를 논하기를 즐겨하였다.
하지만 문일평이 무엇보다 몰입한 것은 한민족이 외적과의 전쟁에서 이긴 사실을 읽는 것이었고 그는 조선이 너무 약하고 남을 숭배만 하는 나라인 것 같아서 분하고 원통하게 생각했다. 그런 그는 조선이 대국을 이겨낸 일에 크게 기뻐했고 훗날 과거를 회상하면서 가장 통쾌한 순간으로 살수와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당당한 무용이 빛난 것, 고려 현종 때에 강감찬이 거란족을 꺾은 귀주대첩, 고려 예종 때 여진족 정벌에 승리한 윤관의 동북 9성 전역 같은 일을 읽었을 때를 꼽았다. 이렇듯 문일평은 학생 때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그는 공부보다는 잡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 유학생들만의 잡지를 창건하고자 유학생 친목회에 가담해 '학계보'의 편집인을 맡았다. 그러나 학계보는 창간호에 그치고 말았고 이후에도 잡지를 창간하려고 준비하다가 1912년 말 돌연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상하이로 떠났다. 문일평의 조선일보사 후배였던 유광렬은 "문일평은 나라 잃은 슬픔에 비분강개하여 독립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상하이로 건너갔다"고 밝혔다. 반면 홍명희는 "문일평이 도쿄에서 모함을 받아 화가 나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을 찾으려고 상하이로 갔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문일평이 과거에 신민회에 잠시 가담했던 사실을 근거로 그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4]
문일평은 상하이와 난징에서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등과 함께 기숙하면서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동제사는 대종교와 대동 사상을 기본으로 국혼을 중시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였는데 그는 이 단체에서 일하면서 기독교보다는 도교나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불경을 읽으면서 중국 승려들에게 불교를 가르쳐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가 중국 불교계에 많이 알려진 것을 보고 기뻐하기도 했다. 문일평은 상하이에서 중국 혁명당 지도자 및 청년 외교관들과 교유 관계를 맺었고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홍명희 등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때때로 고향을 오가며 고향에 있는 땅을 팔아서 챙긴 돈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제공하거나 학교를 세웠는데 가세가 기울고 건강이 나빠지자 문일평은 1914년 봄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돌보며 독서에 전념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문일평은 3월 8일 오후 안동교회의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독립 문제에 관해 논의한 뒤 기미독립선언서의 후속으로서 또 하나의 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3월 11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낸 문일평은 3월 12일 오전 서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의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 문성호, 김극선, 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논의했다. 3월 23일 오후 문일평은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했다.
오늘 세계대세는 이미 무단적 실력은 가고 정의 인도가 온 것이 아닌가. 이미 압박적 역리(逆理)가 가고 평화적 정도(正道)가 흥한 것이 아닌가. 민족이 이미 무력으로써 자립치 아니하고 인도 정의로써 자존자보(自存自保)케 된 이상은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이 무슨 모순이 있으며 무슨 패리(悖理)될 것이 있으리오. 동양평화가 조선독립으로 더욱 확고할 것이 아닌가. (후략)
이후 문일평은 조선총독부에 애원서를 제출한 뒤 보신각에서 2~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애원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8월 30일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 혐의로 징역 8개월형(미결 구류일수 12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이튿날인 7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복역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독립선언서' 대신 '애원서'라는 제목을 달아 체포된 뒤에 처벌 수위를 예상해 보신의 방편으로 그 같은 용어를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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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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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은 1920년 3월 9일 만기 출옥#한 뒤 1920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한시 <삼각산>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20년 2월 결성된 조선노력자대회의 교육부장관직을 맡았고 8월에는 한성도서부서협회 출판부의 촉탁으로 근무했다. 이후 서울 중등학교, 개성 송도중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역사 교사 생활을 청산하고 3번째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병도의 회고에 따르면 문일평은 동경제대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 청강생으로 재학하던 중 일본 학생에게 연개소문에 관한 얘기를 수차례 했다가 핀잔을 듣고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3번째 유학을 1년도 안되어 포기한 것만은 분명하다.
문일평은 역사 가운데 '중세사' 연구에 주력했으며 그는 "자신이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고대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그 중턱의 일에 중점을 둔다"고 밝혔다. 그는 1924년 <고려개사(高麗槪史)>를 집필했는데 이 글은 민족주의 사학에서 고려사를 연대사로 정리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일평은 고려의 건국은 남북 양조선의 문화를 동시에 합치하여 진정한 의미 아래에서 전적 통일의 물심 양요소가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고 봤다. 신라와 발해라는 '남북조'가 고려의 건국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민족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문일평은 왕건을 대조선 정신을 계승한 인물로 높이 평가했고 귀주대첩을 거란 남하와 고려 북진의 일대 충돌로 봤고 거란, 여진, 몽골과의 전쟁을 통해 고려인의 용기와 탄성(彈性)을 확인하고자 했으며 최영의 요동 정벌 계획이 위화도 회군으로 수포로 돌아간 것에 관해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자강(自强) 자조(自助)적 존엄한 대조선 정신이 최영의 죽음을 따라 거품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문일평은 언론 활동에 주력했는데 중외일보에서 12년간 근무하며 신문에 역사, 문화, 한시 등 각종 분야에 관한 글을 기고했고 신문사가 주최하는 각종 강연회에 참가했으며 1927년에는 중외일보 논설부 기자를 맡았다. 또한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 적을 두고 역사학 전공자이자 사학가로 자처했으며 조선의 역사, 문화,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역사 보급 및 민중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1927년 2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신간회에서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출되었고 1927년 8월 15일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임되어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했다. 하지만 1929년 6월과 1930년 11월 2차례에 걸쳐 선출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면 신간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신문사가 운영난으로 어렵게 되자 조선일보를 사임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1932년 8월까지 임시 교사로 근무했다. 1932년 조선일보의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조선일보에 들어갔고 일주일마다 역사와 관련된 논설을 주로 기재했다. 그의 논설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담겨 있으며 조선일보에서 그와 함께 근무한 동료들은 "문일평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으며 항일 의지가 분명한 지사적 인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중국사상 그것도 아니요, 인도사상 그것도 아니요, 조선사상은 어디까지 조선사상이다. 비록 예로부터 조선이 중국, 인도 사상의 감화를 많이 받았으나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생활을 하게 된 조선인은 구원한 역사를 통하여 일종 특수한 조선심을 형성함에 이른 것으로서 그것이 세종에게 의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조선심의 대표자라고 부르고 싶다.
문일평은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 역사의 과학화를 주장하면서도 정신적 요소인 '조선심(朝鮮心)'을 강조했다. 그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구별 속에서 "민족적 아(我)", "군체(群體) 아", "조선 아"라고 정의할 수 있는 민족 단위의 공통체의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봤다. 아울러 그는 국가와 민족의 단위의 정신적인 요소를 여러 용어로 표현했는데 그 중 자주 사용한 용어가 바로 조선심이었다. 조선심은 조선 후기 실학을 평가할 때도 적용되었는데 문일평은 실학을 "영조, 정조 시대에 성행하던 실사구시의 학풍"으로 보고 그것이 반도 유학의 공리 편중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실사구시의 근본 정신은 자아를 재검토하여 재수립하려 함인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먼저 근본 문제인 경제적 시설부터 착수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평가했다.
근일에 사용하는 조선학은 흔히 애급학과 앗시리하학과 병칭하는 경향이 있다마는 여기는 다소 그 의미가 다르니 넓게는 종교, 철학, 예술, 민족, 전설할 것 없이 조선 연구의 학적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포함한 것이나, 협의로는 조선어, 조선사를 비롯하여 순조선문학 같은 것을 주로 지정하여야 하겠다.
한편 문일평은 '조선심'과 훈민정음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강조하면서 '조선학'을 위와 같이 정의했다. 문일평은 한자와 한학을 '우리 문화'에서 배제하고자 했으며 '민족 문학'을 "정음 반포 이후로서 순정(純正)한 우리 문학의 창시(創始)를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조선 문화를 민중적 관점으로 적용할 때 원효와 이황은 귀족 문명 시대에 있어서 사상계의 대표자가 되었다면 세종은 장차 오는 민중 문화 시대에 가서도 사상계의 지도자됨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문일평은 훈민정음 발표 이전에도 옛날 신라인이 노래한 것을 기재한 향가 등 민족 단위의 문학은 한 문화에 중독되기 전의 것으로 그 정신과 관념만으로 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수립함에 있어 불가결의 한 요소가 될 것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고대 신화를 무작정 천시하고 배척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그 속에서 고대인들의 순수한 문화적 사랑을 고려하여 보호를 꾀하는 것이 역사적 문화를 존중하는 본의라고 주장했다.
다만 문일평은 일본 식민학자들이 설립한 청구학회에 참여했다가 1932년 탈퇴했고 1934년 5월 이병도 등이 설립한 식민사관 성향의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가 왜 이런 행보를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논쟁거리로 거론되고 있다. 1939년 4월 3일 문일평은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에서 지병이던 급성단독(急性丹毒)이 재발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글은 1939년 유고집 형태로 호암사화집(湖岩史話集)과 호암전집 3권, 1940년에 소년역사독본(少年歷史讀本)으로 발간됐다.
3. 사상
문일평이 <전집>에 남긴 기록은 총 779개 칼럼으로, '고려개사'와 '소년역사계본'을 각기 하나로 셈하여 추가하면 781개이다. 이 가운데 정치, 외교사 관련 칼럼은 총 193개이며, 역사, 사화 관련 인물 17명에 대한 것과 역사, 평론, 사담 분야는 172개, 문화, 풍속 분야는 161개 칼럼이 있다. 그리고 민속은 13개, 문학은 27개, 고적답사 등을 포함한 수필류 칼럼이 181개이고, 경제 관련 기사는 8개이다. 이를 비율로 환산해 보면 정치, 외교사는 25.%를 차지하며, 역사 분야는 22.8%, 문화, 풍속 분야는 21.3%를 차지한다. 즉, 문일평은 정치, 외교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문화사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3.1. 민족사
문일평이 활동하던 당시 민족사학자들의 주요 화두는 한국사를 민족사란 형식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교과서에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 것인가 여부였다. 문일평은 이에 관해 1929년에 <동광>에 게재한 '조선사의 교육서에 대하여'에서 '중등 교과서' 수준의 역사서 서술 기준을 '통속, 취미, 과학화' 3가지 요소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문과 전문적인 학술 용어 대신에 쉬운 한글을 많이 사용해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문일평은 민족의 기원 문제인 단군신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단군 시대는 역사 발전 단계상 원시적 농경사회이며 단군은 하늘에 제사하는 집단을 다스리는 군주의 보통 명칭이라고 주장하면서 단군에게 과도한 '민족적' 의미를 부여한 역사 서술에 관해 비판을 가했다.
현채(玄采)의 <반만년조선사>는 태고사에 단군을 지내어 기자조선을 서술함에 있어서 기자 이후 준왕까지 41대의 모든 임금의 이름을 들어 각기 업적을 적어놓았으니, 이것은 오늘날 연구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바이다.
장도빈(張道斌)의 <조선역사대전>은 상고사에 있어 단군에 관한 서술의 분량이 그뒤 열국에 과한 서술의 분량보다 도리어 많으니 역사 서술상 정견을 밟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 그러냐 하면 역사적 사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내려올수록 점점 확대되는 것이 통칙이므로 역사적 서술도 이 통칙을 무시하여서는 불가한 때문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단군기를 서술함에 있어 그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나 박잡(駁雜)하여 정사인지 전설인지 얼른 알아보기 어려운데가 있다.
문일평은 단군 시대 이후 민족의 계통과 관련해서 조선 민족 유일의 '독자성'보다 '보편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한 조상의 자손으로 그대로 내려온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조선인은 모두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생겨난 동일한 자손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마는 어찌하랴. 조선인은 동인한 조상의 자손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특히 부끄러운 것은 조금도 없다. (중략) 조선인도 단군의 직계가 주체가 되어 가지고 (중략) 고대에 가장 우세하던 맥인(貊人)과 그 다임에는 한인( 韓人)과 그 다음에는 영동 방면에 있던 진인(辰人)이 서로 화합하여 삼국인을 이루었다가 그 뒤에 일통하여 신라인이 되었고, 재전(再轉)하여 고려인이 되니, 고려인은 재래의 신라인에 다시 발해인의 일부를 거두어 가지고 민족적 풀무로 일합해서 비로소 오늘날 조선인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문일평은 단군의 직계에 맥인, 한인, 진인이 합해 삼국시대가 형성되었고, 그 후에 통일신라와 발해인 일부가 결합해 고려인이 되어 오늘날의 조선인으로 이어졌다는 민족계통도를 설정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위만조선은 배제되었다. 그는 위만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사에 있어 연대순으로 대전쟁을 꼽자면 가장 먼저 위만의 왕국과 유철(劉徹, 한무제)의 한제국과의 전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규모로든지 그 영향으로든지 대전쟁임에 어김없으나, 다만 그것이 고조선에 더부살이하던 연인(燕人)과 한인(漢人) 사이의 싸움이니 순수한 조선 대 외국과의 전쟁이 아님으로 십대전쟁의 머리로 삼고 싶지 않다.
문일평은 신채호에 대해 "우리 사학계의 선배이며, 역사가로서의 혁명적 기백을 가진 그는 신라 이래 소조선(小朝鮮)의 역사에 대해 아주 불만을 품어 깊이 묻혀있는 우렁찬 대조선의 정신을 파서 내리고 무척 애를 썼음으로, 단재라면 오늘날까지도 조선혼을 부르짖던 애국자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는 신채호가 말한 대조선은 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개념이며, 만주는 "단군의 조기(肇基)로부터 주몽(朱蒙)의 패업(霸業)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의 대중심이 있던 곳"으로 이해했다. 또한 그는 묘청의 난을 한화파에 속한 김부식 등 유학자와 자주파에 속한 묘청 등 낭도의 최후 결전으로 봤으며, 대조선 정신을 고구려에서 찾고 소조선 정신을 신라에서 찾았으며, 왕건을 '대조선 정신의 현자(顯者)'로 평가했다.
하지만 문일평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해선 신채호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봤지만, 문일평은 신라의 통일 노력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신라의 대당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의 연호까지 사용하니 법흥왕 이래 115년간이나 자국건원을 행하여 오던 신라로서 이로부터 그것을 전폐하고 남의 연호를 쓰게 된다는 것은 얼마큼 국가 체면에 손상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나, 그 속에 묻히어 있는 신라 정치가의 대강자(對强者) 조정책(調停策)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삼국 통일의 원인에 대해 "신라의 인화가 곧 그 국가적 성공의 기본적, 중심적 요건이 되었다"고 봤으며, 김춘추와 문무왕을 훌륭한 군주로 평가했다. 또한 문일평은 1931년 12월에 열린 한 좌담회에서 "조선에서 제일 나쁜 인물"을 선정해달라는 질문을 받자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에 복속한 연남생을 지목하며 "큰 조선을 작은 조선으로 만든" 것이 그 이유라고 밝혔다. 즉, 그는 '소조선'의 역사적 계기에 관해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내부에서도 그 원인이 있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조선 시대 정치사에 대해선 일관적으로 '사대주의', '당론'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요소로 평가했다. 특히 개항 이후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 지도자의 국제적 문맹을 강하게 질타했다.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에 관해서는 "이때에 한하여서만 다소 적극적 활동을 했다"고 보고 효종의 북벌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한말까지의 정치사는 '발전/진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민족사를 구성할 때 부정적인 요소를 조선 역사 혹은 조선 민족의 고유한 것 혹은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민족성의 탓으로 돌리는 '식민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조선인을 유순하고 평화적이라 함도 일면관이요, 사납고 투쟁적이라 함도 일면관이다. 조선인도 요컨대 시세나 환경의 변화를 따라 평화적도 되고 쟁투적도 됨은 다른 민족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3.2. 문화사
문일평은 한말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지에 대해 '문화사'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으며, 체계적인 조선사의 서술 속에서 문화 분야를 강조했다. 그가 문화사가 무엇인지에 관해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으로는 '문물제도'와 함께 종교, 문학, 예술, 산업 및 풍속 등을 의미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정치사와 구별되는 경제자를 범주 설정하고, 이를 넓은 의미의 문화사에 포함시켰다.
당시 조선문화 연구는 '조선적인 것'의 독자성,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뒀다. 즉, 식민지 시기 문화사 연구는 일제에 대한 '정신적' 저항의 방안이었다. 특히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조선 문화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유일성의 강조는 조선 문화 가운데 세계 '최초', '최고'라는 문화 유적과 사상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문일평 역시 이러한 흐름에 가담해 한국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적극 강조하고 한국이 세계 최초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유산을 높이 받들었다. 다만 문화사 서술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데서 다른 사학자들과 구별되는 면모를 보였다. 문일평은 민중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수인에 의해 지은 문명은 귀족 문명이오, 다수인에 지은 문명은 민중문명이다. 전자의 특징이 이상적에 있다면 후자의 특징은 실제성에 있다. 이미 벌써 이조 문명이 고려보다 실용적 색채를 짙게 띠므로 미래의 민중문명을 암시 혹은 잉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그는 조선이 비록 정치적으로 고려에 비하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문화 면에서는 시간적 추이에 따른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또한 그는 '경제관계로 본 조선 문명'에서 전근대시기 귀족 계급 중심의 문명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민중에 기초한 신문명이 금후 세워질 것을 전망했다.(2)
<자료출처>
(1)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636
(2) https://namu.wiki/w/%EB%AC%B8%EC%9D%BC%ED%8F%89
<참고자료>
문일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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