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형(金錫亨)

출처; 김석형 (역사학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김석형(金錫亨 1915년 ~ 1996년 11월 26일)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나 1946년 월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이다.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삼한의 주민들이 일본에 이주하여 분국을 세웠다는 학설을 주장한 역사학자이다.

경력[편집]

칠지도 해석[편집]

김석형은 1963년 칠지도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 삼국이 일본(당시 왜)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한 삼국 분국설을 주장했다.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 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출처; 김석형(金錫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915년
사망 연도1996년 11월 26일
출생지대구
관련 사건조선어학회사건
정의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내용

대구 출생이며, 변호사 김의균(金宜均)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구한말 법관양성소 출신으로, 해방 후 미군정 시대에 경상북도 도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김석형은 1946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한국사 연구, 특히 한국고대사 연구에 한 평생을 바쳤으며,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거하면서도 주체사관(主體史觀)을 강하게 지닌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하였다.

생애 / 활동사항

김석형은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인 1939년 「 신라 최치원과 그 시대」(경성제대 『사회학보』)를 썼고, 학부졸업논문을 1941년에 「이조 초기 국역(國役) 편성의 기저」(『진단학보』14)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양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5년 3월 검거되어 그해 6월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서중석(徐重錫)의 보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대학동기생인 박시형(朴時亨)과 함께 월북, 평양에 신설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8년 역사편찬위원회를 설치했을 때 부임위원이 되어 위원회의 운영을 맡고 위원회 간행 잡지인 『력사문제』에 고려 조선과 관련된 6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 뒤 1956년 1월 과학원(사회과학원의 전신) 역사연구소 소장이 되어 재임을 거쳐 1979년까지 북한에서 한국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북한 역사학계의 중진 · 원로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해방 후의 애국적 · 민족적인 의식을 한껏 고취하는 한편 일제 식민사학(植民史學)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 한국사 체계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관련된 저서로는 『리조병제사』(1954), 『조선통사(상)』(1956) 중 고려후기 부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고려편)』(1960)이 있다.

1963년 김일성의 교시로 역사서술에서의 주체적 입장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전근대 시기의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김석형이었다. 이때 나온 결과물이 『조선통사(상)』(1977년판)와 『조선전사』(전33권)였다. 특히 『조선전사』는 북한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모든 역사연구자가 동원되어 집필된 것으로 1979년부터 3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김일성으로부터 인정받아 이후 학계의 요직을 거쳤다.

일찍이 과학원 원사(院士)로 뽑혔으며, 19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위원회 위원장,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 1962년 10월 최고인민위원회 제3기 대위원, 1967년 11월 제4기 대위원, 1972년 12월 제5기 대의원, 1982년 2월 제7기 대의원, 1982년 2월 조평통 상무위원, 1986년 11월 제8기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8년 8월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 박사,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 원사 교수 박사가 되었으며, 1989년 5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남북회담대표로 남북 역사학자 회담을 제의하는 등 대남사업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1990년 4월 최고회의 제9기 대의원이 되었고,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 조선학학술대회 참가 시 누이동생 김금숙 등을 상봉하였다.

1991년 1월 조통연합 중앙위 위원, 1992년 4월 김일성 훈장 수상, 사회과학원 원장, 조평통 상무위원,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상무위원, 1993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 상설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단군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주관하였다. 1994년 7월 9일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1994년 12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2차 학술발표회’를 갖고 단군 · 고조선 역사의 전면 재서술을 주장하였다. 1995년 11월 15일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3차 학술발표회’ 개최하였다. 1996년 2월 8일 월북화학자 이승기(李升基)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71년 벽화가 그려져 있는 일본 나라[奈良]의 타카마츠스카[高松塚]무덤 발견을 계기로 하여 일본에 국제학술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북한측의 대표단장으로 참석한 것을 비롯해 그 뒤 여러 차례 도일해 학술교류활동을 꾀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11월 7일 김정일로부터 80회 ‘생일상’을 받았으며, 1996년 11월 26일 사망하였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7)과 『초기 조일관계 연구』(1966) 등이 있다. 전자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구조를 봉건제라는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계급구성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는 농노제만이 아니라 봉건적 예속민의 존재를 중시하면서 노예의 존재까지도 포섭하였다. 또한 국가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방법으로서는 문헌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고려 말기(14세기)와 조선 전기(15∼16세기)에 있어 노비 양인(良人)의 존재형태를 확인한 다음, 이를 자료가 부족한 앞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내지 경제 형태를 밝혀보려고 했다.

북한학계는 1956년 10월부터 한국사에서의 고대와 중세의 경계를 획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열기 띤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김광진(金洸鎭) · 정찬영(鄭贊榮) 등과 함께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가 아닌 봉건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결국 이 책은 시대구분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직후 그는 「량반론」(『력사논문집』3, 1959)을 발표, 관인(官人) · 지주계층의 토지소유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한편 『초기 조일관계 연구』는 고대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 대표되는 일본학계의 그릇된 한 · 일관계 역사상(歷史像)을 ‘분쇄’할 목적에서 저술된 것으로 서기전 3세기경의 야요이[彌生]시대 개시 이래 서기 7세기 전반경까지의 1천년간에 걸친 고대 한 · 일관계사를 전반적으로 새롭게 다루었다.

그는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기타규슈[北九州]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 삼국의 분국(分國)을 형성했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김석형 개인의 저작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최길성 · 박문원 · 림종상 등이 세부내용을 집필하고 서술의 방향과 기본골격은 김석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뒤에 그는 고고학 전문가인 조희승과의 공저로 『초기조일관계사』상 · 하 2권(1988)을 저술, 이 책의 내용을 일부 보완하였다.

 

홍이섭(洪以燮)

출처; 홍이섭(洪以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해방 이후 『조선과학사』,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914년
사망 연도1974년
정의
해방 이후 『조선과학사』,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개설

아버지는 홍병선(洪秉璇)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33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학교 교사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 국학대학,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뒤 사학과장·문과대학장·동방학연구소장·출판부장 등 교내 보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줄곧 교수직에 있으면서, 학계와 사회 각 분야의 학술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학술부위원·해군본부 전사편찬실편수관·역사학회회장·고시위원회 보통고시위원·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위원·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위원회위원·국민사상연구원 전문위원회위원·사법고등고시위원·민족문화추진위원회 이사·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민족문화협의회위원·문화공보부 문화재보존위원회위원·원호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위원·재단법인 외솔회 회장·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등을 거쳤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으로 한국사 연구에 몰두, 창의적인 연구성과를 냄으로써 한국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젊은 시절엔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과 한국의 과학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으나 먼저 학문적인 성과가 활자화된 것은 과학사 쪽이었다.

홍이섭이 쓴 『조선과학사(朝鮮科學史)』는 1944년 일본 동경(東京)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본어로 출판되었으며, 1946년 한글로 번역, 정음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과학사를 전시대에 걸쳐 종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서 그 뒤 한국의 과학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홍이섭이 가장 관심을 두고 학문적인 매력에 빠져 든 것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학문이었다. 1936년에 정약용의 ‘별세백년기념행사’에 관한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크게 다루어지고 있었던 데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지 못했는데, 이는 정약용의 문집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4년에야 비로소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입수,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연구결과가 1959년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연구는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이고도 종합적인 첫 연구성과였다는 데서 크게 평가받고 있다. 한편, 이 업적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생을 한국사 연구에 전념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사상의 맥락을 여러 각도에서 인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상사 연구의 관심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랐다. 1950년대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주로 조선 후기의 실학과 천주교였으나, 1960년대부터는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골몰하여 특히 그 시대의 정신사를 연구과제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문학작품을 한국사 연구에 활용하는 가능성도 보여 주었다. 문학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사회적인 현실과 시대정신을 인식하고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은 앞으로의 한국사 연구에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뜻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은 1975년에 출판된 『한국정신사서설(韓國精神史序說)』로 나타났다.

홍이섭의 사학활동에서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여러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들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이다. 평소 머리에 떠오르는 짧은 생각들을 글로써 정리해 둘 필요 때문에도 원고청탁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끝으로 홍이섭은 언제나 일제 관학자들의 한국사 연구 태도에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이는 한국사 연구에서 실증적인 연구보다는 그 인식과 이해에 노력하였던 그의 연구태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저술로는 『조선과학사(朝鮮科學史)』·『세계사와 대조한 조선사 도해표』·『한국해양사(韓國海洋史)』(공저)·『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한국사의 방법』·『The History of Korea』(공저)·『세종대왕 전기』·『Korea's Self―Identity』·『한국근대사』·『한국정신사서설』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수백 편의 논문 및 잡기(雜記)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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