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연수(桂延壽)

출처; 계연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계연수(桂延壽, 생년 미상 ~ 1920년)는 한국의 종교인이며 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의심되고 있다.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 세거선천(世居宣川), 일시당(一始堂)이라고 한다.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으로 이기의 문인(門人)이었으며 태백교도였다고 한다.[1]

생애[편집]

계연수의 생애는 크게 《환단고기》(桓檀古記) 및 태백교(太白敎)와 관련된 행적과 단군교(檀君敎)와 관련된 행적으로 나뉜다. 두 가지 행적은 서로 많은 면에서 다르며, 대치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 《환단고기》 및 태백교에 따르면, 계연수는 대한자강회 출신으로 이기의 문인이다. 1898년(무술년) 《단군세기(檀君世記)》와 《태백유사(太白遺史)》등의 책을 간행하였고, 이기가 1909년 단학회(檀學會)를 설립한 후 사망하자 뒤를 이어 단학회의 2대 회장이 되었다. 1911년에 《환단고기》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상룡의 막하에서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는 등 항일운동에 힘쓰다가 1920년에 만주에서 일제의 밀정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 단군교의 《단탁》,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등에 따르면 계연수는 묘향산에서 수도를 하던 도인(道人)으로, 묘향산의 석굴에서 수도를 하던 도중 깨달음을 얻자 갑자기 벽에 새겨진 천부경이 보여 이를 탁본하였다고 한다.(1916년1917년에는 이 탁본을 단군교에 보내 해석을 구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행적에 대한 의문[편집]

  • 계연수는 1864년 5월 20일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나서 1920년 8월 15일에 독립군으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의 시신은 토막난 상태로 압록강에 버려졌고 일제의 밀정들이 계연수가 소유했던 서적과 원고, 계연수가 건립한 배달의숙 건물도 불에 태워져 사라졌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대한민국에 있는 계씨는 수안 계씨 뿐인데 수안 계씨의 족보에는 계연수라는 이름이 없다.[2]
  • "계연수는 이기·나철이 단군 사상의 연구·역사 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한 단체인 단학회(檀學會)의 제2대 회장을 역임했고, 1911년에 홍범도·오동진의 지원을 통해 여러 사서들을 엮은 다음에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서 《환단고기》 30권을 간행하였다."는 내용은 위서로 알려져 있는 《환단고기》 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 계연수는 이상룡의 막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큰 전공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룡과 관련된 기록 및 이상룡의 문집에는 계연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3], 환단고기 및 태백교의 전승을 제외하면 계연수의 독립운동 기록이 없다.[4]

민족 의식에 대한 의문[편집]

계연수는 《환단고기》의 저자이자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한 민족주의자 또는 항일운동가로 인식되어 있으나 실제 그의 행적이나 저작 속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족 의식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환단고기》에는 계연수가 직접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범례가 있는데, 1911년에 작성되었다고 하는 이 범례는 당시의 민족주의자가 서술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 또한 《환단고기》의 주요 내용들에서 친일성이 지적된다, 《환단고기》는 위작으로 의심되므로 해당 내용들 역시 계연수의 저작으로 보는 주장이 존재한다.[5] 한편 단군교와 관련되어 친일성이 지적된다. 단군교는 원래 대종교와 같은 교단이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고치고 만주로 망명하자 정훈모 등이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국내에 남았다. 이 단군교에 대해 친일성을 제기하는 연구가 존재한다.[6]

각주[편집]

  1.  단단학회편(이유립),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년
  2.  “「추적!환단고기 열풍」- 역사스페셜, KBS, 1999.10.2.”. 2007년 4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0월 8일에 확인함.
  3.  이상룡, 《석주유고》, 고려대학교, 1973 / 이상룡, 《석주유고 후집》, 석주이상룡기념사업회, 1996
  4.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5. ↑ 이동:가  박광용, 〈역비논단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2호, 역사비평사, 1990
  6.  삿사 미츠아키,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 / 천부경#비판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 및 링크[편집]

 

 

출처; 70년대 재야사학자 이종기와 한일고대사 (daum.net)

70년대 재야사학자 이종기와 한일고대사

입력 2006. 6. 30. 11:47수정 2006. 6. 30. 11:47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민국의 70-80년대는 민족 열풍의 시대였다. 아울러 그에 편승한 '국사'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 시대 통치권자들이나, 이들을 군사독재자로 규정하고 맹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한 이른바 민주화 운동세력에게나 제1 화두는 모두 민족이었다.

교과과정과 각종 국가고시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이 됐고, 그에 덩달아 거의 모든 대학에 국사 관련 학과가 생겨났으며, 당시 국사학 전공자들은 그야말로 석사학위 논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대학 교수로 진출했다.

민족의 열풍과 그와 궤를 같이 한 국사교육의 강화는 재야사학 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재야사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냉소적이었던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재야를 가리켜 국사를 망치는 주범처럼 비판하거나 아예 무시하고자 했지만, 양측은 서로 대립하는 듯하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유례없는 국사의 호황기를 만들어냈다.

이 시대 재야사학의 한 축을 담당한 이로 아동문학가였던 고 이종기(1929-95)가 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70년대 이후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한일고대사 연구에 천착하게 된다. 그의 이런 역정은 76년 일본 후타미쇼보(二見書房) 출판사에서 나온 일어본 '히미코 도래의 수수께끼'와 이듬해 한국의 일지사에서 '가락국 탐사'로 정리됐다. 타계 이후인 97년에는 유고집을 모아 '춤추는 신녀'가 출간된다.

타계 10주기를 즈음해 최근 그의 딸과 삼국유사 연구자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도흠 교수에 의해 선보인 또 하나의 유고집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책장) 또한 제목이 암시하듯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매달린 한일고대사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이번 유고집을 포함한 그의 글에서 표출된 생각은 요약하면 이렇다. 중국기록에 고대 일본열도를 통치한 여왕으로 보이는 히미코(卑彌呼)는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후 사이에 난 딸로서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로 건너가 남동생 선경왕자와 또 다른 가락국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다이국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허황후는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였으며, 서기 48년 여름에 두 달 가량 되는 항해 끝에 낙동강 어귀에 닻을 내리고 김수로를 만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들을 뒷받침하고자 이종기는 김해 수로왕릉 사당을 장식한 쌍어문(雙魚文)이 일본 규슈의 신사와 중국 푸저우의 사찰은 물론이고 인도 북동부 아요디아 사원에서도 발견된다든가, 파형동기(巴形銅器)나 다른 신어문(神魚文)도 이들 지역에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든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 기록을 토대로 하고 일본서기와 중국기록 등의 문헌기록을 가미한 이런 작업들을 통해 이종기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수로왕비 허황후와 그의 딸 히미코는 더 이상 전설 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재했고, 그들이 건너간 미지의 뱃길 또한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정기적으로 오가던 해상 무역로이자 문화교류의 길이었다. 따라서 그 길은 사라진 고대 한국사를 복원하는 길이자 우리 민족정신을 살리는 길이요,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히미코가 허황후의 딸이기에 히미코의 흔적이 서린 규슈 일대를 탐사하는 일이란 "내게는 같은 진외가(眞外家) 어른들을 뵈러 간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까지 말한다. 2천년 전 우리 조상이 건너가 일본을 개척했기에 그 땅은 우리에게는 외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학술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일축하거나 아예 무시로 일관했으며, 그런 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종기가 일본에 대한 한민족의 우월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심취하던 그 시절, 강단사학 중심에 위치한 이기백(1924-2004) 당시 서강대 교수는 이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는 준 것만 있지, 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 303쪽. 1만2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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