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8)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본문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8)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대야발 2025. 3. 6. 11:48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 · 사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 · 남궁억(南宮檍) · 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 · 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 · 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 · 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같은 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 · 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 · 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 · 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앙위원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6년 한성일보(漢城日報)의 사장 · 비상국민회의 의원 · 민주의원 의원 · 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안재홍이 우리나라 고대사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모아 수록한 역사서.
2책. 안재홍은 민족주의 사학자 중 드물게 고등교육[일본의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받았다. 동제사(同濟社), 3·1운동, 신간회(新幹會),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을 맺으며 독립운동에 나섰고 여러 번 투옥되었다.
또한, 조선일보 사장 재직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지면에 연재하도록 하였다. 어릴 때부터 술사가(述史家)를 희망했으나, 일제의 강점으로 말미암아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대 전시체제의 강화로 거듭 투옥되는 상황에서 ‘정치로써 투쟁함은 한동안 거의 절망의 일이오 국사(國史)를 연찬(硏纘)하야 써 민족정기를 불후(不朽)에 남겨둠이 지고한 사명임을 자임(自任)’하고 10여 년간 고대사 연구에 몰두해 이 고징서(考徵書)를 완성하였다.
반복된 투옥시기 동안 이 초고가 빈족(貧族)의 콩항아리 속에 묻혀 보관되었다. 광복 후 1947년 7월에 상권, 1948년 4월에 하권이 각각 출판되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상권에는 ①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② 아사달(阿斯達)과 백악(白岳), 평양, 부여변(夫餘辨), ③ 고구려건국사정고(高句麗建國事情考), ④ 고구려직관고(高句麗職官考), ⑤ 신라건국사정고, ⑥ 신라직관고략, ⑦ 삼한국(三韓國)과 그 법속고(法俗考), ⑧ 육가라국소고(六加羅國小考).
하권에는 ① 부여조선고(夫餘朝鮮考), ② ᄇᆞᆰᄇᆞᆯ, ᄇᆡ원칙과 그의 순환공식, ③ 고구려와 평양별고, ④ 백제사총고, ⑤ 조선상대지리문화고(朝鮮上代地理文化考) 등이다.
이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나 정인보의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같은 시대사와 그 연구 영역을 같이하고 있다. 또, 그는 언어학적 연구방법을 자주 쓰고 있는데 이 또한 신채호에게서도 보인다. 신채호와 정인보를 자주 인용하고 있지만, 그가 근대적 사회과학에 접촉했던 만큼 그의 연구는 독자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고대사 연구에 사회발전단계설을 도입하였다. 즉, 앞서 열거된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고조선 사회가 사회발전의 단계를 거쳐 삼국시대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규명하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그가 사용한 언어학적 방법도 고대사회의 발전과정과 그 단계성을 파악하는 데에 원용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안재홍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신채호나 정인보(鄭寅普)의 연구 영역과 발상에서 출발해 그것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민족주의사학이 사회경제사학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후기의 민족주의사회학자로서의 그의 연구방법은 신채호 등 전기 민족주의사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2)
<자료출처>
<참고자료>
평택에 民世 안재홍 기념관·공원 만든다 (daum.net)2017. 7. 18.
'우리겨레력사와 문화 >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7)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호암전집(湖巖全集) (6) | 2025.03.06 |
---|---|
우리겨레 력사학사, 력사서 (26) 계봉우(桂奉瑀) 조선역사(朝鮮歷史) (3) | 2025.03.06 |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5) 자산 안확 (自山 安廓)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1923년) (12) | 2025.03.05 |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4) 해원 황의돈 (海圓 黃義敦) 조선신사(朝鮮新史) (8) | 2025.03.05 |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3)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 1928년) (7) | 202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