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4) 해원 황의돈 (海圓 黃義敦) 조선신사(朝鮮新史) 본문

황의돈(1890년(고종 27)~1964년)은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이다. 호는 해원(海圓). 충청남도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1890년에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1964년 75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1)
■ [역사 속 보령인물]-5 진정으로 민족을 위했던 교육자이자 사학자 근.현대 사학의 개척자 '황의돈'
2009년 05월 06일 (수) 15:44:51
보령신문, 김종윤 기자
교육자이자 사학자인 황의돈 선생.
본관은 장수이고 호는 단원이다. 서울과 동경에서 수학하고 1909년에는 만주 북간도 중영촌에서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해외동포에 독립사상을 고취 시켰으며, 1910년에는 정주오산학교, 평양대성학교에서 국사과 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 1962년 대통령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동국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8월 발행, 보령군지 발췌>
황의돈 선생의 출생지에 대해서 웅천읍 대창리와 서천군 문산면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선생의 후손 등에 따르면 선생의 선친이 웅천에서 살았던 것은 확인됐다.
* 황의돈 선생의 아들인 황석연씨(판사)는 선생은 선친이 서천군 문산면에 거주할 때 태어났으며, 이후 웅천읍 대창리 접동골로 이사해 살았으며, 황 판사 자신도 웅천읍 대창리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알려왔습니다.(5월 6일)
민족사의 중요성 일깨우는데 전념
1890년에 태어난 황의돈선생은 가까운 인척이 한말의 문인 황현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유학자의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4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16세에 이르러 사서오경을 모두 익힐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17세 되던 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간 수료한 이후 황의돈 선생은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동서양에 걸친 고전과 근대식 학문을 두루 접했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근대식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수료하고 그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의 전개를 위해 북간도 중영촌으로 이주,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고취에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방면으로 다시 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훈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전념했다.
1911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때인 1911년 문일평과 역사를 담당할때 시험문제로 '국권회복'에 대한 문제를 내고 "폭탄과 암살이 최선책"이란 답에 만점을 줘 학교가 폐쇄된 일화가 유명하다.
1916년에는 YMCA강당에서 국사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됐다.
1920년 이후 약 20여년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 강의를 계속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을 겸임했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 교육이 금지되고, 이에 따라 보성고등보통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돼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했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했다.
불교로의 귀의
194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극에 달했고, 이 당시 유일하게 그의 마음에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 줬던 것은 불교였다.
1942년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 창씨개명 비협력자로 지목돼 옥고를 치룬 후 황의돈 선생은 당시 강원도 오대산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 스님으로부터 참선 수행을 배우면서 불교에 귀의한다.
이후 불교에 심취했고, 그의 학문과 사상에도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됐다. 한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불교사를 새롭게 연구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 근·현대사학을 개척
황의돈 선생이 집필한 '신편 조선역사'.
1945년 해방과 함께 황의돈 선생은 문교부 편수관의 직책을 맡아 국사 교과서를 편수했고, 51년∼62년까지 동국대 교수로 활동하며 ‘역사적 대국의 동향과 불교’, ‘원측대사와 원효대사’등 수많은 저술과 논문을 남겼다.
특히 그는 일제하에 그들의 눈을 피하여 삼국유사 정덕본을 몰래 숨겨오다가 해방을 맞아 이것을 공개해 일제가 삼국유사를 조작하였음을 만천하에 밝혔다.
그의 사학적 특징은 부여족을 민족의 뿌리로 보았으며 신라와 발해시대를 남북조 시대로 최초로 정립시켰고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유심사관과는 다른 '문화사관'을 추구하여 역사를 단선적이지 않은 종합사로 인식했다.
평생을 한국사 연구에 매진했던, 특히 민족주의적 사관에서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노력했던 황의돈 거사는 1964년 11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 조선역사’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 ‘이목은전’, ‘안의사’, ‘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대한민국 제1호 여성판사였던 황윤석의 생전모습.
한편, 선생의 딸이자 대한민국 제1호 여성판사였던 황윤석은 1952년 스물셋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1961년 4 19혁명 1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시위가 한창이던 21일 의문사했다.
황윤석의 시체해부 결과 밝혀진 것은 베나드릴이라는 약물이 검출되었을 뿐 이었다. 이렇듯 황윤석 판사의 사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자 항간의 관심도 점차 커져만 갔다. 그러나 때마침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묻혀버리고 말았다.(2)
<자료출처>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270
(2) http://www.char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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