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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5) 자산 안확 (自山 安廓)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1923년)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5) 자산 안확 (自山 安廓)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1923년)

대야발 2025. 3. 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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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1886년(고종 23)~1946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대마을(서울 성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역, 곧 인왕산과 가까운 지역)의 안씨(安氏)집안 태생으로 중인 출신이다.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교육받고, 1896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하여 연설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소학교를 마친 뒤 당시 유행하던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구 문물과 서양의 정치사상들에 대하여 인식을 넓혀 갔다.

 

 

1900년대에는 서북 지방의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1910년 일제의 조선병탄 이후에는 마산에 내려가서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4년경에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다.

 

 

그 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로(尹相老)·이시영(李始榮) 등 영남 지역 인사들이 1915년에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가, 마산지부장을 맡았다.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이회영(李會榮)이 주도하고 이승훈(李承薰)·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 등 후일 3·1운동 지도자들이 참여한 고종의 해외망명 유치계획에 관여하였다.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조직,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울에 올라와 1921년 창간된 조선청년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을 맡았고, 다음 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해 『조선문학사』와 『조선문명사―조선정치사』로 대표되는 국어와 국문학, 국사를 비롯한 국학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당시 일제의 문화통치에 말려드는 지식인들의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지식인의 지향을 제시하는 「자각론(自覺論)」등의 시론(時論)들도 발표하였다.

 

 

1928년부터는 전통 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 연구하고자 이왕직(李王職) 아악부(雅樂部)에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4년 동안 아악에 대한 기본적인 정리와 연구를 이루고, 이를 토대로 국어학·국문학에 관하여도 새로운 업적을 많이 쌓았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식민통치가 무단통치로 바뀌어 더 이상의 학문적 탐구가 어렵게 되자 국내를 벗어나 만주와 중국 대륙, 노령의 연해주 지역과 미주(하와이)를 유랑하였다.

 

 

7년 동안의 유랑을 마치고 귀국, 어학과 고구려 문학, 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글 쓰는 일을 중단한 채 정인보(鄭寅普) 등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광복이 되던 해에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친우들과 정당 결성을 꾀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6년 죽었다.

 

안확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을 적극 주장하였지만, 대부분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취한 서구 문명 우월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민족의 장점을 찾아 민족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 하며 이를 통해 개화와 선진 문명으로의 성취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안확은 「자각론」 등에서 서구 문물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개화에만 그치는 지식인들의 동향을 비판하고, 진정한 문명 진보를 위해서는 민족 문화의 발전을 토대로 현실에 필요한 자유·자주·자치의 새 이념을 가져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이는 당시를 풍미한 일본 지식인들의 사회진화론적 입장에 서서 선진 서구의 문물만을 최상으로 여기고 민족문화 전통을 완전히 부정했던 이광수(李光洙)의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국학연구에 몰두하고 초기 국학계에 있어서 독보적인 업적들을 이룩하였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국학에 남다른 열의를 가지고 구체적인 연구를 하여, 전일본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에 국어와 국문학·미술 등 국학에 관계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안확의 본격적인 연구활동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문법』을 출판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23년에 발간한 『조선문명사―조선정치사』에서 밝힌 저술 계획에는 국학에 대한 안확의 지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술계획은 『조선문명사』 8권, 『자산학설집』 8권, 『자산문집』 7권, 『정치론』 2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이 국학과 당시 현실을 다룬 것이었다. 이 계획이 다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지만 안확은 이 계획을 바탕으로 140여 편에 달하는 글을 남겼다.

 

 

안확의 초기의 대표적 연구 분야는 국어와 국사에 관한 것이었다. 국어학 연구에 있어서 안확은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조직적 정신의 결정으로 보고 기록용 문자인 한문에 대해 민중들이 사용하던 말, 즉 구어(口語)를 적기 위해 만들었다는 뜻에서 언문(諺文)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글의 제자원리가 세종 초년의 음악 정리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는 악리기원설(樂理起源說)을 제시, 일인 관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주장한 범자(梵字) 모방설이나 몽고자 모방설 등을 부정하였다. 안확은 국어의 본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국어와 다른 언어를 비교하고 국어의 계통과 역사를 연구하였다.

 

 

또한,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한글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자고 주장하자, 그것은 언어와 문자를 혼동하는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언한문(諺漢文) 혼용을 주장하고,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를 비난하였다. 맞춤법 문제에 있어서는 민중을 위해 편리한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맞춤법을 큰 수정 없이 쓰자고 주장하였다.

 

 

국사학 분야에서의 업적은 1923년에 간행된 『조선문명사』가 대표격인데, 원래 이 책은 안확이 계획한 『조선문명사』 8권 중의 「조선정치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명진보론의 관점에 입각, 민족의 생활사를 대변하는 정치사의 발전 과정을 정치 체제의 변화라는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시대 구분에 반영되어, 상고의 소분립정치시대로부터 중고의 대분립정치시대로, 그리고 다시 근고의 귀족정치시대로부터 근세의 군주독재정치시대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의 배경에는, 민족의 역사는 꾸준히 개선, 진화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 안확은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지배층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일반 민중의 정치에의 참여 정도인 자치제의 발달이란 기준에서 추구하고 있다. 곧 자치제의 발달과 정치체제의 변화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장 주목된 것은 향촌사회에서 일반민의 의사가 결정되는 촌회였다. 민중을 기준으로 한 역사발전의 이해는, 당시의 애국계몽운동기에 추구된 자유민주주의의 근대적 민중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궁중음악의 악기·악곡 등을 정리하고 외국 음악과의 관계를 연구하였으며, 민중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음악 연구를 바탕으로 문학사상에 존재한 가시(歌詩)들을 검토, 가시를 삼대목체(三大目體)·정읍체(井邑體)·첩성체(疊聲體)·경기체(景幾體)·장편(長篇)·시조(時調) 등으로 분류, 최초의 시조연구서인 『시조시학(時調詩學)』을 내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일인 학자들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단군조선의 문화에 대한 글을 비롯한 고대사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와 동시에 민족 문화의 전통의 일부로서 미술사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조선문명사』·『조선문학사』·『조선문법』·『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시조시학』 등의 저서와 「조선의 미술」·「조선철학사상개관」·「조선의 음악」·「조선상업사소고(朝鮮商業史小考)」 등 140여 편의 국학 관계 논문이 있다. 1994년 안확의 저술을 모아 『자산안확국학논저집(自山安廓國學論著集)』이란 이름으로 여강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이러한 안확의 국학연구는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지적 풍토 속에서 더욱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엄밀한 학문적 기반 위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그 발전과정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검토하였다는 점은, 이후 국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아울러 민중의 역사 창조 능력에 대한 신뢰와 민중 주체의 역사관은 민족 문화 전통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1)

 

 

 
 
 
 
 
 

조선문명사

학자 안확이 한국사에 관하여 저술한 학술서.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간행하였다. 조선정치사라고도 한다.

 

 

저자는 당초 조선문명사를 『조선민족사고』·『조선미술사개론』·『조선학예사』·『조선문학사』·『조선정치사』·『조선경제사』·『조선외교사』·『조선육해군사』 등 8책으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선문학사』와 『조선정치사』 만 간행되었을 뿐이다. 또 『조선문학사』의 간행에서는 정작 조선문명사의 시리즈 이름을 붙이지 않아 『조선정치사』가 조선문명사를 대표하게 되었다. 간행 당시의 정확한 내재명은 ‘조선문명사(5), 일명 조선정치사’였다.

 

 

이 책은 1900년대에 수용되기 시작한 사회진화론·문명진보론의 영향을 받아 민족사를 시종 개선진화의 관점에서 발전적으로 본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이 정치사적 관점에서 주목한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치제 발달이다. 이것은 1900년대의 공화제 실현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역사인식의 소산이었다.

 

 

루소·몽테스키외 등의 문명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1900년대의 공화제 실현운동은 민주주의 실현의 기본 요건이 자유·자주·자치라고 이해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사에서 확인되는 자치제의 역사를 특별히 주목하는 역사인식이 대두하였다.

 

 

민족사의 이러한 특별한 면모에 대한 인식은 1910년의 국권 상실로 크게 쇠퇴했으나 이 책에서는 굳은 신념으로 남아 자치제 발달의 면모를 중심으로 한 민족사의 발전이 조명되었다.

 

 

자치제 발달은 단순한 제도의 발달 측면으로 주목된 것이 아니라, 다수 인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역사를 이끈 자취로서 자치제의 시대적 성쇠가 주목되었다. 그러나 이런 면모는 어디까지나 개설서로서의 다른 부문과의 균형 속에서 조명되고 강조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치사가 바로 문명의 요체로서 생활사의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정치사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구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은 시대구분을 가하였다.

 

 

즉, 상고 소분립정치시대(단군건국부터 열국, 즉 삼한 말까지 2, 200년간), 중고 대분립정치시대(삼국 초부터 남북조까지 1,000년간), 근고 귀족정치시대(고려조 500년간), 근세 군주독재정치시대(조선 500년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시대구분은 현재까지의 조사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당시의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긍정으로 보아 민족사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시대라고 본 점이다. 이 시대를 군주독재정치시대라고 하고 또 새로운 민주공화제의 준비기라는 의미를 설정하였다.

 

 

조선의 군주정치는 제도적으로는 독재이나 실질적으로는 관료제와 어우러져 전횡이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특히 이 시대의 정파의 대립을 당쟁의 차원으로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정당 정치의 발달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중앙에서의 정파의 활동은 각지의 서원·유회(儒會)의 발달이 된 것으로 정치는 본래 서로 토론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옳은 것에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정파의 대립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저자는 조선왕조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인식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고조되어가는 것을 비판 하고, 오히려 세도정치의 대두와 함께 정파의 원기가 꺾이면서 나라가 쇠퇴하고 말았던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그는 조선시대 유교정치의 토대가 된 유회, 그리고 지역사회의 자치체인 향회, 최하부 촌락사회의 촌회 등의 발달은 조선시대의 역사가 민족사에서 가장 발달된 것의 실체라고 파악하였다. 이것들의 상호관계를 근대적으로 잘 발달시켰더라면 공화제도 실현시킬 수 있었고 나라도 잃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이 이 책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책을 간행할 당시 일제의 문화정치에 대한 타협안으로 일부에서 자치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타협론과는 전혀 무관하며, 저자가 이 때 자치제 발달의 역사를 주목하는 민족사를 쓴 것은 어디까지나 3·1운동의 경험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마산 지방의 3·1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저자는 이 운동에서 ‘다수 인민’이 민족사의 주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1900년대 이래의 자신의 민족사에 대한 신념을 개설서의 저술을 통해 체계화시키게 되었던 것이다.(2)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국학연구가 안확의 '한글' 명칭 비판

[45회] 안확은 '주씨 일파의 곡설'이라는 심한 표현까지 썼다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0. 4. 12. 

 

 

주시경의 한글운동에 '썩은 선비' 부류가 아닌 국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비판하고 나왔다. 자산(自山) 안확(安廓)이다. 주시경보다 10년 아래였으므로 서로 만났을 수도, 또는 그의 강의나 저서에 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확은 '주씨 일파의 곡설(曲說)'이라는 심한 표현까지 썼다. 먼저 이와 관련 한 논고를 살펴보자.

 

 

편의상 명칭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하면 자산은 '한글'이란 새 이름을 짓는 일은 부질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컨대 '언문(諺文)'에는 한자에 비하여 낫 게 보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꺼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던 듯, 그는 내처 '언문'을 고수했으며 논문(22)에서 그의 생각을 요약하여 표명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자산은 먼저 "세종대왕이 흠정하기는 훈민정음이라 하였으나 실층으로는 언문이라 하였다"고 지적하고 "언문이라 함은 고대인의 성명과 여한(如)한 것이니 후인이 그것을 변작한다기는 심히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언문을 '한글'이라 개명하는 것을 "평민이 양반을 선망하여 행렬자로써 본명을 개(改)함"에 비유하면서 이런 개명으로 그 가치가 "천하세계에 제1대문자"가 될 리는 만무하다고 꼬집기도 하였다. (주석 12)

 

 

일제강점기 『조선문법』과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 그리고 해방 뒤 『조선평민문학사』등을 저술하고 국학 전반에 걸쳐 정력적인 연구를 해온 안확은, 1914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학과에서 수학하고 조선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에 「조선어의 가치」를 발표하였다.

 

 

근대 주시경 씨가 출(出)하여 차(此)에 전력하고 우(又) 학생으로 하여금 언어 연구열을 고취한지라. 연(然)이나 씨는 불행히 조서하였으며 기타 학자는 혹 어음(語音)을 성지(聲理)로 해(解)치 않고 문자형을 의하여 해(解)하며 우 혹자는 현대 수만의 외래어를 일절 폐지하고 고대어를 사용하자는 곡론(曲論) 불합리설을 창(唱)하므로 상금까지 진정한 언어학자가 무 (無)하여 신성한 조선어로써 만어(蠻語)가 되게 하고 오히려 외국학자에게 그 연구를 양(讓)케 되었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주석 13)

 

 

안확은 주시경의 '한글' 이름 짓기에도 못마땅했던 것 같다.

 

"언(諺)은 곧 문기어(文記語)가 아니요 구음어(口音語)라 함이요 우(又)는 성인의 특훈이 아니요 민중의 격언이라 함이라 차는 양의(兩義)에 빙하여 언문의 본의를 해하면 표음문자로서 사회일반에 통합한 평면적의 문자라 할 것이다." (주석 14)

"안확은 '언문'이 도리어 민중의 문자를 부르는 명칭으로서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은 '한글'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언문'의 본의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니, 자산(自山)의 해석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석 15) 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안확의 「주씨 일파의 곡설」의 결론 부문은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주씨 일파의 곡론은 문자와 언어를 혼용하며 어떠한 감정에 자함(自陷)하여 괴벽한 언론을 주장하니 학생에게 취하여는 오히려 해만 있는 이는 없는지라, 관컨대 조선어는 조선문으로 기(記)하여야 된다 하여 조선문법은 조선 본토어만 사용하기로 목적한다 하는 피견은 실로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여차한 무리의 주장으로서 학생을 교(敎) 하였으매 이래 10년 래 조선 문법을 학(學)한 학생은 오직 기로에 함하여 도리어 귀찮은 감상을 기(起)하여 문법의 원리 원칙은 하나도 불지(不知)하게 된 것 같더라. (주석 16)(3)

 

주석
12> 이기문, 「안자산의 국어연구, 특히 그의 주시경 비판에 대하여」, 『주시경 학보』 제2집, 91~92쪽.
13> 안확, 「조선어의 가치」, 『학지광』, 1915년, 여기서는 이기문 앞의 책, 88~90쪽, 재인용.
14> 이기문, 앞의 책, 92쪽, 재인용.
15> 앞과 같음.
16> 앞의 책, 96쪽, 재인용.

 

 

 

 

 

<자료출처>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111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05

 

 

(3) https://v.daum.net/v/2020041217120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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