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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오강원교수는 시차거우(서차구)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고리,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고,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라고 합니다. 『1955년 이른 봄날 랴오닝성 시펑(西豊)현 러산(樂善)향 즈중(執中)촌 장자제(姜家街)에 사는 몇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이제 갓 겨울철이 지났고 아직 곡식을 심지도 않은 상태라 집집마다 식량이 충분치 않던 차에, 10여년 전 마을 노인들이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황금과 옥기를 파내어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올라간 마을 사람 가운데 한 ..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hani.co.kr)2009-06-09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북한학자 안병찬은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1995)에서 ‘평양시 락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 평방미터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면서 “이것은 일제가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강점 기간에 도굴한 무덤수보다 무려 26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남한의 한 사학자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란 논문에서 “(북한에서)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문자 유물의 보고는 더욱..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
신채호 조선상고사근구수왕 즉위 이후의 해외경략근구수왕은 서기 375년에 즉위하여 10년간 재위했다. 그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겨우 한 차례 평양을 침공했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전진(前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의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런 이야기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없지만, 《양서》 및 《송서》에서 “백제가 요서군·진평군을 빼앗았다”라고 하고, 《자치통감》에서 “부여는 처음에는 녹산(鹿山)에 거점을 두었지만, 백제에 패배한 뒤 서쪽으로 옮겨가 연나라에 가까워졌다”라고 한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근구수는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군사와 국정의 대권을 처리했다. 그는 침입한 고구려를 격퇴한 뒤 ..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한정석 편집위원 승인 2015.01.31 01:08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일본 왕실이 꼭꼭 숨긴 ‘쇼소인’ 백제·신라 보물을 엿본다입력 : 2018.02.28 20:53 수정 : 2018.02.28 21:03도재기 선임기자나라 ‘쇼소인’ 소장 유물 관련 심포지엄 7일 열려1년에 단 한 차례 60여점만 공개…전체 소장품은 아직 베일당나라·인도·페르시아 유물도 있는 ‘동아시아의 타임캡슐’1300여년 전 삼국시대 바둑판과 바둑알, 식기와 수저, 악기, 백제 의자왕과 관련된 가구, 호구조사 문서와 사경, 각종 옻칠공예품…. ‘국보’가 되고도 남을 희귀한 문화재들이다. 모두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나라(奈良)의 ‘쇼소인’(正倉院·정창원·맨 위 사진)에 소장돼 있다. 백제·신라와 일본 간 무역, 선물로 전해진 것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유물들이다. 쇼소인에 소장된 ..
《환국-가사라국》 2. 환국은 어떤 나라인가?(4) 2.4.4 《삼국사기》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편》 12개국 주해에서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은 《삼국사기》에 구다국과 매구곡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1)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九年冬十二月에 구다국이 항복해왔다는 기사가 있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가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이로써 땅을 개척하여 점차 넓어졌다.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舉國來降. 由是拓地浸廣.』(2) 또한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地理四 百濟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에 구다국 이름이 들어있다. 『삼국의..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6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는 황제국임을 보여주고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세 고주몽성제, 연호는 평락, 2세 유리명제, 3세 대무신열제, 6세 태조무열제, 연호는 융무, 10세 산상제, 11세 동천제, 19세 광개토경호태황, 연호는 영락,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 연호는 건흥, 21세 문자호태열제, 연호는 명치, 25세 평강상호태열제, 연호는 대덕,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 연호는 홍무, 27세 영류제, 28세 보장제, 연호는 개화 등 황제라 칭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타발, 소서노,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을밀이 나오고, 백제, 신라, 왜의 력사도 나온다. 고구려의 천도과정을 보면 고주몽성제가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년, B..
현대 일본인의 뿌리는 3000년 전 한반도 도래인…유전체로 확인곽노필 기자2024. 10. 17. 09:35곽노필의 미래창현대 일본인 게놈의 80%는 비토착민 계열고대 유전체 분석하니 한국인과 가장 비슷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 된 야요이 시대 이주민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으로 나타났다. 위키미디어 코먼스오늘날 일본은 세계 경제의 중심 가운데 하나이지만 선사시대 일본은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된 섬이었다. 약 1만6500년 전에 시작돼 1만년 이상 이어진 이 시기를 조몬시대라고 부른다. 조몬이란 ‘줄무늬’란 뜻으로 이 시기의 대표적 유물인 줄무늬토기를 가리킨다.약 3000년 전 규슈 북부지역에서부터 벼 농사가 시작되면서 사냥과 채집 위주의 조몬시대는 끝나고 야요이시대(기원전 1000∼서기 300년..
신채호 조선상고사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위축백제 동성대왕이 반역자 백가에게 암살되자, 유능하고 용맹한 사촌형제인1) 무령왕이 백가의 난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무령왕은 고구려의 방비 소홀을 틈타 달솔인 부여우영에게 정예병 5천 명을 주고 고구려 수곡성(지금의 신계군)2)을 기습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장령(지금의 서흥군)3)과 철령4)을 차지하고 성책을 세워 예족을 막았다. 이로써 백제의 서북 경계가 지금의 대동강까지 미치게 됐다. 근구수대왕 시대의 형세가 회복된 것이다.서기 505년에 고구려 문자왕은 치욕을 씻고자 대군을 동원해서 가불성(위치 미상)을 침입했다. 이에 맞서 무령왕은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고구려인들은 백제군이 소수인 것을 보고 방비를 소홀히 했다. 이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