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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온조왕조에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국고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1..
오강원교수는 시차거우(서차구)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고리,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고,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지린시를 중심으로 제2쑹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라고 합니다. 『1955년 이른 봄날 랴오닝성 시펑(西豊)현 러산(樂善)향 즈중(執中)촌 장자제(姜家街)에 사는 몇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이제 갓 겨울철이 지났고 아직 곡식을 심지도 않은 상태라 집집마다 식량이 충분치 않던 차에, 10여년 전 마을 노인들이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황금과 옥기를 파내어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올라간 마을 사람 가운데 한 ..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사현장. 장마철 무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놓는 작업 도중 6호분과 비슷한 재질의 벽돌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유구가 새로 발견됐다는 보고에 김원룡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구성돼 이틀 뒤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원은 이호관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였다.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무령왕릉을 열기 직전 아치 모양의 입구 앞에서 발굴단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벽돌을 쌓아올려 입구를 막은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22일 무령왕릉 앞에서 발굴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지건길 이사장 제공·공주=김경제 기자 kjk58..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평범한 성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선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한정석 편집위원 승인 2015.01.31 01:08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환국-가사라국》 2. 환국은 어떤 나라인가?(4) 2.4.4 《삼국사기》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편》 12개국 주해에서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은 《삼국사기》에 구다국과 매구곡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1)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九年冬十二月에 구다국이 항복해왔다는 기사가 있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가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이로써 땅을 개척하여 점차 넓어졌다.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舉國來降. 由是拓地浸廣.』(2) 또한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地理四 百濟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에 구다국 이름이 들어있다. 『삼국의..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6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는 황제국임을 보여주고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세 고주몽성제, 연호는 평락, 2세 유리명제, 3세 대무신열제, 6세 태조무열제, 연호는 융무, 10세 산상제, 11세 동천제, 19세 광개토경호태황, 연호는 영락,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 연호는 건흥, 21세 문자호태열제, 연호는 명치, 25세 평강상호태열제, 연호는 대덕,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 연호는 홍무, 27세 영류제, 28세 보장제, 연호는 개화 등 황제라 칭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타발, 소서노,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을밀이 나오고, 백제, 신라, 왜의 력사도 나온다. 고구려의 천도과정을 보면 고주몽성제가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년, B..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다. 성왕은 신라 · 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을 차지하였다.이 시기에 백제 공주가 신라에 시집가는 등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말년에 신라가 배신하여 백제의 동북변을 차지하자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중국의 남조와는 물론 북조(당시의 북제)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북제는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라는 작위를 내렸다. 이는 백제가 동청주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서기 245년경에 중국의 동북부에 ..
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부흥 신위례성이 파괴되어 외환이 심하던 상황에서, 백제는 잦은 내란마저 겪어야 했다.그러자 문주왕은 곰나루(웅진)로 천도했다. 문주왕이 재위 4년(《삼국사기》 〈연표〉에서는 3년)에 반역자 해구에게 죽임을 당하자, 장자인 왕근왕(〈백제 본기〉에서는 삼근(三斤)이라고 했지만, 임걸(壬乞)이라고도 한 걸 보면 삼근의 三은 王의 오자일 것이다)이 13세의 어린아이로 즉위했다.왕근왕은 이듬해에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 등과 모의하여 해구를 죽였다. 왕근왕은 이 정도로 영명했지만, 왕이 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그해 즉 서기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했다. 대왕의 이름은 마모대(摩牟大)다. 기존 역사서에서 마모(摩牟)라고 쓴 것은 끝의 한 글자를 뺀 것이고, 모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발해연안문명의 여명을 밝히다부여의 갑골 습속 (naver.com)부여국(扶餘國)의 유적지 분포도 부여(扶餘, 혹은 夫餘)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군사·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신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우선 중국의 진(晋)나라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有軍事 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