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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 (2) 475∼538년 웅진도읍기(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1. 백제 (2) 475∼538년 웅진도읍기(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

대야발 2021. 7. 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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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부흥

 

신위례성이 파괴되어 외환이 심하던 상황에서, 백제는 잦은 내란마저 겪어야 했다.

그러자 문주왕은 곰나루(웅진)로 천도했다. 문주왕이 재위 4년(《삼국사기》 〈연표〉에서는 3년)에 반역자 해구에게 죽임을 당하자, 장자인 왕근왕(〈백제 본기〉에서는 삼근()이라고 했지만, 임걸()이라고도 한 걸 보면 삼근의  의 오자일 것이다)이 13세의 어린아이로 즉위했다.

왕근왕은 이듬해에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 등과 모의하여 해구를 죽였다. 왕근왕은 이 정도로 영명했지만, 왕이 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해 즉 서기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했다. 대왕의 이름은 마모대()다. 기존 역사서에서 마모()라고 쓴 것은 끝의 한 글자를 뺀 것이고, 모대()라고 쓴 것은 앞의 한 글자를 뺀 것이다. 즉위 당시에 대왕이 몇 살이었는지는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왕근의 사촌동생이라고 했으므로 열넷이나 열다섯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왕은 14, 15세의 소년으로 이 같은 난국을 당했지만 타고난 성품이 성숙하고 궁술도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북위를 물리치고 국난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중국의 산동·절강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공격해서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 외에도 전공이 많지만, 《삼국사기》에는 한두 차례의 천재지변인 장마·가뭄과 대왕의 수렵 활동만 기록된 채 나머지는 모두 빠져 있다. 이는 신라 말엽의 문인들이 삭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아래와 같이 그 시대의 역사를 대략 서술하고자 한다.(1)


 

 

북위 군대의 두 차례 침입과 두 차례 패배

 

중국 대륙의 국가 중에서 조선에 침입한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군대 규모가 십만 명에 달한 것은 탁발씨의 북위가 처음이었다. 그런 대군을 격퇴한 것도 백제 동성대왕이 처음이었다. 《위서》에서는 북위의 국치를 숨길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성공을 시기하여 역사적 진실을 삭제하는 신라의 역사 집필 방식을 따른 탓에 이를 기록하지 못했다. 오직 《남제서》에만 이런 사실의 대강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태종에 의해 대부분 사라지고, 동성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를 통해서만 사실의 단편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국서는 온전한 상태로 실려 있을까? 연암 박지원(원문은 ‘박연암’_옮긴이) 선생은 “중국인들은 남(조선)의 시문을 대담하게 고친다. 중국을 수방(, 다른 나라_옮긴이)이나 원방()이라고 쓴 자구가 있으면, 이런 것들을 황도()나 대방()으로 고친다”고 했다. 음풍영월을 담은 사소한 시나 글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정치와 관련된 국서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우리는 이 국서를 통해

(1) 서기 490년에 북위가 보병·기병 수십만을 동원해서 두 차례나 백제를 침입한 사실,

(2) 동성대왕이 제1차로 영삭장군 면중왕 왕저근, 건위장군 팔중후 부여고(), 건위장군 부여력(), 광무장군 부여고()를 보내 북위 군대를 대파한 사실,

(3) 동성대왕이 제2차로 정로장군 매라왕 사법명, 안국장군 벽중왕 찬수류, 무위장군 불중후 해체곤, 광위장군 면중후 목간나를 보내 북위 군대를 격파하고 수만 개의 수급을 벤 사실,

(4) 동성대왕이 두 번의 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국서와 격문을 내외 각국1)에 보내 이를 과시한 사실,

(5) 동성대왕이 수 세대에 걸쳐 쇠퇴하고 위태해진 백제에 태어나서 위와 같은 양차 대전의 승리를 발판으로 국운을 만회하고 내외경략의 터를 닦은 사실,

(6) 당시 출전한 대장들이 왕저근·사법명·부여고()·부여력·부여고()였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전선()의 길이가 어떠했는지, 전쟁의 기간은 어떠했는지, 나중 전쟁은 육전인 게 확실하지만 처음 전쟁은 육전인지 해전이었는지 등등은 다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유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장들이 각각 네 명이었을까? 이는 백제도 부여나 고구려처럼 중·전·후·좌·우의 오군 제도를 썼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 중군대원수가 되고 나머지 네 명은 각각 네 명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이유로 왕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대왕의 신하로서 왕을 겸했을까? 이것도 조선의 옛 제도에 입각한 것이다. 대왕은 ‘신한’의 번역어로 국가 전체에 군림하는 천자의 칭호이고, 왕은 ‘한’의 번역어로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의 칭호였다.(2)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 사망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훨씬 더 넓었다.

 

《구당서》 〈백제 열전〉에서는 백제의 영토에 관해 말하면서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도달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고려에 도달하며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국에 도달한다”고 했다.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다.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에서 “월나라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명사였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서의 서쪽 즉 지금의 봉천성 서부는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구절에 의하면 당시의 일본 전역이 백제의 속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백제는 이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언제 잃었을까?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 패해 국세가 약해졌으니, 이때 해외 식민지를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동성대왕은 이처럼 큰 전공을 이루었지만, 수재나 가뭄 같은 재해가 심한 때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웅장하고 화려한 임류각을 지었다. 그 앞에 정원을 조성하고 못을 파서 진귀한 동물과 기이한 물고기를 길렀다. 또 수렵을 즐겨 자주 궁을 나갔다.

 

그는 재위 23년 11월 사비 부여의 마포촌에서 수렵을 하다가 큰 눈을 만나 유숙하던 중에, 왕을 미워하는 전 위사좌평 겸 전 가림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재위 23년 12월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은 22년간(원문은 23년_옮긴이)이었다. 당시 나이는 겨우 30여 세였다.(3)

 

 
 

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위축

 

백제 동성대왕이 반역자 백가에게 암살되자, 유능하고 용맹한 사촌형제인 무령왕이 백가의 난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무령왕은 고구려의 방비 소홀을 틈타 달솔인 부여우영에게 정예병 5천 명을 주고 고구려 수곡성(지금의 신계군)을 기습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는 장령(지금의 서흥군)과 철령을 차지하고 성책을 세워 예족을 막았다. 이로써 백제의 서북 경계가 지금의 대동강까지 미치게 됐다. 근구수대왕 시대의 형세가 회복된 것이다.

서기 505년에 고구려 문자왕은 치욕을 씻고자 대군을 동원해서 가불성(위치 미상)을 침입했다. 이에 맞서 무령왕은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고구려인들은 백제군이 소수인 것을 보고 방비를 소홀히 했다. 이것을 이용해서 왕은 계책을 써 고구려군을 급습하고 대파했다. 이후 10여 년간 고구려는 남쪽을 침범하지 못했다.

무령왕은 이 틈을 타 도성과 지방의 유랑자들을 농토로 유인했다. 이들에게 농사를 시키고 제방을 수축하고 수전()을 짓도록 하자, 국고가 더욱 더 충실해졌다. 서쪽으로 중국, 서남쪽으로 인도·대식국 등과 통상하니 문화적으로도 꽤 발달했다.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23년간은 백제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만하다.(4)

 

 

 

 

<자료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부흥(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북위 군대의 두 차례 침입과 두 차례 패배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동성대왕의 해외 경략과 중도 사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 [네이버 지식백과] 무령왕의 북진과 고구려의 위축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참고자료>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신동아 (donga.com)

 

 

백제는 없었다 (pressian.com)

 

 

 

현존 세계 '最古' 일본기업, 뿌리는 '백제' | 연합뉴스 (yna.co.kr)2019-03-23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5/08/10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8/05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땅에 묻혔을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7/30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8/12

 

 

백제왕 창의 사리함과 고대 4국의 관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4/14

 

 

쿠데타로 본 '대륙백제'의 역사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11/11

 

 

“일본 최고 사찰 아스카데라 원형은 부여 왕흥사 가능성”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08.04.17

 

 

백제의 멸망기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웅진은 신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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