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4. 1. 22. 05:32수정 2024. 1. 24. 06:04

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이기환의 Hi-story](118) (daum.net)

 

무령왕릉 앞 6호분은 요절한 순타태자인가, 원수였던 동성왕인가[이기환의 Hi-story](118)

‘실종된 29호분의 정체를 찾아라.’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역사적인 고고학 발견이 있었죠. 고분 속 지석에 ‘무덤 주인공이 나(무령왕)요’ 하고 새겨넣은 고분, 즉 ‘백제 무령왕릉’

v.daum.net

 

 

노형석 기자입력 2024. 1. 12. 07:05수정 2024. 1. 13. 22:45

백제로 이어졌던 베트남 바닷길 유적서 1600년 전 힌두사원터 나왔다 (daum.net)

 

백제로 이어졌던 베트남 바닷길 유적서 1600년 전 힌두사원터 나왔다

베트남 남부 안장성의 메콩강 삼각주 해안지역엔 고대 백제사람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1500~1600여년 전 백제인들이 오가며 국제교역을 했던 항구도시 흔적들과 유력한 교역물인 유리 구슬 등이 2

v.daum.net

 

 

[ 한성(서울) 도읍기 ]

[풍납토성]

김종목 기자입력 2022. 5. 22. 20:46수정 2022. 5. 24. 10:49

"자연제방에 축성했다는 거짓말을 또..한성백제 능멸은 못 참아"..'풍납토성 교수' 이형구의 분노 (daum.net)

 

 

기사입력 2018-12-17 15:44 l 최종수정 2019-03-17 16:05

풍납토성 서쪽 성벽 실체 드러났다…"성벽 최소 31m 이상"

 

 

이명희 기자입력 2018. 10. 9. 12:33수정 2018. 10. 9. 14:14

올림픽대로 '풍납토성나들목' 일대서 35m 성벽 발견

 

 

 

입력2018.01.24 06:55

풍납토성 서성벽 대형 매립콘크리트 발견

 

 

 

송고시간2017-10-20 05:01

 

 

입력 : 2008.06.30 17:43

 

 

입력 : 2008.06.18 18:09

 

 

입력 2008-05-07 02:54업데이트 2009-09-25 03:47  

 

한성도읍기 백제 절터 최초 발굴(종합)

풍납토성 경당지구서 확인(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로 건립된 절터의 목탑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에서 발굴됐다.한신대박물관은

v.daum.net

 

 

입력 : 2008.04.29 23:33

 

풍납토성서 ‘목탑지’ 발굴…4~5세기 건립 추정

백제의 불교전래(AD 384년) 후 최초로 건립된 절터의 목탑지(사진)로 추정되는 유구가 서울 풍납토성에서 확인됐다.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발굴 중인 한신대박물관은 2005년 ...

www.khan.co.kr

 

 

입력 2008-02-27 03:01업데이트 2009-09-25 14:20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 재개… 초기백제 왕실제사터 추정

2000년 한성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왕성의 제사 터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遺構·건축물의 구조를 보여 주는

www.donga.com

 

 

 

수정 2007-12-10 19:31 등록 2007-12-10 19:31

풍납토성 백제 유적 발굴 8년만에 재개 (hani.co.kr)

 

풍납토성 백제 유적 발굴 8년만에 재개

2000년 5월 재개발조합 주민들의 발굴 유적 파괴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서울 풍납동 풍납토성(사적 11호) 안 옛 경당연립 재개발터의 초기 백제 유적이 8년만에 다시 발굴된다. 이 유적은 오늘날

www.hani.co.kr

 

 

[몽촌토성]

최윤선입력 2023. 11. 21. 06:00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고대 목제 쟁기' 추가 출토 (daum.net)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고대 목제 쟁기' 추가 출토

(서울=연합뉴스) 최윤선 기자 = 한성백제박물관은 지난 6월 한성백제 왕도 유적인 몽촌토성에서 삼국시대 목제 쟁기가 추가로 출토됐다고 21일 밝혔다. 삼국시대 목제 쟁기는 2020년과 지난해에

v.daum.net

 

 

등록 :2017-03-28 16:35수정 :2017-03-28 20:10

[단독] ‘신라냐 백제냐’ 국적논란 방이동 고분 40여년 만에 발굴한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한성백제박물관, 4월초 발굴조사 착수
1970년대 발굴 당시 한성백제 무덤 단정
나중에 출토된 토기 신라유물로 드러나
최근 백제석실분 잇단 발견에 백제무덤설 재부각
고고학계 해묵은 국적논란 종식될지 관심 모아져
서울 송파구 방이동 산 47-4번지에 있는 방이동고분군의 일부. 1970년대 이후 강남개발로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여 섬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맨 왼쪽에 입구가 보이는 고분이 1호분, 바로 뒤에 있는 고분이 2호분이다. 그 옆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고분 2개가 3호분과 6호분. 이번에 발굴하는 고분은 조사되지 않았던 3호분이며 나머지 고분들은 70년대 조사된 바 있다.
이 옛 무덤떼는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해진다. 1500여년 전 무덤 잡은 자리는 옛 백제 도읍터 코앞인데, 나온 토기들은 죄다 신라의 유물이다. 그래서 30여년째 학자들 사이에 신라 무덤인지 백제 무덤인지를 놓고 국적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숲에 둘러싸여 8기의 무덤 공원이 된 서울 방이동고분군의 내력이다. 이 무덤떼는 70년대 초 한 주민이 자기 집 축대와 인접한 1호분 무덤의 돌방과 널길을 발견해 신고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뒤이어 75년 잠실 택지개발을 앞두고 문화재관리국이 1, 4, 5, 6호분 무덤을 발굴한 결과 백제, 신라 공통의 굴식돌방무덤(석실분)들이 대부분 나왔다. 조사단은 4~5세기 한성(서울)에 도읍한 초기 백제 무덤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대부분 도굴된 상태에서 빈약하게 나온 굽다리접시, 직구호 항아리 따위의 토기 유물들이 나중에 학계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학계는 출토품도 한성백제 유물로 봤는데, 아니었다. 80년대 초까지 진행된 경주의 신라고찰 황룡사터 발굴 현장에서 방이동 출토품과 똑같은 굽다리접시, 항아리들이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방이동고분군 주인이 6세기 한강 유역에 진출한 신라인들이란 학설(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이 제시됐고, 결국 신라계 무덤이라는 통설이 힘을 얻게 됐다. 79년 사적 지정 당시 고분군 정식 명칭이 ‘방이동백제고분군’이었다가 2011년 명칭에서 백제가 빠진 건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백제설이 그냥 가라앉은 건 아니다. 최근 부근의 우면동과 하남시 감일동 등에서 한성백제의 정교한 석실무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방이동고분군 국적은 백제가 맞다는 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일부 학자들은 백제인들의 석실무덤을 나중에 들어온 신라인들이 재활용했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5~6세기 백제·신라 무덤 변천사에서 수수께끼의 고리가 되는 방이동고분군이 70년대 이래 40년 만에 처음 발굴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4월 첫주부터 전문가들 자문 아래 고분군의 3호분을 발굴하는 학술조사에 들어간다고 28일 밝혔다. 최근 3호분 한쪽 면 봉토가 쓸려 내려가는 이상현상이 나타나 관리자 쪽인 송파구청이 정비를 위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3호분은 70년대 발굴되지 않았다. 봉토, 내부 무덤방 얼개, 유물 등을 확인할 것으로 보이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4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신라, 백제 국적 논란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인지 학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최병현 교수는 “70년대엔 신라와 백제 고분의 얼개, 토기의 차이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한 상태로 발굴했던 만큼 이번 조사를 통해 국적 논란에 좀더 분명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송고시간2018-04-22 06:00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중국 교류 증거 '청자 계수호', '부뚜막형 토기' 첫 출토

 

"한성도읍기 백제 역사 구명할 핵심 유적"

 
 

하남 감일동에서 나온 백제 횡혈식 석실분. [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이 확실시되는 서울 풍납토성(사적 제11호)과 약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 최고위층 무덤 수십 기가 나왔다.

22일 하남시와 하남역사박물관에 따르면 고려문화재연구원(이사장 김병모)이 2015년 11월부터 진행 중인 하남감일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부지에서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 돌방무덤) 50기가 발견됐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전국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모두 70여 기로, 서울 인근에서 이처럼 많은 백제 석실분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 고분들은 학계에서 한성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과 가락동, 그리고 방이동 일대 고분군이 도시 개발로 대부분 파괴된 상황에서 당시 백제 건축 문화와 생활상, 국제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 중심부에서 상상도 못 한 유적이 나온 것"이라며 "한성도읍기 백제는 고분은 망가지고 기록은 소략했는데, 감일동 고분군은 백제사를 구명하고 복원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남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 벽에 회가 남아 있다.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감일동에서 확인한 횡혈식 석실분은 크게 네 곳에 무리를 이루었다. 경사면에 땅을 파서 직사각형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만들고, 바닥을 다진 뒤 길쭉하고 평평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조다.

묘광과 돌 사이는 판축기법(흙을 얇은 판 모양으로 켜켜이 다져 올리는 방법)을 썼고, 천장은 점차 오므라드는 소위 궁륭식이다. 일부 무덤은 벽을 마감한 회가 남았고,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연도는 대부분 오른쪽에 마련됐다.

무덤 크기는 묘광이 세로 330∼670㎝, 가로 230∼420㎝이고, 석실은 세로 240∼300㎝, 세로 170∼220㎝다. 높이는 180㎝ 내외다. 무덤 간 거리는 약 10∼20m다.

문재범 하남역사박물관장은 "일부 무덤은 두 번 이상 사용한 흔적이 있다"며 "시신과 껴묻거리를 안치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안쪽으로 밀어 넣고 또다시 장례를 치른 것 같다"고 말했다.

 
 

감일동 횡혈식 석실분에서 나온 부뚜막형 토기.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부장품으로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토기와 매우 흡사한 직구광견호(直口廣肩壺·아가리가 곧고 어깨가 넓은 항아리)를 비롯해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 계수호(鷄首壺·닭머리가 달린 항아리)와 부뚜막형 토기 2점이 출토됐다.

문 관장은 "백제 무덤은 신라 무덤과 비교하면 껴묻거리가 많지 않다"며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흑유(흑색 유약) 계수호가 나온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청자 계수호가 발굴되기는 최초다. 사각뿔에 동그란 구멍을 뚫은 것 같은 부뚜막형 토기도 처음 출토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청자는 당시 중국에서만 만들 수 있었고, 부뚜막형 토기를 무덤에 묻는 풍습도 중국에 있었다"며 "백제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지금으로 치면 감일동 고분군에는 글로벌화한 사람들이 묻혔다고 볼 수 있다"며 "일본 오사카, 나라에서 나오는 5세기 후반 백제계 석실분의 원형이라는 생각도 든다"는 의견을 내놨다.

 
 

청자 계수호.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하남시는 석실분 28기가 밀집한 지역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공원 한편에는 이전·복원할 석실분 15기와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이 들어선다.

문 관장은 "감일동 고분군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이어지는 백제 고분 유적"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가 웅진과 사비를 도읍으로 삼았을 때 유적을 아우르는데, 세계유산을 한성도읍기 백제 유적으로 확장 등재한다면 감일동 고분군도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psh59@yna.co.kr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 연합뉴스 (yna.co.kr)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이 확실시되는 서울 풍납토성(사적 제11호)과 약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동에서 백제 ...

www.yna.co.kr

 

 

 

입력 2016.12.23. 16:49

예산군, 예산산성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유적 발견 (daum.net)

 

예산군, 예산산성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유적 발견

(대전·충남=뉴스1) 조문현 기자 = 예산군은 지명탄생 1100주년을 맞아 지명탄생한 장소인 예산산성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수의 백제시대 유적들이 발견됐다고 23일 현장설명회를 통해 밝혔다

v.daum.net

 

송고시간2016-08-03 17:14

파주 운정지구서 백제 초기 토기가마 단지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파주 운정지구서 백제 초기 토기가마 단지 발견 | 연합뉴스

가마 유적 9기, 대형옹기 조각·토기 조각 등 발굴

www.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기도 파주 운정3 택지개발지구에서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가마 유적이 무더기로 나왔다.

문화재청은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지난해 9월부터 경기도 파주시 다율동 산 27-1 번지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4세기 전후의 토기 가마 유적 9기와 대형옹기 조각, 타날문(두드려서 새긴 무늬) 토기 조각 등을 발굴했다고 3일 밝혔다.

 

 

입력 2016. 12. 1. 16:18

한성 백제시대 대형 주거지 발굴 (daum.net)

 

한성 백제시대 대형 주거지 발굴

(증평=연합뉴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추성산성(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7호)에서 한성 백제기인 4세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6.12.1 [증평군 제공=연합뉴스] ks@yna.co.

v.daum.net

(증평=연합뉴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추성산성(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7호)에서 한성 백제기인 4세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6.12.1 [증평군 제공=연합뉴스]

 

 

입력 2007-11-10 03:02업데이트 2009-09-26 05:43

한성 백제시대 거대 고분 발견|동아일보 (donga.com)

 

한성 백제시대 거대 고분 발견

충남 연기 행정도시 예정지서 횡혈식석실 등 무더기 발굴한성 도읍기 백제시대의 대규모 고분이 행정중심복합도시 예

www.donga.com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국고고환경연구소는 충남 연기군 남면 송원리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한성기 백제시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중 가장 큰 고분을 발굴했다고 9일 밝혔다. 이 고분은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

송고시간2019-05-29 09:57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서 백제 제련로 5기 추가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서 백제 제련로 5기 추가 발견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대 제철 생산지인 충북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서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든 가마인 제련로(製鍊爐) 5기가 추가...

www.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고대 제철 생산지인 충북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에서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든 가마인 제련로(製鍊爐) 5기가 추가로 확인됐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충주 탄금대(명승 제42호) 남사면 구릉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3∼4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1.3m 안팎 원형 제련로 5기를 더 찾아냈다고 29일 밝혔다.

2016년부터 3년간 진행한 조사를 통해 드러난 칠금동 유적 백제시대 제련로는 모두 25기로 늘어났다.

 

 
 
 

[고창 봉덕리 1호분]

박제철 기자입력 2023. 11. 7. 18:18

"봉덕고분 마한~백제 무덤양식"…고창군 7일 고분발굴 현장 설명회 (daum.net)

 

"봉덕고분 마한~백제 무덤양식"…고창군 7일 고분발굴 현장 설명회

(고창=뉴스1) 박제철 기자 = 전북 고창군이 마한시대의 무덤 ‘고창 봉덕리 봉덕고분’ 발굴과 관련해 7일 현장을 공개했다. 이번 발굴조사는 고창군과 (재)문화유산마을(원장 이영덕)이 2023년 문

v.daum.net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5. 4. 05:01수정 2021. 5. 6. 09:31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2009년 9월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을 조사중이던 발굴단이 1호분 정상부에서 도굴의 화를 피한 구덩식 돌방무덤을 확인했다. 돌 틈 사이로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보자 한줄기 빛이 반사된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1550년전 무덤주인공의 발에 신긴 금동신발이었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이건 제사를 지냈던 흔적 같은데….” 2009년 9월 어느 날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을 발굴 중이던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단이 1호분의 정상부에서 심상치 않은 유구를 확인했다.

봉덕리 고분은 자연구릉을 깎아 시차를 두고 여러 기의 무덤을 조성한 이른바 분구묘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약한 지방세력의 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고창군은 2008년부터 3억원의 예산을 들여 봉덕리 1호분의 정비보존 방안을 마련하려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1호분 분구 내 1·2호 석실에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제 귀고리 등을 찾아냈다. 학술적으로 의미있는 성과였다. 그러나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다.

 

■밀봉된 고분에서 출현한 금동신발

이에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팀이 추가조사를 벌였고, 급기야 1호분의 정상부의 남동쪽에서 기존과 다른 형태의 유구를 찾아낸 것이다. 발굴단은 처음에는 직사각형 형태로 정연하게 깔려있는 깬돌(할석)을 제사 유구로 판단했다. 백제인들이 무덤을 조성한 뒤에 이 평평한 돌 위에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깬돌을 들어내자 2장의 대형 판석을 이용한 덮개돌이 노출됐다.

전북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시대의 금동신발. 5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최고의 ‘명품 구두’라 할만큼 빼어난 문양과 제작기법을 뽐내고 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이 덮개돌 사이의 빈틈은 4개의 작은 돌과 진흙으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다.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이것은 제사유구가 아니라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싱싱한 고분이었다.

“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발굴단을 이끈 당시 최완규 연구소장(현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덮개돌 한 장을 살짝 들어올렸다. 살짝 틈이 생겼다. 최소장은 틈 사이로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넣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까맣게 찍혔지만 돌 틈 사이로 들어간 한줄기 희미한 빛이 어떤 물체에 부딪혀 흰색을 띄고 있었다.

 

최완규 소장이 발굴 실무자인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연구교수)을 불러 흥분을 가라앉힌 채 나지막히 말했다.

“저건, 금동제품이 틀림없어. 금동신발 같은데.”

발굴단으로서는 무덤뚜껑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꾹 참았다. 자칫 덮개돌을 열었다가는 1500년 이상 밀봉되어 있던 유물들이 외부 환경에 노출되어 급격하게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유물의 보존처리는 국가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고분의 뚜껑돌을 닫고,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에게 ‘금동신발이 포함된 도굴없는 고분의 발견’ 사실을 알렸습니다.”(최완규 소장)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은 구릉을 반으로 깎아 무덤을 계속 조성하는 그 지방 유력자 가문의 선산이었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4호석실(오른쪽 작은 사진)은 1호분의 정상부에서 확인됐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신발 안에는 사람의 발뼈가…

12월까지 계속된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금동신발은 물론이고, 피장자의 주변에서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머리장신구’와 ‘청동탁잔(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장식대도(장식이 있는 큰칼)’, ‘중국청자항아리’, ‘소호장식유공광구호(작은 항아리를 장식으로 붙인 넓은 입 구멍 단지)’, ‘성시구(화살통)’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5세기 2/4분기 말~3/4분기로 추정됐다. 즉 450~475년 사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분의 가치를 높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금동신발이었다.

사실 확인된 금동신발의 크기는 32.4(좌)~32.7(우)㎝ 정도였다. 게다가 바닥판에 최대 1.7㎝ 크기의 원추형 스파이크를 18개나 박았다. 따라서 실용성은 ‘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동신발의 오른쪽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극히 일부지만 주인공의 뼈가 확인됐다. 피장자의 발에 이 금동신발을 신겨서 안장한 것이 틀림없다.

금동신발은 바닥판과 양 옆판을 포함해서 3장의 금속판을 접어 못으로 결구하여 제작했다. 백제 고분에서 확인되는 다른 금동신발과 달리 윗부분에 2㎝ 가량의 목깃을 추가로 붙였다. 이 목깃은 결구한 금동판이 밖으로 벌어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총 4장의 금속판이 소요됐다.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의 문양. 양쪽 옆면은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를 배치했다. 가운데 육각형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용·인면조(사람얼굴의 새)·쌍조·길상조 등을 역동적이면서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육각 무늬 바깥쪽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을 알맞게 배치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명품 중 명품’인 한성백제 구두

이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을 자세히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터진다. 목깃을 제외한 양쪽 옆판과 바닥판에 다양한 문양이 배치되어 있다.

양쪽 옆면은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를 배치했다. 가운데 육각형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용·인면조(사람얼굴의 새)·쌍조·길상조 등을 역동적·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육각 무늬 바깥쪽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을 알맞게 배치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다.

바닥판도 마찬가지다.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다. 특히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는 물론이고, 내부 비늘까지도 정(끌)을 이용해서 매우 섬세하면서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18개나 박은 스파이크는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추형 형태로 배치했다. 이밖에도 원형의 인면(사람얼굴) 문양 역시 바닥판 곳곳에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았다.

①바닥판에 최대 1.7㎝ 크기의 원추형 스파이크를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추형 형태로 배치했다.②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 순으로 배치했다.③원형의 인면(사람얼굴) 문양 역시 바닥판 곳곳에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았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물론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다. 기존 제품 중에도 凸자문과 능형문(마름모 무늬) 같은 단순 무늬에서 벗어나 거치문(톱니무늬), 화염문, 용문 등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즉 정(끌)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법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내부에 다채로운 문양을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금동신발의 제작기법은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권향아의 논문에서


이 기법을 쓰면 쐐기형의 삼각형 점들이 연결되는 선으로 보인다. 당연히 입체감과 생동감이 생긴다. 기존의 점선조 기법은 문양대의 구획선이나 경계선 같은 보조 문양을 새기는데 활용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점점 다양해진 공예기법이 봉덕리 금동신발에 와서 절정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일본 고분에서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전했다.

바닥판에 보이는 용무늬.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는 물론이고, 내부 비늘까지도 정(끌)을 이용해서 매우 섬세하면서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국립전주박물관


■경주 식리총에서 발견된 백제의 명품구두

이문형 연구교수는 “이미 한성백제 시기에 이렇듯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기술자(공인) 집단이 존재했다는 얘기”라고 분석했다.

또하나 한가지 의미있는 시사점이 있다. 봉덕리 금동신발이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과 제작기법 및 문양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신발 양쪽의 판을 하나씩 제작해서 결합시키는 제작기법은 완전히 백제식이다. 이한상·이문형 교수는 “육각형 구획 안에 괴수와 인면조 등 무늬의 구성도 비슷하다”면서 “백제가 신라에 보낸 선물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한상 교수에 따르면 식리총은 5세기 4/4분기, 즉 475~500년 사이에 조성된 무덤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신라인들은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 백제와 신라를 통틀어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명품으로 꼽힌다. ①전남 고흥 길두리 금동신발 ②충남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비 금동신발 ③무령왕 금동신발 ④ 공주 수촌리 1호분 금동신발 ⑤ 익산 입점리 금동신발 ⑥경북 경주 황남대총 남분 금동신발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중국을 괴롭힌 전성기 백제

도굴되지 않은채 현현한 이 고분에는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고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금동신발과 같은 유물을 백제 중앙정부가 봉덕리 근방을 다스리던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룬 나라는 백제이다. 특히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태자(근구수왕·375~384)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파하고(369년)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깃발을 휘날리며 대대적인 열병식을 열었다. 2년 뒤(371년)에는 급기야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원정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331~371)까지 죽였다. <송서>와 <양직공도> 등 중국 사서에 ‘요서경략’ 기사가 등장하고 <양서>에는 “요서에 근거를 둔 백제가 근구수왕, 전지왕(405~420), 비유왕(427~455)이 백성을 파견했다”는 대목까지 보인다.

이 기록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혔다”(<삼국사기>)는 편지를 보냈다. 백제가 중국을 괴롭힐만큼 강성했다는 얘기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왼쪽 사진은 중국 지린성(吉林省)지안(集安)의 고구려 고분인 마선묘구(麻線墓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일본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에서 확인된 금동신발(오른쪽 사진).|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지방분권을 추구한 백제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마한의 50여개 소국을 통합해서 세운 왕국이다. 태생부터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을 지향한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백제가 성(城)과 촌 단위로 조직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침략 이후 국세가 위축됐다. 하지만 한성 함락-웅진(공주) 천도(475년)까지는 여전히 전성기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백제 중앙정부는 지방 소재 거점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고 있던 유력자에게 이른바 ‘위세품’을 사여한 것이다. ‘위세품’은 지방세력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면서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사하는 귀중품을 의미한다. 백제 중앙정부는 이 위세품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방 세력의 이탈을 막는 한편 그들을 매개로 거점 지역을 간접 지배했다. 지방 유력자들은 물론 기득권을 일부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인정을 받고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다.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왼쪽 사진)과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오른쪽 사진). 5세기 말~6세기 초 조성된 경주 식리총은 귀족무덤으로 추정된다. 제작기법과 문양 등을 미뤄볼 때 식리총 금동신발은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덕리 고분 출토품과 흡사하다. 신라에서도 백제산 금동신발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조잡한 무덤에 웬 금동신발?

이한상 교수는 “위세품의 사여는 왕실의 복속의례 혹은 충성서약의 형태로 표현됐다”고 해석한다. 그중에서도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최고급이었다.

“머리에 쓰는 관모는 관직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죠. 또한 신발은 실용품이 아니지만 사후세계와 관련된 장송의례의 전용품이죠. 백제 중앙정부와의 강한 유대감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겠죠.”(이한상 교수)

이문형 연구교수는 “그 중에서도 명품 중의 명품을 하사받은 봉덕리 고분 주인공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백제산인 금동신발 외에 왜와 중국제 제품이 한꺼번에 안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와 ‘기대형 고배(그릇받침형 굽다리접시)’, 그리고 중국제 청자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동진(317~420) 혹은 유송(420∼479) 시기에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봉덕리 고분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사진 오른쪽)와 중국제 청자(왼쪽)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4~5세기 중국 남조에서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최완규 이사장은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왜나 중국제 제품을 배당 받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봉덕리 고분 주인공이 무역 등 통해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주목할만한 사항이 또 있다. 이 4호 석실이 매우 화급하게 축조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호분 분구 내에는 5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 이 (금동신발이 출토된) 4호 석실은 무덤방의 석재나 축조기법 등을 비교할 때 매우 조잡하고 거칠어서 급조된 것 같아요.”(이문형 연구교수)

즉 벽에 사용된 석재가 정연하지도 않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며, 벽석과 벽석 사이를 메운 작은 깬돌들도 대충 채워 넣었다는 인상이 짙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방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있다. 이 무덤이 부부합장묘가 아니라 홀로 묻힌 단장이라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이 미혼 남성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을 시사하는 대목일까. 이문형 연구교수는 여기서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한성이 475년(개로왕 21년)에 함락됐고, 이 무덤이 조성된 때가 5세기 중후반(450~475년)이라는 점이 눈에 밟힌다.

그렇다면 한성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후 격심해진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인물이 전사한 뒤에 급하게 만든 무덤이 아닐까. 그렇게 죽은 봉덕리 출신의 젊은 장수를 위해 백제 국왕(개로왕?)이 최고의 장례품인 명품 신발을 하사한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봉덕리 1호분 4호석실에서는 장식대도와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장신구’와 ‘청동잔탁(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한성백제 멸망과 금동신발 기술의 단절

화려한 금동신발은 한성 함락과 웅진천도(475년)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지방 세력에 내려준 금동신발(익산 입점리·나주 신촌리 9호 을관) 등은 봉덕리 출토품과 사뭇 다르다.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법 대신 점을 연속으로 찍어 선을 나타내는 ‘점선조 기법’으로 회귀한다.

이한상·이문형 두 교수는 “이것은 고구려의 침입과 웅진천도 이후 금속기술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랬을 것이다.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에 전성기를 이룬 백제는 고구려 침입과 개로왕의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고, 국력 또한 급전직하했다.

금동신발 같은 명품 신발을 안장한 4호석실이지만 급조된 인상이 짙다. 벽에 사용된 석재가 정연하지도 않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며, 벽석과 벽석 사이를 메운 작은 깬돌들도 대충 채워 넣었다는 인상이 짙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방 떨어진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금속기술 역시 단절되었다가 40여년이 지난 6세기 전반기에 겨우 회복되었다. 523년에 조성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신발이 그것이다. 이 두 짝의 금동신발은 봉덕리 출토품과는 사뭇 다르다. 금속판을 오리고 뚫어서 무늬를 만드는 이른바 ‘투조기법’을 사용한 것은 같다. 그러나 기법도, 문양도 정제되고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물론 이한상 교수는 “이것이 우열의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들은 신발 안쪽에 금속판, 즉 은판(무령왕)과 금동판(왕비)을 덧대었습니다. 그래서 무령왕의 신발은 배경은 하얀색, 무늬는 금색이 나게 돼죠.”

말하자면 제작기법과 문양 새김의 차이일 뿐이며, 이는 한성 시기와 웅진 천도 이후의 트렌드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백제의 명품 신발이 한성 함락 이후에 사라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봉덕리 1호분 4호석실 인근에서는 4호석실보다 시기도 빠르고 지위도 높은 석실이 확인됐다. 그 무덤에서는 또하나의 금동신발편도 출토됐다. 그러나 이 고분은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였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제공


■5호석실 도굴이 없었다면…

최근 문화재청은 이 고창 봉덕리와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등 2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사실 삼국시대 고분의 출토 유물 중에서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다. 그러나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무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조차 지정문화재가 아니다.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5세기 중후반 한성 백제가 제작한 명품 신발(‘봉덕리 고분 출토품’)이 ‘보물’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 ‘보물 금동신발’이 출토된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호 석실에서도 금동신발의 바닥편과 금동허리띠 꾸미개, 철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출토된 철도끼 등을 보면 완형의 금동신발이 나온 4호 석실의 철도끼보다 컸다”면서 “5호 석실의 주인공이 4호 피장자보다 시기도 앞섰고 지위도 높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다. 아마 5호 석실과 4호 석실의 주인공들은 같은 가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5호 석실은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였다. 만약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다면 한성백제 시대의 찬란한 금동신발, 아니 그보다 더 나은 금동제 유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누군가 그렇게 도굴해간 5호석실의 금동신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고자료>

이문형, 유수화, ‘분석 및 조사보고문:고창 봉덕리1호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방법과 문양 -4호석실 출토품을 중심으로’, <마한백제문화> 25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이문형, ‘고창 봉덕리고분군 축조세력 연구’, 공주대 박사논문, 2020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고창 봉덕리 1호분 종합보고서>(유적조사보고 제80집), 2016

권향아, ‘삼국시대 금속유물의 선조기법양상-축조기법을 중심으로’, <문물연구> 제4호, 동아시아문물연구 학술재단, 2000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이건 제사를 지냈던 흔적 같은데….” 2009년 9월 어느 날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을 발굴 중이던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단이 1호분의 정상부에서 심상치 않은 유구를 확

v.daum.net

 

 

 

[ 웅진도읍기(475∼538)  ]

[무령왕릉과 왕릉원]

 

강혜란 입력 2021. 02. 24. 11:00 수정 2021. 02. 24. 14:31 

[무령왕릉 발굴 50년, 역사를 바꾸다] ⓶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출처; news.v.daum.net/v/20210224110058986

 

귀신 홀린 듯 가마니에 퍼담았다..1박2일 아수라장 무령왕릉

“시간에 쫓겨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마는, 그런 최악의 발굴을 거쳐서 최선의 유적이 나왔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지건길(78)

news.v.daum.net

귀신 홀린 듯 가마니에 퍼담았다..1박2일 아수라장 무령왕릉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2021. 03. 23. 06:01 수정 2021. 03. 25. 09:11 댓글 158

https://news.v.daum.net/v/20210323060114421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왜 하필 29호분일까.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웅진 백제 시기(475~538년) 왕릉의 구조와 상장례를 규명한다면서 첫번째로 지목해서 발굴 조사하는 고분이 바로 송산리 29호분이다.

news.v.daum.net

사라진 송산리 29호분, 일인 교사 '도굴' 88년 만에 발굴하는 이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등록 2019-07-17 오후 5:13:33  수정 2019-07-17 오후 5:13:33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709686622555504&mediaCodeNo=257&OutLnkChk=Y 

 

백제 무령왕릉 주변에 '고분 40여기' 더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현황. 무령왕릉을 포함해 정비된 고분은 7기, 일제강점기 보고됐으나 현재까지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고분은 6기, 새롭게 확인된 추정 고

www.edaily.co.kr

 

 

 

연합뉴스

<무령왕 墓誌 구멍의 비밀 마침내 풀렸다>

2007년 9월 6일 (목) 06:00

 

日학자 "墓地구입 돈꾸러미 끼운 곳"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여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돼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무덤 주인공이 확인된 왕릉이다.

그것은 왕릉 안에서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묘지(墓誌.방형 판석)가 각각 1장, 그리고 죽은 무령왕이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여러 신(神)에게서 무덤으로 쓸 땅을 매입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인 매지권(買地卷)이 왕비 묘지의 뒷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무덤방(玄室)으로 통하는 무덤길에서 동서쪽으로 나란히 놓인 채 발견된 두 묘지에는 모두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나아가 무령왕 묘지 뒷면에는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칭만 제외한 '십이간지(十二干支) 방위표'가 그려져 있었다.

중국 투르판 지역 고문서를 주로 연구하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 이후 30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무령왕릉을 둘러싼 최대의 미스터리인 묘지의 구멍과 십이간지 방위표에 얽힌 비밀을 마침내 풀어냈다.

시라스 교수는 미술사학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권영필 교수의 정년퇴임 논총에 투고한 논문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ㆍ왕비 합장묘의 묘권(墓券.매지권)ㆍ묘지석(墓誌石)에 관한 한 제언'에서 묘지(석)의 구멍은 무령왕이 지하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시라스 교수는 무령왕 묘지 뒷면에 새긴 '십이간지 방위표'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하는 亥ㆍ壬ㆍ子ㆍ癸ㆍ丑, 동쪽에 해당하는 寅ㆍ甲ㆍ卯ㆍ乙ㆍ辰, 그리고 남쪽을 지칭하는 巳ㆍ丙ㆍ午ㆍ丁ㆍ未를 표시하고 서쪽에 해당하는 방위명들인 申ㆍ庚ㆍ酉ㆍ辛ㆍ戌을 뺀 것은 "무령왕이 (지신에게서) 산 무덤 부지가 바로 '서쪽 땅'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무령왕릉 출토된 그의 묘지와 매지권에 의하면 523년 62세로 사망한 무령왕은 525년에 지금의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으며, 토왕(土王)과 토백(土伯)을 비롯한 각종 지하세계 신들에게 '돈 1만문'(錢一萬文)을 주고 신지(神地), 즉 서쪽 땅을 매입했다.

시라스 교수에 의하면,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유독 서쪽 방위만 표시하지 않은 것은 매지권에서 밝힌 대로 무령왕이 바로 서쪽 땅을 사서 매입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령왕 묘지는 무덤길 오른쪽(동쪽), 그 왕비 묘지는 왼쪽(서쪽)에 각각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중국 고대 동전 90여 개가 꾸러미 상태로 발견됐다. 왕과 왕비 묘지는 무덤방 바깥이 아니라 무덤방 안쪽에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놓아 두었다.

시라스 교수는 이런 배치는 525년에 무령왕이 먼저 매장되고 나서, 나중에 죽은 그 왕비를 529년에 합장(合葬)할 때 일어난 현상이라면서 "따라서 당연히 무령왕이 처음 묻혔을 때는 그 왕비 묘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령왕만 묻었을 때는 '십이간지 방위표'를 뒷면에 새긴 무령왕 묘지 판석과 매지권을 새긴 다른 판석(나중에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를 새김)은 1971년 발견 상태와 같이 왼쪽-오른쪽에 나란히 놓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포개 놓았었다"면서 "묘지나 매지권 등의 각종 문서 내용이나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묘지가 위, 매지권이 아래에 놓였음이 분명하며, 두 판석 중앙에 난 구멍은 무령왕릉 발견 당시에 발견된 오수전 꾸러미를 꿴 끈을 끼운 공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 참조)

이런 주장을 접한 고고학자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아무도 풀 수 없던 난제를 시라스 교수가 단칼에 풀었다"고 평가했으며, 돈황학 전공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은 "시라스 교수가 기존 한ㆍ일 고대사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투르판지역 고문헌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쌓은 학자이기에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주 교촌리전축분]

송고시간2018-06-07 10:11

백제 왕릉급 벽돌무덤, 80년만에 다시 출현(종합)

공주서 1939년 이후 재확인…길이 7m 석단 시설도 조사

[그래픽] 백제 왕릉급 벽돌무덤, 80년만에 다시 출현

공주 교촌리 전축분. [공주대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이후 80년 가까이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린 웅진도읍기(475∼538) 백제시대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시와 공주대박물관은 충남 공주시 교동 252-1번지 일원에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1939년 사이토 다다시(齊藤忠)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조사한 결과 미완성 무덤이라고 규정한 백제 교촌리 전축분을 다시 찾았다고 7일 밝혔다.

벽돌을 쌓아 만든 백제 전축분으로는 교촌리 전축분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이 있다.

 

공주 교촌리 전축분. [공주대박물관 제공]

 

교촌리 전축분은 무령왕릉처럼 터널형 구조를 갖춘 것으로 조사됐다.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은 가로 3m·세로 6.1m·높이 2m이며, 묘실은 가로 1.9m·세로 3.4m·높이 1.6m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연꽃무늬 벽돌을 사용한 무령왕릉과 달리 교촌리 전축분 벽돌에는 무늬가 없고, 벽돌을 가로로 쌓아 무덤을 조성했다"며 "이 무덤이 무령왕릉 축조를 위해 연습용으로 만든 미완성 무덤인지, 무령왕릉 이전에 조성한 왕릉급 무덤인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사진. [공주대박물관 제공]

 

그러나 조사단은 교촌리 전축분을 미완성 무덤보다는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시각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이 무덤은 1530년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공주) 향교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는 대목과 일치하고, 미완성 무덤이라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조사단 설명이다.

이 연구사는 "가루베 지온은 무덤 안에 점토가 있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미완성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이번 조사에서 전축분 주변에 본래 점토가 많고, 무덤길에 나무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령왕릉에 있는 창문 시설인 가창(假窓)은 없으나, 등잔 따위를 놓는 감실(龕室·움푹 판 구멍)이 있어 조심스럽게 해석하면 무령왕릉보다 이른 시기 왕릉급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교촌봉 정상 석축 단 시설. [공주대박물관 제공]

 

한편 공주대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조사에서 2호 전축분으로 명명한 유적은 벽돌무덤이 아니라 한 변 길이가 7∼8m인 네모꼴 석축 단 시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교촌봉 정상에 마련한 석축 단 시설은 교촌리 석실분에서 약 150m 거리에 있다. 이곳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연꽃무늬 벽돌이 출토돼 백제가 만든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용도는 구명되지 않았다.

석축 단 시설에서 나온 문양 전돌. [공주대박물관 제공]

 

이 연구사는 "교촌봉은 송산리보다 해발고도가 높아 정상에 오르면 백제 왕성 모습이 한눈에 보였을 것"이라며 "국가가 주관하는 의례나 제례 행사를 개최한 장소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교촌리 전축분과 석축 단 시설은 웅진도읍기 백제 왕도 경관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며 "두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추가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백제 왕릉급 벽돌무덤, 80년만에 다시 출현(종합) | 연합뉴스 (yna.co.kr)

 

백제 왕릉급 벽돌무덤, 80년만에 다시 출현(종합)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이후 80년 가까이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린 웅진도읍기(475∼538) 백제시대 전축분(塼築...

www.yna.co.kr

 

 

송고시간2018-05-16 21:03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 연합뉴스 (yna.co.kr)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웅진도읍기(475∼538) 백제 대형 사찰인 대통사(大通寺)터로 지목된 충남 공주 반죽동 주택부지가 보존된다.

www.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웅진도읍기(475∼538) 백제 대형 사찰인 대통사(大通寺)터로 지목된 충남 공주 반죽동 주택부지가 보존된다.

대통사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이 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 축조했다는 사찰로, 세계유산인 공산성·송산리 고분군과 함께 웅진도읍기 핵심유적으로 평가된다.

 

 

입력 2016.06.01 11:20

충주에서 4세기 백제 철 생산했다 (hankookilbo.com)

 

충주에서 4세기 백제 철 생산했다

 

m.hankookilbo.com

 

 

[공산성]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20.06.11. 09:00 수정 2020.06.11. 12:00 댓글 127

https://news.v.daum.net/v/20200611090008538

 

공주 공산성 출토 백제 옻칠갑옷 등 삼국시대 말갑옷 총출동

[경향신문]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함안 마갑총 말 갑옷(1992년)과 경주쪽샘지구 C10호의 말 갑옷(2009년), 그리고 웅진 백제의 도읍인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옻칠 말갑옷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

news.v.daum.net

 

 

입력 2019.05.06. 18:56 수정 2019.05.06. 20:06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https://news.v.daum.net/v/20190506185601611

 

'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660년 7월18일은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의 발굽 아래 스러졌던 날이다. 백제 최후의 날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은 어디였을까. 백제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로 점찍는 이들이 적지않을 듯하다.

news.v.daum.net

 

 

 

입력 2019.04.22 03:00 | 수정 2019.04.22 18:2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2/2019042200039.html

 

백제인가… 당나라인가… 공산성 옻칠 갑옷 국적 논란 끝날까

백제인가 당나라인가 공산성 옻칠 갑옷 국적 논란 끝날까 보존처리 후 60字 새로 밝혀져 인명·관직명 등 글자 전모 확인 공주대박물관측, 학회에서 발표

www.chosun.com

보존처리 후 60字 새로 밝혀져… 인명·관직명 등 글자 전모 확인
공주대박물관측, 학회에서 발표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18.08.28. 06:02 수정 2018.08.28. 09:50댓글 126

https://news.v.daum.net/v/20180828060229449

 

'공노(孔奴)'.. "백제인의 익살 담긴 공주 공산성 옻칠갑옷의 낙서였다"

[경향신문] ‘공노(孔奴)…’. 2011년 10월 공주 공산성을 발굴중이던 공주대박물관 조사단은 가죽에 옻칠한 갑옷(칠피갑옷) 미늘편과 함께 이 갑옷의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을 확인했다. 특히 ‘

news.v.daum.net

 

 

 

뉴시스 | 신진아 | 입력 2015.12.11 14:54 | 수정 2015.12.11 14:57

http://media.daum.net/life/living/tips/newsview?newsId=20151211145442133 

 

백제 관청건물 31동 발굴했다, 공주 공산성

【서울=뉴시스】신진아 기자 =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서 백제시대 관청 건물군이 확인됐다. 문화재청, 충청남도, 공주시는 공주대학교박물관과 함께 11일 오후 4시 공주시 산성동 공산성에서 제8

news.v.daum.net

 

 

 

입력 2015.12.11. 03:30 수정 2015.12.11. 08:08 댓글 90

http://v.media.daum.net/v/20151211033007623

 

[사진] 1400년 전 백제 사다리

충남 공주시 공산성 제8차 발굴 조사 현장에서 1400여 년 전 백제인이 쓰던 사다리가 발견됐다고 10일 문화재청이 밝혔다. 못을 쓰지 않고 만든 6m 길이의 사다리는 백제시대 관청 추정 건물터의

news.v.daum.net

 

 

 

입력 2014.09.23. 07:54 수정 2014.09.23. 08:24 

http://v.media.daum.net/v/20140923075408652

 

공산성 출토 백제 갑옷과 무기류

(공주=연합뉴스) 웅진 도읍기 백제시대 왕성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공주 공산성 저수시설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갑옷과 무기류. 2014.9.23 << 문화부 기사참조, 공주대박물관 제공 >>taeshik@yna.co.kr(끝)[

v.daum.net

 

 

 

입력 2014.09.23. 07:54 수정 2014.09.23. 08:24 댓글 0

http://v.media.daum.net/v/20140923075408651

 

공산성서 백제 목곽창고 발견

(공주=연합뉴스) 웅진 도읍기 백제시대 왕성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공주 공산성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목곽고(木槨庫). 2014.9.23 << 문화부 기사참조, 공주대박물관 제공 >>taeshik@yna.co.kr(끝)[이 시각

v.daum.net

 

 

 

조남용 기자 | 기사입력 2014/09/24 [01:17]

공주 공산성 지하에서 백제가 깨어나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공주 공산성 지하에서 백제가 깨어나다

[플러스코리아타임즈조남용기자]문화재청(청장나선화),충청남도(도지사안희정),공주시(시장오시덕)는공주대학교박물관(관장이남석)과함께공주공산성

www.pluskorea.net

공주 공산성 지하에서 백제가 깨어나다

백제 시대 완전한 형태의 대형 목곽고와 깃대꽂이 최초로 발굴

 

 

 

조남용 기자 | 기사입력 2014/04/01 [11:02]

공주 공산성의 백제 시대 판축성벽, 최초로 확인되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공주 공산성의 백제 시대 판축성벽, 최초로 확인되다

공주공산성의백제시대판축성벽전경©조남용기자[플러스코리아타임즈-조남용기자]문화재청(청장나선화),충청남도(도지사안희정),공주시(시장이준원

www.pluskorea.net

공주 공산성의 백제 시대 판축성벽, 최초로 확인되다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명

 

 

[사비(부여) 도읍기(538~660)]

입력 : 2018-07-04 21:06:51 수정 : 2018-07-04 21:06:50

부여 능산리 고분군서 용문양 금제 장식 출토 | 세계일보 (segye.com)

 

부여 능산리 고분군서 용문양 금제 장식 출토

일제강점기 조사 이후 약 100년 만에 다시 발굴한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 내 서쪽 고분군에서 용 문양이 들어간 작은 금제 장식(사진)이 출토됐다.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와 부여군

www.segye.com

 

 

 

 

손영옥 선임기자입력 2018. 7. 4. 20:50수정 2018. 7. 5. 21:28

'능산리 고분군' 100년 만에 재발굴 (daum.net)

 

'능산리 고분군' 100년 만에 재발굴

백제 사비기(538∼660) 유적인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대한 재발굴이 일제강점기 때 첫 조사 이후 100년 만에 이뤄졌다. 광복된 지 73년이 지났지만 사비 도읍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v.daum.net

 

 

김예나입력 2024. 2. 27. 10:05

백제의 '마지막' 흔적일까…부여 관북리 유적서 옻칠 갑옷 확인 (daum.net)

 

백제의 '마지막' 흔적일까…부여 관북리 유적서 옻칠 갑옷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백제 사비 도읍기(538∼660) 왕궁터로 거론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옻칠한 갑옷의 흔적이 확인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7일 "관북리 유적 내 왕궁 시

v.daum.net

 

 

도재기 기자입력 2023. 12. 1. 14:11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daum.net)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 시기(538~660) 왕궁터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길이 60m 이상의 대형 건물터 등이 확인됐다. 대형 건물터는 특히 장랑식 건물터(궁궐에서 중심 건물

v.daum.net

 

 

 

2015-11-11 10:47

부여 백마강변 일원서 백제·조선 얼음창고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부여 백마강변 일원서 백제·조선 얼음창고 발견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충남 부여 백마강변 구드래 일원과 서나성에서 각각 백제시대와 조선시대 얼...

www.yna.co.kr

백제시대 빙고는 한성(서울) 도읍기에는 충남 연기 나성리에서, 뒤이은 웅진(공주) 도읍기에는 공주 정지산유적에서 발견됐지만, 사비(부여) 도읍기(538~660)의 빙고가 발굴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부여군과 백제고도문화재단이 지난 4월부터 발굴 조사 중인 부여읍 구드래 일원(명승 제63호)과 서나성(사적 제58호)에서 “백제 시대와 조선 시대의 빙고를 확인했다”며 “12일 부여읍 구교리 발굴현장에서 유적 설명회를 연다”고 11일 밝혔다.

 

 

윤슬빈 기자 입력 2021. 07. 02. 09:33 댓글 1

부여 응평리 일원에서 백제 무덤 긴급발굴조사 진행 중

https://news.v.daum.net/v/20210702093359339

 

도굴 안된 백제 귀족 무덤서 인골·금동 귀걸이 확인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충남 부여 응평리 일원에서 도굴되지 않은 백제 사비기 귀족 무덤에서 인골 2개(두개골)와 금동 귀걸이 등을 확인했다고 2일 밝혔

news.v.daum.net

 

 

 

벽체 심벽(心壁) 추정 목탄 흔적 발견
기와류, 각종 토기 등 출토

https://www.nocutnews.co.kr/news/5210635

 

부여 화지산 유적서 사비 백제시대 건축 양식 확인

사비 백제시대의 중요 유적이자 사적 425호로 지정된 충남 부여 화지산 유적에서 당시 건축 내부 양식이 확인됐다. 앞서 이곳에서는 백제 사비 건물지의 흔적이 실제로 확인되기도 했다. 9일 부

www.nocutnews.co.kr

 

 

이수지 입력 2019.07.11. 14:36 댓글 85

https://news.v.daum.net/v/20190711143643341

 

부여 화지산 유적, 사비백제 초석 건물지·계단식 대지 확인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부여 화지산 유적에서 백제 사비 시기 초석 건물지와 대지 조성시설이 나왔다. 부여군과 백제고도문화재단이 2월부터 발굴 조사한 사적 제425호 '부여 화지산유적

news.v.daum.net

 

 

 

입력 2017.12.26. 09:36 수정 2017.12.26. 11:51댓글 13

'이궁 추정' 부여 화지산서 사비백제 건물지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이궁 추정' 부여 화지산서 사비백제 건물지 발견 | 연합뉴스

4차 조사서 대지조성시설도 확인…"내년부터 정밀조사"

www.yna.co.kr

 

 

 

입력 2016. 10. 11. 13:10

입력2018.12.10 11:18 수정2018.12.10 11:18

예산 산성서 백제 지방 산성 첫 대형 석벽 건물지 발견 | 한국경제 (hankyung.com)

 

예산 산성서 백제 지방 산성 첫 대형 석벽 건물지 발견

예산 산성서 백제 지방 산성 첫 대형 석벽 건물지 발견, 문화스포츠

www.hankyung.com

 

 

 

등록 :2018-08-19 14:05수정 :2018-08-19 21:00

중국인이 왜? 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중국인이 왜? 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전형적인 중국계 무덤입니다. 여기 살던 토착세력의 것들이 아닙니다.” 백제 고고학 전문가인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무덤 내부를 보고 한마디했다. 주변의 학자들은 고민스런 표정으로 고개

www.hani.co.kr

 

[익산]

 

[익산 왕궁리유적]

김춘상 기자입력 2020. 1. 6. 11:49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55년 만에 익산 품으로 (daum.net)

국립익산박물관 10일 개관..11일부터 특별전시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석탑 1층 심주석의 사리구멍 발견 당시 상황.(국립익산박물관 제공) /© News1

(익산=뉴스1) 김춘상 기자 = 전북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가 55년 만에 익산의 품으로 돌아온다.

 

국립익산박물관(관장 신상효)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볼 수 있는 특별전시회 '사리장엄 탑 속 또 하나의 세계'를 박물관 개관 이튿날인 11일부터 3월29일까지 연다고 6일 밝혔다.

이 사리장엄구는 1965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보수를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됐다.

기단부 윗면에 品(품)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 광배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1구와 불교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요령(靑銅搖鈴) 1개가 나왔고,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나왔다. 또 다른 구멍은 비어 있었다.

금제 사리내합·유리제 사리병·주칠 금동제사리외함(국립익산박물관 제공) /© News1

 

1층 지붕돌 윗면 중앙에 뚫려 있는 2개의 구멍에서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덮여 있는 녹색 유리사리병과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겨 책처럼 2개의 금줄로 묶은 도금 은제 금강경판(鍍金銀製金剛經板)이 각각 발견됐다.

사리장엄구는 이듬해인 1996년 7월에 국보 제123호로 지정됐다. 2000년대 이후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리장엄구 중 녹색 유리병과 금제 연화문받침, 그것을 담고 있는 금제 사리내합은 사리를 봉안하는 장엄구 일괄품으로,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도금은제금강반야바라밀경판(국립익산박물관 제공) /© News1

 

특히 금강경판으로 불리는 유물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자료다. 발견 당시 "깨끗하고 눈부신 19매의 금판은 유례없이 정교한 타출(打出)기법을 보여줘 우리나라 공예사 연구에 새로운 기점이 되고, 인쇄 문화의 새로운 연구 자료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근 금강경판 복원 실험 결과 원판(原版)에 경전의 글자를 반대로 새긴 후 원판 위에 은판을 놓고 망치로 두드려 글자를 양출(陽出)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원판이 상하지 않는 한 여러 개의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금동제 경한내함·도금은제금강반야바라밀경판·주칠 금동제 경판외함(국립익산박물관) /© News1

 

이들 유물은 그동안 전국에 있는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가 국립익산박물관이 문을 열게 되면서 익산으로 돌아오게 됐다.

국립익산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시회를 관람객들이 금강경판의 내용과 제작기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국립익산박물관 개관식은 10일 정헌율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다.

신상효 관장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백제를 계승한 대표적인 사리장엄구이자 고대 인쇄 기술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문화재로서 국립익산박물관에서 꼭 봐야할 전시품"이라고 말했다.

mellotron@news1.kr

 

 

조수정 입력 2018.07.12. 08:44 

https://news.v.daum.net/v/20180712084459137

 

백제문화유산주간-익산 왕궁리유적

【익산=뉴시스】조수정 기자 = 백제문화유산주간인 11일 오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왕궁리유적 5층석탑의 모습. 왕궁리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제408호다. 백제문화유산주간은 백제

news.v.daum.net

 

 

 

입력 2009. 3. 23. 18:23수정 2009. 3. 23. 18:23

2005년 "사리장엄구는 백제유물" 주장한 한정호씨 "왕궁리 5층석탑도 백제탑" (daum.net)

"학계의 통일신라 말∼고려초기 건립설은 잘못"석탑해체 보수성과통해 드러난 구조 비교설명

"왕궁리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백제 것이라는 것을 100% 확신했습니다. 당시 파격적인 주장이었지만 저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한정호(39·사진) 동국대 경주캠퍼스박물관 연구원은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가 백제 유물이라는 주장을 2005년에 한 학술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당시 통설은 사리장엄구가 8∼10세기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됐다는 것이었기에 그의 주장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한 연구원의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대세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639년 백제 무왕시대에 제작됐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은 미륵사 사리장엄구는 왕궁리 사리장엄구와 흡사하다. 따라서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백제 유물이라는 것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백제인이 300년을 더 살았다면 모를까 백제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유물이었습니다. 백제 금속공예는 유려함과 정교함이 특징입니다. 또 백제 사리기는 순금이 많이 사용됐다는 특징이 있어요. 신라가 사리기에 순금을 사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리신앙이 삼국시대 유행한 것으로 볼 때 왕궁리 사리장엄구가 백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위)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등 백제 유물.

 

한 연구원은 이번엔 왕궁리 석탑 자체도 백제탑이라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지난 21일 열린 신라사학회와 국민대 공동 학술대회에서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왕궁리 석탑도 석탑 구조에 있어 목탑을 바꾼 게 아니라 원래 백제 석탑인 게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왕궁리 5층석탑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시대 말∼고려 초기에 백제시대 목탑이 있던 곳을 뜯어내고 현재의 석탑을 세웠으며, 그 양식에서 백제 전통을 따랐다는 이른바 '백제계 석탑설'이 학계에서 통용돼 왔다. 한 연구원은 "미륵사지 석탑 사리 봉안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이 아니라 '백제의 석탑'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궁리 5층석탑이 백제의 석탑이라는 근거는 바로 석탑 내부구조에 있다"면서 "1965년 석탑 해체 보수 당시 드러난 석탑기단 내부의 구조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내부구조를 그대로 축소한 백제 석탑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궁리 5층석탑을 백제시대 유산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제기한 적이 있지만, 한 연구원은 미륵사지 서탑 해체 보수 성과를 통해 드러난 구조를 서로 비교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현재 부여에 있는 탑을 연구 중이다. 이 탑 역시 백제 탑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올 하반기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현재 백제탑으로 알려진 것은 미륵사지 탑과 정림사 5층 석탑밖에 없다"며 "왕궁리 석탑과 지금 연구 중인 부여 탑도 백제 것이라고 판명된다면 백제시대부터 이후까지 탑의 변형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입력 2009. 1. 28. 06:52수정 2009. 1. 28. 09:30

 

639년 미륵사 장엄구와 "똑같아"(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 한정호(39) 연구원은 지난 19일 익산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가 공개된 직후, 현장을 다녀온 다른 연구자들에게서 "축하한다"는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한 연구원은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을 해체하다가 발견한 사리장엄구가 8-10세기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기 유물이라는 통설을 거부하면서, 백제시대 유물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2005년 10월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발간한 학술잡지인 '불교미술사학' 3집에 투고한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사리장엄구의 편년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이 사리장엄구는 제작기법이나 양식으로 보아 백제시대 작품임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한 연구원이 전화를 여러 통 받은 이유는 3년여 전에 제기한 그의 주장이 미륵사 사리장엄구가 공개됨으로써 '사실'로 판명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미륵사 사리장엄구를 현장에서 본 불교미술사 전문가 대부분도 왕궁리 석탑 사리장엄구를 둘러싼 논란, 즉 그 제작시기가 백제시대인지 아니면 종래 통설처럼 8-10세기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이제는 풀렸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1천3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639년 무렵의 백제 무왕시대에 제작됐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은 미륵사 사리장엄구는 여러 모로 왕궁리 사리장엄구와 흡사했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현장에서는 "(왕궁리 사리장엄구와) 비슷하긴 한데, 여전히 고려초기 흔적이 있는 듯하다"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불과 며칠만에 이런 짐작을 수정하고는 "백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연구소로 돌아가 차분히, 그리고 면밀히 두 사리장엄구를 비교할 결과 "같은 장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될 만큼 문양의 종류라든가 그것을 제작, 배치하는 기법이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비교 대상은 미륵사 사리장엄구 중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왕궁리 사리장엄구의 금제 사리내함(舍利內函).

 

높이 13㎝, 어깨 폭 7.7㎝인 미륵사 금제 사리호는 넓적한 구연(口緣.아가리) 위로 보주형(寶珠形) 꼭지가 달린 뚜껑과 긴 목, 둥근 어깨를 지닌 몸통으로 구성된다.

뚜껑과 목, 그리고 바닥에는 연꽃잎을 넣었고, 몸통에는 인동초와 당초문을 배열했으며, 그 여백에는 어자문(魚子文)이라는 물고기 알 모양 문양을 촘촘히 넣었다. 바닥에 가까운 몸통 바깥을 둘러가면서는 이파리 3개가 난 연꽃잎을 일정하게 배치했다.

이와 거의 똑같은 문양은 왕궁리 석탑의 사리내함 뚜껑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이파리 3개가 난 연꽃잎과 어자문은 미륵사 사리호의 그것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한다는 것이 강 소장의 지적이다.

한편 한 연구원에 앞서 불교미술 전공인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도 왕궁리 5층 석탑이 양식으로 보아 백제석탑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적이 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taeshik@yna.co.kr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Copyright©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입력 1995. 11. 17. 11:30수정 1995. 11. 17. 11:30

 

성도현 입력 2021. 04. 01. 09:16 댓글 1

익산 쌍릉 소왕릉 재정비…훼손 지형 복구·탐방로 개설해 공개 | 연합뉴스 (yna.co.kr)

 

익산 쌍릉 소왕릉 재정비…훼손 지형 복구·탐방로 개설해 공개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문화재청은 전북 익산시와 백제왕도 핵심 유적 보존·관리사업의 일환으로 이달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소왕릉 ...

www.yna.co.kr

 

 

입력 2019.09.19. 09:06 댓글 31

석실 앞·봉분서 각각 확인.."정밀조사에도 글자는 안 나와"
"국내 첫 사례로 무덤 수호 의미 추정..피장자 단서 없어"

익산 쌍릉 소왕릉서 1m 넘는 백제 묘표석 2점 발견 | 연합뉴스 (yna.co.kr)

 

익산 쌍릉 소왕릉서 1m 넘는 백제 묘표석 2점 발견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 무왕(재위 600∼641)에 얽힌 고대 설화 '서동요' 주인공인 선화공주 무덤으로 추정된 익산 쌍릉 소왕...

www.yna.co.kr

 

 

 

송고시간 | 2018/04/24 06:00

학계·지자체 "무덤 내부 공개하는 현장박물관 만들어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23/0200000000AKR20180423187200005.HTML?input=1179m 

 

익산 쌍릉, 발굴 뒤엔 어떻게 하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00년 만에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백제 고분 '익산 쌍릉'(雙陵·사적 제87호)의 사후 보존·활용 방안이 관...

www.yna.co.kr

 

 

 

입력 2016.01.26. 10:25 댓글 39국내 最古 위금 직물·금송 나무베개 등도 나와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 치아 4점 출토 | 연합뉴스 (yna.co.kr)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 치아 4점 출토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백제시대 무덤인 익산 쌍릉 대왕묘에서 성인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4점이 나왔다.

www.yna.co.kr

 

 

 

[나주 송제리고분]

입력 2019. 7. 25. 09:16수정 2019. 7. 25. 14:35

마한 심장부의 생뚱맞은 백제고분 주인공은 성왕이 '담로'에 파견한 왕족?

이기환 선임기자

[경향신문]

나주 송제리고분 돌방에서 수습한 은제관식과 하단 고정 못. 6세기 전반 백제 중앙정부가 하사한 복식(옷과 장식)인 것으로 추정된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인가.’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관(독널)을 묻은 묘제를 일컫는다. 옹관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인 마한의 문화권임을 상징하는 묘제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형옹관의 핵심분포권인 반남고분군 인근에 옹관과는 어울리지 못한 고분이 버티고 있다.

돌방 평면과 유물 출토 상황. 도굴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 최상위급 무덤에서 나오는 최상급의 유물이 세트로 출토됐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전혀 어울리지못한 고분

영산강 지류인 금천과 만나는 전남 나주 세지면 송제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이른바 송제리 고분이다. 예부터 ‘동산’이니 ‘고려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1987년 도굴을 당한 채로 발견됐다. 하지만 1999년 실측조사로 무덤의 형태를 살펴보니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이었다. 천장은 궁륭형(활이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태)이었다. 이것은 마한의 핵심지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백제식 무덤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만약 마한인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반남고분군의 영역 내에 무덤을 조성해야 한다. 그런데 송제리 고분은 마한인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도 외톨이처럼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에서 출토된 은제 관식, 은제 허리띠 장식, 은피 관못, 청동제 잔 등. 청동제 잔과 은장도 등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똑같을 정도로 수준이 뛰어났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학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형적인 백제고분이 ‘마한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왜 어울리지 못한 모습으로 조성됐을까. 무덤은 5세기 것인가, 6세기 것인가. 백제가 직접 파견한 관리의 무덤인가. 아니면 백제 중앙의 간접지배를 명받은 토착 마한 수장의 무덤인가. 이 고분의 축조배경과 시기, 성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돌방 출토 은제 허리띠 장식(교구, 허리띠 끝장식) 앞뒷면이다.|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제 왕릉급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1월부터 고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미 무자비한 도굴을 당한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조사해본 결과 놀랄만한 성과를 얻어냈다. 지름 20m, 높이 4.5m의 돌방무덤에서 은제관식(은으로 제작한 관 장식)과 은제 허리띠장식, 은제 관못, 관고리, 청동제 잔, 호박 옥 등과 토기편 20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전용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25일 “무덤의 주인공이 6세기 전반에 걸쳐 백제 중앙의 복식(옷과 장신구)을 받았던 증거”라고 밝혔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물의 구성을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제품의 관식과 허리띠 장식 등 최고급 백제유물이 세트로 현현했습니다. 무엇보다 허리 부근에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똑같은 은장도(손잡이 끝부분과 칼집장식 출토)가 보였습니다. 또 청동잔 역시 무령왕릉에서 나온 청동잔 5점과 똑같았습니다. 무령왕릉 것과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은장도와 청동잔으로 보였습니다.”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 토기편.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나온 그릇받침을 연상시킨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한상 교수는 “526년 승하한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되는 공주 정지산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그릇받침 등과 거의 똑같은 토기들이 보였다”고 덧붙였다. 무령왕릉과 무령왕비의 빈전(정지산)에서 쏟아진 유물과 비슷한 등급이라면 무슨 뜻인가. 이한상 교수는 “유물의 구성상 왕이나 왕비, 왕족에 비길 수 있는 높은 신분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교수는 “송제리 고분에서 출토된 은장도는 무령왕릉 조성시기(523~525년)와 비슷하고, 허리띠는 무령왕릉 조성시기~부여 능산리 사지 조성시기(567년)보다는 앞선다”고 보았다. 이교수는 “따라서 송제리 고분은 523(무령왕 승하)~567년(능산리 사지 조성) 사이의 공백기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 하트형 과판의 앞 뒷면과 연결고리이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주목되는 백제 성왕

그렇다면 송제리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누구일까.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최성락 목포대 교수는 “반남고분군 등 재지세력의 무덤과 떨어진 곳에 홀로 조성된 백제식 고분이 아니냐”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의 무덤은 아닐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지에서 호흡을 나눈 토착세력이라면 나주 복암리 고분이나 반남고분에서처럼 한 곳에 무덤들을 계속 조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제리 고분은 반남고분과 신촌리 고분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고 외롭게 서있다.

최 교수는 또 “신촌리 고분 등에서 박혀있는 원통형 토기가 송제리 고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서 “재지적인 전통이 없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 국왕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이 아닐까. 그래서 재지세력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 것이 아닐까. 혹은 높은 신분을 과시하며 독야청청한 것일 수도 있다.

1980년대 도굴된채 발견된 나주 송제리고분. 그래도 발굴결과 무덤방 바닥에서 6세기 백제의 지방지배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국립나주문화재 연구소 제공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뒤를 이은 성왕(재위 523~554)을 주목한다.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은제관식’이야말로 이번 발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을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의 ‘대표 유물’은 ‘은화관식’(은으로 만든 꽃모양의 관 장식)이다. 전형적인 은화관식은 사비백제 시기(538~660)의 고분인 나주 복암리 고분과 흥덕리 고분 등을 비롯, 충남 논산과 부여, 전북 익산·남원, 그리고 경남 남해 등에서 총 13점 출토된 바 있다.

은화관식은 사비 천도(538년)를 단행한 성왕이 정비한 담로제에 따라 파견된 백제 지방관(6품인 나솔 이상의 고위관료)이 이마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알려져있다. 은화관식은 은판을 접어서 상단은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1쌍이나 2쌍으로 대칭하고 하단은 특수하게 제작된 틀에 꽂아 고정하는 형태로 제작된다.

나주 송제리 고분. 송제리 고분은 마한의 핵심지역인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백제 돌방무덤이다. 6세기 전반 백제중앙 정부가 파견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은화관식과 은제관식의 차이

물론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전형적인 은화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가운데 대가 있는 것은 은화관식과 같지만 양쪽에 꽃과 같은 장식은 없고 세 개의 가지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재질(은제품)과 제작기법(좌우 대칭과 은판을 오린 다음에 접어 만든 기법)에서 ‘은화관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은제관식’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이런 은제관식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은제관식의 은판은 고정못을 박도록 했는데, 이것은 천으로 끼우도록 한 은화관식 보다는 고식(古式)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은제관식은 백제중앙정부가 지방 지배를 위해 파견되는 지배층에게 하사한 ‘은화관식’의 과도기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무덤의 조성시기를 웅진백제(475~538) 말기와 사비백제(538~660) 초기, 즉 500~550년 사이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사비천도를 단행하고 담로제를 정비한 성왕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돌방에서 출토된 호박제 관옥.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유물이 나왔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따라서 나주 송제리 고분의 주인공은 성왕이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왕자나 왕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경우 성왕이 정비한 ‘담로’를 다스리던 왕자나 왕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영산강 유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재지세력의 수장을 백제의 왕족급으로 극진하게 예우해준 사례일 수도 있다. 이한상 교수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만약 백제 왕족이었다면 죽고나서 원래의 본거지(웅진이나 사비)로 돌아가 묻히지 않았겠느냐”고 보았다.

충남 부여 능산리 36호묘에서 확인된 전형적인 모습의 ‘은화관식’. 백제가 나솔(6품) 이상의 고위관료에게 내려준 위세품이다.|사진출처:오은석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논문 ‘백제 ‘銀花冠飾’의 기능과 의미‘에서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가야와 신라지역과 교류한 증거라 할 수 있는 발걸이(등자·등子)와 안장 고정구가 출토됐다. 발걸이는 철제로 발을 딛는 부분이 세장방형으로 갈라져 있고, 그 윗면에는 방형의 요철이 연속되는 형태이다. 안장 고정구(안장과 말의 가슴 부위를 가죽끈으로 연결해주는 장치)는 원형 철판 중앙에 교구(고정장치)가 부착된 형태이다. 임승경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런 형태의 유물은 의령 경산리와 진주 옥봉 고분군 등 가야와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바 있다”고 밝혔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Copyright©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한 심장부의 생뚱맞은 백제고분 주인공은 성왕이 '담로'에 파견한 왕족?

[경향신문] ‘마한의 심장부에 웬 생뚱맞은 백제지배층의 무덤인가.’ 3~6세기 전반 영산강 유역의 독특한 문화가 ‘옹관 무덤’이다.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올린 뒤 그 속에 여러 개의 옹

v.daum.net

 
 
 

 

남해군서 신라 아닌 백제 무덤 발견

등록 :2014-01-09 20:27

남해군서 신라 아닌 백제 무덤 발견 : 전국일반 : 전국 : 뉴스 : 한겨레 (hani.co.kr)

 

남해군서 신라 아닌 백제 무덤 발견

남치리 분묘군 1기 귀족묘로 추정 “기존영토 재논의 필요한 새 근거”

www.hani.co.kr

 

 

청주 신봉동 고분군서 석곽묘 3기 첫 발굴

이성기 입력 2013.12.24. 10:31 수정 2013.12.24. 10:31 댓글 0

http://v.media.daum.net/v/20131224103110522

 

청주 신봉동 고분군서 석곽묘 3기 첫 발굴

【청주=뉴시스】이성기 기자 =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고분군에서 백제시대 석곽묘 3기가 처음으로 발견됐다.청주시는 이 같은 내용의 신봉동 고분군 7차 발굴 결과를 24일 발표했다.신봉동

news.v.daum.net

 

 

백제 금동신발 출토된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김운협 입력 2013.08.12. 16:22 수정 2013.08.12. 16:22 댓글 0

http://v.media.daum.net/v/20130812162215572

 

백제 금동신발 출토된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전주=뉴시스】김운협 기자 = 12일 전북대학교 박물관은 남원시 의뢰를 받아 5월부터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가운데 대형분에 속하는 32호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금동신발과 청동거울, 장

news.v.daum.net

 

 

전북 남원서 백제 청동거울 출토

김운협 입력 2013.08.12. 16:22 수정 2013.08.12. 16:22 댓글 3

http://v.media.daum.net/v/20130812162216575

 

전북 남원서 백제 청동거울 출토

【전주=뉴시스】김운협 기자 = 12일 전북대학교 박물관은 남원시 의뢰를 받아 5월부터 남원 두락리·유곡리 고분군 가운데 대형분에 속하는 32호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금동신발과 청동거울, 장

news.v.daum.net

 

 

용인 할미산성서 백제 원형 구덩이 다수 확인

입력 2012.12.18. 10:24 수정 2012.12.18. 10:24 댓글 0

"성벽은 신라가 축조한 듯..6-7세기 유물 다량"

용인 할미산성서 백제 원형 구덩이 다수 확인 | 연합뉴스 (yna.co.kr)

 

용인 할미산성서 백제 원형 구덩이 다수 확인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기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에 소재하는 고대성곽인 할미산성에서 백제시대 원형 구덩이 6기가 발견됐다.

www.yna.co.kr

 

 

 

연합뉴스

지하궁전형 백제 횡혈식 석실분 또 출현

2008년 1월 4일 (금) 11:35 

 

판교신도시 예정지..고구려 고분도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에서 발견된 지하궁전을 연상케 하는 한성도읍기 백제시대 횡혈식 석실분과 거의 똑같은 구조를 한 같은 한성시대 백제고분이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 신도시 예정지에서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또 고구려 고분 3기도 함께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도시 개발을 맡고있는 한국토지공사 의뢰로 판교지구를 발굴 중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조사연구단(단장 정재훈)은 4일 현재까지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삼국시대 고분군, 조선시대 주거지와 분묘 등 각종 유적 120기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중 16구역에서는 한성시대 백제 횡혈식 석실분 6기가 무더기로 발견돼 이 중 4기에 대한 발굴이 완료됐다.

이 석실분들은 햇볕이 잘 드는 구릉 남쪽 경사면에 등고선 방향과 엇갈린 방향으로 암반을 굴착한 다음, 길이와 폭 각각 2m 안팎인 방형(方形) 현실(玄室.널방)을 만들고 그 위에 봉분을 쌓는 형태를 보였다. 현실 네 벽면은 깬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아올렸으며, 양쪽 벽면은 가운데 부분이 바깥으로 약간 벌어짐으로써 위에서 내려다 볼 때는 마치 배 모양을 연상케 한다.

이 중 한 곳에서는 은제 가락지와 팔찌를 비롯한 장신구가 출토됐으며, 도굴로 인해 수량은 많지 않지만 한성도읍기 백제 양식의 토기류가 여러 무덤에서 출토됐다.

조사단은 "축조방식과 출토 토기로 볼 때 이 석실분들이 조성된 시기가 한성도읍기 말기인 5세기 초-중기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된 석실분은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고고환경연구소가 최근 발견한 초대형 횡혈식 석실분과 비교할 때 규모만 작을 뿐, 네 벽면을 축조한 방식이라든가 축조시기, 출토 유물 등이 거의 똑같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성시대 횡혈식 석실분은 그동안 그 중심지인 서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만 더러 발견되다가 지난 2005년 세종대박물관이 조사한 경기 하남시 광암동 산 21번지 일원에서 서울 인접지역에서는 처음으로 2기가 확인된 바 있다.

이번 판교신도시 예정지 석실분은 하남에 이어 서울 인접지역에서 두 번째로 확인된 한성도읍기 고분으로 기록됐다.

숭실대 최병현 교수는 따라서 이번 발굴은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등장 시기나 장소, 그 변천양상 등을 구명하는 데 매우 획기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신도시 예정지 19구역에서는 총 3기에 이르는 고구려, 혹은 그런 전통이 농후한 고분이 발견됐다. 이 중 2기는 봉분을 나란히 이어 붙인 이른바 쌍분(雙墳) 형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고분들은 현실 네 벽면 모서리 각을 죽이되 천장으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게끔 축조한 궁륭형(穹隆形)으로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 스타일로 평가된다.

이런 고분이 한강 이남에서 발견되기는 이 역시 두번째. 앞서 지난해 4월 한양대문화재연구소는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901-3번지 일대 개인주택 신축예정지에서 이번 판교 신도시에서 발견된 것과 거의 똑같은 고분 2기를 발굴하고, 그 구조와 흑색마연퇴를 비롯한 출토유물 등을 들어 고구려 고분이 틀림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문화재보호재단 조사단은 지난달 14일 학계 인사들만 초청한 가운데 개최한 발굴지도위원회에서 "바닥에서 철도자(작은 쇠칼) 1점이 출토되었을 뿐 조영(축조) 시기를 추론할 수 있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고 했을 뿐, 보정리 고분과의 연관성이라든가, 고구려 고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고구려 고분들은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고분군 발견 지역의 보존 문제가 심각히 거론되기 시작했다.

최병현 교수는 "중요한 유적이 개발논리에 밀려 자꾸 파괴되는가 하면, 조사가 끝난 유적은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박물관 같은 데로 옮겨 복원을 하면 된다는 주장이 학계 일각에서 공공연히 제기되는 것은 개탄스럽다"면서 "같은 논리대로라면 발굴을 끝내고 '빈껍데기'만 남은 공주 무령왕릉이나 경주 천마총, 혹은 황남대총 같은 유적은 왜 보존했느냐"고 반문했다.

용인 보정리 고구려 고분 2기는 보존이 결정돼 그 유적을 파괴하지 않는 조건에서 건축허가가 났다.

 

 

연합뉴스

<키 84㎝ 장독과 47㎝ 시루가 증언하는 백제>

2007년 12월 4일 (화) 06:42

 

 

한신대박물관 '한신고고학발굴 16년' 도록 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신대박물관은 한신대라는 특정 대학의 부속기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대학박물관이 그렇듯이 이 박물관 역시 출발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만우관이라는 대학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 개관한 때가 1991년. 그 이듬해 한신대박물관은 국립광주박물관이 주도하는 무등산 금곡동 제철유적 발굴에 참가하면서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던 한신대박물관이 1998년 이후에는 한국고고학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게 된다. 서울 송파동 소재 초기 백제 중요 유적지인 풍납토성 일대 발굴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9년 이후 이듬해 초까지 진행한 풍납토성 내부 경당지구 발굴조사는 한국고고학의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건으로 꼽힌다.

1천여 점에 달하는 기와, 중요한 창고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열쇠, 장신구 일종인 유리를 제작하던 거푸집처럼 일반 취락에서는 나올 수 없는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가 하면, 종묘(宗廟)와 같은 대규모 제사건물터가 위용을 드러내면서 풍납토성이 이미 오래 전에 그 터를 잃어버린 백제 초기 수도 도읍 하남위례성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 길이 9.6m, 폭 7.1m 가량 되는 평면 마름모꼴인 '101호 유구'라는 경당지구 유적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말ㆍ멧돼지ㆍ소ㆍ사슴ㆍ곰 등의 동물뼈, 고대 중국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直'(직)이라는 글자를 새긴 전돌(벽돌) 등과 함께 높이 84㎝, 입지름 73.8㎝에 이르는 초대형 '장독'인 대옹(大饔)이 발굴되기도 했다.

어깨 부근을 둘러가며 톱니바퀴를 닮은 거치문(鉅齒文)을 한 줄로 넣은 이 대옹은 나팔처럼 아가리를 바깥으로 벌린 모습이다.

한성도읍기 백제시대의 이런 대옹은 최근 들어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1년 경기도박물관이 조사한 경기 포천 자작리 유적 중 길이 23.6m, 폭 13.2m에 이르는 평면 凸자형 백제시대 집터에서는 높이와 아가리 및 몸통 지름이 각각 ▲86 x 64 x 64㎝ ▲88 x 64 x 68㎝ ▲91 x 61 x 61㎝에 이르는 대옹 3점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자작리 출토품과 비교해 풍납토성 경당지구 대옹은 키가 2-7㎝ 가량 작지만, 입지름은 지금껏 발굴된 백제시대 대옹 중 단연 최대를 자랑한다.

같은 경당지구 유적 중 길이 13.5m, 폭 5.2m, 깊이 2.4m 이상 되는 대형 구덩이인 9호 유구에서 파편 상태로 출토되었다가 완형으로 복원된 시루 또한 '덩치'가 만만치 않다. 입지름 47㎝에 이르는 이 대형 시루는 양쪽에 길쭉한 손잡이가 달렸으며, 그 바닥에는 한가운데 마련한 둥근 구멍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가며 반달 모양 구멍 4개를 뚫어 놓음으로써 그 기능이 시루였음을 명백히 한다. 이처럼 큰 시루 또한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보기 드물다.

풍납토성 이전 한신대박물관이 손댄 유적 중에는 1995-96년에 조사한 경기 용인 풍덕천동 수지(水枝) 백제 마을유적이 주목을 끈다. 신봉천이 형성한 선상지에 자리한 이 마을 유적에서는 움집터 6기와 대소형 구덩이 12곳 등이 발굴됐다.

4-5세기 백제인이 남긴 이 유적 중 한 곳에서 발견된 타원형 토기 내부에는 쇳물을 부어 만든 주조(鑄造) 괭이와 꺾쇠 등 22점에 이르는 각종 철기가 그득히 담겨 있었다.

16년에 이르는 한신대박물관의 역사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2002년 7-11월 조사한 화성 천전리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 수원에서 화성 남양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 84호선 확포장 구간에 포함된 이 유적 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집터 12곳이 드러났는데 그 중 하나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평면 긴 네모꼴로 길이가 무려 29.1m(너비 4m, 면적 116.4㎡)에 이르렀다.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 집터 중 가장 길다.

나아가 이 천전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이른바 송국리형 집터가 2곳 발견되어 고고학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송국리형 집자리는 서울과 경기지역에는 분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신대박물관(관장 이남규)이 이런 조사활동을 중심으로 박물관이 걸어온 길을 '한신고고학 발굴 16년'이라는 도록으로 최근 발간했다.

 

 

'여러나라시대 >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0) 2021.07.05
백제 문화유산  (0) 2021.07.05
백제 영토  (0) 2020.05.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