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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제의 강역 (1) 위례성은 어디인가?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2. 백제의 강역 (1) 위례성은 어디인가?

대야발 2024. 5. 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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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1.31 01:08

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

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국사학자들에게는 유령의 성과 같은 불가사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도저히 찾을 수도 없거니와 ‘여긴가?’하면 ‘저기다’라는 주장이 나오고, 그래서 ‘그곳인가?’하면 ‘아까 거기가 맞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적어도 백제의 초기 수도 위례성의 후보는 9개에 달한다.

한강 이북으로는 파주 적성(積城)으로부터 세검동, 중랑천을 거쳐 강남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천안에 이른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위례성을 찾아 경기도를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다수결로 하자면 풍납토성이 유력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는 남는다.


오리지널 위례성은 어디인가
백제의 초기 도읍이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믿음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온조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에 있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한산이 다름 아닌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해 명확했다. 문제는 그곳으로 옮겨진 초기 백제인들이 있었던 위례성의 위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 위례성이 당시의 직산(오늘날 천안)의 ‘성거산 위례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성거산 위례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며 온조왕 13년(AD 1세기)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믿음에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에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옮겼다면 위례성은 직산(천안)이 아니라 더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순행 구절에 주목했다.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라는 대목이었다.

정약용은 이 구절이 바로 온조왕의 초기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처음에 한강 이북 어딘가에 오리지널 위례성이 있었고, 그곳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자주 받으니 강을 건넌 곳이 하남 위례성이었고, 다시 한산으로 옮겨갔다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생각은 파격적이었지만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일제시대 일본 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서기>와 차이가 난다는 이유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이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 채 하남 위례성을 광주, 한산을 남한산에 비정하고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했다.

▲ 몽촌토성 재현 모습

 

또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간주하게 된다. 해방 후에도 그러한 관점은 계속됐다. 어쨌거나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위례성은 이제 더 이상 천안이 될 수 없었다. 한강 유역 어디여야만 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학설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속수무책일 때 획기적인 관점에서 위례성을 찾으려는 이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친일 식민사관의 거두라고 비판받는 이병도(李丙燾)였다. 그는 일본학자들의 실증주의 방법론을 받아들였지만 무엇보다 정약용이 분석한 ‘하북 위례성’에 주목했다.

이병도는 오늘날 세검정 유역을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여러 전승과 기록을 종합해 광주고읍(古邑)과 남한산성이 조선시대에 임금의 피난처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했다.

코미디 같은 ‘위례 선점’ 지자체 싸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좀 더 대담한 학자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김영수는 온조가 처음 도읍한 (하북)위례성을 오늘의 임진강 남쪽 고양(高陽) 부근으로 추정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파주를 지나는 임진강의 옛 이름이 적성강(積城江)이라는 사실과 위례성이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는 점이었다.

당시로서는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른 뒤 파주, 고양 일대에서 백제 초기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위례성=파주, 고양설’은 단숨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이렇게 영역이 넓어진 위례성은 1980년대 고고학의 발전과 서울시 개발에 따른 유적지 발굴이 겹치면서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 풍납토성, 이성산성 등의 지역이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하북 위례성은 현재의 중랑천 지역이었고 이곳에서 이동한 하남 위례성이 한나절 거리였을 거라는 차용걸 충북대 교수의 주장이었다.

   
▲ 백제인 의복 재현
특히 백제 고분들이 나오는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거리가 2km내라는 점에서 차용걸 교수는 하북 위례성-하남 위례성-한산이 사실은 서로 아주 가까운 지역 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는 북방민족 백제가 한강을 통해 남하하는 루트로서 제시된 임진강 위례성론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건은 일종의 대이동이 아니라 관내 이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든다. 온조왕이 우려했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고자 초기 백제의 수도를 한반도가 아닌 만주지역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다시 우리는 궁금해진다. 그래서 위례성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대답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다만 위례성의 ‘위례’라는 음가에 주목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이 투르크-몽골어로 ‘나라’, ‘백성’을 뜻하는 ‘Ulus’의 음차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의 귀족계층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썼으며 고구려의 언어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간에 천연성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니까 위례성은 온조 집단들이 모여서 사는 곳을 그들이 ‘울루스’라고 말하는 것을 ‘慰禮(위례)’로 적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백제 전체가 울루스이자 위례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위례’ 선점 갈등도 사실 좀 코믹한 면이 있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해양대제국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 중국의 동부에 있었다"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5/27 [13:39]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의 기원과 사서로 본 위례성의 위치
(2부)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의 왕성인가?
 
위대한 제국 백제를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가두어 놓은 식민사학계와 가지마 노보루를 고발한다.

우리는 백제라는 국호는 건국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에는 십제(十濟)라는 국호였다가 형인 비류가 죽고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귀의하자 국호를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약자로 백제로 고쳤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海, 산동성 동남쪽의 지명)>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본시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설명한다. 

 
 
<한단고기>와 <사기>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여하튼 백제라는 단어가 처음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遼) 중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년.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虞)라 함은 3황 5제의 하나인 순임금을 말함이고, 요(遼)라 함은 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그 일대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백제와 관련된 낯익은 지명들인 한성.대방.백제 등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가 백가제해의 준말이 아니라 지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지명을 가져와 국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첨언을 하나 하자면,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에 있는 요수가 중국에 의해 점차 동으로 옮겨진다. 즉 동북공정은 수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초 요수(遼水)는 황하나 요라는 지방 근처를 흐르는 그 지류였으나, 그것이 하북성 난하로 옮겨가고, 요나라가 들어서서는 현 요하가 요수가 된다. 현 요하와 옛 요동.요서의 중심이 되는 산서성 요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요동하면 현 요하 동쪽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안시.요동성이 현 요하 주변이 되고 평양이 대동강 평양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대주의 매국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을 국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아직도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가!!! 

 

조선은 44세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린다. 그 중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번조선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 한나라 땅 아니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자조선의 기준은 위만조선에게 망해 대동강 평양에서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한반도에 삼한을 세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역사를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놓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시조인 온조의 건국지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여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단고기>에는 백제국본기가 따로 되어있지 않고 백제에 대한 내용이 <고구려국본기>에 일부 나온다.

(인용)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 데 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南至帶水)까지 이르고,
동으로 빈.대해(東濱大海)까지 이르고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하고,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는 것이 다르다.) 

 
 
그런데 위 문장이 <한단고기> 번역본마다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남지대수(南至帶水)가 다른 본에는 북(北)지대수로 되어있고, 동빈대해(東濱大海)가 다른 본에는 서(西)빈대해로 되어있다. 경인(庚寅)년 3월은 다른 본에는 기묘(己卯)년으로 되어있다. 즉 동.서.남.북을 고의로 바꾸어 위치비정을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조작되어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지적했다. 

 

위의 남지대수/동빈대해 내용은 이유립선생께서 소장한 진본 영인본 <정본 한단고기> 내용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유립선생이 쓰신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라는 책과 대조해보니 남지대수/동빈대해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서의 지리지에서 동.서와 남.북을 반대로 조작하면 그 나라의 강역이 전혀 달라진다. 그럼 남지대수/동빈대해를 북지대수/서빈대해로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한단고기>를 일본에서 최초 출판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로 보인다. 그럼 왜 일본은 백제 건국지의 방위를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고쳐야 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다음 연재인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에서 밝혀진다. 이번엔 지면상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 기록은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의 기록인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양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는 기록과 같다. 해서 위의 가지마노보루의 북지대수/서빈대해는 분명한 조작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참고로 而瀛濱海之陽의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 때는 햇빛이 먼저 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났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은 “이 하남(河南)의 땅은 北으로 한수를 띠고 東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였으며 南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西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보기 어려운 천험 (天險)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다. (참고로 대(帶)자는 ‘띠를 두르다’의 뜻인데, 왜 하필 이 글자를 썼는지? 한단고기의 대수(帶水)와 혼돈된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며 <한단고기>와 비슷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미추홀을 식민사학계는 인천으로 비정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며, 민족사학계는 천진 근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서는 패수를 북경 근처를 흐르는 현 조하(潮河)로 말하고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己亥38年 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 浿水今潮河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발간한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조하가 아니라 현 하북성 동부 난하로 적혀 있다. 가지마 노보루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일본인이라 그의 조상인 왜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역사의 스토리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소서노 여왕이 건넜다는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대수는 그 한자로 보아 대방(帶方)의 땅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대방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하북성 석문(石門 현 석가장)과 접하고 있는 대방이 확실하다. 그 대방의 땅을 흐르는 강이 있으면 필시 대수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대방 지역을 흐르는 큰 강은 없다. 작은 강은 있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강을 대수라 했을까? (대수가 어떤 강인지는 다음 연재에 언급한다.)

여하튼 이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다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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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

백제 30대 무왕이 승하하자 당 태종도 상복입고 곡을 한 백제의 위상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02 [21:25]
본 글은 ‘백제의 기원과 온조의 건국지는 어디?’의 (2부)입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93§ion=section78

주변의 낙랑/말갈/대방으로 본 위례성의 위치

온조 13년(AD 6년) 2월 왕모(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죽고, 5월 온조대왕은 신하들에게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으로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었는데, (중략)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하략)”라고 말한다. (소서노의 죽은 나이 61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고구려의 건국년도와 함께 언급할 예정입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할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 편의상 온조대왕을 존칭을 생략하고 온조라 하니 이해바랍니다.)
▲&nbsp;&nbsp;산서성에 있는 대해(大海)라는 지명은 호수를 말함이다. 이곳도 백제의 영역으로&nbsp;간과할 수 없는 지역이다.

 
참고로 위 낙랑은 최씨의 낙랑국(한반도+만주)이 아니라 한사군 낙랑으로 보아야 한다.
▲&nbsp;&nbsp;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nbsp;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안에 모든 것을 잡아 넣어 서부산악지대에만 있었던 중국은 어부지리로 역사 강역을 넓혔다.&nbsp;&nbsp; 이걸 아직도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nbsp;이나라 식민사학계는&nbsp;매국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엔 말갈이 있었다고 온조는 말하고 있다. 이 낙랑군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가 저절로 밝혀진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한다.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으니 백제는 그 잘난 후손들 때문에 황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낙랑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려면 장문이라 사진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백제와 낙랑의 기록을 보면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한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의 위치사진을 보면 이 기록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백제가 낙랑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즉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nbsp;&nbsp;&nbsp;중국의 사서가 오히려 역사강역을 제대로 밝혀주고 있다.&nbsp; 필자는 사기의&nbsp;상부 1/2이&nbsp;한사군의 위치가 맞다고 본다. 중국 떼놈보다도 못한 한국의 식민사학계 임을 알 수 있다.&nbsp; 돈만 없애는 고구려 연구재단도 다 엉터리이다.

그리고 <중국 25사>에 백제는 대방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럼 대방은 어디인가? 대방은 백제 패망 후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보듯이 하북성 남부 석문(石門: 현 石家庄)과 접한 곳이다. 9대 책계왕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대방은 우리와 장인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즉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백제와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초기 백제가 서울 근처에 있었으면 말갈은 황해도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 따르면 그 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가? 도대체 말갈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온조왕 2년 왕이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있고 (생략) 막고 지킬 계획을 마련하라”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온조왕이 말갈을 피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그런 말갈의 위치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5대 초고왕 49년(214년) 북부(北部)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방과 접해 있는 현 하북성 남쪽에 있는 성도(省都) 석가장(石家庄)인 것이다. 이곳은 또 대방과 접해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위의 기록들에서 온조의 최초 도읍지를 추정해 보면, 석문(석가장) 아래에 대방이 붙어 있고, 이 대방 근처 아래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nbsp;&nbsp;대방의 위치는 석문 바로 아래쪽이다. 석문은 현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마한으로 본 백제의 둘째 도읍지

온조왕 24년(AD 6) 왕이 남쪽 경계인 웅천에 울짱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00리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소.(이하생략)”라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후인 온조 27년 마한이 결국 백제에 복속된다. 이로서 마한은 백제 남쪽 경계인 웅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본 글의 (1부)에 언급했다시피, 번조선의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한(삼한)의 왕이 된다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삼한의 하나가 마한이다. 마한은 한수 남쪽에 백제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이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달려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 ‘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 ‘가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 “Let's go'의 뜻이다.

또 海라는 지명은 현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 일대에 있다. 한문 실력이 없는(?) 식민사학계는 海자만 보이면 전부 바다로만 해석해 전혀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nbsp;&nbsp;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 번조선왕 기준은 조상인 기자가 살던 서화 땅으로 와 한(삼한)을 세운다. 가운데 상부에 대왕산 밑에 海 자가&nbsp;보인다. 바로 저 일대가 바다가 아닌 육지인 海 지방이다.

둘째 도읍지의 지리적 조건    

여하튼 온조는 두 번째 도읍지에서 나라를 다스린다.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서울로 비정하고는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보고, 북쪽 패하를 예성강으로, 남쪽 웅천을 안성으로, 동쪽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를 한반도 서부로 비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백제의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본 것이다. 대해가 황해인지는 잠시 후에 한꺼번에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온조의 최초 도읍지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는 당시 말을 타고 당일치기가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두 군데 다 한수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례성은 북대한수(北帶漢水)이니 분명 한수의 남쪽이다. 그리고 온조는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고는 그리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에서 왜 굳이 한수의 남쪽을 순시했다고 말했을까?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는 거짓이던가 아니면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어야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맞는 것이다.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면 아무래도 북대한수(北帶漢水)가 수상하다.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南至帶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온조는 (북)한수의 남쪽인 위례성에서 (남)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도읍지가 더 남쪽이라는 근거는 북으로 말갈이 침략하니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았다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진 그 중간의 큰 섬과 같은 곳에 백제가 위치해야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한강의 여의도처럼 남과 북 위.아래로 한수가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 굳이 여의도로 표현을 하자면 한강 남쪽의 여의도에서 한강 남쪽인 영등포로 도읍을 옮겼고, 그런 여의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너머에 낙랑군이 있어야 한다. 즉 섬처럼 보이면서 여의도 같은 작은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육지여야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먼저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서울의 한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학계가 비정한 한수는 서울의 한강이다. 그런데 한강은 강줄기가 둘로 갈라지지 않아 이 조건에 안 맞고, 동쪽 끝은 주양(東極走壤)으로 비정한 춘천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는데 낙랑군은 대동강 평양으로 정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식민사학계의 백제 도읍지 비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차라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북한강의 남쪽을 위례성으로, 남한강의 남쪽을 한성이라 했으면 이 조건에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양수리도 낙랑군이 춘천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인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했으므로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리고 한강은 대부분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한줄기인 한강의 하류가 상황에 따라 절대로 둘로 갈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2,000년 전 백제 때 한강 하류는 두 줄기 이었다”라고 우길 수도 없다. 결국 여러 조건으로 보아 서울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미 필자는 4부에 걸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위치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백제는 위례성-->한성(?)-->한산-->웅진-->사비로 천도를 했다. 웅진과 사비에 대해서는 백제 패망 전쟁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밝혔다. 이번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 도읍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중국 대륙 산동성의 지형을 놓고 보면 이 조건과 거의 맞아 들어간다. 위례성의 조건인 북대한수(北帶漢水)는 황하(黃河), 동거고악(東據高岳)은 태산(泰山), 남망옥택(南望沃澤)은 평야지대,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대야택(大野澤: 독산호)로 보면 조건이 딱 맞아 들어간다. 그리고 한수가 둘로 갈라지기만 하면 된다. 

산동성 서쪽에 있는 독산호는 폭 20Km 길이 120Km 정도로 엄청나게 큰 호수로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120Km이면 충남의 해안선 길이보다 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오면 호수의 길이와 폭은 더욱 더 커진다. 독산호 바로 밑에 미산호라는 큰 호수가 또 있다. 이 두 호수를 합치면 이곳이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랴! 

▲독산호(대야택)은 옛날부터 큰 바다로 불리던 큰 호수이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산동성 사람들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의 바다를 北海를 발해(渤海), 東海를 황해(黃海), 南海를 산동성 남쪽 청도/연운항 앞바다, 西海를 독산호(獨山湖)라고 했다. 백제의 기록은 백제의 위치인 산동성을 중심으로 쓴 것이지 중국 대륙 전체를 놓고 쓴 것이 아니다. 
▲산동성의 동.서.남.북의 사해. 독산호(대야택)은 산동성의 서쪽 바다로 회수에서 황하로 가는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필자가 백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자 식민사학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네티즌들이 서조대해(西阻大海)를 핑계로 중국의 서쪽엔 바다가 없고 멀리가면 지중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서쪽에 대해 즉 황해가 있어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다는 코미디 같은 항의성 댓글을 단 적이 있어 필자를 크게 웃긴 적이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 고맙기는 했다.

한국과 같이 작은 땅에서야 한반도 전체를 놓고 지형을 따지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그렇지 않다. 각자 나라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의 중요한 지형을 자기네 영토라고 기록에 적는 것이다. 백제를 산동성에 놓고 보면 <삼국사기>의 동서남북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大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위와 같은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해(海)는 바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 양자강과 같이 큰 강, 대야택이나 동정호와 같은 큰 호수, 동부 평원과 같은 대평원 등을 모두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에게 밀려 서부 산악지대에만 살았던 산적들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海)라는 지명도 있다. 실제로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일대를 고대에 해(海)라 불렀다. 육지에도 X해, X도 라는 지명이 간혹 있지 않은가!!! 

황하의 물줄기로 본 백제의 위치?

황하는 서부 산악지대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이 물줄기는 안 바뀐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면서 동부 평야지대로 빠져나온다. 하남성 정주(鄭州)를 지나면서는 대평원을 흐르다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황하는 100년에 한번씩 맑아진다고 했다. 즉 100년에 한번씩 큰 홍수가 나고 그 때마다 물줄기가 바뀐다는 말이다.

현 황하는 지금 산동성 성도인 제남(濟南)을 거쳐 산동반도 바로 위에서 황해로 흘러간다. 그러나 기원전에는 천진 쪽으로 흘렀던 적도 있고, 산동반도 아래로 빠진 적도 있고, 아예 남쪽에 있는 회수와 만나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물줄기의 변화가 심한 강이다. 그런 황하를  현재의 물줄기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분석하면 큰 오류에 빠진다.

중국의 지질학계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온조가 백제가 건국할 때의 황하의 주 강줄기는 천진 쪽으로 흘렀다 한다. 당시 황하가 양쪽으로 갈라져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많다. 2,000년 전의 황하 물줄기가 몇 개였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주 물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사서의 기록과 지질조사로 가능하다. 
▲&nbsp;&nbsp;&nbsp;온조가 위례성에서 도읍지를 옮갈 때의 황하 물줄기의 변천도. 아마 황하는 당시 두 줄기로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온조의 기록으로 보면 황하(한수)는 북한수와 남한수로 나뉘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천진 쪽으로 흘렀던 황하(北漢水)는 대방(帶方) 지역을 지나가므로 대수(帶水) 또는 대한수(帶漢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남한수(南漢水)는 그냥 한수로 불리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서노와 온조의 이야기의 조건이 산동성에서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필자는 산동성의 성도(省都)인 제남(濟南) 근처를 백제 초기도읍지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다. 그곳이 위례성인지 한성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온조대왕은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제남을 놔두고 다른데 가서 도읍을 정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유리왕의 유적이 북경 근처에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실제로 제남이라는 도시 명에 백제의 제(濟)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지금의 대도시들은 예전에도 한 나라의 도읍이거나 소경(小京)의 하나가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에 도읍을 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현 수도인 북경, 하북성 석가장, 산동성 제남, 산서성 태원이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성은 동.서 두 군데

백제는 동.서 두 군데에 도성이 있다고 했다. 혹자는 동도(東都)는 한반도에 있고, 서도(西都)는 대륙이라고 한다. 물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가 한반도에 아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담로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는 분명 대륙에 있었고 주무대는 산동성인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동도는 산동성에 있었고, 서도는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湖南省)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중국장수전전 흑치상지편에 나오는 백강은 현 상강(湘江)으로 호남성 기양이라는 곳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중국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전투지가 호남성 동정호 부근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nbsp;&nbsp;중국 장수전전의 기록에는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백강(현 상강)을 호남성 기양으로 말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 장족자치구 백제향이니 백제는 호남성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당항성을 빼앗은 지도와 연계해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백제 의자왕이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끊은 것도 산동성 백제와 호남성 백제와의 육로 개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nbsp;&nbsp;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당과 신라의 교통로를 끊은 것은 백제가 호남성 백제와 왜와&nbsp;육로로 통하는 길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대왕에 의해 건국된 백제의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채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봄 사중월(2월.5월.8월.11월)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께 제사지낸다.”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 (원구)단을 쌓아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25사를 종합 검토해 보아도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백제를 고구려보다 더 강한 나라로 표기한 기록이 여럿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41년 백제 30대 무왕(의자왕의 부왕)이 승하하자 당태종 이세민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와 <만주원류고>에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에 보면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遺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贈光祿大夫賻物二百叚遺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方郡王百濟王)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렸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며 백제는 당나라의 부모국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엔 입장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는 당나라를 신하국으로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기록인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를 서울 하남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공주를 웅진으로, 부여를 사비로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한 매국식민사학계(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건 민족정신을 썩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거짓으로 조작한 식민사학을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인양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학계는 이젠 매국노란 소릴 들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썩어빠진 이 나라 식민사학계와 정부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일본과 역사 전쟁을 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가지고 싸워야 하거늘 매국 식민사학계는 자기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그런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니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수 밖에 없고, 또 정부는 외교 문제가 된다는 한심한 논리로 동북공정에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리라 보는가!!!!

지금의 식민사학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역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역사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단군은 신화로 되어 있으며, 삼국은 한반도에 갇혀 있다. 고려의 만주 영토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구한말 잃은 간도 땅은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학은 다른 인문학과 달라 국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들 국익을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 부록 ***

필자가 백제 패망지에 대한 연재를 계속하자 두 네티즌이 아주 흥미있는 자료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필명 심제(心濟) 선생이 제공한 글이다.

(인용) 산동성에 있는 백마하를 따라가 보니,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수도라고 전해지는 임치(臨淄 사실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산동에 이르지도 않았다 )와 8세기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제(齊)나라 수도 운주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백마하 주위에 산재하는 몇 개의 고성( 古城)이라는 지명과 백마창(白馬廠)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제왕성(齊王城)이 위치한 지도를 발견했다. 
▲&nbsp;&nbsp;상단에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 바로 옆에&nbsp;제왕성(齊王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분명히 위의 두 제(齊)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 백제의 의미인 제(濟)에서 삼수변을 떼어버린 제왕성<齊王城> 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미군군사지도에도 백마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이 지도에는 馬河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지역이 춘추전국시대의 제, 이정기의 제나라 지역이 아니라면 제왕성이라 표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百濟 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인용 끝)

▲ 우측 상단 곡부 우측에 제왕성이 보인다.  청색 사각형이 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지명들이다.


게다가 친절하게 대청광여도에 당나라 소정방의 침투로를 그려 주었다. 소정방은 협주(莢州-->陜州로 지명 바뀜)를 출발해 황하를 타고 오다, 진공로2와 같이 회수(淮水)로 들어가 덕물도(위치 미상)에서 신라태자를 만나고, 회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독산호)에서 백마하를 타고 도성(사비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기습 침투로 2와 같이 낙양에서 황하를 타고오다 회수로 빠졌다가 하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으로 들어가 사수 또는 백마하를 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남, 곡부, 비성 등에 백제 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과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녕(濟寧)이란 도시도 백제와 관련된 도시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을까?

또 한 네티즌(필명 님의 침묵)은 곡부에서 찍은 성(城)의 사진을 몇 장 올리면서, 이것이 백제의 건축양식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맨 끝에 사진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사진 중 옥으로 만든 말과 장식물은 분명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이의 문명인 홍산문화의 출토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은 3황5제의 한 사람으로 동이족이었으며, 신라 김유신의 조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소호금천이 우리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능을 파헤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인근에 있던 공자의 무덤은 멀쩡했다.

또 중국에 사는 교포 한의사 한 분은 필자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백제의 일백 백(百)자는 옛날에 ‘온’이라 했으며 시조 ‘온조’는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다들 민족사를 바로 찾자는 취지로 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현재 매국식민사학자들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의 이론은 얼마 못 가 반드시 뒤집어질 것으로 본다. 

▲&nbsp;&nbsp;&nbsp;산동성 곡부에 왜 성이&nbsp;있을까? &nbsp;성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nbsp;&nbsp;동이족의 성루 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사진. 서울의 숭례문 양식과 비슷한 곡선으로 치켜 올라가게 되어있다. 자고로 중국의 성루는 직선으로 천안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양식을 중국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성의 지붕이 우리 것과 비슷하다.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 집의 구분은 곡선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백제 도읍지는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

수도 위례성은 이병도가 지정 " 온조왕은 북경에 원구단을 쌓았다"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9/14 [08:45]

 

[1]. 백제가 한반도 속에 존재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단독보도 제24편 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2] [플러스코리아]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 우리나라 고대사서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구당서(舊唐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의 어떠한 사서(史書)에도 한반도 속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대제국 백제를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일본인과 우리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가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광주(廣州) 고읍(古邑)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므로서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풍납토성,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피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온조왕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지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천험지리(天險地利)로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또 다른 곳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이병도는 지금의 인천이라고 주장)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였기에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하남 위례(慰禮)성의 도읍에 돌아와 보니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다 위례에 돌아와 귀부(歸附)하였는데 처음 따라올 때처럼 백성(百姓)들이 즐거워하였다. 그 후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백제의 왕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부여(扶餘) 계통의 씨족(氏族)들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 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을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을 자기 친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돌아오자 태자로 삼고 왕위까지 계승시키자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의 재산으로 나라를 세워 많은 도움을 주시고 온 정성을 다해 노력했으나 대왕은 세상을 싫어하시자 [하느님이 용을 내려 보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 붙어 있어도 혹처럼 될 것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 보다 못할 것입니다. 드디어 [비류]는 동생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던 것이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왕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구태(仇台)는 처음 옛 대방(帶方)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마침내 동이(東夷) 백제는 강국(强國)이 되었다.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라고 조작해서 믿지 못하게 했다.]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국경의 북쪽에 말갈(靺鞨)이 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말갈을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들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뿐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을 하였는데 신비한 사슴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성책(城柵)을 세웠다.  

[신라]의 사자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친선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을 만들어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 영토를 쳐들어올 계략이 있지 않는가? 만약에 옛 우호를 저버리고 성을 허물지 않거나 목책을 깨뜨려 버리지 않고, 시기하고 혹 의심한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고하였다. 

온조왕이 회답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것은 아닌 것 같소.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오.” 이로 말미암아 낙랑(신라)과 백제는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한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강가에서 막아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구]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백제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자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백제는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요하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서기전 2) 봄에 [신라]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 소서노에게 제사지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이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에 원구단을 쌓았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온조왕이 [하북성 북경]에 큰 제단(祭壇:천단,원구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 왔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빼앗은 가구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기준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우리나라 [기준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나 우리나라 왕이 어찌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마땅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라고 말하자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인 것 같습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기준왕이 건국한]“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아랫 윗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다. 그때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 탕정성(湯井城)과 대두성(大豆城)을 쌓아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쌓았는데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와 공작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호수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의 제천단에서 제시지냈다

38년(서기 20) 봄 2월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온조왕이 큰 제단(祭壇:북경 원구단,天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식견[神識]이 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漢水)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합니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귀순해 오자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온조왕이 죽었다. [본문 끝]
 
[2].백제의 수도 위례성은 이병도가 독단적으로 지정했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은 지금 廣州(광주)의 春宮里(춘궁리)와 南漢山城(남한산성)을 포함한 일대이다. 그러나 처음의 都城(도성)이 하남위례성에 있었음은 뒤에 河南(하남)으로 移都(이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옴으로서 알 수가 있다. [온조왕 13년 및 14년조] 그러면 상기 기록은 河南遷都時(하남천도시)의 사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見後). 

河北慰禮城(하북위례성) (이 위례)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인 漢城(한성)에 대칭하여 후에 北漢城(북한성)으로 개칭한 듯 한데)은 그 위치가 漢水(한수) 이북인 것은 틀림없다.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은 慰禮(위례)를 지금 서울의 동북방(지금 정능동. 삼양동. 부근)에 해당한 양으로 말했으나 (彊域考券三 慰禮考(강역권3 위례고) 그 방면에는 백제시대의 유물 유적은 물론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고구려 및 신라)의 그 것 조차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산 계곡에 있어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의 유적(특히 신라시대)이 집중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은 彰義門(창의문) 밖인 洗劍洞(세검동) 일대를 내 놓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碑峰上(비봉상)의 眞興王碑(현재보관상 박물관내로 移置)를 비릇하여 文殊庵(문수암)의 석굴 僧伽寺(승가사) 및 新營洞(신영동)의 藏義寺址(장의사지)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상기와 같이 백제의 수도 위치를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본문에서 지금 경기도의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없다.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서울 洗劍洞(세검동) 계곡 일대로 추정한 지명일 뿐이다. 

백제의 수도는 삼국사기에 河南省(하남성)의 慰禮城(위례성)이라고 뚜렷이 기록하고 역사적 진실이 이미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왕의 칙명을 받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 대륙에 소재했던 백제의 수도 河南省(하남성)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고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어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조선사: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증서(考證書)도 없이 이병도 독단적 추정으로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어찌 경기도 하남이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있는가? 

    ▶ [이병도를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학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한 몽촌토성으로 비정한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 지배층의 일반적 거주지인 구릉지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의 석촌동에는 왕릉급 고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사와도 부합된다. 특히 한성 말기 백제 왕성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만들어 장려함이 극에 달했다"라고 했는데, 토성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부합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몽촌토성이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추정해서 오늘날까지 백제의 수도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작태인가?]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後漢書(후한서)에서 이르기를 三韓(삼한)은 무릇 78국으로서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 이다. 北史(북사)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며 서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漢江(한강)이며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하고 그 외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通典(통전)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남쪽은 신라와 접해 있고 북쪽은 고구려이며 서쪽은 큰 바다가 경계였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居拔(거발)과 固麻(고마)는 고마의 借音(차음)으로 熊津(웅진:고마나루), 즉 지금의 公州(공주)를 지칭한 것이니 이것이 백제의 熊津都邑(웅진도읍)시대에 관한 기사임은 再言(재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그 중의 北際漢江(북제한강)은 원문에는 없는 말로 史記撰者(사기찬자)의 潤筆(윤필)에 불과한 것이어니와 사실 그때 백제의 北界(북계)가 漢江(한강)에 다달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강유역은 그 당시 엄연한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北史(북사) 원문에는 處小海南(처소해남)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이른바 小海(소해)는 西海岸(서해안)의 沈入灣(심입만)인 牙山灣(아산만)을 가르켜 말한 듯 하므로 그것이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하겠다. 라고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말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舊唐書(구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은 越州(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倭(왜)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고 백제왕은 동서 양쪽 城(성)에서 거처 하셨다. 新唐書(신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西界(서계)는 越州(월주)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倭(왜)에 이르고 다 깨우쳐 주었다. 하고 북쪽은 고구려라 하였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원문에는『西界(서계) 越州(월주) 南倭(남왜) 北高麗(高句麗:북고구려) 皆踰海(개유해),乃至(내지)』라고 하였는데 고구려와는 실제 陸接(육접)하고 있으므로 史記撰者(사기찬자)가 조금 潤筆(윤필)을 가한 것 같다. 라고 이병도는 부정 했다.
 

      ▶ 초기 백제 강역의 핵심요소
(1). 백제의 수도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어 위례성은 그 어떤 나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천험지리(天險地利)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2). 비류(沸流)는 동생 온조와 함께 패수(浿水:요하)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마침내 온조왕은 백제의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었다. 곧 낙랑(樂浪)은 하북성 북평(北平)과 북경(北京) 지역에 있었다.
 
(3). 비류왕(沸流王)과 온조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1. 백제의 수도 위례성 북쪽에 대방(帶方)이 있었다

북대방(北帶方) : 삼국유사]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 남대방(南帶方) : 남대방군(南帶方郡)은 조위(曹魏)때 남원부(南原府)를 지금의 대방에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했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2.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었다

낙랑국(樂浪國:삼국유사)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전한(前漢) 때 처음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옛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즉 고조선 삼한 중 진한의 제34대 오루문(奧婁門)왕(서기전 795년)이 처음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했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했다. 삼국사기에는 혁거세(赫居世)왕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에게 신라의 낙랑(樂浪)이 멸망되자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사람들이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청하)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을 곧 평양성(平壤城)이라 해야 마땅하다. 혹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라 했다. [일제와 이병도의 조작 부분]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했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고려 태조(太祖)가 그의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3. 소서노의 아버지는 연타발이다

[한단고기 三韓秘記(삼한비기)]에서 말하기를 상장군 延陀勃(연타발)은 졸본사람이다. 葛思國(갈사국) 남북을 왕래하며 소금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아 동명성왕이 나라를 개국할 때 큰 도움을 주고 그의 딸 “召西奴(소서노)”를 동명왕은 후처로 삼았다. 후에 무리를 이끌고 九黎河(구려하)로 옮겨와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모은 이익을 고주몽 성제께서 북 옥저를 토벌 할 적에 양곡 5천 석을 헌납하였고 도읍을 訥見(눌현)으로 옮길 때도 먼저 자원하여 헌납하고 나라가 망한 유랑민들에게 일을 시켜 동명왕은 그 공으로 座原(좌원)에 王事(왕사)로 책봉하였다. 다물 병인 3월에 80세로 죽었다.
  

4. 소서노는 대방(帶方)에 2천리의 땅을 소유하였다

고주몽은 재위 시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맡아들 琉璃(유리)가 돌아온다면 당연히 태자로 봉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에 소서노는 두 아들의 장래가 이롭지 않고 염려가 되어 기묘년(BC 42년) 3월에 인편에 듣기로 浿水(패수)와 帶水(대수) 지역이 비옥하여 농산물이 잘되어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서노는 드디어 남행을 결심하고 무리를 이끌고 辰番(진번) 근처인 해변의 僻地(벽지)에서 10년을 安居(안거)하면서  田畓(전답)을 매수하여 별장까지 두는 億萬長者(억만장자)가 되어 큰 富豪(부호)에 이르게 되니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오는 백성들도 많았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가 소유한 땅의 넓이는 북쪽은 帶水(대수)까지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이고 소서노가 소유한 토지의 半徑(반경:반지름)이 무려 천리가 되었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사방 2,000리의 땅을 소유한 큰 富者(부자)가 되었다는 편지를 써서 사람을 파견하여 고주몽성제에게 전달하니 아내로부터 전달된 편지를 읽어본 고주몽 성제는 매우 기뻐하시며 직접 매우 칭찬하는 격려문을 써서 소서노의 號(호)를 於瑕羅(어하라)란 이름을 지어서 소서노에게 전달하셨다.  

13년 임인(BC 19년)에 소서노가 돌아가고 태자 비류가 왕위에 옹립되자 넷 신하는 붙어 있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馬黎(마려)등의 신하들이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들은 馬韓(마한)이 쇠퇴하여 패망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곳으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좋은 시기라 사료됩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락하고 곧 배를 띄워 바다 건너 馬韓(마한)의 彌鄒忽(미추홀)에 이르니 사방이 평야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거주한 흔적이 없기에 漢山(한산)에 登頂(등정)하여 負兒岳(부아악)을 바라보니 거주 할만한 지역이었다.  

馬黎(마려)와 烏干(오간)등 열 신하가 말하기를 오직 河南(하남:중국 하남성)의 땅은 북쪽은 帶水(대수)와 漢水(한수)가 있고 동쪽은 높은 산악지대이고 남쪽은 훤히 열려 있고, 연못이 있어 농사 짖기에 옥답이 되겠으며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참으로 얻기 어려운 天險地利(천험지리)로서 도읍지로는 얻기 어려운 地勢(지세)의 땅입니다. 다시는 다른 지역을 구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온조는 열 신하의 의견을 따르고 드디어 河南省(하남성)의 慰支城(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 칭하였다. 백제는 沸流(비류)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지역을 취득하고 난 후에 국호가 되었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은 비류가 통치한 지역을 온조에게 歸附(귀부)하였던 것이다. 

즉 백제 초기의 영토는 소서노가 소유한  대방(帶方)지역의 2000리와 연나라의 도적 위만에게 패한 후 해성에 들어가 기준이 건국한 후 마한의 땅을 소유한 대국이었다. 경기도 하남 땅이 어찌 백제의 첫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독단적으로 조작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으로 백제의 수도로 지정했을 뿐이다.
 

5. 비류왕의 도읍지는 섬서성이었다

백제 비류의 첫 수도는 중국 중서부에 있는 陝西省(섬서성)이다. 섬서성의 성도(省都)는 시안(西安)이며, 황하(黃河) 중류 유역에 있다. 주변의 위하평원(渭河平原)에는 북경원인(北京原人)과 함께 염전원인(藍田原人:비류왕이 처음 도읍한 미추홀)의 유적과 서안반파유적(西安半坡遺蹟) 등 원시고대의 유적이 많으며, 현재 중국 서북지구의 현관에 해당한다. 

태령산맥(秦嶺山脈)이 섬서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남쪽 양자강(揚子江) 수계를 옛날 한수[漢水] 유역이라 했다. 그 북쪽은 황하강 유역에 속한다. 태령에서 섬서성 남단의 대파산지(大巴山地)까지는 태파산지(秦巴山地)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漢水)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漢中), 안강(安康)의 양 분지가 있다. [중국 여행 지리지 참조]
 

     ◆. 백제의 위례성은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백제의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했다. 수도 고마성(위례성=관미성(關彌城)을 중심으로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관미성을 중심으로 동익성(東翼城),서익성(西翼城),남익성(南翼城),북익성(北翼城)이 있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하북성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만라장성의 기점이다. 또한 수서(隋書)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 창려현(昌黎縣)이 있다. 라고 전하고 있다.  

三韓秘記(삼한비기)의 舊志(구지)에서 이르기를 당시대에 요서(遼西)를 昌遼縣(창요현)으로 개명하여 遼州(요주)라 하였고 남쪽의 碣石山(갈석산)밑의 白岩城(백암성) 역시 당시대에 소위 岩州(암주)라 하였다. [사기권 115 조선열전 제55]: 집해서광(集解徐廣)이 말하기를, [하북성]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하북성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삼한의 변한왕(弁韓王) 기준(箕準)]의 도읍지가 왕험성(王險城)이다.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고 패수(浿水)는 동쪽이라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75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漢江:조작:패수(浿水:요하)을 건너서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잡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곧 낙랑군(樂浪郡)에 요녕성(遼寧城)도 소재하고, 하북성(河北省)에 창려(昌黎), 험독현(險瀆縣)=왕험성(王險城)=관미성(關彌城)=산해관(山海關)은 각 지명 이름은 다르지만 다 같은 지역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다. 

중국은 천하제일의 산해관(山海關)을 줄여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고쳐서 부르고 있다. 이곳이 바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로서 처음 수도(首都) ‘하남성(하북성 남쪽) 위례성(慰禮城)이다.
 

   ▶ 초기의 백제는 요서(遼西)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백제의 수도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며,"위례성은 직산(稷山)"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직산"이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에 있다. 처음 백제의 영토는 遼西(요서), 晋平(진평), 江南(강남), 越州(월주)는 백제의 縣(현)에 속해 있었다. 첫째 山陰(산음) 둘째 山越(산월) 셋째 左越(좌월)까지 백제의 영토였던 것이다. 

 [양서]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통전]에 의하면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 2군을 영토를 점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사이이다.

고구려 제21대 文咨帝(무자제)께서 明治(명치) 11년(502년) 11월 백제의 越州(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署(서), 郡(군), 縣(현)으로 개명)하면서 松江(송강), 會稽(회계) 吳(오), 越(월)을 左越(좌월), 山越(산월)을 泉州(천주)라 하였다. 12년(503년) 신라의 백성들이 泉州(천주)에 옮겨와 살았다. 이해에 백제에서 조공을 받히지 않으니 장병을 파견하여 遼西(요서)와 晋平(진평)등을 공격하여 쟁취하고 백제의 郡(군)을 없에 버렸다.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 개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양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였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겨야 했다. 끝.

 

 

  

 

 

 

<주>

 

(1) 

 

 

(2)

 

 

(3)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승인 2015.01.31 01:08

 

 

(4)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5/27 

 

 

(5)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성훈2008/06/02 

 

 

(6) 백제 도읍지는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박병역  2007/09/14 

 

 

 

<참고자료>

 

 

 

백제의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5/08 [15:18]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30 [16:04]

 

 

 

백제(百濟), '압록강변'에서 시작했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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