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1. 백제 (1)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본문
필자는 지금까지 백제의 건국시조와 왕실의 혈통, 건국 연대와 건국지, 건국 뒤의 발전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얻어진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왕이었으며 그의 혈통은 부여계였다.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후손인 우태였고 어머니는 졸본부여의 여인 소서노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백제 왕실은 성을 부여씨라 했던 것이다. 그러한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건국시조인 추모왕의 아들로 전해온 것은 추모왕이 비류와 온조의 계부였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처음 비류가 건국하였지만, 그는 건국 뒤 5개월 만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사망하여 그의 동생 온조가 왕위를 잇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게승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건국시조가 온조였던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건국 연대는 서기 전 18년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건국 연대를 이보다 훨씬 늦은 서기 260~261년의 고이왕 때로 보거나 더 늦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 이 시기에 백제는 관제와 신분등급을 확립하고 법을 엄격히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백제가 이 시기에 관제와 신분등급 제도를 확립하고 법을 엄격하게 한 것은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중앙권력을 한층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서 백제 사회가 정치적으로 그만큼 발전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건국 연대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서기 전 18년으로 보아야 하며, 고이왕 때의 기록은 백제의 국가권력이 증대되어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백제의 건국지를 지금까지는 하북위례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했으므로 백제의 건국지는 미추홀이며 그곳은 지금의 임진강 유역에서 찾아야 한다.
미추홀에서 천도한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건국한 뒤 온조왕은 한의 거수국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안정을 꾀하는 한편 동명왕묘를 세워 왕실의 전통과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농사에 힘쓰도록 격려하고 성을 쌓아 주민들이 안전하게 거주하도록 하였으며 궁궐을 신축하여 왕실의 위엄을 보였다.
기반이 닦이자 온조왕은 마한을 쳐서 그 영토를 지금의 정읍까지 확장하고 전국에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등 4부의 행정구역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는 주와 군을 두었다. 그리고 장자상속법의 원칙을 세웠다. 다루왕은 대대적인 농지 개간사업을 벌여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이왕은 안으로는 경제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고 밖으로는 신라를 제압하면서 중국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관제를 정돈하고 법령을 엄격히 하여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개혁정치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고이왕은 좌장 진충을 보내 난하 유역에 있던 낙랑군을 습격하였다. 이후 백제는 산동성과 강소성 및 절강성 등지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여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했다.
백제는 중국 동부 지역의 영역확장에 주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책계왕과 분서왕이 사망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 뒤를 이은 비류왕은 국내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어려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어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고 신라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 지역에 있었던 한사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 지역의 고조선 옛 땅을 모두 수복한 뒤 백제와 신라를 통합하기 위하여 진출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침략에 대응하여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도록 하여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 · 신성성을 강화하였다.
서기 384년에는 동진에서 온 불교 승려 마라난타를 맞아 불교를 받들기 시작하였는데, 불교는 왕과 귀족의 현실적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합리적 논리를 제공해 주었다.
침류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싸고 심한 갈등이 있었으나, 아신왕은 왕위를 회복하여 국내의 기강을 세우고 왜와 관계도 증진시켰다.
아직기와 왕인을 왜에 보냈는데, 아직기는 왜의 태자 菟道稚郞子(우지노와키이라스코)에게 경전을 가르쳤으며,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왜에 전하고 왜 태자의 스승이 되어 모든 전적을 가르쳤다. 그리고 眞毛津이라는 縫衣工女, 卓素라는 冶工, 西素라는 織造工 들을 보내 진보된 백제 문물울 왜에 전하였다.
그러나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에 부딪혀 많은 군사를 잃고 넓은 땅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 군대에 도읍인 한성이 포위되고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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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daum.net)입력 2007. 6. 7. 02:11수정 2007. 6. 7. 02:11
"부여 계승한 백제, 해외까지 진출한 글로벌 국가였다!" (brainmedia.co.kr)2015년 11월 13일 (금) 18:37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차태헌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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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백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The Little Known Ancient Korean Sites of the Baekje Kingdom Finally Receive Worldwide Recognition | Ancient Origins (ancient-origins.net)UPDATED 28 SEPTEMBER, 2018 - 01:43 ROBIN WHITLOCK
동맹이론으로 ‘해상강국 백제’ 증명한 중국인 판보싱|신동아 (donga.com) 2013-12-23
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25
요동의 비정과 백제의 진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신완순 2013/12/07
고대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백제인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7/21
‘백제의 혼’을 깨운다 | 서울신문 (seoul.co.kr)서울신문 최여경기자 2007-10-03
백제 -‘구드래’와 ‘구다라’ - munhwa.com문화일보.2007-09-27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 서울신문 (seoul.co.kr) : 2007-02-15
삼태극 | 한반도의 고구려 고분벽화는...대부분 백제의 것이다. - Daum 카페
잊혀진 제국- 백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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