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5. 7. 4. 20:03수정 2015. 7. 14. 00:52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에 등재 (daum.net)

홍성·예산=대전CBS 정세영 기자
 
공주 공산성 (사진=충청남도)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4일 충남도에 따르면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통과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고분군 ▲부여 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 등 모두 8개 유적지로 구성돼 있다.

 

이날 등재 심사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 등재 10개 기준 중 ▲특정 기간이나 문화지역 내 건축과 기술, 예술, 도시계획, 경관 디자인 등에서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 증거가 있고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가 있는 유산 등 2개 기준을 충족했다.

구체적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에 진행된 건축기술 및 불교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고 ▲웅진왕도와 사비도성의 입지 선정, 불교 사찰 및 석탑, 고분, 건축물 등은 백제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예술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이와 함께 ▲단위 유적들이 적절하게 잘 보존돼 있고 ▲각 유적들은 역사적 기능 및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유적 보호를 위한 완충구역이 설정된 데다 ▲전담기구를 통해 보존·관리되고 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날 등재 심사 통과 직후 안희정 지사는 WHC 회의장에서 공식 연설을 통해 “백제역사유적은 고대 한·중·일과 동북아시아 평화·교류·번영의 결과물”이라며 “1400년 전 고대 왕국 백제의 역사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전 세계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북아의 과거·현재·미래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며 등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 지사는 이어 “충청남도는 백제역사유적의 보존과 계승을 통해 백제역사유적이 인류의 유산으로 길이 남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달 말 현재 161개국 1007건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으며, 우리나라는 지난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 3건이 이름을 올린 이후 이번 백제역사유적지구까지 모두 12건을 보유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또 조선왕조실록 등 11건의 세계기록유산과 지난 2011년 등재된 서천 한산모시짜기 등 16건의 세계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홍성·예산=대전CBS 정세영 기자] lotrash@cbs.co.kr

 

 

이정현입력 2018. 7. 14. 06:01

낙화암 지나는 돛배에는 배호 노래가
땅 속에서 1500년 기다린 찬란한 흔적
세계유산 등재로 재평가 중

낙화암 아래 금강을 지나는 황포돛배. 고란사 아래 선착장에서 탑승하면 구드래 나루터까지 갈 수 있다. (사진=뉴시스)

 
[부여·공주·익산=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부여 사람들은 금강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부소산을 끼고 크게 돌아 부여의 젖줄인 이 강에 다른 이름을 붙인 사연은 어쩐지 가슴 아프다. 이 도시를 정복한 중국의 장수 소정방이 하얀 말의 머리로 용을 낚았다 하여 지었다. 그렇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가 부여의 옛 이름이다. 나라가 망한 후 도망치던 궁인들이 욕을 피하기 위해 40m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도 이곳에 있다.

 

부소산을 걸어 올랐다. 3년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이 있는 곳이다. 국운이 다한 백제의 왕이 거닐은 후원이자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땅. 걷기 좋게 정리된 길은 사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를 지으면서 닦았다. 부여의 사람들은 일제가 망하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신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을 모시는 사당을 지었다. 수천년간 영광과 오욕의 역사가 번갈아 사연이 많다.

부소산성으로 가는 길. 한때 백제 왕이 후원이자 피난처로 사용했으나 이제는 부여 시민의 쉼터다.(사진=이정현 기자)
 
백제왕이 왕국을 내려다보던 곳에 서서 바람을 맞는다. 123년간 백제 왕실의 공간이었던 부소산은 이제 시민의 쉼터다. 산세에 야트막해 산책하는 이가 자주 눈에 띈다. 여름을 앞두고 나무가 우거져 그늘길이 이어진다. 전날 내린 비가 채 마르지 않아 녹림이 짙다. 가을이면 발갛고 노란 단풍이 멋스러운 부여시의 명소다. 평야가 발달한 주변보다 지세가 높아 이른 겨울에는 단풍 위에 눈이 내려앉은 진풍경도 볼 수 있다.

 

산책로 끄트머리에 낙화암이 있다. 탁 트인 전망으로 발아래가 아득하다. 굴욕적인 삶을 살기보다 죽음을 택한 백제인의 결기는 산에서 내려와 탄 황포돛배 위에서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금강을 지나는 황포돛배는 현대식 유람선에 황색의 큼지막한 가짜 돛을 달았다. 관광객을 위한 짤막한 안내방송이 끝나자 가수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이 나온다. 오래된 배호의 목소리가 금강에 부는 바람을 탄다. 출력이 버거운지 스피커에서 이질음이 나지만 그것도 좋다.

백제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대 왕국이다. 고구려·신라와 경쟁한 삼국의 주역이자 세계 각국과 교역하며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에 선 해상왕국이나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 왕궁과 사찰은 불에 탔고 기록은 사라졌다. 땅에 묻힌 왕릉은 도굴꾼의 먹잇감이 됐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수도 경주가 천년고도로 명맥을 이어오는 동안 백제의 흔적은 서서히 옅어졌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비 함락 당시 불에 그을린 자국과 소정방이 새겨 넣은 승전 기록이 남아있다.(사진=이정현 기자)
 
“사비는 며칠 동안이나 불탔다. 소정방은 정림사에 있던 불탑(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에 자신의 공훈을 새겨 넣었다.” 백제의 기록은 이 땅을 정복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대부분 사라졌다. 백제 문화의 걸작이라 꼽히는 백제금동대향로는 난을 피해 달아나던 이름 모를 누군가가 진흙 속에 숨긴 덕에 겨우 전해졌다. 강성했던 무령왕의 무덤은 일제의 약탈을 피해 겨우 본모습을 지켰다. 수탈이 계속된 백제의 흔적은 살아남은 이들의 입으로 전해져 후대에 남았다. 부소산의 왕도는 지금도 부여시민의 산책로로 쓰이고 있다. 부여여자고등학교는 백제의 왕궁이 있던 곳과 가까워 언젠가 국모가 나올거라 하더라.

백제의 문화유산은 현재진행형이다. 땅 위에 세운 건물은 불타 사라졌지만 백제인의 흔적은 땅속에서 1500년을 기다렸다. 한국 고고학의 대사건이라 꼽히는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에 이어 백제를 찾는 발굴이 이어진다. 장엄한 규모를 자랑했다는 익산 왕궁리 유적 한 켠에는 지금도 학자들이 손바닥만한 호미로 조금씩 땅을 긁어내고 있다. 지루한 작업이지만 성과가 있다. 30여 년이 넘는 발굴조사로 50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했다. 익산 쌍릉에서는 조선총독부 이후 100년 만에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인골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사고 있다.

학자들이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한 기왓장 사이를 조심스레 호미로 긁어내고 있다. 이곳에서 백제시대 궁장, 석축, 대형화장실, 정원, 와적기단 건물지, 공방 폐기지, 후원 영역의 도수 등 다양한 왕궁 관련 유구가 나왔다. (사진=이정현 기자)
 
백제는 망했으나 이들이 남긴 것은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며 가치를 인정 받았다. 부여와 공주, 익산에 넓게 분포한 흔적에 전세계와 교류하며 쌓아올린 백제인의 기상이 담겼다. 이는 세계문화유산 선정 기준 중 △인류 보편적 가치의 교류 △사라진 문명에 대한 독보적 증거 임을 충족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백제가 남긴 문화재를 놓고 학자들이 하는 말이다. 무령왕 금제관식(국보 제154호)은 화려하면서도 정숙함을 놓지 않은 백제의 예술양식을 그대로 따른다. 높이 30cm 너비 14cm의 금판을 뚫어 덩굴무늬를 장식했다. 구불구불한 장식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하다. 출토지인 무령왕릉은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다.

최근 보수정비 사업을 마친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현대기술을 총동원해 되살렸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는 미륵사의 세 탑 중 하나다. 미륵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폐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 탑 중 가운데에 있던 목탑과 동쪽의 석탑은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서탑은 동북 측면으로 6층까지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콘크리트를 부어 조악하게 보완한 것을 1998년부터 해체해 20년 간 다시 쌓아올렸다. 이 과정에서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쓰인 금제사리봉영기 등이 발견됐다. 미륵사지석탑은 현재 보수를 위한 가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일반 관람객도 들어갈 수 있다.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보수 정비공사가 끝난 익산 미륵사지석탑 공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이 보강한 콘크리트를 모두 떼어내고 전통 방식에 현대 문화재 복원 기술을 더해 다시 쌓아올렸다.(사진=뉴시스)

이정현 (seiji@edaily.co.kr)

Copyright©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정현입력 2018. 7. 14. 06:00

백제금동대향로 진품은 부여에
일본인 착각 덕에 보존한 무령왕릉
미륵사지석탑 콘크리트도 우리 문화재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하늘에서 날아온 봉황이 앉아있고 다섯방향으로 쌓은 봉우리에는 신선과 상상의 동물 그리고 현실 속의 동물을 묘사했다. 몸체는 연꽃 봉오리처럼 표현했으며 받침은 용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신선이 산다는 신산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백제 고유의 멋을 살렸다.(사진=국립부여박물관)
 
[부여·공주·익산=이데일리 이정현 기자]△국립중앙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는 가짜에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백제의 예술과 사상 그리고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백제 관련 최고의 걸작이다. 백제 왕실에서 제사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의 이 향로 안에 부처는 물론 도교에 등장하는 신선과 상상의 동물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담겼다. 똬리를 튼 용이 입으로 몸체 하부를 물고 있는 받침과 연꽃잎으로 장식한 몸체, 산봉우리가 층층이 겹쳐진 뚜껑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편 봉황까지 총 네 개의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교함과 미적 가치가 아주 높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에 능산리 고분군 일대의 물웅덩이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을 마련하기 위해 일대를 사전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500여 년 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가 함락할 당시 약탈을 피해 누군가가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진품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애초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했으나 지금은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 문화의 정수라 꼽히는 이 문화재를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관람객을 맞고 있다. 현재 전시실 개선을 위해 수리를 하고 있으며 18일 다시 문을 연다.

백제 무령왕릉은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을 정비하기 위해 배수시설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학계의 백제사 재평가는 물론 새로운 고대사 연구를 가능하게 한 고고학적 대사건이었다. (사진=이정현 기자)
 
△‘무령왕릉’ 살린 日 가루베지온의 착각

무령왕릉(사적 13호)은 오랫동안 도굴꾼이 탐내는 먹잇감이었다. 혼란한 백제를 수습하고 고구려에 맞서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한 강왕, 중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과 교역하며 해상왕국으로서 입지를 다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문왕, 인망이 두터워 백제인의 존경을 받았다는 덕왕이 묻힌 곳의 금은보화를 노렸다.

무령왕릉을 탐한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공주 지역의 백제 유적을 무단 발굴 조사한 일본인 가루베지온 역시 마찬가지다. 공주지역에 교사로 부임한 그는 일대 고분 100여 개를 조사하며 무령왕릉을 집요하게 쫓았다. 하지만 그는 송산리고분군 6호분을 무령왕릉으로 착각했다. 진짜 무령왕릉은 1971년 우리 학자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데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이라는 점에서 국내외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무령왕 지석, 금제관식, 금귀걸이 등 유물 4600여 점이 출토했으며 왕릉 출토 유물중 최다 규모의 국보(17점)를 냈다. 무령왕릉 내부는 1997년 7월에 문화재청이 보존 등을 이유로 폐쇄해 들어갈 수 없다. 인근에 있는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에서 똑같이 재현한 무령왕릉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이 있는 미륵사지는 국내 최대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최대 규모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다.(사진=문화재청)
 
△일제가 ‘미륵사지석탑’에 땜질한 콘크리트도 문화재

익산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 미륵사에 있었던 세 개의 탑 중 하나다.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석탑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이 반영된 독특한 양식이다. 가운데 있던 목탑은 소실되었으며 동탑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1992년에 9층 탑으로 복원했다. 그나마 본모습이 남은 서탑도 상당부분이 훼손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땜질을 해놓았다.

 

미리사지석탑이 제 모습을 일부 되찾았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구조적 불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해체 수리를 시작했다. 탑에 붙은 콘크리트를 일일이 떼어내고 원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해 완전 복원이 아닌 원래 남아 있던 6층까지 수리·보강했다.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기간 수리며 국제적 기준에 따라 조사 및 수리 과정을 이행하였다는 점에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다.

미륵사지석탑 보수 정비 사업 과정에서 떼어낸 콘크리트 덩어리는 현재 보관 중이다. 박물관 등에 전시할 계획도 있다.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일본인이 콘크리트로 보수해 놓은 것도 문화재의 하나라 보고 일부를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정현 (seiji@edaily.co.kr)

Copyright©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현재 행정구역명은 웅진동)에 위치한 백제의 왕릉들로 추정되는 고분들로 현재 1, 2, 3, 4, 5, 6, 7호 분이 복원이 되어 있다. 이중 7호분은 무령왕릉으로 더 널리 알려져있다.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능산리 고분군정림사지부여 나성))가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2021년 9월 17일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2023년 여름 한반도 집중호우로 흙더미가 무너졌다.[1]

 

1 ~ 4호분[편집]

1~4호분

 

공주 송산리 1호분(公州 宋山里 一號墳)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중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하나이다.

남쪽으로 면한 구릉의 사면(斜面)을 파고, 직사각형 묘실을 활석으로 쌓고 벽면에 회칠을 했는데 천장은 안으로 좁혀든(內傾) 네 벽 위에 얹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배수구(排水構)가 연문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중앙을 지나 밖으로 뽑아지고 있다. 벽면에 휘장을 쳤을 것으로 여겨지는 못이 박혀 있는데 이러한 예는 함안(咸安)의 가야시대(伽倻時代) 고분에서도 볼 수 있어 서로 교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 전체적인 가구나 형식이 고구려의 분묘와 흡사하여 이러한 유의 고분형식이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전(南傳)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 ~ 4호분은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1927년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이전에 이미 도굴됐다. 조사 당시 동서방향으로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4기만 복원되어 있다. 벽돌로 쌓은 묘실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은 정사각형의 형태이며, 남벽의 우측에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인 널길이 달려있다. 벽면과 천장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조사 당시에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5호분[편집]

5,6호분과 무령왕릉

5호분은 1932년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되었는데, 1~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 돌방무덤이다. 130cm 높이까지 벽면을 수직으로 쌓고, 그 위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천정이 돔 형태가 되도록 하였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 놓는 관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조사 전에 도굴되어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 등이 남아 있었다. 백제의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6호분[편집]

 공주 송산리 6호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호분은 무령왕릉과 함께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으로 굴식 벽돌무덤이다. 무덤의 내부에는 벽화가 있다. 공주고보(현재의 공주고)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도굴하였다.[2]

7호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무령왕릉입니다.

무령왕릉(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1990년대 초기까지만 일반 방문객들은 모여서 요청하면 관리자가 동행하여 고분 안의 유리벽으로 막힌 석실 바로 앞에 고분의 벽돌 바닥면을 밟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죽어있었다

 

 

유의주입력 2021. 9. 30. 10:05

 

 

수정 2021-09-14 02:30 등록 2021-09-13 18:54

집요한 잔조각 찾기…50년 걸려 복원한 무령왕 금동신발 (hani.co.kr)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현장

기자노형석

 
최초로 전시장에 공개된 무령왕의 금동 신발. 발굴 당시 형태가 으스러져 원형을 찾기 어려웠으나 최근 보존 복원 작업을 거쳐 왕비의 신발과 함께 처음 선보이게 됐다.

1500년 전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의 발에 신겼던 큰 금동 신발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구려에 패해 망한 것이나 다름없던 왕조를 웅진(공주) 땅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제왕이었다. 신발은 22년간 재위하며 눈부신 치적을 쌓은 왕이 죽자 슬퍼한 왕족들이 주검에 신겨 무덤에 넣어준 껴묻거리였다.

국립공주박물관이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으로 13일 개막 행사를 연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전 현장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처음 공개된 왕의 신발이었다. 측판과 바닥판을 이어 만든 금속 신발은 왕릉 발굴 당시 형태가 으스러져 원형을 찾기 어려웠으나, 박물관 연구진이 집요하게 잔편을 추적하고 이어붙이는 복원 작업 끝에, 역시 뒤꿈치가 복원된 왕비의 금동 신발과 함께 처음 선보이게 됐다. 녹슬어 어두운 빛이었지만, 육각무늬와 맞새김된 꽃무늬가 드러난 신발에는 군주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국립공주박물관 상설관에 차려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들머리에 나온 동탁은잔(청동받침이 있는 은잔). 잔과 받침에 연꽃, 톱니 등의 무늬와 인면조, 용, 사슴, 새 등의 온갖 신령스러운 동물들을 새겨놓은 백제 공예미술의 명품이다. 웅진백제 시기 백제인의 사상과 미의식을 집약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14일부터 내년 3월6일까지 상설관과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전시는 금동 신발 등 왕릉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발굴 이래 최초로 모두 꺼내놓았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한 국보급 명품들을 중심으로 출토품들을 새로이 배치했다. 들머리에는 학계에서 ‘동탁은잔’이라고 흔히 불러온 청동받침 있는 은잔만 단독으로 부각시켰다. 잔과 받침에 연꽃, 톱니 등의 무늬와 인면조, 용, 사슴, 새 등의 온갖 신령스러운 동물들을 새겨놓은 백제 공예미술의 명품이다. 실체의 기억이 모호한 웅진 도읍기 백제인의 사상과 미의식을 집약해 보여주는 결정체다.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 금귀걸이, 청동거울, 진묘수 등 주요 유물들은 몰입해 감상할 수 있게 저반사 유리 진열장에 넣어 전시한 점이 돋보였다.

무령왕릉의 대표적인 출토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무령왕의 관꾸미개 장식. 치솟아 오르는 화염 모양의 무늬가 특징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육각형, 직사각형의 금속 마구리를 씌워 온전하게 복원한 왕의 목관을 처음으로 왕비의 목관과 나란히 선보인 점도 호평을 받았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옛 송산리고분군의 배수로를 파다 무령왕릉의 입구를 막은 벽돌을 발견했던 당시 최초 보고 문서와 조사 실측 도면, 탁본, 언론 보도 기사 등을 먼저 보게 된다. 뒤이어 핵심 유물의 실물이 발굴 이후 50년간 이뤄진 주요 연구 성과와 함께 줄줄이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는 발굴 뒤 처음으로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 베개가 나란히 진열장에 나왔다. 무령왕릉의 대표 공예품 중 하나인 왕과 왕비의 베개는 보존상의 어려움 때문에 대개 복제품만 전시되거나 따로따로 전시되어 왔다.

삼국시대 목제 공예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작으로 회자되는 무령왕과 왕비의 목제 베개와 발받침이, 두 사람의 주검이 놓였던 자리인 시상대와 함께 나란히 진열장에 나온 것이 감상의 알짬이다. 왕과 왕비의 베개는 보존상의 어려움 탓에 복제품만 전시되거나 따로따로 전시된 터라 동시 전시는 희귀한 구경거리다. 왕과 왕비의 금동 신발에 붙은 채 발견된 직물 등을 분석해 금(錦)과 라(羅) 직물 재현품을 내놓았고, 발굴 현장에서 흩어진 채 발견됐던 꽃, 오각형, 사각형 등 갖가지 모양의 꾸미개, 못들을 처음 모아 보여준 시도도 특기할 만하다.

1971년 7월 조사단원들이 무령왕릉의 아치형 입구 연도(널길)를 가로막았던 벽돌들을 빼고 있는 모습이다. 입구 연도 구멍을 빽빽히 채웠던 벽돌들을 걷어내고 묘실 내부로 들어간 조사단은 이후 몰려든 취재진과 주민들에 겁을 먹고 하룻밤 새 유물들을 모두 쓸어담는 패착을 두게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전시를 보고 나면 두 가지 요점을 알게 된다. 우선 왕의 관과 부장품이 왕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나 격조가 높다. 무령왕이 절대권력자였음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또 그의 관과 묘실 곳곳은 각종 꾸미개와 못으로 고정한 화려한 직물들로 덮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특별전에서 새 연구 성과로 은연중 강조하는 내용이다.

공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입력 2021.09.13 15:41

업데이트 2021.09.13 17:15

'계란 1개 무게' 금귀걸이, 왕비 은팔찌…무령왕릉 발굴 50년전 | 중앙일보 (joongang.co.kr)

무게 각 53.4g, 54.7g의 무령왕릉 금귀걸이는 국내에서 발견된 금귀걸이 중 가장 무겁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을 14일부터 내년 3월 6일까지 연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진묘수. 무령왕릉 입구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입에 붉은 칠(나쁜 기운을 쫓음), 발에 녹색 채색(무덤을 지킴), 몸통에 날개문양(망자를 좋은 세상으로 안내함) 등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의 벽돌 구조를 차용해온 중국 남조에서 '진묘수'를 썼지만, 사진의 돼지와 비슷한 형상이 아니라 물소, 악어 형상이 많았다. 돼지는 무령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상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묘지석. 무덤의 주인(무령왕)과 사망연도가 적혀있다. '송산리 고분군'으로만 알려졌던 공주 일대 고분군이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가장 뚜렷한 자료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측은 이번에 공개되는 '받침있는 은잔'이 '백제 금동대향로만큼 의미있다'고 분석한다. 잔과 받침에 그려진 각종 문양이 백제 시대 종교와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베개(오른쪽)와 발받침은 올해 처음으로 실물을 공개한다. 왕의 물품에는 왕비의 것에는 없는, 금으로 만든 꽃모양 꾸미개가 빼곡히 붙어있다. 국립공주박물관

날개달린 화형 금꾸미개. 무령왕릉에서 수습해온 바닥 흙에서 금과 은, 청동으로 된 꾸미개가 수없이 발견됐다. 얆게 편 금으로 꽃 모양을 만들고, 매달 수 있는 고리를 꼬아 걸었다. 천 등에 바느질을 할 수 있게 작은 구멍도 뚫려있어, 백제의 금속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한 단편이다. 최장열 학예연구실장은 "시신에만 장식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은 양이고, 무덤 안의 휘장 등에 사용했던 꾸미개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비가 살아있을때부터 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팔찌. 팔찌 안쪽에 만든 사람과 일자가 새겨져있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백제시대에 제작되어 사용된 연꽃무늬 벽돌.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백제는 금을 얇고 섬세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왕이 사용했던 금 관꾸미개. 검정색 비단 모자에 아래쪽 뾰족한 침을 꽂아 고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송고시간2021-07-06 07:00 

무령왕릉 발굴 50년…새 보고서에서 찾은 5가지 이야기 | 연합뉴스 (yna.co.kr)

무령왕릉 북벽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3. 22. 06:01수정 2021. 3. 29. 10:29

[경향신문]

 

2021년은 한국 고고학사에 매우 뜻깊은 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딱 50년이 지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고분 중 도굴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첫번째 고분이 현현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임금(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뒤 공주로 천도한 뒤에 국력을 가다듬고는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역사서의 표현인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521년)한 지 1500주년이 되는 해라네요. 당연히 잔칫상을 받아야 하겠네요. 아닌게 아니라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 무령왕릉 발굴 50년과 백제 ‘갱위강국’ 선언 1500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네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나무 베개는 봉황, 어룡(魚龍), 연꽃, 덩굴무늬를 새겼고,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진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다. 국보 164호로 지정됐다. 오른쪽은 왕비의 발받침이다. 장식이 붙어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런데 한가지 이의를 제기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무덤 주인공이 무령왕이기로소니 남편과 함께 묻혀있는 무령왕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소홀한게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무령왕비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에 나오지 않으니 사실 뭐라 언급핳 거리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 관련 지석이나 유적 방향, 유물 등을 토대로 몇가지 짐작할 바가 있겠죠. 있습니다. 이번에는 관련 영상을 붙여 무령왕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정지산 기와건물의 비밀

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해야 했죠. 그렇지만 웅진 백제의 고도인 공주를 마구 파헤칠 수 있나요. 당연히 문화재조사가 선행되어야 했죠. 그 지표조사를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는데요. 과연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습니다.

그냥 넘길 수 없었죠.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발굴을 맡은 이한상 학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현 대전대 교수)가 보기엔 발굴이 진행될수록 좀 이상했대요. 해발이 70m도 안된다 해도 산은 명색이 산인데 산의 정상부가 너무도 평탄했기 때문이죠.

저도 가봤는데요. 정말 그렇다라구요. 정상부의 면적은 800여평이었는데 마치 학교 운동장 같았습니다.

그 곳에서 7기의 건물터가 노출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유독 한가운데 평탄지에 있는 돌출된 중앙건물지(15.5평·8m×6.4m)가 돋보였답니다. 주변에서 기와가 발견됐으니 지체높은 기와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고요. 주변의 땅 전체를 깎아내어 건물을 높여 웅장함을 더하고 배수문제를 해결했대요.

무령왕비의 유품 중 국보로 지정된 유물들. 왼쪽부터 관장식(국보 155호)와 금귀고리(157호), 금목걸이(158호), 은팔찌(160호) 등.|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런데요. 다른 건물지와 달리 적심(기둥을 세우려고 초석 밑부분에 구덩이를 파고 석재를 채워놓는 일)도, 초석도 없었는데, 무려 45개의 기둥이 3열로 박혀 있었답니다. 게다가 건물의 중앙부에 다시 4개의 기둥구멍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파여있었데요.

좀 이상하죠. 15평 남짓되는 기와건물에 초석도, 적심도 없이 그저 맨땅에 구멍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는 거니까요. 그랗다면 건물도 튼튼하지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 15평 남짓한 이 건물 안에는 사람이 활동할만한 공간이 거의 없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데요. 오래 사용한 건물이 아니라 일정기간 사용했던 특수목적 건물이 아니었을까. 뭐 그렇게 추론했답니다. 이상한 거 투성이죠. 대체 백제인들은 왜 이 야트막한 야산에 800평 가량의 넓은 공간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활동할 수 없는 기와건물을, 그것도 잠깐의 목적을 위해 조성했던 것일까요.

백제큰길 조성을 위해 잘릴 위기에 놓였던 정지산 정상에서 수상한 기와건물지가 확인됐다. 다른 건물지와 달리 적심(마루나 서까래의 뒷목을 보강하기 위하여 큰 원목을 눌러 박은 것)도, 초석도 없었는데, 45개의 기둥이 3열로 박혀 있었다.건물의 중앙부에 다시 4개의 기둥구멍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파여있었다. 의미심장항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자 도로는 터널을 뚫고 조성되는 방향으로 설계가 바뀌었다.


■신지와 유지는 어느 방향일까

그래서 이한상 학예사가 여러 단서를 찾기 시작했답니다. 먼저 유물을 살펴보았대요. 뭐 웅진백제 시기(475~538년)의 벽돌이 나왔고요. 장고 모양의 그릇받침(器臺) 조각도 17점 확인됐답니다. 그릇받침은 말 그대로 일반적으로 제기를 올려놓는 받침대죠. 출토된 토기들도 고급의 정품(精品)이 많았답니다. 그중에는 왜계열인 스에키(須惠器·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5세기부터 일본에서 제작된 회색토기)와 하지키(土師器·일본의 전통적인 토기)가 보였답니다. 또 고창과 나주, 고령 등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외부 토기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답니다. 뭐 그렇다면 정지산은 제사를 지낸 곳이고, 왜국이나 가야 같은 곳에서 사절을 보내 이 제사에 참석한 것이 아닐까요.

제사유적이라구요. 아 그렇죠. 이한상 학예사의 뇌리를 스친 유적이 있었습니다. 정지산 유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무령왕릉이었어요. 650m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무령왕릉의 주인공은 백제 25대 임금인 무령왕(재위 501~523년)과 무령왕비잖아요. 그런데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 부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한 명문기록이 많이 나왔죠.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과 무덤의 소재를 기록한 돌판, 즉 지석하고요. 무덤조성을 위해 땅을 매입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알린 매매계약서인 매지권 등이 발굴됐잖아요.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및 매지권. 왕과 왕비가 서거한 뒤 서남쪽(申地)에 무덤을 마련했고, 특히 왕비의 경우 27개월간 서쪽(酉地)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의 지석과 매지권을 종합하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마왕(무령왕)이 나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

의문점이 또 생기죠. 24방위의 하나인 ‘신지(申地)’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이것은 서쪽에서 남으로 30도 안쪽의 방위를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무령왕이 묻힌 땅, 즉 지금의 무령왕릉이 서남쪽 땅이라는 이야기죠.

 

무령왕비는 어떨까요. 무령왕의 매지권을 새긴 지석의 뒷면에는 무령왕보다 3년뒤(526년) 서거한 무령왕비의 행적과 무덤 소재지를 밝힌 묘지가 적혀있었는데요. 무령왕비의 묘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비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유지(酉地·서쪽)에서 상례를 치르고(居喪在酉地), 기유년(529년) 2월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지냈다.”

‘유지(酉地)’는 정서쪽의 땅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내용을 정리해봅시다.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 서거했고, 27개월만인 525년 8월12일 서남쪽에 조성된 대묘(무령왕릉)에 안장됩니다. 그런 뒤 1년 4개월만인 526년 12월 부인(무령왕비)도 서거합니다.

그러나 부인은 곧바로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합니다. 일단 ‘유지(酉地)’, 즉 정서쪽의 땅에서 장례를 치른 뒤 27개월만에 남편이 묻힌 대묘(무령왕릉)에 합장됩니다. 남편인 무령왕도, 부인인 무령왕비도 똑같이 죽은 지 27개월 뒤에 지금의 무령왕릉에 묻힌거죠. 그런데 왕비의 경우 남편 곁에 묻히기 전에 일단 상례를 치른 곳이 유지(酉地), 즉 서쪽이라 했습니다.

이한상 학예사가 왕과 왕비의 거처인 공산성을 기준으로 방위와 각도를 재보니 왕와 왕비가 묻힌 무령왕릉은 신지(서남쪽)이고, 왕비의 시신이 27개월간 장례를 치른 곳(유지·서쪽)은 정지산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한상 대전대교수 제공


■조문객 맞이한 빈전?

그렇다면 방위의 기준점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국왕 부부가 생전에 거처했고, 정사를 펼쳤던 왕궁이 기준점이었겠죠. 왕궁이라면 공산성이었을 겁니다. 이한상 학예사는 공산성을 기준점으로 무령왕릉과 정지산의 방위와 각도를 재보았는데요. 과연 꼭 들어맞았답니다. 즉 공산성에서 볼 때 서남쪽(신지)에 무령왕릉이, 서쪽(유지)에 정지산이 기막히게 걸렸습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해발 67m 정지산 정상부 800여평 땅에 죽은 무령왕비의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한 공간이 아니었을까요. 이곳에서 국내외 조문객의 문상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유구와 유물의 양상을 더듬어보니 얼추 맞았답니다.

즉 왕비의 시신은 기둥만 3열 45개 박아 조성한 기와건물 안에 모셨을 겁니다. 건물의 구조를 추정해봅시다. 흙으로 된 벽체는 없었으며 밀착된 기둥사이로 공기가 통하도록 배려했을 가능성이 짙어요. 내부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을 보면 건물구조가 2층일 가능성도 있지만 평상 등의 시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시신을 보관한 자리일 수 있다는거죠.

무령왕비의 시신을 27개월간 두고 조문객을 받은 정지산 빈전의 상상도. |이한상 교수 제공


■얼음 보관한 빙고가 존재했다

한가지 의문점이 더 생기겠죠. 무령왕비의 빈전은 27개월 동안 차려졌을 것인데, 시신은 어떻게 썩지 않게 보관했을까요. 일단 음력 12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시신 또한 별탈없이 겨울철 한철은 날 수 있었겠죠.

그러나 여름철은 어떻게 보관했을까요. 여기에서 김길식 용인대 교수의 연구가 눈에 띄는데요. 정지산에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려고 조성한 빙고(氷庫)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살펴볼까요. 정지산에는 괴상한 형태의 구덩이가 있는데요. 진흙덩어리가 두껍게 깔려있는 구덩이였는데요. 구덩이 윗부분에는 목탄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 모서리에 U자형 관(배수로)이 설치됐어요. 이 관은 아래쪽으로 경사지게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배수로 끝에는 깊이 30~40㎝의 구덩이가 또 있었어요.

상상해볼까요. 구덩이의 상층부에 겹겹이 쌓인 진흙덩어리는 무엇일까요. 고체인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긴 끈끈한 점액질이 아닐까요. 혹 겨울철에 인근 금강의 얼음을 잘라 저장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놓고 얼음이 쉽게 녹지 않도록 짚, 솔가지 등의 보냉재와 빙탄으로 사용할 목탄을 쌓아두고는 구덩이 상부를 덮은 것은 아닐까요. 얼음이 녹으면 배수관을 통해 경사진 밑에 설치된 소형구덩이로 흘렀겠죠.

또 정지산의 저장구덩이에서 특히 외부토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이것은 조문사절이 가져온 재물을 특별히 ‘보관한’ 것은 아닐까요.

정지산 빈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빙고. 겨울철에 금강에서 얼음을 얻어 빙고에 저장해놓고 시신을 썩지않게 보존했을 것이다. |김길식의 논문에서


■무령왕비 홀대론?

이렇게 저장한 얼음덩이를 어떻게 무령왕비 시신의 부패방지에 사용했을까요.

기와건물지 한가운데는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다면 어떨까요. 바로 그 관의 밑바닥에 빙반(氷盤)을 조성, 빙고에서 보관된 얼음덩어리를 부패방지용으로 깔아놓았을 가능성이 크죠. 터무니 없는 상상력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其死 夏月皆氷)”(<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부여조’)고 했고, “505년(신라 지증왕 6년)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지증왕조)고 했습니다. 부여와 신라에 존재했던 빙고가 백제에 없었을 리가 없죠.

무령왕과 무령왕비는 왜 죽은 다음 곧바로 묻히지 않은 것일까요. 중국측 기록은 <수서>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서 빈소를 차리고 3년이 지나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고 기록했어요.

‘빈(殯)’은 대체로 죽음(상·喪)에서 장례식까지의 기간 혹은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셔놓은 공간을 말합니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을 토대로 계산해보면 백제왕과 왕비의 시신이 빈전에서 문상객을 받은 기간 27개월인데요. 만 3년은 아니지만 햇수로 3년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무령왕릉의 지석내용을 토대로, 정지산 유적의 유구·유물 출토상황 등을 종합해보면 ‘정지산=무령왕비 빈전’ 설이 유력해보입니다.

최근에는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정지산 유적이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국가시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이 주장은 정설로 굳어진 ‘정지산=무령왕비 빈전’설에 대한 문제제기 형식의 반론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무령왕 뿐 아니라 무령왕비와 관련된 스토리텔링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왕비의 유물도 많잖아요. 엄연히 부부묘인데 너무 무령왕에게만 관심을 둔 것 같아요.

<참고자료>

이한상, ‘백제의 상장의례와 고대 동아시아’, <충청학과 충청문화> 19집, 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14

김길식, ‘고대의 빙고와 상장례’, <한국고고학보> 47권, 한국고고학회, 2002

이병호, ‘백제왕실의 조상제사 변천에 대한 시론’, <동아시아 종묘와 무덤제사의 비교고고학> 학술대회,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지단·성림문화재연구원 공동주최, 2017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Copyright©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혜란입력 2021. 2. 23. 11:16수정 2021. 2. 23. 13:38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제관식(관 꾸미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 무령왕릉 50년, 졸속 발굴이 문화재과학 초석 되다

「 “이 무덤은 백제 사마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1971년 7월 8일 흥분을 억누르며 김원룡 발굴단장(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했다. 벽돌로 덮어 쌓은 아치형 무덤 입구 한쪽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직후였다. 벌떼처럼 둘러싼 기자들이 “사마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 역대 왕조 연표를 들어 확인시켜준 공식 시호는 백제 25대 무령왕. 5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되다)’을 선포한 백제 중흥의 군주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침묵을 깬 순간이었다. 2021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포 1500주년.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발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을 통해 문화재 발굴과 보존과학 50년을 3회에 걸쳐 돌아본다.

 


천마총·황남대총·무용총·쌍영총…. 신라·고구려의 고분들은 대체로 ‘총’으로 끝나는데 왜 무령왕릉은 ‘능’일까. 이런 의문을 품은 적 있다면 1500년 된 고대사 ‘블랙박스’를 열어젖힐 준비가 됐다. 그만큼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푸는 열쇠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 중 첫 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 공주대 교수(사학과)의 설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삼국시대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왕릉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태릉, 정릉 등) 일반인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총은 왕에 준하는 사람 무덤 같긴 한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 붙이는 이름. 예컨대 천마총 발굴 당시 경주 김씨 종친회에서 “신라 왕릉이 확실한데 왜 천마총이라 부르느냐”며 들고 일어났어도, 누구 무덤인지 알 수가 없어 묵살되기도 했다. 무령왕릉과 천마총 발굴에 잇따라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다. 고고·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 ‘능’은 무령왕릉 뿐”이라고 강조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연도 상부 세부 노출 상태.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석수(진묘수)와 지석(묘비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힌 부분. '사마'는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게다가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백제 고분이다.(이렇게 손을 안 탄 무덤을 ‘처녀분’이라 불렀는데, 요즘 언어 사용에선 기피되는 단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공주 백제 유적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교사로 일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의해 샅샅이 털렸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스스로 “백제 고분 1000기 이상을 조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설사 가루베가 훼손한 게 아니라 해도 백제 고분 구조가 신라에 비해 도굴이 쉬운 편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꾼이 무너뜨리지 않고 유물을 빼돌리기 힘든 반면, 백제는 돌방무덤 아니면 전축분(벽돌무덤)이라 입구가 한번 노출되면 훼손이 쉽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에 위치했던 무령왕릉은 기적적으로 가루베 혹은 여느 도굴꾼의 눈을 피해, 1500년 만에 고스란히 실체를 드러냈다.

 


국보 17점 쏟아진 '백제 고분예술의 정수'
온전히 보존됐다 하더라도 백제 고분은 상대적으로 부장품이 적은 편이다. 가루베가 빼돌렸을 유물도 간 곳을 알길 없다. 그런데 무령왕릉에선 국보 17점을 포함한 유물 수천점이 쏟아졌다. 특히 얇은 금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교한 금속 공예는 황홀한 예술성의 경지다. 엇비슷해 보여도 왕 관모장식(관 꾸미개)은 타오르는 여러 겹의 불꽃 모양이고 왕비 것은 막 피어오르는 연꽃을 닮았다. 총 5쌍의 금귀걸이와 2개의 금목걸이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 검이불루)는 백제미의 진수가 배어 있다. 정교한 신수무늬거울(神獸鏡)과 은탁잔, 은팔찌의 자태까지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금귀걸이.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비의 베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글자를 새긴 용무늬 팔찌. 팔찌 안쪽에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다리’라는 장인이 만들었다고 새겼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이 같은 유물들은 묘지석의 절대편년에 힘입어 뚜렷한 역사성을 지니게 됐다. 나아가 후속 연구로 밝혀진 소재·양식 등은 당대 동아시아 무역교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정재윤 교수는 “중국제 청자·동전꾸러미, 일본산 금송으로 된 관 재료, 동남아 원료인 구슬 유물 등을 통해 6세기 백제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도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신라 위주로 쓰인데다 백제 유적이 극히 적은 편인데, 무령왕릉 덕에 공주시와 백제사 고고학자들이 먹고 살 수 있다”며 웃음기를 섞어 강조했다.


6세기 한·중·일 교류 밝힌 기념비적 발굴
권오영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6세기 전반은 백제, 양나라(중국), 일본 간에 유례없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라면서 “한·중·일, 나아가 동남아까지 학문과 예술이 교류한 흔적이 무령왕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짚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가 등재됐을 때도 이 같은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적극 강조됐음은 물론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값진 유물을 무덤에서 내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2시간.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초고속 발굴’이었다. 공사인부의 삽날 끝에 벽돌이 걸린 때로부터 발굴단이 손을 털고 나온 7월 9일 오전까지 불과 5일. 누가 등이라도 떠민 걸까. 1971년 7월 발굴단을 휘감았던 강박은 대체 무엇일까. 그날 밤 공주 송산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내부 보호를 위해 1997년 영구폐쇄됐다. [중앙포토]
 


〈2편으로 계속〉
취재·글=강혜란 기자, 그래픽·영상= 심정보·이세영
theother@joongang.co.kr

Copyright©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백제 무령왕릉서 나온 묘지석은 어디서 비롯했나

송고시간 | 2019-07-21 11:02

국립공주박물관 '중국 낙양 고대 묘지 탁본' 특별전

https://www.yna.co.kr/view/AKR20190721014300005?input=1179m 

 

백제 무령왕릉서 나온 묘지석은 어디서 비롯했나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고분은 백제 무령왕릉 외에는 없다.

www.yna.co.kr

 

 

 

 

[부여]

[부여왕릉원]

 

부여 왕릉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왕릉원은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15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의 후기 고분들로 사비의 외곽성인 나성 밖에 자리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9월 17일에 능산리 고분군에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역사[편집]

조선시대 공주의 옛읍지에 따르면 부여현의 관아에서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백제 시대 왕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능뫼 또는 능산리라는 지명으로 왕릉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1917년1936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1966년 추가로 고분 1기를, 2016년 추가로 고분 3기를 더 발견하였다.[1]

백제 사비 도읍기(538~660, 지금의 부여)에 조성되었다.[2]

고분들[편집]

중앙의 고분군 모형

능산리에 있는 고분의 총 개수는 20개이고, 능산리의 고분들은 중앙 및 좌, 우의 세 무리 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1960년대에 복원한 중앙 지역, 2016년에 발굴 조사를 진행한 서쪽 지역과 현재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동쪽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3차례 조사된 바 있으며 중앙 지역에 8기, 동쪽 지역에 5기, 서쪽 지역에 7기가 남아 있다.[1] 또한 무덤들 서쪽에서 발굴된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출토되어 왕실 무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2]

앞줄 가운데에 있는 중하총은 널방 천장이 터널형으로 축조되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과 유사하다. 축조한 재료는 다르지만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되어 왕릉으로 추정하는데,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릉일 가능성이 있다. 벽그림(사신도)이 있는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의 릉일 가능성이 있다.[3] 고분들의 왼쪽에는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가져온 흙으로 조성한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가 있다

능사터와 백제금동대향로[편집]

1993년 나성과 고분군 사이에서 능사터가 발굴되었는데, 이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편집]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들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부여 나성))가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 이번 세계 유산 등재는 충청권에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4]

 

 

노형석입력 2020. 7. 15. 09:06수정 2020. 7. 15. 11:36

부여 백제 왕릉 레이더 쏘아 탐사해보니..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daum.net)

능산리 고분군 6년간 물리탐사 결과
사비시대 왕릉 배치와 규모 확인
현재 복원 무덤보다 훨씬 큰 규모

하늘에서 본 능산리 고분군. 아래쪽으로 돌출된 숲 한가운데 누런 땅 드러난 부분이 서고분군의 8, 10호분 발굴지점이다. 숲 오른쪽의 잔디밭 봉분들이 사적 지정된 기존 능산리 고분군이다. 숲 왼쪽의 허옇고 큰 건물터는 1993년 금동대향로가 나온 능사 터다. 사진 한국전통문화대 고고학연구소 제공
능산리 중앙고분군 지하 물리탐사 결과 작성된 지하 유구 분포 도해도. 주요 무덤들을 둘러싼 점선은 물리탐사로 드러난 호석 추정 열을 따라 그린 선으로 백제 왕릉의 봉분이 현재 복원정비 되어있는 지름 20m 규모보다 훨씬 크게 조성됐으며,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두 기씩 서로 연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제 왕조는 5세기 고구려에 패해 첫 도읍지 한성(서울)에서 밀려난 뒤 6~7세기 웅진(충남 공주)과 사비(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겨 다시 일어서게 된다. 백제의 이 중흥기 시절 왕조를 대표하는 왕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많은 이들이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채 수 많은 보물을 쏟아내 세상을 놀라게 한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고역사학계 전문가들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또 다른 왕릉급 고분군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사비)의 동쪽 산기슭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국가사적)이 바로 그곳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릉급 무덤 떼다. 학계에서는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등 백제 후기 왕가의 여러 제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큰 묘역 터로 간주해왔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 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와 30년대 일본 학자들의 발굴 조사 뒤로는 거의 조사 되지 않았던 능산리 고분군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 고분군에 대해 약 6년간의 지하 물리탐사를 벌인 끝에 최근 백제 사비시대 당시 왕릉의 배치와 규모가 지금 복원된 모습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연구소는 2014~2019년 묘역 중앙부와 진입부를 대상으로 레이더 전파를 고분군 땅 밑으로 쏘아 지하의 매장물을 파악하는 지하 물리탐사 작업을 벌였다. 결과를 보니, 각 봉분 외곽에는 호석(護石)으로 판단되는 이상체 반응이 확인됐으며, 이를 분석한 결과 사비기 능산리 왕릉의 봉분 규모가 현재 복원·정비된 지름 20m보다 훨씬 큰 25~30m정도인 것으로 파악됐다. 연구소는 이런 내용이 담긴 종합적인 물리탐사 결과를 15일 발표했다.

호석이란 무덤 봉분 외곽에 둥글게 열을 지어 두르는 고분의 경계를 표시하는 돌을 말한다.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이 호석이 일본학자들의 발굴 조사 사진에서 일부 나타난 것 외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물리탐사를 통해 중앙 고분군 7기의 모두에서 완형 또는 부분적인 원호가 나타난 것이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과 남쪽의 평탄대지에 대한 2014~2019년 지하 물리탐사 작업의 범위를 전체 사진에 합성한 도해도. 지하에 있는 이상체 반응을 탐색한 물리탐사 작업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동 진행했다.
부여 능산리 중앙고분군의 물리탐사 작업 광경. 지난해 찍은 사진이다.

이를 통해 중앙 고분군을 이루는 주요 무덤인 동하총과 중하총, 서상총과 서하총, 중상총과 동상총이 각각 두 기씩 모여 있는 배치 얼개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장한길로 학예사는 “탐측 결과 호석 추정 열이 붙은 고분이 두 기씩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 간에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과 왕비 무덤이 함께 조성됐거나 가족 단위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육안으로는 각각의 고분이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덤끼리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연구소 쪽은 무덤 사이 빈 곳 여기저기서 이상체가 감지된 만큼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무덤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조사는 백제 후기 능원 종합 학술연구 사업의 핵심인 능산리 고분군 중장기 학술조사의 첫 단계인데,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보가 나와 학계의 기대감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공중에서 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전경. 중간에 일곱개의 무덤 자리가 보이는 곳이 능산리 중앙고분군이며, 왼쪽 상단에 숲으로 둘러싸인 네모진 구역이 지난 2016년 4기의 무덤이 발굴된 서고분군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조선 영조 때인 1757년 나온 공주의 옛 읍지인 <여지도서> 등에 언급돼 있다. 부여현 관아 동쪽에 ‘능산’이 있다는 기록이 나와 조선시대 선조들은 이미 백제의 왕릉급 무덤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능의 내부 실체가 처음 드러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뤄진 세 차례의 발굴조사였다. 1915년 구로이타 가쓰미와 세키노 다다시,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가 중앙고분군과 서고분군을, 1937년 우메하라 스에지가 동고분군을 발굴했다. 정식 보고서 없이 1916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와 1920년 나온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에 간단한 설명과 내외부를 찍은 유리건판 사진 몇 장만 남겼을 뿐이지만, 중앙 고분군의 고분 6기와 동서 고분군의 9기 등 고분 15기가 당시 확인됐다.

 

이후 60년대 봉분을 정비하면서 고분 2기가 다시 드러났고, 2016년 한국전통문화대 조사팀의 서고분군 발굴로 3기의 고분이 추가 확인돼 현재까지 20기가 파악된 상태다. 특히 2007년까지 무덤 내부가 개방됐던 중앙 고분군의 동하총은 고구려 강서무덤처럼 사신도 벽화가 남아있는 유일한 백제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덤 얼개는 백제 후기의 전형적인 굴식 돌방무덤이지만, 세부 양식에선 웅진 시기 벽돌 무덤의 아치식 천장이 정제된 판석과 꺾임 천장을 쓰는 석실분으로 변모돼 가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백제 능원 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주목됐다. 고분군 서쪽 능산리 절터(능사)에서는 1992년 백제 미술품 가운데 최고 걸작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이 출토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오는 9월부터 일제강점기 발굴 이래 100여년 만에 능산리 중앙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재발굴 조사에 들어간다. 잠정적인 계획안에 따르면, 2038년까지 진행되는 대규모 중장기 조사다. 올해 하반기 첫 조사는 시굴 성격으로 이번 물리탐사에서 확인된 무덤 부근 지하 호석을 확인하고, 내부를 흙으로 메운 동하총의 관대 등을 해체·분석할 계획이다. 김대영 학예연구사는 “발굴을 통해 능산리 중앙고분군 무덤의 실제 토층 연대를 확인하고 분류하게 되면 무덤의 선후 관계와 무덤 주인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부소산성]

 

노형석입력 2021. 2. 16. 10:56수정 2021. 2. 16. 16:56

삼천궁녀 몸 던졌다는 부여 부소산..백제의 핵심 물류기지였다 (daum.net)

을사년 명문 토기의 마지막 글자를 확대한 모습.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등 일부 연구자들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를 내놓았다.

 

[경향신문]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물구덩이에서 확인된 금동대향로. 백제멸망의 순간을 증언해주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동북아의 운명을 건 이 국제전쟁은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이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게 된 거죠. 이 전투를 끝으로 백제왕·귀족들 중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합니다.(<일본서기>) 그리고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의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가왕 일가가 바로 규슈 남쪽 산골지방인 난고손 마을에 정착한 거죠.

이 마을 주민들이 망명한 백제왕자인 정가왕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을 찾은 겁니다. 난가손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 등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답니다.

1993년 10월 백제 멸망 후 의자왕의 서자 중 한 사람인 정가왕이 정착한 일본 규슈 마야자키 현 난고손 주민들이 정가왕의 신위를 모시고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아와 고유제를 올렸다. 능산리는 정가왕의 선조인 백제 왕가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정가왕으로서는 1300년여 만의 귀향인 셈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구유형 물웅덩이 속에 무언가 있었다

그 무렵 옆에서 또 다른 의미의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능산리 절터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이벤트였던 겁니다. 이 발굴은 처음부터 악전고투 그 자체였답니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이고, 습기가 질척질척거렸으며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답니다. 물웅덩이였다는 겁니다.

 

악전고투 속에 맞이한 12월12일 오후 4시30분, 한국 발굴사에 길이 남을 대어를 낚습니다.

진흙이 잔뜩 묻어나는 물웅덩이에서 심상치않은 물건이 노출되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의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뚜껑이 보였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었습니다. 조사단은 야간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전등을 밝혀놓고 끝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펀지로 걷어내면서 120㎝ 가량의 타원형 물웅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답니다.

마침내 “아!”하는 탄성이 터졌습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너무나도 정교한 문양의 물체가 현현한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물체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여있던 곳임을 알게 됐습니다.

사비기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을 지키려고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능사. 이곳의 공방지(원 안) 땅 밑 물구덩이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자태를 드러낸 금동대향로

미지근한 물에 담든 ‘귀이개’로 물체의 이물질을 닦아내자 비로소 그 자태가 드러냈습니다. 신선이 보이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승이 존재하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던 이 물체는 아무리 봐도 향로였습니다. 뚜껑 꼭지에는 봉황인 듯 같은 새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었습니다.

 

뚜껑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꽹과리), 종적(縱笛·관악기), 소(簫·피리의 일종)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뚜껑 전체는 삼신산 형태의 4∼5단이었는데요. 첩첩산중의 자연세계를 표현한 거죠.

세어 보니 74곳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현실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향로의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턱밑에 안고 있는 봉황이 보이고 5가지 악기로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표현되어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처음엔 이구동성으로 ‘이거 박산로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박산로(博山爐)’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봉래·방장·영주 등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중국 향로입니다. 이 정도로 잘 만들었다면 중국 것임이 분명하다는 일종의 문화패배주의였던 겁니다.

‘백제라면 저렇게 만들 수는 없어…’. 뭐 이렇게 깎아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오히려 중국제가 ‘물건’처럼 섬세하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중국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높이 62.5㎝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중국에서 발견된 예는 없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무왕 35년(634년)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물 가운데는 섬을 축조하여 방장선산(方丈仙山)이라 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는 당대 백제에서 신선사상의 영향이 왕실에 미쳤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문양을 봐도 그렇습니다. 무령왕릉에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 그리고 부여 외리에서 나온 백제 문양 전(塼·전돌) 등은 이 금동대향로와 거의 일치하는 박산표현이 있습니다. 대향로가 중국의 영향도 받았을 수 있지만 결국 계승은 한반도에서 계승되었다는 거죠. 5~6세기 신라시대 토기와 금속기, 부안 죽막동 출토 백제토기 등에서 금동대향로와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는 겁니다. 결국 이 향로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과 독창성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화생했음을 만천하에 알린 걸작품이라는 거죠.

향로의 뚜껑과 몸체에는 첩첩산중과 산길, 시냇물 등 자연을 표현했고, 현실 속 다양한 동물과 인물, 상상 속 동물과 신선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스님들은 왜 향로를 숨겨놓았을까

여기서 슬슬 피어나오는 궁금증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대향로는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은 구유형의 나무물통에 은닉된 모습으로 발견됐을까요.

이제부터 백제 멸망의 현장으로 달려가 상상의 나래를 펴봅시다. 발굴을 담당한 신광섭 전 국립부여박물관장의 언급을 토대로 펼친 상상이니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겠죠.

660년(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백제의 도읍지 부여가 함락되면서 약탈과 유린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백제 왕릉을 지키던 이 절의 스님들은 임금이 제사 때마다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던 대향로를 감추려 했을 겁니다. 스님들은 백제가 끝내 멸망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쳤을 겁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생각과 달리 백제의 사직은 끝내 종막을 고하게 되죠. 나당연합군에 의해 나라 제사를 지내던 이 절은 철저히 유린 소실되고, 공방터 지붕도 폭삭 무너졌겠죠. 금동대향로도 그로부터 1300년 이상 묻혀버린 거죠.

백제 예술의 투톱이라는 금동대향로와 부여 외리 출토 산수인물무늬 전돌. 문양이 비슷하다. 한국 산수화의 원형이라 할만 하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도끼로 찍은 목탑중심기둥

해도해도 너무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냐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향로가 발견된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발견되는데요.

‘백제 창왕(위덕왕·재위 554~568) 13년인 정해년(567년), (성왕의 딸이자 창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문 석조사리감의 발견도 중요했습니다만, 출토 양상도 의미심장했답니다. 탑의 중심기둥이 도끼 같은 흉기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명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추측할 수 있을까요.

절을 유린한 나당연합군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고 마구 파헤친 것이 아니었을까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위 사진) 밑 사진은 백제 제사유적인 전북 부안 죽막동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금동대향로와 일관된 표현양식이다. |국립부여박물관·조원교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제공

■까맣게 몰랐던 나당 동맹과 연합군 결성

그게 맞는 상상이라 해도 의문점이 꼬리를 뭅니다. 그렇게 멸망의 지경에 빠졌는데, 그 조짐이라도 있었을 거 아니냐. 스님들은 왜 까맣게 몰랐을까 하는 거죠. 그러나 그랬을 수 있답니다.

왜냐면 의자왕 시대(641~660) 백제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642년(의자왕 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오죽하면 651년(의자왕 11년)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라고 협박하는 국서를 보냈을까요.

이 대목이 중요하죠. 신라와 당나라는 648년(백제 의자왕 8년·진덕여왕 2년) 나당 연합군 결성의 밀약을 맺었거든요. 당시 당나라 태종은 신라의 사신(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를 만나 “당나라가 군대를 보내…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대향로가 발견된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의 목탑지 밑에서 ‘백제 창왕의 누이동생이 567년 사리를 공양한다’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 발견됐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그러나 의자왕은 어떠했을까요. 의자왕은 652년 당나라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겁니다. 의자왕이 누구입니까. 처음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통할만큼 지극한 효자였고,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친 분이죠.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충신들을 쫓아냈죠. 성충(?~656)이 옥사하고 흥수(생몰년 미상)가 귀양 갔으며, 그 빈 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생몰년 미상) 같은 인물로 채웠죠.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답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겁니다.

그런데 ‘창왕’명 사리감은 비스듬히 누워있었고, 목탑의 중심기둥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다. 나당 연합군이 절을 유린하면서 목탑의 사리장치를 파헤친 것은 아닐까.|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운명의 660년 알리는 다양한 유구 유물들

2011년 공주 공산성의 백제 왕궁 관련 유적 저수시설에서 ‘정관 19년(645)명 옻칠갑’ 유물이 나왔고요.

최근에는 부여 부소산성에서 ‘을사년’명 토기가 출토됐는데요. ‘을사년’은 바로 645년이거든요. 이런 유물이 확인된 집수시설에 수백점의 토기가 시기차 없이 동시에 매몰됐는데요. 발굴자들은 ‘정관’명 옻칠갑이나 ‘을사년’명 토기 등도 백제 멸망기에 누군가 한꺼번에 묻어놓은 자료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소산성 주변 조사에서 통일신라 극초기(7세기 중후반)에 해당하는 토기들이 여러 점 보였다는데요. 이것은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이곳을 진입해서 어떤 시설을 설치하는 어수선한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더라구요. 그럴 듯한 추론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떨까요. 1993년 발견된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무엇을 웅변해주고 있을까요. 백제의 초절정기 예술품인 금동대향로가 한편으로는 백제 멸망을 극적으로 웅변해주는 상징 유물인 셈이죠. 정말 아이러니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2023. 10. 18. 07:33

백제금동대향로 다섯 악사는 여성 전문 악단[이기환의 Hi-story](104) (daum.net)

 

백제금동대향로 다섯 악사는 여성 전문 악단[이기환의 Hi-story](104)

위대한 발견은 어느 날 불쑥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 같습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백

v.daum.net

 

 

입력 2007-12-22 02:56업데이트 2009-09-25 23:50

[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백제금동대향로 공개|동아일보 (donga.com)

 

 

[부여 나성]

입력 2015-10-08 03:00업데이트 2015-10-08 04:30

백제문화재단이 발굴한 결과 성벽 흔적 대신 건물터가 나와
동쪽-북쪽의 나성과 달리 백마강이 자연해자로 기능한 듯
일각선 도성경계 강 건너 확장설도
2012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 근처에서 발굴된 동나성 성벽. 내부를 흙으로 다져 올린 뒤 그 위에 돌을 쌓았다. 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여 나성(사적 제58호)의 일부로 추정된 서나성(西羅城)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가 발견됐다.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사비도성이 120년 동안 존속하면서 서나성 대신 자연해자(自然垓子)로 쓰인 백마강 방면으로 도시가 확장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

문화재청과 발굴 기관인 백제고도문화재단에 따르면 올 6월 충남 부여군 구교리 구릉지대에서 벌인 서나성 추정지 시굴조사에서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곳으로부터 서쪽 백마강 방향으로 5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사찰 강당지로 보이는 유구(遺構·옛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상육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은 “통상 사찰이 나성과 인접한 곳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추정지에 서나성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외리사지와 왕흥사지 등을 제외하고 정림사지, 부소산 폐사지, 군수리 사지, 동남리 사지, 구아리 사지 등은 모두 나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부여 나성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왕도 주변을 에워싼 성곽으로 확인된 길이만 6.6km에 이른다.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급하게 축조된 웅진도성과 달리 사비도성은 오랜 기간 천도를 계획한 도시답게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나성을 외곽에 둘렀다. 또 백제 초기 도읍인 한성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평지에 있는 반면, 사비도성은 유사시를 대비한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왕궁지 배후에 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리면서 고구려와 신라,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부여 나성 가운데 북나성과 동나성 유적은 이미 발견됐지만, 서·남 나성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부터 구릉과 제방을 중심으로 서나성의 위치를 추정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땅을 파 보니 북·동 나성과는 달리 서쪽에서는 나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사비도성의 서쪽을 휘돌아 나가는 백마강이 일종의 자연해자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물길로 외적의 즉각적인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사비도성의 구조에 대하여’ 논문에서 “사비 천도 당시 최대의 가상적은 고구려였을 것이므로 도성 방비에 있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인 방향은 역시 동·북방이었을 것”이라며 “반면 남쪽과 서쪽은 백마강이 자연해자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나성 건설이 시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나성이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읍의 경계를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능산리 사지 옆을 남북으로 지나가는 동나성이 사비도성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나성이 없었다고 전제할 때 사비도성의 서쪽 경계는 어디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이 부분에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엇갈린다.

△백마강 건너편에 왕흥사지와 외리사지, 대형 고분군이 조성된 점 △신라 궁궐인 월성(月城)도 외곽으로 점차 확대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사비도성도 인구가 늘면서 백마강 너머까지 도성의 경계가 확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심 연구원은 “사비 천도 초기 백마강 언저리에 목책이 설치됐으나 강 건너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목책 시설이 유명무실화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반면 백마강 너머까지 도성의 서쪽 경계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박순발 교수는 “백마강 건너편에 시가지가 형성된 흔적이 없고 동쪽에 왕릉 등 주요 고분군이 집중된 것을 감안하면 사비도성의 서쪽 경계는 백마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관북리유적]

도재기 기자입력 2023. 12. 1. 14:11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daum.net)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 시기(538~660) 왕궁터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길이 60m 이상의 대형 건물터 등이 확인됐다. 대형 건물터는 특히 장랑식 건물터(궁궐에서 중심 건물

v.daum.net

 

 

[정림사지]

수정 2016-01-19 20:22 등록 2016-01-19 20:22

백제 ‘망국의 아픔’ 닮은…역사가 외면한 정림사의 수수께끼들 (hani.co.kr)

기자노형석
5층탑과 석불좌상

 

백제 패망의 아픔이 새겨진 탓일까. 이 절터는 역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백제 불교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찰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지금도 절의 창건과 운영, 규모에 얽힌 내력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충남 부여읍)안 한가운데 자리한 고찰 정림사터가 바로 이 비운의 유적이다.

백제 불교 전성기 대표 고찰 불구
창건·운영·규모 아는 것 거의 없어
5층 석탑·석불좌상·건물터 흔적뿐

절터서 나온 진흙 소조상 등 통해
중국 대륙 북쪽 고찰과의 교류 확인
국립부여박물관 작년 11월부터 특별전

정림사터는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가득한 곳이다. 현재 터에 남은 건 1500여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선 5층 석탑과 후대인 고려시대 세웠으나 얼굴이 깎여버린 석불좌상, 연못터와 희미한 건물터 흔적들 뿐이다. 절의 역사와 관련된 문자기록은 정림사 석탑에 낙인처럼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백제 정벌 전승기록인 2100여자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1940년대 발굴된 정림사명 새겨진 고려시대 기왓장밖에 없다.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지난해 백제사적 지구로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 오르면서 백제 대표유산으로 새롭게 조명받게 됐지만, 절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카즈오의 첫 발굴조사 이래 70~80년대 충남대 윤무병 교수팀의 2차 조사, 2008~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거듭되면서 인자한 미소의 진흙 소조상과 불교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터의 배치와 얼개에 얽힌 고고학적 정보도 상당부분 확보된 상태다. 최근 이를 토대로 절의 실체를 둘러싼 여러 학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림사를 둘러싼 쟁점들 가운데 핵심은 출토된 불상들과 탑에 얽힌 두가지로 집약된다. 첫번째는 1980년대 이후 정림사터 서쪽 폐기 구덩이에서 쏟아진 불상과 인물 소조상들의 본산지다. 이 상들은 현재 중국 뤄양에 있는 북위 영녕사터의 출토 불상들과 모양새가 거의 똑같다. 백제인들은 자주 교류했던 중국 남조 대신 대륙 북쪽 뤄양에 있는 고찰까지 가서 불상들을 직수입한 것일까. 아니면 백제 장인들이 기술을 갖고 들어와 불상을 만든 것일까. 두번째 쟁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된 정림사터 석탑 이전의 목탑 건립설이다. 정림사터에서 나온 작은 중국풍 불상들은 원래 용도가 목탑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림사도 마찬가지로 그런 용도로 불상들을 썼다면 목탑이 앞서 지어진 뒤 내부를 장식했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실제 유물들과 견줘보면서 음미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특별전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다. 중국 뤄양박물관에서 빌려온 영녕사터 출토 불상들과 정림사터에서 나온 불상과 소조상 등을 중심으로 당시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백제 불교문화와 고찰 정림사가 지닌 역사적 비밀을 살펴보는 자리다.

이 전시의 초점은 정림사와 중국 북위 효문제가 518년 지은 국찰인 영녕사의 교류 관계다. 정림사는 538년 사비천도 직후인 6세기 중반~후반에 창건됐을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전시장 2부 영역에 흙으로 빚고 구운 영녕사 소조상, 불상 40여점과 정림사터 출토 소조상들이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편안하고 자비스런 얼굴상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옛 북위 스타일의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들이 단적인 예다. 구일회 관장은 “너무나 유사해 백제인들이 일부러 북위를 찾아가 직수입했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중국 남조 도읍이었던 난징 건강성 주변의 홍토교란 곳에서 최근 정림사터나 영녕사터 소조불과 거의 같은 모양새의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남조의 난징에서 이 소조불의 기본 도상이 창안돼 북위나 백제로 전파되거나, 아니면 북위에서 도상이 창안돼 백제나 남조로 전파됐다는 가설이 모두 가능하다. 게다가 정림사라는 사찰은 한·중·일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국 난징에도 상정림사터가 있고, 6세기 백제의 불교문화를 직수입한 일본의 고도 아스카 지방에도 백제풍의 정림사터가 남아있어 당시 한·중·일간에 긴밀했던 불교문화 교류상을 보여준다.

또다른 쟁점인 목탑의 존재를 둘러싼 논란은 출토 기와, 토기, 벼루 등의 유물들과 발굴된 절터 영역 등의 사진, 출토 자료들을 전시한 1부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다. 6세기 중엽 정림사가 창건되면서 원래는 큰 목재 중심기둥이 내부를 받친 목탑을 먼저 세우고 그 안에 중국에서 직수입한 소조불 등을 붙이는 식으로 장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등의 소장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석탑터 주변을 추가 발굴한 결과 두툼한 흙다짐층 외에는 목탑터의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지금도 학계는 목탑지 여부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목탑이 있다가 화재 등으로 사라져 석탑을 쌓았다는 추정이 나오지만, 화재의 흔적인 불먹임 자욱 등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1940년대 조사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정림사명 기왓장과 고려시대 석불, 그리고 소정방이 탑에 새긴 평제비 탁본을 입체적인 구조물을 통해 감상하며 절터의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경 학예연구사와 한봉규 학예실장은 “정림사터에 얽힌 역사적 실체 논란은 사실 탑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는 성격이지만, 세계유산인 탑을 섣불리 해체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앞으로도 논쟁은 거듭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시는 24일까지다.

부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익산]

[왕궁리유적]

 

입력 2022. 6. 28. 03:02수정 2022. 6. 28. 04:16

쌍릉 중 소왕릉에서 출토된 목관 뚜껑 장식(너비 7.1cm). 백제 왕족 특유의 목관 장식품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무왕은 31명의 백제왕들 가운데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무왕이 선왕인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무왕을 ‘강화도령’ 철종처럼 초야에 묻혀 살던 방계 왕족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 있다. 그는 과부 어머니와 연못의 용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마를 캐며 살았고, 지략을 발휘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으며, 후에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스토리다.

그는 600년부터 641년까지 장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사비도성 일원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익산에 그와 관련한 전승과 유적이 남아 있고 일부 문헌에는 그가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게다가 근래까지 그러한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발굴 성과가 조금씩 쌓여 어느새 무왕의 익산천도설이 힘을 받는 모양새다. 무왕은 과연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 日 교토 사찰에서 발견된 실마리

1970년 일본에서 백제사 관련 중요 기록 하나가 공개됐다. 교토의 한 사찰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라는 고서에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 639년 번개가 쳐 제석정사가 불탔다. 탑 아래의 여러 보물 중 불사리가 든 병과 금강경을 담은 목칠함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 기록을 활용한 연구가 본격화했고 학자들은 무강왕을 무왕, 지모밀지를 익산으로 추정하면서 익산천도설을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 견해도 나왔다. 불사리의 영험함을 보여주려 과장해 서술한 것이므로 사료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유적이 2003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광대 박물관이 제석사지 북쪽에서 639년 제석사 화재 때 불탄 기와, 벽체, 소조불상 조각들의 폐기장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1965년 발견된 왕궁리 5층 석탑 속 사리기와 금강경판이 관세음응험기에 묘사된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도 같은 해에 나왔다. 즉, 원래 제석사 목탑에 안치되었던 사리기와 금강경판이 화재 이후 왕궁리 5층 석탑에 다시 봉안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남북으로 492m, 동서로 234m인 왕궁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989년부터 왕궁리 5층 석탑 주변에 대한 발굴에 나섰다. 당초 사찰의 규모와 성격 등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예정이었지만 탑 남쪽에서 정전(正殿) 성격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는 등 왕궁으로서의 면모가 확인되면서 전면 조사를 통해 왕성의 구조를 확인하는 쪽으로 조사의 방향이 틀어졌고 33년이 지난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남북으로 492m, 동서로 234m에 달하는 네모난 공간에 정연한 담장을 돌리고 그 안에 다양한 건축물을 배치한 백제 궁궐터가 차례로 속살을 드러냈다. 남쪽 구역에서는 건물터들이, 북쪽 구역에서는 자연미를 갖춘 후원이 조사됐다. 후원의 서쪽 낮은 공간에서는 귀금속공방터와 대형 화장실 흔적이 확인됐다.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은 관련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힘을 받고 있다. 전북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인근에서 출토된 기와. ‘왕이 거처하는 수도’라는 뜻의 ‘수부(首府)’가 적혀 있어 옛 왕궁 터 가능성을 높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초기부터 유적지 곳곳에서 범상치 않은 유물이 쏟아졌다. ‘상부을와(上部乙瓦)’, ‘하부을와(下部乙瓦)’, ‘수부(首府)’ 등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특히 ‘수부’명 기와는 사비도성 이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수부란 왕이 거처하는 수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간의 발굴을 통해 먼저 백제의 왕성이 건축되었고 그 이후 시기에 일부가 절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발굴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 유적을 백제의 왕궁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 소왕릉의 주인은 선화공주?

전북 익산 쌍릉 중 대왕릉에서 출토된 금송으로 만든 목관(길이 2.55m·복원품). 백제 왕족이 일본산 금송을 선호한 데다 ‘무왕 부부의 능’이라는 기록이 전해져 무왕이 주인으로 추정된다.
 
1917년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박물관 전시품 확보를 명분으로 백제 고분 발굴에 나섰다. 발굴 대상에 익산 쌍릉이 포함됐다. 쌍릉은 무왕 부부의 능으로 고려 충숙왕 때 도굴 당했다는 옛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대왕릉에서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목관과 함께 옥으로 만든 허리띠장식, 반파된 토기 등이 출토됐지만 소왕릉에는 목관 장식품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오랫동안 대왕릉은 왕, 소왕릉은 왕비의 무덤으로 여겨졌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에서 긴급뉴스가 타전됐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나온 사리봉영기에 무왕의 왕비가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이 소식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이 간행한 쌍릉 발굴보고서는 이러한 논쟁을 격화시켰다. 박물관 연구원들은 대왕릉에서 수습된 치아 4점이 20, 30대 여성의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한편, 출토된 토기를 신라계로 보면서 무덤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관련 내용이 언론에 연이어 보도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정부 당국은 쌍릉에 대한 재발굴을 결정했다.

2018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대왕릉의 무덤방 입구를 다시 열었을 때 그 속엔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여니 인골 편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일인들이 발굴한 다음 인골을 별도로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법의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한 다음 ‘뼈의 주인공은 신장이 최대 170.1cm,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세상을 뜬 60, 70대 남성이며, 무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후 대왕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익산에는 무왕과 관련한 전승과 유적이 존재한다. 왕궁, 왕실사찰, 왕릉이 모두 확인되었기 때문에 익산에 새로운 왕도가 건설되었을 공산이 크다. 다만 아직 왕궁 주변의 도로망, 백성들의 거주 구역 등이 제대로 발굴된 바 없어 새로운 왕도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 기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장차 체계적 발굴 및 연구를 통해 백제사 최고의 미스터리, ‘익산 천도’ 논의가 큰 진전을 이루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Copyright©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 2020. 11. 18. 07:30

무왕의 '백제 부활' 꿈이 남긴 유산

(익산=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전라북도 익산은 공주, 부여, 경주와 함께 한국의 '4대 고도(古都)'다. 공주, 부여에 이은 백제의 왕도였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과 석탑이었던 미륵사 터와 미륵사지 석탑, 왕궁리 유적은 왕도 익산의 위엄을 보여준다.

석조 문화재 보수의 새 장 연 미륵사지 석탑

한국 문화재 보수의 새 장을 연 미륵사지 석탑 [사진/조보희 기자]

 

가을이 본격적으로 무르익던 즈음. 익산 미륵사지를 찾은 날은 파랗게 높은 하늘 아래,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을 맑고 투명한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동양 최대의 절터로 평가받는 미륵사지는 한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코스모스 길이 끝날 때쯤 모습을 드러냈다. 미륵산에 포근히 안겨 있는 미륵사지는 차라리 힐링 공간이었다.

사찰 건물은 오래전에 모두 사라지고 푸른 잔디 위에 서 있는 몇 개의 석조 유물만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그곳에 한국 문화재 보수의 새 장을 연 미륵사지 서쪽 석탑(이하 '미륵사지 석탑'으로 표기)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석탑 오른쪽에 실패한 문화재 복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륵사지 동쪽 석탑(이하 '동탑'으로 표기)이 있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처음에 모양과 높이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탑이다. 그러나 복원 및 보수의 개념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복원과 보수가 끝난 지금 두 탑은 전혀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불린다. 그만큼 석탑이 많다. 석탑 안에는 사리장엄구, 불경 등의 귀한 문화유산이 간직돼 있다. 석탑에서 나온 유물은 고대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 때가 많다.

이런 한국 석탑들의 시원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그 전에 한국의 탑은 목탑이었다.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 바로 옆에는 이 석탑보다 더 큰 목탑이 있었다. 목탑은 유실됐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래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양식,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이행 과정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왼쪽)과 동탑은 처음에 모양과 높이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탑이다. 그러나 복원 및 보수의 개념과 방법이 달랐기 때문에, 지금 두 탑은 전혀 다른 모습과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진/조보희 기자]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 대에 지어져 조선 시대인 1600년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터의 규모가 확인된 사찰 중에서는 백제 최대, 나아가 동아시아 최대 사찰이었다.

미륵사지의 상징처럼 우뚝 솟은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제일 큰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지난해 장장 20년에 걸친 보수 작업의 대장정을 마쳤다. 단일 문화재로는 수리 기간이 가장 길다.

그만큼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에 공을 들였다. 석탑이 수리를 끝내고 준공된 뒤 미륵사지를 찾는 관람객은 이전의 연간 수만 명 수준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훌쩍 늘었다. 국민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구조 불안정을 이유로 해체, 수리를 결정했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방불했다. 일제가 1915년 이 석탑의 무너져내린 부분을 수리하면서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발랐기 때문이다.

해체 과정에서 제거한 콘크리트 양은 185t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여 복구한 미륵사지 석탑은 보수하다가 만 듯한 느낌을 준다. 석탑 중 유실된 부분을 보수하지 않고, 없는 채로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문화재 관리 당국과 학계는 미륵사지 석탑의 원형을 확인하지 못하자, 남아있는 부분 혹은 기록 등으로 확인된 부분만 복원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문화재의 원형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하거나 수리한 경우가 허다했다.

1990년대 초에 복원된 동탑. 왼쪽으로 멀리 미륵사지 석탑이 보인다. [사진/조보희 기자]

 

미륵사지 석탑 보수는 추정에 의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현대의 온갖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루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원형대로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문화재로서 진정성, 역사성을 확보했다. 한국의 석조 문화재 복원 기술을 세계 수준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동탑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복원됐다.

당시 동탑은 본래의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내리고, 잔해조차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당국과 학계는 나름의 연구를 근거로, 탑의 높이와 모양을 추정했다. 그리고 추정을 근거로 동탑을 9층 탑으로 복원했다.

원래 석탑을 구성했던 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로 돌을 새로 깎아 탑을 쌓았다. 복원된 동탑은 원형을 회복한 문화재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졸속 복원' 논란이 제기됐고, 동탑은 '성형미인', '죽은 탑'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와 동탑의 복원은 문화재 수리와 보존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조지연 익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동탑이 복원될 때만 해도 문화재 보수의 개념과 기술이 지금과 매우 달랐다"라며 현재의 잣대로 당시의 복원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당시의 지식과 기술로는 최선을 다한 복원이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은 국내 문화재 보존 역사와 가치관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오래 남을 것이다. 동탑을 외면할 게 아니라 변화하는 우리 인식의 일부이자 산물로 보듬는 애정을 갖는 게 옳을 듯싶다.

국립익산박물관 입구 [사진/조보희 기자]

 

해체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던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에서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또 가로 15.5㎝, 세로 10.5㎝의 금판에 글자를 새긴 금제사리봉영기가 출토됐다.

여기에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로써 미륵사와 석탑의 조성 주체와 연대가 확인됐다.

조 해설사는 "탑이 개보수되는 과정에서 사리가 옮겨지거나 분할되는 경우가 많고, 사리장엄과 봉영기가 원형 그대로 출토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1천400년 전에 묻었던 타임캡슐이 열린 셈"이라고 강조했다.

사리장엄구는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됐고, 사리는 미륵사지 석탑에 재봉안됐다.

올해 초 미륵사지 바로 옆에는 국립박물관으로는 전북에서 두 번째인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했다. 미륵사지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낮춰 박물관과 미륵사지 유적이 조화를 이루게 했다.

익산박물관에 들어서면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사리내호가 1호 전시물로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리내호는 높이 5.9cm, 지름 2.6cm의 금 세공품이다. 사리를 담은 작은 유리병을 다시 넣는 소형 금속 항아리다.

90% 이상의 순도로, 황금빛을 발하는 사리내호의 정교한 아름다움 앞에서 관람객은 숨이 멎을 듯한 황홀감에 빠진다. 찬란했던 백제 예술혼의 세계로 인도되는 듯하다.

 

무왕의 '백제 부활' 꿈 서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5㎞쯤 떨어진 왕궁리에는 또 하나의 큰 백제 유적지인 왕궁리 터가 있다. 백제 무왕이 왕궁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그의 사후에는 사찰로 운영됐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은 40여 년 재위하며 백제의 부활을 꿈꿨다.

그 부활은 그가 태어나 자랐던 익산을 무대로 펼쳐진다. 현재의 서울을 500년 가까이 도읍으로 삼았던 백제는 공주를 거쳐 부여로 천도했다가 무왕 때 익산에 왕궁을 지은 것으로 최근 여러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것인지, 익산에 별도(別都)를 만든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익산이 왕도인 것만은 분명해졌다.

격동기였던 7세기 한반도에서 무왕은 익산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의 야심을 펼쳤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진/조보희 기자]

 

현재 왕궁리 터에는 절제된 조형미로 유명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을 제외하고는 왕궁 건물과 시설이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거대한 왕궁터를 오층석탑이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궁터를 향해 걸으면 늙은 벚나무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5층 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케 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다. 왕궁리 터에는 오층석탑을 찬미한 시들이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잔디밭에 떠오른 흰나비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오늘도 깔끄막이다

그늘 속인데도 날은 무덥고

뙤약볕을 지키고 서 있는

네 표정엔 바람 한 점 묻지 않았다

- 이병초 시인의 '나비의 꿈 왕궁리 오층석탑에서'의 일부

왕궁리 유적 조사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사 결과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외곽 담장과 내부 구조가 확인됐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의례, 정무를 위한 공간이었고 북측 절반은 휴식 공간인 정원과 후원으로 배치됐음이 드러났다.

북측 공간에는 당시로는 최고 귀중품이었던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이 있었다. 또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화장실 유적이 있다.

이 화장실 유적은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돼 있었다. 화장실을 경사지에 만들고, 경사지 위에서 아래쪽으로 물이 흘러내리게 해 오물이 물을 따라 자연스럽게 강으로 흘러가게 했다. 일종의 수세식이다.

또 화장실 구덩이를 3m 이상으로 깊이 파고, 구덩이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로는 구덩이의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현대 정화조 시설과 유사한 원리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근대에 만든 파리의 하수도를 과학적 구조라며 관광지로 만들어 자랑한다. 한국의 고대 정화조는 파리 하수도가 명함을 내밀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훨씬 오래된 지혜임이 틀림없다.

왕궁리 터는 백제의 왕궁 축조 방식과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왕궁리 후원 영역에 물을 흐르게 만든 곡수로 흔적 [사진/조보희 기자]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유네스코에 의해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두 유적 외에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등 8개 유적으로 구성된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한국,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호 교류 역사를 보여주고 백제의 내세관, 종교, 건축기술, 예술미를 확인시키는 특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백도시' 익산

익산이 경주, 공주, 부여와 어깨를 겨루는 '4대 고도(古都)'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네 곳은 2004년 한국의 4대 고도로 지정됐다.

익산은 왕궁(왕궁리 유적), 사찰(미륵사지, 제석사지), 산성(미륵산성, 익산토성), 왕릉(무왕릉) 등 고대 왕국이 갖춰야 할 4가지를 모두 가진 2천년 고도다. 또 익산은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후기의 왕도였다.

익산은 2천년 전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를 간직한 장소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백도시'를 자처한다. 이는 고도 백제(古都百濟)를 줄인 말인 동시에 '가자! 백제' 'GO 100(번)'을 의미한다. '사랑, 진심을 고백하는 익산'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 미륵사지 연못가 잔디밭에는 누군가 홀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터에는 시민들의 '야행'(夜行)을 위해 해가 지면 은은한 조명등이 켜진다.

품격 높은 박물관, 정성스럽게 가꾼 유적지만큼 데이트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장소가 없다. 인파가 붐비지 않고 고즈넉하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공간은 다툼과 미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화재, 예술 작품, 역사 등 얘깃거리가 널려 있어 대화의 문이 끝없이 열린다. 익산에 가보자. 무왕의 숨결을 느껴보자.

 

 

강명수입력 2017. 7. 11. 14:21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익산=뉴시스】강명수 기자 = 11일 전북 익산시와 문화재청은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을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은 왕궁리유적 내 5층 석탑의 모습이다. 2017.07.11.

smister@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정림사지 5층석탑이 익산에 있었나?

입력 2012. 6. 24. 17:35수정 2012. 6. 24. 17:35
 

[오마이뉴스 정만진 기자]

 

▲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왕궁리 5층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과 외양이 비슷하다.ⓒ 정만진

 

어디서 많이 본 탑이다. 탑 이름이 뭐더라? 실물은 비록 못 보았더라도 최소한 사진으로는 본 기억을 국민들은 가지고 있을터다. 모양과 색깔로 미뤄 볼 때 소정방이 백제 왕궁을 불태울 때 검게 그을린 자국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바로 그 탑 같다. 소정방이 '내가 백제를 평정하였노라' 따위의 '낙서'도 탑신에 새겨놓아 한때 '평제탑'이라 불리기도 했던 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말이다.

하지만 사진의 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이 아니다. 정림사지에 직접 가보신 분들 중에는 간혹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분도 계시리라. 사진의 탑이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이 아니라면, 내가 그토록 답사를 엉성하게 했단 말인가?

 

너무 닮아 전문가들도 헷갈리는 두 탑

사진의 탑은 국보 289호인 '전북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다. 정림사지 탑과 왕궁리 탑이 얼마나 흡사한가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편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 중 한 대목이 잘 증언해준다. 이 책은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한때 백제의 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기술한다. 전문가들도 헷갈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찌 일반인들이 두 탑을 사진만 보고 분별할 수 있으랴.

탑의 배경을 통해 두 탑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정림사지 5층석탑은 박물관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혹은 백제초등학교 건물이 나온다. 아니면 고려 때의 석불좌상을 모신 강당 건물이나, 시가지가 사진의 바탕을 이룬다. 그에 비해 왕궁리 5층석탑은 사방으로 아무런 인공물이 없다. 사진의 배경은 그저 잔디밭 일색에, 멀리 보이는 나무와 산, 그리고 하늘뿐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 정만진

 

높이가 정림사탑은 8.33m, 왕궁리탑은 8.5m이다. 거의 같다. 기단도 둘 다 1층이다. 지붕돌이 얇고 넓은 것도 같다. 지붕돌의 모서리가 살짝 들려 있는 것까지도 같다. 심지어 불마가 할퀸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검게 그을린 빛깔까지 닮았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이 탑이 백제가 남긴 대표적인 탑- 정림사탑과 빼닮았다는 점에서 당연히 백제 때 지어진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 탑을 통일신라 초기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또 고려 때 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의 소책자에는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 왕궁의 경영이 끝나고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략)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말기로 보고 있으나 석탑의 견립 연대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일치된 의견 접근이 어려운 상태'라고 기술되어 있다.

 

탑은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500m가량 떨어져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탑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왕궁의 석축 가운데로 탑을 향해 걷는다. 탑이 있는 곳은 전시관 터보다 조금 높다. 그렇다고 그리로 가는 길을 오르막이라 고 부를 수는 없다. 그만큼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6월 22일 오전, 탑을 둘러보는 것으로 내내 유쾌했다. 탑 주위로 아무 방해물이 없어 불어오는 바람조차 곧장 직선이다. 넓은 잔디는 탑 뒤로도 아득히 깔려 있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탑 일대가 배롱나무 천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 배롱나무꽃이 지금쯤 아롱아롱 붉게 피었을 것을 상상하면 그 나무들이 무성한 풍경도 그립지만, 그것은 차라리 아기자기한 다보탑이랑 어울릴 일이다 싶다. 간결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뽐내는 왕궁리 5층석탑 주변은 지금처럼 단아한 풍치를 보여주는 게 최선이다. 번잡한 부여 시내에 놓인 정림사지 5층석탑이 공연히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왕궁리 5층석탑(왼쪽)과 정림사지 5층석탑을 비교해 보니...ⓒ 정만진

 

1965년, 탑이 북쪽으로 제법 기울어져 있어서 붕괴 사고를 예방해야 했다. 그래서 해체, 보수 작업을 했다. 이때 사리함을 비롯한 유물이 발굴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1989년부터 21년째 왕궁리유적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임금이 정사를 돌보았던 정전건물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등을 찾아냈다. 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관사'와 유사한 사찰명인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등의 이름이 적힌 명문기와들도 출토되었다.2008년에는 이곳에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을 받아 왕궁리유적전시관이 건립되었다.

해체, 보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륵사터 석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국보 11호인미륵사터 석탑은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북쪽으로 약 5km 거리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가도 볼 수 없다. 해체되어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인데 2016년이나 되어야 일반에게 공개된다.

올해가 중앙 정부 지정 '전북 방문의 해'라고 해서 발걸음을 했는데, 백제가요 '정읍사', 내장산, 선운사와 더불어 전북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미륵사터 석탑을 볼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쉬웠다. 단아한 왕궁리 탑 앞에서 줄곧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던 2012년 6월 22일 오전, 그러나 오후는 실망에 젖은 채 반쯤 부서진 탑처럼 기울어버린 마음을 달래며 미륵사터 담장에 몸을 기댄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해체, 보수 작업 중이라 지금은 찾아가도 볼 수 없고, 2016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진은 미륵사터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원광대학교 홍보판의 부착물을 촬영한 것이다.ⓒ 원광대
 
 

 

 

[미륵사지]

 

 

2008 02/05   뉴스메이커 761호

[익산의 문화유적]

서동요 얼 깃든 백제문화 고도(古都)익산

공주·부여에 못지않은 볼거리들, 관광 잠재력 뛰어나

주간경향 (khan.co.kr)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761호[익산의 문화유적]서동요 얼 깃든 백제문화 고도(古都)익산공주·부여에 못지않은 볼거리들, 관광 잠재력 뛰어나 지난 1월 17일 사학계는 전북 익산에서 날아온 낭보로 기쁨을 감

weekly.khan.co.kr

 

 

 

전설과 역사 사이 ‘선화공주 연애담’ 진실 밝혀지나

등록 :2016-01-26 20:50수정 :2016-01-27 17:2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28011.html?dable=30.1.3 

 

전설과 역사 사이 ‘선화공주 연애담’ 진실 밝혀지나

실제 왕비로 살았을까. 전설상의 인물일 뿐일까.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지었다는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

www.hani.co.kr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서동요' 허구였다?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의 결혼 설화는 후대의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이성민 기자 | 기사입력 2009/01/19 [23:39]

https://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1842§ion=section78§ion2 

 

≪pluskorea≫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와의 '서동요' 허구였다?

일제식민시대‘조선사편수회’를만들어우리민족의말살정책의일환으로20만여권에이르는방대한역사서를불태우고감추어버렸지만,무슨이유에서인지김

www.pluskorea.net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잠에서 깨어나다

2007년 10월 25일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잠에서 깨어나다 (daum.net)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잠에서 깨어나다

지금으로부터 1430년 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황금 사리병을 담은 청동 사리함의 몸체에는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

news.v.daum.net

 

 

 

‘금동향로’이후 최대성과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0-25    3 면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025003004 

 

‘금동향로’이후 최대성과

, 충남 부여 왕흥사(王興寺)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사리장엄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삼국시대의 사리장엄이, 그것도 완벽한 상태의 ‘한 세트’가 출토된 것은

www.seoul.co.kr

 

 

 

사리 없는 ‘백제 사리기’, 당시 외교사는 고스란히

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25일

임종업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45410.html

 

사리 없는 ‘백제 사리기’, 당시 외교사는 고스란히

금동·은·금 삼중구조 형태로 발굴 남북조·일본과 양식 비슷해 교류 증거

www.hani.co.kr

 

 

 

 

노형석 입력 2021. 01. 15. 05:06 수정 2021. 01. 15. 10:46 댓글 52

[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https://news.v.daum.net/v/20210115050645582

 

세계서 가장 아름다운 벽돌 나온 '외리 유적'..84년째 방치된 까닭은

“소방서 뒤쪽에 유적이 있습니다.” “불 끄는 소방서요?” “예, 맞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 조효식 학예사가 겸연쩍은 듯 위치를 확인해줬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화로 교과서에까지

news.v.daum.net

 

 

'백제 8가지 무늬 전돌' 중 최초·최고의 산수인물화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2020. 12. 29. 06:00 수정 2020. 12. 29. 09:40 댓글 98

https://news.v.daum.net/v/20201229060006082

 

'백제 8가지 무늬 전돌' 중 최초·최고의 산수인물화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아니 금관이나 반가사유상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 1960~2019년 사이 해외전시를 다녀온 한국문화재 순위를 집계한 자료를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게서 받았는데 뜻밖의 결과가

news.v.daum.net

 

 

불단에 가린 익산 백제 석불대좌, 30년만에 공개

송고시간2020-03-30 09:56

박상현 기자

보물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정비…8월까지 실측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330044300005?input=1179m 

 

불단에 가린 익산 백제 석불대좌, 30년만에 공개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보물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대좌(臺座·불상을 올려놓는 대)가 30년 만에 공개...

www.yna.co.kr

 

 

 

개관 앞둔 인천 계양산성박물관…유물 1천800점 확보

송고시간2020-03-29 08:05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00327054200065?input=1179m

 

개관 앞둔 인천 계양산성박물관…유물 1천800점 확보 | 연합뉴스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삼국시대에 축조돼 한강 유역 교두보 역할을 했던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유물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개관을 ...

www.yna.co.kr

 

 

'백제의 미소' 중국에 넘어갈라…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내달 상하이서 전시

입력2019.05.07 16:34 수정2019.05.07 16:36

 

1922년경 일본 반출된 7세기 걸작…‘백제의 3대 미소’
지난해 환수협상 나섰으나 가격 문제로 결렬
문화유산회복재단, 8일 기자회견
“적극적인 환수 노력” 촉구 예정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5079564i

 

'백제의 미소' 중국에 넘어갈라…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내달 상하이서 전시

'백제의 미소' 중국에 넘어갈라…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 내달 상하이서 전시, 1922년경 일본 반출된 7세기 걸작…‘백제의 3대 미소’ 지난해 환수협상 나섰으나 가격 문제로 결렬 문화유산회복

www.hankyung.com

 

 

 

[단독]백제 최고 사찰터에서도 화려한 단청 사용 확인..'양 무제 본받기 위해'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2018.09.05. 17:32 수정 2018.09.05. 18:20 댓글 72

[단독]백제 최고 사찰터에서도 화려한 단청 사용 확인..'양 무제 본받기 위해' (daum.net)

 

[단독]백제 최고 사찰터에서도 화려한 단청 사용 확인..'양 무제 본받기 위해'

[경향신문] 백제 최고(最古)의 사찰인 대통사터로 지목된 충남 공주 반죽동 한옥부지에서 사찰을 화려한 단청으로 칠한 흔적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지난 3~4월 이곳에서 ‘대통(大通)’이라는 명

news.v.daum.net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

입력 2018.06.04. 05:19 수정 2018.06.04. 14:26 댓글 614

금동관음입상 90여년만에 일본서 소재 확인

소장자 "한국 귀환 바란다..환수 나서야"

http://v.media.daum.net/v/20180604051940845

 

[단독] '백제의 걸작' 90년만에 빛..진품 공인되면 수백억 가치

[한겨레] 가장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를 찾았다. 한국 미술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혔으나 1907년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뒤 일본에 반출돼 90여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news.v.daum.net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입력 2018.05.16. 21:03 댓글 8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 연합뉴스 (yna.co.kr)

 

문화재위원회, 공주 '대통'명 기와 출토지 보존키로(종합)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웅진도읍기(475∼538) 백제 대형 사찰인 대통사(大通寺)터로 지목된 충남 공주 반죽동 주택부지가 보존된다.

www.yna.co.kr

 

 

1500년전 럭셔리 금동신발 복원, 나주 정촌고분 발굴품

신동립 입력 2017.04.03. 09:28 댓글 22

1500년전 럭셔리 금동신발 복원, 나주 정촌고분 발굴품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1500년전 럭셔리 금동신발 복원, 나주 정촌고분 발굴품

【나주=뉴시스】신동립 기자 = 전남 나주 정촌 고분 금동 신발이 복원됐다

www.newsis.com

 

 

 

 

1400년 만에 베일 벗는 백제 魂!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역사의 숨결-수준 높은 백제 문화

장병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4/07 [12:17]

1400년 만에 베일 벗는 백제 魂!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1400년 만에 베일 벗는 백제 魂!

아,백제의魂!1,400년의세월이지난지금에도손상됨이없이당시그모습그대로미륵사지석탑심주석에서사리장엄구와금제사리호및금제사리봉안기등의유물이

www.pluskorea.net

 

 

“1400년전 백제인, 수세식 변소 썼다”

한겨레 | 입력 2009.04.13 19:40 | 수정 2009.04.13 19:50 | 누가 봤을까? 

[한겨레] 익산 왕궁리 대형 뒷간터 석축 수로 등 분석 

일본학자 "한·일 고대사 통틀어 유일한 유적"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090413194005610&p=hani 

 

"1400년전 백제인, 수세식 변소 썼다"

[한겨레]익산 왕궁리 대형 뒷간터 석축 수로 등 분석일본학자 "한·일 고대사 통틀어 유일한 유적"시대와 공간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배설 욕구는 변치 않는 법이다. 1400여년전 이땅에서 살

news.v.daum.net

 

 

백제 미소를 찍고… 숨결을 빚다

1500여년전 백제의 미소를 사진과 조각으로 만난다.17∼30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백제 사진전’을 여는 준초이와 18일∼11월11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조각·회화전 ‘구도의 여정’전을 갖는 최종태. 눈썹과 콧날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포근한 표정은 그야말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서울신문 기사일자 : 2007-10-16    26 면

윤창수기자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016026002&spage=1 

 

백제 미소를 찍고… 숨결을 빚다

, 1500여년전 백제의 미소를 사진과 조각으로 만난다.17∼30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백제 사진전’을 여는 준초이와 18일∼11월11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조각·회화전 ‘구도의 여정’전을 갖

www.seoul.co.kr

 

 

 

 

<참고자료>

 

익산 왕궁리유적- 위키백과

 

익산 미륵사지-위키백과

 

공주 공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나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관북리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정림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부소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여러나라시대 >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0) 2021.07.05
백제 고고학  (0) 2021.07.05
백제 영토  (0) 2020.05.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