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 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평범한 성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선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 중 왕성 규모에 맞는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풍납 토성의 우진육각형(찌그러진 형태의 육각형 구조) 집터 구조 자체가 왕성에 맞지 않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이소장은 또 ▷고구려 장안성, 백제 웅비성 등 수백만평 규모의 왕성과 달리 20만평 규모의 풍납 토성은 왕성이라고는 불리기조차 초라 할 만큼 미미한 수준이라는 점 ▷동아시아권 왕성에서 발견되는 격자형 도시계획 구조가 확인되지 않는 점 ▷홍수 범람지역에 도성을 세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풍납 토성이 백제 왕성이었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1)

 

2024년 7월 3일 한성백제박물관은 술 부분이 지면과 평행하게 뻗은 ‘눕쟁기’(4호)로 추정되는 목제쟁기를 출토했다고 밝혔는데요, 원본으로 출토된 몽촌토성 쟁기는 세계 최초의 사례에 가깝다고 합니다.

석촌동 3호분은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 왕궁 풍납토성, 그 한가운데 뚫린 우물의 정체는?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6년 9월 21일 08시 33분 
 

<16>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한 권오영 서울대 교수

19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건물터(44호 유구) 앞에서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2008년 9월 초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우물터 발굴현장. 현 지표면으로부터 5m 아래 구덩이에서 젊은 여성 조사원의 환호가 들려왔다. 발굴책임자였던 권오영 당시 한신대 교수(현 서울대 교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꽃삽으로 자갈과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던 한지선 한신대 조교(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한 무더기의 백제시대 토기들을 발견한 것. 40여 점의 완형(完形) 토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묘한 모습이었다.

구덩이 폭이 1.5m에 불과해 조사원 한 명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땅을 겨우 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선은 철모를 눌러쓴 채 사진을 찍고 토기를 하나씩 수습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기들을 올려 보내고 다시 땅을 파내자 또 한 겹의 토기 무더기가 나왔다.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완형 토기들이 5층을 이뤄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19일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권오영은 “1999년 1차 발굴에 이은 2008년 재발굴에서 왕궁 우물(御井·어정)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풍납토성 안에 한성백제시대 왕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 왕궁 우물 안에 토기 200개나 묻은 사연

권오영 교수의 한신대 발굴팀이 2000년 경당지구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모습(맨위 사진). 2008년 재발굴에서 실체가 드러난 우물터(가운데)에서 총 200여 개에 이르는 백제시대 완형 토기들(맨 아래)이 출토됐다. 한신대 박물관 제공
 
발굴 초기 우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물 입구부터 자갈과 흙으로 빽빽하게 매립된 상태인 데다 얼핏 부여 제석사지, 왕흥사지와 구조가 엇비슷해 발굴팀은 목탑 터로 오인하기도 했다. 현 지표면으로부터 6m(백제시대 기준 3m) 아래 바닥까지 완전히 발굴한 뒤에야 우물터임이 드러났다.

남은 과제는 우물과 완형 토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우물을 폐기할 때 토기와 각종 희생물을 함께 넣고 제사를 드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시대 우물터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출토됐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도 폐기를 위한 제사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토기만 나올 뿐 동물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물 폐기 시점에 흔히 보이는 전염병이나 전란 등 천재지변의 흔적도 없었다.

권오영은 토기들의 개별 양식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우물이 축조된 4∼5세기 전라, 충청지역 토기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궁 내 자리 잡은 우물터의 정치적 상징성과 토기양식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백제 왕실과 지방민 사이의 복속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본사와 지방 말사들이 모여 합수(合水) 의식을 치른 것처럼, 각 지방 지배층이 토기에 특산물이나 물을 담아 경당지구 우물에서 회맹의식을 치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했지만 강력한 중앙통치가 이뤄지지 않아 학계는 한동안 이들이 반(半)자치 상태에 놓였다고 본다. 신라,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에서 막 복속시킨 지방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발견

1999년 경당지구 1차 발굴에서 발견한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의미도 적지 않다. 발굴을 빨리 끝내 달라는 재개발조합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그해 12월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유적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세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최장열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뛰쳐나왔다. 그는 권오영에게 달려가 “토기 조각에 글자가 새겨진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한성백제시대 문자 자료는 백제왕이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가 유일했기 때문에 권오영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토기 조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분명 글자가 있었다. ‘大夫(대부)’였다. 며칠 뒤 같은 유구에서 ‘井(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大夫’자 토기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였다. 해당 유구(101호)는 10마리의 말 뼈와 더불어 약 1200점에 달하는 제기용 토기가 깨진 채 쌓여 있는 제사용 폐기장으로 밝혀졌다. ‘大夫’에 대해서는 백제의 중앙관직명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1999년 시루봉 고구려 보루에서도 ‘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가 발견됐다. 권오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할 때 ‘大夫’와 ‘井’이 종교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됐다. 특히 경당지구에서는 왕실 우물과 더불어 국가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44호 유구)도 발견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경당지구는 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 왕성의 존재를 실증하는 핵심 유적”이라고 평가했다.(2)
 
 
 

몽촌토성서 삼국시대 목제쟁기 4번째 출토…동아시아 최다

김보미 기자2024. 7. 3. 11:15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추가로 출토된 4번째 삼국시대 목제쟁기. 한성백제박물관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삼국시대 목제쟁기가 추가로 출토됐다. 2020년 이후 네 번째 발견된 쟁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술 부분이 지면과 평행하게 뻗은 ‘눕쟁기’(4호)로 추정되는 목제쟁기를 출토했다고 3일 밝혔다. 논과 밭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쟁기의 손잡이 부분 아래에서 새끼줄도 함께 발견됐다.

이번 쟁기는 정교하게 제작된 손잡이 부분의 ‘자부지’가 특징이다. 술 끝의 뾰족한 부분을 이르는 말로 경상북도에서는 탁주꼬재이, 잡주지, 평안북도에서는 탑조지라고도 부른다.

박물관 관계자는 “쟁기 본연의 기능 외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아 당시 농기구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며 “특히 이번 쟁기는 손잡이가 양쪽에 있어 갈아낸 흙을 원하는 방향으로 넘길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추가로 출토된 4번째 삼국시대 목제쟁기 손잡이 부분 새끼줄. 한성백제박물관

 

지난 2022년 발굴 때는 밭농사에만 사용되는 ‘가대기’가 출토된 바 있다. 이번에 발견된 새끼줄은 지난해 출토된 쟁기(3호)에 연결된 ‘탕개줄’과 같은 성격으로 추정된다. 이는 서로 다른 부분을 연결하기 위해 단단하게 비틀어 죄어 놓은 줄이다.

이번 발굴로 몽촌토성 집수지는 역사적으로 드물게 손잡이가 한쪽, 양쪽에 있는 두 가지 형태의 쟁기가 모두를 출토됐다.

삼국시대 대표 농기구인 쟁기는 개인이 아닌 마을이나 지역 단위에서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귀하기 어려운 데다 사람의 신체와 접촉한 목제품 등은 기능이 다 하면 태우기보다 자연 유실되도록 뒀다고 한다.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빗이 여러 점 출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쟁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연장이었기 때문에 몽촌토성 일대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는 점을 반증한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추가로 출토된 4번째 삼국시대 목제쟁기 출토 지점(노란색 점선).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왕도 유적 발굴조사를 추진 중인 한성백제박물관은 2013년부터는 몽촌토성(백제 왕성) 일대 학술 발굴에 들어가 2015년 석촌동 고분군(백제 왕릉지구)까지 범위를 넓혔다. 쟁기가 나온 몽촌토성 집수지는 1500~1600년 물탱크 역할을 했던 시설로 성내 용수(用水)를 확보하고 식수(食水) 보관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전 세계 발굴 사례 중 몽촌토성과 같은 시기 쟁기는 중국에서 확인됐으나 제대로 된 실물이 아닌 화상석으로 확인된 경우다. 이는 석재에 여러 그림을 선으로 새기거나(선각) 부조(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로 조각한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쟁기가 먼저 발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본으로 출토된 몽촌토성 쟁기는 세계 최초의 사례에 가깝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김지연 한성백제박물관장은 “4호 쟁기로 몽촌토성 집수지는 동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수량의 연속 출토 성과를 기록하게 됐다”며 “출토된 쟁기들은 유기물 분석, 방사성탄소연대분석 등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3)

쟁기 구조별 명칭. 한성백제박물관

김보미 기자 bomi8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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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에 공개된 몽촌토성 '곰발바닥'…백제판 '강남개발'의 증거?[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자2023. 6. 6. 05:01

 

발굴 40년만에 정리·분석·공개된 몽촌토성(1983~1985)의 출토유물 중 동남지구에서 확인된 곰앞발뼈와 말의 치아. 사람의 손과 흡사한 곰의 앞발뼈는 끝마디가 모두 잘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말의 치아는 위치 이동없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온전한 말머리가 묻혀있다가 다른 부위는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가지런히 놓인 말머리뼈, 사람 손과 너무 닮은 발톱 잘린 곰발바닥뼈의 정체는 무얼까.

1983~89년 조사된 몽촌토성의 미정리유물 일부가 40년 만에 공개됐다.

서울대박물관은 ‘왕도한성:몽촌토성 1983~2023’ 특별전(5월23~8월31일)에서 나무상자 속에 보관해왔던 동물유체 등 유물 일부를 꺼내 정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최초로 정리·공개되는 제사의 흔적 유구와 유물이 특히 눈길을 끈다.

특히 40년 동안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동·식물유체 400여점을 분석한 결과가 흥미롭다. 즉 소·사슴과·멧돼지·말·곰·개·꿩 등 포유류 및 조류와 대구, 숭어·백합 등의 어·패류 등으로 분류됐다.

 

몽촌토성은 남한산(해발 480m)에서 뻗어 내려온 낮은 구릉에 조성됐다. 최고봉인 망월봉의 해발고도는 44.8m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릉부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인 ‘한강뷰’와 ‘북·남한산뷰’, ‘평지뷰’를 만끽할 수 있다.|서울대박물관·한성백제박물관 제공

 

 

1983년부터 시작된 몽촌토성 발굴에서 확인된 ‘동전무늬 도기편’과 ‘금동제 허리띠 꾸미개’. 중국 서진 시대까지 올려다 볼 수 있는 유물이어서 몽촌토성의 축조연대를 3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견해도 나왔다.|서울대박물관 제공

 

1983~89년 사이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들. 제사와 관련된 심상치않은 유물들이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몽촌토성에서 위상이 만만치않은 유물이 출토되고, 일부 중국제 유물로 비춰볼 때 몽촌토성의 축조연대가 3세가 중후반으로 올려보는 견해가 등장했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몽촌토성 조사는 1983~89년 사이 6차례 진행되어 높은 위상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다. 그러나 궁궐터나 관청터로 추정되는 기와건물터가 발견되지 않아 ‘몽촌토성=왕성’을 주장하기에는 약간 애매했다.|서울대박물관 제공

 

1997년부터 시작된 풍납토성 발굴에서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시기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속출했다.|국립문화재연구원·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삼국사기>에는 371년(근초고왕 26)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개선한 뒤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392년 아신왕이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고, 475년 고구려군이 침략해서 7일만에 북성을 함락시킨 뒤 개로왕이 피신한 남성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근초고왕릉(3호분) 등 한성백제 시대 전성기를 이끈 임금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 1·2·4·5호분 등이 복원되어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풍납토성에서 4㎞ 떨어진 경기 하남 감일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에서 한성백제 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줄줄이 엮여나왔다. 한성백제 귀족들의 공동묘지로 추정된다.|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사람얼굴 도기. 당시 도기를 만든 장인의 자화상인지, 아니면 다름 사람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새겨넣었니 알 수 없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풍납토성 및 몽촌토성에서 확인된 유물들. 사방치기(땅따먹기)나 제기차기용 도구가 나왔고, 한성함락 이후 몽촌토성을 점령한 고구려인이 남긴 목간과 자(尺·추정) 등이 보였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왕릉인 석촌동 고분. 한성백제 493년(기원전 18~기원후 475)의 영화를 증거해주고 있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4)

 

‘최강 백제’ 이끈 근초고왕, 어디 묻혔나[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2024. 2. 5. 23:33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인데 왕족 무덤을 다른 귀족들의 무덤과 차별화하기 위해 외래 양식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백제사에서 근초고왕은 탁월한 군주로 손꼽힌다. 동진, 신라, 왜와의 외교로 고구려 남진을 저지한 데 이어 몸소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으며 각지로 땅을 넓혀 백제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생전 뭇사람들의 존숭을 한 몸에 받았을 그가 세상을 뜨자 상주인 근구수왕은 거대 무덤을 만들고 수묘인(守墓人)을 배치하여 그곳을 관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덤을 쓴 지 한 세기 만인 475년 근초고왕의 능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551년에는 신라 땅에 편입된다. 그에 따라 왕릉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퇴락하거나 약탈 대상으로 전락했고 또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전승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지금도 발굴 중인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에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어느 무덤이고 또 그 일대의 옛 무덤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백제사의 비밀은 무엇일까.

 

용두사미로 끝난 일제강점기 발굴

한성기 백제 무덤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초반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이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현 서울 송파구 석촌동) 일대의 백제 무덤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1916년 그 내용을 간략히 공개했지만, 석촌리 일대의 무덤을 왕릉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1917년 하반기, 조선총독부는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집중적으로 발굴하여 유물을 확보하기로 하고 실행에 나섰다. 실무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쓰 일행은 9월 21일 경성을 출발해 12월 27일 복귀할 때까지 경기(현 서울 포함), 충청, 전라 지역 유적을 발굴했다. 특히 그들은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빛의 속도’로 파헤쳤다. 그때 발굴된 석촌리 1호분(현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 부여 능산리 동하총은 위덕왕, 익산 쌍릉은 무왕 부부, 나주 신촌리 9호분은 영산강 유역 유력자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이다.

그 무렵 석촌리 일대에 분포한 무덤은 293기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석촌리 1호분이 가장 큰 무덤이었다. 야쓰이 일행은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의 구조 및 발굴 방법을 몰랐기에 좁고 깊은 도랑 하나를 팠다가 무덤방이나 제대로 된 유물이 드러나지 않자 서둘러 발굴을 끝냈다. 그 후 이 일대의 백제 무덤들은 총독부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공주나 부여의 백제 무덤들과 달리 보존 조치가 추진되지 않았다.

 

백제 왕릉이 왜 고구려식 적석총?

석촌동 일대에서 출토된 ①금제 달개 ② 1호분 북쪽 적석총에서 나온 기와류 ③ 12호 목곽묘에서 나온 흑유계수호(닭 머리 모양 검은 항아리). 한성백제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광복 후 30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에 우리 손으로 석촌동 고분군 발굴을 실시했다. 잠실지구 개발사업에 부수하여 서울대박물관이 1974년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석촌동 고분군을 발굴하였는데, 그 무렵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잔존 무덤은 5기에 불과했다.

기대를 품었던 대형 적석총의 경우 훼손이 심하고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방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실망하였지만, 지표상에 봉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곳에서 무덤 하부가 잘 남아 있는 사례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에 더하여 대형 무덤의 경우는 주변에서, 작은 무덤의 경우는 내부에서 전형적인 백제 토기와 기와, 황금 장신구, 중국 청자 등이 쏟아짐에 따라 이곳이 한성기 백제 사람들의 핵심 묘역임이 확인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3호분이었다. 이 무덤은 돌로 3층의 단을 쌓은 고구려식 적석총이고 길이가 자그마치 50.8m나 되는 대형분이어서 일약 백제 왕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조사자는 근초고왕릉으로 특정했다.

 

석촌동 일대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고구려 혹은 부여에서 유력한 세력들이 이주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았고 극단적으로 4세기 무렵 백제 왕실이 북방계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백제 왕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여타 귀족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외래의 무덤 양식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아졌다.

 

싱크홀이 불러낸 한성 백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87년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됐다. 그 무렵 대형 묘 발굴이 종료됨에 따라 추가 발굴은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년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석촌동 고분군 내 1호분 북쪽 잔디밭에서 싱크홀이 발생한 것이었다. 조사를 벌인 결과 나무로 만든 현대 지하 구조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구덩이였음이 밝혀졌다.

이 조사에서 구덩이 주변으로 돌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이 실시해 온 이 발굴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많이 확인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십 기의 적석총이 연접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인데 길이가 자그마치 100m를 넘어선다. 무덤 상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무덤이 빼곡히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혈연적으로 가까운 인물들이 오랫동안 무덤을 이어 붙여 가면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접 적석총의 하부에는 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목관묘와 목곽묘가 분포하며, 연접된 무덤들 중간중간에서는 장송 의례를 거행하던 터가 확인됐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분의 화장된 인골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다량의 기와와 함께 화려한 금제 장식품이 출토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와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도 확보했다. 기왕에는 고구려처럼 적석총 상부에 세운 건물의 지붕에 올려졌던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근래의 발굴 결과로 보면 적석총 주변에 마련된 의례용 건축물 지붕에 올렸을 공산이 커졌다.

이처럼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기 백제사 해명의 ‘일급 사료’이지만 절대다수의 무덤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다만 지난 반세기 동안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었기에 그러한 자료를 통해 장차 더 한층 정밀한 연구가 진행되어 여전히 애매하기 그지없는 백제 초기의 역사가 머지않은 장래에 제대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5)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5)청주 신봉동 유적 上

입력 : 2008.10.03 17:11
청주 | 이기환 선임기자

 

도굴로 짓밟힌 무덤서 만난 ‘철강강국 백제’

“허허, 술 덕분이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과 차용걸 교수(충북대)가 껄껄 웃는다. 두 사람은 1982년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성백제의 최전성기 때 조성된 청주 신봉동 유적 발굴현장. 도굴의 참화 속에서도 백제 철기군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철제 무기류가 대거 출토됐다. | 충북대박물관 제공

 

‘숙취 덕분에’ 발견해낸 백제의 역사

 

그해, 그러니까 1982년 3월21일 일요일 아침. 차용걸 교수의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영 메스꺼웠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기 때문이었다. 대학(충남대 사학과) 동창생인 심정보(한밭대 교수)·성하규(대전여상 교사) 등과 청주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한 날.

“원래는 청주 상당산성(백제시대 때 초축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에 오르기로 약속했었죠. 그런데 속이 울렁거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도저히 산에 오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상당산성 답사를 포기하고 (청주) 신봉동·봉명동·운천동의 낮은 야산을 산책 겸해서 둘러보기로 했어요.”(차용걸 교수)

숙취 때문이라지만 이 일대 역시 뭔가 유적이 확인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점심을 얼큰한 칼국수 한그릇 씩으로 때운 뒤인 오후 1시, 세사람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신봉동 야산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난 오후 3시쯤.

“신봉동과 봉명동의 경계에 해당하는 야산을 내려오는데 수상한 기미가 감지됐어요. 무너져 내리는 흙 사이에 뭔가 구멍이 나있는데, 꼭 도굴갱 같은 흔적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토광묘였고, 또 곁에는 파괴된 석실분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도굴갱 곁에서 토기편과 철겸(鐵鎌·쇠낫)편이 흩어져 있었다. 셋은 그것이 삼국시대 고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큰 일이다 싶어 그날 저녁 재빨리 김인제씨(당시 충북 문화재연구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어요. 다음 날 충북 문화재 관계자들이 현장을 즉시 둘러보았고, 저는 이것이 삼국시대 고분이며, 그것도 백제계라는 의견을 냈고요.”

신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김기웅 전문위원을 급파했고, 곧 긴급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사실 이 야산은 뭔가 고분군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지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으로는 우암산성(牛岩山城)이 있는 청주의 진산이 있고, 멀리 상당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북동으로는 평지토성인 정북리 토성이 있고…. 서로는 부모산성(父母山城)이 보이는 등 사방에 걸쳐 삼국시대 성들이 3~4㎞ 이내에 자리잡고 있으니 주변에 고분이 있을 가능성은 높았던 거죠.”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하고 이곳이 그 합류지점의 낮은 구릉지역에 있는 곳이니 유적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았던 게지.”(조 관장)

어쨌든 5월15일부터 긴급발굴이 시작되었다. 고분은 토광묘, 수혈식석실묘(석곽묘), 횡혈식석실분 등 고분 3종 세트가 뒤섞여 있었다.

도굴로 갈갈이 찢긴 무덤떼

하지만 이미 수많은 도굴로 인해 갈갈이 찢긴 채 노출되었다.

“대부분의 석실분은 산정상 가까이나 능선을 이루는 비탈면에 있었고 토광묘는 야산 전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곳곳이 도굴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그러나 푸념은 그때뿐. 도굴로 난도질당했음에도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우선 4~5세기 백제 양식을 빼닮은 석실분과 토광묘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토기의 양상이 서울 석촌동·원주 법천리·천원 화성리 등 한성백제 토기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발굴 토기 가운데 가장 특이한 형태는 손잡이(把手)가 달린 잔(그릇)이다.

하지만 말갖춤새(마구류)가 확인되는 토광묘에서 출토된 이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杯)’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82년 발굴조사단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신기하네!” 하고 고개만 갸웃거릴 뿐. 이 신봉동 유적이 중요한 것은 비단 무덤양식이나 토기의 양상 때문만은 아니다. 백제가 강력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말갖춤새와 무기류가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백제 마구류와 무기류가 출토된 예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아주 한정된 무덤을 조사했는데도 말재갈 12점을 비롯, 등자(등子·발걸이)가 확인됐어요. 또 철도끼, 쇠낫, 철창, 철끌 등과 쇠화살촉도…. 이런 마구류와 무기류는 가야 및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차 교수)

물론 철제유물들은 농사를 짓는 데도 사용될 수도 있었겠지만, 말갖춤새가 동반되고, 고대사회에서 찌르는 무기로 사용된 철창과 철끌, 치는 무기인 쇠도끼가 확인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 신봉동 고분은 당대 최전성기를 구가한 백제 철기군 집단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사집단은 군영을 세우기도 하고, 그 경계를 만드는 목책도 세울 수 있고…. 이런 철도끼와 쇠낫, 철끌 등은 무기는 물론 공구로도 사용할 수 있었겠지요.”(조 관장)

1차 발굴은 아쉽지만 도굴로 파괴된 석실분 1기와 토광묘 14기를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다. 유적의 중요성 덕분에 사적(319호)으로도 지정되었다. 하지만 사적으로 지정되면 뭐하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데….

망루까지 갖춘 1200개의 도굴갱

“야산 전체가 무덤으로 뒤덮여 있어 무덤이 도대체 몇 기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관리 감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유적의 범위가 워낙 넓어서 수풀이 우거지면 바로 옆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며, 시가지를 오가는 차량 소음 때문에….”(차 교수)

유적의 상황은 무관심-방치 속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빗물에 무덤이 씻겨 내려가 무덤이 노출되고…. 도굴범이 활개를 치고…. 도굴갱이 무려 1200여개가 생겼어요. 88년 10월에는 도굴범이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하고, 소문에는 금동관을 도굴해 팔아먹었고, 그 금동관이 시중에 나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고….”

오죽했으면 도굴범들이 나무 위에 망루까지 설치해놓고, 마음껏 무덤을 파헤쳤을 정도였을까.

도굴로 만신창이가 된 채 발견된 신봉동 고분 모습(왼쪽). 백제 도량형의 기준이 된 ‘손잡이 달린 잔’.

 

“할 말이 없어. 정말 한심한 일이야. 지금도 유적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예전엔 더했지.”(조 관장)

1990년 유적이 빈사상태에 이르고서야 겨우 다시 응급발굴에 들어갔다. 보기에도 흉측한 도굴무덤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도굴범들이 싹쓸이하다시피한 고분에서도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졌다.

“A·B지구(각기 충북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구역을 나누어 조사)로 나눠 이뤄진 발굴조사 결과 A지구에서는 토광묘 74기, 독무덤 1기, 토기류 141점, 철기류 176점, 기타 9점 등 총 326점이 확인됐어요. B지구에서는 널무덤 17기와 토기 40점, 무기 및 마구류 106점, 그리고 금동·청동제와 자기류 14점이 쏟아졌어요.”

2400㎖들이 맥주잔?

특별하게 눈에 띈 유물은 역시 82년에도 발견됐지만 용도를 몰라 해석할 수 없었던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杯)’이었다.

“야! 이거 꼭 맥주잔 같지 않아?”

“그래요. 꼭 2000㎖, 3000㎖ 맥주잔 같아요.”

다른 곳에서는 출토 예가 없는 이 커다란 ‘손잡이 달린 잔’이 7점이나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형 ‘맥주잔’을 ‘신봉동식 파배’로 이름 지었고, 이것은 학계에서도 통용됩니다.”

그런데 이 잔은 6차례의 발굴 결과 모두 49점이 확인됐다. 한결같이 5세기쯤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5m가량의 중형급 무덤 이상에서 확인됐다. 이 잔이 확인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른 것들보다 3배나 많았다. 이것은 ‘파배’ 출토 무덤의 신분이 꽤나 높았음을 방증한다. 과연 용도는 무엇일까. 조사단은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혹시 이 잔이 양기(量器), 즉 부피를 재는 백제의 표준그릇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확인된 49점의 파배 가운데 28점이 2400㎖이거나, 2400㎖에 근접했어요. 또한 신봉동 고분과 인근 가경 4지구, 주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리(鉢) 127점의 용적을 계산해보니 500~700㎖들이가 46점으로 가장 많고, 그 가운데서도 600㎖들이가 27점이나 됐어요.”

발굴단에 참여했던 윤대식(현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사)은 논문에서 “백제는 600㎖(소형 바리)를 1되로 해서 4되, 즉 2400㎖(파배)를 1말로 계산하는 백제 특유의 용적체계를 주로 쓰지 않았을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2차 발굴에서 또하나 눈에 도드라진 유물은 B지구 1호 무덤에서 나온 갑옷이다.

“도굴범이 얼마나 급했는지…. 갑옷은 교란됐고 완형도 아니지만 견갑과 경갑 조각까지 수습됐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갑옷은 세모꼴과 긴 메모꼴 철판을 주로 해서 대가리가 둥근 못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이걸 삼각판정결판갑(三角板釘結板甲)이라 하는데….”

사실 한성백제기의 갑옷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뼈로 만든 소찰(小札)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금석문이나 문헌에서는 백제 갑옷의 존재는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자.

“광개토대왕이 보기병 5만을 파견, 1만여령의 갑옷을 획득하고….(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所獲鎧鉀一萬餘領~.)”

이미 광개토대왕 17년(407년)때 백제가 이미 다량의 갑옷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명광개(明光鎧)·금갑(金甲), 철갑(鐵甲) 등 화려한 백제의 갑옷을 지칭하는 기사가 속출한다.

백제 철기군 집단의 위용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하도 오래 사용해서 닳아버린 말재갈이나 등자, 철도끼가 확인된다는 것. 부러진 도끼를 삼베로 묶어 재사용한 것도 있었다. 이것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덤의 주인공이 쓰던 무기와 공구를 그대로 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야산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은 10%도 안된다. 수백기 아니 수천기의 고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2차 발굴 때에는 금동제 귀면장식조각편과 금동 가는고리 귀고리, 청동 귀고리 등이 토광묘에서 확인됐다. 싹쓸이하다시피한 도굴의 와중에 남아있었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혹 금동관이라든가, 금동신발은 없었을까.

그동안 무자비한 도굴에 속수무책으로 속살을 열어버린 신봉동 고분군. 얼마나 많은 중요한 유물들이 도굴됐는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유물이 땅 속에 남아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한 도굴이 자행됐음에도 남아있는 유물의 양상만으로도 초기 한성백제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신봉동 고분의 주인공들이 묻혔던 시대, 바로 그 4~5세기 때의 한성백제는 철강강국이었다는 것. 그 철강기술로 최첨단 무기를 제작, 최전성기를 이뤄 고구려를 끊임없이 압박했다는 것. 이제 청주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은 과연 한성백제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한번 백제 최전성기인 근초고왕대로 돌아가보자.(6)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둥근고리칼-쇠갑옷… 재갈… 백제 전사들의 魂을 만나다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7년 11월 2일 09시 45분 

<38> 청주 신봉동 유적

조사된 300여기 무덤들 중 무기-마구 묻힌 비율 20% 달해… 지금의 현충원 군인묘역에 해당
신라-가야-일본계 토기도 출토, 문화교류 흔적 오롯이 남아있어

1990년대 충북 청주시 신봉동 유적 발굴 당시 각종 토기가 출토된 토광묘들. 이곳에서는 재갈(작은 사진), 발걸이 등 백제 마구가 당시로선 최초로 발견됐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지난달 31일 충북 오송역에서 차로 30분. 청주 북서쪽 외곽에 이르자 야트막한 봉분들이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동네 뒷산 같은 아늑한 분위기랄까. 왕릉급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본 시리즈 20회) 같은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백제 재갈과 발걸이가 출토돼 고고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청주 신봉동 유적’이다.》
 

지난달 31일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손잡이잔(파수배)’ 출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학계는 이 잔이 곡식 양을 측정하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동행한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67)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엔 백제 장수도 있지만 지름이 1m도 안 되는 조그마한 무덤에 묻힌 서민들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왕릉 부장품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백제 전사들의 생생한 흔적이 담긴 현장이죠.”

○ 삼국시대 격전지 전사들의 무덤

1992년 7월 중순 무더운 여름날. 충북대 박물관 발굴팀은 도굴로 인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 무덤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지표를 샅샅이 훑던 조사원들의 시야에 살짝 드러난 고분 일부가 들어왔다. 상당한 크기의 목곽 무덤이었다. 이미 도굴 갱이 뚫려 있어 큰 기대를 접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벌 통을 제거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20∼30cm를 파들어 갔을까. 길쭉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박물관 학예부장이던 차용걸이 손잡이 부분의 까만 녹을 긁어내자 순간 하얀 빛이 번쩍했다. 고대 지배층이 애용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의 ‘은장식’이 분명했다. 붉은색 점토층에 칼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바람에 발굴팀은 대도를 흙과 함께 통째로 파냈다.

흥미로운 것은 칼의 끝이 ㄱ자로 휘어 있었다는 점이다. 차용걸의 회고. “이런 형태의 칼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끝이 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장 당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청동기시대에도 주술적 의미에서 동기를 일부러 부러뜨려 묻은 게 많은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신봉동 유적이 독특한 건 조사된 300여 기의 무덤 가운데 무기나 마구(馬具)가 묻힌 비율이 거의 20%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쇠 갑옷과 투구, 둥근고리큰칼, 손칼, 화살촉, 창, 발걸이, 재갈 등 총 130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 전사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요즘으로 치면 현충원 군인묘역과 비슷할까. 학계는 전사들이 4, 5세기 한반도 중부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한다. 이곳은 한강 유역에 왕성을 둔 백제가 남쪽의 신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이자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 마한과 백제가 빚은 문화

답사를 마치고 고분군 바로 아래 들어선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청주 출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야인 시절 홍보 동영상에 나와 선보이는 ‘손잡이잔(파수배·把手杯)’이 단연 눈길을 끈다. 한쪽에만 손잡이가 달려 머그 컵처럼 생긴 이 잔은 4, 5세기 백제 중앙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봉동 고분에서는 여러 개가 발견돼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 토착 지배층의 문화로 해석된다. 반면 다리가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三足器)나 돌방무덤(석실분) 등은 한성백제의 영향이다. 차용걸은 “3, 4세기 조성된 인근 청주 송절동이나 봉명동 고분은 백제의 지배를 받기 전 마한 토착세력의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에 신봉동 고분은 백제화가 진척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일본계 토기인 스에키와 가야, 신라 토기들이 신봉동에서 발견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백제가 가야를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청주지역이 가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사들의 무덤에도 국제 문화교류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거지요.”(7)

 

 

<주>

 

(1) https://v.daum.net/v/20150713144532060

 

 

(2)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60921/80368379/1

 

 

(3) https://v.daum.net/v/20240703111503467

 

 

(4) 40년만에 공개된 몽촌토성 '곰발바닥'…백제판 '강남개발'의 증거?[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경향신문.2023. 6. 6.

 

 

(5) ‘최강 백제’ 이끈 근초고왕, 어디 묻혔나[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daum.net)

 

 

(6)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15)청주 신봉동 유적 上 - 경향신문 (khan.co.kr)

 

 

(7)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둥근고리칼-쇠갑옷… 재갈… 백제 전사들의 魂을 만나다|동아일보 (donga.com)

 

 

 

 

<참고자료>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70611.html

 

 

 

"자연제방에 축성했다는 거짓말을 또..한성백제 능멸은 못 참아"..'풍납토성 교수' 이형구의 분노 (daum.net)경향신문. 2022.05.22

 

 

 

"풍납토성 성벽 길이 3.8㎞ 이상…올림픽대로 밑 존재 가능성" (daum.net)2023.03.07

 

 

 

풍납토성 서쪽 성벽 실체 드러났다…"성벽 최소 31m 이상" (mbn.co.kr)2018-12-17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서쪽 성벽 발굴과정에서 성 외벽 구간이 처음 확인됐습니다.

 

 

 

 

 

 

 

 

 

 

 

 

 

 

 

 

풍납토성 백제 유적 발굴 8년만에 재개 (hani.co.kr) 2007-12-10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60302/76767224/1 

 

 

 

몽촌토성 인근서 백제 우물 발견…"한성 백제 연구에 중요 자료" (daum.net)연합뉴스.2024. 2. 26.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출토 '동물 뼈' 분석 나서 (daum.net)2024. 2. 4.

 

 


몽촌토성 집수지에서 '고대 목제 쟁기' 추가 출토 (daum.net)연합뉴스.2023. 11. 21.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 '백제 한성' 고분군 보고서 4권 발간 (daum.net)
2023. 3. 7.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유골 발굴..백제 '화장문화' 첫 확인 (daum.net)2019. 10. 24.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백제 한성기 초대형 적석총 확인 (daum.net)2016. 11. 29.

 

 

 

'한반도의 피라미드' 서울 송파구 석촌동고분군은 백제왕 근초고왕의 무덤일까? (daum.net)2016.06.03

 

 

 

 

 

 

 

 

 

 

 

 

 

충주에서 4세기 백제 철 생산했다 (hankookilbo.com) 2016.06.01 

 

 


하남 감일동서 백제 최고위층 석실묘 50기 쏟아져 | 연합뉴스 (yna.co.kr)
2018-04-22 

 

 

 

파주 운정지구서 백제 초기 토기가마 단지 발견 | 연합뉴스 (yna.co.kr)2016-08-03

 

 


예산군, 예산산성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유적 발견 (daum.net)2016.12.23. 

 

 

 

청주 신봉동 고분군서 석곽묘 3기 첫 발굴 (daum.net)2013.12.24.

 

 

 

한성 백제시대 대형 주거지 발굴 (daum.net)2016. 12. 1. 

 

 

 

한성 백제시대 거대 고분 발견|동아일보 (donga.com)200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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