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1) 소서노 여왕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는 〈고구려 본기〉보다 훨씬 더 잘못 기술되었다. 백제 역사가 백 수십 년 정도 삭감되었음은 물론이고 시조와 시조의 출신까지 잘못 기술되었다. 백제 시조는 소서노 여왕이다. 그는 지금의 한양인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그가 죽은 뒤 두 아들 비류·온조가 각각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하남위례성1)에 도읍을 정했다. 비류는 금방 망하고 온조만 계속 왕 노릇을 했다. 〈백제 본기〉는 소서노 이야기를 쏙 뺀 채, 서두에서 비류·온조가 미추홀·하남위례성에서 분립한 사실부터 기록했다. 또 〈백제 본기〉는 온조왕 13년에 온조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다. 이것은 온조가 하남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백제 본기〉의 첫 번째 오류다.

비류·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우태다. 우태가 부여씨이므로, 비류·온조의 성씨도 부여다. 근개루왕(개로왕)도 “백제는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따라서 〈백제 본기〉에서 비류·온조를 추모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것이 두 번째 오류다. 이런 오류를 교정한 상태에서 백제 건국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태의 부인인 소서노가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로 살다가 추모왕과 재혼한 뒤, 재산을 바쳐 추모왕을 돕고 고구려 건국에 기여했다는 점은 이번 장의 제3절에서(‘제2절 고구려의 발흥’의 오기인 듯하다_옮긴이) 서술했다. 추모왕은 소서노를 정실부인으로 대접하고 비류·온조를 친자식처럼 사랑했다. 그러나 추모의 아들인 유류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돌아오자, 예씨가 제1왕후가 되고 소서노가 제2왕후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온조가 덤받이 자식(전처소생_옮긴이)이 되었다. 그러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다 우리 어머니한테 있는데도, 어머니는 왕후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기댈 데가 없어졌다. 대왕이 계실 때도 이러하니, 대왕이 돌아가시고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가 어디에 기대겠느냐?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실 때 어머니를 모시고 딴 데 가서 살림을 차리는 게 낫겠다”라고 상의했다.

비류와 온조는 이런 생각을 소서노에게 알렸다.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요청해서 금은보화를 나눠 가진 뒤, 비류·온조 두 아들과 오간·마려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에 들어갔다. 당시 마한왕은 기준의 자손이었다. 소서노는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마한 땅의 서북 100여 리에 해당하는 미추홀과 하북위례성 등을 얻었다.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 후 강성해진 서북쪽의 최씨 낙랑국이 압록강의 예족을 은밀히 도와 백제를 심하게 압박했다. 낙랑국과 친했던 소서노는 처음에는 예족만 경계했다. 그러나 예족의 침입이 낙랑국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안 뒤로, 낙랑국과 절교하고 성책을 쌓아 방비했다.

〈백제 본기〉에서는 낙랑왕이라 하지 않고 낙랑태수라고 했다. 이는 백제 역사를 몇 백 몇 십 년 삭감한 뒤, 거기에 맞는 중국 제도를 찾다 보니 생겨난 결과다. 그래서 낙랑왕을 한사군 낙랑태수라고 한 것이고, 예족을 말갈족이라고 한 것이다. 신라 말엽에 예족을 말갈족으로 표현한 당나라 책을 보고 기존 서적의 예족을 모두 말갈로 고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깊이 읽기

백제의 건국 연도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편에 따르면, 소서노와 비류·온조는 유류가 추모왕을 찾아온 뒤에 고구려를 떠나 한강변에 가서 백제를 세웠다.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 편에 따르면, 유류(유리)가 추모왕을 찾아온 것은 고구려가 건국된 지 18년 뒤였다. 따라서 고구려가 건국되고 적어도 18년이 경과한 뒤에 백제가 세워진 것이다.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따르면, 고구려가 망한 668년에 당나라의 가언충이 당고종에게 “올해는 고구려 건국 900년이 되는 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233년에 세워진 나라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유물을 토대로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가언충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기원전 215년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고, 북한 학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기원전 259년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세워졌다’는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위례성의 위치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편에 따르면, 소서노가 죽은 직후에 온조가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라면서 한강 남쪽으로 순시하러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그 이전까지는 백제 수도가 한강 북쪽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강 북쪽에 있었던 도읍이 바로 하북위례성이다. 하북위례성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다. 북한산 근처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고 중랑천 유역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2) 소서노 사후에 두 아들의 분열과 흥망

소서노는 재위 13년에 사망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성 건국자이며,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와 온조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다. “낙랑과 예족의 압박이 날로 심해지는 속에서 어머니 같은 분이 없으면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찾아 천도하는 게 마땅하다.”

두 형제는 오간·마려 등과 함께 지금의 한양 북악인 부아악()에 올라 수도로 삼을 만한 자리를 찾아보았다. 비류는 미추홀을 생각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을 생각하니, 두 형제의 의견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오간·마려 등은 한결같이 비류에게 충고했다. 하남위례성은 북으로는 한강을 등지고 남으로는 풍부한 못을 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을 끼고 서로는 큰 바다를 둔 훌륭한 요새이므로, 이곳을 버리고 다른 데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류가 듣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는 할 수 없이 토지와 인민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비류는 한쪽 인민을 차지하고 미추홀을 거점으로 삼았으며, 온조는 다른 쪽 인민을 차지하고 하남위례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이로써 백제가 동서로 갈리게 되었다.

〈백제 본기〉에 기록된 온조 13년까지는 소서노의 연대이고, 익년인 14년은 온조의 원년이다. 온조 13년에 발표한 도읍 이전의 명령은 비류와 충돌한 뒤 자신을 따르는 인민에게 내린 것이다. 또 온조 14년(실은 온조 1년)에 “한성 백성을 나누었다”고 한 것은 두 형제가 인민을 갈라 각자의 서울로 간 사실을 가리킨다. 미추홀은 메주골이고 위례성은 오리골(본래는 

리골)이다. 오늘날에도 어느 동네든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기원이 오래되었음은 알 수 있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짰다. 그래서 백성들이 살 수 없다며 흩어져 달아났다. 하지만 온조의 하남위례성은 물과 풍토가 적당하고 오곡이 잘 자라 인민이 편안히 살 수 있었다. 비류가 분통해하며 병들어 죽은 뒤, 신하와 백성이 다들 온조에게 가니 동서의 두 백제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깊이 읽기 소서노와 온조

신채호는 소서노가 초대 백제왕 즉 초대 ‘어라하’이고 온조는 두 번째 왕이라고 했다. 신채호가 제시한 핵심 근거는 《삼국사기》 기록의 모순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온조가 하남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했다. 이렇게 하남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운 온조가 백제 건국 12년 만에 소서노가 죽자 도읍을 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바로 이 대목이 이상하다는 게 신채호의 지적이다. 백제 수도가 하남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바뀌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려다 보니까 이런 모순이 생겼다는 것이 신채호의 생각이다. 하북위례성이 백제 최초의 도읍이고 그곳에서 소서노가 왕이었던 사실을 숨기고자 하니까 이런 모순이 생겼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채호가 제시한 근거 외에도 소서노가 초대 왕이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들이 있다. 중요한 것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소서노의 지위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서노는 고구려를 세우기 전에나 후에나 항상 자기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추종 세력에는 비류·온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어머니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하 관계가 백제 건국 당시에도 그대로 유지됐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정세가 편안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정세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가리킨다. 만약 소서노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였다면, 소서노가 죽는다고 국제정세가 위태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서노가 왕이었다고 보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진다.

둘째, 소서노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었고 그것이 도읍 천도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호랑이들이 성에 침투하고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식의 기록 방식은 쿠데타에 의한 왕의 죽음을 가리킬 때에 흔히 사용되었다. 신라 박혁거세와 백제 동성왕은 쿠데타로 죽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죽기 전에 용 두 마리가 경주에 출현했다고 했고, 동성왕이 죽기 전에도 호랑이 두 마리가 출현했다고 했다. 왕의 죽음을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한 점을 고려할 때, ‘호랑이의 침투에 이은 소서노의 죽음’은 쿠데타에 의한 소서노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소서노의 죽음이 정변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소서노가 정변으로 죽자마자 온조가 도읍을 옮겼다. 소서노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였다면 소서노가 죽었다는 이유로 도읍을 옮길 필요가 있었을까?

셋째, 소서노가 죽을 당시에 소서노와 온조의 관계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기 거처보다 부모의 사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 점은 《예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예기》 〈곡례〉에서는 “군자가 집을 지을 때는 사당이 가장 먼저이고, 마구간과 창고가 그 다음이며, 자기 거처는 맨 나중이다”라고 했다. 군자는 부모의 사당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는 마구간이나 창고 등과 같은 실용적인 장소를 짓고 맨 나중에 자기 거처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관념은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을 위반하는 인물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온조는 이런 상식을 위반했다. 소서노가 죽자마자 온조는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는 이 궁궐이 화려했다고 했다. 온조는 자기 궁궐을 짓고 2년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어머니 소서노의 사당을 지었다. 어머니가 죽고 4년이 넘은 뒤에야 사당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온조와의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소서노가 사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정황들을 보면 백제 초대 어라하인 소서노가 온조의 쿠데타로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온조의 마한 점령

백제는 마한의 땅을 얻어 건국했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마한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했다. 수렵을 하면 노루·사슴을 마한에 보냈고, 전쟁을 하면 포로를 마한에 보냈다. 소서노 사후, 온조는 예족과 낙랑을 방어할 목적이라면서, 북으로 패하(지금의 대동강)로부터 남으로 웅천(지금의 공주)까지를 백제 땅으로 획정해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후 온조는 웅천으로 가 마한과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그러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온조를 힐난했다. “왕의 모자가 처음 남쪽으로 왔을 때 발 디딜 땅도 없었다. 내가 서북의 100리 땅을 떼어주었기에 오늘날의 백제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국력이 좀 세졌다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고 성책을 쌓으니, 이 어찌 의리상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러자 온조는 거짓으로 죄스러워하며 성책을 헐었다. 하지만 측근들에게는 “마한왕의 정치가 어지럽고 국세가 쇠약해졌으니, 지금 취하지 않으면 딴 사람 손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얼마 뒤 사냥을 핑계 삼아 마한을 습격하고 도읍을 점령했다. 또 50여 개의 소국을 토벌하는 한편, 마한의 유민으로 의병을 일으킨 주근의 일족을 참살하였는데, 온조왕의 잔학상이 매우 심했다.

기준은 남쪽으로 도망해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로 바꾸었다. 이것이 후손들에게 이어지다가 이때 와서 망했다. 《삼국지》에서 “기준의 후예가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다. 여기서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중국인들이 항상 백제를 마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 유류·대주류왕과 동시대 사람이다. 온조대왕 이후에 낙랑이 침입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이미 대주류왕이 낙랑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 1) 소서노 여왕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는 〈고구려 본기〉보다 훨씬 더 잘못 기술되었다. 백제 역사가 백 수십 년 정도 삭감되었음은 물론이고 시조와 시조의 출신까지 잘못 기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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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금) 18:37  

"부여 계승한 백제, 해외까지 진출한 글로벌 국가였다!"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강연

▲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이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의 서술에 의하면, 백제 건국 시조는 온조이고 그 계통은 고구려가 된다. 고구려가 종가(宗家)라면, 백제는 그 작은 집이 되고 마는 셈이다. 백제 건국 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기록을 일방 통행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가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이 교수는 '글로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이 교수는 백제사 왜곡에 대한 사안을 뽑아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 근간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백제는 고구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나라가 아버지의 나라와 수백 년간 전쟁을 벌인 국가로 본다"며 "백제 건국 세력을 잘못 풀이한 바람에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 시조 전승(傳承)'과 '비류 시조 전승' 등 2종류의 백제 시조 전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온조 시조 전승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에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며, 비류 시조 전승은 백제본기 할주(割註)에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이다. 현재 온조의 고구려 기원설과 비류의 부여 기원설이 팽팽한 상황이나, 온조 전승이 본문에 적힌 덕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이 교수는 "온조 이야기는 근거가 너무 박약한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며 "백제 시조 온조왕은 만들어진 역사다. 온조 일행의 남하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어머니 소서노를 데리고 간 것은 비류왕"이라고 말했다. 또한, 백제 건국 세력은 고구려계가 아닌 부여계라며, 시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부여계 전승 대 고구려계 전승이 4:1로 부여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했다.
 
"472년에 개로왕(백제 21대 왕, 455~475)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이것보다 분명한 기록이 어디 있나? 일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이 외교 문서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았다. 실제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扶餘) 씨이다. 온조 건국설화가 맞는다면, 고구려 왕실의 고(高) 씨를 써야 맞지 않는가?"
 
이 교수는 "중국 사서에 보면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뿌리가 같은, 대등한 형제국가이고 경쟁상대"라며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소재한 약소국이 아니다.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이 아닌 오히려 자긍심을 지닌 민족이었다.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천손국(天孫國) 의식으로 주변 국가와 외교적 관계를 맺으며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 해상을 통한 백제의 활동 영역. 백제는 국제성과 독창성으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 남부까지 진출했다. 제주도는 물론 북규수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했다. 다시금 항로를 연장시켜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이르렀으며,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
 
이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점이 백제다. 물산이 풍부해 인구도 제일 많았고 생산력도 높았다. 중국인, 왜인을 조정의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다문화를 지향하는 열린 국가였으며 선진국이었다"고 했다.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해외까지 진출하며 다양성을 추구한 글로벌 국가였다.
 
한민족원로회가 주최하는 제14차 포럼(2016년 1월 14일)에는 하버드대학교 박사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학교 교수가 초청되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주제로 강연한다. 한민족미래포럼은 격월로 홀수달 두 번째 목요일에 열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동서남북의 분열과 대립, 정파 간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자 마련된 자리이다.
 
글/사진. 이효선 기자 sunnim0304@gmail.com

"부여 계승한 백제, 해외까지 진출한 글로벌 국가였다!" (brainmedia.co.kr)

 

"부여 계승한 백제, 해외까지 진출한 글로벌 국가였다!"

▲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이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의 서술에 의하면, 백제 건국 시조는 온조이고 그 계통은 고구려가 된다. 고구려가 종가(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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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 6. 7. 02:11수정 2007. 6. 7. 02:11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서울신문]올해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 왕경(王京)일 가능성이 처음 제시된 역사적인 발견이 있은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7년 1월, 이형구( 왼쪽·63)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는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적의 흔적과 초기 백제의 토기를 찾아냈다.

3세기 후반 것으로 치부되던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에 백제가 쌓은 도성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근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이 교수는 '목숨을 걸다시피' 풍납토성을 보호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재산권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성 내부 주민들로부터 수없이 항의를 받은 것은 물론 지난해에는 몇 시간 동안 감금되는 일도 있었다.

이 교수가 이번에는 사재를 털어 '풍납토성 내 백제왕경 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8일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갖는다. 이 교수는 6일 "10년 전, 학자로서 예지했던 대로 왕궁유적이 드러났을 때 마치 천상에 있는 것처럼 평안해지는 희열을 느꼈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교수는 "그동안 물러서지 않고 학문적 견지를 지켜 왔기에 오늘날처럼 풍납토성이 국가사적으로 되살아나고, 백제 초기 역사도 300년이나 복원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이형구가 보아도 이형구가 해낸 일이 아닌 것 같다."면서 웃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떠들썩하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된 초기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면서 "공주와 부여뿐만 아니라 서울도 백제의 옛 수도라는 인식을 서울 시민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고 세미나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경이라는 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박물관 등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는 확신"이라면서 "풍납토성에서 나온 11개의 시료로 실시한 방사성연대측정에서도 모두 백제의 건국연대와 일치하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증거에도 풍납토성이 곧 초기 백제의 왕성이라는 학설을 역사학계는 선뜻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국사 교과서에 반영되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사들이 공동 집필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마주보는 한일사'에도 황해도는 물론 경기도와 충청남도까지를 백제가 아닌 '대방'의 강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식민사관에 입각해 3∼4세기에 백제가 건국됐다고 씌어진 책을 읽고 학위를 받은 뒤 학교에서 가르쳤으니 고정관념을 타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가 풍납토성에 쏟는 노력은 글자 그대로 '보존'에 모아져 있다. 그는 "풍납토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거나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시개발에서 지켜 현상유지만 하자는 것"이라면서 "고고학도 아직은 일천한 상황인 만큼 학문의 수준이 진전되고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때 능력 있는 후학들이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 건너에 있는 서울 구의동 유적을 예로 들었다. 구의동 유적은 발굴보고서에 백제유적으로 명시돼 있지만, 최근에는 완전히 고구려 유적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를 지으면서 유적을 깎아 버리는 바람에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은 조선시대만 생각하는 정도 600주년이 아니라 한성백제부터 2000년을 이어 왔다는 점에서 로마 다음가는 역사를 지닌 도시"라면서 "그럼에도 세계 10대 역사도시를 선정하는 데 서울이 빠지는 것은 스스로 역사를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밤을 새워 자료집을 손수 복사하고 제본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이번 세미나를 여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고통을 겪고 있는 풍납토성 지역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재산권 행사가 어렵고, 최근 부동산값이 널뛰기하며 바로 이웃마을은 다락같이 아파트값이 오르는데도 살기 좋은 풍납동은 개발이 안 되는 데 따른 주민들의 박탈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민들이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에 이른 것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주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상할 수 있는지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를 정부에 전달해 실질적인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글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daum.net)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6. 28. 09:00수정 2021. 7. 2. 11:37

 

입력 2013-12-23 15:35:00

동맹이론으로 ‘해상강국 백제’ 증명한 중국인 판보싱|신동아 (donga.com)

 

동맹이론으로 ‘해상강국 백제’ 증명한 중국인 판보싱|신동아

 

shindonga.donga.com

 

 

 

문화일보 입력 2013-03-05 11:04

“백제의 개방과 국제성, 동아시아 문화권 기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백제통합 전쟁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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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북송대 모사한 ‘양직공도(梁職貢圖)’ 가운데 백제국 사신을 그린 ‘백제국사도’.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일선에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임무를 수행한 첨병이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30년 넘게 가르쳐온 중견 역사학자 두 명이 최근 각각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묶은 책을 펴냈다.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인 노중국(64·사학) 계명대 교수가 상재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지식산업사)와 국내 고대사학계에서 대표적인 남북국시대론자인 김영하(60·사학) 성균관대 교수가 출간한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성균관대출판부)가 바로 그것. 두 연구서에는 모두 30년 내공의 연구자들이 절차탁마한 한국고대사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이 담겨있다.

노 교수의 연구가 풍부한 실증 자료에 바탕을 하고 있는 반면, 김 교수의 연구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실증보다 있는 사실에 대한 재검증과 논리에 바탕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 “백제 문화의 자기 개성과 국제성, 개방성은 고대 동아시아 공유문화권(共有文化圈)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는 우리나라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 한반도, 왜(倭) 등과 폭넓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던 백제의 대외관계사를 교섭과 교류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정리한 책이다. ‘백제정치사상사연구’와 ‘백제사회사상사’ 등을 펴낸 바 있는 노 교수는 이 책에서 백제사를 초기 백제와 한성도읍기, 웅진도읍기, 사비도읍기 등 크게 네 시기로 나눈 뒤 시기별 대외관계를 정치·군사·외교 측면에 비중을 둔 교섭과 경제·문화 측면에 비중을 둔 교류의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자국의 존립과 이익 추구였다. 이에 따라 중국 대륙의 수나라·당나라, 고구려 같은 대국들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른바 ‘실지양단(實持兩端)’ 정책을 추진했다는 게 노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백제는 이러한 현실적인 외교의 모습과 함께 개방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의 면모도 지녔다. 특히 지정학적·자연환경적으로 중국 왕조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가야·왜의 사정은 용이치 않았다.

노 교수는 “백제는 신라와 가야, 왜가 중국 남조와 교섭을 재개하려 할 때 뱃길 안내와 통역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며 “이로써 이들 나라들도 한문자(漢文字)의 사용과 유교·도가사상·불교라고 하는 정신문화, 율령 제도를 기본적인 공통요소로 하는 동북아시아 공유문화권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백제가 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전은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으로 이해하기보다 신라의 백제통합전쟁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영하 성균관대 교수가 펴낸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의 문제의식은 세 가지로 모아진다. 우선 김 교수는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일국사적 접근을 넘어 동질의 고대사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7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국제전을 신라의 백제통합 전쟁이란 관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축소해 이해하는 한편, 이 전쟁을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의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삼국의 정치체제는 노예를 소유한 귀족들의 평의체제에서 권력을 강화한 대왕의 전제체제로 발전했지만, 대왕 전제체제하에서 귀족세력은 분열했고 삼국 간의 세력 각축전은 더욱 격화됐다. 이 같은 이중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삼국에서는 권력의 집중을 지향한 정변이 일어났고, 삼국 간의 전쟁은 수와 당의 개입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비화됐다.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임을 주장해온 김 교수는 책에 실린 ‘신라통일론의 궤적과 함의’라는 글에서 “고구려를 포함한 신라의 일통삼한(一統三韓)은 신문왕대에 측천무후를 상대한 외교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허위의식이었다”고 강조했다. 신라의 일통삼한의식은 고구려를 통합하지 못한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선사관은 고구려 고지에서 건국한 발해를 한국사에서 배제하기 위해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는 신라통일론의 전형을 마련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전에 대한 한국사의 해석에서 신라의 백제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 건국이라는 기본 사실 위에 ‘신라와 발해’로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백제의 개방과 국제성, 동아시아 문화권 기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백제통합 전쟁에 불과” :: 문화일보 munhwa

 

“백제의 개방과 국제성, 동아시아 문화권 기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백제통합 전쟁에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30년 넘게 가르쳐온 중견 역사학자 두 명이 최근 각각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묶은 책을 펴냈다. 백제사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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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완순 컬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2/07 [20:01]

요동의 비정과 백제의 진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요동의 비정과 백제의 진실

고려인삼의원산지가중국요동이라는기묘한주장몇해전서울역사박물관에서충청남도주최로열린‘고려인삼의역사문화적가치재조명을위한국제학술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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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현 기자  | 기사입력 2008/04/25 [11:34

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의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nbsp;.&nbsp;&nbsp;&nbsp;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nbsp;"百濟王&nbsp;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pluskorea≫ 해상과 대륙을 지배경영한 백제와 로마

고대동아시아해상제국백제1.비류백제와온조백제문제,그리고백제의수도문제로마는하루아침에이루어지지않았다.라는말이있다.그만큼탄탄한제국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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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수도]

승인 2015.01.31 01:08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한정석 편집위원 

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

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국사학자들에게는 유령의 성과 같은 불가사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도저히 찾을 수도 없거니와 ‘여긴가?’하면 ‘저기다’라는 주장이 나오고, 그래서 ‘그곳인가?’하면 ‘아까 거기가 맞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적어도 백제의 초기 수도 위례성의 후보는 9개에 달한다.

한강 이북으로는 파주 적성(積城)으로부터 세검동, 중랑천을 거쳐 강남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천안에 이른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위례성을 찾아 경기도를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다수결로 하자면 풍납토성이 유력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는 남는다.


오리지널 위례성은 어디인가
백제의 초기 도읍이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믿음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온조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에 있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한산이 다름 아닌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해 명확했다. 문제는 그곳으로 옮겨진 초기 백제인들이 있었던 위례성의 위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 위례성이 당시의 직산(오늘날 천안)의 ‘성거산 위례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성거산 위례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며 온조왕 13년(AD 1세기)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믿음에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에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옮겼다면 위례성은 직산(천안)이 아니라 더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순행 구절에 주목했다.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라는 대목이었다.

정약용은 이 구절이 바로 온조왕의 초기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처음에 한강 이북 어딘가에 오리지널 위례성이 있었고, 그곳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자주 받으니 강을 건넌 곳이 하남 위례성이었고, 다시 한산으로 옮겨갔다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생각은 파격적이었지만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일제시대 일본 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서기>와 차이가 난다는 이유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이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 채 하남 위례성을 광주, 한산을 남한산에 비정하고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했다.

▲ 몽촌토성 재현 모습

 

또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간주하게 된다. 해방 후에도 그러한 관점은 계속됐다. 어쨌거나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위례성은 이제 더 이상 천안이 될 수 없었다. 한강 유역 어디여야만 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학설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속수무책일 때 획기적인 관점에서 위례성을 찾으려는 이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친일 식민사관의 거두라고 비판받는 이병도(李丙燾)였다. 그는 일본학자들의 실증주의 방법론을 받아들였지만 무엇보다 정약용이 분석한 ‘하북 위례성’에 주목했다.

이병도는 오늘날 세검정 유역을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여러 전승과 기록을 종합해 광주고읍(古邑)과 남한산성이 조선시대에 임금의 피난처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했다.

코미디 같은 ‘위례 선점’ 지자체 싸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좀 더 대담한 학자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김영수는 온조가 처음 도읍한 (하북)위례성을 오늘의 임진강 남쪽 고양(高陽) 부근으로 추정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파주를 지나는 임진강의 옛 이름이 적성강(積城江)이라는 사실과 위례성이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는 점이었다.

당시로서는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른 뒤 파주, 고양 일대에서 백제 초기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위례성=파주, 고양설’은 단숨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이렇게 영역이 넓어진 위례성은 1980년대 고고학의 발전과 서울시 개발에 따른 유적지 발굴이 겹치면서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 풍납토성, 이성산성 등의 지역이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하북 위례성은 현재의 중랑천 지역이었고 이곳에서 이동한 하남 위례성이 한나절 거리였을 거라는 차용걸 충북대 교수의 주장이었다.

   
▲ 백제인 의복 재현
특히 백제 고분들이 나오는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거리가 2km내라는 점에서 차용걸 교수는 하북 위례성-하남 위례성-한산이 사실은 서로 아주 가까운 지역 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는 북방민족 백제가 한강을 통해 남하하는 루트로서 제시된 임진강 위례성론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건은 일종의 대이동이 아니라 관내 이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든다. 온조왕이 우려했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고자 초기 백제의 수도를 한반도가 아닌 만주지역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다시 우리는 궁금해진다. 그래서 위례성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대답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다만 위례성의 ‘위례’라는 음가에 주목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이 투르크-몽골어로 ‘나라’, ‘백성’을 뜻하는 ‘Ulus’의 음차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의 귀족계층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썼으며 고구려의 언어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간에 천연성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니까 위례성은 온조 집단들이 모여서 사는 곳을 그들이 ‘울루스’라고 말하는 것을 ‘慰禮(위례)’로 적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백제 전체가 울루스이자 위례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위례’ 선점 갈등도 사실 좀 코믹한 면이 있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출처 :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미래한국 Weekly

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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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8 [15:18]

백제의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의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양지환©양지환©양지환©양지환위에열거된사진은출토된백제유물을바탕으로한것임을양지환선생이제보한것이으로서,백제가한반도에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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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5/27 [13:39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본글은장문이라아래와같이2부로나누어연재됩니다.(1부)백제의기원과사서로본위례성의위치(2부)산동성곡부의제왕성은백제의왕성인가?위대한제국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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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3:44]

백제(百濟), '압록강변'에서 시작했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백제(百濟), '압록강변'에서 시작했다?

(백제(百濟)가백제(百濟)인이유는활발한해상활동을해서그렇다는의견도있는데그것도맞다고봅니다.이글에서는더근본적인이유를찾아봅니다.)백제(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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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30 [16:04]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본글은장문이라다음과같이3부로나누어연재됩니다.(1부)일제가조작한백제의왕도부여(2부)소정방은황해를건너왔을까?(3부)백제멸망과흑치상지의부흥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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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6/02 [21:25]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백제 30대 무왕이 승하하자 당 태종도 상복입고 곡을 한 백제의 위상

본 글은 ‘백제의 기원과 온조의 건국지는 어디?’의 (2부)입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93§ion=section78

주변의 낙랑/말갈/대방으로 본 위례성의 위치

온조 13년(AD 6년) 2월 왕모(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죽고, 5월 온조대왕은 신하들에게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으로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었는데, (중략)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하략)”라고 말한다. (소서노의 죽은 나이 61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고구려의 건국년도와 함께 언급할 예정입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할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 편의상 온조대왕을 존칭을 생략하고 온조라 하니 이해바랍니다.)
▲&nbsp;&nbsp;산서성에 있는 대해(大海)라는 지명은 호수를 말함이다. 이곳도 백제의 영역으로&nbsp;간과할 수 없는 지역이다.

 
참고로 위 낙랑은 최씨의 낙랑국(한반도+만주)이 아니라 한사군 낙랑으로 보아야 한다.
▲&nbsp;&nbsp;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nbsp;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안에 모든 것을 잡아 넣어 서부산악지대에만 있었던 중국은 어부지리로 역사 강역을 넓혔다.&nbsp;&nbsp; 이걸 아직도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nbsp;이나라 식민사학계는&nbsp;매국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엔 말갈이 있었다고 온조는 말하고 있다. 이 낙랑군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가 저절로 밝혀진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한다.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으니 백제는 그 잘난 후손들 때문에 황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낙랑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려면 장문이라 사진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백제와 낙랑의 기록을 보면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한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의 위치사진을 보면 이 기록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백제가 낙랑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즉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nbsp;&nbsp;&nbsp;중국의 사서가 오히려 역사강역을 제대로 밝혀주고 있다.&nbsp; 필자는 사기의&nbsp;상부 1/2이&nbsp;한사군의 위치가 맞다고 본다. 중국 떼놈보다도 못한 한국의 식민사학계 임을 알 수 있다.&nbsp; 돈만 없애는 고구려 연구재단도 다 엉터리이다.

그리고 <중국 25사>에 백제는 대방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럼 대방은 어디인가? 대방은 백제 패망 후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보듯이 하북성 남부 석문(石門: 현 石家庄)과 접한 곳이다. 9대 책계왕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대방은 우리와 장인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즉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백제와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초기 백제가 서울 근처에 있었으면 말갈은 황해도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 따르면 그 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가? 도대체 말갈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온조왕 2년 왕이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있고 (생략) 막고 지킬 계획을 마련하라”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온조왕이 말갈을 피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그런 말갈의 위치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5대 초고왕 49년(214년) 북부(北部)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방과 접해 있는 현 하북성 남쪽에 있는 성도(省都) 석가장(石家庄)인 것이다. 이곳은 또 대방과 접해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위의 기록들에서 온조의 최초 도읍지를 추정해 보면, 석문(석가장) 아래에 대방이 붙어 있고, 이 대방 근처 아래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nbsp;&nbsp;대방의 위치는 석문 바로 아래쪽이다. 석문은 현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마한으로 본 백제의 둘째 도읍지

온조왕 24년(AD 6) 왕이 남쪽 경계인 웅천에 울짱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00리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소.(이하생략)”라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후인 온조 27년 마한이 결국 백제에 복속된다. 이로서 마한은 백제 남쪽 경계인 웅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본 글의 (1부)에 언급했다시피, 번조선의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한(삼한)의 왕이 된다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삼한의 하나가 마한이다. 마한은 한수 남쪽에 백제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이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달려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 ‘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 ‘가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 “Let's go'의 뜻이다.

또 海라는 지명은 현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 일대에 있다. 한문 실력이 없는(?) 식민사학계는 海자만 보이면 전부 바다로만 해석해 전혀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nbsp;&nbsp;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 번조선왕 기준은 조상인 기자가 살던 서화 땅으로 와 한(삼한)을 세운다. 가운데 상부에 대왕산 밑에 海 자가&nbsp;보인다. 바로 저 일대가 바다가 아닌 육지인 海 지방이다.

둘째 도읍지의 지리적 조건    

여하튼 온조는 두 번째 도읍지에서 나라를 다스린다.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서울로 비정하고는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보고, 북쪽 패하를 예성강으로, 남쪽 웅천을 안성으로, 동쪽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를 한반도 서부로 비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백제의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본 것이다. 대해가 황해인지는 잠시 후에 한꺼번에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온조의 최초 도읍지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는 당시 말을 타고 당일치기가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두 군데 다 한수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례성은 북대한수(北帶漢水)이니 분명 한수의 남쪽이다. 그리고 온조는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고는 그리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에서 왜 굳이 한수의 남쪽을 순시했다고 말했을까?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는 거짓이던가 아니면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어야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맞는 것이다.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면 아무래도 북대한수(北帶漢水)가 수상하다.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南至帶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온조는 (북)한수의 남쪽인 위례성에서 (남)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도읍지가 더 남쪽이라는 근거는 북으로 말갈이 침략하니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았다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진 그 중간의 큰 섬과 같은 곳에 백제가 위치해야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한강의 여의도처럼 남과 북 위.아래로 한수가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 굳이 여의도로 표현을 하자면 한강 남쪽의 여의도에서 한강 남쪽인 영등포로 도읍을 옮겼고, 그런 여의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너머에 낙랑군이 있어야 한다. 즉 섬처럼 보이면서 여의도 같은 작은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육지여야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먼저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서울의 한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학계가 비정한 한수는 서울의 한강이다. 그런데 한강은 강줄기가 둘로 갈라지지 않아 이 조건에 안 맞고, 동쪽 끝은 주양(東極走壤)으로 비정한 춘천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는데 낙랑군은 대동강 평양으로 정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식민사학계의 백제 도읍지 비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차라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북한강의 남쪽을 위례성으로, 남한강의 남쪽을 한성이라 했으면 이 조건에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양수리도 낙랑군이 춘천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인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했으므로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리고 한강은 대부분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한줄기인 한강의 하류가 상황에 따라 절대로 둘로 갈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2,000년 전 백제 때 한강 하류는 두 줄기 이었다”라고 우길 수도 없다. 결국 여러 조건으로 보아 서울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미 필자는 4부에 걸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위치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백제는 위례성-->한성(?)-->한산-->웅진-->사비로 천도를 했다. 웅진과 사비에 대해서는 백제 패망 전쟁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밝혔다. 이번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 도읍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중국 대륙 산동성의 지형을 놓고 보면 이 조건과 거의 맞아 들어간다. 위례성의 조건인 북대한수(北帶漢水)는 황하(黃河), 동거고악(東據高岳)은 태산(泰山), 남망옥택(南望沃澤)은 평야지대,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대야택(大野澤: 독산호)로 보면 조건이 딱 맞아 들어간다. 그리고 한수가 둘로 갈라지기만 하면 된다. 

산동성 서쪽에 있는 독산호는 폭 20Km 길이 120Km 정도로 엄청나게 큰 호수로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120Km이면 충남의 해안선 길이보다 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오면 호수의 길이와 폭은 더욱 더 커진다. 독산호 바로 밑에 미산호라는 큰 호수가 또 있다. 이 두 호수를 합치면 이곳이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랴! 

▲&nbsp; 독산호(대야택)은&nbsp;옛날부터 큰 바다로 불리던 큰 호수이다.&nbsp;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바로 이곳이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산동성 사람들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의 바다를 北海를 발해(渤海), 東海를 황해(黃海), 南海를 산동성 남쪽 청도/연운항 앞바다, 西海를 독산호(獨山湖)라고 했다. 백제의 기록은 백제의 위치인 산동성을 중심으로 쓴 것이지 중국 대륙 전체를 놓고 쓴 것이 아니다. 
▲&nbsp;&nbsp;산동성의 동.서.남.북의 사해. 독산호(대야택)은 산동성의 서쪽 바다로 회수에서 황하로 가는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필자가 백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자 식민사학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네티즌들이 서조대해(西阻大海)를 핑계로 중국의 서쪽엔 바다가 없고 멀리가면 지중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서쪽에 대해 즉 황해가 있어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다는 코미디 같은 항의성 댓글을 단 적이 있어 필자를 크게 웃긴 적이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 고맙기는 했다.

한국과 같이 작은 땅에서야 한반도 전체를 놓고 지형을 따지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그렇지 않다. 각자 나라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의 중요한 지형을 자기네 영토라고 기록에 적는 것이다. 백제를 산동성에 놓고 보면 <삼국사기>의 동서남북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大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위와 같은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해(海)는 바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 양자강과 같이 큰 강, 대야택이나 동정호와 같은 큰 호수, 동부 평원과 같은 대평원 등을 모두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에게 밀려 서부 산악지대에만 살았던 산적들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海)라는 지명도 있다. 실제로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일대를 고대에 해(海)라 불렀다. 육지에도 X해, X도 라는 지명이 간혹 있지 않은가!!! 

황하의 물줄기로 본 백제의 위치?

황하는 서부 산악지대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이 물줄기는 안 바뀐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면서 동부 평야지대로 빠져나온다. 하남성 정주(鄭州)를 지나면서는 대평원을 흐르다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황하는 100년에 한번씩 맑아진다고 했다. 즉 100년에 한번씩 큰 홍수가 나고 그 때마다 물줄기가 바뀐다는 말이다.

현 황하는 지금 산동성 성도인 제남(濟南)을 거쳐 산동반도 바로 위에서 황해로 흘러간다. 그러나 기원전에는 천진 쪽으로 흘렀던 적도 있고, 산동반도 아래로 빠진 적도 있고, 아예 남쪽에 있는 회수와 만나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물줄기의 변화가 심한 강이다. 그런 황하를  현재의 물줄기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분석하면 큰 오류에 빠진다.

중국의 지질학계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온조가 백제가 건국할 때의 황하의 주 강줄기는 천진 쪽으로 흘렀다 한다. 당시 황하가 양쪽으로 갈라져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많다. 2,000년 전의 황하 물줄기가 몇 개였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주 물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사서의 기록과 지질조사로 가능하다. 
▲&nbsp;&nbsp;&nbsp;온조가 위례성에서 도읍지를 옮갈 때의 황하 물줄기의 변천도. 아마 황하는 당시 두 줄기로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온조의 기록으로 보면 황하(한수)는 북한수와 남한수로 나뉘어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천진 쪽으로 흘렀던 황하(北漢水)는 대방(帶方) 지역을 지나가므로 대수(帶水) 또는 대한수(帶漢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남한수(南漢水)는 그냥 한수로 불리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서노와 온조의 이야기의 조건이 산동성에서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필자는 산동성의 성도(省都)인 제남(濟南) 근처를 백제 초기도읍지의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다. 그곳이 위례성인지 한성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온조대왕은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제남을 놔두고 다른데 가서 도읍을 정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유리왕의 유적이 북경 근처에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실제로 제남이라는 도시 명에 백제의 제(濟)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지금의 대도시들은 예전에도 한 나라의 도읍이거나 소경(小京)의 하나가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에 도읍을 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현 수도인 북경, 하북성 석가장, 산동성 제남, 산서성 태원이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성은 동.서 두 군데

백제는 동.서 두 군데에 도성이 있다고 했다. 혹자는 동도(東都)는 한반도에 있고, 서도(西都)는 대륙이라고 한다. 물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가 한반도에 아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담로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는 분명 대륙에 있었고 주무대는 산동성인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동도는 산동성에 있었고, 서도는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湖南省)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중국장수전전 흑치상지편에 나오는 백강은 현 상강(湘江)으로 호남성 기양이라는 곳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중국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전투지가 호남성 동정호 부근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nbsp;&nbsp;중국 장수전전의 기록에는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백강(현 상강)을 호남성 기양으로 말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 장족자치구 백제향이니 백제는 호남성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당항성을 빼앗은 지도와 연계해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백제 의자왕이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끊은 것도 산동성 백제와 호남성 백제와의 육로 개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nbsp;&nbsp;백제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당과 신라의 교통로를 끊은 것은 백제가 호남성 백제와 왜와&nbsp;육로로 통하는 길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대왕에 의해 건국된 백제의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채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봄 사중월(2월.5월.8월.11월)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께 제사지낸다.”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 (원구)단을 쌓아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25사를 종합 검토해 보아도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백제를 고구려보다 더 강한 나라로 표기한 기록이 여럿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41년 백제 30대 무왕(의자왕의 부왕)이 승하하자 당태종 이세민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와 <만주원류고>에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에 보면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遺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贈光祿大夫賻物二百叚遺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方郡王百濟王)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렸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며 백제는 당나라의 부모국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엔 입장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는 당나라를 신하국으로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기록인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를 서울 하남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공주를 웅진으로, 부여를 사비로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한 매국식민사학계(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건 민족정신을 썩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거짓으로 조작한 식민사학을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인양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학계는 이젠 매국노란 소릴 들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썩어빠진 이 나라 식민사학계와 정부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일본과 역사 전쟁을 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가지고 싸워야 하거늘 매국 식민사학계는 자기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그런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니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수 밖에 없고, 또 정부는 외교 문제가 된다는 한심한 논리로 동북공정에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리라 보는가!!!!

지금의 식민사학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역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역사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단군은 신화로 되어 있으며, 삼국은 한반도에 갇혀 있다. 고려의 만주 영토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구한말 잃은 간도 땅은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학은 다른 인문학과 달라 국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들 국익을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 부록 ***

필자가 백제 패망지에 대한 연재를 계속하자 두 네티즌이 아주 흥미있는 자료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필명 심제(心濟) 선생이 제공한 글이다.

(인용) 산동성에 있는 백마하를 따라가 보니,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수도라고 전해지는 임치(臨淄 사실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산동에 이르지도 않았다 )와 8세기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제(齊)나라 수도 운주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백마하 주위에 산재하는 몇 개의 고성( 古城)이라는 지명과 백마창(白馬廠)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제왕성(齊王城)이 위치한 지도를 발견했다. 
▲&nbsp;&nbsp;상단에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 바로 옆에&nbsp;제왕성(齊王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분명히 위의 두 제(齊)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 백제의 의미인 제(濟)에서 삼수변을 떼어버린 제왕성<齊王城> 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미군군사지도에도 백마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이 지도에는 馬河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지역이 춘추전국시대의 제, 이정기의 제나라 지역이 아니라면 제왕성이라 표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百濟 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인용 끝)

▲ 우측 상단 곡부 우측에 제왕성이 보인다.  청색 사각형이 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지명들이다.


게다가 친절하게 대청광여도에 당나라 소정방의 침투로를 그려 주었다. 소정방은 협주(莢州-->陜州로 지명 바뀜)를 출발해 황하를 타고 오다, 진공로2와 같이 회수(淮水)로 들어가 덕물도(위치 미상)에서 신라태자를 만나고, 회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독산호)에서 백마하를 타고 도성(사비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기습 침투로 2와 같이 낙양에서 황하를 타고오다 회수로 빠졌다가 하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으로 들어가 사수 또는 백마하를 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남, 곡부, 비성 등에 백제 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과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녕(濟寧)이란 도시도 백제와 관련된 도시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을까?

또 한 네티즌(필명 님의 침묵)은 곡부에서 찍은 성(城)의 사진을 몇 장 올리면서, 이것이 백제의 건축양식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맨 끝에 사진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사진 중 옥으로 만든 말과 장식물은 분명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이의 문명인 홍산문화의 출토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은 3황5제의 한 사람으로 동이족이었으며, 신라 김유신의 조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소호금천이 우리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능을 파헤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인근에 있던 공자의 무덤은 멀쩡했다.

또 중국에 사는 교포 한의사 한 분은 필자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백제의 일백 백(百)자는 옛날에 ‘온’이라 했으며 시조 ‘온조’는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다들 민족사를 바로 찾자는 취지로 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현재 매국식민사학자들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의 이론은 얼마 못 가 반드시 뒤집어질 것으로 본다. 

▲&nbsp;&nbsp;&nbsp;산동성 곡부에 왜 성이&nbsp;있을까? &nbsp;성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nbsp;&nbsp;동이족의 성루 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사진. 서울의 숭례문 양식과 비슷한 곡선으로 치켜 올라가게 되어있다. 자고로 중국의 성루는 직선으로 천안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양식을 중국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성의 지붕이 우리 것과 비슷하다.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 집의 구분은 곡선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 왕성인가?

본글은‘백제의기원과온조의건국지는어디?’의(2부)입니다.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693§ion=section78주변의낙랑/말갈/대방으로본위례성의

www.pluskorea.net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9/14 [08:45]

백제 도읍지는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1]. 백제가 한반도 속에 존재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단독보도 제24편 大백제는 한반도 속에 없었다-2] [플러스코리아] 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이 우리나라 고대사서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구당서(舊唐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의 어떠한 사서(史書)에도 한반도 속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대제국 백제를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일본인과 우리 역사 왜곡의 주범자 이병도가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광주(廣州) 고읍(古邑)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므로서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풍납토성, 몽촌토성(夢村土城)이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피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이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가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온조왕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으니 이 지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천험지리(天險地利)로서 참으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또 다른 곳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이병도는 지금의 인천이라고 주장)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漢水) 남쪽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가 보좌하였기에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하남 위례(慰禮)성의 도읍에 돌아와 보니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다 위례에 돌아와 귀부(歸附)하였는데 처음 따라올 때처럼 백성(百姓)들이 즐거워하였다. 그 후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백제의 왕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부여(扶餘) 계통의 씨족(氏族)들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 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을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을 자기 친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돌아오자 태자로 삼고 왕위까지 계승시키자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의 재산으로 나라를 세워 많은 도움을 주시고 온 정성을 다해 노력했으나 대왕은 세상을 싫어하시자 [하느님이 용을 내려 보내 하늘로 승천]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 붙어 있어도 혹처럼 될 것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 보다 못할 것입니다. 드디어 [비류]는 동생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던 것이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왕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구태(仇台)는 처음 옛 대방(帶方)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마침내 동이(東夷) 백제는 강국(强國)이 되었다.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라고 조작해서 믿지 못하게 했다.]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국경의 북쪽에 말갈(靺鞨)이 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말갈을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년(서기전 16)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들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뿐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피었다.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을 하였는데 신비한 사슴을 잡았다.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성책(城柵)을 세웠다.  

[신라]의 사자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친선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을 만들어 목책을 세우는 것은 혹시 우리 영토를 쳐들어올 계략이 있지 않는가? 만약에 옛 우호를 저버리고 성을 허물지 않거나 목책을 깨뜨려 버리지 않고, 시기하고 혹 의심한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고하였다. 

온조왕이 회답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것은 아닌 것 같소.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오.” 이로 말미암아 낙랑(신라)과 백제는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한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강가에서 막아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구]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백제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자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백제는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요하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서기전 2) 봄에 [신라]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 소서노에게 제사지냈다.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이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에 원구단을 쌓았다

 20년(서기 2) 봄 2월에 온조왕이 [하북성 북경]에 큰 제단(祭壇:천단,원구단)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 왔다.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빼앗은 가구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기준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우리나라 [기준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나 우리나라 왕이 어찌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요.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마땅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라고 말하자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인 것 같습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기준왕이 건국한]“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아랫 윗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다. 그때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년(서기 18) 가을 7월 탕정성(湯井城)과 대두성(大豆城)을 쌓아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쌓았는데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이다.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와 공작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호수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 백제의 온조왕은 북경의 제천단에서 제시지냈다

38년(서기 20) 봄 2월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온조왕이 큰 제단(祭壇:북경 원구단,天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40년(서기 22)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식견[神識]이 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漢水)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을 상징합니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부양(斧壤)에 귀순해 오자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년(서기 28) 봄 2월에 온조왕이 죽었다. [본문 끝]
 
[2].백제의 수도 위례성은 이병도가 독단적으로 지정했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은 지금 廣州(광주)의 春宮里(춘궁리)와 南漢山城(남한산성)을 포함한 일대이다. 그러나 처음의 都城(도성)이 하남위례성에 있었음은 뒤에 河南(하남)으로 移都(이도)하였다는 기록이 나옴으로서 알 수가 있다. [온조왕 13년 및 14년조] 그러면 상기 기록은 河南遷都時(하남천도시)의 사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見後). 

河北慰禮城(하북위례성) (이 위례)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인 漢城(한성)에 대칭하여 후에 北漢城(북한성)으로 개칭한 듯 한데)은 그 위치가 漢水(한수) 이북인 것은 틀림없다.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은 慰禮(위례)를 지금 서울의 동북방(지금 정능동. 삼양동. 부근)에 해당한 양으로 말했으나 (彊域考券三 慰禮考(강역권3 위례고) 그 방면에는 백제시대의 유물 유적은 물론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고구려 및 신라)의 그 것 조차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산 계곡에 있어 後繼所有時代(후계소유시대)의 유적(특히 신라시대)이 집중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은 彰義門(창의문) 밖인 洗劍洞(세검동) 일대를 내 놓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碑峰上(비봉상)의 眞興王碑(현재보관상 박물관내로 移置)를 비릇하여 文殊庵(문수암)의 석굴 僧伽寺(승가사) 및 新營洞(신영동)의 藏義寺址(장의사지)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상기와 같이 백제의 수도 위치를 本慰禮(본위례)를 洗劍洞(세검동) 溪谷一帶(계곡일대)에 比定(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본문에서 지금 경기도의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없다.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서울 洗劍洞(세검동) 계곡 일대로 추정한 지명일 뿐이다. 

백제의 수도는 삼국사기에 河南省(하남성)의 慰禮城(위례성)이라고 뚜렷이 기록하고 역사적 진실이 이미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왕의 칙명을 받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 대륙에 소재했던 백제의 수도 河南省(하남성)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고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어 삼국의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조선사:국사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증서(考證書)도 없이 이병도 독단적 추정으로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어찌 경기도 하남이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있는가? 

    ▶ [이병도를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의 학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한 몽촌토성으로 비정한다.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몽촌토성으로 비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몽촌토성이 삼한 소국 지배층의 일반적 거주지인 구릉지토성이라는 점과 그 인근의 석촌동에는 왕릉급 고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하남위례성에 관한 기사와도 부합된다. 특히 한성 말기 백제 왕성에 관하여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았는데 그 안에 궁실·누각·대사를 만들어 장려함이 극에 달했다"라고 했는데, 토성이라는 점에서 몽촌토성과 부합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몽촌토성이 왕성임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및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지의 흔적이 밝혀져 지금까지 출토된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 등의 유물과 더불어 왕성의 가능성을 증대시켜주고 있다.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본 결과 정약용, 이병도, 천관우, 윤무병, 김용국 등은 광주 고읍인 춘궁리(春宮里)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김정학, 이형구 등은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 주장하고, 이기백, 김원룡, 성주탁, 최몽룡 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 비정하고 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전북 익산, 충남 직산이 하남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의 결과 몽촌토성은 3세기에서 5세기의 백제 성으로, 광주 고읍에 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의 성으로 판정함으로써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설이 우세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추정해서 오늘날까지 백제의 수도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작태인가?]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後漢書(후한서)에서 이르기를 三韓(삼한)은 무릇 78국으로서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 이다. 北史(북사)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며 서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漢江(한강)이며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하고 그 외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通典(통전)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남쪽은 신라와 접해 있고 북쪽은 고구려이며 서쪽은 큰 바다가 경계였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居拔(거발)과 固麻(고마)는 고마의 借音(차음)으로 熊津(웅진:고마나루), 즉 지금의 公州(공주)를 지칭한 것이니 이것이 백제의 熊津都邑(웅진도읍)시대에 관한 기사임은 再言(재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그 중의 北際漢江(북제한강)은 원문에는 없는 말로 史記撰者(사기찬자)의 潤筆(윤필)에 불과한 것이어니와 사실 그때 백제의 北界(북계)가 漢江(한강)에 다달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강유역은 그 당시 엄연한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北史(북사) 원문에는 處小海南(처소해남)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이른바 小海(소해)는 西海岸(서해안)의 沈入灣(심입만)인 牙山灣(아산만)을 가르켜 말한 듯 하므로 그것이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하겠다. 라고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말했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舊唐書(구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은 越州(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倭(왜)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고 백제왕은 동서 양쪽 城(성)에서 거처 하셨다. 新唐書(신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西界(서계)는 越州(월주)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倭(왜)에 이르고 다 깨우쳐 주었다. 하고 북쪽은 고구려라 하였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원문과는 조금 다르다. 원문에는『西界(서계) 越州(월주) 南倭(남왜) 北高麗(高句麗:북고구려) 皆踰海(개유해),乃至(내지)』라고 하였는데 고구려와는 실제 陸接(육접)하고 있으므로 史記撰者(사기찬자)가 조금 潤筆(윤필)을 가한 것 같다. 라고 이병도는 부정 했다.
 

      ▶ 초기 백제 강역의 핵심요소
(1). 백제의 수도 하남(河南) 위례성은 북쪽에 대방(帶方)과 한강(漢江)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어 위례성은 그 어떤 나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천험지리(天險地利)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2). 비류(沸流)는 동생 온조와 함께 패수(浿水:요하)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마침내 온조왕은 백제의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었다. 곧 낙랑(樂浪)은 하북성 북평(北平)과 북경(北京) 지역에 있었다.
 
(3). 비류왕(沸流王)과 온조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1. 백제의 수도 위례성 북쪽에 대방(帶方)이 있었다

북대방(北帶方) : 삼국유사]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 남대방(南帶方) : 남대방군(南帶方郡)은 조위(曹魏)때 남원부(南原府)를 지금의 대방에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했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2. 백제의 동쪽에 낙랑(樂浪)이 있었다

낙랑국(樂浪國:삼국유사)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전한(前漢) 때 처음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옛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즉 고조선 삼한 중 진한의 제34대 오루문(奧婁門)왕(서기전 795년)이 처음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했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했다. 삼국사기에는 혁거세(赫居世)왕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에게 신라의 낙랑(樂浪)이 멸망되자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사람들이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청하)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을 곧 평양성(平壤城)이라 해야 마땅하다. 혹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라 했다. [일제와 이병도의 조작 부분]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했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고려 태조(太祖)가 그의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3. 소서노의 아버지는 연타발이다

[한단고기 三韓秘記(삼한비기)]에서 말하기를 상장군 延陀勃(연타발)은 졸본사람이다. 葛思國(갈사국) 남북을 왕래하며 소금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아 동명성왕이 나라를 개국할 때 큰 도움을 주고 그의 딸 “召西奴(소서노)”를 동명왕은 후처로 삼았다. 후에 무리를 이끌고 九黎河(구려하)로 옮겨와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모은 이익을 고주몽 성제께서 북 옥저를 토벌 할 적에 양곡 5천 석을 헌납하였고 도읍을 訥見(눌현)으로 옮길 때도 먼저 자원하여 헌납하고 나라가 망한 유랑민들에게 일을 시켜 동명왕은 그 공으로 座原(좌원)에 王事(왕사)로 책봉하였다. 다물 병인 3월에 80세로 죽었다.
  

4. 소서노는 대방(帶方)에 2천리의 땅을 소유하였다

고주몽은 재위 시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맡아들 琉璃(유리)가 돌아온다면 당연히 태자로 봉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에 소서노는 두 아들의 장래가 이롭지 않고 염려가 되어 기묘년(BC 42년) 3월에 인편에 듣기로 浿水(패수)와 帶水(대수) 지역이 비옥하여 농산물이 잘되어 사람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서노는 드디어 남행을 결심하고 무리를 이끌고 辰番(진번) 근처인 해변의 僻地(벽지)에서 10년을 安居(안거)하면서  田畓(전답)을 매수하여 별장까지 두는 億萬長者(억만장자)가 되어 큰 富豪(부호)에 이르게 되니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오는 백성들도 많았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가 소유한 땅의 넓이는 북쪽은 帶水(대수)까지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이고 소서노가 소유한 토지의 半徑(반경:반지름)이 무려 천리가 되었다.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는 사방 2,000리의 땅을 소유한 큰 富者(부자)가 되었다는 편지를 써서 사람을 파견하여 고주몽성제에게 전달하니 아내로부터 전달된 편지를 읽어본 고주몽 성제는 매우 기뻐하시며 직접 매우 칭찬하는 격려문을 써서 소서노의 號(호)를 於瑕羅(어하라)란 이름을 지어서 소서노에게 전달하셨다.  

13년 임인(BC 19년)에 소서노가 돌아가고 태자 비류가 왕위에 옹립되자 넷 신하는 붙어 있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馬黎(마려)등의 신하들이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들은 馬韓(마한)이 쇠퇴하여 패망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곳으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좋은 시기라 사료됩니다. 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락하고 곧 배를 띄워 바다 건너 馬韓(마한)의 彌鄒忽(미추홀)에 이르니 사방이 평야로 사람들이 오래도록 거주한 흔적이 없기에 漢山(한산)에 登頂(등정)하여 負兒岳(부아악)을 바라보니 거주 할만한 지역이었다.  

馬黎(마려)와 烏干(오간)등 열 신하가 말하기를 오직 河南(하남:중국 하남성)의 땅은 북쪽은 帶水(대수)와 漢水(한수)가 있고 동쪽은 높은 산악지대이고 남쪽은 훤히 열려 있고, 연못이 있어 농사 짖기에 옥답이 되겠으며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참으로 얻기 어려운 天險地利(천험지리)로서 도읍지로는 얻기 어려운 地勢(지세)의 땅입니다. 다시는 다른 지역을 구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온조는 열 신하의 의견을 따르고 드디어 河南省(하남성)의 慰支城(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 칭하였다. 백제는 沸流(비류)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지역을 취득하고 난 후에 국호가 되었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은 비류가 통치한 지역을 온조에게 歸附(귀부)하였던 것이다. 

즉 백제 초기의 영토는 소서노가 소유한  대방(帶方)지역의 2000리와 연나라의 도적 위만에게 패한 후 해성에 들어가 기준이 건국한 후 마한의 땅을 소유한 대국이었다. 경기도 하남 땅이 어찌 백제의 첫 도읍지가 될 수 있는가? 오직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독단적으로 조작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반도 속의 경기도 하남으로 백제의 수도로 지정했을 뿐이다.
 

5. 비류왕의 도읍지는 섬서성이었다

백제 비류의 첫 수도는 중국 중서부에 있는 陝西省(섬서성)이다. 섬서성의 성도(省都)는 시안(西安)이며, 황하(黃河) 중류 유역에 있다. 주변의 위하평원(渭河平原)에는 북경원인(北京原人)과 함께 염전원인(藍田原人:비류왕이 처음 도읍한 미추홀)의 유적과 서안반파유적(西安半坡遺蹟) 등 원시고대의 유적이 많으며, 현재 중국 서북지구의 현관에 해당한다. 

태령산맥(秦嶺山脈)이 섬서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남쪽 양자강(揚子江) 수계를 옛날 한수[漢水] 유역이라 했다. 그 북쪽은 황하강 유역에 속한다. 태령에서 섬서성 남단의 대파산지(大巴山地)까지는 태파산지(秦巴山地)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漢水)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漢中), 안강(安康)의 양 분지가 있다. [중국 여행 지리지 참조]
 

     ◆. 백제의 위례성은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 백제] : 백제의 首都(수도)를 居拔城(거발성) 또한 固麻城(고마성)이라 했다. 수도 고마성(위례성=관미성(關彌城)을 중심으로 五方城(5방성)이 있었다. 관미성을 중심으로 동익성(東翼城),서익성(西翼城),남익성(南翼城),북익성(北翼城)이 있었다.

사기(史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하북성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만라장성의 기점이다. 또한 수서(隋書)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는 수성현, 창려현(昌黎縣)이 있다. 라고 전하고 있다.  

三韓秘記(삼한비기)의 舊志(구지)에서 이르기를 당시대에 요서(遼西)를 昌遼縣(창요현)으로 개명하여 遼州(요주)라 하였고 남쪽의 碣石山(갈석산)밑의 白岩城(백암성) 역시 당시대에 소위 岩州(암주)라 하였다. [사기권 115 조선열전 제55]: 집해서광(集解徐廣)이 말하기를, [하북성]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 하북성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삼한의 변한왕(弁韓王) 기준(箕準)]의 도읍지가 왕험성(王險城)이다. 신찬(臣瓚)이 이르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樂浪郡)에 속해 있고 패수(浿水)는 동쪽이라 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75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漢江:조작:패수(浿水:요하)을 건너서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포로잡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케 했다. 

곧 낙랑군(樂浪郡)에 요녕성(遼寧城)도 소재하고, 하북성(河北省)에 창려(昌黎), 험독현(險瀆縣)=왕험성(王險城)=관미성(關彌城)=산해관(山海關)은 각 지명 이름은 다르지만 다 같은 지역이다. 현재 창려현에는 ‘천고신악(千古神岳)’이란 입석이 우뚝 서 있다. 

중국은 천하제일의 산해관(山海關)을 줄여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고쳐서 부르고 있다. 이곳이 바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로서 처음 수도(首都) ‘하남성(하북성 남쪽) 위례성(慰禮城)이다.
 

   ▶ 초기의 백제는 요서(遼西)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백제의 수도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며,"위례성은 직산(稷山)"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직산"이 산서성(山西省) 서남부에 있다. 처음 백제의 영토는 遼西(요서), 晋平(진평), 江南(강남), 越州(월주)는 백제의 縣(현)에 속해 있었다. 첫째 山陰(산음) 둘째 山越(산월) 셋째 左越(좌월)까지 백제의 영토였던 것이다. 

 [양서]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통전]에 의하면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 2군을 영토를 점유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사이이다.

고구려 제21대 文咨帝(무자제)께서 明治(명치) 11년(502년) 11월 백제의 越州(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署(서), 郡(군), 縣(현)으로 개명)하면서 松江(송강), 會稽(회계) 吳(오), 越(월)을 左越(좌월), 山越(산월)을 泉州(천주)라 하였다. 12년(503년) 신라의 백성들이 泉州(천주)에 옮겨와 살았다. 이해에 백제에서 조공을 받히지 않으니 장병을 파견하여 遼西(요서)와 晋平(진평)등을 공격하여 쟁취하고 백제의 郡(군)을 없에 버렸다. 


고구려의 제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은 41년(371) 겨울 10월 백제 개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양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다.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천하에서 얻기 어려운 천험지리(天險地理)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리고 ‘하남위례성(慰禮城)’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였다. 백제는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겨야 했다. 끝.

백제 도읍지는 중국 하북성의 관미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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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제가한반도속에존재한기록은찾아볼수없다[단독보도제24편大백제는한반도속에없었다-2][플러스코리아]백제의수도[하남위례성]이우리나라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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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북위 전쟁] 

차태헌  | 기사입력 2015/08/10 [14:02]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동성왕의 수수께끼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차태헌] 5세기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북방 기마 민족의 발흥으로 한족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고 이 양자강 이남에서 진 송 제 양의 한(漢)족의 단명한 왕조들이 교체가 되고있는 상황이었다. 이 중국 남조의 국가들중의 하나인 남제의 정사를 기록한 남제서에는 우리가 실제 역사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은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인 선비족의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다. 그것도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고 전쟁의 기간도 수년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표문을 올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제의 장군들에게 백제 동성왕이 작위를 수여하고 중국 남제에게 이를 추인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춘추필법으로 쓰여져서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광양 태수등 중국 하북지역의 태수직을 받는 형식이지만 실제 상황은 북위를 물리친 백제가 하북 지방의 원주인인 한족들에게 통치권을 이양받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만일에 이 전쟁이 실제 역사라면 5세기 말 동북 아시아 최강국은 선비족에게 밀려난 한족도 아니고 북방을 차지했던 선비족도 아닌 바로 백제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남제서에서는 많은 부분을 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분을 보자

이 해에 위(魏) 나라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도록 하여 크게 무찔렀다.제 명제 2년(495)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길, " 지난 경오년 (490 ) 에 험윤 (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격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 남제서 동이열전 백제 -

전쟁의 양상을 볼 때에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은 당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를 통과하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선박에 기병 수십만을 태우고 해양항로를 통해서 오는 두가지인데 어느것 이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결국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봐야하는데 이 믿기 어려운 전쟁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사서가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남제서가 기록한 백제 북위 전쟁과 같은 시기에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

중국 남제서에는 전쟁의 진행 양상 그리고 이후의 논공행상까지 타국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에 반해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오히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략하다. 역시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정치적 편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역사가 이전에 정치인이었고 유학자였다.  그리고 북벌을 주장했던 서경파를 진압한 당사자이기도하다.
 
신채호와 같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삼국사기는 적극적으로 위작을 한 부분은 없지만 대륙의 한(韓)민족 역사에 대해서 축소하고 누락 시킨 부분이 많다. 김부식은 남제서 이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백제 구사(舊史)를 통해서 이 전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전쟁은 김부식이 생략하거나 누락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전쟁이었기에 마지못해 한 줄이라도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김부식의 저 짧은 기록은 이 전쟁이 그 당시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헌적으로 고찰해보면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 2개의 전쟁이 같은 시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전쟁은 실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전쟁은 남제서를 기준으로 볼 때에 490 ~ 495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과 그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실질적으로 국가 멸망의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 후에 백제가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할 여력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백제의 서남부에 어떤 고고학적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주 지역은 여러 대형 고분들이 존재해 있는데, 이 고분군들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 금동관중 가장 화려한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환두대도와 금동신발등 , 여러 백제 계열 부장품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기존에 백제에 없던 옹관도 같이 출토가 되는데 이 옹관은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유의 매장풍습이다.
 
이덕일씨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초 이곳을 처음 발굴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반남 고분군의 화려한 부장품들에 대한 보고서만 작성하고 이후 도굴을 방조하여 당시에 보고서에 기록된 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만 이후 출토된 유물과 보고서로 추측해보면 이 세력은 상당히 국제적인 세력이라는 것이 추측이 가능하다.
 
여지승람 익산조에서는 이 지역에 말통( 末通 ) 대왕의 능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동성왕은 일본서기에는 말다 (末多)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는 모대 (牟大)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여지승람의 말통대왕과 연결이 되는데 그렇고 보면 이 지역에 백제계열 유물뿐만 아니라 다른 한반도 고유 양식인 옹관묘등이 출토되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동성왕은 백제 왕족으로서는 특이하게 신라귀족과 결혼한 왕이다. 단순하게 백제 동성왕과 신라 여인의 개인적인 결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나주 고분군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은 열도 출신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이 당시에 열도에 백제의 후왕으로 가 있었던 곤지의 후계자였을 것이다. 당시 열도에서는 백제와 한반도 고유의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는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전남 나주에서 이런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475년 한반도 백제가 실질적으로 멸망 상태에 있었지만, 그 15년 후에 백제가 북위와 대륙에서 전쟁해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반도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열도와 한반도에는 여전히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장수왕의 남하로 위기 의식을 겪었고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동성왕이 있었던 것이고, 나주의 고분군들은 이렇한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의문점이 있다. 그렇다면 백제 동성왕은 한민족 역사에 있어서 살수대첩에서 승리한 을지문덕 정도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이 되는데,삼국사기 동성왕 기록은 어째서 그를 폭군으로 기록하였을까? 그리고 왜 같은 백제인에 의해서 살해된 것일까?

이렇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라고 하는 사료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이 시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단순히 가공 윤색의 차원을 넘어서 5세기 당시 백제 후왕과 가야게열 왜왕들이 다스리던 열도 지역에 가공의 일본 천황을 창작하여 삽입한 위사(僞史)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성왕이 통치하던 시기와 같은 시기에 무열 천황이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서기는 책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창작한 가공의 천황들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할애된 책이다. 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무열천황이다.

삼국사기에서 동성왕을 폭군으로 묘사한 임류각을 세우고 진기한 동물들을 길렀다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 무열천황 8년 기록에도 나온다. 아마도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의 저본(底本)이 되었을 구 ( 舊 ) 백제사에 나온 동성왕에 대한 기록을 반도계열 사서인 삼국사기와 열도의 신라 백제인들이 창작한 위사인 일본서기가 같은 원전의 기록을 참조하였을 것이다. 이 기록을 삼국사기는 인용하고 일본서기는 변형하여 위사僞史를 만드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찌기 단재 신채호는 일본서기의 성덕 태자 기록은 백제 근구수 태자의 기록을 베껴서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성왕을 모티브로 일본서기 무열기가 창작되었다면, 반도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 폭군으로 기록되는 점과 천황에 대한 아부가 대부분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무열 천황의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란 것을 알게된다. 이 일본서기 무열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7년 夏 4월 백제의 왕이 사아군(斯我君)을 통해 조공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 먼저 번에 조공을 간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왕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천황을 섬기게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무열기 7년

물론 이 시기에 열도에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섬겨야 하는 일본 천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정사의 왜왕과 일본서기의 천황은 일치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데, 역시 일본서기의 천황들은 가공인물들인 것이다. 실제 역사는 일본 열도의 백제 후왕을 교체하는 내용이 백제 구사舊史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는 백제 동성왕 즉 모도왕에서 무녕왕 사마왕 ( 斯摩王) 으로 교체가 되는 시점이다. 마나와 사아 그리고 모도왕과 사마왕이 음운상으로 대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는 열도의 동성왕의 아들이 열도의 백제 후왕을 하였으나 무녕왕의 아들로 교쳬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마나를 백제왕의 골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성왕은 신라 여인과 결혼하였고 마나는 백제인 신라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였을 것이다. 열도의 신라 백제 세력을 등에 업고 대륙에서 전쟁을 한 동성왕 자체도 순수하게 백제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이 대륙에서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한 위대한 대왕을 반도 백제인들이 암살한 이유였을 것이다. 반도 백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신라인의 피가 섞인 백제왕과 후왕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동성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 그리고 열도에 걸친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을 모두 통치하는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당시 동북아 최강자중의 하나였던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도의 백제인들로부터 암살을 당하고 폭군이라는 오명을 쓴 채 역사에 기록되어 잊혀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백제 가야 신라 세력의 특성이 모두 나타나는 동성왕의 나주 고분군은 일본 학자들, 그리고 일부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에 의해서 왜인의 유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등의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9/13 [04:36]  

세계 최대 규모 한강지역 '전방후원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분포된 전방후원분의 실체는 무엇인가?

 

A 한.일 역사논쟁으로 부각된 미스테리의 '전방후원분'
 

▲ 단군3조선의 영역(마조선:한반도+일본열도:왕검성=북한 평양)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먼저 단군3조선 중에서 한반도는 마조선(마한)지역으로 당시 마조선의 영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바다를 매개로 한반도와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된 일본열도까지 포함되었다는 역사인식을 깔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분포된 '전방후원분'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전방후원분은 2-3세기경에 한강유역에서 발생해 4,5세기경에 성행하였고, 5세기말에는 한반도에서 소멸되었다.전방후원분은 한강유역에서 비롯해 영산강유역·남해안·낙동강유역·경주 등지에 분포한다. 대개 대하천·해안에 인접한 구릉·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한다. 일본에는 홋카이도·오키나와를 제외한 전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긴키(近畿)지방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보고된 숫자가 약 2,600여 기에 이른다.
 
일본의 경우는 4세기까지는 우리 나라와 같이 산상이나 구릉에 만들었다. 전반부를 스커트형(潑形) 또는 긴 장방형으로 하고 후원부에 비해 낮게 만들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는 위치가 평야지대로 바뀌고 규모도 커져서 길이가 수백 m에 달하는 고분들도 출현하였다. 또 전방부의 높이가 올라가고 그 밑변이 넓어져서, 고분이 부채나 키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쇠퇴하고 8세기에는 소멸하였다.
 
전방후원분은 고분군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나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규모나 부장품도 특출하므로, 주로 지배적 인물을 매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일고대사에서 미스터리로 불려왔던 백제 초기의 한성문제에 큰 분수령이 있을 듯 하다. 전에 뉴스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바로 서울 강동구 한강변 일대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10여개의 전방후원분 고분의 발견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작은 동산, 야산, 구릉 정도로 보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 고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연대도 기원 4세기인 일본의 전방후원분 시기보다 더 빠른 시기인 기원 1세기다. 서울 한강변 전방후원분의 내부를 레이저로 매장물 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 3미터 지점에서 돌로 만든 방, 즉 석실이 발견됐고, 그 안에는 유물이 확인됐다. 붉은 부분은 금과 동으로 만든 유물을 나타내고, 하늘색 부분은 토기나 자기 등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 전방 후원분은 그 동안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남 영산강 지역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16기가 발견됐지만 모두 일본보다 규모가 작고 나중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일본학계는 이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일본의 분묘 문화가 한반도로 수출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까지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서울 한강변에서 발견된 초대형 고분은 이같은 일본의 논리를 뿌리채 흔드는 결정적인 고고학적인 근거다.

▲ 세계 최대 규모의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전방후원분(위성사진) &nbsp; &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기원3-4세기 당시 일본은 한반도 백제황족들이 건너가 살면서 일본열도의 왕노릇을 하며 백제본국의 통제를 받는 담로지역으로 백제의 영역이나 마찬가지 지역인 한반도 남부지역을 침략하여 점령할 자체 능력도 없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은 마땅히 해당사항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단군3조선 붕괴이후 마한(서남부).진한과 번한(동남부) 등 한반도3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왜>관련 문헌내용은 당시 한반도 남부해안 지역의 해상세력을 의미하지 일본열도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일간에 비문조작이니하면서 역사논쟁이 되고 있는 광개토태왕비문내용과 관련하여 마한을 복속한 백제.번한을 복속한 가야.진한을 복속한 신라지역을 침범하여 영토를 점령했다는 내용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역사주역은 일본열도로 완전히 이주해 가기 전에 해상활동을 했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 마조선인들이며 북방 기마세력에 해당하는 진.번조선 유민들에게 빼앗긴 토착 마조선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독립전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일본사학자들이 일본열도 중심으로 해석하는 인식론은 당시 왜에 대한 이해해족에서 오는 왜곡된 역사분석이라 할 수 있다. <왜>는 당시 해상활동을 했던 한반도 토착민들(마조선인들) 체구가 왜소한데서 붙인 용어다. 유순했던 한반도 마조선인들은 부여.흉노족 등 북방의 단군조선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기마세력에게 밀려 결국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왜>로 통칭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이주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화해와 소통이 되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역사인식만이 발전적인 한일관계 복원의 길이다.

▲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과 그의 세력들이 살았던 오사카 간논즈카의 고분규모에 비추어 당시 곤지계가 규슈,오사카 일대를 무대로 야마토 왜의 주요 정치세력일 가능성을 주장한다.그렇다면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녕왕은 백제가 파견한 왕자들로서 야마토 왜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고,본국 백제가 위험에 빠지자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nbsp;&nbsp;&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그러면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하여 개로왕이 죽고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무녕왕을 임신한 황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던 중에 무녕왕(이름:사마)을 낳게 되고 수도 서울이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황급히 서울에서 공주로 수도를 이전한 백제시대에 일본열도와 백제와의 관계성과 관련한 [일본서기]기록을 보자.

[일본서기 웅략23년에 보면 "4월 왕(백제 문주왕)이 죽었다.곤지왕의 다섯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유년에 총명하므로...군사500을 자기나라(백제)에 호위하여 보냈는데,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기록내용과 관련한 당시 한반도 백제본국의 상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백제 공격으로 父王 개로왕 전사=>웅진(공주) 천도.정치적 불안 끝에 호족반란으로 개로왕 동생 문주왕 피살 및 정국 혼돈 상태=>개로왕이 죽자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개로왕의 황후를 데리고 일본열도로 피신하여 무녕왕(사마)을 친아들처럼 키운다. 문주왕이 피살당하자 일본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은 자신의 친아들 동성왕 (479-501)을 왜군500명을 호위하게 하면서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보낸다.=>동성왕도 귀족에게 피살당하자 일본열도에서 자란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역시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한반도 백제본국의 황제로 등극하니 바로 무령왕(501-523)이다. 이후 백제의 국력이 회복기를 맞이한다. 이렇게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를 보좌하는 백제황족의 나라였던 것이다.

▲ 일본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전방후원분(닌토쿠능 고분)&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따라서 한반도에 일본보다 시기가 늦은 전방후원분의 무덤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백제를 보좌한 일본의 백제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그래야 전남 영산강 지역의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의 분포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열도와 활발한 무역과 교류관계을 가지고 있던 서남해 지역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토착마한세력(토착 마조선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이동한 이후 제압하고 복속시켜야 할 세력이였다는 의미가 된다.

1991년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장년리 장고산 마을에서 전체 길이가 70m에 이르는 대형 무덤이 발견됐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무덤을 장고 모양의 산이라 여겨 장고산이라 불러왔다. 이런 이유로 이와 구조가 같은 무덤의 명칭이 ‘장고형 무덤’이라 정해졌다. 해남 지역의 장고형 무덤은 공식 측량 결과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불리는 무덤과 같은 양식으로 밝혀졌다. 전방후원분은 글자 그대로 앞은 직사각형이고 뒤가 원형인 무덤이다.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장고형 무덤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반대로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일본 고대사의 핵심 유적으로 본다. 일본에게 전방후원분은 왕의 무덤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 전남 광주의 전방후원분.원 안은 시체를 안치하는 곳이고 사각 안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추정된다.&nbsp; &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호남지역의 영산강유역에선 일본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많이 발견된다. 영산강 유역에선 장고형을 비롯한 삼각형, 원형, 타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어 장고형 무덤의 원류가 한반도라는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무덤은 일본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만일 일본에서 전해진 무덤이라면 영산강 지역을 일본의 지배지로 해석할 수도 있어 한일 고대사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 분포지역&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B.전방후원분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논쟁사항
 
1. 도입

영산강 일대에 나타나는 장고모양의 고분군들(14기)의 기원과 그 주인에 대한 문제는 한.일 양국의 논쟁거리다. 일본은 이 무덤양식이 일본의 보편적인 양식인 전방후원분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을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일고대사 문제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2. 일본 측의 주장

1) 형태

전남 함평의 신덕 고분을 비롯한 영산강 일대의 장고형 무덤은 일본 고대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방후원분과 형태 면에서 유사하며, 그 규모로 볼 때 거대국가권력인 4세기 후반의 야마토조정과 연관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또한 내부가 붉은 색인 것도 일본고분의 주요특징이다.

2) 출토품

한국 검보다 20 센티 정도 긴 일본형 대도가 발견되었고, 1994년 발견된 광주 명화동 고분의 경우 일본 하니와 토기의 특징인 몸체에 구멍이 난 원통형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본의 이 지역 지배의 흔적으로 볼 수 있고,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이다.

(임나일본부설:2000년에 경남 고성의 송학동 고분이 발굴되었다. 그 모양과 내부의 붉은 칠, 그리고 출토된 토기가 일본 고분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는 사슴뿔재료로 만든 칼자루 또한 발견되자, 일본은 이를 근거로 일본이 옛 가야시대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 일본 교과서 중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채택한 것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송학동 고분은 옛 가야의 고유한 무덤 형태인 삼봉 형식의 무덤이 가운데 부분이 주저 앉으면서 전방후원분의 형태로 변형된 것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3)무덤의 주인

고분전문가 동지사 대 모리 고이찌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한(마한)'이라는 지역이 영산강 일대였을 것이며 이 지역은 백제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구역으로 일본인들이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중간기착지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덤의 주인은 막강한 세력을 가진 독자적 성격의 외래 일본인이었다는 주장이다.

3. 한국 측 반론

1) 형태

일본사학계에서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유한 고대무덤양식인 방형주구묘의 영향을 받은 일본만의 독특한 무덤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구묘의 오래된 형태가 한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고 있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서 발굴된 주구부 석관묘(도랑이 있는 석관묘) 15기의 경우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식석촉 등 유물로 보아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된 일본 효고(兵庫)현의 주구묘(기원전 445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도 최대인 것으로 밝혀졌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봉분을 쌓기 위해 흙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덤 주위의 흙을 파낼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도랑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구묘가 일본 무덤 만의 특수한 형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2) 출토품

위의 일본측의 주장처럼 일본의 특성을 지닌 물건들이 출토된 것이 사실이나, 백제산 금관과 장신구들도 발견되었다. 이 물건들은 백제에서 봉신이나 제후에게 하사했던 물건들이었다.

3) 무덤의 주인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무덤을 축조했던 사람들은 일본에서 온 외래무장세력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의 관계성이 없는 독자세력이기 보다는 일련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미 4-5세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에 진출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일본의 나라와 오사카 인근에 소재한 와카야마 시 주변에는 백제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이 전체 450기 무덤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토기와 기와들은 영산강 일대의 출토품들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일본 서기에는 '기 씨'와 '시나노 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러한 언급 중에 백제의 벼슬인 나솔, 시덕, 덕솔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벼슬이 나타내는 신분은 최고 귀족과는 거리가 있는 일반적인 성격의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가?

이 지역은 고야산 금송으로 유명하였으며 이는 황족 목관 제조에 사용되었다. 또한 나가노 지역은 시나노 씨의 본거지로서 전 일본 말 사육지 40개 중 20개가 여기 분포할 정도로 말생산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말 사육형태가 백제식이었음이 밝혀졌고 발견된 시신에 대하여 인골 유전자 감식을 시행한 결과 50세 전후의 한반도 도래인임이 밝혀졌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 갔던 백제관료들이 이미 이 시기에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야마토 조정과 백제 사이를 매개하면서 일본의 특산품을 백제에 공급하는, 백제의 이익을 위한, agent 역할을 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벼슬명과 금동관 및 장신구 등 백제의 하사품 발견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일본이 아닌 영산강 지역에 자리를 잡고 무덤을 축조하였는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의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고구려의 남하정책(475년)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밀려나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 때 영산강 지역에는 백제에 저항하는 마한(한반도 토착마한세력)의 잔존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분발굴 시 전방후원분 외의 다른 형태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 때 백제는 고구려와의 경쟁 외에 마한세력으로부터의 위협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일본에 있던 백제계 유민들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영산강 일대를 제압 관할하게 하였던 것이다.

C.종합분석-전방후원분의 실제 주인은 마조선(마한)인들
 
원래 전방후원분 이전의 우리 나라 고분들은 방형 분구를 가졌었다. 뒤에 일찌기 동이족의 역사터전이였던 양자강 유역과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성행한 토돈묘(土墩墓)와 방총(方塚)·원분(圓墳)의 요소가 해류(해양무역루트)를 타고 황해를 건너와 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서해안지역에 상륙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 방분과 원분이 결합하고, 방분쪽의 제단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전방후원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륙을 통해 낙동강유역과 경주지방에 전파되었다. 이 중 남해안지역의 것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전파되어 크게 발달되었다. 결국 전방후원분은 고대 해상활동을 활발히 했던 한반도 마조선 해양세력(특히 영산강 지역을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세력)의 문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사유체계를 반영한 고고학적 자료라 할 것이다.

▲&nbsp;단군3조선 중 마조선(마한)의 영역은 일본열도를 포함하고 있었고, 단군3조선의 붕괴이전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nbsp;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간으로써 해상을 매개로 문화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3조선의 붕괴이후 북방 기마세력(진.번조선 유민들)의 대거 유입으로 토착 마한인들은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이 되었다.&nbsp; &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백제가 영산강이남까지 통합한 시기는 백제가 서울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4-5세기로 봐야 한다. 영산강지역 전방후원분 무덤에서 백제관료들의 장식구가 출토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4-5세기 이전에는 충청도이남은 마한지역이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여기서 마한이라고 할 때는 중국 요서지역에 위치한 기자조선이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세력이 해로를 따라 남쪽(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내려와 스스로 한왕(한반도 왕)이라 칭하고, 개국한 마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래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 마한세력은 기자조선세력에 밀려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본토 한반도를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해양활동을 하던 토착 마한세력과 연합하여 초기 백제.가야.신라시기에 자주 공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열도의 대표적인 장고무덤양식은 바로 이들 토착마한세력의 무덤양식이라고 해야 맞다. 일본열도의 초기 장고무덤은 쿠슈지역에서 발견된다. 쿠슈지역은 일찌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하던 토착마한 해상세력이다. 이들을 [후한서]에서는 한반도3한과 경계를 하고 있는 한반도 남부해안지역의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한반도 서남해 해상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역적으로나 거리상으로도 일본문명은 한반도문명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의 하나의 네트워크공동체로 단군3조선 중 평양을 왕검성으로 삼는 마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단군3조선이 붕괴되기 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해상을 통하여 문화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중에서도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교류했고, 가장 먼저 영산강문화가 직수입되는 곳이 바로 큐슈(구주)지역이다.

따라서 단군3조선이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활발히 교류하다가 단군조선이 붕괴되고 마한(한반도)통치체제도 자체 붕괴되면서 중국 요서지역에서 최씨 낙랑국이 북한 평양으로 이전하였고, 옥저도 함경도지역으로 이전하였고,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세력도 요서지역에서 서해를 건너 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전하여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고 마한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마한으로 개국하고 54개 소국(읍단위:총 인구 50-60만 정도)이 분포된 한반도 서부지역을 장악했다. 이 때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장고무덤은 토착마한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교류했던 구주(쿠슈)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일본전역에 확산되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기준세력은 대가 끊어져 다시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고 기록된 점으로 마한토착세력은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韓傳>에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조선왕 준은 위만에게 패한 후 남은 무리 수천인과 같이 바다 길로 도망하여 (한지로 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 후는 대가 끊어지고 마한인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絶滅馬韓人復立爲辰王」결국 기자조선세력은 토착마한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일본열도는 오래전부터 영산강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마한세력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제를 도왔던<왜>로 기록된 한반도 서남해지역의 토착마한세력은 바다를 지배하는 강력한 세력이였음이 분명하다.

▲&nbsp;소서노가 개국한 어하라 지역(진.번조선 경계지역=현재 요동반도)&nbsp;. 소서노가 온조를 따라 한반도(마한)땅으로 이주하면서 비류가 다스렸으나&nbsp; 추종세력이 적어 결국 비류세력도 온조가 한반도 마한땅에 개국한 십제로 통합되었다.&copy; 윤복현 저널리스트

 

[후한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54개 속에 백제국이 들어 있다. 이 때 백제는 어하라(비류백제)지역에서 마한지역으로 들어와 마한왕에게 거주할 땅을 분양받은 고추모 아들 온조세력의 <십제>라 할 것이다. 나중에 어하라(진.번조선의 경계지역으로 지금의 요동반도에 해당)지역에서 비류세력이 온조세력에게 통합되고, 서울 한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요서지역에서 고구려 고추모세력과 전쟁을 벌이던 고두막후예 중 구태세력이 100가족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평안도 지역(대방)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진짜 백제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백잔>으로 기록된 구태세력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이잔>으로 기록된 온조의 십제를 통합하는데, 그 시기가 국가의 기틀을 잡은 고이왕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문헌에는 백제시조는 구태이고 구태가 동이강국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백제본기>에 온조는 아버지 동명성왕(고추모)과 국모 소서노를 시조로 제사지냈다. 제사의 대상인 시조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권력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온 구태세력이 온조.비류세력을 완전히 통합하고 백제를 개국하고 제사의 대상을 구태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백제의 성장과 대외확장.한강지역에 터전을 잡았던 고구려 고추모의 아들&nbsp;온조의 나라-십제(마한의 제후국)를 통합한 백제(구태세력)는 서해와 연결된 한강.금강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국력을 뻗쳐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해 나갔다.&nbsp; 세계 최대규모의 한강지역 전방후원분은 기원2-3세기 무덤으로 강력한 법령반포 등 국가기반을 다지고 성장과 대외확장이 시작되는 백제시기와 맞아 떨어지는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다.요서.산동지역은 번조선의 영역으로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에 한반도 서남부로 이주하여 마한을 개국한 기자조선유민들의 고향이며, 백제(구태세력)의 선조 고두막 칸(동명성왕)이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번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지역으로 백제는 이들 기자조선(번조선)유민들의 꿈을 실현해 주는 동시에 부여의 정통성을 두고 고구려와 패권을 겨루던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그런데, 광개토태왕비문에 부여의 주인자리를 놓고 고구려와 구태백제(백잔)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일 때 백잔을 보좌하는 세력이 <왜>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왜>라고 할 때는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열도의 토착마한세력을 의미한다. 한나라 군대와 전쟁할 때 번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요서지역의 조선유민들과 연합하여 승리로 이끈 고두막후예인 구태세력은 마땅히 한반도 마한지역으로 이주해 온 기자세력과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당시 일본열도세력을 후원군으로 삼고 있던 서남해 해상세력은 구태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왜는 백잔의 보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왜>는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세력으로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인들 중에서도 한반도 해상세력을 의미한다. 단군3조선 당시 마조선은 한반도전체와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영역이였다. 단군3조선 붕괴이후 마조선 지역(한반도)으로 이주해 온 북방 기마.유목세력들(진조선.번조선인들)이 유입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역이였다. 그러나, 한반도지역이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밀려난 북방 기마.유목세력의 이주지가 되어 버리자, 유순했던 마조선인들은 일본열도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방 유목.기마세력이 차지한 한반도는 마조선인들로 세워진 일본열도와 구분되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해양제국 대백제제국의 영토.&nbsp;1) 2차례에 걸쳐 백제 동성황제에게 참패를 거듭한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는 힘으로 강경책을 쓰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정책을 바꾸어&nbsp;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중국인으로 동화시티는 정책을 펴니, 그 때부터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주위의 모든 세력들을 융합한 대동연합국가로 서서히 변하여&nbsp; 갔다. 2)백제는 이 때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명실공히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을&nbsp; 건설하였다. 3)구당서(舊唐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영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바다 건너 월주(越州)를 포함하고, 북쪽으로 바다 건너 가우리 국경까지, 남쪽으로&nbsp;바다 건너 왜국(倭國)을 포함하여 다 백제의 땅이다.&nbsp;백제는 동,서&nbsp;두 곳에 서울을 두었다."&nbsp;두 서울이란 서백제의 중심지 요서지역과 백제본국 한반도지역(서울=>웅진)이다.&nbsp; 4)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 따르면, 백제는 전성기에 백만대군으로 오(吳), 월(越), 연(燕), 제(齊), 노(魯)나라를 다 장악했다 하였다.5)주서(周書)의 백제전엔, 동진(東晋)때부터 남송(南宋)과 양(梁), 나라[奈浪]때까지&nbsp;백제는&nbsp; 양쯔강 양쪽을 다 점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6.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 따르면, 금주(錦州), 의주(義州), 애춘(愛瑃)을 포함한&nbsp;지역을&nbsp;다 백제의 강역이라했다.&nbsp;&copy;윤복현 저널리스트

 


구태세력은 이 <왜>세력을 등에 업고 온조세력을 통합하고 온조세력과 혈통적으로 친척인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고 봐야 한다. 서울 한강변(강동구)에는 10여기의 세계 최대의 장고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구태백제세력이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 토착무덤양식을 수용,변형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방후원분의 특징은 주구묘다. 주구묘는 주위에 도랑을 판 형태의 무덤을 말하는데, 전방후원분이 바로 주구묘의 형태다. 주구묘는 한반도무덤양식으로 일본열도보다 시기가 앞선다.
 
문화재청은 조속히 서울 강동구 한강변의 세계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을 발굴하여 백제사의 진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전방후원분을 사용했던 일본천황가의 뿌리가 백제라는 역사적 진실을 만 천하에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물론 고대 한국인들이 건설의 주역)처럼 관광상품화함으로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세계에 소개해야 할 것이다. 오직 민족주의 권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친일권력은 할 수 없는 중대한 민족양심의 문제이다.


그러면 결국 장고무덤(전방후원분)의 실제 주인은 전방후원분의 전신인 주구묘를 변형시킨 토착 마조선인들의 무덤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수의 구태세력은 엘리트집단으로 지배층을 이루고, 서남해 해상세력은 백제의 기반세력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구태세력과 서남해 해상세력이 권력적으로 융합하다 보니 친척이 되고 가족이 되어 결국 마조선의 영역이였던 일본열도도 백제의 담로가 되어 버렸다고 본다. 그리고, 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를 설치할 정도로 대백제로 성장한 기반에는 항해술과 선박술에 뛰어난 서남해 해상세력(왜)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한성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초토화면서 무기력해진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이전하면서 협력공존세력이였다고 볼 수 있는 호남지역의 토착마조선세력은 무기력해진 한반도 백제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백제내부에서 느껴졌을 것이며,
 
결국 백제를 보좌하는 일본열도의 백제담로군대(왜)를 동원하여 토착마한세력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영산강 주변지역으로 주둔시키는 과정에?백제관료들의 장식구와 일본검들이 출토되는 전방후원분이 생기고 전방후원분에 일본열도에 거주한 백제계 관료가 묻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후기 백제수도였던 공주지역에서도 일본식 무덤은 발견되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며, 전남.경남지역에 분포한 전방후원분과 관련하여 당시 백제의 담로지역에 불과한 일본이 침략하여 지배했다는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은 어불성설이라 하겠다. 당시 일본열도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담로지역이기 때문에 일본자체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하여 지배할 수도 없는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령왕릉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삼국시대의 왕릉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8/05 [13:53]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공주의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본글은“독살당한무령왕은백제땅에묻혔나?”(1부)에이어지는글입니다.무령왕릉지석의새로운해석앞에서언급한것을종합한다면,무령왕릉은백제인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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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땅에 묻혔을까?

서자 성왕은 부왕이 독살당한 것을 감추고 왕위에 오르나?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7/30 [16:17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땅에 묻혔을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땅에 묻혔을까?

본글은장문이라2부로나뉘어연재됩니다.(1부)독살당한무령왕은백제땅에묻혔나?(2부)무령왕의아버지(부왕)은누구인가?필자가여러가지근거를대며백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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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어디인가?

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8/12 [16:12]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지금까지(1부)에서는공주에있는무령왕릉의의혹에대해집중조명해보았다.위대한동성대왕의뒤를이어백제의중흥을이룩한무령대왕은이렇듯허망하게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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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 기사입력 2008/04/14 [00:50]

백제왕 창의 사리함과 고대 4국의 관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이기환 기자입력 2023. 11. 6. 05:00수정 2023. 11. 6. 09:42

백제 마지막 왕이 의자왕?…아니다, 32대 풍왕이 있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

 

백제 마지막 왕이 의자왕?…아니다, 32대 풍왕이 있다[이기환의 Hi-story]

‘660년? 663년?’ 백제는 언제 멸망했을까요.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냐구요? 660년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지 않았냐구요. 그러나 과연 660년이 맞을까요. 663년설도 제법 설득력이 있거든요.

v.daum.net

 

 

 

 2008/11/11 [18:47

쿠데타로 본 '대륙백제'의 역사는?: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  

2008/07/21 [13:59

고대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백제인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고대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백제인들

동아시아바다를지배한사람들-배의노,키,나침반을발명한백제인이글은김성호박사의'중국진출백제인의해상활동천오백년(맑은소리,1996년)'에서발췌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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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8 [15:01]

˝백제사의 묻혀진 진실 햇빛 비추어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5/08 [17:37]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러 '황해' 건넜나?: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04/30 [15:42]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입력 :2007-10-27 00:00ㅣ 수정 : 2007-10-27 00:00

[씨줄날줄] 비운의 백제왕 昌/이용원 수석논설위원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7-11-17 00:00ㅣ 수정 : 2007-11-17 00:00

[열린세상] 늦가을 부여를 유람하다/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 서울신문 (seoul.co.kr)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김재호 승인 2023.07.04 17:29
최재석 지음 | 만권당 | 612쪽

야마토왜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일본서기』를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파헤친다!

 

‘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의 변신 과정’을 다룬 책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에 대한 열 편의 논고를 모은 책이다. 1990년에 출간된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의 신판이다.

저자인 고(故) 최재석 교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을 집중 분석해 “적어도 서기 670년까지의 일본사는 일본의 역사가 아닌 한국의 역사, 한국 고대사의 일부”였음을 밝혀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백제인의 대규모 일본열도 이주 과정과 일본 개척사, 그리고 그들이 야마토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이어 백제가 야마토왜를 어떻게 통치, 경영했으며, 백제 멸망 후 야마토왜는 어떻게 일본으로 변신했는지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쪽으로는 압록·두만강을 건너 만주땅까지, 남쪽으로는 일본열도까지 펼쳐져 있었다는 진실을 밝혀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출처;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교수신문 (kyosu.net)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교수신문

야마토왜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일본서기』를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파헤친다!‘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의 변신 과정’을 다룬 책으로, 일본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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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신동아 (donga.com)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충청도 사투리 썼다

  • 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 입력2003-08-25 15:17:00
 
  • 올 가을 개봉 예정인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 극중인물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한다.
  • 계백 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황산벌’은 실제 백제어로는 어떻게 발음됐을까. 필자는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인 ‘백제어’를 찾아나섰다. 충청도 부여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200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제어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었다.

일러스트·홍성찬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 왕건’을 시청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황산곡(黃山谷)의 격전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려니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태조 왕건 하면 우선 이곳 전투부터 떠오를 정도로 역사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 고마 :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북쪽’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님’의 기원은 백제어 ‘니리므’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 니리므 :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계백 장군의 영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삼충사 소장.

나라 잃은 언어는 결국 쇠퇴하여 한 지역의 방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백제어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그렇다면 백제어를 계승한 방언은 지금 어느 지방의 방언일까. ‘표준 백제어’를 계승한 현대어는 바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추정된다(충남 공주 부여 논산 서천 보령과 전북 익산 방언).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백제어는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즉 상류층은 백제 멸망 때까지도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어계 언어를 계승, 사용한 것이다. 이들 상류층의 언어는 후기 백제의 수도, 즉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도권 백제 표준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호남 방언은 마한어에서 주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충남 공주-부여 방언은 호남 방언과 언어학적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충남 공주-부여 방언이 후기 백제의 수도권 표준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계백 장군은 제2품(달솔)의 고관, 즉 상류층 귀족계급으로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백장군은 수도에 거주하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한 언어, 즉 백제 표준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계백 장군이 굳이 현대 한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호남 사투리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다만 부여어계와 마한어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혼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호남 방언도 수도권 백제 표준어의 특징들을 상당부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 전투를 백제 표준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누르리모이부리에서 산화한 패장 계백은 어떤 인물일까. 이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열전의 기록뿐이다.

이 전투에서 맞서 싸운 신라 장군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나누어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계백은 열전 제7의 13인 중 맨 끝에 소개하였는데 그나마 짤막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계백이 생포했다가 돌려보낸 화랑 관창에 관한 내용이 배나 길다. 승자에 비해 패자의 모습은 이렇듯 초라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생지(生地)와 가계를 확실히 밝히며 서울(서라벌)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계백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백제 사람이라는 것과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 되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階伯, 텏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를 동음이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백제 인물들이 ‘장군 允充(윤충) 殷相(은상), 좌평 成忠(성충) 義直(의직) 興首(흥수) 忠常(충상) 常永(상영), 달솔 自簡(자간) 助服(조복)’ 등과 같이 성씨 없이 이름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삼국사기’엔 신라왕은 박·석·김(朴·昔·金) 3성으로 불렀지만 백제왕은 성씨 없이 온조, 다루, 기루, 개루 등과 같이 이름만 적혀 있다. 백제에서는 왕처럼 백성들도 이름만 불렀을 것이다.

백제인은 두 자 성씨, 두 자 이름

계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 열거한 다른 이름들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계백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신라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지(毗處)’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염독(厭獨)을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이름은 신라처럼 한자어로 표기한 별명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백제 왕명 중에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은 부모(왕과 비)가 국빈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중에 왕비가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한 섬에서 해산하였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세마(斯麻=嶼)’라 불렀다고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마(斯摩)로 적혀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적혀 있어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백제어 ‘세마’ 또는 ‘사마’에서 기원하여 ‘섬(島)’이라는 현대 한국어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된 것처럼 끝 모음을 잃고 단음절로 줄었다. 백제는 왕성이 ‘부여(扶餘)’씨이고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장수 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 별부장(別部將)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한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인은 계백 등 고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계백 장군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가 거주하였던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계백의 출생지와 거주지가 어느 문헌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모로 탐색하여 짐작할 뿐이다. 역사서는 귀실복신을 서부 달솔이라 지칭하였으니 그가 서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계백의 벼슬이 달솔이었으니 품계로 따지면 제1품인 좌평(佐平) 다음가는 높은 자리이다. 이러한 그의 벼슬로 미뤄보아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 사람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더구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왕이 그를 구국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면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누르리모이부리 전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황산벌(黃山之野)은 어디였을까.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 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계백 장군은 백제 수도인 현재의 충남 부여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도권 표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에 있는 백제 별궁의 연못 궁남지.

이들 여러 지명 중에 어느 곳이 당시의 결전장이었을까. 본래 싸움터란 일정한 곳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싸우다가 다른 장소로 밀려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굳이 지정한다면 ‘누르미, 누르기, 황산리’ 일원이 아닐까. 전해 내려오는 ‘황산벌 싸움’의 지명 ‘黃山, 누르모이’와 같기 때문이다. 상당히 넓은 이 벌판은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에서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던 사령부는 황산성(黃山城)에 위치해 있었다. 누르모이 싸움의 요새였던 이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93보(步)이고 성 안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황산성에 있었다는 이 샘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수량이 많고 깨끗해서 물맛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산벌 성터는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쪽은 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멀리서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성)가 아련히 보인다. 이 성터 지휘대에 올라서서 구름처럼 몰려든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은 한두 번쯤 서울 소부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부와 일본을 호령하던 ‘700년 제국’ 백제의 멸망을 예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논산시 관동은 화랑 관창에서 유래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이 있다. 이 산골의 이름은 신라 화랑 관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제7에 화랑 관창(官昌 또는 官狀) 이야기가 나온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백제를 침공할 당시 관창은 부장(副將)이었다. 신라 군사가 느르뫼벌에 이르러 백제군을 네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에게 홀로 백제군에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백제군을 여러 명 죽였다. 그러다 사로잡혀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 장군이 관창의 갑옷을 벗기게 하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감함을 어여삐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는 어떠하랴” 하며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내가 아까 적진에 돌격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영기(營旗)를 꺾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다시 쳐들어가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스럽게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이번에는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말이 관창의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라고 외쳤다. 이를 본 모든 군사가 분개하여 목숨 받쳐 굳게 싸우기로 결의한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해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으며 후대에 ‘창’이 생략되어 ‘관골(官洞)’이 되었다가 현재엔 관동이 됐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 마을 북쪽 산기슭에 1340여 년 전에 사망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다. 최후의 결전장에서 직선으로 거의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계백은 비록 패했지만 5000의 군사로 5만 군사와 싸워 네 번을 격퇴시킨 충장(忠將)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어떻게 여기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사한 장군을 누군가 남몰래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에서 이곳 부근에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이곳 충곡리에서 전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곳은 백제 서울 소부리 쪽으로 후퇴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백제 충신 계백의 무덤이라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은 지금도 충곡(忠谷)이라고 불린다. 지명이 지닌 역사적인 증거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묘가 가짜일 수도 있다 하여 의심해왔다. 의심을 풀기 위하여 1966년 여름 실제로 묘를 파 보았는데 증거물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계백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우선 묘 속의 길이가 12척이요, 넓이가 6척이나 되며 석회로 천장을 다섯 층이나다진 것 등은 상고(上古)시대의 무덤 규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곡이라는 지명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조선 영조 18년(1692년)엔 충곡서원이 창건되어 계백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최근 논산시가 계백 장군 묘의 봉분을 장군 묘답게 키우고 묘역도 넓혔다. 묘소에 충혼비도 세웠다. 아울러 부근에 계백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앞의 넓은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000 결사대 최후의 순간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계백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달’은 백제어로 ‘높다(高)’는 뜻이다. 또한 ‘달’은 ‘아사달(阿斯達=九月山)’, ‘부사달(夫斯達=松山)’, ‘소물달(所勿達=僧山)’ 등과 같이 산(山)의 뜻으로도 쓰였다. 달솔(達率)은 대솔(大率)로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고유어 ‘한’을 한역하면 ‘大’이다. 대전(大田)을 ‘한밭’, 대천(大川)을 ‘한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솔’은 고구려의 벼슬이름 중에서 ‘욕살(褥薩)’의 ‘살’에 해당한다. 이 ‘살’, ‘솔’이 변하여 후대의 ‘슬’이 되었다. ‘벼살’이 ‘벼슬’로 바뀐 것이다.

계백 장군은 장졸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 소부리를 출발하여 ‘두락모이(石城)’를 지나 ‘가디나이(恩津)’를 거쳐 ‘누르리모이(黃等也山)’에 당도했을 것이다. 도착하자 세 진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맞섰다. 아마도 당시의 세 진영 중 제1영은 현 관동리의 서쪽산 위에 축성한 석성 ‘누르모이잣(黃山城)’이고, 제2영은 이 제1영에서 정남을 향해 왼쪽(남동쪽)에 있는 흙성 ‘누르재잣(黃嶺城)’이며, 제3영은 오른쪽(서남쪽)에 있는 흙성 ‘오이잣(外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인 제1영을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진영이 펼쳐 있어 적을 품안에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작전에 알맞게 3개 진영에 분산 배치하고 주성인 제1진영에 올라 총지휘하여 10배가 넘는 5만여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진맥진한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진격을 맞아 ‘누르리모이부리’ 마지막 싸움에서 마침내 전멸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계백은 후기 백제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고마·소부리’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화 속 계백 장군은 공주·부여 지방 방언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입력 2008.04.17 01:29 업데이트 2008.04.17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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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2019-03-23 07:31

현존 세계 '最古' 일본기업, 뿌리는 '백제' | 연합뉴스 (yna.co.kr)

 

현존 세계 '最古' 일본기업, 뿌리는 '백제' | 연합뉴스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일본어에 '구다라나이'(下らない)라는 단어가 있다. 하찮거나 시시하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www.yna.co.kr

 

‘백제의 혼’을 깨운다

서울신문 최여경기자 2007-10-03   

‘백제의 혼’을 깨운다 | 서울신문 (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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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가을,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에 화려한 백제 의상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왁자지껄하게 한판 잔치를 벌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백제의 주막과 상점·농가에서 소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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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구드래’와 ‘구다라’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7-09-27

오창규기자 chang@munhwa.com

백제 -‘구드래’와 ‘구다라’ - munhwa.com

 

백제 -‘구드래’와 ‘구다라’

일본인들은 고구려(高句麗)를 ‘고구리’, 신라(新羅)를 ‘시라기’라고 읽는다. 그러나 백제(百濟)는 ‘구다라’로 발..

www.munhwa.com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서울신문기사일자 : 2007-02-15    31 면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 서울신문 (seoul.co.kr)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 7세기 초 유적지인 전북 익산시 왕궁리에서 정화시설을 갖춘 공중화장실 3기가 발굴됐다고 엊그제 언론이 보도했다. 아울러 토양을 분석해 보았더니 백제인들은 육식을 거의 하지 않고 채식을

www.seoul.co.kr

 

 

 

<참고자료>

 

백제(百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백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UPDATED 28 SEPTEMBER, 2018 - 01:43 ROBIN WHITLOCK

The Little Known Ancient Korean Sites of the Baekje Kingdom Finally Receive Worldwide Recognition | Ancient Origins (ancient-origins.net)

 

 

삼태극 | 한반도의 고구려 고분벽화는...대부분 백제의 것이다. - Daum 카페

 

고대 백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잊혀진 제국- 백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백제의 멸망기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백제의 도읍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웅진은 신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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