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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 (3) 538~660년 사비도읍기(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본문

여러나라시대/백제

1. 백제 (3) 538~660년 사비도읍기(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대야발 2021. 7. 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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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다. 성왕은 신라 · 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 공주가 신라에 시집가는 등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말년에 신라가 배신하여 백제의 동북변을 차지하자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중국의 남조와는 물론 북조(당시의 북제)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북제는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라는 작위를 내렸다.

이는 백제가 동청주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서기 245년경에 중국의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 동부 해안지역을 지배해 왔는데  그 지배가 위덕왕 때까지 계속되다가 서기 581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마감되었다.

 


이 기간에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다시 사비로 도읍을 옮겼는데, 중국의 동부 지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볼 때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과 사비로 도읍을 옮긴 것은 고구려의 남하 때문이기도 했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의 곡창지역과 함께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곡창지역을 기반으로 웅지를 펴려던 백제는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중국 동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무왕은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이은 의자왕 때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1)

 

 

백제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영토 확장

 

신라는 10개 군을 취한 뒤에 고구려와 강화했다. 신라는 어제의 동맹국인 백제를 적국으로 돌리고, 백제의 동북 지방을 침탈하여 지금의 이천·광주·한양 등지를 취하고 신주()를 설치했다.

패배한 백제는 고립됐지만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반격에 나섰다. 백제는 밈라가라의 유민들에게 국원성(지금의 충주)을 떼어주고 나라를 재건하도록 한 뒤, 서기 554년에 밈라와 연합하여 어진성(진산())을 쳐서 신라군을 격파하고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했다.

 

백제군이 더 나아가 고시산(지금의 옥천)을 치자, 신라 신주군주 김무력과 삼년산군(지금의 충북 보은)의 고우도도()가 대군을 거느리고 지원에 나섰다. 성왕은 정예병 5천 명을 뽑아 한밤중에 신라 대본영을 기습하려 했지만, 구천(, 음은 ‘글래’, 여기서 옥천이란 이름이 나옴, 지금의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의 복병을 만나 패전하고 사망했다.

승세를 탄 신라군이 백제의 좌평(대신)과 병졸 2만 9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자 백제 전국이 크게 진동했다. 그 뒤 백제를 더욱 더 공략한 신라는 남으로는 비사벌(지금의 전주)을 쳐서 완산주를 설치하고, 북으로는 국원성을 쳐서 제2밈라를 멸하고 그 땅에 소경()을 만들었다. 진흥대왕은 이처럼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충주·전주 같은 경기·충청·전라도의 요지를 획득했다. 그런 뒤 고구려를 쳐서 동북방으로 나가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길림() 동북을 차지했다. 신라 영토의 확장은 이때가 건국 이래 최고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는 연도가 바뀌거나 사실 관계가 빠진 예가 한둘이 아니다. 화랑이 창설된 연도가 틀렸다는 점은 이 편의 제1장에서 서술했다. 또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 변방을 취해서 신주()를 설치했으며, 겨울 10월에 백제의 왕녀를 취해 작은 왕비로 삼았다고 한 기록이 있다. 아무리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시대라고 해도, 석 달 전(원문은 ‘4개월 전’_옮긴이)에 전쟁을 해서 영토를 뺏고 빼앗긴 나라들이 석 달 뒤(원문은 ‘4개월 후’_옮긴이)에 결혼동맹을 맺고 장인-사위 관계가 될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이 일은 10개 군을 탈취한 때로부터 불과 3년 뒤의 일이다. 3년 전에 신라와의 동맹에서 배신을 당한 백제가 3년 뒤에 딸을 시집보내고 신라왕을 사위로 삼았겠는가.

또 진흥왕 12년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지금의 충주 탄금대 부근)에서 우륵과 그 제자 니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따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음악지〉에 따르면, 성현현(지금의 청풍) 사람인 우륵이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악기를 갖고 신라에 투항하자 진흥왕은 그를 국원성()에 안치했다”고 했다. 우륵은 본래 제1밈라 즉 고령 사람이었다. 그는 제2밈라에 들어가 지금의 청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다가 제2밈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신라에 투항했다. 제2밈라를 점령하고 우륵을 국원성에 안치한 진흥왕이 순행 중에 우륵을 불러 가야금 소리를 감상한 곳이 지금의 충주 탄금대 유적이다. 국원성 즉 지금의 충주가 신라 땅이 된 때가 진흥왕 16년6)이므로,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도 진흥왕 16년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진흥왕 12년에 낭성에 순행하여 우륵의 가야금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한양 삼각산 북봉에 진흥대왕순수비가 있다. 이것은 대왕이 백제를 쳐서 성공한 일을 기념하는 유적이다. 함경남도 함흥 초방원()에도 진흥대왕의 순수비가 있다. 이것은 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성공한 일을 기념하는 유적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편에는 이 같은 대사건이 죄다 빠져 있지 않은가. 《만주원류고》 및 《길림유력기()》에 따르면, 길림은 본래 신라의 땅이다. 길림이라는 표현도 신라를 가리키는 계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진흥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강토를 개척하고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 보유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한편, 박지원의 《연암집》에서는 복건성의 천주()와 장주()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었다고 했다. 어떤 책을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 자세히 인용할 수는 없지만, 진흥대왕이 바다 건너까지 경략하여 그곳에 유적을 남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깊이 읽기 신라와 만주

신라가 만주의 길림 지역을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중국 측 기록인 《만주원류고》에 나오는데도, 이런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김부식은 신라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삼국사기》를 지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김부식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신라 중심주의라기보다는 한반도 중심주의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반도 중심주의에 입각했기 때문에 신라가 만주 땅을 확보한 사실조차 숨겼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신라 중심주의보다 한반도 중심주의가 상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주로 가자!’는 구호를 내건 묘청에 맞서 ‘한반도에서 살자!’는 입장을 취했던 김부식의 행적을 살펴볼 때,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주의가 아닌 한반도 중심주의에 입각한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다.(2)

 

 

부여성충의 전략 건의

 

부여성충은 백제 왕족으로서 어릴 적부터 지략이 출중했다. 예족이 침략할 때마다 그는 지역민들을 거느리고 산성을 근거로 방어하면서 항상 절묘한 작전으로 많은 예족을 살상했다. 한번은 예족 장수가 사신을 보내 “나라를 위하는 너희의 충절을 흠모하여 작은 음식을 올리겠다”며 궤짝 하나를 바쳤다. 산성 사람들이 궤짝을 열어보려 하자, 성충은 이것을 불에 던졌다. 넣고 보니,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땅벌 같은 것이었다.

 

다음 날, 예족 장수가 궤짝 하나를 다시 바치자, 산성 사람들은 이것을 불에 던지려고 했다. 성충은 이번에는 열어보도록 했다. 열어보니 그 속에 든 것은 화약과 염초 등이었다. 셋째 날에도 궤짝 하나를 보내자, 성충은 톱으로 켜도록 했다. 그랬더니 피가 흘러나왔다. 칼을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때가 서기 645년,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뒤였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성충을 불렀다. “짐은 덕이 없이 대위를 이은 탓에 이것을 감당치 못할까 두렵다. 신라가 백제와 더불어 화해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니, 백제가 신라를 멸하지 못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할 것이다. 이는 내가 더욱 더 염려하는 바다. 옛날 월나라왕 구천은 범려를 얻어 백성을 10년간 기르고 10년간 가르쳐서 오나라를 멸했다. 자네가 범려가 돼서 짐을 도와 나를 구천으로 만들어주면 어떻겠느냐?”

성충은 말했다. “구천은 오나라왕 부차가 교만하여 방비를 소홀히 한 탓에 20년간 백성을 기르고 가르쳐서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신라의 침입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경각에 달리고 나라의 흥망이 조석()으로 갈리니, 어찌 한가하게 20년간 기르고 가르칠 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이 반역의 뜻을 품어 조만간 내란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한참 동안은 외부 문제를 다루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우리나라가 근심할 상대가 아닙니다. 신라는 본래 소국이었지만 진흥왕 이후로 갑자기 강국이 되어, 우리와 원수가 되더니 근래 들어 더욱 더 위협적이 되고 있습니다. 내성사신 김용춘은 선대왕(백제 무왕_옮긴이)과 혈전을 벌이다가 죽었습니다. 항상 우리나라를 엿보는 그 아들 김춘추는 영명한 선대왕이 두려워서 행동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대왕이 붕어하시고 안 계십니다. 김춘추는 대왕께서 군사 문제에 익숙하지 못한 청년인 줄 알고 가벼이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상을 당한 틈을 타서 머지않아 침략을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을 연구하셔야 합니다.”

왕은 “신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경우, 어디로 들어오겠느냐?”고 물었다. 성충은 “선대왕께서 성열성(지금의 청풍) 이서 지방과 가잠성(지금의 괴산) 이동 지방을 차지하자 신라가 이것을 오랫동안 분하게 여겼으므로, 그들은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렇다면 가잠성의 수비를 증강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성충은 “가잠성주 계백은 지략과 용맹을 겸비했기 때문에 신라가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포위·공격한다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불시에 공격하여 허를 찌르는 것이 병법의 상책()입니다. 신라 정예병이 가잠성을 공격할 때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고 공표한 뒤 군대를 동원해서 다른 곳을 기습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어느 곳을 기습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성충은 “신이 들어보니, 대야주(지금의 합천) 도독인 김품석이 김춘추의 딸인 김소 낭자의 남편이 되자 그 권세를 믿고 부하와 백성들을 학대하며 음탕과 사치를 일삼은 탓에, 오래 전에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더욱 더 수비를 소홀히 할 것입니다. 신라 정예병이 가잠성을 포위한 상황하에서는, 설령 대야주가 위험할지라도 신속히 구원하기 힘들 겁니다. 그때 우리 군대가 대야주를 무너뜨리고 여세를 몰아 공격한다면 신라 전역이 진동할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신라를 멸망시키기 쉬울 겁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공의 지략은 고금을 막론하고 대적할 자가 없다”고 말하고 성충을 상좌평에 임명했다.(3)

 

 

대야성의 함락과 김품석의 참사

 

의자왕이 즉위한 이듬해 음력 3월1), 신라가 정말로 장군 김유신과 정예병 3만 명을 보내 가잠성을 쳤다. 계백이 성을 근거로 임기응변으로 응전하니, 수개월 사이에 신라 병사들이 수없이 사상을 당했다. 음력 7월2)에 의자왕이 정예병 수만 명을 뽑아 가잠성을 구원한다고 공표한 뒤, 북쪽으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대야주 쪽으로 군대를 돌리고 미후성을 포위했다.

대야주는 신라 서부의 주요 기지로 관할하는 성읍이 40여 개나 되었다. 김춘추는 딸인 김소 낭자를 매우 사랑했다. 그래서 대야주의 속현인 고타(, 지금의 창녕)를 식읍()으로 주고 딸을 고타소()라고 명명했다. 또 김소 낭자의 남편인 김품석을 대야주 도독에 임명하고 40여 성을 총괄하도록 했다.

음란하고 난폭한 김품석은 병사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미녀와 재물을 강탈했다. 그는 종종 부하의 부인을 빼앗아 첩으로 삼기도 했다. 김품석의 막료인 검일은 미모의 아내를 빼앗긴 데 분노하여 항상 보복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백제가 미후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사람을 보내 내응을 자청했다.

의자왕은 부여윤충(부여성충의 동생)더러 정예병 1만 명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백제군이 성 앞에 도착하자, 검일은 성 안의 창고에 불을 질러 군량미를 태워버렸다. 성 안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할 수 없이 김품석 부부는 막료인 서천으로 하여금 성 위에서 부여윤충에게 “우리 부부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해주면 성 전체를 내어주겠다”고 말하도록 했다. 부여윤충은 측근들에게 “저희 부부를 위해 국토와 인민을 파는 놈을 어찌 살려주겠느냐? 하지만 이를 거부했다가 성 안에서 수비에 나서게 되면, 앞으로 얼마 동안 더 싸워야 할지 모르니 차라리 거짓으로 허락한 뒤 사로잡아야 하겠다”고 말했다. 부여윤충은 서천에게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하노니, 공의 부부를 살려서 보낼 것을 약속한다”고 말하고 은밀히 군대를 숨겨 놓은 뒤 거짓으로 철수했다. 김품석이 부하 장병들을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내자, 백제군은 이 틈을 타서 복병을 보내 이들을 다 죽였다. 김품석 부부는 검일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백제 군대가 성 안에 들어갔다.

미후성에 있던 의자왕은 소식을 듣고 대야성으로 갔다. 그는 부여윤충의 작위를 높이고 말 20필과 쌀 1천 석을 상으로 주고, 수하 장병들에게도 차등적으로 상을 주었다. 그런 뒤, 여러 장수들을 보내 각 지역을 공략하도록 했다. 대야주는 원래 임라가라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 백성들은 고국을 그리워하고 신라를 싫어했다. 그러던 차에 백제 군대가 들어오자 모두들 환영했다. 이로 인해 40여 성이 한 달 내에 모조리 백제의 차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7월에 의자왕이 미후성 등 40여 성을 점령했고, 8월에 부여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했다”고 했지만, 《해상잡록》에서는 “대야성을 점령한 뒤 40여 성을 함락했다”고 했다. 후자의 기록이 사리에 가까우므로, 이것을 따르기로 한다.

대야()는 ‘하래’로 읽는다. 이것은 낙동강 상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는 대야를 대량()으로 표기했다. 야()나 량() 같은 글자는 고어에서는 ‘라’ 혹은 ‘래’로 발음했다. 대야는 신라 말에 협천()으로 개칭되고, 후세에는 합천으로 발음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협()의 첫 음인 ‘하’와 천()의 뜻인 ‘래’를 합쳐 ‘하래’로 읽었다.(4)

 

 

 

 

고구려-백제 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하고 얼마 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이 성충에게 “연개소문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도 고구려 전역이 두려워 엎드리고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성충은 “고구려가 서국(중국을 가리키는 말)과 전쟁한 지 수백 년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서국에 여러 번 패하다가, 근세에 날로 강대해져 요동을 차지하고 요서까지 진출했습니다. 육상에서만 힘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해상에까지 드나들 정도입니다. 영양대왕 때는 세 차례나 수나라 백만 군대를 격파하여 국위를 크게 떨쳤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병사와 백성들이 서국과 우열을 다투는 열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건무가 도리어 이를 억압하고 서국과 화친하니, 군인과 백성들이 분노한 지 오래됐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장군 겸 재상의 명문가 출신으로 왕의 정책을 반대하고 당나라 정복론을 주장하여 국민의 마음에 부응하고 이걸 기반으로 고건무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전역이 연개소문의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연개소문의 공로를 노래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기겠느냐?”고 묻자, 성충은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영토도 넓고 인민도 많지만, 이세민은 연개소문의 전략을 따를 수 없습니다. 승리는 반드시 고구려 쪽에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자왕이 “이세민은 네 나라의 군웅을 토벌하여 하나로 통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연개소문은 아무런 전쟁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연개소문의 전략이 이세민보다 낫다고 하느냐?”고 묻자, 성충은 “신은 예전에 고구려를 여행하면서 연개소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연개소문은 아무런 지위도 없이 그저 연씨 가문의 귀공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용모가 웅장하고 기개가 호탕했습니다. 신이 호기심이 생겨 그와 담론을 나누다가 병법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의 지략이 비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연개소문은 직위를 세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성과 안색 한 번 나타내지 않고 하루아침에 대신 이하 수백 명을 죽이고, 패수 전투에서 수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명성을 얻은 고건무 왕을 쳐서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이세민이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그럼, 고구려가 당나라를 멸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성충은 “이 점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다면 당나라를 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제 막 정권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이세민은 벌써 20년 전에 서국을 통일하고 치국의 방책을 정밀히 짰으며 인민을 사랑하고 복종시킨 지 오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승리한다 해도, 당나라의 민심이 갑자기 이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이 승패를 단언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통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저 외형일 뿐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호족의 잔당들이 항상 연개소문을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를 멸하기 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 후계자가 재목감이 못 된다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래서 양국의 흥망을 미리 말하기 힘듭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우리나라가 비록 신라 대야성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뿌리를 뽑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복수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고구려가 당나라를 멸하거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한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남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고구려나 당나라의 침략을 받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반격을 받을 것이다. 어찌해야 하겠느냐?”라고 묻자, 성충은 “지금의 형세를 볼 때, 고구려가 당나라를 치지 않으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상호 대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은 연개소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싸우자면 남방의 백제나 신라와 화친해서 후방의 우환을 없애야 한다는 점을 연개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서로 원한이 깊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한쪽과 화친하면 다른 쪽과 적국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연개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은 앞으로 어느 한 나라와 화친을 맺어둠으로써, 자기들이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남방의 양국이 상호 견제하고 고구려의 뒤를 엿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지금 백제를 위한 계책은 신속히 고구려와 동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제는 신라를 맡고 고구려는 당나라를 맡아야 합니다. 신라는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틈을 봐서 유리한 쪽으로 행동한다면, 이 동맹은 고구려보다는 백제에 더 유리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옳다고 여긴 왕은 성충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에 간 성충은 이해관계를 제시하면서 연개소문을 설득했다. 동맹조약이 거의 성사될 단계에 접어들 때였다. 갑자기 연개소문이 성충을 멀리하고 몇 달 동안 만나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성충이 탐지해 보니, 신라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방해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성충은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 “명공(, 존칭의 일종_옮긴이)께서 당나라와 싸우지 않는다면 모를까, 만일 당나라와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슨 이유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서국이 고구려를 칠 때에 항상 군량미 부족으로 패했습니다. 수나라가 좋은 사례입니다. 만약 백제가 당나라와 연합한다면, 당나라는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략할 뿐 아니라 해로로 백제로 들어와 백제의 쌀을 먹으면서 고구려를 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는 남북 양쪽에서 적을 상대하게 되니,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가 이곳으로 군대를 수송하는 것은 백제로 수송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 예전에 신라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치다가 결국 백제를 속이고 죽령과 고현 사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는 점은 명공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신라가 오늘 고구려와 동맹한다고 해서 내일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기습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글을 본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이외, 욱하() 일대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다. 이 점은 제11편 2장 김춘추의 보복 운동에서 서술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성충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오게 됐다.(5)

 

 

 

안시성 전투 당시 성충의 건의

서기 644년에 신라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죽령을 넘어 성열·동대()성 등을 기습하자,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 전략을 논의했다. 성충은 “그간 계속 패배만 하던 신라가 자신을 지킬 생각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오니, 여기에는 필시 까닭이 있을 겁니다. 신이 듣기로는, 김춘추가 고타소 낭자의 복수를 위해 여러 차례 은밀히 바다 건너 당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당나라 주인인 이세민은 이미 오래 전에 해동()을 침략할 뜻을 품었습니다. 따라서 당나라와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대한 음모를 세웠을 겁니다. 신이 그 음모를 추론해보면, 아마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는 동시에 수군으로 백제의 서쪽을 침략하고, 신라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를 돕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하기로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라가 성열·동대성을 차지하기 전에는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하지 못할 겁니다. 또 당나라가 요동을 차지하기 전에는, 해로를 통한 군량미 운반이란 문제 때문에 백제를 침입할 함선을 따로 마련하지 못할 겁니다.1)

이제 백제를 위한 계책을 생각해보면, 성열성 등을 신라에 내주고 군대를 대기시키며 관망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나라·신라가 고구려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어 서로 손을 떼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라는 백제가 무서워 대규모 군대를 고구려에 보내지 못할 테지만, 당나라는 필시 모든 국력을 다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입할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백제가 함선으로 정예병 수만 명을 싣고 당나라의 강남을 친다면, 이곳을 점령하기가 용이할 것입니다. 강남을 점령한 뒤에 그곳의 재물과 민중을 이용해서 계속 진격한다면, 서국의 북방은 고구려의 소유가 될지라도 남방은 다 백제의 차지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신라가 설령 백제를 증오한다 할지라도, 미미한 소국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머리 숙여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백제가 신라를 가질 수도 있고 그냥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라고 건의했다.

의자왕은 이 의견에 따라 장수들에게 변경을 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듬해에 정말로 당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하고 안시성를 공격했지만, 여러 달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신라는 13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 남방으로 들어가 후방 교란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신라군의 후미를 기습해서 성열성 등 일곱 개 성을 회복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부여윤충을 보내 부사달(지금의 송도) 등 10여 성을 점령하도록 했다. 또 수군을 보내 당나라의 강남을 기습하여 월주(, 지금의 소흥) 등지를 점령하고 해외 개척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에 임자의 참소로 부여성충이 왕의 박해를 받고 뜻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3장 부여성충의 자살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6)

 

 

 

성충의 자살과 그 일파의 축출

윤충이 죽고 성충도 쫓겨나자, 금화는 더욱 더 거리낌 없이 의자왕을 충동질했다. 금화는 왕흥사와 태자궁을 화려하게 쌓도록 해서 국가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또 “백제 산천의 지덕()이 험악하니 철로 눌러야 합니다”라며 곳곳의 명산에 쇠기둥이나 쇠못을 막고, 강과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 나라의 철을 소진시키도록 만들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은 금화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불가살’이라고 불렀다. 불가살은 백제 신화에 나오는 쇠 먹는 신이었다.

성충이 상소를 올려 임자와 금화의 죄를 지적했다. 하지만 왕의 측근은 다들 임자와 금화의 심복이었다. 도리어 이들은 성충을 참소하면서 “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뒤부터 항상 분노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성충을 궁중 감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를 고마미지(지금의 장흥)로 내쫓았다. 또 서부 은솔인 복신의 직책을 빼앗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들은 다 성충 일파였다.

성충은 옥중에서 상소로 유언을 올렸다.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므로,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펴보니, 머지않아 전쟁의 화가 닥칠 것입니다. 군대를 움직일 때는 지세를 봐서 상류에 진을 치고 적군을 맞이해야 만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막고 수로로는 백강을 막아야 합니다. 이렇게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싸워야 합니다”라고 쓴 뒤 음식을 끊고 28일 만에 죽었다.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1년 전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탄현은 지금의 여산() 탄현이라 하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 백강이라 한다. 하지만 백제가 망할 때 신라 군대가 탄현을 넘고 당나라 군대가 백강을 지난 뒤에 계백이 황산(지금의 연산 부근)에서 싸우고 의직이 부여 앞강에서 싸웠다. 따라서 탄현은 지금의 보은에 있는 탄현이고, 백강은 지금의 서천() 백마강의 바다 쪽 입구로, 흥수가 말한 이른바 기벌포(다음 장 신라·당나라 군대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체포 참고)라는 곳이다.(7)

 

 

 

 

계백과 의직의 전사

의자왕 20년 3월(원문은 ‘서기 660년 3월’_옮긴이)1) 신라 왕자 김인문이 당나라 행군대총관 소정방과 함께 병력 13만 명을 거느리고 래주(, 산동반도 북쪽 해안의 왼쪽 끝부분_옮긴이)에서 바다를 건넜다. 이들은 음력 6월2) 덕물도(지금의 남양 덕물도)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은 금돌성(지금의 음성)에 진을 치고, 태자 김법민과 대각간 김유신 및 장군 진주·천존 등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영접하러 나갔다. 소정방이 김법민에게 “신라·당나라 양국 군대가 수륙을 나누어 이동하자. 신라 군대는 육로로 가고 당나라 군대는 수로로 가서, 7월 10일(양력 8월 21일_옮긴이) 백제 서울 소부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법민·김유신 등은 금돌성으로 돌아가서 김품일·김흠순 등의 장수들과 함께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했다.

의자왕은 그제야 밤샘 연회를 파하고 신하들을 불러 전쟁의 방도에 관해 협의했다. 좌평 의직은 “당나라 군대가 물에 익숙지 못한 자들을 데리고 멀리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분명히 피곤할 겁니다. 그들이 상륙할 때 기습하면 깨부수기 쉬울 것입니다. 당나라 군대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을 먹고 싸움 없이도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좌평 상영은 “당나라 군대는 멀리 왔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속전속결이 유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륙하는 동안에는 다들 용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새를 막고 수비하다가, 저들이 양곡이 떨어지고 지친 뒤에 싸워야 합니다. 신라는 우리 군대에 여러 번이나 패한 탓에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신라를 깨뜨린 다음에 상황을 봐서 당나라 군대를 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의자왕은 본래 평시든 전시든 항상 용단을 내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때 요상한 무녀와 여러 소인배들에 둘러싸인 의자왕은, 이렇게 논의가 분분해지자 의외로 흐리멍덩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갑자기 꾀지팡이[]로 이름난 좌평 하나가 생각났다. 그는 성충의 일파로 지목되어 고마미지(지금의 장흥)에 귀양 간 부여흥수였다. 의자왕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계책을 물었다.

흥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탄현과 기벌포는 나라의 요충지입니다. 한 명이 칼을 들고 막아서면, 일만 명도 덤비지 못할 곳입니다. 육군과 수군에서 정예병을 뽑아 당나라 군대가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대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도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곡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지친 뒤에 공격하면 백전백승할 겁니다.”

사람이 돌아와서 왕에게 보고하자, 임자 등은 성충의 잔당이 다시 기용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흥수가 오랫동안 귀양생활을 한 탓에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보복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성충의 유언 찌꺼기로 나라를 잘못되게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쓸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를 지나게 하고 신라 군대는 탄현을 넘게 한 뒤에 이들을 한 데 모아 공격하면, 주머니 속에 든 자라를 잡는 것처럼 한꺼번에 두 적을 분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험한 곳을 막고 적과 대치하며 시일을 허비하고 군사들의 용기를 떨어뜨릴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왕은 다시 궁녀들에게 술 따르고 노래 부르게 했다. 그는 눈앞에 전쟁이 다가왔다는 것을 잊었다.

음력 7월 9일(양력 8월 20일_옮긴이)에 신라 대장 김유신·김품일 등이 5만 군대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 논산·연산 사이)에 이르렀다. 의자왕은 장군 부여계백을 보내 신라 군대를 막도록 했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 “어허!” 하며 말하기를 “탄현의 요새를 지키지 않고 5천 병력으로 열 배의 적을 막으라고 하니, 내 앞일을 내가 알겠구나”라고 말했다. 그런 뒤 처자식을 불러 “남의 포로가 될 바에는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고 말하고 칼을 빼어 그 자리에서 쳐 죽였다. 그러고 군영에 나가 병사들을 모아 놓고 “고구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5천 명으로 당나라 군대 70만을 격파했다. 우리 5천 병력이 각각 열 명씩 상대한다면, 신라군 5만 명을 겁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외친 뒤 황등야군까지 달려갔다. 계백은 여기서 험한 곳을 잡아 진영을 세 곳에 설치하고 형세를 뒤집었다. 김유신 등은 네 번 쫓아왔다가 네 번 다 패해 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김유신은 싸워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7월 10일의 약속이 급한지라 그는 김품일과 김흠순을 돌아보면서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당나라 군대가 단독으로 싸우다가 패배하면 신라의 수십 년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당나라 군대가 단독으로 승리하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한다 하더라도 신라는 당나라의 모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좋겠느냐?”라고 말했다. 김흠순과 김품일은 “오늘 열 배의 병력으로 백제를 이기지 못하면, 신라인은 다시 면목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내 자식을 죽인 뒤에 남의 자식에게 혈전을 독려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부르고 김품일은 아들 관창을 불렀다. 김흠순과 김품일은 “신라 화랑은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 1만 명의 화랑 병력으로 수천 명의 백제 군대를 이기지 못하면 화랑도 망하고 신라도 망한다. 너희는 화랑의 두령으로서 화랑을 망칠 것인가? 신하가 되면 충성을 다해야 하고, 자식이 되면 효성을 다해야 한다. 위기 앞에서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명성을 얻는 것이 오늘의 임무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반굴은 “예!” 하고 자기 부하들과 함께 백제 진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전사했다.

관창은 겨우 열여섯 살로 화랑 중에서 가장 어렸다. 그는 반굴의 뒤를 이어 필마단창()3)으로 백제군에 뛰어들어 여러 명을 벤 뒤에 사로잡혔다. 계백은 소년의 용맹이 대견해서 차마 해를 가하지 못하고 “어허!” 하면서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상하구나” 하고 돌려보냈다. 관창은 아버지 김품일에게 “오늘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베지 못했으니,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을 움켜 마시고 갈증을 해소한 다음에, 채찍으로 말을 몰며 장창을 들고 백제 진영에 들어갔다. 그러자 계백은 그의 목을 벤 뒤 그 머리를 말꼬리에 달아 신라 진영으로 보냈다.

이를 본 김품일은 도리어 기운이 나서 “내 아이의 얼굴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죽은 게 아니로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신라군은 감동하여 용기가 치솟았다. 이에 김유신이 총공격을 명하자, 수만 명이 일제히 돌진했다. 계백은 직접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했다. 결국 양국 군대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계백과 백제 군대가 용맹하고 강하다 해도, 숫자가 너무 달리니 어쩔 것인가. 성스러운 희생으로 백제의 최후를 장식하고 전장에 쓰러질 뿐이었다. 신라군은 승전가를 부르며 백제 왕도를 향해 나아갔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강 입구의 기벌포에 도착했다. 수리()나 이어진 개펄 때문에 섣불리 상륙할 수 없었다. 초목을 베어 바닥에 깐 뒤에야 간신히 상륙할 수 있었다. 백제왕은 임자의 말대로 자라가 주머니 속에 들어오면 잡겠다는 생각으로 백강(백마강) 입구를 지키지 않았다. 백제 수군은 백강 안쪽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개펄을 지난 당나라 군대는 후퇴할 곳이 없기 때문에 그저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 군대가 용기가 끓어올라 백제 수군을 격파하며 언덕 위로 올라오자, 의직은 군대를 지휘하며 격렬히 싸우다가 죽었다. 의직은 비록 지략은 계백만 못했으나 용감함은 서로 비슷해 한때 당나라 군대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의직이 죽은 곳을 조룡대()라고 불렀다.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은 것에 비유한 모양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소정방이 백강에 도착할 때 비바람이 너무 심해서 행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에게 물어보니 무당은 “강의 용이 백제를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그 용을 낚았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부르고 대()를 조룡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실, 백마라는 강 이름은 소정방이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다. 성충의 상소문에도 백강 입구라는 말이 있었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다. 일본 역사책에서는 백촌강()이라고 했지만, 촌()은 ‘말’을 뜻하므로 백촌강은 백마강의 별칭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야사는 그 자체가 황당할 뿐 아니라 역사와도 모순된다. 《해상잡록》에 적힌 대로 이곳은 의직이 죽은 곳이라고 봐야 한다.(8)

 

 

의자왕의 체포와 백제 2대 도읍의 함락

계백을 격파한 김유신 등은 약속한 날짜가 하루 지난 음력 7월 11일에야 백강에 도착했다. 소정방은 약속 기한이 지났다면서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김유신은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는 데 격분했다. 그는 눈에 불이 번쩍하면서, 순식간에 보검을 빼어들었다. 그러고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그냥 놔두고 당나라와 싸우자”고 말했다. 당나라 장수 중에서 이를 탐지한 자가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소정방에게 알리자, 소정방은 김문영을 놓아주었다. 뒤이어 양국 군대는 합세하여 ‘솝울(소부리)’을 공격했다.

의자왕에게는 태자 이외의 적자가 여럿이고 서자가 40여 명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에 왕은 그들 모두에게 좌평 직책을 주고 국가 운영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들 중에는 실권을 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 이들은 대략 세 파로 갈렸다. 태자 부여효 등은 북경인 곰나루성으로 가서 전국의 의병을 소집하자고 했고, 둘째 왕자인 부여태는 솝울을 사수하고 왕·왕자·신하들이 힘껏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했고, 왕자 부여융은 소·술·비단을 적군에 바치고 철수를 요청하자고 했다. 4, 50명의 적·서자들이 각기 자기네 의견을 주장하면서 왕의 앞에서 떠들었다. 왕은 무엇을 따라야 할지를 몰라 왕자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었다. 부여융에게는 강화 협상의 권한을 맡기고, 부여태에게는 수비의 권한을 맡겼다. 그런 뒤 본인은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로 도망갔다.

부여융은 소정방에게 편지를 보내 철군을 요청하고 소와 술을 보냈지만 전부 다 퇴짜를 맞았다. 그 사이에 둘째아들 부여태가 대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성을 수비했다. 그러자 태자의 아들인 부여문사는 “대왕과 태자가 생존해 계시는데, 숙부께서 어찌 스스로 왕이 되십니까? 만약 일이 평정되면 숙부를 좇는 자는 모두 역적죄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 측근들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인민들도 따라나서고 군인들도 전의를 상실했다.

부여융은 화의를 성사시키지 못한 게 부끄러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신라 군대와 당나라 군대는 성벽을 타고 성 위로 올라갔다. 왕후와 후궁과 태자의 비빈들은 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대왕포로 달아나 암석 위에서 강으로 떨어졌다. 낙화암이란 바위 명칭이 지금까지도 그 자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왕자들은 자살하거나 도주했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대장이 임자의 일파였다. 그가 왕을 잡고 항복하려 하자, 왕은 스스로 목을 벴지만 동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왕은 태자 부여효 및 어린 아들 부여연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나라 군영에 끌려갔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스스로 목을 찔러 절반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의자왕을 땅바닥에 굴리면서 “이래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신라 태자 김법민은 왕자 부여융을 굴리면서 “네 아비가 우리 누이의 부부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며 앙갚음을 했다.

신라 태종은 소정방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금돌성에서 솝울로 달려갔다. 소정방은 ‘백제를 멸하거든 기회를 봐서 신라를 빼앗으라’는 당고종의 밀지를 받은 터라, 신라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김유신이 이를 태종에게 보고하자, 태종은 어전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때 김다미는 “우리 병사들에게 백제 옷을 입혀 당나라 진영을 치면 당나라 군대는 출전을 하는 기회에 우리 진영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그때 불시에 기습하면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백제 전역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북쪽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나라에 맞서면서, 백제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대를 양성하며 때를 봐서 움직인다면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태종은 “당나라의 은혜로 적국을 멸하고 나서 당나라를 친다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고 답했다. 김유신은 “개의 꼬리를 물면 주인일지라도 무는 법입니다. 지금 당나라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꼬리를 밟고 머리까지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라며 당나라를 칠 것을 확고히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듣지 않고, 엄중히 방비할 것을 군영에 명령할 뿐이었다. 신라의 경비 태세를 파악한 소정방은 음모를 중지했다. 민간의 어느 책에는 함창 당교()에서 당나라 군대를 기습해서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고증했다.

백제는 백전()의 나라라서 백성들이 전쟁을 잘하고 정의로운 일에 용감하게 나섰다. 하지만 유교를 수입한 뒤부터 사회가 명분의 굴레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 성충과 흥수는 외적을 평정할 재주와 지략은 가졌지만 명림답부처럼 폭군을 벨 기백은 없었다. 계백과 의직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할 충렬은 있었지만 연개소문처럼 국가 내부를 숙청할 수완은 없었다. 이 때문에 결국 광망한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임자 같은 소인배들이 수십 년간 정치의 중심세력이 되어 평소에는 국가재정을 탕진하며 일신의 향락을 추구하다가 난시에는 국토를 들고 적에게 투항하게 된 것이다. 이때 중경()과 상경()은 왕자들의 성문 개방으로 점령되고, 그 외의 3경과 각 군현도 저항 없이 적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 운동은 의외로 격렬하여 군왕과 관리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뒤에 분연히 일어나 맨손으로 적병과 싸웠다. 이로써 최후의 망국사는 피비[]로 장식되었다. 만약 그들이 유교의 명분론에 속지 않고 혁명의 의기를 품었다면, 어찌 구구한 간신배들이 나라를 망치도록 그냥 둘 수 있었겠는가. 이제, 다음 장 백제 의병의 봉기(부여복신의 역사)에서 백제의 다물 운동에 관한 대략을 설명하고자 한다.(9)

 

 

 

 

<자료출처>

 

 

(1)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214-217쪽

 

 

(2) [네이버 지식백과] 백제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영토 확장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성충의 전략 건의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 [네이버 지식백과] 대야성의 함락과 김품석의 참사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5)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백제 동맹의 성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6) [네이버 지식백과] 안시성 전투 당시 성충의 건의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7) [네이버 지식백과] 성충의 자살과 그 일파의 축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8) [네이버 지식백과] 계백과 의직의 전사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9) [네이버 지식백과] 의자왕의 체포와 백제 2대 도읍의 함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참고자료>

 

 

백제 마지막 왕이 의자왕?…아니다, 32대 풍왕이 있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이기환 기자 2023. 11. 6.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30

 


[씨줄날줄] 비운의 백제왕 昌/이용원 수석논설위원 | 서울신문 (seoul.co.kr)200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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