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평범한 성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선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 중 왕성 규모에 맞는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풍납 토성의 우진육각형(찌그러진 형태의 육각형 구조) 집터 구조 자체가 왕성에 맞지 않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이소장은 또 ▷고구려 장안성, 백제 웅비성 등 수백만평 규모의 왕성과 달리 20만평 규모의 풍납 토성은 왕성이라고는 불리기조차 초라 할 만큼 미미한 수준이라는 점 ▷동아시아권 왕성에서 발견되는 격자형 도시계획 구조가 확인되지 않는 점 ▷홍수 범람지역에 도성을 세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풍납 토성이 백제 왕성이었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1)
<16>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한 권오영 서울대 교수
2008년 9월 초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우물터 발굴현장. 현 지표면으로부터 5m 아래 구덩이에서 젊은 여성 조사원의 환호가 들려왔다. 발굴책임자였던 권오영 당시 한신대 교수(현 서울대 교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꽃삽으로 자갈과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던 한지선 한신대 조교(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한 무더기의 백제시대 토기들을 발견한 것. 40여 점의 완형(完形) 토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묘한 모습이었다.
구덩이 폭이 1.5m에 불과해 조사원 한 명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땅을 겨우 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선은 철모를 눌러쓴 채 사진을 찍고 토기를 하나씩 수습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기들을 올려 보내고 다시 땅을 파내자 또 한 겹의 토기 무더기가 나왔다.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완형 토기들이 5층을 이뤄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19일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권오영은 “1999년 1차 발굴에 이은 2008년 재발굴에서 왕궁 우물(御井·어정)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풍납토성 안에 한성백제시대 왕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발굴 초기 우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물 입구부터 자갈과 흙으로 빽빽하게 매립된 상태인 데다 얼핏 부여 제석사지, 왕흥사지와 구조가 엇비슷해 발굴팀은 목탑 터로 오인하기도 했다. 현 지표면으로부터 6m(백제시대 기준 3m) 아래 바닥까지 완전히 발굴한 뒤에야 우물터임이 드러났다.
남은 과제는 우물과 완형 토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우물을 폐기할 때 토기와 각종 희생물을 함께 넣고 제사를 드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시대 우물터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출토됐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도 폐기를 위한 제사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토기만 나올 뿐 동물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물 폐기 시점에 흔히 보이는 전염병이나 전란 등 천재지변의 흔적도 없었다.
권오영은 토기들의 개별 양식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우물이 축조된 4∼5세기 전라, 충청지역 토기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궁 내 자리 잡은 우물터의 정치적 상징성과 토기양식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백제 왕실과 지방민 사이의 복속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본사와 지방 말사들이 모여 합수(合水) 의식을 치른 것처럼, 각 지방 지배층이 토기에 특산물이나 물을 담아 경당지구 우물에서 회맹의식을 치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했지만 강력한 중앙통치가 이뤄지지 않아 학계는 한동안 이들이 반(半)자치 상태에 놓였다고 본다. 신라,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에서 막 복속시킨 지방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발견
1999년 경당지구 1차 발굴에서 발견한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의미도 적지 않다. 발굴을 빨리 끝내 달라는 재개발조합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그해 12월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유적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세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최장열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뛰쳐나왔다.
그는 권오영에게 달려가 “토기 조각에 글자가 새겨진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한성백제시대 문자 자료는 백제왕이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가 유일했기 때문에 권오영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토기 조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분명 글자가 있었다. ‘大夫(대부)’였다. 며칠 뒤 같은 유구에서 ‘井(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大夫’자 토기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였다. 해당 유구(101호)는 10마리의 말 뼈와 더불어 약 1200점에 달하는 제기용 토기가 깨진 채 쌓여 있는 제사용 폐기장으로 밝혀졌다.
‘大夫’에 대해서는 백제의 중앙관직명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1999년 시루봉 고구려 보루에서도 ‘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가 발견됐다. 권오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할 때 ‘大夫’와 ‘井’이 종교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됐다. 특히 경당지구에서는 왕실 우물과 더불어 국가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44호 유구)도 발견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경당지구는 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 왕성의 존재를 실증하는 핵심 유적”이라고 평가했다.(2)
<주>
https://v.daum.net/v/20150713144532060
https://www.donga.com/news/List/Series_70040100000214/article/all/20160921/80368379/1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70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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