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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세월이 30년이나 흘러 ‘통일의 꽃’으로 불린 20대 초반 대학생이 50대 중년이 됐네요.” ‘판문점 군사분계선 민간인 첫 통과’ 30돌을 맞은 문규현(74) 신부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에 참석하려고 이동중이라며 전화를 받았다. 문 신부는 1989년 8월15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한국외대 4학년)씨와 함께 남쪽으로 귀환했다. 두 사람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온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고 수감중 1992년 성탄절 전야에 형집행 정지로 가석방됐다. ■ 문규현 "30년전 오늘 '분단 금기 돌파'는 '윤한봉 기획'이었다"정대하2019. 8. 14. 22:26 [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

1989년 6월21일 한국외대 4학년 임수경씨가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일본 도쿄와 독일을 거쳐 6월30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왕복해 서울에서 평양에 갔다. 그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했다. 분단 이후 남쪽의 학생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큰 충격을 줬다. 통일운동가나 유명 작가가 아닌 평범한 20대 대학생의 방북은 남북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임수경씨는 평양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며 환영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에는 환영 인파가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 민간방북 30년..문익환·황석영·임수경의 길 어떻게 이을까2019. 4. 4. 12:16 '금단의 시대' 넘은 3인 행적 ..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당시 해직됐던 전국 교사 1527명이 1994년 '특별채용' 형태로 복직됐지만 해직기간 동안 경력이나 호봉을 인정받도록 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교조 탈퇴를 거부했던 교사 1527명이 해임·파면의 징계 처분으로 1989년 6~9월 사이 교단을 떠났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 때였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고 특별채용 형태로 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전교조는 "2013년 10월24일 사무실로 날아든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 팩스 한 장이 6만명의 살아 숨 쉬는 노동조합을 하루아침에 법 밖으로 몰아냈다"며 "이병박·박근혜 정권은 국가권력을 총동원해 전교조를 탄압했고,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탄압..

문 목사 일행은 방북 후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회담을 갖고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제목의 공동 성명도 발표했다. 성명의 주요 내용은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7·4 남북 공동 성명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 문제 해결 △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연방제 방식의 통일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 반대 등이었다. 문 목사 일행은 열흘 간의 방북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 민간방북 30년..문익환·황석영·임수경의 길 어떻게 이을까한겨레 2019. 4. 4. 12:16 '금단의 시대' 넘은 3인 행..

황석영 작가는 북한문학예술동맹의 초청장을 받아 ‘문화예술교류'를 위해 방북했다. 그는 분단 고착 이후 북쪽에 들어간 최초의 남쪽 작가였다. 그는 방북 뒤 바로 귀국하지 않고 4년간 외국에 머물면서 다섯번 북한에 들어갔고, 일곱번 김일성 주석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평양을 떠나는 날, 황 작가에게 “다 돌아가서 차례차례 굴비 엮듯이 잡혀가지 말고 황형은 밖에서 활동을 좀 해라. 기행문 쓰고도 해외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대 틀을 만들어줘라”는 부탁을 전했다고 한다. ■ 민간방북 30년..문익환·황석영·임수경의 길 어떻게 이을까한겨레 2019. 4. 4. 12:16 '금단의 시대' 넘은 3인 행적 재조명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다. 그해 봄과 여름 황석영 작가(3월20일), 임수..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적 공간이 열리자, 그동안 축적된 노동운동의 역량에 노동자 대중의 엄청난 열기가 결합되어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울산, 특히 그 전까지 노동조합이 없었던 재벌 기업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주)통일 등 마산‧창원의 대기업으로 확대됐다.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소속사들 노조들의 모임인 현대그룹노조연합 노동자 수 만 명이 시위를 벌이면서 울산시가 해방구로 변하고 말았다. ■ '노동자대투쟁' 이후 30년, 노동 현실은 달라졌나? [손호철의 발자국] 16. 울산 : 역사상 최대의 노동자투쟁인 87년 노동자대투쟁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4.12. 07:58:32 최종수정 2021.04.12. 18:21:41 "내 눈에 흙이 ..

1987년 6월 항쟁은 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발표 후 6월 10일을 정점으로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으며 이후 노동자 대투쟁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다. 6월 항쟁은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대통령 간접선거를 고수하려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 조치 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이 도화선이 됐으며,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전개됐다. ■ 서울을 걸으며 '6월 항쟁'과 재회하다[CBS 이진성 프로듀서] 2013. 6. 7. 10:30 [서울의 재발견] 6월 항쟁을 따라 걷는 서울 트레킹 1987년 6월 항쟁은 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발표 ..

‘198769757922’는 한열동산 기념비에 새겨진 숫자다. 1987년 전국에서 500여 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와 직선제 쟁취를 외치며 한국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월9일 연세대에선 다음날 열릴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과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렸다. 당시 교문 밖에서 시위를 하던 이 열사는 사람을 향해 발포한 경찰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7월5일, 27일 동안 사경을 헤메던 그는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끝내 사망했다. 7월9일 시민들은 그의 희생을 애도하며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 "고통과 헌신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12·3 내란 후 '고 이한열 추모제'[뉴스데스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언론·의학·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지면서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 [정리뉴스]박종철 사망 30주기..사진과 글로 정리해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정대연·홍진수·이재덕 기자2017. 1. 14. 00:35 [경향신문]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30주기입니다. 1987년 이후 해마다 돌아오는 기일이지만,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한국사회 현 상황은 오늘 기일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듯 합니다. 향이네에..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