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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신형식 백산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한국고대사)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도 드러나듯 간도는 명백한 우리 영토였고, 1909년의 청·일 간 간도협약은 국제법상으로도 무효”라며 “만일 정부가 제기하지 못한다면 국회와 학계에서라도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국제법)는 “중국이 국가 주도로 자신의 국익에 유리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 정부는 ‘외교적 마찰’ 운운하며 이런 논의를 스스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중국 정부와의 ‘조용한 조율’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삼음으로써 중국에 대한 ‘카드’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간도협정은 무효’ 명기된 국감자료집 수거후외교..
간도는 통상 남부 만주 지역 중 두만강 북쪽 땅(동간도)을 뜻하지만, 압록강 북쪽도 서간도로 불려왔습니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과 청 나라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만들 때 합의한 것처럼 조선 영토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는 한국인이 급증, 간도협약 당시 동간도에만 10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습니다.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노무현 정부 때 중국 “간도 영유권 거론 말라” 요구 후“외교부가 왜 국감 자료집 회수하느냐” 제보 전화신구 자료집 비교해 보니 간도 협약 기술 바뀌어파..
안도패총은 여수 돌산 송도, 신안 가거도, 완도 여서도 패총에 이어 지금까지 전라남도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패총으로 네 번째이지만, 다른 유적들과는 달리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다량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남해안지역 전체로 보았을 때에도 매장 방식의 특징이나 대외교류와 관련된 유물 등은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자료는 남해안지역과 일본 규슈지역의 신석기시대 매장 풍습과 문화교류 등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각 층에서 출토된 뼈와 패각을 시료로 실시한 연대 측정 결과도 각각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2500년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 각 문화층의 연대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1)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전남 여수시가 금오도..
인류의 진화 단계상 최초로 시신을 매장한 것은 호모사피엔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집단적인 공동묘지를 따로 만든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다. 어패류 주로 섭취..신장 타지역보다 작아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에서 발굴된 신석기인의 흔적. /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집단무덤 유적으로는 부산 가덕도 북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장항유적이 대표적이다.이 유적에서는 인골 48개체와 돌무지 유구 90여기, 구덩이 100기 등이 발굴됐다. 인골이 출토된 경우는 장항유적 발굴 이전만 해도 전국을 통틀어 불과 33개체뿐이었다. 장항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은 대체로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있었다. 팔다리를 바로 펴거나 굽힌 상태로 묻혔는데 대다수가 굽혀묻기로 돼 있었다. 남녀의 성비는 비슷하고 연령은 유소아부터 70대의..
동삼동패총은 남해안지역 신석기문화의 특징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이른 시기부터 해양 활동을 통해 일본 규슈지역까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입니다. 1929년 일제강점기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 오이가와〔及川民次郞〕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1963∼1964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모어(Mohr, A.) 및 샘플(Sample, L.L.)에 의해 시굴조사가 그 후 201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부산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서 10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2,000년 전은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로 접어들면서 구석기시대에 비해 기후가 급속히 따뜻해집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고 식물 채집, 사냥, 물..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고래사냥 관련 바위그림이다. 1971년에 발견되었고 1995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사냥과 어로와 관련된 3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중 고래를 사냥하는 사실적인 그림은 7,000년 전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지구상에 현존하는 고래사냥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냥하는 사람과 동물, 어로 및 사냥 도구 등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약 7,000년~3,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 신라시대 명문이 눈에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 등 또한 학계를 깜짝..
국가가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작은 전시관이나마 만든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빙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 놓였던 한반도 선주민들의 진보하는 문화를 담은 유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전시관에 전시된 신석기시대 비봉리마을 복원 그림.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그런데 인류사의 99% 이상은, 95% 이상 식물성 음식으로 살아왔다. 동물성 식료도 그나마 뭍짐승보다는 벌레나 동물을 잡아먹었다. 사냥은 사실 쉽게 잡으면 수지가 맞지만, 위험하기도 하고 에너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초기에는 다른 맹수류 짐승이 먹고 난 찌꺼기들을 먹는 소위 '시체청소부' 역할을 했다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하고 시대가 흘러 지금으로부터 1만8,0..
신석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생활 유물인 토기는 선사시대인들의 건강을 획기적으로 바꿔준 발명품입니다. 또한 디자인의 개념이 일상 생활에 처음으로 도입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산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예술품이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산화철로 빨갛게 장식한 적색마연토기는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입니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유적 C지구(예맥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류 모음 인류사의 문화대혁명을 체감할 수 있는 곳 신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삶의 방식이 가장 크게 달라졌던 시기다. 아이를 들쳐없고 돌아다니면서 먹거리를 구하고, 밤이면 쉴 곳을 찾아다니던 '노마드 시대'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한 곳에 오래 눌러 앉아서 살 수 있게 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정주생활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
홍산 문화 전문가인 항공대 우실하 교수에 따르면 문암리 옥 귀걸이의 모양은 흥륭와 옥 귀걸이와 모양이 거의 같습니다. 옥 귀걸이를 고리로 한반도 동해안의 문암리가 중국 동북부 흥륭와~사해~부하 문화 시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7000년 이전,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두고 비슷한 모양의 옥 귀걸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신석기 유물들. 신석기 조기(早期)의 융기문 토기와 돌칼, 돌 도끼, 돌 낚시 등이다. 그 가운데 옥 귀걸이(가운데 붉은 원 내)는 BC 5000년쯤 내몽골 흥륭와 문화와 교류한 증거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년대 말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인근 동해안에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변에 뒹구는 토기 파..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물구덩이에서 확인된 금동대향로. 백제멸망의 순간을 증언해주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