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신석기시대 고고학 (9) 양양 오산리유적 - 8000년 전~3500년 전 본문
신석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생활 유물인 토기는 선사시대인들의 건강을 획기적으로 바꿔준 발명품입니다. 또한 디자인의 개념이 일상 생활에 처음으로 도입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산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예술품이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산화철로 빨갛게 장식한 적색마연토기는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입니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유적 C지구(예맥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류 모음
인류사의 문화대혁명을 체감할 수 있는 곳
신석기시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삶의 방식이 가장 크게 달라졌던 시기다. 아이를 들쳐없고 돌아다니면서 먹거리를 구하고, 밤이면 쉴 곳을 찾아다니던 '노마드 시대'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한 곳에 오래 눌러 앉아서 살 수 있게 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정주생활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주거생활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삶의 모든 면을 바꾸어 버렸다. 육아방식이 달라지고 음식물 저장방식이 생겨나는 ‘부엌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처음으로 발명된 토기를 이용해 음식물을 끓여서 국이나 찌개를 만들어 먹는 음식 섭취 방식으로 영양 상태가 개선되었고, 아이 이유식이 가능해짐에 따라 유아사망률을 크게 감소시키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할 수 있었다. 신석기 혁명은 농경의 시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산리 유적에서 발굴된 인면 토우. 서울대학교박물관 제공
이러한 변화는 빙하가 물러난 다음 지구상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8,000년 전 우리나라의 초기 신석기시대 유적, 아마도 한반도 내에서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고 알려진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鰲山里) 유적도 그러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곳이다.
1980년대 초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임효재 교수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기의 새로운 토기인 아가리 시문토기(오산리식 토기), 그리고 융기선문토기와 그 유명한 토제 얼굴 조각품 등을 처음으로 발굴해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한 유적이다.
그 후에 진행된 예맥문화재연구원의 발굴에서는 구석기 문화층도 발견되었다. 공백으로 남아있던 구석기시대 말엽과 신석기시대 시작 사이 시기의 문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열쇠가 될 만한 유적이다. 사실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 토기가 1만5,000년 이전에 나타나기 때문에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시작에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이 발굴에서도 물개나 곰 등의 동물 조각들이 추가로 발굴돼 한국원시미술의 원류를 엿볼 수 있다. 상징물이나 미술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양양 오산리유적 C지구에서 출토된 토우. 물개와 곰 모양이다.
솔밭 언덕의 마을
양양에서 강릉 방향 국도를 타고 남대천을 건넌 뒤 작은 언덕을 오르기 직전 좌회전해 바닷가가 보일 때까지 동쪽 길을 따라가면 ‘오산리선사박물관’이 등장한다. 박물관 동편의 솔숲 속에 원형 집자리들이 복원되어 있는데 바로 발굴된 지점들이다. 박물관 앞으로는 엄청나게 넓은 갈대밭이 조성돼 방문객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서쪽의 야산에서 내려오는 동명천의 양쪽에 쌍호(雙湖)라는 크고 얕은 호수가 있었고, 그 동편의 모래 언덕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들이 발견되었다. 쌍호를 메워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흙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산리유적 제1지구 발굴지점의 복원된 마을 모습
유적 옆으로 흐르는 동명천은 200~300m 동쪽에서 바다를 면한 오산과 만나게 되는데 그 옆으로 어촌인 오산리 마을이 있다. '오산'이라는 명칭은 낙산사에서 보면 자라가 춤추는 모습이라고 하여 오무(鰲舞)라고 부르다가, 오산으로 바뀐 모양이다. 이 일대는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며 이루는 호수와 늪지로 구성돼 있는데 이웃한 가평리(柯坪里)라는 지명은 바로 갈대마을이라는 뜻이다.
모래 언덕에는 뿌리에 바람이 잘 통해야 잘 자라는 길숨한 소나무 숲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이 일대의 지명에 송현(솔고개), 송전(솔밭) 등 소나무가 들어 있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선사시대 당시의 풍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솔 그늘 사이에 갈대로 엮은 작은 움집들이 햇빛에 반사되고, 솔바람 속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신석기시대 마을 모습이 연상된다.
몇 년 전 방문했던 에티오피아 리프트밸리의 사바나 관목 숲 속의 코쿤 모양 집에서 이방인 소리에 반라로 튀어나오던 원주민 젊은 아낙의 모습은 내가 선사시대 무공해의 삶을 상상하는 모델이다.
신석기 토기는 생활 예술의 시작
신석기시대 문화의 대표적 생활 유물인 토기는 선사시대인들의 건강을 획기적으로 바꿔준 발명품이다. 또한 디자인의 개념이 일상 생활에 처음으로 도입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오산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예술품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산화철로 빨갛게 장식한 적색마연토기는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흔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를 바닥이 뾰죽하게 생긴 빗살문토기라고 알고 있지만, 오산리유적에서 발견되는 융기문토기 또는 덧띠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서해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태다. 토기를 장식하는 방법으로는 흙을 알갱이나 끈처럼 만들어 토기 표면에 붙이고 여러 방식으로 변형하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표현한다.
오산리유적 C지구에서 출토된 적색마연토기(왼쪽)와 덧띠기하무늬토기
이 토기는 동해안의 유적들, 대표적으로 고성의 문암리, 울주군의 신암리에서 보인다. 또 유명한 부산 영도의 동삼동 유적과 북으로는 연해주 지방에서도 나타난다. 백두산 흑요석이 보여주듯이 동해안을 따라 움직인 문화의 궤적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기문화는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縄文)토기와도 통한다.
이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층보다 아래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서해안과는 다른 문화가 흐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나 지속되었는데, 이것이 동해안으로 퍼져나가 융기문토기를 대체하면서 한반도의 보편적인 신석기문화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오산리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덧띠무늬토기에서 읽히는 오산리 여인들
토기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 세대가 바느질을 하여 옷이나 이불을 만드는 작업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토기 만들기는 가족 먹거리를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지만 유행에 따라 예쁘게 만들어 집안을 아름답게 꾸미는 작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흙실을 길게 만들어 토기에 그냥 붙이기도 하고 또는 잘라서 콩알 모양으로 장식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손에 묻은 진흙을 꾹꾹 눌러서 보고 싶은 ‘님’의 얼굴을 표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얼굴조각품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또 아이가 가지고 놀 수 있게 곰이나 돼지 모양으로도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리에서 발굴된 토제 사람 얼굴이나 동물형 토기는 옹기종기 앉아 수다를 떨면서 만들지 않았을까.
오산리선사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과거 토기 제작 모습.
조개무덤은 왜 없을까? 오산리 어부의 한나절
동해안의 신석기유적은 바닷가의 유적이지만 조개무덤이 없다. 오산리 일대에도 이 지역에서 ‘째복’이나 ‘섭(홍합)국’이라고 부르는 인기 있는 조개요리가 있지만 막상 유적에서는 조개껍데기가 보이지 않는다. 모래 해변에서 흔히 보는 작은 조개 말이다. 그리고 오산 주변은 바위 해안이기도 해서 전복, 소라 등의 조개가 있을 법한데 유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들은 물고기가 흔하기 때문에 자잘한 먹거리에는 신경 안 썼을 수도 있다.
오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낚시바늘은 전 세계 통틀어 획기적인 기술혁신 작품이다. 돌을 갈아서 대롱처럼 길게 만들고 뼈나 나무로 고리부분을 묶거나 접착제로 붙여 낚시바늘을 만들었다. 고성 문암리 유적을 비롯한 동해안 여러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지만 일본의 동해 연안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동해연안문화의 흐름이라고 할 만하다.
돌대롱의 길이가 한 뼘에 달하는 것도 있어서 엄청나게 입이 큰 물고기를 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물고기는 대체로 수심이 깊은 물에서 잡힐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배를 타고 나가 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나무 배의 흔적은 이미 오산리 유적과 동해안 일대의 저습지 유적들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오산리유적 C지구에서 출토된 석기류(왼쪽부터)와 갈돌, 조합식어구, 마제석부, 어망추 등. 오른쪽 사진은 조합식어구 복원품.
그렇지만 이 지역은 깊은 바다로 나가지 않아도 먹거리가 풍족한 지역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남대천은 회귀성 어족인 연어가 겨울철에 엄청나게 잡히는 곳이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연어 떼들이 있고, 민물과 바닷물이 혼합되는 이 일대는 수자원이 엄청나게 풍부한 생태환경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오늘날 볼 수 있듯이 수온 변화에 따라서 명태나 오징어 떼들이 찾아든다. 아마도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오늘날 미시령 너머 인제군 용대리의 명태 덕장 같은 고기 말리는 풍경들이 이 일대에도 펼쳐졌을 것이다. 일 년 내내 물고기잡이와 갈무리 작업으로 남정네들은 손이 닳고 허리가 아팠을 것 같다.
한국일보.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신석기 동해 마을의 하루..아낙들은 토기를 빚고 남정네들은 낚시를 하고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1. 7. 17. (1)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식물고고학을 통한 선사 시대 농경화 연구'의 하나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시행한 '양양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 눌린 흔적) 조사'에서 농경과 관련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팥의 압흔은 신석기 조기(8000~6500년 전)와 중기(5500~4500년 전)에 각각 1점이 확인되었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는 작으며 팥 압흔이 확인된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Beta Analytic)에서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이용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가장 오래된 판 흔적 발견 결과로 인하여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이용됐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특히, 신석기 조기부터 중기에 걸쳐 팥이 이용되는 과정에서 크기가 점차 커지는 재배화 경향까지 확인되어 농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는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이 확인되었다.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학명: Hemiptera)에 속하는 곤충으로, 선사 시대 농경과 관련해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곤충 압흔이 발견된 점토 덩어리와 함께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 등도 확인되었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석기 시대 식생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번에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양양 오산리와 송전리 유적은 지난 2006년 (재)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 조~중기에 해당하는 주거지, 야외노지, 저습지 등이 확인되면서 중부 동해안 지역 신석기 시대 문화상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 곳이다.
머니S. 강인귀기자. 가장 오래된 팥 흔적 발견..기존 추정보다 2천년 앞서 2014. 10. 15. (2)
신석기시대 토기에 그려진 삼각형을 세계 고고학계나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 또는 '기하학적 추상무늬'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는데, 김찬곤교수는 양양 오산리유적의 덧무늬토기에 새겨진 삼각형 모양이 양양 앞바다의 구름을 그린 것으로 보았습니다.
양양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그릇 가운데 눈에 띄는 항아리 두 점이 있다. 나는 두 항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항아리 모양과 같은 그릇은 다른 신석기 유적에서는 볼 수 없고, 삼국·통일신라·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덧무늬토기1(양양 오산리, 27cm), 덧무늬토기2(양양 오산리, 26.1cm), 백자 철화포도문호(국보 제107호. 18세기 초. 높이 53.8cm. 입 지름 19.4cm. 밑 지름 19.1cm)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또 세계 신석기시대 그릇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그 기본 모양은 조선 항아리와 같다. 7200년이 지나서야 볼 수 있는 그릇을 신석기시대 오산리에서 빚은 것이다. 더구나 덧무늬토기 그릇 무늬는 오늘날 디자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현대적이다.
위 세 항아리 모양은 여성의 몸을 닮았다. 특히 세 번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제107호)는 여성의 배꼽부터 시작해 골반과 다리까지, 그것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눈'으로 그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릇은 여성, 여신(女神), 비구름·비·물(만물생성의 기원), 만병(滿甁 찰만·항아리병, 마찬가지로 만물생성의 기원), 어머니, 들판 같은 상징성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
신석기시대 그릇을 빚었던 장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릇이 지금의 냉장고처럼 생활필수품이었던 만큼 편리성이 아주 중요한데, 그 편리성의 발전 속도가 아주 더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릇에 손잡이를 다는 것이나 물그릇에 귀때나 부리를 붙이는 것, 이런 것이 수백에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그릇을 빚었던 장인은 그릇을 늘 쓰는 여자였다기보다는 바깥일을 주로 했던 남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오산리는 바다에서 200미터 남짓 떨어진 곳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성난 파도와 물결을 표현했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래 그릇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신석기인이 빚었던 그릇이다. 모두 다 삼각형 무늬가 있다. 과연 이 삼각형은 무엇을 뜻할까.
▲ 세계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1. 나이지리아 신석기 항아리 2. 이집트 신석기 항아리(기원전 3800년, 높이 16cm) 3. 스페인 발렌시아 물그릇(높이 12.4cm, 발렌시아선사시대박물관) 4. 영국 비커(높이 13.8cm, 대영박물관) 5. 러시아 얌나야(Yamnaya) 물병. 6. 초기 아시리아,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신석기 그릇(기원전 1900-1700, 높이 22.8cm, 대영박물관) 7. 중국 양사오 물병(기원전 5000년) 8. 과테말라 마야 토기 복제품. 9. 미국 애리조나 호피족(Hopi) 그릇 ⓒ 김찬곤
신석기인은 이 삼각형을 무슨 뜻으로 새겼을까.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이것을 풀지 못한 것 같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 설명글을 읽어 보면 거의 다 '기하학적·비유적·추상적인 삼각형'이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사진 3-6〉 같은 삼각형 무늬를 '기하학적 추상무늬' 또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라 말하고 있다.
이 삼각형과 빗금무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신석기 문화에서 볼 수 있고, 무늬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더구나 이 무늬는 신석기에 그치지 않고 청동기와 철기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청동기와 철기를 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 삼각형 무늬의 기원은 반타원이고, 이것의 각진 형태가 삼각형이다(삼각형 구름'에 대해서는 앞 글, 관련기사: 부산 영선동 '토기 융기문 발' 무늬는 무엇을 새긴 것일까)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타원은 뭉게구름 '뭉게뭉게(뭉실뭉실)'의 한 부분 '뭉게'를 1차원 평면에 새긴 것이다. 여기서 반타원은 비(雨 또는 수분(水))을 안고 있는 '비구름'이다. 비는 보통 삼각형 안에 빗금을 긋거나 점을 찍어 표현한다. 〈사진1-9〉 그릇은 세계 신석기 그릇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 구름'이다.
▲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삼각형’ 세계 신석기인이 구름을 왜 삼각형으로 그렸는지는 두 측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구상(삼각형 꼴의 움집, 빗물에 젖은 나뭇잎)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은 구름을 비(雨·水)를 품고 있는 집으로 보았다. 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원에 가까운 그릇에 다시 타원형 구름을 새기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진 삼각형 꼴 구름무늬를 새겼다고 볼 수 있다. ⓒ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그림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보통 아가리에 가깝게 그린다. 〈사진3〉 스페인 발렌시아 그릇은 몸통에 수평으로 선을 몇 겹으로 그려 하늘과 그 아래를 구분 짓고, 하늘 속(파란 하늘 너머)을 그들의 세계관에 따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6〉 시리아 샤가르 바자르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항아리는 본질적으로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2와 도상이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삼각형 속 비(雨)를 빗금을 엇갈려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산리 덧무기토기1 또한 〈사진4〉 영국 신석기 비커처럼 삼각형 구름을 엇갈려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은 구름을 아가리 쪽에 새기지 않고 몸통 전체에 표현했다. 나는 이것을 양양 앞바다 수평선 위로 떠 있는 구름으로 읽고 싶다.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은 기원전 5500년까지 내려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덧무늬토기 두 점에 그린 구름은 지금으로부터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양양 앞바다 구름인 셈이다.
오마이뉴스. 김찬곤.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1] 양양 오산리 덧무늬토기 두 점에 숨어 있는 비밀.2018.09.28. (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10717110002895 한국일보. 2021. 7. 17.
(2) 가장 오래된 팥 흔적 발견..기존 추정보다 2천년 앞서 (daum.net) 2014. 10. 15.
(3) 7500년 전 신석기인이 그린 강원 양양 앞바다 구름 - 오마이뉴스 (ohmynews.com)2018.09.28.
<참고자료>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襄陽 鰲山里 先史遺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한국고고학사전(2001) - 문화유산 지식e음 (nrich.go.kr)오산리유적
'동북아 最古' 7000년 前 팥 흔적 발견.. 신석기 시대 농사 지었을 가능성 시사 (daum.net)
'환국시대 > 환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3. 신석기시대 고고학 (11) 울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7000년전 (13) | 2025.01.18 |
---|---|
3. 신석기시대 고고학 (10) 창녕 비봉리 패총 - 8000년 전~청동기시대 (17) | 2025.01.17 |
3. 신석기시대 고고학 (8) 고성 문암리유적 - 8,000년 전~5000년 전 (11) | 2025.01.16 |
3. 신석기시대 고고학 (7) 사해(차하이)문화, 흥륭와(싱룽와)문화, 신락(신러)문화 - 8천년전 (25) | 2025.01.12 |
3. 신석기시대 고고학 (6) 요하문명(발해연안문명) (3) (28) | 2025.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