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3. 신석기시대 고고학 (10) 창녕 비봉리 패총 - 8000년 전~청동기시대 본문

환국시대/환국

3. 신석기시대 고고학 (10) 창녕 비봉리 패총 - 8000년 전~청동기시대

대야발 2025. 1. 17. 09:11
SMALL

 

 

 

 

 

 

 

국가가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작은 전시관이나마 만든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빙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 놓였던 한반도 선주민들의 진보하는 문화를 담은 유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전시관에 전시된 신석기시대 비봉리마을 복원 그림.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그런데 인류사의 99% 이상은, 95% 이상 식물성 음식으로 살아왔다. 동물성 식료도 그나마 뭍짐승보다는 벌레나 동물을 잡아먹었다. 사냥은 사실 쉽게 잡으면 수지가 맞지만, 위험하기도 하고 에너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초기에는 다른 맹수류 짐승이 먹고 난 찌꺼기들을 먹는 소위 '시체청소부' 역할을 했다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그런데 인류가 진화하고 시대가 흘러 지금으로부터 1만8,000년 전 무렵, 기후온난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아 바닷물이 밀려오게 되니까, 인간은 살던 곳을 버리고 계속해서 내륙으로 쫓겨들어가게 되었다.

 

그 난리 중에서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주방혁명, 먹거리 혁명이다. 토기가 발명되면서 음식을 끓일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을 위한 이유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해산물이 마침내 중요한 식단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영양분 섭취가 확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이러한 먹거리 혁명의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곳이 2004년 발굴돼 국가사적 486호로 지정되었다. 8,000년 전부터 먹거리를 장만했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상남도 창녕 비봉리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이다.

 

 

 

비봉(飛鳳)리 가는 길

 

청도천. 비봉리유적의 골짜기와 직각을 이루고 흐르다 낙동강에 합류하게 된다.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창녕을 지나 영산포IC를 내려오니,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으로 가는 간판이 보인다. 창녕에 내려서 진흥왕 창녕비와 송이라는 여인이 있는 고분공원도 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달렸다. 부곡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비봉리 유적'이라 표시된 간판이 나타나고 금세 작은 전시관이 보인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림이 없었다면 유적전시관임을 알아보기도 힘든 평범한 네모난 건물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사방이 조용해서 이제 막 강해지는 햇살이 나뭇잎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전시관은 서편의 작은 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가 청도천(淸道川)과 합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주차장에서 골짜기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잔디밭에 멧돼지와 사슴 모형을 세워놓았다. ‘아 바로 저기가 발굴 지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사시대 유적이라서 지상의 구조물은 남은 것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옆면에 멧돼지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멧돼지는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의 표면을 캔버스로 하여 음각선문으로 그린 비봉 여인의 ‘작품’이다. 희귀한 신석기시대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봉리 유적 전경. 오른쪽 흰 건물이 비봉리패총전시관이고 잔디마당에 사슴과 멧돼지 조각 장식이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배

 

비봉리의 트레이드마크가 멧돼지 그림이지만 널리 알려진 발견은 바로 갯벌 속에 남아 있던 당시의 배의 파편이다. 배는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것인데, 당시에는 판자를 만들 수 있는 도구나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누처럼 생긴 통나무배나 뗏목을 만들었다. 큼직한 나무를 베어서 속을 불태워가면서 파내 사람이 탈 자리를 만든 것인데 남아 있는 나무 파편은 납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윗 줄은 2005년 비봉리에서 배가 출토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왼쪽 사진)과 복원품. 아랫줄은 함께 출토된 목제 노와 각종 골각기.

 

 

 

 

비봉리에서는 배와 함께 노가 발견되었는데 약간 휘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 배의 파편은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이곳 박물관에는 복원된 배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배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에서 발굴된 배보다도 2,000년 정도 앞선다.

 

 

전시관 안에는 비봉리 유적의 층위를 발굴 구덩이처럼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시대를 달리하는 유적의 층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층서(層序·지층이 쌓인 순서)의 아랫부분에는 바다에 사는 규조류(플랑크톤처럼 물에 떠서 사는 미생물)가 압도적으로 나타나서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인 8,000년 전경(頃)은 바다의 수면이 오늘날의 높이에 도달한 시기이니, 멀리 떨어진 남해바다 강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밀려온 셈이다.

 

 

사람들은 창녕이 경남 내륙의 도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에 해수면이 높아질 때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던 모양이다. 썰물에 배를 타고 해안가로 나가면, 밀물에는 쉽게 이곳까지 돌아올 수도 있었으리라.

 

 

 

비봉리유적의 토층 전시물. 신석기시대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기로 패총들이 켜로 나타난다. 아랫줄은 비봉리유적 문화층서. '신석기 전기' 이하의 층은 갯벌층과 패각층이 교대로 나타나는 해안 환경의 시기다.

 

 

 

비봉리의 바로 앞에도 대단히 넓은 갯벌이 연결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간척 작업으로 청도천의 양쪽을 긴 제방으로 물을 막고 농사를 짓고 있다. 비봉리 유적이 자리한 지점이 제방으로 청도천과 분리되자 물을 퍼내는 양수펌프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면서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비봉리의 풍요로운 백반식단

 

우리나라 대부분 유적에선 동물뼈나 식물의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땅에 산소 공급이 원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산화돼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소가 닿기 힘든 물 속이나 갯벌층에서는 유기물로 된 유물이 남아 있다. 비봉리에서도 갯벌층 속에 동물뼈, 씨앗, 곡물, 나무 등 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 사람들의 먹거리를 짐작하게 한다.

 

 

비봉리유적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도토리이다. 불에 탄 도토리는 신석기유적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구덩이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구덩이에 가득 채워 넣고 그 위에 나뭇잎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을 담당하였던 임학종 김해박물관 전 관장은 도토리에 들어 있는 쓴맛의 타닌을 없애기 위해서 만조 시에 들어오는 바닷물을 채워 넣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적의 저장구덩이 안에서 갈돌과 제분된 가루가 보이고 또한 큼직한 토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도토리묵을 만들었다고 상상해도 될 것 같다. 도토리가 선사시대에 중요한 식료자원이었음은 전 세계에서 확인되지만, 묵은 오늘날 한국에만 남아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윗 줄은 비봉리유적 도토리 탈타닌 구덩이의 구조도와 발굴된 모습. 도토리를 나무로 덮었음을 보여준다. 아랫줄은 구덩이 안에서 발굴된 도토리와 씨앗, 제분 용도로 추정되는 갈판.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발굴된 개뼈에서 바다에서 오는 식료들을 섭취한 흔적이 동위원소과학분석에서 나타났는데 개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볼 수 있다. 유적에서는 낙동강하구에서 많이 채집되던 재첩 종류의 조개가 있는 한편, 바닷속의 바위에 서식한 소라나 굴, 가오리처럼 바다에서 서식하는 종들이 발견되는데 분명 이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배를 타고 멀리 잡으러 나갔거나 해안 지역의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한편 팥과 같은 잡곡류 곡물의 흔적들이 토기에 찍힌 흔적이나 탄화물로 발견되고 있어 비봉리 사람들의 상차림이 오늘날 서울의 백반집에서 보는 것보다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장식의 토기들

 

비봉리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출토된 층위에 따라서 시대가 다를 수는 있지만 토기띠를 붙인 것도 있고 누른 문양, 그은 문양 등 다양한 기법과 함께 디자인 역시 다채롭다. 멧돼지 그림과 같이 기하학적인 음각선으로 된 것도 있고 또 특이한 것은 붉은 산화철로 껍질을 마연하여 표면을 문양 장식한 것도 있다.

 

 

 

비봉리 출토 토기편들. 멧돼지그림(왼쪽 사진)과 융기문, 빗살문, 적색마연 등 각종 장식기법들.

 

 

 

 

그런데 토기 장식을 볼 때마다 머리 속에는 그것을 만든 여인네들의 손이 떠오르는데, 왜 한동네에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토기가 나오는 것인지 의문이다. 친정어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시누이 올케가 사이좋게 의논하면서 새로운 장식을 고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젠더(Gender·성별)고고학이 별로 발전되지 않았다.

 

 

비봉리 토기의 다양한 모습에 그저 당시 여인네들의 생각을 이리저리 짐작할 따름이다. 결국 집안 분위기를 단조롭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를 상상할 수 있고,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작은 그릇들도 상(床)자리 분위기를 즐겁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선사전시관 유감

 

국가가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작은 전시관이나마 만든 것은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빙하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 놓였던 한반도 선주민들의 진보하는 문화를 담은 유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구온난화로 기후이변이 이어지는 이 시대에, 자연을 조화롭게 이용하여 오늘날까지 인류를 번성하게 만든 신석기시대 초기 인간승리의 현장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미래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의 그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고고학여행에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신석기 시대 주방혁명, 먹거리혁명의 흔적을 찾다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1. 11. 27. (1)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입니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섭니다.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전시관 앞.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11년 전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선다.

 

 

발굴의 ‘구루’들에게는 상서로운 꿈자리가 따르는 걸까.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직전 아내가 용꿈을 꾼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본 시리즈 2회)처럼 2005년 발굴 당시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임학종 역시 기묘한 꿈을 꿨다.

 

 

 

○ 우리나라 최고(最古) 나무배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나무배’.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발굴을 위해 십자형으로 둑처럼 쌓은 곳에 돼지꼬리 모양의 끈이 달려 있는 꿈을 꿨어요. 느낌이 심상치 않으니까 뭔가 납작한 판이 나오면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내게 보고해 주시오.”

 

 

2005년 6월 초순 임학종은 김해박물관 조사원들에게 느닷없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는 꿈에서 본 끈을 배를 접안시킬 때 사용하는 밧줄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온갖 물고기 뼈와 조개, 대형 어망추 등이 출토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곳은 수천 년 전 바닷가였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배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나무배가 130척이나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신석기시대 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조사원들은 ‘더위를 드셨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달 24일 오후 3시 유적 북쪽 끝 개흙. 지표로부터 6m, 땅속의 가장 아래 패각층까지 드러난 지점에서 굴착기 기사가 “그만 파자”고 했지만, 임학종은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긁어 보자”고 채근했다. 삽날로 지면을 살짝 긁는 순간, 노란 선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윤곽선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판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흙 속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쑤셔 넣고 쭉 훑어봤는데 한참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이 정도 크기의 나무판이라면 100% 배가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순간 몸에서 전율이 일어납디다.”

 

 

발굴단이 1시간에 걸쳐 개흙에서 파낸 나무배는 길이 310cm, 너비 62cm 크기였다. 발굴단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적 위에 천막을 치고 나무배 전체에 중성지를 덮었다.

 

변조와 부식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무 특성상 현장에서의 보존이 관건이었다. 배에서 조그만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을 박성진 경북대 교수(임학)에게 자문한 결과 수령이 약 200년 된 소나무로 판명이 났다.

 

 

발굴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급파된 목재 보존 전문가 2명과 함께 주변 개흙과 한꺼번에 퍼낸 나무배를 특수 제작된 나무상자 안에 넣고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배는 올해로 12년째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 첫 ‘똥 화석’ 찾아내려 지극정성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도토리 저장 구덩이’(위쪽사진)와 ‘똥 화석’.

 

 

온전한 형태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87개를 무더기로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다. 이전에 발굴된 것들은 수도 적고 형태도 온전치 않아 정확한 기능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학종은 이른바 ‘어깨선’(유적 조성 당시의 지층)을 찾는 데 성공해 저장 구덩이의 본래 크기를 밝힐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채집한 도토리의 떫은맛(타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에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먹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안가에 구덩이를 판 이유다. 따라서 도토리 저장 구덩이의 개별 위치를 파악하면 신석기시대 당시의 해안선을 그릴 수 있다. 비봉리 일대 내륙이 신석기시대 바다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 연구로도 입증됐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규조(硅藻)류가 비봉리 토층에서 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똥 화석도 의미가 작지 않다.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발전한 일본에서는 똥 화석을 선사인의 영양 상태와 당시 식생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임학종은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똥 화석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며 “비봉리 발굴 현장에서 퍼낸 모든 흙을 삼중(三重) 채로 일일이 걸러 똥 화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8>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발굴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 2016. 10. 19. (1)

 

 

 

 

 

2004년부터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44번지 일대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을 발굴 조사하던 국립김해박물관은 이듬해 9월5일 놀라운 성과를 내놓았다. 8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신석기시대 나무 배 1척을 발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부터 3년 정도가 흘러 더 놀라운 사실이 추가로 공개됐다. 당시 조사에서 건져낸 신석기시대 통나무배는 1척이 아니라 2척이라는 것입니다. 

 

 

 

 

 

 

발굴조사 완료 이후 그 유물 정리를 해온 김해박물관(관장 임학종)이 2004년 6월30일 이후 8월4일까지 진행된 시굴조사와 그 해 11월30일에 시작해 이듬해 8월23일에 끝낸 비봉리 유적 발굴성과를 정리한 정식 보고서 '비봉리'(飛鳳里)를 18일 발간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공개한 Ⅱ지구 제2 피트 제5 패층(貝層. 조개무지가 쌓인 층) 아래에서 출토된 목선 외에도 또 1척의 소나무를 가공해 만든 신석기시대 배 1척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2호 배로 명명한 이 배는 1호 배와 마찬가지로 수령이 많은 소나무를 단면 U자형으로 속을 파낸 이른바 통나무형 선박(환목주 <丸木舟 >)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 내부와 외부에는 돌도끼로 가공한 흔적이 발견되며,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초흔(焦痕)이라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현재 남은 규모는 길이 64.0㎝, 너비 22.0㎝, 두께 1.2~1.7㎝. 
재질이나 모양 등의 여러 모로 보아 1호 배와 흡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1호 배는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2㎝, 두께 2.0-5.0㎝로 역시 통나무(소나무) 속을 파내 만들었으며, 원래 길이는 400㎝를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속기가 발견되기 전 선사시대 사람들은 통나무를 가공할 때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군데군데 목재를 불에 태우거나 그을린 다음, 석기로 깎아내고 다시 돌로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에게 1호 배 목재 분석을 의뢰한 결과 수령 200년가량 되는 소나무임이 밝혀졌다. 

임학종 관장은 "이는 현재 한반도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배이며, 100여 척이 넘는 일본 조몬시대 목주(木舟.나무배)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으로서, 8천 년 전으로 추정하는 중국 저장성 콰후차오(跨湖橋) 유적 출토 나무배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기록된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비봉리 유적 발굴 성과로 ▲국내 최초로 신석기시대 저습지 유적을 확인했고 ▲후빙기 어느 시점에는 지금의 창녕과 밀양 지역까지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해수면 변동 자료를 확보했으며 ▲신석기시대 생계방식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물질자료를 얻었다는 점 등을 꼽았다. 

 

비봉리 유적은 배외에도 망태기, 칼 모양 목기, 똥이 화석처럼 굳어 생긴 분석(糞石), 멧돼지로 추정할 수 있는 동물 그림 등 국내 최고(最古), 최초로 기록되는 유물을 다량으로 쏟아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애초 홍수 예방을 위해 양배수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비봉리 유적은 지난해 8월, 국가 사적 486호로 지정돼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번 '비봉리' 발굴보고서는 판에 박힌 보고서 형식에서 탈피해, 발굴 및 유물 정리 과정 등에서 일어난 각종 일화까지 아울러 수록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배 1척 더 있다". 2008. 9. 18. (3)

 

 

 

 

https://youtu.be/b_9m6oJNFgA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11127110022055 한국일보. 2021. 11. 27.

 

 

(2)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기묘한 꿈 덕분인가… 논바닥에서 8000년 전 배가 떠올랐다|동아일보 (donga.com)2016.10.19.

 

 

(3) "8천년전 신석기시대 배 1척 더 있다" (daum.net) 2008. 9. 18. 

 

 

 

 

 

 

<참고자료>

 

 

 

창녕 비봉리 패총(昌寧 飛鳳里 貝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最古 배 출토 창녕 비봉리 사적예고 (daum.net) 2007. 7. 6. 

 

 

 

한국 최초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