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5)
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 인근의 치장에 도착한 직후인 1939년 8월 좌우익 진영의 7개 정당 및 단체가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목표 아래 7당 통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과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민족주의 세력은 1930년대 중반 이래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재건한국독립당,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하여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 3당은 1940년 5월 8일 공동 명의로 3당 해체 선언을 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 좌우가 함께 싸운 임시정부의 역사한겨레 2017. 6. 2..
■ 일제수뇌폭살한 한인애국단원 윤봉길[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6]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선구자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4.12.22 17:38 ▲윤봉길 의사 처형장면 기록 사진 (CG 부분 수정). 일본 육군의 비밀보고서인 만밀대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 대전MBC관련사진보기 25세의 대한 청년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뤼순공원)에서 열린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 일제 고위 장성 등 여럿이 폭사하거나 부상 당했다.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윤봉길의사이다. 이 의거는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고, 특히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

국내는 물론 만주·중국·러시아에서 각종 의열투쟁이 전개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적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은 이봉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23년 박열이 일왕 부자를 폭살시키려는 거사를 일본에서 준비하다가 검거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 일왕마차에 폭탄 던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4. 12. 21. 18:48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35]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한민족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져야 했던 역사의 무게 때문에 항상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봉창 의사이다ⓒ 국가보훈처 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경, ..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한국국민당 창당에 앞장서김삼웅2020. 8. 10. 17:54 [34회] 이시영의 개인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중첩된다 이시영의 개인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중첩된다. 고통의 길이고 고난의 여정이었다. 대륙의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데 이어 상하이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만주괴뢰국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같은 해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중국 대륙은 일본군의 전쟁놀이터로 변해갔다. 비록 철도와 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도시가 차례로 장악되었지만, 침략의 최종 목표인 심장부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군이 왜적 앞에서 벌..

■ 좌우진영 통합한 민족혁명당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19. 2. 19. 16:21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18회] 창당이념을 민족혁명과 민주주의혁명을 동시에 수행하여 '조선혁명을 완성'하는 것으로 설정해 ▲ 난징대학의 예당. 좌파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원봉은 1935년 이 대학(당시는 금릉대학) 강당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장호철 갈수록 강폭해져가는 일제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족운동진영의 통합으로 혁명역량을 강화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해외의 민족진영은 이념ㆍ지역ㆍ인맥ㆍ항일전의 방법론 등으로 산산히 조각나고 흩어져 있었다. 이념적으로 동색(同色)끼리도 갈라지고 대립하였다.각 조직과 단체들의 결성시기와 지역, 인적구성과 긴박하게 돌아가는 대륙..

좌익계는 민족계열에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등 모든 일에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민족진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회합을 결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영을 비롯한 백범ㆍ이동녕ㆍ조완구ㆍ윤기섭ㆍ조소앙ㆍ안창호 등이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한국독립당 창당, 감찰위원장 맡아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0. 8. 5. 16:36 [29회] 한국독립당은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정통세력이 처음으로 만든 임정의 방계 조직이다 ▲ 이시영(1868-1953)ⓒ 독립기념관 정세의 변화는 이시영의 '칩거'..

1929년 9월 중국 지린 성에서 결성된 조선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는 강령 아래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진탁과 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은 1932년 중국 의용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 [단독]일제가 1931년 만주 점령한 이후에도 조선혁명당, 남만주서 항일투쟁 계속동아일보 김상운기자 2016. 1. 20. 03:08 조선총독부 작성 1934년판 한인 독립운동 단체 분포도 발견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34년에 작성한 ‘국외 조선인 불온 단체 분포도’. 중국 각지와 미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단체들의 이름과 소재지, 핵심 구성원 등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9..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 항일 언론부터 무장투쟁까지 이끈 전천후 독립운동가2025. 2. 15. 00:02━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⑭ 우강 양기탁우강(雩岡) 양기탁은 1871년 평양 소천에서 한학자인 부친 양시영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양시욱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

실제 임시정부 요인들 상당수가 이 교회 구성원이었다.첫 담임목사였던 김병조 목사가 임시정부 의정원 평안도 대표 의원과 법제위원회 이사, 외교위원회 상임위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교회에 출석하던 송병조 목사는 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을 지냈다.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와 부의장이던 정인과 목사, 외무차장 현순 목사도 이 교회 출신이었다.이승만 전 대통령과 여운형 김구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도산 안창호가 1919년 5월 상하이 교민들에게 ‘민족개조론’을 외쳤던 곳도 상해한인교회였다. ■ [단독]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점 1919년 상해한인교회 찾았다장창일 기자2019. 4. 11. 17:15 상하이 베이징동루 280호, 100년 동안 밝혀지지 않던 장소 발견되면서 상해한인교회 연구 본격화 전망 ..

· ■ [줌인] "대동단결" 호소… 독립운동 헌신한 임시정부 '큰 어른'대전일보 김재근 선임기자2025. 1. 22. 18:56 ② 임정의 정신적 지주 석오 이동녕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청년기부터 국내는 물론 중국·러시아 오가며 활동임시정부 의장 3회·주석 4회 등 순국 전까지 온힘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 위치한 석오 이동녕의 생가와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임시정부하면 여러 인물이 떠오른다. 김구, 여운형, 조소앙,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회영, 이시영, 조완구, 신채호, 양기탁, 이동휘, 박은식, 홍진 등….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도 임시정부와 닿아 있다.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혔듯이 임정은 대한민국의 뿌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