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1)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제 제2대 주석 김구(1944년 4월 6일 ~ 1947년 3월 3일) 본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1)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제 제2대 주석 김구(1944년 4월 6일 ~ 1947년 3월 3일)
대야발 2025. 5. 21. 17:20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김구의 민족단일국가 염원 끝내 무산.. '미완의 건국' 대한민국
[서울신문]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

●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

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

1948년 4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리는 평양에 가기 위해 백범 일행이 38선을 넘기 전 기념촬영한 모습. 왼쪽부터 비서 선우진, 김구, 아들 김신.서울신문 DB

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

●‘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1)
■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김구를 다시 읽다[기자수첩]
해방 후 '꼬마' 이종찬과 환국했던 김구와 오버랩…메신저 흠집내기
"조국 분열 연장은 민족을 죽음으로 모는 극악극흉"…동족상잔 걱정
일류국가 됐지만 김구의 염원 '분단 극복‧역사 청산'은 미완의 과제

최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앞에서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가 거의 매일같이 열린다. 이 회장이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과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권과 보수층은 이 회장의 예상보다 강한 반발에 한때 당혹했지만 곧 역공에 나섰다. 같은 보수인사로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가 원로가 민감한 '친일' 담론을 꺼내든 것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여권은 역시 노련하고 조직적이었다. 이 회장은 사사로운 감정에 몽니를 부리고 노욕(老慾)에 찬 무책임한 인물로 채색됐다. 국민의힘 시도지사협의회는 그를 "사실무근의 마타도어"를 앞세운 국론분열자로 규정했다.
국민의힘은 "실체 없는 유령과 싸우는 딱한 모습"이라고도 했다. 사리분별 못하는 노인으로 매도한 셈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국정원장 출신인 그에게 색깔론 덧칠 시도까지 나왔다.
메시지를 공격하기 위해 메신저를 흠집 내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 흔한 장면이다. 1948년 우남 이승만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결사반대했던 백범 김구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그는 그해 2월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라며 머잖아 닥칠 동존상잔의 참극을 걱정했다.
그는 단독정부 세력을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며 "그러나 매국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구의 이런 태도는 이승만 세력에 눈엣가시였다. 김구의 호소문도 "(그들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대경소괴(大驚小怪‧매우 놀라워 좀 의하게 여김)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써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모욕만 가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당시 모 유력신문이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 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고 했고, 일찍이 각종 유언비어를 생산하던 그 신문이 또 다시 자신과 관련한 허언(虛言‧거짓말)을 만들어냈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전 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인도의 독립 영웅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을 저격한 암살범마저 용서한 사실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했다.
"내가 사형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김구는 이듬해 6월 암살됐다. 거족적 지지를 받던 몽양 여운형에 이어 김구의 암살로 남북의 통합은 더욱 멀어졌고 결국 1년 뒤 6.25전쟁이 발발했다.
김구는 호소문 말미에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억눌리고 막힘)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깊이 생각)하라"며 끝을 맺었다.
역사는 과연 되풀이되는가? 대한민국은 그간 '일류국가'로 도약했지만 분단 극복과 역사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김구가 말한 '민족 단결'과 '매국매족 일진회' 화두는 여전한 것이다.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김구 앞에 선 '꼬마' 이종찬이 지금의 광복회장이다. 이제는 구순을 앞둔 원로가 "광복회는 결코 이 역사적 퇴행과 훼손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며 행동에 나선 것을 몽니니 노욕이니 폄할 수 있을까?(2)
■ 김구의 정권 인수 시도는 왜 ‘1일 천하’로 끝났나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 주석과 임시정부
실패한 國字 쿠데타

1945년 11월 5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임정) 요인 30여 명은 중국 장제스 정부가 보내준 군용기 편으로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임정은 미 군정과 환국 조건을 합의하지 못해 한동안 발이 묶였다. 11월 19일, 결국 김구 주석은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해 공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서약서’를 대신한 이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중국 주둔 미군은 임정에 수송기를 제공했다. 수송기가 협소하다는 이유에서 환국은 1, 2진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1진 15명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아무런 환영 행사도 없이 미군이 제공한 승용차에 탑승해 ‘금광 재벌’ 최창학의 저택 죽첨장으로 이동했다. 임정에 헌납된 죽첨장은 이후 ‘경교장’이라 불렸다.
12월 1일 조소앙, 김원봉, 신익희 등 20여 명의 환국 2진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발한 수송기는 폭설 탓에 김포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비행하다가 군산 옥구비행장에 착륙했다. 고령의 임정 요인들은 엄동설한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이튿날 대전 유성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는 동아일보가 “15만의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도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파를 초월해 전 민중이 27년 만에 귀국한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물론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인공)’ 어느 쪽도 ‘망명정부’로서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 후원하에 정부 수립을 목표로 결성된 독촉은 임정의 ‘합류’를 요청했고, 인공은 임정에 ‘대등한 조건’으로 통합을 제안했다. 두 제안 모두, 임정 주도로 ‘과도 정권’을 구성하고, ‘국민 대표 대회’를 소집해 ‘정식 정권’을 수립하려 한 임정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는 정치 자금 제공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임정 환국에 앞서 ‘환국 지사 후원회(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에 전달할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임정이 귀국하자 송진우는 1차로 900만원을 전달했다. 하지만 김구는 후원회에 ‘친일 실업인’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 그 자금을 반려하려 했다. 임정과 후원회 연석회의에서 송진우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임정 요인 양반들,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 속에는 애국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장사꾼이나 죄인의 돈도 섞여 있는 법이오. 지금은 임정이 정부 행세를 못 하니까, 세금을 거둘 형편도 못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뜻있는 몇몇 분이 자진해서 성금을 갹출했는데 그걸 가지고 부정이다 뭐다 가릴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결국 임정은 그 자금을 받기로 했다.

환영 대회를 앞두고 한민당과 임정 요인들이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양측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비난했다. 장덕수가 “그렇다면 해공(신익희),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항의하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뿐인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했던 송진우도 그날만큼은 모욕을 참지 않았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공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당신들이 중국에서 궁할 때 무엇을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는 줄 알아?”
환국 후 한 달 가까이 정국에서 소외되었던 임정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가 알려진 12월 28일부터 정당과 사회 단체의 반탁 성명이 줄을 이었다. 29일, 군정청 한국인 직원 3000여 명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 장군의 요리사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하지 장군이 관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31일, 서울 시내 경찰서 10곳 중 8곳의 경찰서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해 “앞으로 모든 경찰관은 김구 주석의 지시를 따라 치안 확보의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國字 제1호’), “일반 국민은 금후 임정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국자 제2호’)이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사실상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는 임정이 반탁을 빙자해 미 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라 격분했다. 미 군정은 임정 요인 전원을 체포해 인천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튿날인 1월 1일 오후 2시, 하지와 김구가 반도호텔 미군사령부에서 만났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배반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김구는 “집무실 카펫 위에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맞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반탁 운동을 계속하되 질서 파괴 행위는 자제한다”는 데 합의하고 끝났다. 그날 밤 8시,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김구의 대국민 선언문을 대독했다.
“나는 질서 정연한 시위 운동에 대하여 십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업을 중지하고 일제히 복업(復業)하기를 바란다.”
김구에 충성을 맹세한 경찰서장 8명은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1월 4일 전원 파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신익희가 CIC(미군방첩대)에 체포돼 이틀 동안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것 외에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임정 요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진압’된 임정의 무모한 정권 인수 시도는 김구와 임정에 대한 미 군정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이후 김구와 임정은 해방 정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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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8) | 2025.05.20 |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8) 1938년~1945년 강제징용 (7) | 2025.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