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0) 1941년~1946년 한국광복군, 1941년 대일선전포고, 1945년 한국광복군 국내진공작전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50) 1941년~1946년 한국광복군, 1941년 대일선전포고, 1945년 한국광복군 국내진공작전

대야발 2025. 5. 21. 16:46

 

 

 

 

 

 

1919년 4월 11일 임정 수립 이후 21년만에 광복군 창군
일제 패망 직전 서울 진공 작전 추진..항복으로 실행은 못 해
미 군정에 정식 정부 인정 못 받고 광복군도 1946년 해체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주장 지지해 달라" 외교전 펼쳐
라디오 방송 선전전, 교포·일본군 탈출 청년들 모아 군사훈련
"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 역사, 가볍게 평가해선 안 돼"

 

 

■ '국군의 뿌리' 광복군 80주년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

CBS노컷뉴스 김형준·김광일 기자2020. 9. 17. 17:21
 
 
 
1940년 8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사진=독립기념관 제공)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이 17일 창군 8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 국군은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공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018년 배포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대한민국과 국군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광복군의 정통성 위에 건설됐다"며 "광복군은 자주독립정신을 대한민국 국군에게 물려준 군맥의 주체이며, 국군 또한 이러한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함으로써 '광복군의 후예'가 되고자 하였다"고 명시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 다닌 임시정부…광복군은 독립운동 세력 통합에 중점

 

 

(왼쪽)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기 전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요인들이 사진을 찍었던 충칭 임시정부 청사는 지난 1995년 복원됐다. 사진은 복원된 청사의 2019년 모습(사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김형준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이보다 한 달 전부터 한반도를 크고 작은 만세운동으로 뜨겁게 달군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하지만 당시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끊임없는 탄압을 피해 항저우·광저우·창사·류저우·치장에 이어 내륙 중심지인 충칭까지 계속 옮겨다녀야 했다. 더욱이 무장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통합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1940년 8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 당시에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병력이 고작 본부 요원 정도를 꾸릴 수 있는 30여명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음해 1월 무정부주의 성향 무장조직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5지대로 흡수되면서 한 번에 100여명의 병력이 보충됐다.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전지공작대 측은 "국군인 광복군에 군사역량을 집중해 이를 발전시켜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류 이유를 밝혔다.

 

 

이어 1942년에는 김원봉이 좌익 성향의 조선의용대 본대 약 50여명을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1938년 창설돼 주로 선전공작과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 80% 이상의 병력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화북으로 이동했고 본대만 충칭에 남은 상황이었다.

 

 

합류 이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가 합류한 광복군 1지대의 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을 겸임했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군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 국내 침투 위한 '독수리 작전' 추진했지만…일제 갑자기 항복하며 무산

 

 

'독수리 작전'을 위한 특수훈련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산시성 시안의 중난산(終南山) 자락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모습(사진=김형준 기자)

 

 

 

작전명 독수리 작전.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한국광복군은 국내 침투를 위한 비밀 훈련을 감행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한반도 곳곳에 잠입시켜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진공 작전을 진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미국 정보기관 CIA(중앙정보부)의 전신인 OSS(전략첩보국)이 참여했다. 기밀해제된 OSS 문건과 백범일지, 현지 증언 등을 근거로 이들은 중국 산시성 시안의 중난산(終南山) 자락에서 훈련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해 2월 이 곳을 직접 찾았다.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절벽과 수풀에 둘러싸여 있어, 작전 보안을 위해 일부러 이런 곳에 훈련장을 지은 것으로 보였다.

 

 

당시 광복군의 훈련을 모형으로 재현한 모습(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들은 미군 교관 20명에게 사격과 교량 폭파, 강 건너는 기술 등 야전훈련과 게릴라 전술훈련 등을 받았다. 이들의 임무는 해군기지·병참선·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으며 시설 파괴와 주요 지점 점령, 나아가 차후에는 일본 진입까지 고려됐다. 독수리 작전 계획서에 따르면 이를 위한 1차 진입 목표는 서울과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 등 한반도 5개 전략지점이었다.

 
 
 

혹독한 훈련 끝에 8월 7일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시안에서 OSS 책임자 도노번 소장을 만나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독수리 작전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중국 산둥성 웨이현에서 촬영한 정진대·OSS 사진(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지난 2015년 8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C-47 수송기 전시회 '70년 동안의 비행' 개막식이 열렸다. 여의도공원에는 정진대원들이 탑승했던 것과 같은 기종의 C-47 수송기가 전시됐다. (사진=황진환 기자)
 
 
 
 

일제의 항복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정진대는 미군의 C-47 수송기를 타고 일본군의 무장 해제, 일본군에 징병된 한국인 인수, 국민자위군 조직 등의 임무를 띤 채 서울로 향했다.

 
 
 
 

정진대는 8월 18일 오전 11시쯤 서울 여의도비행장(현재의 여의도공원)에 착륙했다. 하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며 이들을 포위하고 나서, 결국 정진대는 다음 날 시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충칭의 임시정부 또한 갑작스런 해방을 맞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의정원 회의(현재의 국회)에서는 국내에서 각계 대표로 구성된 과도정권을 수립해 임정의 기능을 여기로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미 군정으로부터 공식 정부의 지위를 승인받지 못한 채 요인들은 그해 11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물론 시민들은 환영했다.

 

 

이후 1946년 1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설립되고, 한국광복군은 그해 6월 해체됐다. 혼란스러웠던 정세 속에서 광복군 인사들은 상당수 국군으로 흡수됐으며, 김원봉처럼 일부는 월북을 택하기도 했다.

 

 

◇외교·선전전, 일본군 탈출한 학병들 모으기도…"독립운동 역사, 가볍게 평가해선 안 돼"

 

 

1943년 7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장제스 위원장을 만나 한반도 독립과 관련해 "힘써 싸우겠다(力爭)"는 약속을 끌어내는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기록화(그림=박학성/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일각에서는 서울 진공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거론하며 국외에서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광복군의 역할을 저평가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광복군이 외교적 노력과 함께 문화와 예술, 선전 등을 통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끝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내걸고 분투했다는 사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943년 7월 26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중국 충칭에서 장제스 국민정부 군사위원장을 만나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장제스로부터 "한국 혁명동지들은 한마음으로 단결해 복국운동(復國運動)을 완성하길 바란다. 중국은 힘써 싸우겠다(力爭)"는 약속을 끌어냈다.

 

 

장제스 위원장은 그해 11월 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해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하지만 식민지 인도 문제를 염려한 영국 측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정을 거친 카이로선언 최종 합의문에는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적혔다. 조건부였지만, 연합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다.

 

 

(왼쪽) 임시정부 라디오방송의 실무를 맡았던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겸 한국광복군 선전과장 故 김의한 선생 (오른쪽)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의 대적방송을 진행했던 故 지복영 지사(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독립기념관 제공)
 
 
 
 

이뿐만 아니라 충칭의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단파라디오를 이용한 선전전도 펼쳤다. 한국독립당 선전부장과 한국광복군 선전과장을 지냈던 故 김의한 선생,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 소속 여군인 故 지복영 지사가 실무를 맡았다.

 
 
 

김 선생의 아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과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 등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단파라디오 방송에는 주로 임시정부 독립투쟁과 일본군 패전 전황 등이 담겼다. 독립군이 전투에서 올린 전과로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주석이 지원을 약속했다는 내용도 나왔다.

 

 

지복영 지사의 아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병에게 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라며 "음악소녀의 꿈을 갖고 있던 어머니가 우리 동포 청년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는 이러한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와 국제 정세 등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1942년 말부터 이를 몰래 들었다는 혐의로 경성방송국(현재의 KBS) 직원 40여명 등 모두 150여명을 검거했다. 광복군의 선전전에 위협을 느낀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내 적지에 직접 들어가 거점을 만들고 모병 활동을 하는 '초모공작'도 이뤄졌다. 지복영 지사도 여기에 자원했는데, 그가 참여한 징모 제6분처 초모공작의 지휘자였던 김학규 장군은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해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광복군에 배치됐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교육훈련을 맡거나 적지에 나가 다시금 지하공작을 벌였다.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 보고에 따르면, 1945년 3월 말까지 초모공작에 의해 모집된 인원은 339명에 달했다. 일제 말기 여러 무장조직들이 합류한데다 초모공작의 성과로 광복군의 규모가 대폭 늘면서 군사 작전을 계획할 정도의 규모가 됐다.

 

 

 

한국광복군동지회장 김영관 지사가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1944년 12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한 한국광복군동지회장 김영관 지사는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중학생 시절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곳으로 탈출해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김 지사는 17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광복군 창군 80주년 기념식 기념사를 통해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힘의 뒷받침이 되었고, 명실상부한 자주적인 군대로서 중국군 산하가 아닌 임시정부의 통수권 하에 있었으며, 특히 우리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이로 선언에서, 우리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줬다"며 "광복군 노병들은 세월 따라 불원 사라지겠지만 광복군은 결코 죽지 않고 조국과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도 "제가 어렸을 땐 독립이 우리 손으로 이룬 게 아니라 남이 선물로 갖다 줬다고 배웠다"면서 "하지만 선물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강제병합 전부터 해방되는 그날까지 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볍게 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이날 서면 축사를 통해 "우리 군은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광복군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6.25 전쟁 당시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더욱 전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1)

 

 

 

■ 광복군 '국내 진공작전' 앞두고 일본 항복..김구의 통탄

2019. 1. 18. 00:07
 
광복군·미군 시안 합동연습
중난산 절벽서 낙하·게릴라훈련
원폭 투하로 작전 펴보지도 못해
당당하게 전승국 될 기회 잃어
이범석·장준하 탄 귀국 수송기
패망 일본의 공격 우려 긴급 회항


임시정부 100년, 임정 루트를 가다 ⑤ <끝>

 

 

 
임시정부가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류저우에서 결성한 ‘한국광복 진선(陣線) 청년공작대’ 소속 대원들이 1939년 4월 4일 충칭으로 떠나면서 사진을 남겼다. 앳된 얼굴의 남녀 대원들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사진 독립기념관]
 
 
 
 

충칭(重慶)에서 밤 기차를 타고 11시간을 달려 산시(陕西)성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탄생한 한국 광복군은 그해 11월 전방 작전에 편리한 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했다. 

 
 

임정의 마지막 희망은 연합군의 합동작전(국내 진공작전)이었다. 그 작전을 추진했던 미국 육군 전략첩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훈련기지가 있던 곳이 시안이다. 정보 수집과 유격대 활동 임무를 수행한 OSS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으로 중국지부는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있었다.

 

 

첫 답사지로 한국광복군 사령부 옛터를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호텔이 들어섰고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다음 답사지는 ‘한국광복군 제2 지대 본부 표지석 기념공원’이었다. 비각에는 ‘한국광복군 시안 제2 지대 본부 옛터. 시안시가 2014년 5월에 이 터에 중국 군인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한국 지사들을 기념해 기념비를 세웠다’고 씌어 있었다. 이곳은 광복군 제2 지대 여군 반장이던 나의 시이모 이월봉(李月峰·1915~77) 애국지사의 활동무대이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각별한 곳이다. “광복군 제2 지대 본부에서 남자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던 시이모님의 사진을 들고 당시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봤다. 광복군에서 여성들도 당당하게 일익을 담당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광복군의 조직을 보면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1888년~1957)이 총사령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1898~1958)이 부사령관,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1900~72)이 참모장(나중에 제2 지대장)을 맡았다.

 

 

 
중국 시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 지대 주둔지 옛 터를 찾은 문영숙 작가. [사진 시안총영사관]
 
 
 

 

지청천 장군은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토론회에서 “우리 청년에게 총을 달라”고 토로했을 만큼 혈기가 넘쳤다.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위로 임관했으나 3·1운동 소식을 듣고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독립군 양성기관인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된 그는 개교식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고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1920년 이후 줄곧 만주를 무대로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지청천은 김구 선생과 연이 닿으면서 1940년 창설된 광복군에서 사령관을 맡는다.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과 제2 지대장을 맡았다. 경성고보(경기고의 전신) 재학 시절인 1915년 여름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을 물색 중이던 몽양 여운형(1886~1947)을 만나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상하이에서 만난 신규식 선생의 주선으로 이범석은 1916년 쿤밍에 있던 윈난 육군 강무당(講武堂)에 진학해 기병과 수석으로 장교가 된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동기생 4명과 함께 상하이 임정을 찾아갔다. 이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중대장으로 합류해 1920년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광복 후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시안의 이범석 제2 지대장 관사 옛터는 신축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이웃에 사는 중국인은 “이전에 흙벽돌로 된 낡은 집이었는데 중·일 전쟁 때 한국 군인이 살았다는 말을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임정루트
 
 
 

 

이튿날 시안 남쪽의 중난산(終南山)을 답사했다. OSS 대원들이 무력을 통한 광복을 위해 추진한 국내 진공작전(독수리 작전, Eagle Project)의 낙하 훈련 장소를 찾는 게 목적이었다. 독수리 작전은 광복군이 1945년 2월 미국 워싱턴 OSS의 검토를 거쳐 미군의 중국 전구(戰區) 사령부에 보고됐다. 미군 클라이드 사전트(1909~81) 소령이 책임자로서 1기 훈련대원 50명에게 3개월간 게릴라전법·낙하·도강술 등 특수훈련을 시켰다.

 

 
 

당시 미국 문서에는 광복군 제2 지대가 주둔하고 있던 작은 절에서 400m 떨어진 중난산 깊숙한 곳이라고 나온다. 그 작은 절은 미퉈구쓰(弥陀古寺)였다. 등산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니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아찔하게 눈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려던 국내 진공작전은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잇따라 투하되면서 무산됐다. 일본은 8월 10일 스위스에 있던 국제연맹(유엔의 전신) 본부에 포츠담 선언 수락의사를 전달했다. 국제연맹은 연합국 측에 이 사실을 당일 바로 알렸다. 이날 저녁 중국군 측으로부터 일본의 항복 사실을 전해들은 김구와 광복군은 기뻐하기는커녕 크게 낙담했다. 당시의 복잡한 심경은 김구 주석의 회고에서 확인된다.

 

 

김구는 “일본의 항복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고 통탄했다. 당당한 전승국이 되기 위해 이제나저제나 출동명령만 손꼽아 기다리던 광복군의 심정도 김구 주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광복은 임정과 광복군의 무장투쟁이 밑바탕이 됐지만, 미군의 원자폭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국내 정진대(挺進隊) 선발대는 일본 항복 예비접수대 역할을 하려고 국내로 가기 위해 8월 15일 오후 4시에 시안 비행장으로 향했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항복 선언 불과 4시간 뒤였다. 8월 16일 오전 4시에야 이륙한 C-47 수송기에는 이범석 장군, 김준엽(金俊燁·1920~2011), 장준하(張俊河·1918~75), 노능서(魯能瑞·1923~2014) 등 4명만 탑승했다. 김준엽은 1944년 학도병으로 중국 주둔 일본군에 투입됐으나 탈영했다. 학도병 장준하도 징집 6개월 만에 쉬저우에서 탈영해 두 사람은 수천 리를 걸어 충칭 임정을 찾아가 광복군이 됐다.

 

 

그런데 광복군 4명이 탄 수송기가 산둥(山東)반도 상공을 지날 때 쿤밍으로부터 갑자기 “한국 진입 중지”라는 무전을 받고 시안으로 회항했다. 패망한 일본의 기습 공격을 우려한 조치였으나 광복군은 또 한 번 분루를 삼켜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광복군 4명을 포함해 22명이 탄 C-46 수송기는 8월 18일 오후 3시에 여의도 땅을 밟았다. 나라를 잃은 지 35년 만의 귀환이었다.

 

 

 
문영숙 작가.
 
 
 


임정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에서 시작해 중국 상하이~항저우~충칭을 거쳐 시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임정 100주년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임정은 27년간 오로지 조국 광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특히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얻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 결의를 끌어낸 것도 큰 성과였다. 그러나 파벌 갈등과 내부 불화는 지금도 거울에 비춰 봐야 할 큰 오점이었다.

 
 
 

열강이 몰려오던 구한말에 왜 우리는 나라를 잃어야 했는지 임정 100주년을 자축하기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임정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의 헌신 덕분에 나라를 되찾았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남북이 분단됐고 여전히 4강에 둘러싸여 있다. 남남 간에도 이념·지역·세대·남녀 갈등이 겹쳐서 통합은커녕 분열하고 있다.

 

 

대장정을 마무리하면서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도 줄곧 입가에 맴돌았다.(2)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우파 독립단체 통합 나선 김구 피격.. 만주독립군과 광복군 창설

서울신문 류지영기자 2019. 2. 7. 03:36
 
의열단원 유자명, 南·北·中 3국서 유공자 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서울신문]3부 고난의 행군: 이동 시기 ③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9월 17일 중국 쓰촨성 충칭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태극기와 함께 중화민국 국기가 내걸려 있다. 한국광복군 설립에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됐음을 알 수 있다.서울신문 DB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던 한국국민당은 항일투쟁에 나서고자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우파 연합 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12월 임정의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도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과 좌파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두 세력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하에 정규군을 편성하는데, 바로 한국광복군(임정파)과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반임정파)다.

 

 

중국 후난성 성도인 창사의 조선혁명당 옛터. 1938년 5월 6일 이곳에서 우파 진영의 정당 통합을 논의하던 김구가 첫 번째 권총 저격을 받는 ‘난무팅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진열관으로 운영되고 있다.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창사의 주거지역인 마원령.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임정 요인 가족들이 살던 곳이다. 김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은 후난성 정부의 도움으로 이곳과 난무팅 등에서 거주했다.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중·일 전쟁이 일어난 지 5개월째인 1937년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이 일본에 함락됐다. 30만명의 중국인이 처참하게 살해된 ‘난징 대학살’도 일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자신들 혼자서 일본군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중국 공산당과 2차 국공합작(1937~1945)을 체결했다. 국민당 주석 장제스(1887~1975)는 그간의 태도를 바꿔 한인들도 항일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을 피해 다시 한 번 피난길에 나섰다. 1937년 11월 말 난징을 출발해 후난성의 성도(省都) 창사에 도착했다. 김구(1876~1949)는 백범일지에 이곳에 온 이유를 “곡식값이 매우 싼 곳이고 장차 홍콩을 통해 해외와 통신을 이어 갈 계획 때문”이라고 적었다. 김구와 친분이 있던 국민당 핵심간부 장즈중(1890~1969)이 후난성 주석으로 온 것도 큰 힘이 됐다. ‘장천’, ‘장전추’ 등의 가명을 쓰던 김구는 이때부터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본명으로 활동했다.

 

 

 

 

 

●임정, 日 패망 확신… “독립전쟁 성공 시기 왔다”

 

임정은 중·일 전쟁이 한국 독립에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봤다. 그간 항일 투쟁에 미온적이던 국민당 정부가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어 일본의 패망이 앞당겨질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당시 임정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여러 문건에 이런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중·일 전쟁의 시작은 우리의 독립 전쟁이 성공할 시기에 도착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적(일본)은 중국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러시아의 내부 모순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망령되게 단정했기 때문에 중국대륙을 침략한 것이다.”(1937년 12월)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거 직후 서울로 압송된 안창호(1878~1938)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유언처럼 일본의 미래를 예견했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중·일 전쟁)을 시작했기에 반드시 이 전쟁으로 패망한다.”

창사 종합병원인 샹야의원(현 중난대 의과대학 부속병원). 난무팅 사건 당시 가슴에 총격을 입은 김구는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소생했다.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독립운동세력 갈등 극심… 김구 저격 사건 발생

 

김구는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우파 진영부터 힘을 모았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속했던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은 1938년 5월 6일 조선혁명당 당사인 난무팅에 모였다. 만주에서 창당한 조선혁명당에서 이청천(1888~1957)과 유동열(1879~1950), 과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한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1887~1958)과 홍면희(1877~1946), 한국국민당에서 김구와 이동녕(1869~1940)이 각각 참석했다. 한참 통합 논의를 벌이던 때였다.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생몰연대 미상)이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했다. 이것이 김구가 첫 번째 저격을 받은 `난무팅(남목청) 사건’이다.

 

 

1938년 창사 샹야의원에서 총상에서 회복된 김구(오른쪽)가 의료진과 함께 찍은 사진. 그의 가슴 가운데에 총탄 자국(원)이 선명하다.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현장에서 조선혁명당 간부 현익철(1890 ~1938)이 숨지고 유동열과 이청천이 총상을 입었다. 김구는 가슴 한가운데 총탄을 맞고 곧바로 샹야의원(현 중난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 중국인 의사는 그가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응급처치를 포기했다. 백범의 장남 김인(1917~1945)에게 사망 통지까지 보냈다. 그런데 총격 발생 4시간이 지나도 숨이 붙어 있자 그때부터 치료를 재개해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김구는 이 사건으로 수전증이 생겨 마치 흔들리는 곳에서 글씨를 쓴 듯한 필체를 얻게 됐는데, 이를 ‘총알체’라고도 부른다.

 

 

김구가 1949년 지인에게 증정한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총상 후유증으로 나타난 수전증이 글씨체에 반영돼 있다. 김구는 이 글씨체를 농담 삼아 ‘총알체’라고 불렀다.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이운한, 첫 발 김구 쏴… 일제 밀정 증거는 없어

 

이운한은 첫 발을 김구에게 쐈다. 애초부터 그를 타깃으로 범행에 나선 것 같다. 중국에 의존하던 한국국민당이 우파 통합을 주도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운한은 중국 감옥에 있다가 탈옥한 뒤 종적을 감췄다. 일각에서는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었나 의심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가 밀정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난무팅 사건은 서로 힘을 모아야 할 한인 독립운동세력 간 갈등이 극에 달해 자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창설… 中과 항일 전쟁

 

이 시기 임정 안팎에서는 “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공산당이 팔로군을 갖춘 것처럼 조선 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졌다. 장제스도 1938년 말부터 독립운동계 대표 격인 김구와 김원봉(1898~1958), 유자명(1894~1985)을 따로 불러 단결을 촉구했다. 한인 세력의 분열을 막고 이들을 무장해 중국의 항일 전쟁 체계에 편입하기 위해서다.

 

 

사회주의 계열이 먼저 나섰다. 일본인 반제국주의 혁명가 아오야마 가즈오(1907~1997)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용대 편성 아이디어를 냈다.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해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이 지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이를 받아들여 1938년 10월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다.

 

 

장쑤성 난징의 밍양가에 자리잡은 후자화원. 1935년 7월 김원봉 등이 결성한 좌파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난징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우파 진영도 군대를 조직했다. 1939년 1월 한국독립당이 세운 당군(黨軍)을 모태로 이청천과 이범석(1900~1972) 등 만주 독립군과 연합해 1940년 9월 쓰촨성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세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정규군 부대로 국군의 모태로 평가받는다. 총사령관은 이청천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작성된 임정 문서에는 광복군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군 대원 출신인 독립운동가 김득명(1923~2009)은 “이것도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타내고자 상당히 부풀려진 수”라고 증언했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600명에 가깝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가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보훈처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올해부터 가짜 독립유공자 색출을 위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창사의 후난농업대학 안에 자리잡은 독립운동가 유자명의 옛집. 현재 그의 제자들이 사비를 모아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창사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中 남부서 포도 年 4차례 수확… 세계적 산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후난성 창사의 후난농업대학. 넓은 캠퍼스를 걸어 한참을 들어가니 제2, 제3 강의동 사이 잔디밭에 부드러운 인상의 학자 흉상 하나가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북한과 중국 세 나라에서 모두 유공자가 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유자명이다. 캠퍼스 안 그의 옛집 터에는 제자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을 짓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유자명은 세계적인 농학자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라며 “비유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우장춘(1898~1959)에 해당하는 국보급 과학자”라고 소개했다.

 

 

남북한과 중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 유자명.

 

 

충북 충주 출신인 그는 수원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현 충주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스물다섯 살이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어릴 때 이름은 흥갑, 학생 때는 흥식이었지만 한성임시정부 설립자인 홍면희( 1877~1946)가 “독립운동을 하려면 새 이름이 필요하다”며 자명(子明)이라고 지어 주었다.

 

 

무장 투쟁에 뜻을 품고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 가입해 신채호(1880~1936) 등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노선에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나석주(1892~1926)가 1926년 12월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겠다고 하자 톈진까지 찾아가 그에게 직접 돈과 폭탄, 권총을 건넸다.

 

 

유자명은 탁월한 어학 능력과 국제 감각으로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재로 손꼽혔다. 1930년대에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을,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학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교육부 등) 차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해방 뒤 한국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치자 후난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벼의 기원이 중국 남서부 윈구이 고원 일대라는 것을 밝혀냈다. 세계 농학계도 이를 정설로 인정하는 추세다. 중국 남부는 기후가 습하고 병충해도 많아 포도 재배에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가 수십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신품종을 개발했다. 현재 중국 남부는 해마다 포도를 네 차례까지 수확할 수 있는 세계적 산지로 탈바꿈했다. 그가 개량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 지금도 중국에서 생산된다.(3)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서울신문 류지영기자 2019. 2. 19. 03:36
 
조소앙, 건국강령 지어 임정 헌법 개정.. 원폭·蘇참전에 日 항복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

 

 

1943년 6월 한국광복군이 한반도 진공 작전 등을 펼치기 위해 훈련을 받는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

 

 

중국 충칭 위중구 롄화츠 38호. 우리 학계에서 ‘연화지 청사’로 불리는 곳이다. 1945년 1월부터 김구 주석을 비롯해 임정 요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던 11월까지 사용했다. 2001년 독립기념관이 건물을 수리했고 충칭시가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충칭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

 

 

충칭 위중구 쩌우룽로 37호(왼쪽 건물). 옥상에 지어진 사옥이 대한광복군 총사령부를 복원한 것이다. 현지 건설업자가 정확한 고증 없이 임의로 설계해 지었다.충칭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충칭 바난구 화시촌에 자리잡은 한인 거주 옛터 기념비. ‘토교 한인촌’으로 알려져 있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 온 뒤 임정 요인과 그 가족이 살던 곳이다. 당시 가옥들은 모두 헐려 자취를 찾을 수 없다.충칭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

 

 

1945년 시안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영문 약칭인 ‘KIA’(Korea Independence Army·한국광복군)를 형상화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플래시몹쯤 될 것 같다. 서울신문 DB

 

 

 

●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

 

 

1945년 8월 중국 시안 광복군 제2지대에서 김구(왼쪽) 임정 주석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OSS 국장이 한반도 진공 작전 협의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 도노번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아버지’로 불린다. 백범기념관 제공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

 

 

1945년 미국 OSS 특수훈련을 받고 한반도 침투작전을 준비하던 한국광복군 대원들. 왼쪽부터 노능서(1923~2014), 김준엽, 장준하. 서울신문 DB

 

 

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

 

 

삼균주의 제창자 조소앙

 

 

●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

 

 

충칭의 임정 사적지 구이위안. 일본이 패망한 뒤인 1945년 11월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 수뇌부가 한국으로 떠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해 환송연을 열어 준 곳이다. 충칭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4)

 

 

 

 

(3) https://v.daum.net/v/20190207033610885

 

 

(4) https://v.daum.net/v/20190219033608553

 

 

대한제국군서 한국광복군까지, 무장투쟁 삶 바친 군인 (daum.net)

 

 

[단독] 80년전 조부처럼..백범 장손이 대일선전성명서 읽는다 (daum.net)

 

 

너무나 아쉬운 한국광복군 국내 진입 불성사 (daum.net)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