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본문

■ 나치박물관에서 만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44명의 눈빛
쾰른/글·사진 장예지 특파원 2025. 3. 10. 16:30
쾰른 나치기록박물관 7일 사진전 시작

김순옥, 박두리, 문필기, 길원옥, 강덕경, 이용수, 이옥선, 김순덕, 김군자, 심달연, 박옥련, 송신도, 김용숙(북한), 곽금례(북한), 이상옥(북한), 박용심(북한).
독일 쾰른의 나치기록박물관에서 지난 7일부터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제3세계’에 소개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44명의 명단 중 조선 출신 피해자들의 이름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은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 기획전은 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맞아 쾰른에서 지난 7일부터 시작돼 오는 6월1일까지 열린다. 2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전쟁’이라는 유럽의 역사적 통념을 깨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참상을 보여준다. 이 전쟁은 서유럽이 아닌 제3세계에서 더 많은 군인이 참전했지만, 기억의 무게추는 유럽을 비롯한 서방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이 기획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가 핵심적으로 다뤄진다.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박물관 앞엔 ‘평화의 소녀상’도 설치됐다. 과거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본부가 있었던 박물관 건물은 지금은 한 해 9만명가량이 방문하는 역사적 장소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날인 지난 6일 나치기록박물관에서 한겨레와 만난 전시기획자 카를 뢰셀은 “소녀상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끌려간 여성의 역사를 넘어선 이야기를 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폭력을 당한 여성들, 그리고 오늘의 전쟁을 말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역사 연구자인 뢰셀은 독립 연구단체에서 40여년간 식민지 국가의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다니며 이야기를 들었고, 희생자 인터뷰를 모았다”며 “자신은 돈도, 배상도 원하지 않고, 일본이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인정하는 것만 바랄 뿐이라고 말한 한국인 희생자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뢰셀이 말한 인물은 2013년 1월, 91살 일기로 별세한 황금주 할머니다. 전시관에선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더빙된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다. “내 이름은 황금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육성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서 증언한 목소리다. 또한 19살에 일본 군수공장에 취업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 생활을 했던 황 할머니를 “1990년대 일본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일본의 전쟁 범죄’라는 제목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묻는다. 1990년 창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과 2000년 국제법정을 소개하며 “일본 정부는 책임을 지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문구도 포함됐다. 일본 정부는 2015년 12월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이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물관은 “피해자들은 (합의 체결에) 참여하지 않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납치’ 되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다시 선언했다”며 “일본 정부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에 합의는 실패했다. 2025년까지도 변한 것은 없다”고 명시했다.

전시에선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집과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카시 원자폭탄 투하로 피폭자가 된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다뤄졌다. “일본은 13살 또는 14살 정도의 학생 15만5000명을 징집했고, 이들은 일본군을 위해 무기와 장비를 운반하고 배와 기차에 짐을 실었다”며 “1만명의 조선인 소년병이 전선에 보내졌다”는 설명도 실렸다.
히로시마에 건립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사진과 함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 5만명에 대한 소개도 담겼다. 한반도를 넘어 1930~40년대 중일 전쟁의 역사와 1937년 난징대학살,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침략도 두루 다뤘다.

뢰셀은 소녀상을 비롯한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가 민감하게 대응해온 것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시 기간 한시적으로 이곳에 소녀상을 세우기로 하는 과정도, 베를린 등 다른 지역 소녀상 전시가 그러했듯 순탄하지 않았다. 헨리에테 레커 쾰른 시장이 올해 초 소녀상을 박물관 앞 공공 부지가 아닌 박물관 인근 민간 부지에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뢰셀은 “우리는 이미 2년 전부터 기획 전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레커 시장이 교토에 다녀온 뒤, 쾰른시는 시 당국이 시유지 등 공공 부지에 기념물을 설치하는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시 정부 산하 분과위원회인 정치위원회의 검토와 판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뢰셀을 비롯한 전시기획자들은 “우리는 싸워야 했다”며 쾰른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쾰른시장과 시 의회, 정당들에 공개편지를 보내고, 언론에 적극 알리는 등 레커 시장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정치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지금의 자리에 소녀상 설치를 찬성하면서 레커 시장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는 게 뢰셀의 설명이다.


그는 “시 당국은 공식적으론 일본이 영향력을 미치려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해 쾰른시와 뒤셀도르프 일본총영사가 만났을 때, 총영사는 쾰른이 속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누구도 소녀상을 세우려는 아이디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는 다른 여러 소식통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쾰른시와 갈등한 끝에 소녀상을 세울 수 있게 된 뢰셀은 전시관 한쪽에 이 문제를 다룬 언론 보도도 함께 전시했다.(1)
■ 중국 전문가 “중국 내 위안소에 한국인 위안부 최대 10만여 명” [3.1절]

중국 남부 난징시에 있는 '위안부 기념관' 중앙에는 '임신한 위안부 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인데요. 바로 조선 출신 위안부 '박용심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 일할 때의 사진을 본뜬 겁니다.
중국 기념관의 상징이 될 정도로 중국에서는 '한국인 위안부'가 익숙한 존재였습니다.
일본이 아시아 침략에 열을 올리던 1930~40년대, 중국 내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간 조선 출신 여성들은 많게는 1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중국에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소 유적과 기록은 중국만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의 아픈 역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3.1절을 앞두고 KBS 취재진이 중국 위안부 연구의 대가로 불리는 상하이사범대 쑤즈량 교수를 직접 만나 중국 내 위안부 역사 연구의 현재와 과제를 들어봤습니다.

쑤 교수가 위안부 연구에 투신한 계기는 남다릅니다.
1992년 3월, 36살이던 쑤즈량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학자가 "일본군의 첫 번째 위안소가 상하이에 있던 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했는데, 상하이 출신으로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쑤 교수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길로 위안부 연구를 시작한 게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고 말합니다.
쑤 교수가 1992년 발표한 <위안부 연구>는 중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연구한 연구서로 기록돼 있습니다.
아래는 쑤 교수와의 일문일답입니다.
Q. 교수님께서는 중국 전역의 위안소를 직접 찾아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21년 발표하신 내용을 보면 중국 내 위안소가 1,000여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가로 연구가 진행된 것이 있나요?
A. 대규모의 팀이 중국 각지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중국이 세운 위안소에 대한 우리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2,000개, 일본 위안소가 2,000개(기존 연구보다 2배 이상 늘어난 숫자) 이상이었다는 겁니다.
Q. 방금 말씀하셨듯이, 중국 내에서 2,000여 곳이 발견되었군요. 더 많았을 수도 있겠는데, 중국에 이렇게 많은 위안소가 설치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지요?
A. 우리 중국 학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난징의 경우 1938년 일본군이 점령 과정에서 부녀자들을 무차별 성폭행합니다. 이로인해 성병이 퍼지자 위안소 70여 곳을 순차적으로 설치했습니다.
일본이 자신의 침략 전쟁을 정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일본군에 안전한 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요? 수십만 여성의 청춘과 행복, 심지어 생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일본군은 1932년부터 중국에서 위안소 제도를 점차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1월 상하이에 일본군 역사상 첫 번째 위안소가 생겼고,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다이이치 살롱이었습니다.
이후 오카무라 야스지(1932년 일본군 상하이 부참모장, 이후 중국 파견군 총사령관 역임)는 위안부단을 조직해 상하이로 데려온 뒤 일본 육군에 제공했습니다. 중국 동북 지역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고, 그 후 한반도에도 나타났습니다.
오카무라 야스지가 위안부 제도를 더 확대한 건 1937년,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면서 일본군의 수가 점점 많아졌을 때 즈음입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그는 위안부 제도를 동남아시아, 심지어 일본 본토까지 확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늘렸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중국 내 위안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500명이었습니다. 매우 대규모입니다.
저희가 추산해 봤을 때 중국의 위안부는 2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Q. 1930년 대 이른 시기부터 한국인 위안부들이 중국에 왔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를 통해 알고 좀 놀랐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된 1940년대나 한국인 위안부들이 끌려왔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당시 한국인 위안부들은 어떤 경로로 끌려왔고, 징집 규모는 어느 정도 됐나요?
A. 한국인 위안부들이 중국에 끌려온 사례 가운데 한 경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의 헌병, 경찰 시스템에 의존하여 강제 징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자며 모집한 경우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1937년 이전에는 위안부 징집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는 20~30개의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1933년 이후 일본 관동군이 장악한 곳에서는 위안소가 계속 발전했습니다. 대부분 위안소에서 한국인 위안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한 일본인 장교로, 전쟁이 끝난 뒤 중국 감옥에 갇혔었는데요. 1933년 구치소에서 동북 지방에 징집된 많은 한국인 위안부를 성폭행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군이 상하이에 처음으로 설치한 위안소 '다이이치 살롱'의 경우 1932년 초 한국인과 일본인 위안부를 데려와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판단하기로는 한국인 위안부가 끌려온 첫 사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Q. 중국에 있었던 한국인 위안부는 대략 몇 분 정도 된다고 봐야 하나요?
A. 통계를 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부와 군대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숨기려 문서를 대량으로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부분만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조만간 진화(金华) 징역에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와 관련된 내용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그 진화 지역의 위안부 가운데 한국인의 비중이 60%를 차지했는데 굉장히 높은 비중입니다. 전쟁 중 한국인 위안부의 수가 14만 명에서 20만 명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Q. 최근 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에서 일본군이 한국인 위안부를 신체검사한 기록지가 발견됐는데요.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직접 운용한 증거로 봐야 하나요?
A.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30년 동안 많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뒤 위안부에 대한 신체검사를 실시했고, 일부는 일본군 헌병이 직접 등록했습니다. 상하이, 난징, 우한, 그리고 동북지역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본의 많은 우익들은 일본군 위안소와 위안부가 일본군과 관련이 없고 인신매매범이나 기생집 운영자들이 설립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이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 당국이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성노예 제도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Q. 최근 새로 발굴된 자료 가운데 눈에 띄는 위안소가 있나요?
A. 새로 발굴된 일본군 문서에 따르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위안소가 '헝다오허즈'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일본 관동군이 헝다오허즈에 설립한 건데요. 동북 지역에 헝다오허즈라는 지명이 여러 곳 있습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랴오닝성 톄링시 헝다오허즈쩐으로 보이는데, 완전 새로운 발견입니다. 조만간 현장 조사를 갈 예정입니다.
Q. 일본군 위안부는 한국과 중국 양국이 공통으로 겪은 역사입니다. 한중 양국이 더 협력해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A. 네 앞으로 위안부 연구는 더 정밀해져야 합니다. 한국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고 자세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위안부 이영란 할머니의 경우 먼저 중국 난징으로 끌려온 뒤 다시 우한으로 갔고, 우한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북한에서 끌려온 '임신한 위안부'입니다. 조선에서 난징으로 끌려온 뒤 상하이를 거쳐 싱가포르와 미얀마, 윈난까지 끌려다녔습니다. 1944년 9월 해방된 그 위안부(박용심 할머니)는 임신 9개월 차에 유산을 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한중 양국에 걸쳐있는 위안부 역사에 대해 정교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Q. 교수님은 왜 30년 넘게 위안부 연구를 지속하고 계시는지요?
A. 왜 계속 연구하냐고요? 위안부 제도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권 침해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지금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피해 할머니들은 여전히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피해를 이해하고 위안부 역사를 명확하게 기록할 책임이 있습니다.

상하이 사범대 안뜰에는 우리 위안부 소녀상과 중국 위안부 소녀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10대의 앳된 모습 그대로 멈춰 서 있는 위안부들의 시간. 쑤즈량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의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돼야 합니다!”
*쑤즈량 교수의 인터뷰는 3월 1일 저녁 9시 40분, KBS1TV<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일본군이 위안부 직접 관리"…중국 내 위안소 추가 발견 편에서 방송됩니다.(2)
■“일본 군이 직접 관리”…중국 내 위안소 추가 발견
KBS 김효신기자 2025. 3. 1. 21:29
촬영기자:안용습/영상편집:이웅/자료조사:권애림
[앵커]
일제 강점기 한국인 위안부 수는 최소 1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일본 정부는 그 책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는 차고 넘친단 지적입니다.
최근에 또 나왔습니다.
일본군이 작성한 한국인 위안부의 신체검사 기록지가 발견됐습니다.
문건에 나와있는 위안소 위치를 김효신 특파원이 찾아가봤습니다.
[리포트]
1930년대 말, 일본군은 난징에서 대학살과 무차별 성폭행을 저지른 뒤, 위안소 70여 곳을 설치했습니다.
96살 펑주잉 할머니의 소녀 시절 기억은 위안소에서 멈췄습니다.
[펑주잉/1945~50년 위안부 생활 : "내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일본군이 끌고 가려고) 내 발가락 2개를 부러뜨렸어요. 제 언니도 배를 한 번 (흉기에) 찔렸습니다."]
최근 중국 난징대학살기념관이 일본군이 위안부를 직접 관리한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위안부 신체검사 기록지'입니다.
김, 박, 남 씨 등이 모두 9명, 조선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 '선(鮮)'이 표시돼 있습니다.
개인별로 병명과 진료 목록도 기록돼 있습니다.
[쑤즈량/중국 위안부연구소장 : "당시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군대가 위안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안소 위치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중국 헝다오허즈, 라는 곳입니다.
이곳 헝다오허즈 쩐이 위치한 톄링시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일본군이 일찌감치 동북 침략을 위한 전략적 요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수소문 끝에 과거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가 존재했다는 증언을 마을 주민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헝다오허즈 주민 : "이 사람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람 들어오고… 일본(군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여자들을 참말로…"]
하지만 세월이 흘러 위안소 건물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과거 중국 내 위안부 중 절반 정도는 한국인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한중 양국 공동 보존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헝다오허즈에서 KBS 뉴스 김효신입니다.(3)
<자료출처>
(1) 나치박물관에서 만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44명의 눈빛 (daum.net)
(2) 중국 전문가 “중국 내 위안소에 한국인 위안부 최대 10만여 명” [3.1절] (daum.net)
(3) “일본 군이 직접 관리”…중국 내 위안소 추가 발견 (daum.net)
<참고자료>
도쿄서 한일 청년 100명이 추모... 한국은 이 여성을 기억하고 있나 [김종성의 '히, 스토리']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