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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7) 1938년 ~1945년 강제징병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7) 1938년 ~1945년 강제징병

대야발 2025. 5. 20. 15:41

 

 

 

 

 

 

 

일제는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1만 7,664명,

해군특별지원병 2만 1,316명을 동원했으며,

1938~1945년까지 육·해군 군속으로 각각 7만 7,652명과 7만 7,915명을 별도로 동원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여성위안부·징용 등으로 총 731만 6,234명을 강제 동원했으며,

이 중 612만 6,163명은 일본내 탄광, 광산촌 등과 동남아 각지와 남양군도 등지에 끌려갔다.

 

 

1944년 1월 19일~20일에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가운데 한국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1,529명), 일본에 남아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1,524명), 취업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4,358명이 전국 각지에서 강제 입대하였다.

 

 

 

일본군 지원자의 두부류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5. 4. 27. 20:09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9] 일본 신학생 생활 1년 반 만에 학업이 중단되었다.

 

 

1942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43년 10월 26일 이른바 <조선인학도 육군특별 지원병제도>를 공포하였다. 학도지원병은 표면으로는 자의에 의한 지원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강제동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 전쟁 말기 해군지원병 모병 포스터 1945년 하반기에 게시될 예정이었던 모병 포스터. 욱일기가 전면에 부각되어있다. 소년수병, 비행예과연습생 등은 13세부터 지원이 가능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선전 포스터들은 전후 소각 처리되었으며, 일본군의 상징물들은 한동안 금기시되었다.
ⓒ 박광홍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점점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자 조선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학도병 제도를 만들고, 해당 학교와 가족에게 '지원'을 독려하였다. 또한 총독부 경무국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김성수·장덕수·최남선·이광수 등을 앞세워 기관지 <매일신보>에 지원하는 글을 쓰게 하거나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인 학병 해당자 중에는 이에 저항하여 집단행동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경찰관서를 파괴하는 경우도 벌어졌다. 또한 만주나 깊은 산속, 탄광으로 들어가 학병을 거부한 사례도 없지 않았다.

 

 

1944년 1월 19일~20일에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가운데 한국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중인 일본 유학생 1,431명(적격자1,529명), 일본에 남아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1,524명), 취업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4,358명이 전국 각지에서 강제 입대하였다.

 

 

 

일제는 이에 앞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1만 7,664명,

해군특별지원병 2만 1,316명을 동원했으며,

1938~1945년까지 육·해군 군속으로 각각 7만 7,652명과 7만 7,915명을 별도로 동원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여성위안부·징용 등으로 총 731만 6,234명을 강제 동원했으며,

이 중 612만 6,163명은 일본내 탄광, 광산촌 등과 동남아 각지와 남양군도 등지에 끌려갔다.

 

 

일제 말기 조선의 청장년들은 '살기 위해 죽을 곳'으로 끌려갔다. 학병이나 징용·징병·여성위안부 등을 거부했다가는 남은 가족이 심하게 시달려야 했고, 공직 추방이나 배급이 중단되고 심지어 기차나 우편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극소수 기회주의자들의 일본군 지원자 이외 다수의 청장년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나 전쟁물자 조달의 소모품으로 끌려갈 때, 장준하는 가족을 지키고 독립군이 되고자 지원서에 서명하였다. 조선인 학병들은 훈련이 끝나면 십중팔구 중국으로 배치되니까 탈출해서 독립군이 되겠다는 것이다.

 

지원자 중에는 진짜 일본군이 되고자 하는 부류가 있었다. 혈서를 쓰고 만군에 지원한 박정희와 백선엽 같은 인물이다.

 

장준하는 짐을 정리하여 1943년 11월 하순에 귀국하였다. 이로서 일본 신학생 생활 1년 반 만에 학업이 중단되었다.(1)

 

 

 

■ 강제징병·징용 피해자들 생생한 육성 증언 담은 구술집 발간

더팩트 박호재기자 2021. 2. 25. 14:45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광주전남 31명 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담은 구술집을 펴냈다. 사진은 구술집 표지./시민모임 제공
 
 
 


도쿄에서 남양군도까지…광주전남 강제동원 31명이 겪은 가슴 아픈 사연 첫 공개

 

광주·전남지역에서 국외로 강제징병·징용된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구술집이 발간됐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지난 23일 강제동원 기록구술집 ‘배고픔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얗게 핀 가시나무 꽃 핥아먹었지’를 펴냈다.

 

 

구술집은 1942년부터 1945년 사이 군인(8명), 군무원(8명), 노무자(9명), 여자근로정신대(6명)로 강제동원 된 31명의 피해자가 겪었던 역사적 아픔과 어긋나 버린 삶의 행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아카시아 꽃이 3월 달이면 하얗게 피어요. 가서 고놈 핥아먹느라고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일 안 나가고 고놈 핥아먹느라고. 아, 고놈이라도 핥아 먹은께 살 것 같드란 말이요."(권창열)

 

 

구술집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파악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구술집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 중 군인은 8명이며 대부분 1924년레 태어난 ‘묻지마 갑자생’이라는 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1944년 징병제 시행 첫해 만 20세로 징병 영장을 받고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전투현장으로 투입됐다.

 

 

군무원으로 동원된 8명은 취업 또는 기능공 양성 교육, 군사훈련을 받다가 연행됐으며, 일본 도쿄, 가고시마, 오키나와, 나고야 등 군사시설은 물론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다.

노무자로 동원된 9명은 탄광(3명), 군수회사(4명), 농사보조 노무원, 방공호 공사장에서 강제로 노동했다.

 

 

여자근로정신대 6명 중 3명은 아이치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2명은 도야마현 후지코시강재 회사로 동원됐다. 나머지 1명은 만주 봉천에 있는 삼양사가 설립한 남만방적 공장으로 동원됐다.

 

 

구술증언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징병검사에서 제2 을종으로 군 면제 대상인데 징병되거나(이경석), 해방되고 일본 공장에 돈 받으러 갔다가 쫄딱 망했는데 뭔 돈이 있겠냐며 못 받기도 했다(이춘식). 노무자를 뽑아 일본에 보내는 담당이 형님인데 나를 보내고(조주호), 일제 순사의 동생을 대신해 끌려가기도 했다(양오섭). 결혼 보름 만에 영장이 나오거나(최영균), 해방되던 해 먼저 징용 간 형님이 아무 말 없이 혼자 귀국(김준수)한 사례 등이 가슴을 적신다.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어린 소녀들의 사연은 특히 심금을 울린다. 안 간다고 하면 너희 아버지, 어머니 다 경찰서 잡아 가둔다(양금덕)는 협박과 일본에 가면 밥도 배부르게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김재림)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일본에 갔지만 배가 고파서 한국에서 가져 간 옷하고 밥하고 바꿔 먹고(곽옥남), 지진이 일어나 담도 허물어지고 고놈 밑에서 두 명이 깔려 죽고(정신영), 공습이 오믄 죽을둥 살둥 저녁 내내 날 샐 때까지 도망다녔다(주금용)는 증언도 있었다.

 

 

그래서 주금용 할머니는 후지코시로 끌려간 어린 소녀들이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 벚꽃 나무 그늘 아래서, 인사과 기무라가 말한 듯 하다, 나는 감쪽같이 속았다"는 신세 한탄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도 했다. 또 만주 봉천 남만 방적에서 일한 오연임 할머니는 "2년 동안 일하고 검은 고무신 하나 산께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시민모임은 "기억을 남기는 것은 두 번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삼기 위해서"라며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분들을 위해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되묻기 위해서다"고 출간 취지를 밝혔다.

 

 

구술집에 기록된 피해자 가운데 정유한, 김오곤, 조주호, 전홍일, 남정노, 권충훈, 곽옥남 등 7명의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구술집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거나 질병 등으로 증언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번 구술집이 마지막 육성 증언이 될 가능성이 크다.(2)

 

 

 

아사히는 "전범이 된 사람들(조선인)을 괴롭힌 것은 고국의 차가운 시선이었다"며 "귀국해도 대일 협력자라며 주위에서 받아주지 않아 (귀국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 전범은 일본 정부로부터도 외면 받았습니다. 일본인 전범과 유족은 일본 정부로부터 연금과 위자료 등의 보상을 받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전범은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 아사히 "조선인 태평양전쟁 전범 외면은 일본 국민의 책임"

기사입력 2021-04-07 13:49 l 최종수정 2021-04-14 14:05

 

 

일본 언론 아사히 신문이 "일본 정부가 조선인 태평양전쟁 전범을 끝내 외면한 것은 일본 국민의 책임"이라며 반성하는 사설을 게시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오늘(7일) 자 '일본의 정의를 묻고 또 묻는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선인 태평양전쟁 B·C급 전범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학래 옹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살아 있는 동안에 구제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고인은 1942년 17세의 나이로 징집돼 일본군 군속(軍屬·군무원)으로 동남아시아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 노역하는 연합군 포로를 감사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포로 취급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의 존재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생전 "건설 현장에는 의료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포로 중 환자가 발생해도 대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당시 많은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 고인은 포로 학대 혐의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감형돼 1956년 석방됐습니다. 고인은 출소 후 고향인 전라남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조선인 전범은 친일파로 낙인찍혀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소식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았습니다.


아사히는 "전범이 된 사람들(조선인)을 괴롭힌 것은 고국의 차가운 시선이었다"며 "귀국해도 대일 협력자라며 주위에서 받아주지 않아 (귀국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 전범은 일본 정부로부터도 외면 받았습니다. 일본인 전범과 유족은 일본 정부로부터 연금과 위자료 등의 보상을 받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전범은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고인은 일본에 남은 다른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과 함께 동진회라는 조직을 결성해 60년 이상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아사히는 "이 나라의 정의와 양식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면서 "정치의, 그리고 그 정치의 부작위를 못 본 체한 국민의 책임을 묻게 된다"고 반성했습니다.(3)

 

 

기쿠치 씨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군인 혹은 군속으로 징병당했다가 전쟁에서 숨진 한반도 출신자 명부를 정리한 책 ‘구(舊)일본군한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를 펴냈다.

책에 적힌 사람들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전달한 한반도 출신 전사자 명단 속 2만 2천명이라고 도쿄신문이 전했다.

 

 

 

■ 日서 한반도 징병자 명부 첫 출판…70대 일본인 20년간 정리

입력 2017-08-09 10:06 
 

한 70대 일본인이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강제로 징병당했다가 희생된 군인과 군속의 명부를 20여년간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주인공은 학원강사 출신인 기쿠치 데아키(菊池英昭·75)씨.

기쿠치 씨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군인 혹은 군속으로 징병당했다가 전쟁에서 숨진 한반도 출신자 명부를 정리한 책 ‘구(舊)일본군한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를 최근 펴냈다.

책에 적힌 사람들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전달한 한반도 출신 전사자 명단 속 2만2천명이라고 도쿄신문이 9일 전했다.

한국 시민단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일본 소송을 돕다가 이 명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기쿠치씨는 지난 1993년부터 일하는 중간 짬을 내 각 인물별로 자세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과거 군부대 기록 등 다양한 과거 자료를 찾아 생년월일, 소속부대, 사망이유, 본적지 등 14개 항목으로 책에 적어 넣었다.

마이니치는 한반도 출신 징병자의 명부가 책으로 출판된 것은 처음이라며 한반도 출신자들이 전쟁에 동원됐다는 사실을 전할 귀중한 자료라고 소개했다.

역사학자인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케이센가쿠인대(惠泉學園大) 명예교수는 “기쿠치씨의 집념으로 한반도 출신자들이 어떻게 끌려왔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며 “책을 보면 일본의 전후 처리가 얼마나 불충분했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쿠치씨는 “겨우 완성을 해서 다행이다”라며 “책을 가지고 전몰지(戰歿地)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4)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427200901221

 

 

(2) https://v.daum.net/v/20210225144554943

 

 

(3) 아사히 "조선인 태평양전쟁 전범 외면은 일본 국민의 책임" (mbn.co.kr)2021-04-07

 

 

(4) 日서 한반도 징병자 명부 첫 출판…70대 일본인 20년간 정리 | 서울신문 (seoul.co.kr)2017-08-09 

 

 

 

<참고자료>

 

 

'가미카제' 전사자 위령비 한국에 세우다니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200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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