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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5) 1940년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1950년) 본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5) 1940년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1950년)
대야발 2025. 5. 18. 12:39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 인근의 치장에 도착한 직후인 1939년 8월 좌우익 진영의 7개 정당 및 단체가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목표 아래 7당 통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과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민족주의 세력은 1930년대 중반 이래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재건한국독립당,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하여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 3당은 1940년 5월 8일 공동 명의로 3당 해체 선언을 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 좌우가 함께 싸운 임시정부의 역사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엮음/한울엠플러스·5만원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중앙감찰위원 전체 촬영(치장, 1940년 5월16일)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이청천·송병조·조완구·이시영·김구·유동열·조소앙·차리석.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 인근의 치장에 도착한 직후인 1939년 8월 좌우익 진영의 7개 정당 및 단체가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목표 아래 7당 통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과 정치적 이념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민족주의 세력은 1930년대 중반 이래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재건한국독립당, 이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하여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3당은 정치적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여야 한다는 입장도 같았다. 이 3당은 1940년 5월 8일 공동 명의로 3당 해체 선언을 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글·사진 170~171쪽) 한울엠플러스 제공.

3·1절 2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충칭, 1941년 3월1일)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충칭 시기의 사진으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많지는 않지만,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관계자 개개인에 관련된 것들이다. 1941년에 김구와 김원봉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소앙과 신익희가 함께 나란히 보인다. 대단히 상징성이 큰 사진이다.”(글 22쪽, 사진 214쪽) 한울엠플러스 제공.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 임시의정원에도 좌익 계열이 대거 참여하여 관내 독립운동 세력을 모두 포괄하는 통일 의회가 구성되었다. (…) 김원봉 계열의 임시의정원 참여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함께 관내 지역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자, 좌우 합작·연합의 표상이었다.”(글·사진 230~231쪽)

송병조 장례식(1942년 2월27일) “송병조가 서거하자 임시정부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유해를 충칭 투차오 허상산에 안장하였다. 허상산에는 송병조 외에도 차리석·손일민·이달·곽낙원·김인 등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 그리고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묘지가 있었다. 그중 일부는 국내로 이장되었으나 대부분 허상산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고 그 일대가 개발되면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글·사진 220~221쪽) 한울엠플러스 제공.

독립운동 진영은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통합을 서둘고 있었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의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1942년 7월 좌파진영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군사부문에서 먼저 좌우합작이 이루어지고, 이 해 10월에 실시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족혁명당 10명. 혁명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등 14명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선출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공히 좌우합작의 통합정부가 구성되었다. 유림도 이때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 임시정부 참여, 의정원 의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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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의정원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
ⓒ 김자동 |
격동기에 6년은 긴 세월이다. 그는 어느덧 1938년에 45세의 중년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정세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은 1932년 1월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과 3월 만주에 괴뢰정권의 수립, 1933년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1934년 4월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으로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독립운동 진영도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무장투쟁론자인 아나키스트 이회영의 사망(1932.11)에 이어 초기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안창호가 사망(1938.3)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민족단일당운동을 시도했다. 민족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세력과 아나키즘세력까지 모두 참여하는 연대운동이었다.
1939년 8월 쓰촨성(사천성) 치장에서 한국혁명운동 통일7단체가 모여(7당회의)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광복전선측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측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연맹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통일조직으로 단일당을,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은 연맹 형식을 각각 주장하였다.
결국 통일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연맹론을 주장하던 두 단체가 탈퇴해 5개 정당이 참가하는 통일회의가 열렸다. 1939년 9월 5개 정당은 서로 연합해 전국연합전선협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곧바로 탈퇴하는 바람에 협동전선연합은 한계를 보였다. (주석 1)
독립운동 진영은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통합을 서둘고 있었다. 일제는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의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다. 1942년 7월 좌파진영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군사부문에서 먼저 좌우합작이 이루어지고, 이 해 10월에 실시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족혁명당 10명. 혁명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등 14명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선출됨으로써 임시정부는 명실공히 좌우합작의 통합정부가 구성되었다. 유림도 이때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는 투옥 6년여 만인 1937년 10월에 출소하여 그 해 말 변장을 하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많이 상한 몸을 추스르며 베이징과 텐진 등에서 옛 동지들을 만났다. 그가 활동을 멈춘 6년의 시공은 많은 것이 변하고 바뀌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공세로 독립운동가들은 위축되고 있었다. 함께 진로 문제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갔다. 대장정 끝에 이곳에 머문 모택동을 만나고 이어서 태항산으로 가서 김두봉과도 만났다. 이와 관련 상세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1929년에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김좌진과 만나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을 강변했던 그의 자세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연안에서 북경이나 만주로 파견되어 있던 조직과 연결되어 그곳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중경이냐 연안이냐를 저울질하던 그가 일단 연안행을 택했고, 모택동·김두봉을 만났던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을 떠났다. 자신의 의지나 방향감각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연안을 떠나 중경으로 이동한 사실은 그의 사상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처해진 상황의 극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주석 2)
유림은 1942년 여름 황하를 건너 1만 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중일전쟁기여서 중국인들의 대일증오심에 불이 붙고 있어서 독립운동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연합과 연대가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했다.
30년대까지만 하여도 임정은 그 인적 구성과 실력 면에서 문자 그대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구라 하기엔 터무니 없이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잇따른 분규에 따른 파벌간의 갈등도 잇따랐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확대되고 독립에의 서광이 비침에 따라 각계각층 독립운동자들의 대동단결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도 체질을 개선, 보수·급진을 망라한 독립운동자들의 집결체로 점차 강화되어 갔다. (주석 3)
1942년 10월에 열린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동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조소앙·조완구·차리석·김상덕·이건웅 등과 함께 임시헌장(헌법) 개수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개수위원회는,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민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 왔다."라는 대한민국의 유래를 말하는 머리말을 위시하여, 제2장으로 '민간의 권리와 의무', 제5장 '심판원'을 새로 두고 종전 헌법의 5장 '회계'를 6장으로 하여 전문 7장 62조로 증대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개수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주석 4)
이 '개수안'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임시정부 참가는 또한 당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인식변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유림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유자명이 조선혁명자연맹을 각각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유림은 외교연구위원회·선전위원회·수개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고, 구양균은 광복군총사령부 서무과 과원, 주석단 비서 겸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주석 5)
그의 임시정부 참여 기간은 짧았으나 활동은 만만치 않았다.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된 임시헌장의 수정기초 위원으로서 한 몫 하였던 유림은 또한 외교 분야의 일도 맡아 보았다. 외무부 안에 설치된 외교연구위원회의 연구위원으로서였다. 외교연구위원회는 당시 점차로 급박해져 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외교에 관한 일반원칙과 정책 및 방침을 연구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42년 8월 처음으로 조직될 당시에는 장건상·신익희·이현수·이현호가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듬해인 43년 2월 김성숙·박호일·최동호와 더불어 유림이 연구위원으로서 그 진용을 보강하게 되었다. 유림이 외교연구위원회에 참여할 무렵에야 비로소 임정의 외교활동이 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43년 4월 선전부(초대 선전부장 김규식)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선전위원회가 구성되자 유림은 조소앙·엄항섭·김성숙·신익희·김상덕 등 14명과 더불어 선전위원으로서 임정의 선전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유림은 선전 계획의 수립과 선전 진행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 위원으로서 또한 국무위원으로서 일본 패망 전야의 중경에서 활동하였다. (주석 6)(2)
주석
1>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86~87쪽, 2022.
2> 김희곤, 앞의 책, 93쪽.
3> 김재명, 앞의 책.
4> <단주 유림 자료집>, 69~70쪽.
5>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 191쪽,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0.
6> 최갑용, <황야의 검은 깃발>, 116쪽, 이문출판사, 1996.
■ 2개월 만에 민족혁명당 탈당 후 한국독립당 재건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1934년 3월경 문일민은 박창세·차리석 등 한국독립당(아래 한독당) 간부들과 함께 항저우로 거처를 옮겨 한독당 사무소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참여
1935년 2월 15~17일 항저우 당 사무소에서 개최된 제7차 한독당 대회에 문일민은 유진동과 함께 제4구 대표로 출석했다.
7차 대회의 핵심 안건은 한국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기 위한 신당(新黨) 조직 문제였다.
앞서 1932년 11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일을 위해 한독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 5개 단체의 연합으로 일종의 협의체적 성격의 기구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탄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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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결성 회의 개최지 |
ⓒ 독립기념관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협의체적 성격을 넘어 단일당 조직을 추진했으나 '임시정부 폐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각 단체마다 의견이 달라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한독당 내에서는 신당 참여 여부를 두고 크게 대립했다. 송병조·조완구·차리석 등은 "의열단 계열과는 이념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단일당 조직에 거세게 반대했다. 반면 김두봉·강창제·박창세 등은 "김구 세력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는 작은 차이를 버리고 대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일당 조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7차 대회에서는 이러한 주장들이 팽팽히 맞섰다. 문일민은 일단 대표자를 선출한 뒤 동맹에서 소집하는 혁명단체대표대회에 출석시켜 그 대회의 정황에 따라 태도를 결정하자는 '중립파'에 속했다.
그러나 한독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단체들이 신당 조직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한독당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신당 참여 찬성파는 반대파를 배제하고 참여하기로 결정, 마침내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아래 민혁당) 창당에 함께 했다. 이날 한독당은 민혁당 항저우 지부로 개편되면서 자연스레 해체됐다.
문일민의 민혁당 합류는 그가 따랐던 안창호의 좌우합작노선에 충실한 결과로 생각된다. 안창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한 사회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이 지역주의 및 계급주의 등에 함몰되어 상호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와 계급혁명론자들에게는 민족의 가치를 호소했고, 반대로 일부 퇴행적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포용성과 투쟁성의 강화를 역설하며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이름으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대동단결을 부르짖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이래 안창호는 민주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복벽주의 등 각종 주의와 계파를 초월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해 당의 통일적 지도 아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뒤 국민의 개업(皆業)·개병(皆兵)·개납(皆納)을 달성코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선 바 있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나 관련 단체 및 인물들과도 전혀 연고가 없던 문일민이 김원봉 등 좌파 계열과 함께 민혁당 창당에 참여한 것은 안창호의 이러한 대공주의와 민족유일당운동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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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혁명당 본부가 있던 난징 호가화원 |
ⓒ 독립기념관 |
민혁당 탈당 후 한독당 재건 선언
그러나 민혁당 내에서 김원봉을 위시한 의열단 계열의 전횡이 심해지자 불과 2개월 만인 9월 25일 조소앙·박창세·김사집·이창기·박경순 등이 탈당하며 한독당 재건을 선언했다. 이때 문일민 역시 탈당 대열에 합류하며 한독당 재건에 참여했다.
"민족주의의 독립운동은 원칙상 사회주의자의 국가관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과 이론을 가지는 것이다. 민족의 경제문제만을 중심으로 국가의 말살과 주권의 포기와 자기 민족의 과정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와는 얼음과 숯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혈분적(血分的) 상반성을 가진다. (…중략…) 지금 본당이 단연한 태도로 3개월 이상 중단되어 있는 본당의 생명을 다시 건설하고 부활하는 본뜻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본령을 명백히 발휘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란 우리가 창조한 당의(黨義)·당강(黨綱)에 게재한 것이다. 국내에 있어서 특권계급을 부인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가 그것이다." - <당원동지에게 고함>(1935.10.5)
즉 한독당 재건파는 좌파적 성향을 가진 김원봉이 이끄는 민혁당과 자신들을 '얼음과 숯'의 관계에 비유하며 이념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순(純)민족주의 정당으로서의 한독당 재건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의단체'로서 민혁당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민혁당은 이를 '항저우 반당(反黨)사건'이라 부를 정도로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민혁당은 문일민 등 재건파를 '항주반당분자(杭州反黨分子)'라 낙인찍고 당적에서 제명해버렸다. 또 '당역(黨逆) 조소앙의 정체를 폭로한다'라는 글을 통해 탈당한 이들에 대해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기회주의가 천품(天稟:타고난 기품)인 배신자 조소앙이야말로 종전부터 기회주의 영역의 제후로서 궁전에 출입하며 향락을 누리는 추장같은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추장의 거동 하나에 5명이 따랐다. (…중략…) 소앙의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실천적 행동은 기회주의자의 낙인을 찍지 않으면 안 된다. 조소앙이 당내에 있을 때 울적하게 지낸 것과, 이번에 반당(反黨)으로까지 진출했던 것은 모두 그의 가슴에 독재가 있고, 그의 안중에 데모크라시가 없는 관계이다. 우리 당 간부의 당당한 실천적 혁명역사를 가진 고상한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고, 조소앙은 스스로 여기서 낙오하여 항저우 왕국의 건설을 안출했던 것이다." - <民族革命黨 黨報> 제2호 (1935.10.18)
한독당 부흥을 위해 노력하다
재건 한독당은 조소앙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당무위원회를 조직하고 한독당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문일민도 임시당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광둥으로 내려가 광둥성 정부로부터 원조를 구하고 한독당 지부를 설치하는 등 고군분투했다.
한편 재건 한독당은 임시정부로 복귀하려는 김구 세력을 견제하고 임시정부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송병조 세력과 제휴를 추진했다. 그러나 송병조는 임시정부의 궁핍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김구 세력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재건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송병조는 재건파를 차후 설득하는 것으로 하고 일방적으로 김구를 불러들였다.
그 결과 1935년 10월 19일 개원한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동녕(주석)·이시영(법무장)·김구(외무장)·조완구(내무장)·조성환(군무장)·송병조(재무장)·차리석(비서장) 7인을 국무위원으로 하는 국무위원회가 새로이 출범했다. 이때 조소앙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당선됐으나 국무위원회에서는 배제됐다.
조소앙은 문일민과 박창세 등 재건 한독당 세력을 임시정부 내각에 진출시킴으로써 임시정부 내에서 재건 한독당의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송병조 및 김구 세력의 배척으로 이 역시 좌절됐다. 결국 임시정부에서 사실상 배제된 재건파는 이후 열리는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불참하기에 이르렀다.(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70629191607844
(2) https://v.daum.net/v/20241026114800556
(3) https://v.daum.net/v/20230217154202095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30815042237020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4h2638a
https://v.daum.net/v/20220411142830950
https://namu.wiki/w/%ED%95%9C%EA%B5%AD%EB%8F%85%EB%A6%BD%EB%8B%B9(1940%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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