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4) - 김 구 주석 본문
김구 선생 잠든 '독립운동 성지'…용산구 효창공원[서울곳곳]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삼의사 묘역·안중근 의사 가묘
김구 선생과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묻혀
소나무숲과 묘역 사이 산책로엔 주민들 많이 찾아
[글·사진=이데일리 양희동 기자] “어명이다. 김창수(김구 선생 본명)의 사형집행을 즉시 중단하라.”
지난 24일 오후 2시 30분께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정문에서 약 250m 떨어진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자, 1층 중앙홀에 김구 선생의 대형 좌상(座像)에 한눈에 들어왔다. 기념관 내부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활동, 백범일지, 가족 관련 자료, 서거 및 추모 관련 공간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이곳에선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서거 당시 입고 있던 옷인 ‘혈의(血衣)’도 직접 볼 수 있다. 또 ‘김구를 살린 전화’란 이름으로 전시된 옛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 1896년 10월 2일 김구 선생의 사형을 중단하란 고종의 어명을 전하는 다급한 목소리를 재연한 통화 내용도 들어볼 수 있다.
백범 김구 기념관 1층 중앙홀에 있는 김구 선생 좌상.효창공원은 원래 조선시대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등 왕가의 묘를 모신 곳으로 ‘효창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기 시작했고, 1944년엔 일제에 의해 왕가의 묘들이 강제로 서삼릉(경기도 고양시)으로 이장된 후 공원으로 조성됐다. 광복 이후엔 1946년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1948년엔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 1949년엔 김구 선생이 각각 안장됐다.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묘.인근에 살고 있어 효창공원을 거의 매일 찾는다는 50대 이모씨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 묘역은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소나무 숲 사이를 연결하는 나무 데크와 산책로도 잘 만들어져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한편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 기념관 운영시간은 매년 3~10월엔 오전 10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11~12월엔 오전 10시~오후 5시(입장마감 오후 4시) 등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정기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등이다.(1)
의열사 입구. 이봉창 의사 동상.양희동 (eastsun@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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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폭한 수괴 김구 막아라"‥광복군 창설 막으려던 일제의 '밀정'
[뉴스데스크]
◀ 앵커 ▶
과거 일제의 밀정들이 만든 보고서가 공개됐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겪으며 노력할 때 이를 방해하려는 밀정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인데요.
내일 한국광복군 창설 84주년 기념식이 열립니다.
이덕영 기자입니다.
◀ 리포트 ▶
조선총독부 밀정들이 만든 보고서.
백범 김구 선생이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염탐했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4년 보고.
중국 장쑤성 강녕진에 김구와 조선인 청년 30여 명이 모여있다며, "조선독립운동에 참여할 소위 혁명투사의 양성"이 목적이라고 적었습니다.
이후 김구 선생과 조선인 청년들을 감시하는 밀정들의 활동은 3년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1935년 난징으로 이동해 동관두 32호에서 합숙 훈련을 했고, 일제에 발각될 우려를 감지해 버스를 타고 장쑤성 징광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는 내용.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김구 선생의 행적도 자세히 전달됐습니다.
"징광사를 찾은 김구가 학생들에게 한 시간 가량 훈시를 하고 남경으로 돌아갔다"는 보고.
김구는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지 모르나 이것은 모두 조국 광복을 위해 그 준비 교육을 하는 것이니 열심히 공부해 주기 바란다"고 막막해하는 청년들에게 말했습니다.
밀정들은 이런 말을 엿듣고 기록했습니다.
일제의 밀정은 엿장수, 중국인 간호원처럼 직업과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며 김구에게 접근했습니다.
[이형진/광복군기념사업회장] "등골이 오싹하더라고.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처절하게 싸웠었구나. 그런 걸 알고도 과연 요즘에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올 수 있는지."
당시 수십 명의 젊은이들 가운데 밀정의 방해 공작을 뚫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 명이 훗날 광복군을 창설하며 국군의 주춧돌이 됐습니다.
이 밀정 보고서는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이재현 지사의 유품으로 뒤늦게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조선총독부 밀정의 보고서는 김구 선생을 "조선독립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흉폭한 수괴"로 평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뉴라이트 성향의 저자가 낸 책도 김구 선생의 활동을 이와 유사한 '흉폭저돌주의 독립운동'으로 규정하며 뉴라이트 역사관의 얼굴을 드러냈습니다.(2)
MBC뉴스 이덕영입니다.
영상취재: 허원철, 임지환 / 영상편집: 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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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취재: 허원철, 임지환 / 영상편집: 안윤선
이덕영 기자(deok@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replay/2024/nwdesk/article/6635639_365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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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영경방’ 흔적만 남았네요”
- 열악한 현장에 탄식, 관심 호소
“현장에 직접 가 보니 많은 독립운동사적지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부산지역 독립운동가 후손들로 구성된 ‘부산광복원정대’가 중국 상하이의 김구 선생 거주지였던 영경방을 탐방하고 있는 모습. 김예진 씨 제공
‘부산광복원정대’에 참여해 중국 상하이 등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한 김예진(31) 씨는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김 씨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후손 28명은 지난달 24일부터 27일 3박 4일간 중국 상하이·항저우 등 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했다. 임시정부청사와 유적지의 일부 전시 구간을 제외하면, 이들이 본 독립운동사적지는 대부분 낡고 부서진 건물이었다. 지리적 접근성도 열악한 데다 안내판조차 없는 곳이 많았다.
김 씨는 “김구 선생 가족의 거주지였던 영경방은 이름표만 남아 있고 모두 상가로 바뀌었다. 최초 일본군 위안소였던 대일살롱은 입구를 제외한 건물 뒤편이 모두 허물어져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시작된 곳인 서금이로에는 이를 안내하는 표지석도 없었다. 이곳이 일반 도로인지, 역사적 의미가 담긴 서금이로인지 일반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씨는 사적지를 보존·관리하기 위해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립유공자 분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나섰지만, 이들의 희생은 다 쓰러져가는 건물과 함께 잊혀지고 있는 듯했다”며 “독립유공자인 후손인 우리들도 현장을 탐방하기 전까지 열악한 사적지의 실태를 알지 못했다. 더 많은 이가 현장을 찾고, 이곳의 열악한 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독립유공자인 김욱진(1885~1943) 선생의 증손녀다. 김 선생은 경북 안동시에서 1919년 3월 24일 안동군 풍산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일제에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풍산면 만세 시위는 3·1운동 계열로, 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일제 수비대가 실탄을 발사하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수감 중 이어진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채 풀려난 그는 부산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 선생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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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령’ 김구 5년 은신 뒤엔… 中 임산부·여자 뱃사공 있었다[대한외국인]
서울신문·국가보훈부 공동기획
추푸청 며느리 친정서 반년 피신
갓 출산한 주자루이 산 넘어 이동
신분 감추려 뱃사공과 위장 결혼
선상 생활하면서 독립운동 활동
백범 “여비 100원밖에 못 줘 후회”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포상 추진
일제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에 이어 4월 29일 윤봉길 의거의 주동자가 백범 김구 선생이라 보고 수배망을 더욱 좁혀 왔다. 노동자 생활비가 월 30원쯤이던 때 김구 선생의 현상금은 20만원에서 60만원까지 올랐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5년 가까이 몸을 숨기며 지낼 수 있었던 데엔 많은 중국인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곁에서 그를 살뜰히 챙겼지만 아직 독립운동 지원 공로가 잘 알려지지 않은 여인들이 있다.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는 엄항섭, 안중근 동생 안공근, 김철과 함께 미국 출신의 조지 애시모어 피치(1883~1979·독립장) 목사 집에서 한 달간 생활했다. 이후 은신처가 발각되자 장제스(蔣介石·1887~1975·대한민국장) 총사령의 지원으로 자싱(嘉興)으로 옮겨 동북의용군 후원회장인 추푸청(補成·1873~1948·건국훈장 독립장)의 도움을 받게 됐다.
김구는 당시 추푸청이 수양아들 집의 호숫가에 정교하게 지은 정자 한 곳을 침실로 내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밀정도 늘고 감시망이 더욱 삼엄해지면서 김구는 또다시 몸을 피해야 했다. 추푸청은 며느리 주자루이(朱佳蘂)의 처가인 하이옌(海)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당시 주자루이는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몸으로 자연스럽게 외출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구두를 신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추씨 부인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의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산 고개를 넘었다”며 “추씨 부인의 친정 여자 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 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해 만대 자손에게 전해 줄 마음이 간절했다”며 주자루이의 용감한 행보와 친절에 고마움을 표했다.
김구는 주자루이의 친정 하이옌 재청 별장에서 반년간 머물렀고, 이때가 피난 생활 중 가장 평온한 때였다고 했다. 정부는 “체포될 위기에 놓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안위를 보전해 준 호의로 항일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며 추푸청에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주자루이에 대한 포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광둥인 ‘장진구’로 신분을 숨기고 지냈지만 중국어가 어눌해 몇 번 정체가 탄로 날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선 더욱 철저하게 신분을 감출 수 있도록 중국인과 위장 결혼을 제안했고, 그렇게 만난 사람이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였다. 37살의 나이 차이였던 두 사람은 부부로 위장하며 선상 생활을 했고 이후엔 난징 친화이허 화이칭교(淮淸橋) 인근에서 지냈다. 이때 김구는 장제스와 독립운동 활동을 꾸준히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37년 난징을 떠나며 주아이바오를 고향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김구는 “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했던 것”이라며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라며 백범일지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백범일지를 엮은 도진순 국립창원대 교수는 ‘백범의 길’에서 “중국과 한국, 남성과 여성, 영웅과 보통 사람의 차이를 넘어서는 이들의 동거는 김구가 난징에서 독립운동의 영수로 비상하는 용의 둥지와 같았다”며 “독립운동 활동이 이어지도록 삶의 밑바닥부터 힘써 준 주아이바오의 활약 역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발굴 태스크포스(TF)는 두 여인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진하기 위해 지난해 주자루이에 대한 보고서를 국가보훈부에 제출했고, 주아이바오에 대해서도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4)
허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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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김구를 다시 읽다[기자수첩]
해방 후 '꼬마' 이종찬과 환국했던 김구와 오버랩…메신저 흠집내기
"조국 분열 연장은 민족을 죽음으로 모는 극악극흉"…동족상잔 걱정
일류국가 됐지만 김구의 염원 '분단 극복‧역사 청산'은 미완의 과제
최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앞에서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가 거의 매일같이 열린다. 이 회장이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과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여권과 보수층은 이 회장의 예상보다 강한 반발에 한때 당혹했지만 곧 역공에 나섰다. 같은 보수인사로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가 원로가 민감한 '친일' 담론을 꺼내든 것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여권은 역시 노련하고 조직적이었다. 이 회장은 사사로운 감정에 몽니를 부리고 노욕(老慾)에 찬 무책임한 인물로 채색됐다. 국민의힘 시도지사협의회는 그를 "사실무근의 마타도어"를 앞세운 국론분열자로 규정했다.
국민의힘은 "실체 없는 유령과 싸우는 딱한 모습"이라고도 했다. 사리분별 못하는 노인으로 매도한 셈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국정원장 출신인 그에게 색깔론 덧칠 시도까지 나왔다.
메시지를 공격하기 위해 메신저를 흠집 내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 흔한 장면이다. 1948년 우남 이승만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결사반대했던 백범 김구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그는 그해 2월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함'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라며 머잖아 닥칠 동존상잔의 참극을 걱정했다.
그는 단독정부 세력을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며 "그러나 매국매족의 일진회식 선각자"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구의 이런 태도는 이승만 세력에 눈엣가시였다. 김구의 호소문도 "(그들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대경소괴(大驚小怪‧매우 놀라워 좀 의하게 여김)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써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모욕만 가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당시 모 유력신문이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 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고 했고, 일찍이 각종 유언비어를 생산하던 그 신문이 또 다시 자신과 관련한 허언(虛言‧거짓말)을 만들어냈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전 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인도의 독립 영웅 마하트마 간디가 자신을 저격한 암살범마저 용서한 사실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했다.
"내가 사형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김구는 이듬해 6월 암살됐다. 거족적 지지를 받던 몽양 여운형에 이어 김구의 암살로 남북의 통합은 더욱 멀어졌고 결국 1년 뒤 6.25전쟁이 발발했다.
김구는 호소문 말미에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억눌리고 막힘)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깊이 생각)하라"며 끝을 맺었다.
역사는 과연 되풀이되는가? 대한민국은 그간 '일류국가'로 도약했지만 분단 극복과 역사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김구가 말한 '민족 단결'과 '매국매족 일진회' 화두는 여전한 것이다.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김구 앞에 선 '꼬마' 이종찬이 지금의 광복회장이다. 이제는 구순을 앞둔 원로가 "광복회는 결코 이 역사적 퇴행과 훼손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며 행동에 나선 것을 몽니니 노욕이니 폄할 수 있을까?(5)
CBS노컷뉴스 홍제표 기자 ente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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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장제스 만남 ‘1933년 5월說’ 은 거짓이다
장위안칭 지음│박지민 옮김│공명
백범 김구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처음 만났다. 그런데 언제?
두 사람의 만남은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점이 됐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에 대한 안전 보장·보조금 지원 등의 파격적 조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매우 큰데, 그 시점은 지금까지 추측만 무성했다. 온라인에서는 추정을 전제로 한 ‘1933년 5월설’의 검색량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해당 설이 오류라고 못을 박고 ‘1932년 12월 10일’로 특정했다. 저자가 난징대 박사 학위를 받고 도시연구자로서 이 지역에 머물며 김구를 연구한 결과다. 우선 장제스가 김구와의 만남을 주선한 천궈푸(陳果夫)를 통해 임시정부에 무관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한 것이 1933년 2월. 뤄양(洛陽) 군사학교에서 한국인 훈련을 허용했던 지시가 이때 나왔다. 따라서 장제스·김구 회담을 이보다 늦은 시점으로 추정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저자는 장제스의 접견실에서 근무했던 인물의 기록을 제시했다. 그 직원은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기 전인 1932년 겨울, 장제스가 김구를 비밀리에 만났다”고 썼다.
이 외에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의 난징 생활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김구가 장제스를 처음 만난 그달부터 임시정부 본부를 난징으로 옮긴 1935년 11월까지가 1기. 김구는 난징을 비롯해 전장(鎭江),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등을 떠돌며 일본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자싱에서 지냈던 시절 김구는 ‘장천지우’(張震球) 또는 ‘장천’(張震) 등으로 이름을 바꿔 광둥(廣東) 출신의 상인으로 행세했다. 김구는 당시 자신을 만났던 중국인들에게 ‘장 씨 아저씨’ ‘장 선생’으로 기억됐다. 그리고 1937년 11월까지 2년간은 난징에 정착했던 2기다. 김구의 아들 김신, 어머니 곽낙원 여사 등도 이곳에서 지냈다. 다만 난징이라는 경계선 안에 있었을 뿐, 김구는 난징 곳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다. 이 책이 수록한 당시 김구 가족의 사진, 거주지 등 사진 자료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특유의 지적 성실로 김구가 난징을 떠난 시점의 특정은 미뤘다. 중일전쟁을 피해 김구가 탑승할 수 있었던 선박 입·출항 등을 활용해 범위를 좁힌 결과, 1937년 11월 21일에서 12월 2일 사이였다. 더 좁힐 수 있는 추가 자료는 찾지 못했기에 여기서 유보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284쪽, 2만 원.(6)
서종민 기자 rashom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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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은거한 쇠실마을…“독립운동사 홀대에 속상합니다”
은신처 후손 “백범선생 추모식
대강당 아닌 소강당서 열어 씁쓸”
“속상하지요. 분통이 터져 잠이 안 와요.”
지난 12일 오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서 만난 김태권(78)씨는 “요즘 뉴스를 잘 안 본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에 상징성이 있는 김구 선생의 후손이 독립기념관장 후보 추천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김씨는 해마다 6월26일 서울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열리는 백범 선생 추모식에 참석한다. 김씨는 “대강당에서 하던 선생의 추모식을 올해부터 소강당으로 옮겨서 하더라”고 했다.
김씨의 고향집(쇠실길 22-58) 대문 옆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인천 감옥에서 탈출한 뒤 ‘김두호’라는 이름으로 숨어 다닐 때였다. 그는 1898년 5월(음력) 종씨였던 고 김승묵(호 광언)의 집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했다. 후손 김씨는 “맨 왼쪽 끝 방에서 선생이 지내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떠날 때 ‘동국역대’라는 책에 시를 적어 건넸던 백범은 1946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신분으로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은신했던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고 김승묵씨의 집 마루에 앉은 증손 김태권씨. 정대하 기자김씨의 집 옆엔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이 있다. 2006년 전남도와 백범선생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지은 이 공간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은거 기념관은 3칸짜리 작은 한옥(49.58㎡) 건물로 정자와 함께 세워져 있다. 고교 기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후손 김씨는 “김구 선생은 두번째 투옥됐을 때 일제에 일곱차례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했던 모습에 존경심이 들었다”고 했다.
은거 기념관 한쪽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근의 딸이 백범 선생의 장남과 결혼할 정도로 인연이 깊다”고 설명했다. 두 집안의 첫 매개가 된 것은 ‘동학’이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백범 김구 선생은 17살 때 동학농민혁명(1894~95)에 참여해 ‘아기 접주’로 이름을 떨쳤다. 안태훈 진사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김구 선생에게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제안했다. 김구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안 진사의 자택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을 기록했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 안 진사는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8, 9세의 정근·공근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독려하면서도,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었던 안중근 의사(오른쪽)와 안 의사 아버지 안태훈 진사. 은거 기념관 촬영김구 선생은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여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동 김창수”라고 타살 포고문을 남겼던 그는 석달 뒤 체포됐다. 고종은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것을 알고 ‘전화’로 사형 집행 중지 어명을 전달했다. 김구 선생은 이듬해 3월 인천 감옥을 탈출해 서울과 광주, 함평, 강진 등을 돌아 쇠실마을로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은신했던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 옆 우물. 정대하 기자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정대하 기자은거 기념관 옆 우물터 옆엔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김구 선생의 흑백 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김구 선생이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물처럼 흐르면 기억도 잊힐까? 후손 김씨는 “김구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의 역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7)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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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억원 현상금 마다하고 김구 살린 한중 우정 (4)
자싱(嘉兴).
상하이에서 차량으로 항저우 방향으로 1시간 40분 정도 가면 저장성 자싱에 도착할 수 있다. 자싱은 한국 관광객들에게 다소 낯선 곳이다. 난후(南湖)가 그나마 알려진 호수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을 선언한 곳으로 유명하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망지로(望志路) 106호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됐다.
7월 30일 저녁, 한 낯선 사람이 회의장을 기웃거렸다. 경찰의 첩자로 생각하고 참석자들이 상하이 외곽에 있는 자싱으로 급히 피신했다. 다행히 한 참석자의 아내가 난후 주변의 소도시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유람선 한 척을 빌렸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이런 자싱을 찾은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김구를 포함한 이동녕‧박찬익‧엄항섭‧김의한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으로 왔고 이곳에서 1932년 5월부터 1936년 2월까지 머물렀다. 실제로 거처한 기간은 2년 정도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싱‧항저우‧난징 등으로 옮겨 다녔다.
김구 선생이 중국 저장성 자싱으로 피신해 머물렀던 김구피난처 입구. 저장성 자싱시 매만가 76호에 있다. 사진 고수석
이들이 여기에 온 것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데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일단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더는 피치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피치 목사는 운전사로 위장한 뒤 김구를 서양인으로 화장시키고, 자신의 아내를 김구의 아내로 가장해 자동차로 피신했다. 김구 일행은 상하이 기차역에서 자싱을 향한 기차를 타고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싱에서 이들을 반겨준 사람은 추푸청(褚輔成, 1873~1948)이다. 추푸청은 자싱 출신으로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저장성 국민정부 주석을 역임했고 윤봉길 의거 당시는 상하이 법학원장‧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국민당 원로로 초기 중국 공산당 핵심 인물인 천두슈(陈独秀)가 국민당에 체포됐을 때 그를 변호한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이 비록 국민당의 원로이지만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자싱에 만들어진 이유다. 그런 추푸청과 김구는 어떻게 연결됐을까?
김구가 자싱으로 피신한 데는 박찬익의 역할이 컸다. 그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을 맡는 등 임시정부 항일 외교의 최전선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대중국 외교교섭을 담당했으며 중국 국민당에 들어가 국제부 선전과에 근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 국민당과 최접점의 외교통으로 활동했다.
박찬익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중앙조직부에 근무하는 샤오정(蕭錚)을 만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샤오정은 천궈푸(陳果夫) 부장에게 보고했다. 천궈푸는 샤오정에게 “추푸청 선생을 찾아가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제공해 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 박찬익과 추푸청은 이전부터 친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김구피난처 2층 비상 탈출구로 나오면 이 배를 볼 수 있다. 이 배는 우펑촨(烏蓬船)이라 불린다. 대나무 지붕이 있는 배로 중국 강남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 배를 타고 호수로 피신하기도 했다. 사진 고수석
이런 도움으로 김구 일행은 자싱에 올 수 있었다. 김구는 추푸청의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별채인 자싱 매만가 76호에 머물렀다. 지금은 건물 입구에 ‘김구피난처 金九避难处’로 한글과 중국어로 함께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곳은 2005년 저장성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고 2006년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2층 목조주택이며 침실로 사용한 2층 방 한쪽 구석에는 긴급할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비상 탈출구가 있었다. 비상 탈출구를 통하면 배 한 척이 나오는 데 위험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김구는 당시 중국 광둥 출신의 상인 ‘장진구(張震球)’라는 가명을 쓰며 다녔다. 그러다가 1933년 여름 외출 중 신분이 광둥인이 아닌 것이 알려져 중국 경찰에 붙잡혔다. 다행히 천둥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이후 천둥성은 집안일을 하던 주아이바오(朱爱宝)에게 뱃사공을 하며 김구의 안전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김구는 낮에 주아이바오와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어둑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생활을 했다.
김구의 피난 시기를 배경으로 주아이바오와 김구와의 관계를 조명한 ‘선월(船月)’이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와 중국의 평범한 뱃사공을 통해 항일전선에 함께 연대한 한‧중 간의 우의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샤녠성(夏辇生)으로 윤봉길 의사의 전기 『회귀천당(回歸天堂)』도 썼다.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난 생활을 했던 자싱시 일휘교 17호. 김구피난처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진 고수석
자싱으로 온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 등은 김구피난처에서 200m 떨어진 일휘교 17호에 머물렀다. 추푸청이 김구의 안전을 배려한 것이다. 김구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추푸청‧박찬익‧엄항섭뿐이었다. 일휘교 17호에 들어서면 1층 전시실이 나온다. 그곳에 김구를 비롯해 이동녕‧엄항섭‧김의한‧박찬익의 가족들과 자싱 피난 생활에 큰 도움을 준 추푸청 가족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 사진을 쳐다보면 잠시 뭉클해진다. 추푸청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일제의 압박을 피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김구에 걸린 현상금은 무려 60만 위안. 현재 한화로 환산하면 200억원 정도. 천궈푸의 부탁이었지만 거절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각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추푸청 가족은 200억원에 눈이 멀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구피난처 옆에 있는 추푸청사료진열실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진열실 2층에 가면 추푸청의 밀납 인형 뒤에 글귀가 있다. 추푸청이 고대 한자 서체인 전서(篆書)로 쓴 글이다. 그것을 읽으면 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여유경동망불길(汝唯敬動芒不吉)
네가 오직 공경히 행동하면 길하지 않은 일이 없고
약유유용현기능(若有猷用懸其能)
만약 꾀를 부리려 한다면 능력이 헛되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임정 요인들을 도왔던 추푸청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감사의 마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가면 ‘독립운동을 도와준 외국인들’이라는 코너가 있다. 12명의 사진이 있는데 장제스‧쑹메이링‧저우언라이 등이 있다. 그들과 함께 천궈푸‧추푸청‧피치 등도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8)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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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폭탄 투척할 것" 김구에게 보낸 나석주 편지 공개
독립운동가 나석주(1892~1926)의사가 백범 김구를 포함한 다른 독립 운동가들에게 의거를 준비하고 있음을 전달하는 편지 7점이 일반에게 처음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26일 개막하는 심화전 ‘독립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 나석주’에서 등록문화유산 ‘나석주 의사 편지’를 공개한다고 밝혔다. ‘나석주 의사 편지’는 김구에게 쓴 편지 2점, 의열단 동지 이승춘에게 쓴 편지 4점, 황해관에게 쓴 편지 1점으로 구성된다. 박물관은 기존 연구 논문을 통해 이같은 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으나, 일반인이 직접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석주는 1921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에서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다 1926년 12월 28일 서울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번에 공개되는 편지속에는 나석주가 이같은 의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의지가 두루 담겨 있다. 1925년 7월 28일에 쓴 '폭탄 투척 의거 계획을 김구에게 알리는 편지'는 나석주가 서울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결심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구에게 알리고, 의거를 지지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같은 날 이승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의거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다. 1925년 8월 4일에 쓴 ‘폭탄 투척 대상을 정해 이승춘에게 알리는 편지’에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을 폭파 대상으로 정했으며, 서로 가까이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함께 폭파할 때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전략을 담고 있다. 1925년 8월 25일에 쓴 ‘의열투쟁 필요성을 이승춘에게 알리는 편지’에서는 ‘중국에서 동분서주하다가 무심하게 죽기보다는 차라리 본국에 가서 몸값이나 하고 죽겠다’는 각오를 전한다.
폭탄투척 대상을 이승춘에게 알리는 내용이 담긴 편지.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그밖에 다른 편지에는 동지들에게 폭탄과 권총을 구했다는 보고, 귀국 배편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 귀국 자금 부족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비치된 태블릿PC로 나석주 의사 편지 7점 전체 원문 사진과 풀어쓴 내용 등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광복절을 맞아 보물 ‘데니 태극기'도 대한제국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는 고종이 미국인 데니(1838~1900)에게 하사한 것이다.(9)
데니 태극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구의 정권 인수 시도는 왜 ‘1일 천하’로 끝났나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 주석과 임시정부
실패한 國字 쿠데타
1945년 11월 5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임정) 요인 30여 명은 중국 장제스 정부가 보내준 군용기 편으로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임정은 미 군정과 환국 조건을 합의하지 못해 한동안 발이 묶였다. 11월 19일, 결국 김구 주석은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해 공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서약서’를 대신한 이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중국 주둔 미군은 임정에 수송기를 제공했다. 수송기가 협소하다는 이유에서 환국은 1, 2진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1진 15명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아무런 환영 행사도 없이 미군이 제공한 승용차에 탑승해 ‘금광 재벌’ 최창학의 저택 죽첨장으로 이동했다. 임정에 헌납된 죽첨장은 이후 ‘경교장’이라 불렸다.
12월 1일 조소앙, 김원봉, 신익희 등 20여 명의 환국 2진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발한 수송기는 폭설 탓에 김포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비행하다가 군산 옥구비행장에 착륙했다. 고령의 임정 요인들은 엄동설한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이튿날 대전 유성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는 동아일보가 “15만의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도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파를 초월해 전 민중이 27년 만에 귀국한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물론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인공)’ 어느 쪽도 ‘망명정부’로서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 후원하에 정부 수립을 목표로 결성된 독촉은 임정의 ‘합류’를 요청했고, 인공은 임정에 ‘대등한 조건’으로 통합을 제안했다. 두 제안 모두, 임정 주도로 ‘과도 정권’을 구성하고, ‘국민 대표 대회’를 소집해 ‘정식 정권’을 수립하려 한 임정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는 정치 자금 제공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임정 환국에 앞서 ‘환국 지사 후원회(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에 전달할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임정이 귀국하자 송진우는 1차로 900만원을 전달했다. 하지만 김구는 후원회에 ‘친일 실업인’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 그 자금을 반려하려 했다. 임정과 후원회 연석회의에서 송진우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임정 요인 양반들,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 속에는 애국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장사꾼이나 죄인의 돈도 섞여 있는 법이오. 지금은 임정이 정부 행세를 못 하니까, 세금을 거둘 형편도 못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뜻있는 몇몇 분이 자진해서 성금을 갹출했는데 그걸 가지고 부정이다 뭐다 가릴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결국 임정은 그 자금을 받기로 했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 직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조소앙(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그 왼쪽부터 차례로 김규식·김구·이시영.
환영 대회를 앞두고 한민당과 임정 요인들이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양측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비난했다. 장덕수가 “그렇다면 해공(신익희),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항의하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뿐인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했던 송진우도 그날만큼은 모욕을 참지 않았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공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당신들이 중국에서 궁할 때 무엇을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는 줄 알아?”
환국 후 한 달 가까이 정국에서 소외되었던 임정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가 알려진 12월 28일부터 정당과 사회 단체의 반탁 성명이 줄을 이었다. 29일, 군정청 한국인 직원 3000여 명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 장군의 요리사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하지 장군이 관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31일, 서울 시내 경찰서 10곳 중 8곳의 경찰서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해 “앞으로 모든 경찰관은 김구 주석의 지시를 따라 치안 확보의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國字 제1호’), “일반 국민은 금후 임정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국자 제2호’)이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사실상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는 임정이 반탁을 빙자해 미 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라 격분했다. 미 군정은 임정 요인 전원을 체포해 인천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튿날인 1월 1일 오후 2시, 하지와 김구가 반도호텔 미군사령부에서 만났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배반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김구는 “집무실 카펫 위에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맞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반탁 운동을 계속하되 질서 파괴 행위는 자제한다”는 데 합의하고 끝났다. 그날 밤 8시,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김구의 대국민 선언문을 대독했다.
“나는 질서 정연한 시위 운동에 대하여 십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업을 중지하고 일제히 복업(復業)하기를 바란다.”
김구에 충성을 맹세한 경찰서장 8명은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1월 4일 전원 파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신익희가 CIC(미군방첩대)에 체포돼 이틀 동안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것 외에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임정 요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진압’된 임정의 무모한 정권 인수 시도는 김구와 임정에 대한 미 군정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이후 김구와 임정은 해방 정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0)
<참고 문헌>
김상구, ‘김구 청문회 2′, 매직하우스, 2014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정용욱,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민음사, 202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
최선우·박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연구’, 경찰학논총 제5-1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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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독립운동공원’ 조성…“대한민국 정통성 세우는 일”
효창공원 성역화 의미와 방향
보훈처, 묘역 짓누른 효창운동장은 철거
추가 묘역 확장·이장은 않기로
“민관 합의 거쳐 신중하게” 주문도
- 수정 2018-08-17 04:59등록 2018-08-17 04:59
국가보훈처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한 것은 늦게나마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앞두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겨레>가 입수한 국가보훈처의 ‘효창공원 성역화 사업 추진방안 등 검토(안)’ 보고서를 보면, 보훈처는 독립운동기념공원 추진 배경으로 “(2019년)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선양 및 국민 통합을 위해 독립운동가 묘소가 위치한 효창공원 성역화를 각계각층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한겨레>에서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기획보도로 지속적으로 관련 사안을 보도하고 있고, 독립단체에서도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보고서는 지난달 작성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꾸준히 독립운동가의 역사성 복원을 주장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이라며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효창공원 성역화 의지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월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 하나 없다. 적어도 효창공원에 독립열사들을 모시는 성역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는 당대표 시절인 2015년 2월9일에도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후손으로서 제대로 도리를 다하자면 효창공원 일대를 우리 민족공원·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고, 중국에서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다시 봉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기념공원 조성 사업의 큰 방향은 정해졌다. 현재 용산구가 근린(동네)공원으로 관리하는 효창공원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훼손하기 위해 만든 효창운동장을 철거하는 일이다. 다만 정부는 현재 효창공원에 조성된 묘역 외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추가로 조성하지는 않을 방침이다. 이성춘 보훈처 보훈선양국장은 “효창운동장 독립공원화 사업의 핵심은 효창운동장 철거”라며 “효창공원 인근 주민들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추가로 독립운동가 묘역을 새로 마련하거나 이장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들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은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23개 독립운동가단체가 속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효창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등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세운 인물들로 그분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가 늦게라도 이뤄지게 돼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 연합회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월진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단체들이 다수 가입해 있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74)씨는 “일생의 소원이 이뤄지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교훈 삼아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과거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톱다운 방식의 정부 주도 사업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의견을 모아 추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용역을 발주하기 전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주민 대표, 축구협회, 노인회, 역사단체, 유족 등 모든 관련자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기구를 만들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했다.(11)
<주>
(1) https://v.daum.net/v/20240925131856883
(2) https://v.daum.net/v/20240910202813668
(3) https://v.daum.net/v/20240908193850211
(4) https://v.daum.net/v/20240826050351955
(5) https://v.daum.net/v/20240825072102663
(6) https://v.daum.net/v/20240816093616340
(7) https://v.daum.net/v/20240815050501902
(8) https://v.daum.net/v/20240813060035753
(9) https://v.daum.net/v/20240727060023438
(10) https://v.daum.net/v/20240706004527629
(11)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공원’ 조성…“대한민국 정통성 세우는 일” (hani.co.kr)2018-08-17
<참고자료>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항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반가의 후손[3]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4],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5][6]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19년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 운동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남북 협상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 선거 출마, 건국실천원양성소 창설 등 정치 활동과 민족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후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 박정희 정부 시절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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