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주민 3000명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 만세운동이다. 시위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명이 다쳤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18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아우네 독립만세운동’ 102주년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의 의거와 죽음을 ‘불멸의 위훈’으로 기린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추도사가 복원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김구 선생의 친필로 작성된 유관순 열사 추도사 등 희귀 기록 4건(99장)를 복원해 공개한다”고 31일 밝혔다. 이번에 복원된 자료는 1947년 11월 27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제막 때 헌정된 김구 선생의 추도사와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이다.
김구 선생의 친필 추도사에는 “유관순 열사의 거룩한 의거와 숭고한 죽음은 일월같이 빛나고 빛나 천고 불멸의 위훈을 세운 것이다….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달성하자”는 염원이 담겼다.
당시 문교부장이던 오천석의 추도사도 복원됐다. 이 기록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캄캄한 이 강산에 봉화를 높이 밝혀 민족의 갈 길을 보여준 이 거룩한 지도자, 대적의 위세에 눌려 헤매는 수천 무리 앞에 깃발을 두르고 뛰어나서 지휘한 대담한 용사”로 표현했다.
특히 유관순 열사의 사촌언니이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 계획 및 전개에 가담한 유예도(1896~1989)지사(志士)의 독사진도 복원돼 최초로 공개됐다.
김구 선생의 추도사는 유관순열사기념관 전시관에서 4월 1일부터 관람할 수 있으며, 그 외 기록 원문은 전국박물관 소장품 검색 사이트인 e-뮤지엄(www.emuseum.go.kr)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약 100년만에 유관순(1902~1920) 열사를 추모하는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었다.
▲ 뉴욕타임스가 다룬 유관순 열사 부고기사.nyt캡처
NYT는 28일(현지시간) 인터넷판에서 유관순 열사의 죄명·형량이 적힌 서대문형무소 기록카드, 유관순 열사의 영정사진 등을 함께 올리면서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라고 추모했다. 1919년 봄, 16세 소녀가 한국 독립을 위한 평화 시위를 벌였다고 소개했다.
유관순 열사의 출생과 집안 분위기, 기독교 신앙에서부터 이화학당 시위에 참가하고 고향 충남 천안의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과정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또 서대문형무소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1920년 9월 순국 직전에 썼던 “비록 손톱이 빠지고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가고, 손과 발이 부러진 이런 육체적 고통은 조국을 잃은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유일하게 후회되는 것은 조국에 받칠 목숨이 더 없는 것”이라고 쓴 유관순 열사의 글도 소개했다.
신문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2015년 5월 이화여대에서 명예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유관순 열사를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 잔다르크에 빗댔다고도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곧바로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3·1 운동은 한국의 민족단결을 일깨웠고 일제 저항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가 유관순 열사를 순국 98년만에 다루게 된 것은 기획연재 ‘간과된 여성들’(Overlooked) 시리즈의 일환이다. 신문은 “1851년 창립 이후로 주로 백인 남성들의 부고 기사를 다뤘다. 이제 주목할 만한 여성을 추가하려고 한다. 더는 놓치지 않겠다”고 ‘뒤늦은’ 부고 기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특히 지난 8일 110주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영국 여류작가 샬럿 브론테(1816~1855),중국 여성혁명가 추진(秋瑾.1875∼1907), 인도 여배우 마두발라(1933∼1969)를 비롯해 여성 15명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다. 이기철 기자 chuli@seoul.co.kr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102년 전 김해 장유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과 운동을 주도한 아들의 투옥·재판 등을 어머니가 절절하게 기록한 희귀자료가 복원·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경남 김해시의 독립운동 기록인 '김승태만세운동가'를 복원해 공개했다고 25일 밝혔다.
'김승태 만세운동가'는 1919년 장유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승태의 모친 조순남 여사가 만세운동 전후 약 1년 동안 직접 보고 겪은 바를 내방가사(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문학 형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1919년 만세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을 확산, 그해 4월12일에는 김해 장유지역에서 3천여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해 3명이 순국하고 12명이 투옥됐다.
김승태는 당시 장유 무계리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행진에 앞장섰고, 이로 인해 징역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총 37쪽 분량의 김승태 만세운동가에는 시위 모습부터 연행 투옥, 재판, 출소 이후 분위기 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특히 일본 기마대의 시위대 연행에 "일본의 득세함을 감당할 수 없어 순사(巡査) 순검(巡檢) 폭력에 떨치고 일어나니 불쌍한 백성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 남은 백성들은 유죄·무죄를 가려 형벌에 처해졌다. 분노한 백성들을 더욱 조여 매어 옥에 가두고 허리에 철사로 줄줄이 매어서 끌고 가니…"라고 적는 등 처절했던 현장의 모습을 담았다.
이홍숙 창원대 외래교수는 김승태 만세운동가에 대해 "당대 여성으로서 조순남 여사의 남다른 역사의식이 드러나며, 여성의 생활에 치중된 다른 내방가사를 뛰어넘어 차별화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조순남 여사의 '김승태 만세운동가' 복원 전후
[국가기록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승태 만세운동가는 이처럼 독립운동 기록물이자 보기 드문 여성 독립운동가의 문학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훼손된 부분이 많았다. 한지에 먹을 사용해 한글로 작성됐는데 앞·뒤 표지가 없거나 찢겨있고 일부는 잉크가 심하게 번져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지난해 5월 김해시에서 국가기록원에 복원 지원 의뢰했고 국가기록원이 약 3개월간 복원처리를 진행했다.
먼저 1단계 디지털 복원으로 적외선·자외선 광원을 활용해 글자를 판독했고, 2단계에서는 종이의 성질이 변하지 않도록 흡입장치와 여과수를 써서 번진 잉크 등을 제거하는 수작업을 장시간 반복했다.
이를 통해 그동안 확인이 어려웠던 글자의 가독성을 높이고 표지를 만드는 등 보존성도 보완했다.
이번에 복원된 '김승태 만세운동가'는 국가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으며, 소장처인 김해시청 홈페이지에도 공개될 예정이다.
최재희 국가기록원장은 "역사성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 기록물을 복원할 수 있어 뜻깊다"며 "이번 김승태 만세운동가 복원·공개가 독립운동 정신과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까.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독립청원서 작성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파견 강덕상의 ‘여운형…’ 방대한 자료균형적 해석
지난해 12월 초 국내에 번역·출간된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 시가현립대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은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강 교수는 자신이 “평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운동사론”이라고 한 그 책에서 독립운동 세력이 3·1운동과 밀접하게 얽혔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자세하게 논하면서 몽양의 역할에 대해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은사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운동사를 천착해온 이정식(77)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경희대 석좌교수의 <몽양 여운형>(서울대 출판부 펴냄)은 <여운형 평전 1>과는 또 다른 각도로 몽양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그것이 이룩한 성취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요소들을 보탰다. 특히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몽양이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쪽 승리로 끝난 1918년 11월28일 당시 상하이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교민친목회(그 다음해 초 교민단으로 바뀌고 몽양이 단장이 됨) 총무를 맡고 있던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를 피압박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한 주중 미국대사 내정자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크레인을 직접 만난 몽양은, 그해 여름 상하이에 와 있던 8살 아래의 와세다대 출신 장덕수 등과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톈진으로 망명한 김규식을 불러 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했다. 김규식이 상하이를 출발한 것은 1919년 2월1일.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경주됐으나 오직 김규식만 성공했다. 파리행을 토의할 때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쪽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이란 망한 나라가 존재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발언권도 없고 누군지조차 모를 자신에게 회의 참석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정식 교수는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씨를 만나 책에 인용한 그 얘기를 확인했는데 김규식 평전까지 썼던 자신의 뒤늦은 깨달음을 탓하면서, 도쿄와 서울에 전달된 그 말이 3·1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조직하고 주동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런데 2·8선언 직전 주동자였던 최팔용을 움직인 것은 상하이에서 도쿄로 잠입한 장덕수였다. 장덕수를 일본과 조선에 파견한 것은 몽양이었고, 거사 계획을 알리고 김규식 여비를 모금하는 것이 장덕수의 주요 임무였다.
이정식 교수는 중국 5·4운동까지 촉발한 3·1운동 발발 이후 전도사 여운형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위상이 바뀌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광복 뒤의 일들만 가지고 몽양을 평가하지만 그 기간은 “그의 60평생의 극히 짧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며, 5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한국민족주의운동사 연구 “거의 모든 장면”에서 몽양과 마주쳤다고 강덕상 교수와 꼭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강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이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세밀함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며, 그 때문에 자신은 몽양의 삶 전체를 추적하는 전기를 쓰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해석” 쪽으로 집필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 역시 8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여운형 평전 1>은 왜곡되거나 무시당한 몽양의 일생과 시대상을 구체적 사실들을 통해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일로매진했고, <몽양 여운형>은 사실들의 중층적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면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을 연구하여 전기를 쓰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바 있지만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교수는 몽양의 사상이 ‘모호한 팔방미인’이라거나 그를 ‘공산주의에 도취된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해서는 그에게 맞지 않는 “사상적인 틀을 무리하게 맞춰보려고” 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 섬에서 3·1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꼭 100년 전 봄, '독립(獨立) 만세(萬歲)'의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이 한반도의 온 산하를 덮었듯 남도의 작은 섬 소안도에선 1년 365일 1500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의 주민과 초등학생들이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을 맞아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항일의 섬'이라 불리는 소안도의 주민들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지 불과 14일만에 완도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으며, 1920년대 섬 주민 6000여명 중 800명이 '불령선인'으로 찍혀 총독부의 감시를 받았을 정도로 격렬하게 항거했다.
전남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닿는 곳. 이곳을 운항하는 세 척의 배 이름부터 '대한' '민국' '만세'호다. 선착장에 도착하는 순간 이곳을 왜 '태극기의 섬'이라 부르는지 실감하게 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 3m 간격으로 세운 깃대마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학교와 관공서는 물론 집집마다 빠짐없이 태극기를 달았다. 소안초등학교 6학년 김유준(13)군은 "학교 선생님과 동네 어른들로부터 거의 매일 항일운동 이야기를 들어서 3·1운동이 일어난 100년 전이 그렇게 오래전 일 같지 않다"며 웃었다.
"한마디로 '항일(抗日)의 섬'이자 '민족의 섬'입니다." 이대욱(66)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이 말했다.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4일 만인 3월 15일 소안도의 독립운동가들이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해 완도읍 장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완도군민과 천도교인·기독교인 등 1000여명이 동참했다. 소안도민들이 주도한 이 '3·15 만세운동'은 유관순의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보다 보름이나 빨랐다. 소안도에선 해마다 3월 15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연다.
2003년 복원된 사립소안학교 교사.
19세기 말부터 광복까지 오래도록 지속된 끈질긴 항쟁이었다. 이 회장은 "1920년대 소안도 주민 6000여명 중 800명이 총독부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돼 감시를 받았다"고 했다. 섬 주민 중 광복 후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만 89명이다.
함남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으로 꼽히는 소안도의 항쟁은 '항일의 종합판'과도 같았다. 평화적 시위와 무력 항쟁, 교육 운동과 노농(勞農) 운동, 비밀 결사와 법정 투쟁이 한곳에서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접장 7명이 소안도에서 체포돼 그중 3명이 처형당했다. 1909년에는 의병이 주도한 '당사도 등대 습격 사건'이 소안도에서 발생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소안도를 비롯한 전남 남해안의 섬들은 동학운동의 전통으로 인해 항일운동의 뿌리가 깊은 곳"이라고 했다.
소안도 출신으로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송내호(1895~1928) 등이 항쟁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완도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송내호는 1927년 좌우를 망라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창립 발기인 35인 중 한 명으로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 주필 안재홍 같은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1923년 개교한 사립소안학교는 '배움만이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도민의 의자가 표현된 교육 기관이었다. 학교 이름에 '사립'을 붙인 이유는 '일제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학교를 세웠다'는 의미다. 일장기를 달지 않고 일본 국경일 행사를 거부하던 이 학교는 1927년 강제 폐교됐고, 주민들은 격렬한 복교 운동을 벌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섬마을 학교의 폐교 사건은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정신은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2003년 사립소안학교 교사가 복원됐고, 그 옆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세워졌다. 2004년엔 기념탑이 건립됐다. 2013년에는 온 마을이 국기를 다는 '태극기 섬 선포식'이 열렸고 2017년엔 군(郡)에서 '소안도는 연중 태극기를 달 수 있다'는 조례를 만들었다. 학생 수 90명의 소안초등학교에선 해마다 3월이면 백일장 대회를 연다. 지난해 5학년 이은비 학생은 이런 시를 썼다. "마치 소안도에는/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커다랗고 커다란/ 애국심이 땅에 묻혀/ 나무도 새도 노래하는 듯하네."
"의리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신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 무퇴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일어나면…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할 것도 없도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 독립 만만세."
1983년 11월, 도산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집에서 문서 한 장이 발견됐다. 한지 위에 순한글로 1291자, 도도한 문체와 질풍노도의 기백이 넘치는 이 문서 제목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 3·1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선포한 독립선언서 수십 종 중에서 여성 목소리로만 이뤄진 것이었다.
◇"여성의 힘으로 민족 독립 이뤄야"
선언서 작성 시기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9년 2월.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이 선언서를 우리 동포가 많이 이주한 간도 땅 지린(吉林)에서 기독교계 젊은 여성들이 썼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이 독립운동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겁나의(오래된)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라." 선언서에서 돋보이는 것은 상무(尙武) 정신이었다. 남자와 동등한 국민 된 여성도 성력(誠力)을 다하면 민족 독립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며, 여성의 힘은 용기와 고매한 지식을 가진 남성 영웅호걸을 능가할 수 있다고 외쳤다.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선언서에 서명한 여성들은 과거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처럼 '누구의 처' '누구의 어머니'로 등장하지 않고 제 이름 석 자를 당당히 밝혔다.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기 시작해 '개인'으로 우뚝 선 여성들이 거대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밝힌 이 선언서는 이후 미주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를 고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합니다." 1919년 2월 6일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며 웅변대회를 열었을 때, 여학생이 소외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여성 친목회 회원 황에스터(1892~1971)가 분연히 일어나서 한 말이다.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보기 드문 여성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3·1운동은 민족운동 전선의 남녀 성차(性差)를 비로소 극복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름 없는 숱한 여성들이 전국에서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여성들 사진이 있다. 일본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실린 이 사진에선 어두운 색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로를 걷고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이 옷은 당시 교복으로, 사진 속 여성들은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상하이 대한적십자회가 1921년 발행한 사진첩에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죄목으로 포승에 묶인 채 일경에게 끌려가는 두 여성의 사진이 있다. 그들에게서 위축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망각 속에서 꺼내야 할 이름들"
여성들이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대표적 지역 중 한 곳이 호남이다. 광주 수피아여학교(3월 10일), 전주 기전여학교(3월 13일), 목포 정명여학교(4월 8일) 등 여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수피아여학교의 만세 운동에는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김마리아(1892~1944)가 은밀하게 교사인 언니 김함라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 주고, 교사 박애순이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등 여성 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를 벌이던 여학생들은 무장한 일본군 기마 헌병대가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우리 발로 경찰서에 가겠다"고 외치며 경찰서 앞마당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기개를 보였다. 그날 체포된 100여 명 중에서 80여 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3·1운동의 '수레바퀴' 중 하나였던 여성 독립운동가는 상당수 잊혔다. 지난해 8월까지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은 1만5052명 중 여성은 외국인 4명을 포함해 325명, 전체의 2.1%에 그쳤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지난해 국가보훈처의 의뢰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한 결과 모두 202명을 새로 찾아냈는데, 이들 중 3·1운동 관련자는 35명이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은 "독립운동은 여성의 참여 없이는 지속 불가능했다"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여성들의 삶을 망각 속에서 꺼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일 낮인데도 행인 한 사람 찾아보기 힘든 시골 마을이었다. 수원 시내에서 차를 타고 50분 정도 가면 닿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이곳이 100년 전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쟁이 벌어진 지역이라고는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화수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독립운동기념비만이 그때 흘린 피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당시 주민들이 공격한 일제의 주재소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마을 하나가 불타 없어진 학살의 현장이었다. "28명이 살해당한 인근 제암리보다 더 큰 규모의 피살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국의 3·1 만세운동 중에서도 유례 드문 공세적 항쟁이 일어났던 지역인데도 세상엔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죠." 동행한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설명했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쟁이 벌어졌던 경기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일대의 현재 모습. ①일제의 학살과 방화로 전소된 기와집이 있던 곳. ②주민들이 습격한 주재소 위치로 추정되는 곳. 지금은 화수초등학교 운동장이다. ③화수초 정문 옆에 있는 3·1독립운동기념비. ④주민들이 총을 쏘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곳. ⑤올 초 항쟁지를 방문할 사람들을 위한 ‘방문자센터’가 들어설 곳. ⑥우정면·장안면 일대 주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이동했던 길.
피해는 참혹했다. 사건 직후 화수리를 방문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40채가 넘는 가구 중에서 18~19채만 남고 나머지는 불타 폐허가 됐다'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4일 새벽, 집이 타는 소리와 연기 냄새에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은 일본 군대의 방화로 마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모습을 목격했다.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은 주민에게 무차별 발포하고 몽둥이로 구타했다. 온몸에 72군데나 난도질당한 사람도 있었다. 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거나 어린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황망히 산으로 몸을 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갔고, 이웃 마을로 달아난 이들은 문간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굶주려야 했다.
1919년 4월 일제에 의해 학살된 형제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화수리의 아이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자에 실린 사진이다.
일제의 이 만행은 독립운동 진영에도 충격을 가져왔다.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자는 천으로 덮인 형제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두 화수리 어린이의 사진과 함께 희생자를 애도하는 주요한의 시 '대한의 누이야 아우야'를 실었다. '화수리 우거진 풀밭이 무도(無道)의 불에 재만 남을 때, 죄 없는 너의 두 다리가 야만한 왜병의 거친 손 밑에….'
화수리 항쟁의 배경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면사무소는 지세·호세부터 도장세(屠場稅)·연초세에 이르는 온갖 세금을 주민에게 부과했고, 모포 만드는 일과 송충이 잡는 일에 수시로 동원했다. 바다에 접한 입지 조건도 한몫했다. 일제는 이 지역에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벌여 주민과 인부들에게 과중한 노동을 강요했고, 일본인 감독들은 술만 마시면 부녀자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 일대가 독립운동 조직이 와해되지 않고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는 시각(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도 있다.
화수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주민 2500여 명은 만세 시위 거사에 나섰다. 주도자는 백낙열(천도교), 김교철(기독교), 차병한(유교) 등 여러 종교를 망라했다. 박환 교수는 "당시 우정·장안면이 2400여 호 규모였으니 한 집당 한 명꼴로 전 주민이 항쟁에 참여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총을 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처단했다. 25세 새파란 나이에 주민의 뺨을 때리고 위생검사로 모욕을 주는 등 조선인을 학대하던 순사였다. 주재소가 전소된 뒤 주민들은 해산했지만 이튿날 새벽 일본 군대의 잔학한 보복을 맞게 된다.
당시 화수리에서 가장 컸던 기와집이 전소됐다는 얘기가 여러 기록에 나온다. 현재 화수리 이장인 송진석(62)씨는 "그곳은 화수리 787, 788번지로 비닐하우스와 폐방앗간이 있다"며 "근처 땅을 파면 기와가 많이 나오곤 했는데, 어렸을 땐 거기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가지 않았다"고 했다. 김종구 화수초등학교 교장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화수리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놀란다"며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화성시는 화수초 옆 옛 보건소 건물을 '방문자센터'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오는 삼일절 이전 완공할 계획이다. 화성시청 최현순 독립기념사업팀장은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화수리 3·1운동을 알리고자 당시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던 길을 역사 탐방로로 만드는 '만세길 조성 사업'의 일환"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가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덕수궁으로 달려간 순종이 함녕전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종은 흰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향년 68세,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은 망국(亡國) 9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전국으로 번진 '고종 독살설'
승하 직후 '황제 폐하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도 나붙었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 시종관 한상학, 자작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다. 독살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개화파 인사 윤치호의 일기다.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전한 말을 기록한 것인데,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거뒀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시신의 이는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는 내용이다.
1919년 2월 28일 고종의 국장 예행연습 때 서울 광화문통 기념비전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덕수궁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의 모습. 오래도록 3·1 운동 당시의 만세운동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아래 왼쪽 사진은 1918년 1월 21일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황후(순종 비), 덕혜옹주다. 오른쪽 사진은 1918년 1월 15일 신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만년의 고종(가운데).
독살 관련 정보는 당시 일본 궁내성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굴한 일본 궁내성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등장하는 정보는 이런 것이었다. 초대 조선 총독이자 전 총리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시켜 이태왕(고종)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친일파로 일본의 작위를 받은 윤덕영과 민병석 등을 시켜 태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고종, 밀사 파견과 망명 기도"
데라우치가 고종에게 전달하려 했던 그 '뜻'이란 무엇일까? 구라토미 일기 중 다른 궁내성 관리의 전언에 그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1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협상을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담은 '14개 항'을 발표했다. 여기에 고무된 고종이 밀사를 보내려 했고, 이 때문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 된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고종이 밀사로 파견하려고 했던 사람은 고종의 5남 의친왕과 김란사 이화학당 교수일 것이라고 본다. 기독교 민족운동가 신흥우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이 김란사에게 한 궁녀를 보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원본을 찾으면 그걸 가지고 파리에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보이며 도와달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기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국제 정세가 일변하는 상황에서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워 동의를 얻고 베이징(北京)에 행궁을 마련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고종이 독립을 도모하다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3·1 만세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고종이 독살 당했다고 믿은 전국의 백성들이 3월 3일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그대로 3·1운동 시위대의 일원이 됐으며, 각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학계에선 고종의 독살을 정설로 받아들이진 않지만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촉발한 민중의 울분이 '왕정 복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는 "고종이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새 국가를 세우자고 말할 수 없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곧 '민주공화정의 수립'과 동의어가 됐다"고 말했다.
26일 낮 도쿄 긴자의 '카페 파울리스타'엔 젊은이들이 북적였다. 샹들리에 아래 주홍빛 가죽 의자에 앉은 이들은 100년 전 맛을 재현한 '올드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정장 조끼를 갖춰 입은 바리스타는 "복고풍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고 했다.
1911년 문을 연 카페 파울리스타는 현존하는 도쿄의 카페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김동인이 문예지 '창조' 창간을 논의하기 위해 차를 마시고 커피를 즐겨 사간 곳도 파울리스타다. '문단 30년의 자취'(1948)에서 김동인은 1918년 12월 25일 밤 "요한과 나는 파우리스타에 들러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커피시럽을 한 병 사가지고 함께 내 하숙으로 온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현존하는 도쿄 카페 중 가장 오래된‘카페 파울리스타’의 내부.
카페 파울리스타는 아사히신문, 덴츠(광고회사 겸 통신사), 지지신보(時事新報) 등의 언론사와 가까운 데 위치한 덕분에 기자들과 작가들의 아지트로 이름을 알렸다.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에 정장풍 유니폼을 입은 10대 소년들이 5전짜리 커피를 나르는 이국적인 분위기도 도쿄 문화인들을 사로잡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칸, 구메 마사오, 시시 분로쿠 등의 글쟁이들이 주요 단골이었다는 게 이 카페의 자랑이다. 구보타 만타로가 "우리가 긴자에 나온다는 것은 곧 그 가게(카페 파울리스타)에서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라도 시간을 죽이는 걸 뜻했다"고 했을 정도다. 이들의 대화를 귀동냥하려는 젊은 문학청년들도 몰려들었다. 김동인 등 도쿄에서 유학하던 조선 문학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동인과 주요한은 "파우리스타의 커피시럽을 진하게 타서 마시면서" 1918년 크리스마스 밤에 열린 동경 유학생 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당시 집회에서 유학생들은 3·1운동을 진행할 위원을 선출하고 독립선언서 작성을 논의한다. "처음에는 화제가 그 방면으로 배회하였었지만 요한과 내가 마주 앉으면 언제든 이야기의 종국은 '문학담'으로 되어 버렸다. '정치 운동은 그 방면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는 문학으로―.' (중략) 그리고 문학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인제(同人制)로 문학잡지를 하나 시작하자는 데까지 우리의 이야기는 진전되었다."
다방의 문예 부흥 역할을 연구해온 신범순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전시 '커피사회'에서 김동인을 "근대 문인 중 최초의 커피 애호가"라고 표현했다. 그는 "최초의 근대적인 문학잡지 제목을 두고 커피를 마시며 밤새 논의하여 '창조'를 만들어낸 것"이라면서 "'창조'에는 밤을 새우며 문학의 불꽃을 만들어내려는 사유가 있고, 그 사유를 계속 깨어 있게 하는 커피의 맛과 향기가 깃들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