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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임기환교수는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벽화 제재의 풍부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림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그 이름과 설명이 묵서로 밝혀져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며, 벽화와 묵서 등 이 무덤에 담겨 있는 역사 자료의 가치로 보아 덕흥리고분을 현존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첫 자리로 꼽았습니다. [고구려사 명장면-26]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벽화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임에도 발굴단은 부랴부랴 12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한 달여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무덤은 널길,..
1979년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가 발견한 '충주고구려비'와 1997년에 발국한 고구려 아차산 보루를 알아봅니다. 1979년 2월 24일 향토연구모임인 예성동호회원들은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우뚝 서있던 비석에서 예사롭지 않은 명문을 읽어냅니다. 40여 일 뒤 ‘충주 고구려비’로 명명된 ‘국보 중 국보’ 명문비석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의 역사적인 발견 순간이었습니다. 조사단을 이끈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까지’ 소급해볼 수도 있겠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주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기호(혹은 글자, 문양)는 지난 100여년간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흩어진 3~7세기 고구려 유적의 토기와 기와에서 180건 이상 발견됐습니다. 학계에서는 문자설, 부호설 등이 나왔고 작고한 인기작가 최인호도 1990년대 펴낸 역사소설 ‘왕도의 비밀’에서 광개토대왕의 상징 문장이란 주장까지 내놓았지만 정설은 없습니다. 2024년 5월 10~11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주최 3회 한·중·일 목간연구 국제학술대회에서 고구려사 전문가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는 ‘고구려유적의 ‘#’자 출토현황과 그 의미’란 논고를 통해, 고구려 유물들을 둘러싼 주요 수수께끼로 꼽히는 ‘#’문양의 뜻을 두고 행운과 대박, 복을 비는 ‘대길’(大吉)’이며, 고구려 인이 창안한 이 기호가 백제와 신라는 물론 왜국까지 전파돼 ..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
이형구교수는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학계에서는 서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이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최근 정비된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태왕릉[오른쪽]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이른바 장군총을 장수왕릉(長壽王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 이 두 무덤이 모두 7층으로 축조된 피라미드형이다.집안의 장군총(將軍塚)동양 최대의 피..
이형구교수는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전기에 유행했던 돌무지무덤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는 발해연안의 신석기 내지 청동기시대에 동이족이 축조한 돌무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대릉하 유역 건평현 우하량 유적의 홍산문화시기[기원전 3500년경]의 계단형(階段形) 돌무지무덤은 피라미드(Pyramid)형 돌무덤의 대표적인 원형이다.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무덤인데, 돌각담 무덤이라고도 하고 적석총이라고도 하는 바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
천추총 천추총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집안 통구고분군을 이루는 6개 고분군 가운데 마선구고분군(麻線溝古墳群)에 속하는 고구려고분이며, 마선구평야에 위치한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입니다. 천추총(千秋塚)이라는 명칭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명문에서 유래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소화 10)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공식명칭은 ‘마선구 1000호묘’입니다. 천추총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을 잃었지만 원래는 10층 정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 평면은 한변 길이 63m 정도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10.9m, 파괴가 심한 동쪽은 7.9m 정도입니다. 무덤..
윤명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3) '옛 영토' 수복은 고구려의 국시 고구려 수도 국내성(중국 지안) 뒤편인 산성하 고분군. 원조선의 무덤 양식을 계승했다.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
성훈 "고구려와 대진국은 왕국인가 제국인가?"'환단고기'를 정사서로 인정하는 길 만이 민족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성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2/12 [19:54] 에는 김부식이 고의로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기록을 적지 않았으나, 에는 건원칭제한 고구려의 왕들이 아래와 같이 나온다. ( )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연호, 제황명) 1대 동명성왕(?) (다물, 고주몽 성제) 책봉기록 없음6대 대조대왕 (강무, 태조 무열제) 책봉기록 없음19대 광개토왕 (영락, 광개토경호태열제) 책봉기록 없음20대 장수왕 (건흥, 장수홍제호태열제)(진) 고구려왕낙안군공 (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송)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남제) 표기대장군21대 문자명왕 (명치, 문자호태열제)(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남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