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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한반도와 만주지역 무덤들에서 출토되어지는 모든 유물들의 통시적인 양식사를 고찰하지 않은 채 중국학자들이 북연 또는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받아들여, 한반도 남부와 만주 집안지역의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三燕)문화 즉 북방문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우리 문화를 보고도 우리문화인 줄 모르고 남의 문화라고 해놓고 거기서 다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를 한결같이 밖에서 찾아야 하는지 걱정이다. 평양성시기 고구려의 금관은 주변민족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馮素弗) 무덤 출토의 금제관식 및 금제관(그림 21, 22, ..

어떤 이유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장들이 각각 네 명이었을까? 이는 백제도 부여나 고구려처럼 중·전·후·좌·우의 오군 제도를 썼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 중군대원수가 되고 나머지 네 명은 각각 네 명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이유로 왕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대왕의 신하로서 왕을 겸했을까? 이것도 조선의 옛 제도에 입각한 것이다. 대왕은 ‘신한’의 번역어로 국가 전체에 군림하는 천자의 칭호이고, 왕은 ‘한’의 번역어로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小王)의 칭호였다. 중국 대륙의 국가 중에서 조선에 침입한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군대 규모가 십만 명에 달한 것은 탁발씨의 북위가 처음이었다. 그런 대군을 격퇴한 것도 백제 동성대왕이 처음이었다. 《위서》에서는 북위의 국치를 숨길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지 않았..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

거란은 송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고려와 전쟁을 세 차례 치르는데 이때 거란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 중에는 장구의 원형인 요고(腰鼓)를 그린 것이 있는데, 거란의 무덤 벽화에도 우리의 장구와 똑같은 북이 그려져 있다. 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된 것이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다. 그런데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는 아골타의 6대조를 고려에서 온 김함보(金函普)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나라와 한국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입력2008-08-31..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

김정일 정권 붕괴시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동요 막으려는 심모원려 “옌볜의 지식인 사회는 ‘술렁’,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용’” 한국의 북방사 연구 저작물 분석하는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들 고구려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東北工程’ 프로젝트 日本, 발해는 중국사로 고구려사는 한국과 중국사 양쪽으로 분류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한국의 역사 主權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도전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입력2003-08-22 13:25:00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담고 있는 광명일보 인터넷판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 중심의 사이트 지난해 초 기자는 교토(京都)에 있는 일본 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