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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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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송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고려와 전쟁을 세 차례 치르는데 이때 거란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집안에 있는 고구려 무덤 벽화 중에는 장구의 원형인 요고(腰鼓)를 그린 것이 있는데, 거란의 무덤 벽화에도 우리의 장구와 똑같은 북이 그려져 있다. 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몽골 초원의 패자가 된 것이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다. 그런데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는 아골타의 6대조를 고려에서 온 김함보(金函普)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나라와 한국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입력2008-08-31..

다음백과에 따르면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년)에 당과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패강(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를 당과 신라가 나누어 통치한다는 비밀협약 - 나당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치열한 전쟁을 전개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연결하여 신라를 협공하는 형세였고,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의 배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신라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신라는 고구려·백제가 침입할 때마다 당에 구원 사절을 파견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입장에서 고구려·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648년(진덕여왕 2) 두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적 결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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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2018. 3. 10. 03:36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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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8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고려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16세 예종 문효대왕(文孝大王), 23세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25세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 28세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 31세 공민왕 경효대왕(敬孝大王), 32세 강릉왕 우왕의 기사와 서희장군, 윤관의 여진정벌, 윤언이, 이존비, 이암, 정지상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태봉국(泰封國) 왕 궁예(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인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고안승의 먼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강(剛)이 술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하여 궁씨가 되었다.이보다 앞서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유민을 모아 안승을 후고구려 왕으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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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정권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7] 당연히 무신정권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지 한참 이후에야, 고려 말기의 각종 인재와 영웅들이 마구 출현한다. 즉 고려는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는 국가였으나, 무신정권이 새로운 고인 물이 되어서 100년 동안 열심히 고려의 인재 출현을 막았던 셈이다. 본인들이 문신들의 차별 때문에 국가를 점령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기존의 문신들보다 더욱 원칙 없고 지독하게 친목질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앞뒤 논리도 안 맞는 옹졸한 방식이었다.무신정권은 기존의 쿠데타 정권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