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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0)상나라와 한민족 中 경향신문 이기환기자 입력 : 2008.02.22 17:05은·부여는 ‘君子의 후예’ 풍류 즐기고 禮 중시 은(상) 마지막 왕 주(紂)의 악행에 대해 변명할 필요는 없다. 충신의 심장을 갈랐고, 육포를 뜨고 젓을 담가 맛보게 했으며, 녹대(鹿台)를 만들어 세금으로 거둔 돈을 가득 채웠으니까. 폭군은 더 나아가 수많은 악공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주지육림의 난행을 펼쳤다.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 것으로도 악명을 떨쳤다.(사기 ‘은본기’) 안양 인쉬 거마갱(車馬坑)에서 발굴된 마차유적. 은(상)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주(紂)왕을 위한 변명- 주왕의 악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지만 “악공..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차하이·싱룽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다. 그리고 상나라의 시조 설은 차하이·싱룽와 문화-훙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샤자뎬 하층문화의 주인공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 대를 거치면서 발해문명의 계승자들은 남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9)상나라와 한민족(上) 경향신문 이기환선임기자 입력 : 2008.02.15 ..

이렇게 고구려의 계보는 500여 년에 걸쳐 점차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해석을 해봄직하다. 멸망 이후 돌궐에 의탁했던 유민들은 중앙아시아와 이집트, 나아가선 동유럽에까지 진출해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모든 튀르크인의 선조’라 불리는 오구즈 칸을 시작으로 호라즘 샤, 오스만 튀르크 등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제국을 일궈나갔다. 온고지신이라 했던가. 코스모폴리탄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깃들어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역사 거꾸로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마지막 회)] 고구려와 튀르크 잇는 ‘미싱링크’ 킵차크 칸국월간중앙 입력 2020.03.30 17:06수정 2020.03.31 16:34호수 202004지면318면 동아시아(요나라 vs 금나라) 대..

결론적으로 고구려가 발해로 이어진 시대에 그들의 일부는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가서 예맥 칸국을 세웠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너머까지 미쳤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오늘날의 우리도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에 관한 안목을 넓히고, 동반자 입장에서 다가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중앙아시아 ‘중세 300년’ 호령한 예맥 칸국월간중앙 입력 2020.02.27 14:00 수정 2020.03.16 16:35 호수 202003 지면254면 750명 유민(遺民)으로 시작한 ‘고구려 굴기(屈起)’옛 고구려 출신 7개 부족 규합해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건국... 창업주 ‘샤드 토톡’, 연개소문 차남 남건(男建)의 후손? 중국 신장웨이우..

6세기 고대 튀르크인의 모습이 우리 선조와 닮은 까닭은?[구당서], 고구려 보장왕 가문과 유민이 서쪽 동돌궐로 갔다고 언급일부는 몽골, 카자흐스탄 등을 거쳐 동로마제국까지 진출했을 수도 ■ [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튀르크 14개 왕조의 뿌리, 고구려 고(高)씨 왕가월간중앙 입력 2020.01.31 10:55 수정 2020.02.11 17:06 호수 202002 지면242면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Issyk-kul) 호수 전경. 오늘날 카자흐스탄·중국 등과 국경을 맞댄 키르기스스탄 일대는 튀르크 부족의 주된 활동 무대였다. / 사진:보물섬투어 오랜 세월 튀르크 민족은 여러 갈래로 존재해 왔다. 유럽의 입구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 러시아 남시베리아의 타타리스탄인, 그리고 1453년까지만 해..

"고구려의 살수는 청천강아 아니라 중국 요녕성에 있는 '혼하'다" 2018년 3월 20일 문성재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교수는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에 대한 번역, 정밀해제 연구팀의 중간 연구결과를 분석하던 중 고구려의 살수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 문성재 교수 "고구려 살수는 청천강 아닌 요녕성 '혼하'"뉴시스 신효령기자 2018. 3. 20. 18:34 "고구려의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중국 요녕성에 있는 '혼하'다" 20일 문성재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교수는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에 대한 번역, 정밀해제 연구팀의 중간 연구결과를 분석하던 중 고구려의 살수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한..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

2016년부터‘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를 통해 이미 45회의 억지 주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고 시정을 요청하였으나 고대사학계에서는 학문적인 답이나 공개토론회 제안에는 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겨레가 역사의 처음부터 중국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거짓말투성이 시민강좌를 더 강화하고 있다. 새해에는 공개토론회를 통해 이런 것을 바로잡아 ‘한강의 기적’과 한류의 뿌리가 되는 민족 저력이 포함된 우리 겨레의 바른 역사를 복원하는 데 나라가 앞장서기를 바란다. ■ [민족NGO 새해 외침] 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기사입력 2018.01.02 17:04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0) '임..

유교사학이 중화사관이라는 틀 속에 우리 역사를 최초로 집어넣은 사건은,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표현했던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1135)과 그 실패 과정에서 드러난 선도(仙道:선불습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대충돌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루어졌다.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교 세력은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정치 표방을 합리화하고 유교사관 확립을 도모하였다. 한국사를 유교사관으로 해석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역사기록에서 배제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서술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4) 고대사 중심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한 김부식과 중화사관 도입K스피릿 입력 2022.05.1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