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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라羅직물과 견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겸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많은 양의 누에천(실크)이 출토되었다. 직물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복식유물의 한 구성부분으로 출토되었는데, 누에천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출토된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자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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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동부여 지역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근초고왕(부여계)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고(『日本書紀』神功 49年), 37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입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近肖古王).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반도 부여인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즉 4~5세기 경 대륙의 부여인들이 한반도로 거쳐 바다를 건너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4세기 전반에 규슈로 갔고, 이 지역을 정벌하고 야마도 왕조를 건설하는데 대략 1세기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 ***백제와 왜, 영원한 부여의 아들**"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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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敦煌)은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둔황에는 모두 4개의 석굴군이 있다. 막고굴(천불동), 서천불동, 유림굴, 수협구굴(소천불동) 등이다. 이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명사산 자락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데 동굴만 700여개, 이 중 불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이 492개다. 둔황 석굴사원 하면 대개 막고굴을 이른다. 북위 시대에 건축된 석굴은 36개다. 이어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했던 수나라도 막고굴 조성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110개, 당나라는 247개를 각각 만들었다. 석굴 내 벽화들이 대부분 황제나 지역 제후, 대형 사찰에 대한 그림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건축비를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 둔황 석굴사원건축비 낸 황제·제후 벽화 많아지금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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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伊水)가 흘러가는 양쪽에 용문산과 향산(香山)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수 양쪽에 솟은 두 산을 멀리서 보면 마치 문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을 ‘이궐(伊闕)’이라고 불렀다. ‘궐’은 문이라는 뜻이니, 이궐은 이수가 흘러가는 곳의 문을 의미한다. 서쪽 문에 해당하는 게 용문산(서산)이고 동쪽 문에 해당하는 게 향산(동산)이다. 이 두 산의 암벽에 마치 벌집을 뚫어 놓은 듯한 수많은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남북으로 1㎞에 달하는 구간에 2300여개의 석굴과 감실, 10만존(尊)에 달하는 불상, 2800여개의 비각제기(碑刻題記)가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엄청난 규모를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비율로 따지자면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이고, 당나라 때 조성된 석굴이 60%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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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석굴은 황제가 곧 부처라는 국가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중원에 들어온 이민족 왕조의 권력자들에게 서역의 포교승이 전해준 불교는 매혹적인 종교사상이었다.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세상 만물에 대한 부처의 자비와 포용을 강조했기에, 절묘한 통합의 통치이념으로 변용이 가능했다. 5세기 중엽 북위의 황제 문성제는 이런 배경에서 불교를 국가의 핵심적인 통치 종교 문화로 만들었다. 그는 부처로 격상된 선대 황제와 자신의 자태를 형상화해 거대한 실물로 남기길 원했다. 문성제의 치세인 화평 1년(460년)에 승려 담요가 주도해 선대 황제 5명의 자태를 모델로 이른바 담요 5굴을 뚫어 만든 것은 바로 그 결실이었고, 윈강석굴의 시초가 되었다. 북위 왕조가 만든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 윈강석굴의 16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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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8일 충남 천안 소재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 37) 교수는 중국 역대왕조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일대 출토 고대 묘지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100여 점을 헤아리는 고대 한인(韓人) 계통 사람들의 묘지명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왕조인 북위(北魏.386-534)에 들어가 후궁을 거쳐 황태후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출신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과 그의 딸과 사위이자 조카, 또 다른 조카 묘지명도 아울러 밝혀졌으며, 이외에도 주로 북위 왕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혹은 요동(遼東) 출신자나 그 후예 9명의 묘지명도 아울러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2006년 1월 2일 민경삼 교수는 고구려 이주민으로 중국 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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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만주지역 무덤들에서 출토되어지는 모든 유물들의 통시적인 양식사를 고찰하지 않은 채 중국학자들이 북연 또는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받아들여, 한반도 남부와 만주 집안지역의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三燕)문화 즉 북방문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우리 문화를 보고도 우리문화인 줄 모르고 남의 문화라고 해놓고 거기서 다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를 한결같이 밖에서 찾아야 하는지 걱정이다. 평양성시기 고구려의 금관은 주변민족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馮素弗) 무덤 출토의 금제관식 및 금제관(그림 21,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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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장들이 각각 네 명이었을까? 이는 백제도 부여나 고구려처럼 중·전·후·좌·우의 오군 제도를 썼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이 중군대원수가 되고 나머지 네 명은 각각 네 명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이유로 왕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대왕의 신하로서 왕을 겸했을까? 이것도 조선의 옛 제도에 입각한 것이다. 대왕은 ‘신한’의 번역어로 국가 전체에 군림하는 천자의 칭호이고, 왕은 ‘한’의 번역어로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小王)의 칭호였다. 중국 대륙의 국가 중에서 조선에 침입한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군대 규모가 십만 명에 달한 것은 탁발씨의 북위가 처음이었다. 그런 대군을 격퇴한 것도 백제 동성대왕이 처음이었다. 《위서》에서는 북위의 국치를 숨길 목적으로 이를 기록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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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