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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

2016년부터‘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를 통해 이미 45회의 억지 주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고 시정을 요청하였으나 고대사학계에서는 학문적인 답이나 공개토론회 제안에는 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겨레가 역사의 처음부터 중국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거짓말투성이 시민강좌를 더 강화하고 있다. 새해에는 공개토론회를 통해 이런 것을 바로잡아 ‘한강의 기적’과 한류의 뿌리가 되는 민족 저력이 포함된 우리 겨레의 바른 역사를 복원하는 데 나라가 앞장서기를 바란다. ■ [민족NGO 새해 외침] 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기사입력 2018.01.02 17:04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0) '임..

유교사학이 중화사관이라는 틀 속에 우리 역사를 최초로 집어넣은 사건은,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표현했던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1135)과 그 실패 과정에서 드러난 선도(仙道:선불습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대충돌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루어졌다.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교 세력은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정치 표방을 합리화하고 유교사관 확립을 도모하였다. 한국사를 유교사관으로 해석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역사기록에서 배제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서술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4) 고대사 중심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한 김부식과 중화사관 도입K스피릿 입력 2022.05.16 1..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 성헌식의 ‘대고구리’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입력 2013-08-0..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2006년 9월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열린 '동북공정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는 금·청나라 역사를 한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강단사학계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는 20일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를 만났다.서 교수는 "중국은 한국사 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2006. 9. 22. 그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전통..

■ 淸 제국 역대 황제의 성씨는 '新羅金氏'김운회 교수 2007-08-24 만주원류고가 말하는 청나라와 신라의 친연성 강희황제, 본명: 김현엽(金玄燁) 중국에는 지금 강희제의 일대기를 다룬 , 강희황제의 민간 암행기를 다룬 , 강희황제가 즉위하기까지의 청나라 초기 궁중비사를 다룬 등 청조와 강희황제를 조명하는 TV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중이다. 특히 는 근년에 제작된 것을 재방하는 것인데 극중 대만을 통일한 강희제의 업적을 통하여 최근 독립기도를 보이고 있는 대만에 대해 중국통일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중국 관방의 의지가 그 배경에 깔려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 소개된 바 있는 중국작가 二月河의 , , 의 제왕삼부곡 대하역사소설은 중국에서 공전의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중국 역사상 한..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팔기제도를 편성 완료했다. 1621년에 심양과 요양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二元)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중립외교 정책을 택했던 광해군을 좋아 낸 인조가 친명정책으로 선회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여 신복(臣服)시켰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조선 사람들에 의한 후고(後顧)의 걱정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알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