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5 09:49

<월간조선> 6월호에는 북방민족사학자 주몽예씨의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王家)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다소 \'도발적인\' 기고문이 한편 실렸다. 주몽예씨는 칭기스 칸 연구를 위해 29개국 언어로 된 사서를 읽고 이를 전부 비교대조한 결과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고문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주몽예씨의 본명은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을 펴낸 전원철 박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pub>은 그가 칭기스 칸 연구에 뛰어든 계기와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직접 만나 보았다. 인터뷰 분량이 길어 3회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칭기스 칸은 발해 왕가의 후손"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
2015년 6월호 <월간조선>에는 아주 흥미 있는 기고문 하나가 실렸다. 주몽예라는 북방민족사학자가 쓴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渤海) 왕가(王家)의 후손이다!>이라는 장문의 기고문이 그것이다.
 
이 기고문에서 필자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12세기에 아시아-중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영웅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주몽예씨의 기고문을 보면, 막연히 ‘몽골과 우리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칭기스 칸은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제19대손이라는 것을 칭기스칸의  ‘족보’  계보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역사언어학적 고증을 통해 칭기스 칸의 어릴 적 이름인 테무진은, 그가 강인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가리키는 ‘철인’ 이라는 일반적인 풀이와는 달리,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또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도 일반적으로 ‘왕중의 왕’ 이라는 일반적 풀이와는 달리, 대조영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에서 나온 것으로, 곧 ‘발해국왕’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월간조선> 기고문을 <조선pub> 사이트를 통해 소개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가 칭기스 칸을 연구하게 된 배경과 <월간조선> 기고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몽예씨를 직접 만났다.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북방민족사학자 전원철 박사.
사실 ‘주몽예’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전원철이며, 주몽예는 ‘주몽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1. 2권》 (비봉출판사)을 펴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외무부 유엔국 유네스코담당자문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을 거쳐, 미국에서 법학박사를 딴 후, 미국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고 되어 있다.
 
2권으로 이루어진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은 <월간조선> 기고문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를 추적한 광범위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단지 ‘세계정복자’로 알려진 몽골의 위대한 인물 칭기스 칸의 선조가 우리의 고구려-발해 왕가임을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왔던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몽골비사》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大)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孼)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金)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년(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또 그는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 우리 학자들이 믿어온 청나라의 시조 아이신교로(愛新覺羅:애신각라) 누르하치 역시 고구려-발해-고려와 한 가문인 금나라 황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제국-청나라가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들 왕조를 창조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징기스칸>의 한장면.
한낱 소수의 양치기 야만 유목인이 세계정복?
 
우리는 그동안 칭기스 칸에 대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을 통일한 ‘좀 더 힘 있는’ 야만적 유목민 부족 출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천 년 간 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민족이 갑자기 부족 통일을 이루고, 여러 문명 세계를 정복한 동기와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인 전원철 박사의 말대로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칭기스 칸과 그의 원정대는 더 이상 ‘말을 탄 야만 유목인’이 아니며, 그가 벌인 정복활동도 그저 영토 확장이나 재물 약탈, 혹은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철 박사는 “그 이전에는 세계지도에 없는 땅에서 느닷없이 전 세계를 떨게 한 ‘세계 정복자’가 탄생했다”며 “아무런 문화, 전통, 기술, 조직력의 배경이 없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한낱 양치기 유목민 무리 따위가 자기보다 인구면에서 1000배가 더 되고, 또 당시의 온 세상을 지배하던 여러 개의 문명세계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정복하는 일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의 몽골족은 뛰어난 무기 제조술과 오랫동안 집적된 문화와 정보전달체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겸비하여, 더불어 잘 정비된 사회조직을 가진 고구려-발해-후고구려의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또 여기에다가 그들이 유목민의 말 타는 기술을 잘 조합했기에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그동안 주몽예라는 필명을 사용해 온 이유에 대해서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근 11~2년 전 제가 ‘지나(China)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중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그 나라의 관보인 <광명일보>가 ‘고구려역사는 중국변방의 역사이다’라는 제목으로 이른 바 ‘동북공정’을 발포하는 충격적인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중국이 우리 고대사를 통째로 빼앗으려 한다’며 온 나라가 수년째 격노하며 들끓었고, 두 나라 간의 심각한 외교문제가 되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 있을 시절이었는데, 저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 그 충격적인 글을 찾아 읽어 보고 분노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 글을 썼는지를 원문을 통해 찾아보니, 그 글의 저자가 ‘변방의 무리’라는 뜻인 ‘변중(邊衆)’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중국(中國)이라는 왕조는 역사상 존재한 적 없어"
 
 
전원철 박사가 최근 펴낸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 2》.
전 박사는 이를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변방의 무리(邊衆)’따위가 어찌 ‘주몽의 후예’에게 조상을 훔쳐갈 음모를 꾸미는가,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조상까지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주몽의 후예이다‘라는 뜻으로 ‘주몽예’를 저의 호를 삼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전 박사는 “우리가 중국을 일반적으로 ‘중국(中國)’이라고 부르는데 이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영어로는 ‘Peoples’ Republic of China, 곧 ‘지나(차이나) 인민공화국’이고, 정식국명도 ‘중화인민공화국’이므로 ‘중공국’ 또는 ‘지나국’이라고 약칭하여 부를 수는 있어도 ‘중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좀 귀찮아도 정식국명을 써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을 국명으로 쓴 이른 바 ‘중국왕조’는 전혀 없으며, 원국, 명국, 청국으로 썼을뿐이고, 이 왕조의 외교무대에서 간혹 ‘중국(中國)’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이 칭호는 단지 외국을 속국으로 간주하고 자기를 종주국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외국인들에게 대해 스스로를 높여 쓰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걸 따라서 그렇게 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우리가 스스로 ‘지나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속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에 펴낸 저서에서도 ‘주몽예’라는 호를 계속 쓸 것을 고집했으나, 소설도 아니고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 작업인 만큼 본명을 밝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를 마침내 수락하여 진짜 이름으로 책을 냈다고 밝혔다.
 
“칭기스 칸의 집안은 자기 조상이 패배한 전쟁의 기록을 후손이 절대 잊지 않도록 기록하였고, 마침내 승리의 기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비록 발해와 후고구려가 망해 이 땅을 떠났지만 우리 피붙이로 났던 그들이 나중에 전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역사의 발굴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알고, 또 우리의 미래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전 박사의 서가 책꽂이에는 온갖 언어로 쓰여진 고대 사서의 원서가 잔뜩 있었다.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부랴트,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에 관한 책들. 손 옆의 두꺼운 책은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書 )》.

 
책꽂이 일부를 좀 더 확대한 모습. 두꺼운 페르시아어 본 《승리의 서( 書 )》 옆에 인도 구르칸 조의 《아크바르의 서》>와 그 옆의 주베이니의 《선별된 역사》 등이 보인다. 


 
부랴트어 본 《몽골비사》, 타타르어 본 《승리의 서( 書 )》, 《투르크의 계보》 등이 꽂혀 있다.  

 
29개 언어로 된 고대 사서를 전부 독파
 
그는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연구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했다고 했다.
 
서양에서 옛날에 발간된 라틴어 기록들을 비롯하여, 중세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사서는 물론, 동방의 《몽골비사》 등 중세 몽골문, 청대 만주어 본,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및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등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여, 인명 및 지명을 각 시대별 언어의 변천과정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저는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shejare, 족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여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만 대충 맞추어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그들의 활동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우리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스 칸의 계보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십수개 민족어로 쓰인 중요 원본사서의 해독만 하더라도 전문역사가나 전공자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려울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 원서의 해독뿐 아니라 그 내용을 대조, 비교, 교차확인까지 해내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연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동서양 역사학자들 여럿이 모여 함께 모여 함께 해야 할 연구를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 결과 1162년 칭기스 칸 탄생 이래 853년간 숨겨진 비밀, 아니, 그 선조로부터 치면 고구려 멸망 후 1300년 동안 숨겨진 세계사적인 대비밀이 드러났다고 자부합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학자는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고 ‘세계사 1000년 간을 다시 써야 할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결국 <월간조선>에 기고한 그 ‘담대한’ 기고문은 자신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를 사학계의 전문학자가 아닌 일반독자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한 그 책의 일부를 요약한 내용이었던 셈이다.
 
'몽골'은 칭기스 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에서 온 말
 
소위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무리없는 생활을 누리던 그는 왜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갑자기 칭기스 칸 가계 연구에 뛰어든 것일까? 전 박사는 우선 몽골과 칭기스 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0년 우리나라가 몽골과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는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갈까 취직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한국에 유학온 몽골학생을 알게 된 계기로 몽골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였고, 그를 통해 몽골어판 《몽골비사》를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는데, 왜 《몽골비사》는 <몽골사>나 <칭기스 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하는 것 하나와, 칭기스 칸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보통 학자들이 부르테 치노를 몽골어로 ‘잿빛 푸른 이리(蒼狼)’라고 푸는데, 몽골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푸른 이리의 자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고, 항상 부르테 치노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는 그 동안 학계와 항간에 알려진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고구려-말갈어인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농)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원나라-북원을 거쳐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는 것.
 
“‘몽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칭기스 칸이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명칭이었는데, 이후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테무진 이전에는 테무진이 통일한 지역은 이름조차 없던 땅이며, 종족의 이름도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어서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은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즉 ‘말 고을’의 옛 소리인 ‘몰-고을’, 곧 ‘몰(말, 馬)-고을(邑, 城)’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과 ‘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高)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은 몽골리아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며,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이미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집사》 페르시아어 본의 도분 바얀과 알란 코와기 . 책에 연필 글씨는 전 박사가 독서 중 참고하기 위해 표기해 놓은 것이다.

 
《몽골비사》 불어판 주석서. 전 박사가 부르테 치노, 고와 마랄, 보카 등 칭기스 칸 선조의 이름을 불어로 푸른늑대, 흰암사슴, 숫소, 등으로 모두 잘 못 번역해 두었으나, 불어권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지적하는 책.
칭기스 칸 계보에 등장하는 '투르크어 고어'는 우리 옛말
 
-우선 <월간조선> 기고문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어디에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까?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우선 중세 몽골어로 쓴 《몽골비사》를 비롯하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서의 서》 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 된 서방사서와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 등 부랴트어로 쓰인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서의 원문을 모두 비교 대조하고, 텍스트의 행간을 해독하여 우리 《삼국사기》, 《고려사》와 《신·구당서》 등 동방사서를 교차 대조하여, 칭기스 칸 선조의 실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책에 기록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서양의 칭기스 칸 연구가, 동양의 학자들이 그 동안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요.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언어를 모르면 모든 시대의 역사 연구가 그렇듯이, 위에 열거된 책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 투르크어, 몽골어, 타타르어, 한문 등 여러가지 옛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나라 언어를 우선 이해해야 그 사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서들이 특히 각 언어들의 중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어려움도 있죠.
 
또 단지 언어를 이해한다고만 해서 이 사서들의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서로 매우 일관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계보 속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지방과, 민족, 그 언어, 그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사서들의 비밀을 절대 캘 수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예컨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로 된 사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학자들이 읽으면,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우리보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막상 그 언어를 쓰는 학자들도 그 사서의 진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 사서들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어휘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죠. 그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그 이름들을 그 무슨  ‘투르크어 고어’ 라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그들은 막상 그 투르크어 고어휘의 소리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그 ‘투르크어 고어’는 사실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몽골인들이 왜 하필 투르크어를 썼겠습니까? 또 서방 학자들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몽골리아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살았다는 점을 몰랐고, 우리 역사도 몰랐기에 그 역사적 진실을 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이유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박사님께서 ‘지나국’이라고 부르는 중국, 몽골 학자들은 왜 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 타타르어, 몽골어, 만주어, 부랴트어 및 티베트어 등 그런 외국어로 적힌 사서를 읽을 어학적 지식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문이나 이 연구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어, 영어 정도만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더러 이 언어들을 일부 이해하더라도 그 사서들에 적힌 내용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죠. 다른 나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칭기스 칸 관해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그동안 박사님과 비슷한 주장이라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 대부분의 몽골 학자들은 서방 학자들이 완전히 오역하거나 잘못된 학설을 내둔 것을 그 무슨 선구적 업적이라고 이야기 하며, 서방 학자들이 오류 위에 세운 지식체계에 대한 권위를 맹종하면서 안일하게 답습해온 이유도 큽니다. 쉽게 말해 독자적 연구와 고민 없이 그저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독일학자 누구누구가, 러시아의 어느 전문가 누구누구가, 몽골의 어느 교수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의 지식으로 칭기스 칸을 연구해 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본토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요.
 
“이미 칭기스 칸 당시부터 송나라 사신 등이나 역사가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사실이 많습니다. 칭기스칸은 지금부터 약 852년 전에 탄생했지만, 그의 선조 이야기는 고구려가 망한 668년, 곧 지금부터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칭기스 칸과 그 선조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지명과 인명, 직책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우리말인 말갈어(고구려-발해어)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지만, 그 낱말들이 몽골어, 지나의 한어(漢語), 만주의 퉁구스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투르크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에 이르는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어, 그리고 유럽의 라틴어와 이태리 토스카나 방언 등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칩니다. 이 때문에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를 적은 그 사서들이 기록된 해당 시대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서들 속의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원철 박사는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사서를 하나씩 해독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과 그 뜻, 그들이 산 시기와 한 행적 등을 동방사서와 대조하여 확인하면서 칭기스 칸의 뿌리를 찾아 들어갔다”며 “결국 칭기스 칸 선조가 기록된 책에 등장하는 인명과 언어, 지명이 모두 고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을 연구했지만, 칭기스 칸의 뿌리인 우리 고대사와 우리 옛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코드가 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과 인명, 관직이 현재 몽골이나 투르크어에서 비슷한 단어에 연결시켜 해석하거나, 예전의 학자들이 궁여지책으로 풀어놓은 뜻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편에서 이어짐)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중원의 지배자 금나라 황제-고려 왕건은 한집안
 
 
페르시아어판 칭기스 칸의 계보도 영인본.

 
(1편에서 이어짐)

칸의 특명으로 집필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
 
-앞서 말씀하신 《집사》나 《사국사》 같은 사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元)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곧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 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집사》에 기록된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비밀  
 
-위 사서를 쓴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자랑스러운 칭기스 칸의 조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굳이 그 이면의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서들은 당연히 칭기스 칸 가문에 내려오는 족보를 본대로 들은 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 10대 혹은 20대 선조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원래의 고대 말갈어(우리말)로 된 인명과 고대의 지명이 몽골어나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또는 한자어화되면서 원음과 많이 달라졌고, 또 그마저도 오늘날의 언어들이 아니라, 중세기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페르시아어와 몽골어 등 그 외국어 본문 속에 있는 인명 지명들은 본문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갈어로 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단번에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서를 교차 대조하고, 칭기스 칸이나 그 이전 선조들이 살았던 당대의 언어 고증을 통해 이런 인명과 지명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 몇 가지 사서는 원래 《황금의 책》 곧 ‘족보’에 기반하여 그 선조들의 생전의 활동기록인 행장(行狀)을 곁들인 글들입니다. 그 《황금의 책》 족보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말하듯이 황제의 재고에 비밀스럽게 간수되어, 황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대아미르들이 항상 지키고 있던 책입니다. 곧 이 책은 비밀스러운 황족의 뿌리를 적은 책인데, 그 내용을 올바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것에 바탕을 둔 사서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칭기스 칸 선조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분화되었습니까.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곧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다.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테헤란에서 발간된 《집사》 페르시아어의 한 본(좌)과 《집사》 아랍어 본(우).

 
‘아르가나 콘’으로 피신한 칭기스 칸의 시조들
 
전 박사는 이 전쟁에 나오는 ‘키안’은 라시드가 ‘모골어(몽골어)’로 ‘산골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말갈인들이 한자말로 표현한 ‘산골 물 간(澗)’이고 ‘니쿠즈’는 말갈말로 ‘님금’이란 말이 모양을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라시드가 말한 ‘모골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말 방언인 ‘말갈어’였고, 또 ‘니쿠즈’는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로, ‘님금’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는 ‘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압록강네 郡(군)’(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때 아르가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죠.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죠.”
 
콩그라트 지파가 아르가나 콘을 빠져 나온 이야기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에 ‘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발해 왕가의 일족이 칭기스 칸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날 여러 종족으로 분화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골족의 아르가나 콘 탈출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나온 종족은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인 ‘황금항아리’가 이끄는 부류로, ‘다른 종족과 상의도 없이 다른 종족의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용광로지를 짓밟고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는 탈출이 아니라 발해 10대 왕 선왕(宣王)의 밀지를 받고, 압록강네 군을 빠져 나와 그 전설적인 ‘타타르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 곧 ‘발해-당·신라전’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땅과 북쪽의 흑수 땅 등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흑수 등 말갈 고을들을 치러 출정한 것입니다.  
 
발해의 남쪽 땅이라고 제가 표현한 땅은 평양의 대동강에서 한강 이북 땅을 말하고, 원래 고구려 땅이자 발해 초기의 땅입니다. 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콩그라트 종족이 뛰쳐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공격에서 발해가 이겼던 것이 확실합니다. 동방사서 《통감》 등 당나라 측의 사정을 적은 사서들은 ‘선왕이 바다 북쪽의 말갈 등을 쳐서 땅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또 신라 측 기록도 발해와 신라 국경이 한강 이북의 경기도 땅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때부터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라는 ‘황금항아리’는 또 누구인지요.  
 
“놀랍게도 이분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가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곧 그들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전원철 박사는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은 ‘서해’,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한다.  
 
곧 ‘용왕(龍王)’의 ‘용(龍)-’은 우리말로 ‘고렝이/고레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고려’의 옛소리인 ‘고라이’와 같아, 그 고려를 ‘용’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왕건의 즉위를 예고하는 도참설(圖讖說)의 비문(秘文, 비밀코드)에서도 사용한 당시의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결국 왕건의 외증조가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고 쓴 것은 그가 ‘발해(서해)-고려왕’(고레이, 고렝이, 구렁이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남(내)몽골 다구르 족 에르덴타이와 아르다잡 선생 주해의 《몽골비사》 위구르 몽문판(좌). 《황금사강》이라고 번역되는 《알탄 톱치》. 티베트-몽골계 사서로 칭기스 칸의 9대조 보잔자르(보돈차르)의 부계의 계보를 비밀코드로 기록한 사서(우).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숙신(肅愼)과 같은 소리값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 
 
한편 신라는 당시 금행이 회복하여 다스리던 땅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자주 침공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해의 내지인 반안군(盤安郡)에서도 부락이 두 개의 종족(지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스런 일이 있어났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 
 
“신라의 침공을 받자 할 수 없이 금행과 그 맏아들, 《금사》에서 아고래(阿古迺), 곧 그 소리가 ‘고구려’와 같은 ‘카고라이’로 기록된 인물은 고향 평주에 남고,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보(函普)와 보활리가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와 ‘야라(耶懶)’로 각각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약 250년 뒤 고려 예종 때인 1113년경에는 《고려사》에서는 ‘여진(女眞)’으로 적히고, 《금사》에는 ‘완안부(完顔部)’로 불리게 되는 지방입니다. 
 
형인 함보가 들어간 《금사》의 ‘복간수(僕幹水)의 물가 땅(涯)’에서 ‘복간수(僕幹水)’는 ‘보카리’ 곧 ‘모구리(고구려, 무쿠리) 물’이라는 강 이름이고, 그 물가의 땅은 《고려사》가 오늘날의 소리로 ‘여진 아지거촌(女眞 阿之居村)’이라고 기록한 곳입니다.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야라(耶懶)’는 당시 ‘갸라이(고려)’라는 소리를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 지명은 또 옛소리로는 ‘코라이 땅’, 오늘날의 소리로는 ‘고려땅’이라는 지명입니다. 여진 및 고려식 이두로 적은 ‘갈라전(曷懶甸)’이 바로 그것이고, 원나라 때 몽골어 소리를 한자로 적은 ‘코랄라(合蘭路, 합란로)’가 같은 땅입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각각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남도 함흥지방입니다.”  
 
-당시에 여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여진(女眞)은 옛 한자 방언소리를 아직도 간직한 오늘날 일본어(日本語) 한자 소리로 ‘죠신’인 것과 같이, 예전에 그 소리가 ‘조신’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입니다. 이 말들을 두고 우리 학자들 대부분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뺏으려고 하는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셨겠지만요.” 
 
전 박사는 “여진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별다른 종족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여진에 대해 보완설명을 이어갔다. 
 
“옛 조선, 곧 고조선에서 나온 고구려의 가닥족속인 발해왕족 대조영의 가계를 숙신의 후예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을 보세요. 고구려와 발해가 한 집안이고 고구려는 옛 조선(朝鮮)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조선’과 ‘숙신’은 한 가지 같은 것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이 말을 후대에 와서 당시에 같은 소리 값을 가졌던 ‘조신(女眞)’으로 쓴 것입니다.  
 
이 조신(女眞)을 여직(女直), 여정(女貞), 여진(慮眞), 주신(珠申)등으로도 쓰는데, 이는 모두 옛 조선(朝鮮)=숙신(肅愼)이라는 말입니다. 중세 몽골어로 이를 ‘조르친(Jurchen)’이라고 하고 만주어로는 ‘주션(Jushen)’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남방 한어(漢語) 방언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여진’이라고 합니다. 단, 당시의 소리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 ‘조선(朝鮮)’이 나오는 것이죠. 그 ‘조신(女眞)’ 땅인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의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이 함보의 7대손이 바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입니다. 발해가 망한지 약 190년 후이죠.” 
 
조상의 영지인 발해 반안군으로 돌아간 칭기스칸 선조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땅,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요사》 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함보 형제는 함보 형제→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야발으로 올라가는 계보에서 그들의 5대 선조인 대야발의 영지로 들어간 거지요.” 
 
-우리 학자들은 함보를 발해가 아닌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분명하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 학자들 중에는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신라가 망하는 936년 이후에 신라 왕족이나 유민이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함보 형제는 이보다 근 80년 앞서 857년경 발해시대에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가 아니라, 발해(渤海) 시대의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함보는 왕건보다 할아버지뻘입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이 왕건의 외증조부이고 그 아들이 함보니까요. 이 물음을 좀 차분하게 잠시만 봅시다. 아골타와 같은 시대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때이고 왕건과 같은 항렬의 시대가 《금사》의 발해(拔海), 곧 함보의 손자 때입니다. 그런데 왕건 조차도 이미 나이가 늙은 시절인 936년경에 신라 말대왕 김부가 그에게 귀부하여 옵니다. 고려는 이 덕택에 이른 바 후삼국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왕건보다 2~3대 전에 어찌 신라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그 유민들이 강원도도 아니고 발해의 내지인 함경도로 들어갔겠습니까?”  
 
-사서에 함보가 신라인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대금국지(大金國志)》나 《송막기문》 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년)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년)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후)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후)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출신의 마일스 대령이   1838년 번역한 <투르크와 타타르의 계보>.


고구려 건국에 참여하는 금행의 후손들
 
전 박사는 “또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며 “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그렇군요. 오늘날 학자들이 잘못 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여러 기록이 좀 두서없이 기록된 이유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사실 관계를 고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풍토 중에 하나가 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시대나 인물의 정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주장이라도 교수나 학계 학자들의 입을 통하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백의종군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교수나 제도권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학문적 풍토이자 사회 현실입니다. 
 
제 책의 본문에 실어 둔 것처럼, 두 집안의 계보에 기반하여 간단한 세대 비교도표 하나만 만들면 이미 답이 나오는데, 게으른 학자들은 이것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논문 발표회이다, 언론이다, 방송에 나와서 대중을 헛된 지식으로 이끈 결과라고 봅니다.” 
 
-박사님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함보는 시기적으로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고향에 남았다는 금행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곧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와 ‘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아고래가 어떻게 고구려라는 뜻인지요.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들에 관해 설명할 필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금행의 맏아로 밝힌 아고래(阿古迺)는 그 옛소리가 ‘카고라이’, 곧 ‘고구려’라는 소리입니다. 그의 손자 <금사>에는 적히지 않았고, 서방사서 《행운의 정원》이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칼지타이 칸(Qaljiday Khan)’이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고려사》에 ‘아지태(阿志泰)’로 적혔습니다. 이 이름의 오늘날의 소리와는 달리 당시의 한자소리는 ‘카지타이’입니다. ‘아지태(阿志泰)’라는 이름에는 <행운의 정원>이 기록한 그 “칼지다이 칸”에서 다만 존칭인 ‘-칸’이 빠진 이름이죠. 물론 소리문자로 적은 <행운의 정원> 속의 “칼지다이 칸”은 오늘날 우리말 ‘클씨씨 왕(乞氏氏 王)’이라는 우리말 소리에 아주 가까이 적혔죠.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집사》 등 여러 사서에서 ‘투스부다우’로 적혔는데, 이는 ‘대씨부 대/두(大. 頭)’, 곧 ‘대씨부의 수령’이라는 이름입니다. 그의 손자로 《사국사》가 ‘율두즈 콘(조선씨 왕)’이라고 하고, 《셀렝게 부랴트인들의 역사》 등이 ‘바르가 타이상 노욘’이라고 기록한 이가 있습니다. 말갈어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라는 이름이죠. 여기서 칼지다이 칸은 칭기스 칸의 부인인 부르테의 선조입니다. 바르가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로 《집사》에서는 ‘미사르 울룩’이라는 사람입니다.” 
 
궁예와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 핏줄 
 
전 박사는 “이 칼지다이 칸 ‘아지태’와 ‘바르가 타이상 노욘’, 곧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 섬긴 궁예는 스스로가 ‘신라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제가 족보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궁파(弓巴), 달리 궁복(弓福)인데 이 궁파는 바로 함보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큰 바’, 곧 ‘큰 가(대씨, 고씨)’를 이두로 적은 이름입니다. 함보의 이름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칸보(鐶浦, 환포), 청대에는 캄부(堪布, 감포)로도 적혔죠. 이 궁파(弓巴)가 바로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 아니 사실은 고구려-말갈식 ‘성씨’를 이름처럼 쓴 것입니다.” 
 
-장보고의 성씨는 장씨인데 무슨 근거로 그가 궁씨라고 연결지을 수가 있는지요. 
 
“장보고의 한문식 성은 ‘활 당길 장(張)’ 자를 써서 ‘활’ 곧 ‘궁(弓)’ 으로 하고, 활의 옛소리인 ‘코리’(弓)로 한 성씨입니다. 이는 ‘고려’를 말하는 겹뜻말(중첩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 몽골어로도 덮개 달린 화살통(dabčitu qor)을 ‘코르(qor)’라고 합니다. 이는 《몽골비사》 리게티(Ligeti)본을 확인해 보면 아실 것입니다만.
 
또 장보고의 성씨 ‘장’ 을 뺀 그의 이름은 ‘고구려’를 말하는 ‘무구리/무쿠리/보코리’인데, 이를 한자로 ‘보코리(保皐)’로 쓴 겁니다. 맨 끝의 ‘-리’ 소리는 오늘날에도 말할 때에는 ‘-ㄹ’소리를 내면서도 글자로 적을 때에는 안 쓰는 이른 바 북경화(北京話)의 ‘얼화(兒話)’와 같이 당시에도 안 쓴 겁니다.  
 
곧 ‘고려-무쿠리’ 장보고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곧 고장(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 왕족 안승의 증손입니다. 보장왕에서 치면 4대손이죠. 궁예는 그 이름이 기록 안 되었지만 사서가 말하기로 궁예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고 하므로 어머니 ‘궁씨녀’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6대 외손이죠.”  
 
-이런 내용도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은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이 때문에 궁예가 신라왕궁에서 버림을 당하자, 성씨를 외가성 궁파(弓巴), 곧 ‘궁가(弓哥)’로 쓰고 이름을 ‘예(裔)’로 한 것입니다. ‘궁(弓=高)씨의 후예(裔)’, 곧 고구려 왕가의 서자가계의 후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큰(大)=궁(弓)=높은(高)씨의 후예(裔)’라는 뜻이죠.” 
 
-칭기스 칸 선조 이야기가 결국 이야기가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역사와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궁예를 도운 발해대상랑, 곧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가 결국 고구려-마진-태봉 창건의 주역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궁예를 도운 왕건이 나중에는 오히려 주군인 궁예를 제거하고 자기가 새 왕이 되죠. 그런데 이 왕건은 아까 말한 대로 서해용왕(금행)의 외증손입니다. 발해대상랑과는 재종외아저씨와 조카 사이이죠. 이들은 때로 신라 땅이 된 곳에 살면서도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자부한 인물들입니다.”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모습./ KBS


왕건의 궁정혁명에 밀려 후고구려를 떠난 발해대상랑 
 
-말씀하셨듯이 결국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잖습니까.  
 
“궁정혁명을 일으킨 것이죠. 궁예가 왕건 자신의 선대의 외가쪽인 아내 강(康)씨와 두 아들을 죽이고, 개성 호족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를 치고, 갓 세운 나라를 굳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아직은 나라의 기반이 약했죠. 후백제가 발호하고, 신라가 건재했으니까요.  
 
북쪽에 발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터에 그 지지세력을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한 불교에서 찾고, 미륵불 신앙을 지나치게 믿었죠. 또 반역을 예방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에 심취하면서 아예 전제적인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근신들이 점점 그로부터 멀어져 갔고, 또 고구려 왕가의 외손인 왕건을 덕 있는 군주감으로 생각한 그 무리의 도움으로 결국 왕건이 정권을 빼앗아 나라 이름을 처음의 ‘고려’ 즉 ‘고구려’로 되돌렸습니다.”
 
-그것이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후삼국이 분열하고, 왕건이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할 때까지 발해가 건재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다행도 잠시였습니다. 그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 곧 강계와 삼수, 갑산 땅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 그러니까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에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전쟁이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실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이번에 펴낸 제 책에서는 깊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
 
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이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칭기스 칸의 선조들은 우리 땅으로부터 멀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네,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단,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3편에서 이어짐)  
 
 
 

전원철 박사 인터뷰는 애초 기획한 3편이 아니라, 4편까지 이어진다.
 
 
영화 <징기스칸>(By The Will Of Genghis Khan)의 한 장면.

(2편에 이어 계속)
 
‘몽골’= 말골, 몰골, 물길, 모골, 몯골, 말갈, 모골, 무크리, 무갈 
 
전원철 박사는 “칭기스 칸이 살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는 칭기스 칸 자신의 시대까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기드, 콩그라트 및 나이만 등 여러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며 “그때까지 이 지방을 대표하는 통일된 나라 이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칭기스 칸이 세상을 떠나지 얼마 안 되는 시대에 쓰인 페르시아어 사서 《선별된 역사(Tarikh-igojide)》도 칭기스 칸이 처음으로 이 지방명을 ‘몽골’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음을 지적했다.
 
“칭기스 칸의 서로 다른 부족을 통일한 뒤 이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을 고안했는데,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어원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이 여려 어원설을 제시했죠. 송(宋)나라 때 팽대아(彭大雅)는 칭기스 칸에게 가는 사신으로 몽골을 방문하고 와서 쓴 자기 보고서에서 <몽골이 몽골어에서 은(銀을) 뜻하는 말인 ‘멍거’에서 왔다>고 해서 심지어 몽골의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믿었지요. 또 오늘날 부랴트 및 몽골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용감하다’는 말뜻의 퉁구스어 ‘망가’가 어원이라고 봅니다.”
 
-이상하네요. 몽골 사람이면 한 번에 당연히 몽골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정상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정작 몽골인들이 자기 종족명이자, 국명의 뜻을 모르는 거죠. 마찬가지로 위대한 칭기스 칸이나, 그의 본 이름인 테무진(칭기스 칸)의 뜻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냥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비슷한 발음이 나는 단어에 꿰맞춰 놓고 ‘이럴 것이다’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그 말의 뿌리가 원래의 몽골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죠.
 
“‘몽골’은 사실 말갈/몰골(말 골,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에 기원을 둔 말입니다. 말갈은 ‘말 키우는 고을’이라는 뜻인데 고구려 옛 소리가 ‘몰 골’ 즉, ‘말 골’입니다. 말을 제주도 방언으로는 아직도 ‘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몰골이 선비(鮮卑) 시대에 와서 ‘몯골’, 곧 ‘몰길’, 한자로는 ‘勿吉(물길)’로 바뀝니다. 이는 ‘몰 길’, 곧 ‘말 다니는 길’이라는 말로 ‘말 고을’과 같은 말이죠. 그 ‘말골’이 결국 600년 세월이 흐른 뒤 몽골어 ‘몽골’이 된 것입니다.”
 
전 박사는 “부랴트어(바이칼호, 내몽고 등지의 종족이 사용하는 말)에서는 지금도 ‘勿吉(물길)’을 북방 한어(漢語)가 아니라, 남방 한어로 읽는 옛 소리인 ‘묻갈리’라고 기록한다”며 “말갈어 ‘몰골’이 기원이 되어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서는 ‘말갈(靺鞨)’로 적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아랍어에서는 ‘모골’이라고 하고, 힌두어에서는 ‘무갈제국’처럼 ‘무갈’이라고도 하지요. 고구려를 옛 산스크리트어로 ‘무쿠리(畝俱理)’, 다른 투르크 방언들로는 ‘마크리’ 또는 ‘베크린’ 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말의 변형들입니다.”
 
 
황금항아리 금행을 기준으로 본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 모든 몽골의 어머니로 불리는 알란 고와의 10대 손이 칭기스 칸이다. /저자 책
구전이나 전설이 아닌 족보로 기록된 칭기스 칸 선조 계보
 
-우리는 흔히 유목민은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서 선조에 대해서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칭기스 칸의 경우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네요.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이 그냥 전설이나, 구전의 형태로 내려온 것을 후대에 와서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만에요. 한 왕조의 계보들 중에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만큼 수 많은 언어와 시대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은 유럽은 물론 동서방 그 어떠한 왕조에도 없습니다. 라틴어 외에 기록문화가 별로 없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예 빼두고라도, 기록 잘하기로 이름난 아랍 및 페르시아와 지나(China)땅에서도 그런 경우가 없죠.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몽골어, 한문, 만주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와 타타르어 몇 개 방언, 부랴트어, 아르메니아어, 또 러시아어 등 10개 민족어 이상의 동·서방 여러 언어로 시대를 달리하며 동·서방에서 수10 종의 사서로 대대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하나이면서, 이만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또 많은 언어로 기록된 왕가의 계보는 전 세계 그 어느 왕조에도 없습니다.”
 
-칭기스 칸을 야만적인 생활을 한 유목민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족보를 기록하고, 전해 왔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서양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무지나, 몽골사에 관한 편견 때문에 이런 숨겨진 역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선입관이 생긴 겁니다. 또 서양학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야만적 동양의 한 종족 때문에 정복을 당하거나, 위협을 느꼈다는 자격지심도 존재했지요. 그래서 ‘야만적인 한 유목민족 출신의 칭기스 칸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전쟁을 통해서 문명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하고 싶었던 점도 있죠.
 
유목민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선조 족보는 단순하게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정식 족보 이상 잘 정리된 형태로 쓰여져 책의 형태로 전해 왔습니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유럽과 세계 각지의 그 어느 문명종족보다도 더 문명적입니다.
 
유럽인들은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모르지요. 또 수십만 명에 하나 드문 예외로 이른바 ‘family tree book(족보)’ 또는 ‘genealogy book(족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귀족출신 가문에만 그렇고 그것도 5~6세대를 못 가지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우리 관습입니다.
 
가가호호가 수천년에서 수백년 전의 선조에 이르는 족보를 가지고 있지요. 그와 같은 전통을 가진 가문이 칭기스 칸의 가문이고, 나중에 칭기스 칸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가에 전해 내려온 선조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 바로 《몽골비사》와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서방 사서들입니다.”
 
전 박사는 “단순 구전으로 칭기스 칸 자신으로부터 자그마치 20대 전, 발해 반안군왕, 달리 진국공인 대야발까지의 조상들의 명단은 물론 그들이 한 행장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가 있느냐”며 “《사국사》는 대야발을 넘어서서 그 이전의 계보까지 보여주는데, 이를 합치면 적힌 것만 해도 근 30세대나 된다”고 말했다.
 
“이는 당연히 족보책을 보고 쓴 것입니다. 라시드 웃딘도 여러 번 자기가 쓴 《집사》에서 《황금의 책》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죠. 중요한 것은 이처럼 족보를 중시하는 민족은 전 세계에서 오직 한 민족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조선민족, 한민족입니다.”
 
칭기스 칸의 시조 ‘황금항아리’의 정체
 
-이제는 칭기스 칸 선조가 어떻게 분화되어 나갔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발해-당 전쟁으로 발해 서경 즉, 압록강네 군(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던 ‘키얀’과 ‘네쿠즈’ 후손들 중에 후에 ‘콩그라트 종족’이 먼저 그 지역을 빠져나왔다고 하셨는데.
 
“아, 네, 콩그라트 종족(지파)이 먼저 빠져나오고, 그다음에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 지역을 나옵니다. 콩그라트는 모골, 곧 말갈 종족 가운데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입니다. 이 콩그라트의 전설적 시조가 바로 대야발의 아들인 일하의 아들로 《집사》가 전하는 키얀에게 손자인 황금항아리입니다. 《집사》의 저자 라시드는 이 황금항아리에 대해 이름만 적어놓고, 그의 선조에 대해 적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가 추적해 봤습니다. 페르시아어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는 한자로 옮기면 ‘금관(金罐)’인데, 이는 ‘금 칸(金干)’, 달리 표현해서 ‘금 한(金汗)’과 같은 소리이고, 뜻은 ‘황금 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타타르어 사서에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라는 말로 투르크어로 번역하여 적었는데, 때마침 공교롭게도 몽골인들은 조신(女眞)의 금(金)나라 군주를 ‘알탄 칸(금 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신(女眞)의 금나라 군주의 시조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금행(今幸, 金幸)’입니다. 그런데 나아가 다시 <투르크의 계보>, <행운의 정원> 및 <시바니의 서(書)> 등을 보니 그가 바로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발의 아들 일하, 일하의 아들 ‘간(澗)’에게 손자로 태어난 이가 바로 금행, 황금칸, 황금항아리이죠. 계보 상의 세대로 따지면, 황금항아리는 발해 왕가의 제2시조인 야발의 4대손입니다. 또한 금시조 함보 3형제의 부친이 되는 것이죠.”
 
-지난 2편의 인터뷰에서 ‘황금황아리’가 ‘서해용왕’이라고 했는데요.
 
“그렇습니다. 황금항아리는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 승(僧: 존경받는 직위를 의미, 요즘의 ‘장로’에 해당)’이라고 나와있고, <고려세계>에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고려세계>는 또 《성원록(聖源錄)》을 인용하여 ‘의조(懿祖: 곧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두은점 각간(豆恩坫角干)의 딸이다’고 합니다. 서해용왕의 실명이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이라고 밝히는 것이죠.
 
그런데, 부랴트 전승에는 그가 ‘토곤 테무르 칸’으로 나옵니다. ‘두은(豆恩)-’의 옛소리는 ‘토곤-’이고 ‘-점(坫)’의 옛소리는 ‘-텸무ㄹ’입니다. 우리 옛말의 ‘ㄷ/ㅌ’이 ‘ㅈ/ㅊ’으로 점차 변하는 구개음화를 생각하면 금새 이해가 가지요. 또 ‘-ㄹ’밭침은 한자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 변화는 금세 이해가 갑니다. 다음으로 ‘각간(角干)’은 투르크어 ‘카간(Kaghan)’, 곧 몽골어로 ‘카안(Khaan)’, ‘칸(Khan)’입니다. 이처럼 두은점 각간이나 토곤 테무르나 고려어로 된 것이냐 부랴트어로 된 것이냐만 다를뿐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 고대어 표기 방식인 이두와 향찰에 대한 이해 필요”
 
 
개성 고려박물관에 소장된 고태조 왕건의 영정.
-서해용왕이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을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이라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죠.
 
“우리말 표기법에는 한자로 우리말 소리를 그대로 적는 이두(吏讀)와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향찰(鄕札)이 있습니다. 예컨대 ‘고려’는 우리말 ‘고을’과 그 옛소리 ‘구루(城)’의 소리를 한자 소리만을 활용하여 적은 것이고, 이것이 이두인데, 향찰의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중천왕’은 또는 ‘중양왕’이라고도 하는데 삼갈 이름은 연불이고 동천왕의 아들이다(中川王 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라고 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제5 중천왕조>를 보시죠.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왕이름이 3개나 있습니다. ‘中川王(중천왕)’, ‘中壤王(중양왕)’ 그리고 삼갈 이름(諱) ‘然弗(연불)’입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이 3가지일까요. 힌트를 하나 드리죠. 이 3개의 이름은 다 하나의 소리이고 한 가지 뜻입니다. 감이 좀 잡히나요?”
 
-이 세 가지가 다 한 가지 소리이자, 한 가지 뜻이라고요?
 
“답은 이 세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두나 향찰을 안 쓰고 한글을 쓰는 우리네가 ‘中川王’은 ‘중천왕’, ‘中壤王’은 ‘중양왕’ 또 ‘然弗’은 ‘연불’로만 읽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식 향찰로 읽어 봅시다. 한자로 쓰되 우리말로 읽는 방법입니다. ‘中’은 ‘가운데 중’이고 ‘천(川)은 내’이고, 또다시 ‘中’은 ‘가운데 중’이고 ‘壤’은 ‘땅 양’입니다.
 
그런데 ‘한 가위’ 또는 ‘한 가우’라고 우리말로 할 때 가우/가우는 한자로 중(中)입니다. 川은 내이고 壤은 나/라입니다. 그러면 中川은 ‘가우내/가우래’이고 ‘中壤’은 ‘가우라’입니다. 또 ‘然弗’은 오늘날에는 ‘연불’이라고 읽지만, 옛소리는 ‘캰부르’입니다. 然자 옆에 개 ‘견(犬)’이 보이죠? 그것이 然자의 옛소리입니다. 이제 왜 이 세 이름이 다 같은 소리이고, 뜻인지 감이 잡히시는지요?”
 
-솔직히 ‘가우내/가우래’와 ‘가우라’는 비슷하긴 합니다만, ‘캰부르’가 어째서 같은 소리인지는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이 세 소리는 모두 다 우리 고어로 ‘가우라이’라고 들렸던 ‘고구려’라는 소리이고 뜻도 같은 말입니다. 고구려는 옛날 한자 소리로도 방언에 따라 ‘카부려, 고리, 까오리, 코오라이’ 등으로 소리가 나고, 오늘날 영어나 불어, 러시아 등 서양어로는 ‘코레아, 꼬레, 까례야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천왕 또는 중양왕 연불의 이름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한자들을 소리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어 보면 앞이 두 가지는 바로 ‘가우(중)-라(양/천)’이고 ‘연불’은 ‘캰부르=큰 부려=커부려=큰 부여=고구려’입니다.  여기에 다가 ‘왕’을 보태보십시오. 결국 그의 이름은 ‘가우-라=고-구려=커-부여-왕’이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쓰고 우리말 소리와 뜻으로 읽는 표기방식이 향찰이고, 한자의 소리를 빌려, 그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소리를 적는 것이 이두입니다. 한자의 소리로 우리말 소리를 적은 ‘然弗’은 이두이고, 앞의 두 이름은 한자로 적되 우리말 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바로 고구려 향찰이죠.”
 
고구려 향찰이 신라 향찰보다 먼저 쓰여
 
전 박사는 “우리 학자들이 신라에만 향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고구려나 백제, 발해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 왔다”며 “그런데 한자의 전래과정에서 고대 지나 대륙과 가까운 고구려나 백제가 한자를 먼저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가장 멀리 떨어진 신라가 먼저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는 상식의 문제에 속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고구려와 백제가 한자를 신라보다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간단한 진실이 학자들의 눈에는 뜨지 못하니, 왜 같은 이름이 다른 한자로 적혀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중천왕은 고구려 제12대 왕이고, 248년~270년간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왕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두 개는 고구려식 향찰로 세 번째 것은 고구려식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신라 향가 때문에 당연히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전하는 향찰로 적은 글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신라 향가 14수가 전하므로 신라에만 향찰이 있는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구려 향가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고구려 향찰은 오히려 신라보다 먼저 쓰인 것을 증명하는 왕 이름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 드린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왕(高麗王)의 소리만 따서 또 다른 우리말로 읽으면 바로 ‘고렝이/구레이 왕’이죠. 이것이 또 다른 향찰의 한 방법입니다. 이 ‘고렝이/구레이=고려’를 다시 이번에는 한자로 뜻 적기를 하면 바로 ‘용왕(龍王)’, 곧 ‘구렁이 왕’이 됩니다.
 
또 우리 서쪽의 바다 ‘서해(西海)’는 ‘발해(渤海)-만’이라고 하는 것처럼 발해입니다. 그러면 ‘서해’는 ‘발해’이고, ‘용왕’은 ‘고레이=고려왕’이라는 말이고 이제 최종적으로 그 두 말을 합치면 ‘서해용왕’은 바로 ‘발해-고려왕’이라는 말이 되죠. 이것이 바로 도참설(圖讖說) 비문(秘文)의 비밀코드로 적는 표현방식입니다만, 이 풀이방법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가죠. 도참설 비문에는 이런 표기방식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도참설 비문은 뭔가요.
 
“한자의 뜻 적기를 활용한 일종의 비밀코드입니다. 주로 비밀스러운 미래 예언 사상을 쓸 때 많이 활용했습니다. 왕건이 궁예가 세운 고려에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문 문장이나, 군데군데 비밀코드를 넣어 퍼뜨린 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글의 비밀코드가 이두나 향찰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세계>가 재인용하는 글을 보세요. ‘익재(益齋)가 인용한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에는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다’고 하는데, <금사 국어해 성씨>도 입을 맞추어 말하듯이, 금나라 완안(完顔)씨도 바로 왕(王)씨입니다. 이 왕씨는 바로 대씨(大氏)와 같은데 왜냐하면 완안씨의 시조가 대함보이기 때문이고 그는 대금행의 아들입니다.
 
결국 황금항아리 금행은 대(大)씨이자 달리 왕건과 같은 왕(王)씨이고, 그래서 그 8대손 완안아골타도 <금사 국어해 성씨>에 따르면 왕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골타의 8대조 금행은 우리나라 평주의 승이고, 《집사》에 따르면, ‘왕 같은 사람’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 곧 ‘토곤 테무르 칸’입니다.
 
이 평주승 금행은 바로 평주인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豆恩坫 角干)’과 같은 지방 사람이고, 다 같이 그 지방의 장로이고 왕같은 인물인데, 그 성씨도 같고 시대도 같죠. 또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 곧 발해고려왕이 바로 금행인데, 평주에서 이 서해용왕 칭호를 취한 이는 바로 황금항아리, 금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는 또 완안 아골타의 선조입니다.”
 
-그 황금항아리가 우리 역사에서 왜 중요한 인물입니까.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고려세계>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선조가 '솔롱고(고려)'에서 왔음을 말하는 솔롱고 뷰라트인의 사진./저자 책
세 지파로 나뉜 칭기스 칸의 선조들
 
-그 연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요.
 
“《집사》에 황금항아리 아들 세 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추를룩 메르겐’, ‘쿠바이시레’ 그리고 ‘투스부다우’입니다. 이 이름들은 얼핏보면 매우 낯설게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이는 사실 우리말인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 칭호와 말갈어 칭호, 그리고 한자로 된 칭호입니다. 이들이 바로 《금사》에 나오는 함보 3형제, 즉 카고라이(아고래, 고구려), 함보(큰보, 걸가, 걸씨, 대씨), 보코리(무구리, 고구려)입니다.
 
이 3형제가 각기 당시 신라의 황해도 평산에서 살다가 남국 신라의 그 땅 침략에 더불어 발해내지에서 일어난 발해 왕족간의 내분이라는 내외적인 난국을 맞습니다. 이 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형 아고래는 평산에 남아 신라와 싸우고, 둘째형제 함보와 막내 형제 보활리는 당시 발해의 반안군의 두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별도의 관향, 곧 다른 본관을 가진 지파, 즉 종족을 이루게 됩니다. 신라로 치자면 경주김씨 안동김씨, 강릉김씨라는 같은 문중의 다른 관향, 본관을 취한 것입니다.큰형 아고래의 콩그라트 종족, 둘째 금시조 함보의 예키라스 종족, 그리고 막내 형제 보활리의 코를라스 종족이 그것입니다.”
 
전원철 박사는 “이 가운데 막내 보활리의 증손자 ‘코를라스’가 바로 칭기스 칸 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종족 지파의 시조”라고 하고 “큰형의 지파인 콩크라트에서는 훗날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곧 말갈말로 ‘부르테 부인’ 및 ‘부여대(씨) 부인’으로 풀리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콩그라트는 ‘큰 고려씨’, 곧 ‘고(高) 구려씨’라는 의미입니다. 《고려사》에 오늘날 몽골리아 지방의 철륵(鐵勒)종족과 함께 왕건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를 무찌르게 했다는 ‘콩거라(驩於羅, 환어라)’ 족입니다. ‘驩於羅(환어라)’의 옛소리가 ‘콩고라’, 곧 ‘큰고려=커구려=고구려’입니다.
 
알려진 대로 함보 가문에서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를 배출하는데 《집사》에는 ‘예키라스 종족’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삼한(三韓)의 진한(辰韓) 역라씨(役拏氏)’라고 기록한 종족입니다. 황해도 평산이 자주 신라에 점령당해 ‘진한 땅의 역라씨’이라고 적은 것이죠.
 
마지막으로 막내 보활리는 《금사》에는 갸라이(耶懶, 야라)로 적히고, 《고려사》에는 ‘코라이땅(曷懶甸, 갈라전)’으로 적히고,《원사》에는 ‘코를라(合蘭路, 합란로)’로 적힌 오늘날의 함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땅의 이름 ‘코를라’ 본관을 따서 여기에 ‘씨(氏)’=‘스’를 붙여 자기 칭호로 쓴 사람이 바로 《집사》가 한자는 빼고 그 소리만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코를라스’로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는 칭기스 칸의 11대 조부이고, 칭기스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알란 고와의 아버지지요. 이 가문은 청나라 때 만주와 몽골 씨족 계보를 밝힌 《황조통지》에서는 ‘고려나씨(高麗那氏)’로 기록된 가문입니다. 좀 이해가 가시나요?”
 
뿌리 의식을 잃지 않은 칭기스 칸 가문
 
 
반안군왕 대야발의 형인 발해고왕 대조영.
전 박사는 ‘코를라스’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으로 적혔는데, 이는 곧 ‘고려-나라-씨-말갈’이라는 뜻이고, 부랴트 전승들에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 또는 ‘코리도이 메르겐(고려씨 말갈)’으로 나온다고 덧붙인다.
 
“‘메르겐’은 오늘날 몽골어, 카자흐어 등에서는 ‘활 잘 쏘는 싸람’과 ‘현명한 사람’, ‘부족장’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원래 활 잘 쏘고 현명을 추구하는 군주들인 발해왕가의 관향인 ‘말갈(靺鞨)’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금나라 말로는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이라는 말로도 바뀌었는데, 이는 ‘씨족장’, ‘문중장’을 말합니다. 원래 대조영, 대야발의 말갈가문의 사람만이 씨족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메르겐” 및 “메르간/베르겐(勃勤, 발근)’은 고구려어로는 ‘낭(郎)’ 또는 ‘낭군(郎君)’이고, 신라어로는 ‘화랑(花郞)’과 같은 말로, 이 후자는 신라어로 김가(金哥, 김씨), 박가(朴哥, 박씨) 등 씨족의 족장 감을 말하는 ‘가랑(哥郞)’의 ‘가(哥)’를 옛날에 같은 음가를 가지나 뜻은 좀 더 예쁜 말인 ‘화(花)’로 바꾸어 쓴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이다.
 
“결국 칭기스 칸의 뿌리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서 시작해서, 그 4대손인 황금항아리 금행으로 이어지고, 바로 이 금행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 보활리의 3대손 코를라스의 후손이 바로 칭기스 칸의 코를라스 종족이 되는 겁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이자면, 대야발→아들 일하→간(키얀)→키얀의 아들→금행→3아들 중 보활리→ 아들 콩글리우드(고구려씨)→바르가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 랑)→코를라스(코리라르다이 메르겐)→알란 고와라는 계보입니다.”
 
-결국 칭기스 칸 가문은 왕족으로서 가문에 대한 뿌리 의식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칭기스 칸은 ‘진국왕(震國王)’이라는 말인데, 그 자신이 정벌하는 금나라와 송나라 말기의 한자 소리로 읽은 ‘친기 칸’이라는 소리, 곧 ‘진국왕=발해왕=고려왕’이라는 말입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우리 사람들이 이른 바 ‘중국’이라고 잘 못 부르는 지나 땅을 정복하고 대원국, 원나라를 세웁니다.”
 
고구려 왕가의 후손임을 자각
 
전 박사는 “이 때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그의 원나라를 찾아오는데,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불행히도 감옥에 갇힌다”며 “이때 감옥 속에서 친구에게 구술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우리가 《동방견문록》이라고 부르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 25번이나 칭기스 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 한 번만 빼고 그의 이름은 항상 ‘친기 칸(Chinghi Kane)’으로 나옵니다. ‘칭기-스 칸’이 아니구요. 그런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르코의 시절에 몽골인들이 남쪽 오랑케라는 뜻에서 ‘만지(蠻子)’라고 불렀던 송나라 백성들의 남방한어로 ‘진국왕(震國王)’은 ‘친귀(기) 칸’이었기 때문이죠. 한자를 몰랐던 그 기록자는 마르코가 말하는 대로 이 한자의 당시소리를 토스카나 방언으로 적은 것이죠. 이 사실이 또 한 번 ‘칭기스 칸’의 진정한 소리와 그 뜻을 알려줍니다.”
 
-‘테무진’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시죠.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타르와 일가친척 부락인들은 칭기스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라고 자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에게 고구려 제 3대왕 ‘대무신=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테무진 자신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종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칭기스 칸이라는 칭호를 취합니다. 이는 테무진 스스로가 자신이 고구려에서 나온 발해국 왕의 후손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이라는 이름을 보세요. 그는 당시에 땅이름조차 없었던 오늘날의 몽골리아에 있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을 창설하는데, 그 ‘몽골=말갈=말고을’입니다 고구려-말갈이라는 두 이름 가운데, 자기가 세운 나라를 친족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말갈’, 곧 ‘몽골’을 선택한 겁니다. 테무진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죠. ‘조선반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말입니다.”

(4편에서 이어집니다. 애초 본 인터뷰는 3편으로 기획되었으나, 4편으로 늘어났습니다. 3편까지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는 마무리하고, 4편에서는 칭기스 칸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4)- 전원철 박사 인터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4)- 전원철 박사 인터뷰

칭기스 칸의 ‘세계정복’은 ‘신의 징벌 전(戰)’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4)- 전원철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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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 말”
⊙ “터키인의 조상 오구즈 칸은 고구려의 후예”
⊙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 몽골·만주·튀르크·아랍어 등 29개국어 해독…, UNHCR 주재관으로 체첸에서 근무

전원철
1963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뉴욕주립대 법학박사 후 과정 / 외무부 유엔국제인권사회과 유네스코 자문관, 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출간
  〈고구려 고(高)씨 왕가의 방계(傍系)인 대(大)씨가 세운 발해는 732년 당(唐)-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일한, 즉 발해 무왕 대무예의 사촌형 대일하(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아들)가 이끌던 발해(말갈/모굴/모골)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 결과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땅을 신라에 빼앗긴다. 일한은 전사하고 그의 아들 키얀(칸)과 그의 7촌 조카 네쿠즈(니쿠즈·임금)는 아르카나 쿤(에르게네 쿤·압록군)이라고 하는 오지(奧地)로 들어간다.
 
  훗날 ‘황금항아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족(콩크라트족)을 이끌고 아르카나 쿤에서 탈출, 신라군을 물리치고 평주(平州)에 정착한다. ‘황금항아리’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금(金)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의 선조 함보의 아버지 금행(金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서해용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후일 율두즈 콘(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이라는 손자를 두게 되는데, 그가 아버지는 신라왕, 어머니는 고구려계 여인인 궁예다. 궁예와 왕건은 같은 핏줄인 셈이다.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이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가 발해의 지파(支派)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캐)와 합류한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들은 오늘날의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 땅 부랴티아로 떠난다. 발해가 멸망한 지 235년 후 이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자, 궁예의 후예인 것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아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다. 그중 한 갈래가 지금의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침공해 일한국을 건국한다. 일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들의 조상인 대일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한국의 가잔 칸은 재상 라시드 웃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그 책이 《집사》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칭기즈 칸 일족의 역사는 《집사》 외에도 《몽골비사》, 티무르 왕조의 《사국사(四國史)》 등의 사서에 비밀 코드의 형태로 숨어 있다. 서양에서 몽골-튀르크계 종족을 일컫는 말인 ‘타타르’라는 말은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몽골-튀르크계 민족이 세운 왕조는 몽골제국, 일한국(이란), 테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맘루크 왕조(이집트),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20여 개에 달한다.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의 서재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몽골어 등으로 되어 있는 다양한 사서들이 있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1·2)》(비봉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낸 전원철(全原徹·53) 변호사의 주장이다. 기분 좋은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는다. 이런 소리 하면 “국뽕 맞았다”거나 “당신 ‘환빠’냐?”는 얘길 듣기 십상이다. ‘국뽕’이니 ‘환빠’니 하는 얘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주장을 하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美) 아이오와대 법학박사(JD),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근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 아주 ‘글로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다니….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을 펴낸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이 작년 봄 “29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라고 한 것도 흥미를 돋웠다. ‘1980년대 이래 《국부론》 《도덕감정론》 《자본론》 등 묵직한 책들을 펴낸 출판계의 원로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 원고를 청탁했다.
 
  《월간조선》 작년 6월호에 ‘역사탐험/한 고대사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다’가 실렸다. 이때 그는 주몽예(朱蒙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글자 그대로 ‘고주몽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칭기즈 칸’과 ‘고구려-발해’가 만났기 때문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pub(pub.chosun.com)에 실린 이 기사의 조회 수는 6만8967회였다. 이후 조선pub에 나간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즈 칸 가계의 비밀’이라는 기사의 조회 수는 15만9261회. 총 5번에 걸쳐 나간 글은 모두 합쳐 28만4943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선pub의 기사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의 글이 《월간조선》에 나간 후 어떤 지인(知人)이 물었다.
 
  “그 주몽예라는 사람, 혹시 본명이 전원철 아니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몽골어·터키어 공부한다고 하던 인간이야. 한여름에도 외투 입고 다니던 괴짜….”
 
 
  체첸 갈 때도 《몽골비사》 챙겨
 
체첸 현장 주재관 시절 오세티야의 이슬람 사원 앞에서.
  지난 2월 전원철 변호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이번에 보내온 글은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제목이었다.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여기고 있는 《집사》 속의 인물 오구즈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예라는 내용이었다. 문득 ‘전원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역사 얘기는 책을 보면 되는 거고, 당신 살아온 인생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묘한 냄새가 확 풍겼다. 바나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베란다에서는 뭔가 퍼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꿩이었다. “웬 꿩이냐?”고 묻자, “잡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기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7평짜리 아파트 거실에는 요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아랍어·영어·몽골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작은 방에 있는 책장에도 다양한 외국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전 변호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어, 이 책들은 몽골어, 이건 튀르크어, 이건 우즈벡어…” 전 변호사는 책을 펼쳐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 이력을 보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1993년 3월 유엔국제공무원시험 정무관(사무관)급 시험에 합격했다. 임용을 기다리는 동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관, 외무부 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체첸 주재관도 지냈다.
 
  “1996년 3월 UNHCR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미스터 원철 전이냐’고 묻더니 ‘선불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제네바로 오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불타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했더니, ‘체체냐(체첸)’라고 했다. 준비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롱부츠와 여권’이라고 했다. 《몽골비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제네바에서 계약서와 유언장을 쓰고 체첸 인근 다게스탄으로 갔다. 체첸에 도착해 보니, 온통 진흙탕이었다. 왜 롱부츠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 무슨 일을 했나?
 
  “전쟁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에게 의약품과 식량, 천막, 구호물자 등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다.”
 
 
  “체첸어 익힌 덕에 위기 모면”
 
체첸어를 익힌 덕분에 현지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 유엔기구에서 나갔다고 해도, 러시아군이나 체첸반군의 위협에서 자유로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밤 12시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조수인 샤미르와 함께 무전기와 보드카,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챙겨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갔다. 현장 사무소로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 들으면서 새벽 4시경까지 있다 보면 상황이 끝나고, 그러고 나면 아침부터 난민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카프카스 산악 지역 마을들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러 갈 때였다. 유엔 표식이 달린 차량을 타고 가는 데도, ‘전투행위자들’이 유엔 차량이라는 걸 알면서도 총격을 가해왔다. 헬기나 초소에서 총격을 가한 일도 있었다. 적십자사 간호원 5명이 사살된 적도 있다. UNHCR 직원도 나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은 납치당하는 경험을 했다.”
 
  전 변호사는 “나는 체첸어를 익힌 덕에 그런 위험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첸어로 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자, 현지인들이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여기게 됐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알려줬다.”
 
  — 체첸 사람들은 어떠했나?
 
  “친절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속이 있다. 한번은 해발 3000미터쯤 되는 산길에서 차가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됐다. 갑자기 군복을 입은 체첸전사(아팔첸시·향토수호자라는 뜻)들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묻기에 ‘유엔이다’라고 했더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총을 내렸다. 동료에게 내 차를 고쳐주라고 하더니, 양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중에서 어떤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라고 하기에 ‘고동색에 검은 점이 박힌 양’이라고 했더니 그 양을 잡아주었다. 동네 남자 10여 명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 체첸 그 지역도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아무르 티무르의 원정 루트다. 체첸인은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먼 옛날에 동쪽에서 온 눈이 찢어진 남자와 아랍 여인이 카프카스산에서 만나 결혼, 체첸인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다”
 
  체첸에서 근무를 마친 전원철 변호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오와대학 로스쿨에서 인도법(人道法)·전쟁범죄법 등 국제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대로 나갔으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달라졌다. 왜일까? “아이오와대학에는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우리 조공국(朝貢國)에서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왜 너희 속국(屬國)이냐?’고 하면 ‘당(唐)나라 이래 원(元)·명(明)·청(淸) 등을 거치면서 내내 조공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너희가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 무슨 논리인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 멍케티무르(孟可帖木兒)는 이성계의 지방장관이었다. 너희는 우리 함경도 사람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인 후예의 정권이었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나 명나라를 조선의 속국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과도하게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조선은 기자·위만 등 중국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지금의 한국 땅도 되찾아야 할 중국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 주장은 ‘역(逆)동북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부 한국인의 선조가 중국에 건너가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걸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나?
 
  “일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 황족에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피가 섞였다는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나?”
 
  —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나? 몽골인들이 이란에 가서 일한국을,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를, 인도에서 무갈제국을 세웠다고 해서, 그 역사가 몽골의 역사가 되나?
 
  “국가, 땅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피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맘루크 왕조는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역사이지만, 몽골 사람이 이집트로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만든 몽골 종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화 속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여”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국사》. 티무르제국의 황제 미르조 올룩벡이 서술한 사서이다.
  — 칭기즈 칸이 고구려-발해인의 후예라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는 얘기인가?
 
  “《몽골비사》를 수없이 읽으면서 나는 칭기즈 칸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푸른 이리·蒼狼)와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慘白色鹿)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신화(神話)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이 실존인물이며, 고구려-말갈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조의 역사책인 《사국사》에서 칭기즈 칸의 10대모(代母)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코와(알란 고와)의 아버지 이름이 추마나 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추마나 콘은 곧 주몽 칸(朱夢 可汗)이다. 추마나 콘의 형은 이름이 위마나 콘, 즉 위만 칸(衛滿 可汗)이다. 주몽과 위만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누가 있겠나?”
 
  — 그것만으로 고주몽이 칭기즈 칸의 선조라는 건 약하지 않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알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신화를 역사로 보는 건 무리 아닌가?
 
  “고대 우리 민족은 역사를 비밀 코드로 썼다. 그 코드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인다.”
 
 
 
 
“타타르족은 대대로 연개소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는 칭기즈 칸 이전에 몽골(모굴)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오늘날 서양에서 몽골이나 튀르크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인 타타르(Tatar)족은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몽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에 기록된 ‘타타르 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淵子遊)이다. 타타르는 곧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히바 칸국(1511~192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던 몽골계 나라)의 칸이자 역사학자인 아불가지 칸은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인명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종족 칭호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대대로 연개소문 가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 이 가문이 이끄는 백성과 속민을 일컫는 말이 되어 타타르로 변화한 것이다.”
 
  — 그것만으로 타타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달단(韃靼·타타르)은 말갈의 남은 씨앗(遺種)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이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 해(奚), 거란의 동북에 있었다. 나중에 거란에 공격당해 부족이 나뉘어 흩어졌다. 어떤 것은 거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는데, 갈린 부락이 음산에 흩어져 살면서 스스로 부르기를 달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끝 무렵에 그 이름을 가지고 중국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 역사책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꿰맞추는 건 아닌가? 다른 증거는 없나?
 
  “옛 돌궐(튀르크) 지역인 카자흐스탄 서쪽 러시아 땅에는 하카스공화국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타다르(Tadar)족, 혹은 코오라이, 콩구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수레, 순대 만들기, 보쌈과 같은 약탈혼 풍속 등도 흡사하다. 귀틀집과 같은 집을 입(Yip)이라고 한다. 아마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돌궐족의 땅에 들어간 고구려의 후예일 것이다. ‘코오라이’는 ‘고려’, ‘콩구레이’는 ‘큰 고려’라는 의미다.”
 
  전원철 변호사는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한다.
 
  “칭기즈 칸의 조상인 모골 칸에게는 카라(高麗) 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튀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튀르크인들은 서방의 튀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코로 호자라는 사람인데, ‘코로’란 ‘고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6·25 때 터키군이 참전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터키는 이렇게 혈연적으로 고구려와 형제국이다.”
 
 
  “오롱키(오랑캐)어도 공부”
 
전원철 변호사가 칭기즈 칸의 계보를 밝히는 데 활용한 역사서들. 왼쪽부터 《몽골비사》 《승리의 서》 《집사》 《행운의 정원》.
  전원철 변호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몽골비사》나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요사》 《금사(金史)》처럼 이름만 들어본 중국 역사책(전원철 변호사는 ‘동방사서’라고 함)에서부터 일한국의 《집사》, 티무르제국의 《사국사》 《승리의 서(書)》(티무르에 대한 기록),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에서 나온 튀르크어 역사서 《행운의 정원》 등(전원철 변호사는 ‘서방사서’라고 함)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역사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의 책장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몽골어·튀르크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설사 그의 주장이 ‘말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을 넘나들면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언어의 천재’라고 하던데, 몇 개 국어나 하나?
 
  “영어는 기본이고, 고교 때 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다. 언젠가는 소련과 관계 개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1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독어는 대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기 위해 공부했고, 카뮈와 콩트를 읽기 위해 불어를, 《군주론》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세네카의 《성서》를 읽으려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스페인어도 했고… 그러다가 ‘서구(西歐)문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에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알아야겠다’고 반성하게 되면서 동양어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전 변호사가 꼽은 언어들은 이랬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중세 튀르크어, 터키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오랑캐어), 어웡키어, 중국어, 티베트어, 만주어, 다와르어, 거란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모두 29개다.
 
  — 만주어, 몽골어 같은 것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면서 전씨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전씨의 조상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고구려를 떠날 때 데리고 온 10명의 신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만주어, 몽골어는 기본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어도 배웠다.”
 
  — 몽골어 같은 건 어디서 배웠나?
 
  “대학교 도서관에서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출해 간 적이 없는 독일어로 된 몽골어 문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우리말과 몽골어 문법이 매우 비슷해서 기본 문법 공부는 2~3주 내에 마쳤다. 마침 우연히 알게 된 몽골인 친구가 몽골에 간다기에 《몽골비사》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독본 삼아서 몽골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만주어 같은 건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나?
 
  “책으로 공부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나도 만주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만주어의 먼 방언인 시보(錫伯)어를 쓰는 사람이 한 10만명 정도 된다.”
 
  —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됐나?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이상 안 걸렸다.”
 
 
  “우리 역사 바로 알려면 중국사서(史書) 외에 다른 사서도 보아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찔러보았다.
 
  —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계보를 기반으로 그것을 ‘동방사서’의 기록들과 철저히 대조했다. ‘서방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동방사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방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문헌사, 역사언어학, 역사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역사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이겠나?
 
  “주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내 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다. 중국 사료(史料)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되어 있는 사서들도 보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물론, 중국, 몽골, 터키 등 유라시아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게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 아닌가?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오늘날 터키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었던 역사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 유연(柔然), 돌궐부터 오구즈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아시아 대륙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활동했던 튀르크계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들의 역사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의 역사마저 말갈족의 역사라면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밖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닌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나라 밖에서 행해진 우리 민족의 행위는 우리 역사가 아닌가?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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