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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당시 만주와 몽골에는 크게 만주인(만주 쥬신)과 몽골인(몽골 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몽골이란 민족적 의식은 칭기즈칸의 원나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까지도 여진(만주 쥬신)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요동 - 만주 - 몽골의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분이 바로 청태조(김누루하치)입니다.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환국(桓國)·칸국(汗國)·한국(韓國) 김누루하치와 산채나물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05.08.17.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저는 야구(baseball)를 좋아합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타자가 홈런을 치고, 미국 메이저 리그 최초의 한국인 ..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3)- 전원철 박사 인터뷰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
한(漢)나라와 흉노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탁발선비족(北魏)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수(隋)-당(唐)나라와 돌궐제국의 공존은 만주의 거란족(遼)과 여진족(金)에 의한 북중국 정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서 징기스칸의 등장은, 북중국에서 만주족 정복국가와 통일된 몽골족 제국의 대결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켰다. 흉노와 위구르 돌궐족은 한족 왕조에 대해 갈취(喝取)전략을 사용했다. 징기스칸의 초기 목표 역시 중국 본토의 정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족 조정들과는 달리, 만주족의 금나라 조정은 몽골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한족 전통을 따라) 갈취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왕조 자체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몽골족에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몽골 지배자들은 몽골어..

⊙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 3대 ‘大武神王’에서 유래, ‘칭기즈 칸’은 ‘震國王’ 즉 ‘발해왕’이라는 의미⊙ ‘몽골’은 ‘말갈(靺鞨)’, 즉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이라는 의미⊙ 몽골족의 역사 다룬 《집사》 등에 나오는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발해 武王 때 발해와 羅唐연합군의 전쟁을 다룬 것⊙ 칭기즈 칸의 조상 엘 콘은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둘째 아들 일한⊙ 《칭기스의 서(Da’ftari-Cingiz-nama’)》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황금의 칸’)’은 金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金幸 ■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06 2015 MAGAZINE 월간조선 ..

한국과 몽골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문화적·심리적 공통성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한 관습들도 공유한다. 예컨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살을 먹는다든가(중국과는 분명히 다르다), 식당이나 가게 등에 가면 한국에서는 '이모', '아제'라고 하듯이, 몽골에서는 '형', '동생'이라고 부른다거나(의제가족) 아이들이 오래 살라고 귀할수록 '개똥이' 등으로 이름을 비하하여 부른다거나 한다. 또 유난히 흰색을 많이 사용한다. ■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⑧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14.02.13. 드라마 25부에서는 기양의(후일 기황후)가 황제(순제 : 혜종)에게 "저의 복수가 바로 폐하의 복수"라고 하면서 엘테무르(연철)의 제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후..

본래 마한은 압록강 이남을 거의 다 점유했다. 그러다가 낙랑·진한·변한 삼국이 생기는 바람에 지금의 조령 이북과 임진강 이남을 점유하게 되었다. 진·변 두 한은 명의상으로는 국가지만 실제로는 신·불 두 조선 유민의 자치구였다. 이들은 마한에 대해 조공과 조세를 납부했다. 그러므로 낙랑 같은 적국은 아니었다. ■ 남삼한 70여 국 삼한의 소속 국가 중에서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70여 개다. 마한은 원양·모수·상외·소석색·대석색·우휴모탁·신분활·백제·속로불사·일화·고탄자·고리·노람·월지·자리모로·소위건·고원·막로·비리·점비리·신흔·지침·구로·비미·감해비리·고포·치리국·염로·아림·사로1)·내비리·감해·벽비리·구사오단·일리·불미·지반·구소·첩로·모로비리·신소도·고랍·임소반·신운신·여래비리·초산도비리·일난·..

고조선 강역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고조선의 서쪽 경계 지역이 어디였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 리지린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서기전 3세기까지는 하북성 난하였다가 서기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 동쪽으로 축소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오늘의 중국 요녕성 개평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역시 발해 북안 난하 유역을 고조선의 서쪽 경계지역으로 보고 있고, 중국에게 밀려서 한때 축소되었다고 보지만 진·한(秦漢) 때 다시 난하를 국경으로 삼았다고 보는 점이 다르다. 또 리지린은 왕검성을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봤지만 윤내현은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지 단군조선의 도읍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56년 만에 남에서 출간..

그의 고조선 연구로 교과서에서 일제가 고조선 역사를 허구화하기 위해 만든 단군 '신화'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사군이 중국 허베이성의 난하(灤河)와 요하(遼河) 하류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써 고조선 때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한반도 북쪽에 가져다놓았던 한사군의 위치 지도가 교과서에서 없어졌다. 고조선의 영토가 현재의 요하에서 난하까지로 넓어진 것은 물론이다. 고조선을 서기전 2333년 세워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명확하게 기술하게 된 것도 의미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2009년 교과서에는 다시 단군신화라는 말이 등장했다. 지난해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나랏돈을 써가며 한사군의 위치를 조선총독부가 주장하던 대로 한반도 북쪽에 가져다놓은 영문판 역사책을 출판한 사실이 드..

윤 교수는 이 시기 고조선 붕괴 후 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대방국·한(삼한)·신라·백제·가야 등의 고대국가가 들어서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며 치열하게 다퉜다고 본다. 윤 교수의 연대 구분은 기원 전후부터 약 300년 동안을 '원(原)삼국시대'로 부르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체제의 원시적 형태로 보는 통설과 어긋난다. 윤 교수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기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열국의 역사를 통째로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열국들의 활동 영역도 남서쪽으로는 중국 요서(遼西) 지역과 상하이(上海) 등 동부 해안지역 , 북동쪽으로는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를 만큼 광범위하다. 열국들이 고조선의 뒤를 이은 만큼, 고조선이 요하(遼河) 서쪽까지 넓은 영토를 ..

서기전 2333년 무렵 국가 단계로 진입한 고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베이징 동쪽 난하로부터 동북쪽은 아르군 강과 흑룡강, 남으로는 한반도 남쪽 해안에 이르는 만주·한반도 전역에 걸쳐 있었다. 고조선이 기자조선으로 넘어가고 다시 위만조선을 거쳐 한4군으로 이어진다는 기존 통설은 잘못됐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4군은 모두 고조선의 서쪽 변경지역인 베이징 인근 난하 동부지역, 요서지역에 있었으며, 주나라 망명객 기자의 조선은 서부 변경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작은 거수국(제후국)에 지나지 않았다. 낙랑군 등 한4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서지역에 있었다. ■고대사 통념 바꾼 '윤내현 고조선 연구' 개정판2015. 10. 22. [한겨레] 고조선 연구(상)윤내현 지음/만권당 1979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