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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단군왕검 실재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고 단군조선 역사도 공백으로 비워두는 주류 강단사학은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도 병립하고 있다. 주류 강단사학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진 않지만 결별하지도 못하여 선도사학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3)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 K스피릿 입력 2022.07.16 08:13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8.15 광복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해체하고 한민족의 자주적이..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0) '임..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

유교사학이 중화사관이라는 틀 속에 우리 역사를 최초로 집어넣은 사건은,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표현했던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1135)과 그 실패 과정에서 드러난 선도(仙道:선불습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대충돌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루어졌다.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교 세력은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정치 표방을 합리화하고 유교사관 확립을 도모하였다. 한국사를 유교사관으로 해석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역사기록에서 배제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서술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4) 고대사 중심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한 김부식과 중화사관 도입K스피릿 입력 2022.05.16 1..

현재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 기자의 후손인 준왕과 중국 망명객인 위만이 한민족을 통치했고 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이 설치됨으로써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삼한) 등이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가 옳다면 고대에 한민족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고구려도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음으로 중국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기자국(기자국),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 즉 ..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

안확(1886년(고종 23)~1946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대마을(서울 성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역, 곧 인왕산과 가까운 지역)의 안씨(安氏)집안 태생으로 중인 출신이다.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교육받고, 1896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하여 연설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소학교를 마친 뒤 당시 유행하던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신경준(1712년(숙종 38)~1781년(정조 5))은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현감,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운해훈민정음』 등을 저술한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33세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서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대한제국 순종 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근거가 되는 사료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에 의하면, 역사와 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교정을 보았다. 출간사항 1929년(쇼와 4년), 대동사강사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상권 1권과 하권 2권이 보관되어 있다. 1974년, 경문사에서 상·하권을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권초에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기씨조선 이후로는 기씨조선, 한,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의 여러 나라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서로 합쳐지고 나뉘면서 단씨조선-기씨조선-마한..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은 주요 경전 『신고강의(神誥講義)』, 『신리대전』, 『회삼경(會三經)』, 『신사기(神事記)』, 『조천기(朝天記)』, 『신가집(神歌集)』 등의 편찬을 주관한 대종교의 이론가임과 더불어 치열한 민족사학자이다. 그는 특히 대종교의 종사(倧史)인 『신단실기(神壇實記)』와 민족통사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김헌(金獻)이라고도 하였다. 수원(지금의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창희(金昌熙)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1885년 정시 문과에 급제, 한림옥당 · 병조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