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2) 단군시대를 폄하한 이익과 안정복/ 단군왕검마저 부정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오로지 중국인의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본 한치윤・한진서 본문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2) 단군시대를 폄하한 이익과 안정복/ 단군왕검마저 부정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오로지 중국인의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본 한치윤・한진서
대야발 2025. 4. 4. 10:19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설』)도 가지고 있었다. 문명의 시작과 중심은 중화라는 중화사관에 철저히 얽매여 있는 역사인식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익이, 단군조선을 과연 중화의 단계로 보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7) 단군시대를 폄하한 이익과 안정복
K스피릿 입력 2022.06.06 16:36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이익, 단군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표명(表明)
경기남인의 영수였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1740)에서 소중화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는 유교 성리학자의 역사인식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지리적·종족적 화이관에 기반하여 중국과 이적(夷狄)의 우열을 따지는 전통적인 화이관을 부정하고 문화주의적 화이관을 주장했다. 역사의 정통체계를 단군-기자-마한-통일신라의 흐름으로 이해하여 단군정통론을 주장하였으며, 한국고대사의 무대를 압록강 동쪽으로 국한하지 않고 요심(遼瀋;요양·심양)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단군을 동방의 정통으로 간주한 것은 단군조선을 이미 중화의 단계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고대사는 요순・3대 문화의 동방적 전개로서 소중화로서의 정통성을 가지며, 그 정통의 시발은 요・순・우와 동시기로 이는 기자정통시발설(箕子正統始發說)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설』)도 가지고 있었다. 문명의 시작과 중심은 중화라는 중화사관에 철저히 얽매여 있는 역사인식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익이, 단군조선을 과연 중화의 단계로 보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단군의 강역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자가 봉한 지역이 연나라와 접근해 있어 요서·요동지역이 모두 영토 안에 들어있었으나 진개의 침략으로 서쪽 영토를 잃고 패수인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관구검이 압록강 서쪽에 있는 환도성을 침략할 때 현도에서 와서 낙랑으로 퇴각한 사례를 들며 낙랑과 현도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고, 진번은 요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임둔군 이외의 3군이 모두 요동, 요서에 있다고 하여 연나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인식도 보여준다. 진개의 침략 이후 압록강을 연(燕)과의 국경으로 삼았는데, 한(漢)의 3군인 낙랑·현도·진번이 요동·요서에 있다고 하였으니, 진개에게 뺏긴 요서·요동의 영토를 되찾은 이후 그 땅을 위만에게 공탈(攻奪)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낙랑군에 대해서는 치소는 요동에 있었으나 관할지역은 지금의 평양까지라는 혼재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기전 82년 이후에는 평안도와 강원도가 모두 낙랑에 속한다고도 하였다. 낙랑군치를 요동으로 본 것은 당시로서는 진전된 인식이었으나 관할지역이 지금의 평양까지라고 본 점에서는 낙랑군 ʻ재평양설ʼ을 부정하지는 못한 절충론이었다.
문화주의적 화이관을 주장하여 화이를 가르는 기준을 문화의 우월성에서 찾은 이익에게 조선이 고대로부터 공자도 인정하는 문명국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공자도 높였던 주(周)왕실에 홍범구주를 설파하고, 문명을 전파하여 고대 조선을 교화한 기자시대의 문화발전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은 더 낮추어 보아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ʻ혈통은 단군에서 시작하지만 문화의 중심은 기자ʼ라는 유교 성리학자들의 인식이 이익에 이르러 처음으로,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은 아주 낮았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ʻ표명ʼ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애초 기자시대에 문화가 발전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단군시대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지만,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이 낮았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익이 천여 년 지속된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이 아주 낮았다고 공식 표명한 이후 단군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성호학파 고대사 인식에서 공식화되었다. 안정복과 정약용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의 정통에 대한 혼란과 단군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스승의 역할과 책임은 그만큼 막중한 것이었다. 시대는 변화하였지만, 중화 문명 전수자라는 기자에 대한 존숭이 강화될수록 단군에 대한 인식은 약화되었고 심지어는 역사적 실존을 부정당하기도 한 것이다.
이익은 한국사 정통이 삼한(마한)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는데, 한백겸의 주장을 따라 한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삼한이 북과 남으로 분립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한백겸은 중국문화 영향(위만조선・한사군)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삼한을 보았다. 그러나 이익의 ‘삼한정통론’은 은나라의 문화, 중국 한나라의 백성, 주나라의 문화가 명맥을 유지하며 신라로 이어져서 예절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한백겸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전기 관찬사서인 『동국통감』은 사대적인 역사서술로 비판받는 『삼국사기』보다 더 철저하게 사대주의 중화사관에 의해 편찬되었다. 민족사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중심으로 삼한을 바라보는 이익의 역사 인식은 삼한 주민을 토착민으로 보는 조선전기 『동국통감』보다도 더 퇴행한 것이었다.
안정복, 단군 정통에 대한 혼란한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론의 강변
성호학파로서 이익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안정복은 『동국통감』(1485) 이후로 가장 방대하고 체계가 잡힌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1778)을 집필했다. 이 책은 사실고증 업적으로 뒷날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내용 중 지리고(地理考)로 인하여 근대 역사가들이 『동사강목』을 필독의 책으로 여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안정복은 역사 정통의 시작이 기자에서 시작된다고 서술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단군이 정통이라고 하는 등 정통의 시작에 대해 일관성 없는 혼란한 인식을 보여준다. 『동사강목』 목록에서는 역사의 시작이 기자로부터임을 말하고 있다. 범례에서도 기자가 정통임을 말하며(“今正統始于箕子而檀君附見于箕子東來之下”, 동사강목), 실제 본문 서술도 기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범례 다른 곳에서는 정통이 단군에서 시작한다(“正統謂檀箕馬韓新羅文武王”, 『동사강목』)고 하고, 동사강목도(東史綱目圖) 상(上)에서도 정통의 시작을 단군으로 그리기도 한다. 우리 역사 정통의 시작에 대해 일관성 없이 혼란한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선도사서 계통인 고기(古記)류에 기록된 단군 사적을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按東方古記等書所言檀君事 皆荒誕不經”, 『동사강목』)고 하였다. 중이 적은 기록으로 환인(桓因)이 전해짐으로 인해 기자의 인현(仁賢)의 고장의 말이 괴이하게 되었으니 통탄한다고도 하며, 급기야 삼성사(三聖祠)에서 제사지내는 삼성 중 단군제사만 남기고 환인・환웅은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단군조선의 문화, 사적을 서술하였으나 이는 중국 성인인 요・순의 교화 영향으로 보았고, 기자가 와서 인현의 교화를 베풀었다는 인식은 이익과 별다르지 않았다. 6년간의 서간(書簡) 문답을 통해 이익의 영향도 받았겠으나 중국 중심 사료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료들의 내용만을 신뢰하여, 주자성리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18세기 유교 성리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안정목은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강역을 먼저 정해놓아야 한다"고 지리고증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안정복의 지리고증 방식은 아주 독특하였다. 『한서』 지리지와 『통전』 기사를 인용하고 나서 "지금의 평양은 낙랑"이라고 자의적으로 단정하였다.(“前漢誌樂浪郡治朝鮮縣 註云以右渠所都爲治所也 應邵曰樂浪故朝鮮國 通典亦云平壤城卽漢樂浪郡王儉城 今平壤之稱樂浪其來久矣”, 『동사강목』)
그런데 안정복이 단정한 문구 앞에 인용된 문구 어디에도 지금의 평양이 낙랑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안정복이 인용한 응소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낙랑군이 된) 조선왕의 옛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이다(“應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고 기록하였다. 두우 또한 『통전』에서 낙랑군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비롯한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통전』 변방 고구려)고 하였다. ʻ낙랑군 수성현ʼ에는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 남쪽 경계까지는 6백리’인데 조선은 곧 낙랑군치이니, 지금의 평양에서 한강까지는 550리라고 하였다.(“樂浪 按括地志曰朝鮮南界六百里 朝鮮卽樂浪郡治 今平壤至漢江五百五十里”, 『동사강목』) 낙랑군치에서 남쪽 경계가 600리인데 지금의 평양에서 한강까지 550리로 비슷하니 낙랑군치가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리가 비슷하다는 주장이 낙랑군치가 지금의 평양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괄지지』에는 ‘朝鮮南界六百里’라는 구절이 없다. 『괄지지』에 기록된 해당 구절은 ‘南至新羅國六百里’이다.(“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鞨國千四百里”, 『括地志』) 안정복이 기자강역고에서는 ‘南至新羅國六百里’라고 『괄지지』의 해당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낙랑고에서 ‘朝鮮南界六百里’라고 쓴 것은 안정복의 의도된 표현이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료의 원문을 변개한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료를 변개할 정도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강한 선입견에 빠진 안정복은 이후 한・중 관련 사료를 모두 이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오류에 빠진다. 장통이 미천왕과 수년간 싸우다가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한 것을 ‘요동에 별도로 설치(別置遼界)’했다고 하여 지금의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요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았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을 처음으로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은 입증하지 못한 채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주장일 뿐이었다. 입증해야 할 주장을 입증하지는 못한 채 주장을 사실로 전제(前提)하고 나서, 그에 근거해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어야 하므로 ʻ낙랑국ʼ 최리왕이 대무신왕에게 항복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은, 세력이 한 국가처럼 강해서 왕이라고 칭한 것일 뿐, 낙랑군은 중국의 행정구역이므로 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관구검의 침략 이후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247)하였는데, 한나라 낙랑군이 그 평양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므로 사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지만 낙랑군 치소가 동쪽으로 옮겼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안정복은 후한 화제 때 최인이 낙랑군 속현인 장잠현의 장이 되었다고 인용하였다.(“和帝時崔駰爲長岑長卽樂浪屬縣也”, 『동사강목』) 그런데 『후한서』 최인열전에서는 ‘其地在遼東’이라 하여 낙랑군 속현인 장잠현은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안정복이 인용한 인용문과는 달리, 원문에는 장잠현이 낙랑군에 속한다고 하고 나서 바로 뒤에 ‘그 땅은 요동에 있다’고 명기(明記)되어(“出為長岑長 【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 『後漢書』) 있는 것이다. 안정복에게 낙랑군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에 있어야 했으므로 ‘그 땅은 요동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정복은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지리지 『성경지(盛京志)』(1684)에서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한나라 장잠현은 동경[요양] 동북 150리에 있었다’고 기록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안정복에게 전한・후한(前漢・後漢) 때에는 낙랑군에 속했다가 진나라 때에 대방군에 속하게 되는 장잠현이 요동 땅에 있을 수는 없었다. 장잠현이 요동에 있었다면 대방군의 속현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長岑後漢同晉屬帶方 按盛京志引遼史云 崇州本漢長岑縣在東京東北一百五十里 此說非也 長岑若在遼地則後來何以屬帶方耶”, 『동사강목』) 낙랑군이 조선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던 안정복에게 낙랑군 둔유현 이남 황무지를 쪼개 만든 대방군은 당연히 한반도에 있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ʻ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ʼ는 선입견이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게도 만들고 사료를 일부러 누락시키게도 만든 것이다. 자신의 논지 전개에 방해가 된다고 문헌에 기록된 문구를 빼버린 후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고, 반드시 필요한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도 회피한 상태에서, 사료를 조작하면서까지 자의적인 판단으로 근거 없이 ʻ지금의 평양이 낙랑군ʼ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고증(考證)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낙랑을 자의적으로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한 안정복은 “이에 의거하면 양한 및 조위시대에는 낙랑이 항상 중국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도 하였다.(“據此則兩漢及曹魏之世 樂浪常爲中國之地矣”, 『동사강목』)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단군 기록을 삭제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에게 단군을 말살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용되었듯이, 안정복의 자의적인 지리고증은 중국의 역사지리학자 담기양에게 한나라, 위나라의 국경선을 평양까지 그리게 만드는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위나라가 평양까지 점령하였다는 동북공정 논리는 결과적으로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제공한 셈이 되는 것이다.(1)
주자학에 실용적 사유와 경세론을 결합시켜 실학을 정립한 조선 실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정약용이지만 그의 고대사 인식에는 단군조선은 물론 단군왕검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기록이 아닌,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기록들은 모두 허황되고 거짓되어 근거가 없다(“故我邦史冊 據漢魏晉諸史 點綴成文 其或收拾於本國之傳記者 皆虛荒誕妄不根之說”, 《아방강역고》(1811) 변진고)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8) 단군왕검마저 부정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K스피릿 입력 2022.06.11 09:44 업데이트 2022.06.11 11:39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주자학에 실용적 사유와 경세론을 결합시켜 실학을 정립한 조선 실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정약용이지만 그의 고대사 인식에는 단군조선은 물론 단군왕검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기록이 아닌,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기록들은 모두 허황되고 거짓되어 근거가 없다(“故我邦史冊 據漢魏晉諸史 點綴成文 其或收拾於本國之傳記者 皆虛荒誕妄不根之說”, 《아방강역고》(1811) 변진고)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단군에 대한 믿을만한 문헌자료가 없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 글에 선인 왕검이란 설이 두루 실려 있지만 왕검(王儉)이란 이름도 지명인 왕험(王險)에서 꾸며낸 것으로 보았다.(“鏞案易曰 王公設險 以守其國 平壤之別名王險 蓋此義也 檀君之都於平壤 亦無信文 況姓名之爲王儉 有誰知之仙人王儉之說 徧載東人之筆 然改險爲儉 旣甚穿鑿”, 《아방강역고》) 단군의 도읍 임검성(壬儉城)의 ‘검(儉)’자를 중국 사서에서 ‘험(險)’으로 잘못 썼다고 보는 선가(仙家) 북애자와는 역사 인식 기준이 완전히 달랐다.
기자를 정통의 첫머리로 삼는 것은 17세기 남인 홍여하의 관점을 이은 것이나, 홍여하가 단군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되 혈통이 단절되었다고 본 것과는 달리 정약용은 단군왕검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조선 건국 이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라는 조선 유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인식을 전면 부정하고 결국, 중국인 기자로부터 한국고대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이러한 인식은 한치윤의 《해동역사》, 김택영의 《역사집략》을 거쳐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게 이어졌다.
정약용은 한백겸을 이어 남북이원론적인 국사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기자조선-한사군-고구려-발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토착세력인 마한이 삼한을 주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양나라 무제(재위:502~549) 이전에는 신라가 아닌 진한의 이름을 썼다 하고, 양한·위·진 시기가 삼한 시대와 같다(“兩漢·魏·晉之際 與我三韓之國時代實同”, 《아방강역고》)고 하여 4세기까지도 삼국이 아닌 삼한 시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의 주장은 기실 정약용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열수(한강) 남쪽은 궁벽하나 북쪽은 중국과 가까워 문명이 조금 빠르다(“洌水以北 近於中國文明差早 洌水以南 益復荒遠”, 《아방강역고》)하여 문명은 중국으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를 요동지방에 두지 않고 한반도에만 국한하여 두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 정약용의 지리고증 태도는 17·18세기 선배학자인 한백겸과 안정복의 역사지리 연구성과를 계승 발전시킨 것인데, 송호정은 정약용의 고조선 지리 고증에 대해 “실학자들의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역사지리 연구 가운데 최고의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정약용의 지리고증 방식 또한 아주 독특하다.
정약용은 아무런 문헌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위만의 도읍이었던 낙랑군 조선현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정약용이 인용한 중국문헌에는 낙랑군 속현인 열구현은 요동에 있다(“列口 郭璞注山海經云 列水在遼東”, 《아방강역고》)고 하였고,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의 기점이 있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 有碣石山長城所起 通典云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 長城起於此山”, 《아방강역고》)고 하였다. ʻ요동과 갈석산과 만리장성ʼ. 너무도 분명하게 한반도 안에는 있을 수 없는 지명이 나오므로, 고증을 위해서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함에도 정약용은 이를 무시 혹은 회피하고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조선왕 만이 왕험성을 도읍으로 하였다는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대해,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의 배인(裴駰)은 《사기집해》에 인용하기를, 동진과 유송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서광(徐廣)은 (요동군 18현 중 하나인) 험독현이 창려에 있다"고 하였다.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에서 후한의 "응소는 지리지에 의거 요동군 험독현은 위만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주를 달았다"고 하였고, 서진의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중국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위만조선의 도읍인 험독현 또는 왕험성은 요동군에 있다는 것인데, 의견이 달랐던 정약용은 ʻ어찌 (지금의 평양에 있어야만 할) 위만의 도읍이 요동군에 있을 수 있느냐. 그들이 제멋대로 비정했다ʼ고 무시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ʻ위만의 도읍인 왕험성이 요동에 있었다면 지금의 평양에는 있을 수 없으니 서광, 응소, 신찬 등이 틀렸다(“險瀆 旣是遼東屬縣 安得爲衛滿所都 徐廣・應劭・臣瓚之等 妄爲之說耳”, 《아방강역고》)ʼ고 일방적이고 공허한 주장만 했을 뿐이다.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사서 내용이나 다른 학자의 의견을 배척하였지만 자신의 선입견말고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인용한 《수서(隋書)》에는 수양제의 113만 대군의 24道(공격로)가 모두 압록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양평과 후성만이 요동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낙랑군에 속하는 현인데 낙랑의 모든 현이 어찌 모두 요동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24로는 과시용일 뿐 근거가 없고 요동 1로가 맞다고 주장하였다. 24군으로 나누어 나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隋煬帝二十四軍之詔 但欲夸耀焜煌 全無實踐 不可據也 隋唐之伐句麗 惟有遼東一路 安得二十四軍 分道各出 大無理矣”, 《아방강역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믿은 정약용에게 낙랑군의 속현들이 요동에 있다고 기록된 《수서》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이에 대해서도 주장만 할 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기록도 아닌, 국가의 운명을 걸고 고구려와 건곤일척의 전면전을 벌인 수나라 황제 양광의 조서 내용을 "과시용·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간단하게 치부(置簿)해 버리는 것을 문헌을 고증하는 학자의 태도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수양제의 조서에는 24개의 공격로가 나와 있다. 수나라의 대군은 한나라 낙랑군에 속하는 현이었던 ʻ조선, 함자, 점제, 대방, 해명, 장잠, 누방, 제해, 혼미, 동이ʼ도를 포함한 24개의 공격로를 통해 평양으로 집결하라고 조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낙랑군의 여러 속현을 지나고 나서 평양으로 집결하라는 것은 그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수양제의 조서는 낙랑군이 요서나 요동지역에 있었기에 가능한 명령이었다.
17세기 중국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서 처분까지 받은 이탁오의 사상도 망설임 없이 수용하여 탈주자학적 경전해석의 근거로 사용한 정약용이었으나, 그러한 과단성은 유학의 범주 내에서의 일에 국한되었다. 고래(古來)의 선도적 역사인식에 근거한 선도사서 기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으로 일관하였다. 성호학파의 경세치용학과 북학(北學)의 이용후생학을 합쳐 조선실학을 집대성하고, 정조를 보좌하며 개혁에 참여한 실학의 대가로 칭송을 받는 정약용이었으나, 한국 상고·고대사를 보는 인식은 고루한 유학자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를 한반도에서 찾은 정약용의 지리 고증 방법은 "다산은 기록은 무엇이나 믿는 비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기록 자체를 비판하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여 문헌고증학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지금도 높게 평가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와는 달리,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약용은 기록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상호 모순되는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동천왕 21년(247년) 낙랑이 평양을 잃어 고구려에 넘어갔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그러고 나서 7년 후에 낙랑군으로 귀양보냈다는 가평(嘉平) 6년(254)의 〈위지〉 기록을 같이 제시한 후, “평양은 고구려에 속해 있었지만 낙랑군은 여전히 위나라에 복속되어 있었다”(“鏞案 罪人流徙必在內服之地 則此時平壤雖屬句麗 樂浪郡之依然內服 可知也”, 《아방강역고》)는 모순된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신하를 귀양 보내는 곳은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만 가능한데 낙랑군으로 귀양을 보냈으니, 평양은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지만 (평양에 있다는) 낙랑군은 위나라가 다스리는 영토라는 것이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한반도의 평양이고 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기록은 무엇이나 믿는 비과학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기록 자체를 비판하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정약용은 심지어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광개토태왕, 장수태왕과 동시대인 북위(386~534) 때에도 낙랑과 대방은 중국에서 바다 건너 다스렸다고 주장하였다.(“鏞案...地形志所云樂浪帶方 亦在我邦域之內 魏人越海而遙領 非在鴨水之西也”, 《아방강역고》) 낙랑군이 영주(營州)에 속해 있다는 중국 사료를 인용하였으나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유교사학 ʻ이데올로기ʼ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냉철한 사료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사료 기록과 함께 당시 여러 지식인들이 낙랑의 위치를 고대 요동으로 비정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鏞案 今人多疑 樂浪諸縣 或在遼東”, 《아방강역고》)으나 정약용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역사 지리는 1차 사료에 대한 엄밀한 검토를 바탕으로 비정해야지 특정 이데올로기로 비정하면 안 된다는 좋은 사례이다.(2)
18세기에 꽃피었던 실학 전통을 사학 분야에서 탁월하게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한치윤・한진서는 시종 외국 자료[중국 523종, 일본 22종]로 우리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유교가 도입되기 전 민족 고유 사상과 역사인식에 근거한 고기류를 "허황되고 근거가 없는 말이라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荒誕之說 士大夫不言可也”, 《해동역사(海東繹史》(1823))이라고 보았기에 중국인과 일본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의 기록만 가지고 역사를 쓰면 그 역사는 남의 것이 되어 버린다. 남이 그 범위와 한계를 정해 놓은 자료에만 의지하므로 내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9) 오로지 중국인의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본 한치윤・한진서
K스피릿 입력 2022.06.18 08:31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18세기에 꽃피었던 실학 전통을 사학 분야에서 탁월하게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한치윤・한진서는 시종 외국 자료[중국 523종, 일본 22종]로 우리 역사를 살펴보고자 했다. 유교가 도입되기 전 민족 고유 사상과 역사인식에 근거한 고기류를 "허황되고 근거가 없는 말이라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東史 凡幾種哉 所謂古記 都是緇流荒誕之說 士大夫不言可也”, 《해동역사(海東繹史》(1823))이라고 보았기에 중국인과 일본인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의 기록만 가지고 역사를 쓰면 그 역사는 남의 것이 되어 버린다. 남이 그 범위와 한계를 정해 놓은 자료에만 의지하므로 내 것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외국 자료를 문헌비판 없이 그대로 이용하였기에 특히 고대사에서는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단군조선에 앞서 동이총기(東夷總紀)를 독립된 항으로 넣어 유교문화를 숭상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이(夷)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고 한국문화의 뿌리를 동이문화와 연결시킴으로써 그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한영우의 지적처럼 동이의 군자국이라는 것은 중국인 기자의 교화 덕으로 이해한다.
기자 이전 동이에 대한 서술은 《산해경》을 인용하여 "군자국에 살며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라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원지역 국가와 교류하고 전쟁한 사실은 모두 일방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시종일관 중원지역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처지고, 정복되고 복속되고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으로 일관하였다. 선도사서인 고기류는 모두 배제하고 중화의 관점에서 쓰여진 자료만 인용하였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중원지역에 앞선 동이문화에 대해서는 "황제가 청구에서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받았다"는 단 하나의 기록만 실려 있다. 황제 헌원이 청구에서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다는 내용은 선도사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이문화가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기록이 오로지 도교서적인 《포박자》에만 실렸다는 것은 유교사서만 살펴보고 고기류를 배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기자가 도망갔다는 조선이 단군조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며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말하는 단군에 관한 일은 모두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고, 단군조선을 실은 것은 《고려사》에 단군을 전조선이라 하였기에 따랐을 뿐이라고 단군조선을 부정하였다.(“然則箕子之前知有朝鮮之稱 而檀君時朝鮮稱否未可的也 然而麗史以檀君爲前朝鮮箕子爲後朝鮮故今從焉...按東史所言檀君事皆荒誕不經”, 《해동역사》)
《삼국사기》에 그나마 한 줄 기록된 ‘平壤은 仙人 檀君王儉이 자리 잡은 곳’이란 문구를 삭제하지 않아, 황잡한 설이 정사에 편입되어 인현의 나라가 말이 괴이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탄식한다. 남인학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마찬가지로 단군시대에 관한 고기류 기록에 대한 불신을 똑같이 표현하고 있다.
해석보다 자료를 앞세우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실증적인 편사(編史) 방식으로 문헌고증에서 당시 다른 사서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는 《해동역사》 역시, 고대사 지리고증 방식에 아주 독특하였다.
자신의 주장과 다르면 인용에서 일부러 누락시켜서(“初 Ⓐ王調據郡不服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崔駰奏記指切長短 憲疎之因察駰高第 Ⓑ出為長岑長按長岑縣屬樂浪郡 駰自以遠去不得意”, 《해동역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였다. Ⓐ 후한서 광무제본기 왕조(王調) 기사 원문은 ‘初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이다. Ⓑ 후한서 최인열전 해당 기사 원문은 ‘出為長岑長【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이다.
‘낙랑인’ 왕조가 웅거한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在遼東)’라고, 낙랑군 장잠현은 ʻ요동에 있다(其地在遼東)ʼ라고 후한서 원문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한치윤은 인용에서 이를 빼버렸다. 따라서 원문과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한사군을 다룬 ‘사군사실(四郡事實)’ 항목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다면, 낙랑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킨 한국고대사는 전체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중대 사안이다. 역사학자라면 반드시 고증과 함께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함에도 한진서는, ʻ수성폐현은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는 《대청일통지》(1743) 기록(“大淸一統志...遂城廢縣在平壤南境”, 《해동역사》 續)을 근거로 태강지리지(太康:280~290)와 통전(801)에 기록된 한나라 수성현(漢遂城縣)이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기록은 ‘진실이 아닌 듯하다’라고 한마디 하고 끝내버렸다. 더욱이 《대청일통지》에 기록된 평양은 한반도의 평양을 적시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평양 남쪽에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없다면 갈석산과 만리장성이 있는 수성현의 위치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1743년의 기록을 근거로 그보다 1450여 년 전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의 ʻ장성이 시작되는 곳ʼ이라는 기록을 한마디로 부정하고 끝내버린 것이다. 갈석산은 아예 무시하고 회피해 버렸다. 한치윤을 이어 구체적인 지리비정을 하였던 한진서는 후대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대 기록이나 앞 시기 기록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한진서가 인용한 《대청일통지》에는 수성폐현이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는 구절에 이어“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수성도(遂城道)로 나갔는데 바로 이곳이다”(“大淸一統志...遂城廢縣在平壤南境 漢置屬樂浪郡後漢魏晉皆因之 隋伐高麗分軍出遂城道卽此”, 《해동역사》 續)라고 하였다.
수양제의 113만 대군의 24道(공격로) 중 하나인 수성도가 한반도의 평양 남쪽 경계에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한진서는 이 구절을 무시하고 아예 언급을 회피하였다. 한진서에게 지금의 평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평양을 찾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수양제의 24道(공격로)는 ʻ자랑하여 빛을 내고자 한 것이요,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말ʼ이라고 부정하였는데, 한진서는 인용은 하되 설명을 하지 않고 회피하였다.
사료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자신의 선입견과 다르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부정만 하거나 설명을 회피하는 것을 고증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배치되는 사서 내용이나 다른 학자의 의견을 배척하기도 하였다. 《대명일통지》에 영평부 경내에 조선성이 있고, 기자의 수봉지라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록했는데, “고금의 사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찬수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當日儒臣令稍知今古者爲之 何至於此爲之太息”, 《해동역사》 續)라고 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명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지리지 편찬자들을 역사적 사실도 모르는 학자들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학자 고조우도 중국 역사 지리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1678))에서 그 영평부는 산해관 서쪽 180리에 있었다고 하였다.(“永平府 東至山海關一百八十里...後魏亦曰遼西郡 兼置平州 又分置北平郡”, 《독사방여기요》)
북위(北魏) 북평군 조선현이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이었다고 명기(明記)되어 있는데도, “후위 때 요서나 북평 등지에 설치된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 때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하였다. 한사군의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병합된 후 모용외에 의해 요서에 교치(僑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진서가 인용한 《자치통감》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교치되었다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고대 요동에 있던 낙랑군이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한진서 역시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수경주(水經注)》에 근거하여 지금의 평양에 한사군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鎭書謹按 朝鮮縣卽樂浪郡之治也 據水經注今平壤府是也”, 《해동역사》 續)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수경주를 쓴 역도원은 한반도 평양이 한사군 낙랑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도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한 고구려 사신의 말을 듣고 ‘그 땅은 지금(6세기) 고구려 도읍인데, 고구려 사신 말처럼 도읍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면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경유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다른 사료들은 모두 무시하고 ‘도성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빈약한 논리이다. 게다가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고 나서는 ‘서북쪽이 아닌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ʻ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이 한반도에 있었는가?ʼ는 조선 초 세종 때에도 의문이 제기된 사안(“禮曹判書申商啓曰 三國始祖立廟 須於其所都...高句麗則未知其所都也”, 《세종실록》)이었으며, 5세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는 요양이라는 연구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역도원이 말하는 서쪽으로 흐르던 6세기의 패수는,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던 패수와는 강물의 흐름이 정반대인, 서로 다른 강이었던 것이다.
역도원 《수경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낙랑군이 존재하던 당시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 패수는 서고동저(西高東低)형 지형에 있었고,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간 6세기 패수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 지형에 있어서 강물의 흐름이 정반대인 서로 다른 강이었다는 사실이다.
한진서는 고증은 하지 못한 채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나서 요서에 교치되었다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안정복의 주장을 이어받은 한진서의 ʻ낙랑군 교치설ʼ은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이미니시 류가 다시 주장하였고, 노태돈이 ʻ313년 평양의 낙랑군이 소멸된 후 낙랑·대방군 등은 요서지방에 이치되었다ʼ고 이어받은 후 현재 주류 강단사학의 통설이 되었다.
ʻ한사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는 견해를 비판ʼ한 한진서의 ʻ교군(僑郡)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탁견ʼ이라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진서도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요서 교치설을 주장하였으므로, ʻ한사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는 견해를 비판ʼ했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다. 요서로 교치되기 전에 ʻ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에 있었는가?ʼ가 문제의 핵심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증도 입증도 없다. ʻ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ʼ는 근거 제시도 없는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인식을 하던 서고동저형 지형이 동고서저형 지형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만리장성 동쪽에 있으면서, 낙랑군 누방현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서고동저형 지형은, 동고서저형 지형인 한반도나 요동지역이 아닌 지금의 요서지역인 연산산맥 근처일 수밖에 없다. 자연지리학인 지형학에 의하면 고대 평양은 한반도 평양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중심지 논의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자료인 《위략》의 ʻ백리의 땅을 봉해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ʼ는 기록(“魏略曰...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 詣準降說準求居西界...準信寵之 拜爲博士賜以圭封地百里 令守西邊”, 《삼국지》)은 너무도 명확하게 지금의 평양이 아님을 역설(力說)한다. 지금 평양 중심부와 서해안 바닷가까지의 거리는 평면지도상으로 36km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평양 서쪽에는 (위)만에게 봉해줄 100리의 땅도 존재하지 않고 변경지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서쪽에 바다가 있어서 위만에게 봉해 줄 100리의 땅이 존재할 수 없는 지금의 평양은 낙랑군 조선현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익이 단군의 문화수준이 아주 낮았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이후, 안정복・한치윤은 단군의 사적을 터무니없고 근거가 없다고 인식하였고, 정약용・한진서는 단군왕검의 이름도 지명인 왕험에서 따온 것이라 하여 단군왕검을 부정하였다. 안정복이 정통의 시작에 대한 혼란한 인식을 보여준 이후 정약용과 한치윤・한진서는 역사의 정통에서 단군조선을 삭제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대체로 평양에 있었다고 ‘인식’하는데 그쳤다. 남인 실학자인 안정복・정약용・한치윤・한진서는 모두 중국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문헌 고증을 통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적극적으로 ‘입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지리 고증 방식은 ①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만 하고 ②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부분은 원(原) 사료를 인용할 때 일부러 배제하고 ③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학자 의견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배척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ʻ한사군 낙랑군 = 한반도 평양ʼ이라는 가설이 수용되기 전에 먼저 증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가설에 기반한 전체구조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원시유학에 관심을 두고 문화의 층위(層位)를 기준으로 화・이를 구분했던 남인 실학자들은 기자에 대한 존숭(尊崇)을 더욱 강화하였고, 그만큼 더 단군시대의 문화수준을 저열하게 인식하였다. 심지어는 단군왕검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남인 실학자들의 역사인식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을 거쳐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보겠다.(3)
<자료출처>
(2) 단군왕검마저 부정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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