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0) 홍익사관은 共生의 역사관/ 선도사학으로 바라본 한국 고대사/ 중화사관, 힘의 질서 중시하는 패권주의 본문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20) 홍익사관은 共生의 역사관/ 선도사학으로 바라본 한국 고대사/ 중화사관, 힘의 질서 중시하는 패권주의
대야발 2025. 4. 3. 15:52

민족사학에서는 고유의 신선사상을 민족종교로, 만주를 민족사의 중심무대로, 민족사의 연원을 단군으로 삼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 성과로 인해 요서지역 청구문화(홍산문화)와 요동지역 천평문화를 두 중심으로 하는 배달국이 단군조선 선행문화임이 밝혀졌으므로, 고대사인 단군조선 역사는 물론 상고사인 배달국 역사까지도 다루고 있는 선도사학을 민족사학의 ‘원형’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선도적 세계관인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을 ‘홍익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 홍익사관은 共生의 역사관
K스피릿 입력 2022.04.25 10:19 업데이트 2022.05.23 10:36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한민족은 고래(古來)로 선도(현묘지도·풍류도)라는 민족 고유 사상에 기반한 문화(선도문화)를 누리고 살아왔다. ‘밝음(光明:생명)’을 이상시하는 선도문화(밝문화)를 누리는 중국의 동북방, 신선향(神仙鄕)에는 군자국(君子國)・불사지국(不死之國)・대인국(大人國) 등이 있다고 여겨졌고, 《삼국유사》에는 선도문화(신선문화)의 내용적 실체가 ‘홍익인간(弘益人間)・재세이화(在世理化)’ 또는 ‘광명이세(光明理世)’로 적시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중국 동북지역 상고문화 등장, 중국의 동북공정, 동북지역 상고문화에 대한 한국 학계의 인식 진전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사상・민족문화의 내용적 실체가 선도사상・선도문화임이 분명해졌기에, 한국 민족사학의 원형인 선도사학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어렵사리 유통되는 과정에서 생긴 탈루(脫漏)・착간(錯簡)・첨입(添入)・오사(誤寫) 등의 문제로 인해 위서 시비에 걸려있던 선도사서들도 이제 ‘역사학’ 무대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사학에서는 고유의 신선사상을 민족종교로, 만주를 민족사의 중심무대로, 민족사의 연원을 단군으로 삼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 성과로 인해 요서지역 청구문화(홍산문화)와 요동지역 천평문화를 두 중심으로 하는 배달국이 단군조선 선행문화임이 밝혀졌으므로, 고대사인 단군조선 역사는 물론 상고사인 배달국 역사까지도 다루고 있는 선도사학을 민족사학의 ‘원형’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선도적 세계관인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을 ‘홍익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한국선도의 존재론과 역사인식을 연동하여 보여주고 있는 《요정징심록연의(要正澄心錄演義)》 「부도지(符都誌)」에서는 존재의 본질인 일(一:밝음・생명(氣)・양심)을 ‘천부(天符)’라 하여 물질(현상)계를 구성하는 4대 원소인 공기(氣)・불(火)・물(水)・흙(土)을 조화시키는 중심점으로 설정하였다. 한민족은 고래(古來)로 물질세계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상만 보지 않고 본질을 함께 바라보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체계를 한국선도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에서는 ‘일・삼・구(一・三・九)’로 표현하였고, 선도사서 「부도지」에서는 ‘기・화・수・토・천부(氣・火・水・土・天符)’로 표현하였다. 본질과 현상을 함께 인식하는 한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는 천부를 중심으로 하는 ‘삼원오행론(三元五行論)’으로 개념화된다.
일기・삼기(一氣・三氣)는 여율(呂律:음(陰)・양(陽)의 한국선도적 표현) 이원적 분화과정, 곧 ‘1기(3기)→2기→4기→8기’의 과정을 거쳐 물질화된다. 물질(현상)은 음・양 이원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므로 ‘분리와 대립’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는데, 물질(현상)의 이면에 자리한 본질인 일기(삼기:천부)는 분별과 치우침이 없는 ‘무선악(無善惡:무아(無我)・무(無)・공(空))’ 또는 공(公:전체(全體) 의식)의 속성을 발현함으로써 물질(현상)의 ‘분리와 대립’을 ‘조화’시켜가게 된다. 천부가 조화점(調和點)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선도 전통에서 인간은 자신 안에 존재의 본질인 ʻ밝음・생명(氣)・양심ʼ을 지니고 있으며, 수행을 통하여 이러한 존재의 본질과 같은 상태에 도달 가능한 존재이다. 그 깨달음이 개인 차원(성통:性通)에 머무르지 않고 확대되어 사회적인 차원으로 실천(공완:功完)되었을 때 누구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인간은 대등하고 평등한 존재이다.
선도수행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천(祭天)의례는 국중대회(國中大會)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제천의례는 환웅천왕의 신시배달국에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풍속으로 연면히 이어졌다. 이후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한(韓)의 제천,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제천, 신라의 대・중・소사(小祀)를 거쳐 고려의 팔관회로 이어졌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그 위상이 현저히 약화되어 유교 산천제로 변이되었고, 지금도 마을제의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도적 역사인식과 실천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람속의 밝음・생명(氣)・양심이 온전하게 발현되어(성통・신인합일・인내천) 공동체 전체의 밝음・생명(氣)・양심이 발현된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생하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것(공완・홍익인간・재세이화)이었다. 이는 선진문물을 지닌 환웅족이 가르침을 받으러 온 웅족을 지배・통제하지 않고 개명(開明)하도록 도와주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차후 단군조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나아간 역사적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생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홍익주의는 국수주의와 패권적 영토주의를 근원적으로 배격한다. ‘홍익’이라는 용어 자체에서도 ‘조화・평화・공생’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홍익사관에 입각한 선도사학을 전승한 민족사학이 국수주의・패권주의로 매도되는 것이 부당한 이유이다. 민족사학이 부당하고 근거 없는 비난으로 ‘국수주의・영토주의’로 매도되는 것은 나중에 살펴보겠다.
유사(有史) 이래 기록된 대부분 역사는 우승열패 기록이며 침략・정복・지배의 기록이다. 고대국가는 군사형 국가였으며, 세계 모든 지역에서 한 손에는 검(무력)을 들고 다른 손에는 덕화(농경・신앙)를 들면서 여러 부족들을 연맹시켜 고대국가를 건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건국 사실을 담은 단군사화(실상은 환웅사화(桓雄史話))는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가 현실에서 구현된, 인류사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 기록은 내용 대부분이 단군조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환웅의 신시고국에 관한 것이니 단군신화가 아닌 ‘환웅신화’로 일컬어야 함이 마땅하다. 또한 요서지역 청구문화와 요동지역 천평문화는 서기전 4000년부터 요동・요서를 아우르는 선도제천문화를 지닌 배달국의 두 중심이었음이 고고학과의 융합 연구로 입증되었으므로 단군사화가 아닌, ‘환웅사화’라고 표현하였다.
단군조선은 하(夏)와 상(商)의 정전제인 공법(貢法)이나 조법(助法)의 10분의 1세보다 훨씬 낮은 세금인 20분의 1세를 걷었다. 이는 《맹자》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가족이 함께 연좌되어 책임을 졌던 중원지역과는 달리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고 백성들 의견까지 들으면서 통치를 하였다. 내면의 밝음・양심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복본(復本: 홍익인간・이화세계의 공동체 구현)의 홍익주의를 패권주의로 대체하여 지배・통제하려는 시도에는 단호히 징치(懲治)하기도 하였다. 홍익주의를 패권주의로 대치하려는 요를 징치하기 위한 단군조선과 요순(堯舜)의 1차 전쟁, 우(禹)의 아들 계(啓)와의 2차 전쟁은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침략전쟁이 아니라 진리를 놓고 벌인 유혈 문화전쟁이자 이념전쟁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인간(생명)을 존중하고 조화롭게 공생하는 홍익주의가 실천되었던 단군조선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평화롭게 공생하는 홍익주의 실천은 배달국 안에서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환웅천왕은 배달국 건립 이후 높고 낮음이 없이 사해가 평등하고 모든 종족들이 스스로 행하는 부도의 법(조화롭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과 문명을 각지로 전파하였다. 천웅도를 설립하여 배를 타고 사해를 순방하면서 근본을 잊지말 것을 호소하고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실천을 한 것이다. 단군왕검 역시 부도를 건설하여 사해 제족(諸族)에게 천부의 이치를 전했으며, 교역을 왕성하게 하여 천하가 넉넉하게 하였다. 현실에서 실천되는 홍익주의는 한 국가나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사해동포와 함께 누리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9년 홍수로 중원지역이 물난리를 겪던 시기 하우(夏禹)를 만난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는 치수법을 전수하여 사해동포주의인 홍익주의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이는 선도사서인 《단군세기》는 물론, 중국 기록인 《오월춘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
한민족 역사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 한민족 역사의 시작은 환국 출신 환웅천왕이 백두산 천평지역에 신시를 세우고 입법・사법・행정(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하는 3백5사(三伯五事) 조직을 갖추어 배달국을 개창함에서 비롯하였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우기 이전에 역년(歷年)이 1565년에 달하는 배달국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발발자유적으로 대표되는 요동 백두산 서편 천평문화와 우하량유적으로 대표되는 요서 대릉하 일대 청구문화(홍산문화)는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의 선도제천문화를 보여주는 고고 유적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2) 선도사학으로 바라본 한국 고대사
K스피릿 입력 2022.05.02 10:53 업데이트 2022.05.23 10:36
기자명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선도사서들은 빈번한 내란과 외구(外寇)에 의해 멸실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서적들도 조선 태종~성종 시기에 걸쳐 불태워지고 수거되었다. 선도사서 중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부도지(符都誌), 단기고사(檀奇古史),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청학집(靑鶴集), 규원사화(揆園史話) 정도이다. 세조~성종 대에 수거된 사서 중『표훈천사(表訓天詞)』,『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대변설주(大辨說註)』,『원동중삼성기주(元董仲三聖記注)』는『태백일사』에 그 내용이 일부 인용되어 있고,『고조선비기(古朝鮮祕記)』,『삼성밀기』,『지공기(志公記)』, 『조대기』는『규원사화』에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남한 주류 강단사학과는 달리 북한학계는 규원사화는 물론 단군세기, 태백일사 등을 진서(眞書)로 인정하여 사료로서 인용하고 있다.
필자는 현전하는 선도사서에서 보이는 한국 상고・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사서별로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민족 고유의 사유체계와 제천의례에 대한 인식이다. 한민족은 고래(古來)로 물질세계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상만 보지 않고 본질을 함께 바라보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존재의 본질은 일(一:밝음・생명(氣)・양심)로서 사람만이 밝음을 온전히 갖춘 존재이다. 내 안의 밝음이 우주의 밝음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성통・신인합일) 그 깨달음을 전체 사회 차원으로 확대하여 실천하는 것(공완・홍익인간)이 신시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이었다. 복본(復本)이라고도 표현되는 그 가르침은 바로 밝음이 회복된 이상적인 공동체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내면의 밝음 회복은 심신을 단련하는 선도수행 과정을 통해, 사회적 밝음 회복은 국중대회의 제천행사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천은 환인이 환웅에게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명을 내린 이래 신시에서 단군조선에 이르기까지 풍속으로 연면히 이어졌다. 이후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한(韓)의 제천,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제천, 신라의 대・중・소사(小祀)를 거쳐 고려의 팔관회에까지 이어졌다. 유교국가인 조선에 이르러서는 그 위격이 현저히 약화되어 유교 산천제로 변이되었고, 마을제의 형식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원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한(韓)민족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이다.
둘째, 한민족 역사의 시작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 한민족 역사의 시작은 환국 출신 환웅천왕이 백두산 천평지역에 신시를 세우고 입법・사법・행정(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하는 3백5사(三伯五事) 조직을 갖추어 배달국을 개창함에서 비롯하였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우기 이전에 역년(歷年)이 1565년에 달하는 배달국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발발자유적으로 대표되는 요동 백두산 서편 천평문화와 우하량유적으로 대표되는 요서 대릉하 일대 청구문화(홍산문화)는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의 선도제천문화를 보여주는 고고 유적이었다.
셋째,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한 인식이다. 선도적 역사인식에서는 단군조선의 문화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보았다. 토지개척・궁성축조・글자만들기 등은 물론, 유교 성리학자들이 기자의 치적으로 삼는 ‘예의・농사짓기・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읽기・팔조법금’ 등 문화 교화는 단군조선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9년 물난리를 겪던 중원지역에 치수법을 전할 정도로 수준높은 문화를 누렸던 단군조선은 민주주의적 지도 원리인 화백제도를 시행하고 1/20세로 백성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크게 줄여, 인간(생명)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홍익주의 정치를 펼쳐 나아갔다.
넷째, 역사 정통 계승에 대한 인식이다. 한민족 형성 이후 역사 정통은 환웅천왕이 세운 배달국에서 시작하여 단군조선부여열국(동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대방국・한(삼한)・신라・백제・가야 등)으로 이어졌다. 단군조선을 ʻ계승ʼ했다는 기자조선은 선도사서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연나라가 왕을 칭했던 시기(BCE 323년)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연(燕)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번조선 임금이 된 이후 ‘기자조선이라고 전승ʼ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의 후손이 이른바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기준왕이다.
후술하는 (4)~(6)에서 확인되듯이 선도사학을 왜곡한 유교사학의 핵심 키워드는 중화문명 전파자이자 역사 정통을 계승했다는 ‘기자(箕子)’이다. 그러므로 기자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기록을 살펴보면 기자에 관해서는 선진(先秦)시대 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 『상서(尙書)』 「주서(周書)」, 『논어(論語)』 「미자(微子)」편에 보이지만, 당시에는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미 선진시대 문헌인 『관자(管子)』와 『산해경(山海經)』에도 나오지만, 서한 초 복생(伏生)의 구술(口述) 기록인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야 처음으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 공자의 상서에는 전혀 없었던 기자와 조선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300여년이 지난 후,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상서대전』에 ʻ처음으로, 갑자기ʼ 등장하였던 것이다.
우리 기록에는 12세기 초까지도 고려에는 기자 무덤이 없었으며, 당연히 기자는 사전(祀典)에도 실리지 않았다. 사전이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 각종 제사에 대한 규범이나 규정을 말하는데, 고려 숙종 7년(1102년)까지도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니 국가 차원에서 기자는 전혀 중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123년 송나라 사절 서긍이 고려에서 머물면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선화봉사고려도경』 기록에도 기자와 관련된 사당이나 제사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서긍이 고려에 왔던 1123년 당시까지도 국가차원 혹은 민간차원에서 기자를 숭배하는 것은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200년이 더 지난 14세기(1325)에 처음으로 기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기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한무제가 조선을 침략한 서한 이후 중국 문헌 기록을 근거로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은 고려 유학자들이 기자를 존숭하기 위해 소동을 벌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자는 묘(墓)도 한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 3세기 위(魏)나라 두예는 한반도에는 없는 기자 무덤이 양국의 몽현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중국 산동성 하택시 왕승보촌에는 기자 무덤이 있다.
또한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북사(北史)』(659)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후 285년이나 지나 편찬된 『구당서(舊唐書)』(945)에 비로소 등장하는 기자신(箕子神)을 근거로 고구려 시기에도 기자숭배사상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중화주의에 경도된 유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기자가 한국사에 끼워 넣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은말 주초 또는 주대 청동기는 요하 동쪽에는 강하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이나 심양 정가와자 유적에서 중국 계통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이 지역에 어떠한 형태로든 당시 중국 세력이 크게 접근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단군조선 사에 기자 또는 기자족과 관련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중원식 토기 등 중원계 주민문화 관련 자료가 대릉하유역에서 확인되지 않았고, 오히려 토착적인 위영자문화가 강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商) 유민 기자(箕子)의 정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된다.
기자집단의 유물이라고 여겨지는 객좌현 북동촌 출토의 기후방정(㠱侯方鼎)에 대해 신용하는 기자(箕子)는 성씨가 ʻ子ʼ이고 기후(㠱侯)의 성씨는 ʻ姜ʼ씨로 서로 다르므로 기후방정은 기자의 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윤내현은 기후방정을 자성 기후의 유물로 보지만, 기자는 단군조선 지역을 통치했던 왕이 아니라 중국의 변방에 있던 소국의 하나였던 기자국의 제후로 바라본다.
고고학 발굴결과도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선도사서 기록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혀 부당한 것이며, 한국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에 대한 인식이다. 한 나라 국가경영은 수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이루어진다. 따라서 국가경영 중심 무대인 수도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그 나라 역사 중심 무대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느냐, 요서・요동에 있었다고 보느냐에 따라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가 달라지기에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선도사서에서는 단군조선이 관경(管境: 다스리는 영토)을 삼한(번한・진한・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삼한의 도읍은 각각 소밀랑・안덕향・백아강인데 소밀랑은 송화강 하얼빈, 안덕향은 개평부 동북 70리의 탕지보,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으로 단군조선 중심 무대는 한반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요서・요동・한반도 전체임을 알 수 있다. 강역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삼한관경제는 『고려사』 「김위제열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한(漢)나라와 국경을 맞대던 번한 서쪽 지역에서 일어난 위만의 반란으로 기준왕이 쫒겨나고 위만정권이 세워졌다. 위만의 왕검성은 기준왕이 있던 번한 지역에 세워졌고, 한무제 유철의 침략으로 세워진 낙랑군 조선현이 왕검성 자리에 세워졌으니 낙랑군 조선현은 번한이 자리했던 고대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최숭이 세우고 최리로 이어진 ‘낙랑국’이었다. 낙랑왕 최리가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를 보고 ‘그대는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
배달국・단군조선에 인접해있던 중원지역으로 전파된 선도문화는 음양오행론에 기반한 도교문화 및 유교문화로 변이되었다. 유교문화에서는 배달국에서 비롯한 문화 전승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고 중국 문화 기원을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설정하였으며, ‘삼원오행론(기・화・수・토・천부론)’을 대신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음양오행론’을 제시하였다. 오행의 중심에 조화점인 일기(삼기:천부) 대신에 통제점(統制點)인 토(土)를 놓고 제왕의 도를 주창하였한 것이다.
황제(黃帝)는 치우천왕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중원지역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황제가 갖는 이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요(堯)는 土를 중심자리로 밀어 넣고 외곽에 목・화・금・수를 배치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중원식 오행론, 중원식 천자제후제를 고안했다. ʻ기・화・수・토・천부론ʼ에 기반한 배달국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土德)의 황제는 천왕의 제후에 불과하지만, ʻ목・화・토・금・수론ʼ에 기반한 중원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의 황제는 천왕의 지위가 되기 때문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3) 중화사관, 힘의 질서 중시하는 패권주의
K스피릿 입력 2022.05.09 10:10 업데이트 2022.05.23 10:37
기자명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선도사서인 《요정징심록연의》 「부도지」에 의하면, 선도문화(천손문화・밝문화)는 배달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사해에 전파되어 세계 각처에서 지역화되었다. 단군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물질(현상) 차원에 몰두하면서 수행에 기반한 선도의 위상은 약화되었고 단군조선의 위상 또한 흔들리게 되었다. 단군조선 말이 되면서 물질(현상) 차원에 몰두하는 중원 문화가 단군조선으로 역유입되어 선도사상을 더욱 약화시켜갔다.
배달국・단군조선에 인접해있던 중원지역으로 전파된 선도문화는 음양오행론에 기반한 도교문화 및 유교문화로 변이되었다. 유교문화에서는 배달국에서 비롯한 문화 전승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고 중국 문화 기원을 ‘삼황오제(三皇五帝)’로 설정하였으며, ‘삼원오행론(기・화・수・토・천부론)’을 대신한 새로운 세계관으로 ‘음양오행론’을 제시하였다. 오행의 중심에 조화점인 일기(삼기:천부) 대신에 통제점(統制點)인 토(土)를 놓고 제왕의 도를 주창하였한 것이다.
황제(黃帝)는 치우천왕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중원지역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황제가 갖는 이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요(堯)는 土를 중심자리로 밀어 넣고 외곽에 목・화・금・수를 배치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중원식 오행론, 중원식 천자제후제를 고안했다. ʻ기・화・수・토・천부론ʼ에 기반한 배달국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土德)의 황제는 천왕의 제후에 불과하지만, ʻ목・화・토・금・수론ʼ에 기반한 중원의 천자제후제에 의할 때 토덕의 황제는 천왕의 지위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롭고 평화롭게 공생하는 ‘홍익주의’ 대신 세계를 ‘지배・통제’의 대상으로 놓고 다스리는 패권주의인 ‘중화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 안의 밝음・생명(氣)・양심을 살리고 사회 또한 밝게 만드는 조화・평화・공생의 홍익주의 대신 폭력을 동원한 지배・통제 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세계를 분리된 개체들의 갈등・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는 물질세계의 속성은 ‘분리・대립’인데, 본질의 속성인 ‘조화로움’은 없애고 ‘분리・대립’하는 현상에만 매몰되어 다스리려고 한다면, ‘지배・통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여기에는 폭력이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원오행론의 ‘조화로움’을 음양오행론의 ‘지배・통제’로 바꾸어 버린 중원지역에서 자신들이 지배와 통제 대상이 되는 외부(外部)를 자처할 리는 만무(萬無)하였다. 주(周)대에 사이(四夷)라는 명칭이 나타났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이라는 명칭이 정해졌다. 중원지역에서, ‘통제점인 내부로서 외부를 제어한다(以內制外)’는 생각이 사상으로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중원지역에서 발생한 유교에서 중원지역은 중화(中華), 여타 지역은 오랑캐라는 정치이데올로기를 만들고, ‘화이론(華夷論)’적 역사인식인 ‘중화사관(中華史觀)’이 정립(定立)되었던 것은 사세 상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통하여 역사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대의명분에 의해 시비・선악 등을 분별하여 비판하고, 왕도사상과 정통의식을 바탕으로 한 대의를 표명하였다. 왕도사상은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중국의 유가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단, 현실에서 실현된다 하더라도 중화(中華)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주변국이 독립적인 주체성을 내세워 중화에 왕화(王化:임금의 덕행으로 감화하게 함)되지 않겠다면, 인과 덕은 언제라도 폭력적인 침략으로 돌변하였기 때문이다.
《춘추》에 나타난 비판정신은 인심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확립하여 왕도정치 이상을 실현하는 것, 즉 존주론(尊周論)과 존왕론(尊王論)으로 쓰러져 가는 주 왕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주왕실이 요순의 왕도 정통을 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나라로부터 전해지는 예악을 중화문화 정수로 인식했던 공자는 "이적에 왕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제하에 왕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하여 중화문화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화이론적 인식을 보여주었다. 지역과 종족이 문화와 함께 화와 이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유가(儒家) 사상이 국가 통치 철학으로 자리를 잡은 한(漢)나라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된 중화사상은, 12세기 금・송(金・宋)의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체험한 주희 시기에 오면서 지역적・종족적 층위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종족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양이사상(攘夷思想)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주희의 화이론은 중국을 내로, 이적을 외로 인식한 춘추 논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다만, 공자의 춘추학적 화이사상을 보편적인 이치(理致)로 확장한 차이가 있다. 즉, 중화와 이적은 결코 대등할 수 없고 상하질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 간의 규범이자 보편적인 이치로서 중화 질서는 항구 불변한 천리(天理)라고까지 보았던 것이다.
화이사상으로 불리기도 하는 중화주의는 중국 한(漢)족이 자국과 자민족 문화를 최고 지위와 절대적 기준에 올려놓는 문명관이자, 스스로를 주변 국가들과 구분하는 세계관이며 국제질서관이다. 또한 중화주의는 중국・중앙(의 문화)을 보편 문명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한족 중심 문화를 문명(文明;華)으로 인식하고 주변 비(非)한족문화를 야만(野蠻; 夷)으로 인식한다.
무엇보다도 중화주의적 역사 인식에서는 지리적・종족적 중화가 항상 중심에 놓였다. 따라서 주변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필요에 따라서는 지배 대상으로 여겨 폭력을 동원한 소유와 지배・통제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리 높여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주창하다가도 중화(中華)라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상대방 문화와 정신을 무참히 짓밟곤 했다. 남송처럼 힘이 없을 경우에는 정신적인 대의명분에 그쳤지만, 힘이 있을 경우에는 고수(高隋)전쟁・고당(高唐)전쟁처럼 전쟁도 불사하였다. 21세기에 들어 중국이 보여주는 패권주의적인 모습 역시 중화주의적 역사 인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지만 배타・지배・통제를 속성으로 하는 중화주의에 기반한 중화사관과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에 기반한 홍익사관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확연히 달랐다.
유교 중화사관은 가치판단 기준이 유교경전이다. 유학자들은 신이(神異)한 내용을 담은 신화나 전설은 근거가 없고 허황되며 상도(常道)에 어긋난다(荒誕不經)고 보았기 때문에 배척했다. 따라서 ‘천손의식에 바탕한 고대의 역사경험’을 기록하고 전달한 선도사서 계통 고기류(古記類)를 불신하여 그 내용을 대부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유학자들이 유교 중화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서술할 경우 선도사서의 상고・고대사 기록을 왜곡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닌 반드시 도달하는 방향이었다. 다음에서는 유교 중화사관에 의한 상고・고대사 왜곡과 그 왜곡의 심화과정을 살펴보겠다.(3)
<자료출처>
(3) 중화사관, 힘의 질서 중시하는 패권주의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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