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 수정 2019-10-19 20:29등록 2008-06-03 18:49

사학부터 문학까지 ‘단재의 눈’ 복원 (hani.co.kr)

‘단재 신채호 전집’ 완간

  •  

1970년대 전집류 이후 30년만에
북한소재 자료·중국 잡지글 수록
역사·논설 등 원자료에 해제 붙여

 

한국 근대를 선도한 걸출한 역사학자요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 문학자인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전집이 30여년 만에 새롭게 발간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단재 70주기인 2006년부터 2년간의 작업 끝에 별책인 총목차까지 포함해 모두 10권(사륙배판형)으로 구성된 <단재 신채호 전집>의 발간을 완료했다고 3일 밝혔다. 지난해 8월 제4권까지 먼저 낸 뒤 순차적으로 완간한 <단재 신채호 전집>은 광복 직후와 1970년대에 발행된 기존 단재 유고집과 전집류에서 양적·질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감으로써 단재 연구를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전집을 위해 꾸린 13인 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이제까지의 단재 연구와 관련 편찬작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행적 입증에는 (여전히) 불비하고 미진한 면이 적지 않다”며 “그중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아무래도 그가 국내외에서 저작한 유문의 수집 정리와 행적 추구가 완벽하지 못한 점”이라고 편찬사에서 지적했다.

이는 이번 전집 발간작업이 어디에 역점을 뒀는지를 시사하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이번 작업을 구상하고 기획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새 전집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먼저 3~4권 분량이었던 1970년대의 전집보다 양적으로 풍부해졌다. 국내뿐만 아니라 러시아·중국·일본 등 해외까지 뒤져 9권(본문내용만)에 담았다. 그리고 당시의 전집은 단재 글을 번역·정리한 것이었으나 이번 전집은 단재 글이 실린 당시 자료들을 그대로 영인해 실었다. 말하자면 원자료, 1차 자료 위주로 수록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 예전의 일부 단행본과 최근의 활자로 다시 손을 본 새 버전을 함께 담았다. 또 한 가지는, 예전의 단재 전집이나 유고집에 수록된 것들 중 출처가 의심스러운 글들을 사계 전문가들이 치밀하게 검증해서 진위를 가리고 단재의 것으로 확인되지 않은 글들은 미확인으로 구분·표기해서 실었다.”

이번 전집은 <용과 용의 대격전>과 같은 북한 소재 자료들, 단재가 중국에서 발간한 <천고> 등의 잡지 글, 그리고 독립운동 관련자료 및 당대 지인들과 연구자들의 논찬물도 실었다. 성균관대 존경각 소장의 필사본 <대동제국사서언>도 처음으로 수집해 넣었다. 육필원고와 필사본을 포함한 새로운 자료들을 많이 발굴해 추가했고, 내용을 재검증했으며, ‘조선혁명선언’을 독립운동 자료에 포함시키는 등 일부 자료의 재분류 작업도 시도했다.

이렇게 해서 제1~3권이 역사(1권=조선상고사, 2권=조선사연구초, 3권=독사신론·대동제국사서언·조선상고문화사), 제4권은 전기(을지문덕·수군제1위인 이순신·동국거걸 최도통·이태리 건국 3걸전), 제5권이 신문·잡지, 제6권이 논설·사론, 제7권이 문학, 제8권이 독립운동, 제9권은 단재론·연보로 묶였다. 각 권마다 이만열, 박걸순, 신용하, 최홍규, 최광식, 김삼웅, 김주현, 윤병석, 최기영 교수 등 전문가들이 해제를 붙였다.

한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비상근)이자 이번 전집의 편찬위원인 한시준 단국대 인문대학장은 “해방 직후 자료들에도 연대를 ‘대한민국 30년’ 등으로 표기한 사실을 이번 편찬작업 과정에서도 확인했다”며 올해를 ‘건국 60년’으로 기념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계승한다고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고, 광복 당시에도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이미 썼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의 60년만을 대한민국 역사로 인정한 ‘건국 60년’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여순감옥 수감 사진(오른쪽) 독립기념관 제공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입력 2023. 12. 10. 09:08

챗GPT 부럽지 않은 인간 컴퓨터의 사학 보물 (daum.net)

역사평론가 김종성이 쉽게 풀어낸 단재의 《조선상고사》

(시사저널=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한국 역사 드라마에는 정치적 파고에 따라 큰 변화가 있었다. KBS 대하사극을 집중해 보면 1980·90년대는 《대명》 《개국》 《여명의 그날》 《용의 눈물》처럼 왕조의 탄생에 머물렀다. 영웅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웅조차 중국에 대한 사대나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힘에 기댄 이승만 정부를 중심으로 그렸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천추태후》 《정도전》처럼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왕에게 집중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갈등에 관심을 더 보인다.

《조선상고사》|신채호 지음|김종성 옮김|시공사 펴냄|524쪽|2만2000원

 

그리고 최근에는 KBS2 《고려거란전쟁》처럼 주체적인 시각에서 정치나 외교 등을 보기 시작하는 의미 있는 드라마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침이 돼줄 수 있는 책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다. 역사 콘텐츠 전문가인 김종성 작가는 최근 읽기 쉽게 풀어쓴 《조선상고사》를 출간했다. 글과 방송을 통해 역사를 쉽게 풀어낸 그에게도 이 책은 난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단재의 뛰어난 통찰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000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는 신채호였다. 지난 1000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역사학이란 장르가 명확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대를 정리하는 풍토는 계속됐다. 다만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역사는 편취되고, 발췌되고, 폄훼됐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대를 바탕으로 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의 입장에서 고려사를 쓴 것, 일제의 시각에서 조선의 역사를 훼손한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단재는 이 시대를 넘어, 조선의 역사가 시작하던 시점까지는 가장 명확하게 관통한 역사의 인공지능(AI)라 할 만큼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단재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구한말 권신 신기선의 서가를 시작으로 수많은 역사 자료를 접했다. 이후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조선의 서고를 만났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사고전서뿐만 아니라 베이징대 도서관 등에서 수많은 역사책을 읽고,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후 그는 젊은 시절 '황성신문' 기자 활동을 시작으로 수많은 매체에 역사관을 표출했다. 물론 그가 만들어내는 지식은 단순히 검색엔진이나 챗GPT에서 나온 것처럼 건조한 것이 아니라, 냉철한 눈으로 사가(史家)들의 관점을 파악해 바로잡는 것이었다. 단재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조선상고사》가 가진 가치는 특별하다. 이 책은 단재가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된 이후 뤼순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검열이라는 난제에도 그는 우리 민족이라는 주관적 관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되살린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라 《사기》와 《춘추》 등 공인된 중국 역사서를 모두 관통해 읽어낸다는 점에 그 위대함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단재가 쏟아낸 기록물을 증명하는 이 시대 학자조차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한수 기자입력 2020. 2. 24. 03:04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11]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안재홍, 홍명희

 

"단재(신채호)는 영원한 나그네로 마쳤는가. 비(悲·슬픔)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학계의 지보(至寶·지극한 보배)로서 불행 옥사하되 일찍 위하여 구명(救命)의 계(計)를 못하였으니…."(안재홍)

"단재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 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한다, 죽지 못한다. 나란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홍명희)

안재홍(1891~1965)과 홍명희(1888~1968)는 1936년 2월 25일 신채호의 유해가 청주 낭성면 교래리에 묻힌 직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고인을 애도했다. 안재홍의 추도문 '오호(嗚呼) 단재를 곡함'(2월 27일)과 홍명희의 '곡(哭) 단재'(2월 28일)가 잇달아 실렸다.

안재홍과 홍명희는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내 독립운동 및 지식계를 잇는 주요 인물이었다. 홍명희는 신채호를 설득해 1927년 좌우합작 민족 단체 신간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했다. 안재홍은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의 조선일보 연재를 주도했다.

안재홍과 홍명희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일보 사람들'의 중심인물이었다. 안재홍은 1924년 조선일보 주필로 초빙된 후 발행인·부사장·사장을 거치며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홍명희는 옥고 등으로 집필을 몇 차례 중단하면서도 1940년 8월 일제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시킬 때까지 13년간 연재했다. 아들 홍기문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다.

 

 

[이만열의 내 인생의 책](5) 조선상고사 - 한국 사학의 주류를 넘다 (daum.net)

이만열 | 전 국사편찬위원장입력 2015. 8. 6. 22:09
 

▲ 조선상고사 | 신채호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라고 쓴 것이 바로 <조선상고사>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다. 이 구절은 흔히 “역사란 ‘아(我·나)와 비아(非我·나 아닌 것)’의 투쟁의 역사다”라고 정리되고 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말 일제강점기의 사학자요, 독립운동가다. 그는 <을지문덕전>을 비롯한 몇몇 영웅들의 전기를 썼고, 또 <조선연구초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남겼으나 <조선상고사>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첫머리에 그의 역사 이론과 한국사학사를 정리한 ‘총론’, 단군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 말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가 신채호에 주목한 것은 1970년대 초 어느 신문에 역사학 부문의 ‘한국의 학보(學譜)’를 쓰면서부터다. 신채호는 역사학자로서 아주 특출한 존재였다. 한국 역사학의 주류를 이룬 유교적 사학 전통에다 재야사학(在野史學)의 정신적 맥락을 접목하여 그 두 흐름을 종합했으며, 그 위에 근대민족주의사학을 이룩한 학자였다. <조선상고사>와 신채호는 그 뒤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나는 처음에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신채호를 연구하면서 근현대사로 학문적인 이적을 했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저술은 고대사이지만, 그의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채호 자신을 먼저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신채호의 삶과 학문의 배경이 되었던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조선상고사>를 주저로 하고 있는 신채호는 나의 학문연구 분야를 넓혀 주었다.

또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언급한 한국사학사는 내게 한국사학사 연구를 촉구했다.

<이만열 |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홍신의 내 인생의 책](3) 조선상고사 - 잃어버린 역사 되찾는 가르침 (daum.net)

김홍신 | 소설가입력 2014. 12. 9. 22:27수정 2014. 12. 9. 22:27
 

▲ 조선상고사 | 신채호

'민족의 심장을 쳐서 움직인 책' <조선상고사>는 우리 근대사의 걸출한 선비인 단재 신채호가 한국근대사학의 주춧돌이 되도록 해준 명저라고 할 수 있다.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 민족사관의 곧은 시선으로 기술한 <조선상고사>는 기존의 굴종사관에서 벗어나 고조선,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으로 사대주의적 관점을 바로잡은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전문가들 역시 이 책을 종래의 사대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민족사관을 수립한 명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상고시대 우리 역사가 중국 동북지역과 랴오시 지역까지 미쳤고 단군시대에는 산둥반도까지 경략했다는 역사적 진실을 발굴한 점을 크게 평가했다.

 

나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찾기 위해 대하역사소설 <대발해>를 쓰면서 <조선상고사>를 다시 읽었다. 대학 시절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낡은 가방에서 스승이 꺼내 들고 대갈일성하던 책이 바로 <조선상고사>였다. 사학자요, 언론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는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명제를 던졌고 '독립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한 대선비였다. 삼국통일이 아니라 남북국시대(남에 신라, 북에 발해)였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겼던 내가 문학도 시절 한때 야학에서 역사를 가르친 것도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우리의 진실하고 장엄하고 장구한 역사를 뜨겁게 알려준 선현의 핏자국 선명한 발걸음 같은 기록을 어찌 우리가 끌어안고 사랑하지 않는지 마음이 아프다. 단재가 옥사하지 않고 좀 더 정정하게 집필할 수 있었다면 고구려, 백제, 발해의 웅혼한 숨결이 살아나고 고려와 조선의 진실도 빛을 발했을 것이다.

<김홍신 | 소설가>

 

 

입력 2010. 10. 10. 14:39수정 2010. 10. 10. 21:27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ㆍ1880-1936)는 구한말의 사학자로, 금년은 그의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다. 일찍이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이름 높은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날선 필치로 조선 민중을 일깨운 《조선상고사》 서문은 특히 이름난 명논설이어서 다시 읽는 뜻이 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을 아라 하고 영·미ㆍ법ㆍ로.....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ㆍ미ㆍ법ㆍ로....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 무산(無産)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한다. …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런 강인한 역사관은 민중의 직접 혁명으로 반일 독립은 물론, 무산자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던 말년의 사상일 터이다. 그가 <조선 혁명선언>을 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안재홍;<조선상고사 서문)는 열성에서였을 터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국의 땅 뤼순 감옥에서 8년을 고문당하다 결국 한줌 재로 고국에 돌아왔다.

일찍이 고향의 동지 홍명희(洪命喜)는 그의 순국 소식에,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哭丹齋>)라고 하고,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 바친 광복의 화신"(<조선사연구(초) 서문)이라 평했고, 고향 후배 시인 도종환은 첫 시집 제목 시이기도 한 <고두미 마을에서 -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 오며>에서 그 민족정신을 이렇게 이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 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메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이 지워진다.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 줄 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동국대 명예교수

 

 

강신욱 기자입력 2024. 1. 3. 07:00

[음성=뉴시스]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사진=문화재청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청주=뉴시스] 강신욱 기자 = 올해 갑진년(甲辰年)은 용(청룡)의 해다.

용띠로 태어난 충북의 역사적 인물은 누가 있을까.

용의 해에 출생한 충북의 인물 6명 삶의 궤적을 따라갔다.

양촌 권근, 중봉 조헌, 백곡 김득신, 우운 권병덕, 단재 신채호, 예관 신규식이다.

이 가운데 올해와 마찬가지로 갑진년 청룡의 해에 태어난 인물은 조헌과 김득신이다.

 

권근은 흑룡(임진년), 권병덕은 황룡(무진년), 신채호와 신규식은 백룡(경진년)이다.

 

◇조선 국가 기틀 다진 권근(임진년·흑룡)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마을에는 500년 조선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의 묘가 있다.

그의 아들 권제(權蹄·1387~1445)와 손자 권람(權擥·1416~1465)의 묘도 있다.

이곳 권근삼대묘소·신도비는 1980년 충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고려 말 익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총(鄭摠)과 함께 정릉묘비문(定陵墓碑文)을 지었고, 개국원종공신으로 화산군에 봉해졌다.

벼슬은 대제학(정2품)에 이르렀다.

 

◇호서 최초 의병장 조헌(갑진년·청룡)

【옥천=뉴시스】충북 옥천 의병장 조헌 선생 묘소.(사진=옥천군 제공) photo@newsis.com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은 임진왜란 당시 호서(湖西)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해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충남 금산에서 왜군과 맞섰다가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음에도 호남 방어의 근거지를 회복했다.

이조참판 겸 의금부 춘추관사에 추증됐다. 이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조판서에 이어 영의정에 거듭 추증됐다.

사액 사당인 옥천 표충사에 위패가 모셔졌다.

조헌은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영면했다. 묘는 도 기념물, 신도비는 도 유형문화재다.

 

◇대기만성 표상 다독시인 김득신(갑진년·청룡)

[증평=뉴시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사진=증평군 제공) photo@newsis.com


대기만성 다독시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은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아버지 김치(金緻), 아들 김천주(金天柱)와 함께 영면했다. 김득신 묘소는 2014년 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했다.

하지만 김득신은 사기 열전 백이전을 11만3000번이나 읽는 등 다독가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그는 59세 때 문과 증광시 병과에 급제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오늘날 대기만성의 표상으로 알려진 이유다.
김득신은 시 '용호(龍湖)'가 효종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을 만큼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다.

 

묘소가 있는 증평군은 독서왕김득신문학관을 건립하는 등 김득신을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리고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권병덕(무진년·황룡)

청주 출신 우운(又雲) 권병덕(權秉悳·1868~1943)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거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지냈다.

일제에 항거한 의열투쟁사를 담은 역사서 '조선총사'를 비롯해 '이조전란사', '궁중비사'가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경진년·백룡)

【청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9일 충북 청주고인쇄박물관 근현대인쇄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을 조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가 열린 가운데 행사를 마련한 박정규 예관편찬위원장이 신규식·신채호·신백규 선생이 함께한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2019.04.09. ksw64@newsis.com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신채호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탈퇴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 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실의에 빠진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활동에 심취했다.

이후 한국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국사 연구에도 몰두해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했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했다.

신채호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중국 다롄시 뤼순감옥에 수감됐다가 뇌일혈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임시정부 실질 설계자 신규식(경진년·백룡)

청주 출신 예관(聣觀) 신규식(申圭植·1880~1922)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임정 내에서 핵심 역할을 한 항일 독립운동가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1912년 동제사를 조직해 공화주의 독립혁명에 투신했다.

1919년 임정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맡아 1921년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화민국정부로부터 임정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22년 임정의 독립운동 분열을 안타까워하며 단식하다 순국했다. 상하이 훙차오로(虹橋路) 만국공묘에 안장됐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입력 2023. 4. 29. 10:00수정 2023. 4. 29. 10:10

“진짜 명당은 3수로 이뤄진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장군분.
 
고구려는 수도가 세 군데 있었다. 중국 당나라때 편찬된 ‘북사(北史)’는 고구려가 수도인 평양성 외에 국내성과 한성에도 별도로 도읍을 두었으며, 이를 삼경(三京)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했다. 또 고구려 왕은 한 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세 곳을 돌면서 나라를 다스렸다고도 했다.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고려 역시 삼경제(三京制)를 따랐다. 고려 숙종(재위 1095~1105년) 때의 인물인 김위제는 ‘도선기’라는 예언서를 근거로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려 땅에는 세 곳의 서울이 있습니다. 11, 12, 1, 2월에는 중경(中京·개성)에서 지내고 3, 4, 5, 6월은 남경(南京·한양)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西京·평양)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입니다.”

고려 왕이 4개월마다 돌아가면서 세 곳 수도에 머물러야 나라가 융성해진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고려 숙종은 김위제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양에 남경 궁궐을 건설한 다음 때때로 머물기도 했다.

이러한 삼경제는 중국 역대 나라의 도읍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중국의 경우 주(周)나라 이후 수도를 두 곳에 두는 양경제(兩京制)를 주로 운영해왔다. 그래서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경제는 단군조선(고조선)의 삼한관경제(마한,진한,변한) 통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선조들은 왜 삼경제를 채택했을까. 이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동아시아 최고의 천문 관측 수준을 자랑했던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고분벽화에 정밀하게 새겨 두었다. 이중 고구려 무용총(춤무덤), 각저총(씨름무덤)의 별자리 그림에는 북쪽 하늘의 북두칠성 옆에 ‘북극삼성(北極三星)’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별이 강조돼 있다.

북극삼성은 3개의 북극성을 가리킨다. 이는 지구 세차운동에 의해 북극성의 위치가 달라짐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다. 현재는 작은곰자리의 폴라리스가 북극성이지만, 2000년 전인 기원 전후 시기에는 작은곰자리의 코카브가, 기원전 3000년 경에는 용자리의 알파별(투반)이 북극성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천손족(天孫族)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따라서 하늘의 뜻이 표현된 별자리를 매우 중요시했고,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는 3개의 북극성을 고분에 새겨 놓았던 것이다.

북극3성은 가운데 별이 북극대성으로 매우 밝은 2등성 별이다. 하늘의 최고 주재자인 태일신(太一神)이 상주한다고 하여 천제성(天帝星)으로 받들어진다. 북극대성 왼쪽의 별은 천제의 적자인 태자(太子)로 불리고, 그 오른쪽 별은 서자(庶子)라고 불린다. 고구려 사람들은 세 별을 ‘의도적으로’ 선으로 연결시켜 놓음으로써 서로 깊은 관계가 있음을 표시했다.

이러한 북극삼성은 지상에서 3개의 도읍으로 구현된다. 가운데 중심 별은 주도(主都)로 표현되고, 나머지 2개 별은 부도(副都)로 삼았다. 즉 고구려인들이 3곳의 수도를 운영한 것은 ‘하늘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자미원 기운 담긴 경복궁의 자미당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하늘의 자미원을 표방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북극3성 대신 하늘의 3원을 염두에 두었다. 3원은 북쪽 하늘에서 1년 내내 보이는 주극성(週極星)들을 자미원(紫微垣), 천시원(天市垣), 태미원(太微垣)의 3원(垣·담장)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조선은 3원 중에서도 가장 으뜸 별자리인 자미원 기운을 한양 도성에 끌어들였다. 그 증거가 자미당(紫薇堂)이라는 건물이다. 경복궁 내 교태전과 자경전 사이에 있던 자미당은 세종대왕 당시 침소로 이용됐고, 고종 때는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자미당은 일제때 훼손된 이후 지금 한창 복원작업이 진행중이다.

이처럼 경복궁 일대가 자미원 권역이 됨으로써 서울 광진구 일대는 자연스럽게 천시원 영역, 은평구 일대는 태미원 영역으로 설정됐다. 조선 세조 때 지관인 문맹검의 천문풍수론에 이같은 내용이 자세히 언급돼 있다(조선왕조실록 참조).

그런데 천시원과 태미원에도 제좌(帝座·임금 자리) 등 통치자를 상징하는 제왕의 별이 하나씩 배치돼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는 천시원의 낙천정(광진구 자양2동)과 태미원의 영서역(은평구 역촌동 일대)에 각각 별궁인 이궁(離宮)을 세우는 구상을 했다. 실제로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천시원 터에 별궁을 짓고 지내기도 했었다. 3경제 체제의 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와 고려의 삼경제나 조선의 3원체제 등은 사실상 풍수 원리이기도 하다. 원래 풍수는 하늘의 별 기운과 지상의 땅 기운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아 ‘감여(堪輿)’라고 불렸다. 즉 하늘의 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光)과 기(氣)가 지상에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명당의 기운인 정기(精氣)가 생긴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만 땅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게 풍수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실제로 하늘의 3수 이치에 의해 지상에서 명당 터로 상징되는 진혈(眞穴) 역시 3개 혹은 3의 배수로 형성된다. 고려 이전 시기에 지어진 고찰이나 유적들을 보면 대체로 이런 3수 명당 혈의 구성 원리를 따라 배치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반도는 서울과 평양이라는 2개의 수도가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394년 한양이 수도 기능을 한 이후 620여 년에 만에 통치권자의 집무실이 한양도성을 빠져나오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의 집무 공간 이전을 두고 아직도 설왕설래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수도의 변천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 통일 한국이라는 거시적 시각으로 보자면 다시 삼경제의 부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세종시와 계룡시를 포함한 범대전권이 주도(主都) 역할을 하면서, 서울과 평양 혹은 다른 도시들이 부도 역할을 하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서울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 현재 땅의 수용 능력을 넘어선 서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장기적으로 서울이 더 오래도록 발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김종성입력 2023. 12. 28. 14:12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고려거란전쟁>

[김종성 기자]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원정왕후(이시아 분)는 현종(김동준 분)의 동반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궐 밖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현종이 군왕의 위신을 갖추도록 도와준다. 현종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치는 듯하면 정중하게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현재까지의 이 드라마 방영분에서는 원정왕후가 현종의 배우자로 부각돼 있다. 등장인물 소개란에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딸인 원성(하승리 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원성황후도 조만간 어느 정도 조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족 요나라와의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이 드라마에서는 현종의 배우자들이 충분히 조명되기 힘들다. 만약. 거기에 초점을 맞춘 사극이 나오다면, 그런 드라마는 고려판 '여인천하'가 될 수도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살았던 조선 성종시대,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살았던 숙종시대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 고려 현종시대다.

조선시대에는 중전이 왕후로도 불리고 왕비로도 불렸다. 임금의 정실부인이 후(后)로도 지칭되고 비(妃)로도 지칭됐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중전이 '후'로 불렸다. '비'는 그보다 낮은 단계였다.

<고려사> 후비열전은 "정실은 왕후로 부르고 첩은 부인으로 부른다"라며 "귀비·숙비·덕비·현비는 부인으로 삼으며 품계는 모두 정1품이다"라고 기술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배우자를 부인으로 부르지만, 고려시대에는 부인이 임금의 첩이었다. '비'는 후궁인 '부인'에 해당했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이 우리나라에 간섭할 때 우리의 악부(樂府)나 역사책에서 황도(皇都)니 제경(帝京)이니 해동천자니 하는 표현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나타난다"며 안타까워했다. 개경을 황제의 도읍이나 황제의 경성 등으로 부르던 황제국 고려(918~1392)의 위상이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 실추됐던 것이다.

그 뒤 조선왕조는 중전을 후궁 급인 '비'로 불렀다. 그러면서도 '후'를 병용했다. 일례로, 세종은 배우자인 심씨가 죽자 소헌왕후라는 시호를 부여했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비'를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주적 면모를 과시하고자 '후'를 썼던 것이다. 이런 조선과 달리, 몽골 간섭 이전의 고려는 정실 배우자를 '후'로, 후궁을 '비'로 구분함으로써 황제국의 면모를 유지했다.

 

출신이 다채로운 13명의 배우자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고려사> 후비열전에는 현종의 배우자가 총 13명 등장한다. 이 중에서 '후'는 원정왕후를 비롯한 7명이다. 나머지 6명 중 셋은 '비'로 불리고 셋은 그냥 '궁인'으로 불렸다.

일곱 명의 '후' 중에는 사후에 왕후로 추존된 이들이 있다. 김은부의 딸이자 원성왕후의 자매인 원혜왕후(원혜태후)는 죽은 뒤에 '후'로 격상됐다. 원목왕후 서씨도 사망 당시에는 흥성궁비였다. 김은부의 또 다른 딸인 원평왕후도 사후에 추존됐을 가능성이 있다.

현종시대도 여인천하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은 '후'가 많아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출신성분'이 다채롭기 때문에 그런 소재가 되고도 남는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원정왕후는 현종의 제1왕후다. 그는 현종의 4촌인 성종의 딸이다. 원정왕후와 현종은 5촌간이다. 왕건의 증손녀인 이 여성은 왕씨 성을 쓰지 않고 어머니 성인 김씨를 썼다.

제2왕후인 원화왕후 최씨도 성종의 딸이다. 원정왕후와 원화왕후는 이복자매다. 원화왕후도 아버지 성이 아닌 후궁 어머니의 성을 썼다. 제5왕후인 원용왕후 유씨는 성종의 조카다. 그 역시 현종의 5촌이다.

원정왕후·원화왕후·원용왕후의 존재는 현종이 신라와 고려 초기의 왕실 근친혼 풍습에 따라 혼인했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제6왕후인 원목왕후 서씨 등은 또 다른 결혼 메커니즘을 반영한다. 원목왕후 등의 결혼은 왕실과 유력 가문의 정략혼 성격을 많이 띤다.

원목왕후가 서씨 성을 쓴 것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서씨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강동 6주 획득으로 유명한 서희다. 외교관 서희가 활약한 제1차 여요전쟁은 현종이 등극하기 16년 전인 993년의 일이다. 서씨 집안이 큰 공을 세운 뒤에 원목왕후가 현종과 혼인했던 것이다. 이는 제1차 거란족 침공이 고려 사회에 큰 충격이 됐고 이 침공을 막은 서씨 가문이 영향력을 갖게 됐음을 반영한다.

현종의 부인들이 다함께 한자리에 모여 저마다 친정집 이야기를 할 경우, 이런 자리에서 가장 많이 나올 만한 이야기는 제2차 여요전쟁과 얽힌 사연이다. 현종이 겪은 제2차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증언해줄 배우자가 셋이나 있었다. 원성왕후·원혜왕후·원평왕후가 그들이다. 이 셋은 모두 자매다.

김은부의 딸이 셋이나 왕후가 된 것은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한 제2차 전쟁의 결과다. <고려사> 원성태후열전은 1010년에 발발한 이 전쟁으로 인해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사연을 들려준다.

"애초에 현종이 남쪽으로 거둥한 뒤 적이 물러나자 돌아오다가 공주에 이르렀다. 은부가 그때 절도사였다. 왕후에게 어의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이 때문에 그를 맞아들여 연경원주(延慶院主)로 칭하게 됐다."

개경으로 귀환하던 현종이 공주절도사 김은부를 만나게 되고 김은부가 딸에게 어의를 만들도록 한 것이 인연이 됐다는 설명이다. 처음에는 후궁인 연경원주에 책봉됐다고 했다. 왕후가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위 인용문에서 '남쪽으로 거둥'에 해당하는 원문은 남행(南幸)이다. 다행스러움이나 기쁨을 뜻할 때 쓰이는 행(幸)이 군주의 피난을 가리킬 때도 사용됐다. '행'은 임금의 피난을 듣기 좋게 표현해주는 용어였지만, 원성왕후 입장에서는 그것이 또 다른 의미의 '행'이 됐을 수도 있다. 임금의 피난을 계기로 후궁이 되고 왕후가 됐으니 그에게는 그것이 '행운'으로 인식됐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의 '행'은 원성왕후의 두 동생에게도 적용된다. 원혜왕후와 원평왕후도 언니를 뒤이어 궁에 들어갔다. 축구하다가 옷이 찢어진 김춘추의 의복을 수선해준 김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해 문명왕후가 된 데 이어 언니인 김보희가 후궁이 된 일을 연상케 하는 사례다.

원정왕후·원화왕후·원용왕후는 전통적인 왕실 근친혼의 결과로 배우자가 됐다. 원목왕후는 제1차 여요전쟁 때 공을 세운 서희의 손녀다. 원성왕후·원혜왕후·원평왕후는 제2차 여요전쟁 때 현종에게 친절을 베푼 가문의 일원들이다.

두 전쟁을 계기로 결혼한 여성들은 일종의 정략결혼 당사자들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현종의 배우자 구성은 왕실 근친혼과 정략결혼을 고루 반영하는 한편, 두 차례의 고려거란전쟁도 함께 반영한다.

제3차 여요전쟁의 일등공신인 강감찬 가문의 여성까지 들어갔다면, 더욱 이채로워졌을 것이다. 근친혼과 정략혼의 당사자도 있고 두 차례 여요전쟁의 관련자들도 있었으므로, 이 시대의 왕실 여성들을 소재로 문학작품을 쓴다면 고려시대판 여인천하가 나올 여지가 충분하다.

'왕족이 당연히 군주의 배우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과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여성들이 현종의 배우자로 살았다. '우리 할아버지 서희가 아니었다면 고려는 망했을 것'이라고 자부했을 수도 있는 여성과 '우리 아버지와 큰언니가 아니었다면 임금의 귀환길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자부했을 수도 있는 여성들이 현종의 배우자로 살았다. 조선 성종이나 숙종 때 못지않은 다채로운 장면들이 많이 나올 법한 여인천하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이연실입력 2023. 9. 14. 08:50수정 2023. 9. 14. 10:36

14일(목) 방송된 SBS 파워FM '김영철의 파워FM'에서는 스타 문학강사 김젬마가 '무식탈출-문학' 코너에서 단재 신채호의 수필을 소개했다.

iMBC 연예뉴스 사진

이날 김젬마는 "오늘은 괴물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괴물 하면 인간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실 것 같다. 오늘은 그런 괴물과는 다른 괴물이 등장한다"라며 "일제강점기 강력한 항일운동의 아이콘, 스스로 괴물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사나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을 만나보겠다"라고 말하고 단재 신채호의 수필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의 일부분을 낭독했다.

DJ 김영철이 "남들과 똑같이 하는 획일화에 반대하고 남을 따라 하는 사회를 비꼬는 것 같다. 남들처럼 하지 않는 게 괴물인 것 같다"라고 감상을 전하자 김젬마가 "맞다. 괴물이 되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군중의식에 대한 비판, 주체성의 부재에 대한 비판이 잘 담겨있는 글이다"라고 응수했다.

 

김젬마는 "말씀이 참 거침이 없으시다"라며 "이 글을 지으셨을 때가 3·1운동 이후다. 이 시기는3·1운동의 열기가 식어갈 때였다. 아무래도 저항의 구체적인 결과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패배감과 무력감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반동으로 나타난 게 문학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었다. 특히 이광수를 대표로 한 연애소설이 당시 히트를 쳤는데 신채호 선생은 그 현실에 대해 격하게 비판한다. 위 수필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노예의 사고다. 조선의 현실과 무관한 소설과 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이런 주장을 또 하신 거라고 볼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그 시기에 연애를 보편화하고 유행하게 한 것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일환이기도 했으니 충분히 타당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김젬마의 말에 김영철이 "신채호 작가님과 이광수 작가님이 사이가 안 좋았거나 잘 맞지 않았냐?"라고 묻자 김젬마는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답했다.

김젬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가장 혁명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시다. 그 시기의 문인 중에 가장 극단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한 쪽은 이광수, 한 쪽은 신채호라고 볼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1880년 충남의 대덕 즉 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릴 때는 유학을 배웠고 이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등 고대사를 다룬 역사책을 써서 역사문화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다. 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기록'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내용은 수능 국어에서 평가원 문제로도 출제되어 학생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이어 김제마는 "여기서 '아'란 나와 조선 자신을 뜻하고 '비아'란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뜻하는데 즉 역사는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투쟁이라고 본 것이다"라며 "또한 그는 한국의 고대사를 신화가 아니라 체계적인 사실로 연구했는데 단군왕검과 부여,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중심으로 보고 중국과 유교 중심의 사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시다가 1936년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어 여순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시다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신다"라고 설명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학술서.
접기/펼치기정의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학술서.
접기/펼치기개설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접기/펼치기서지적 사항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접기/펼치기내용

제1편 총론에는 신채호의 역사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Hegel)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취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는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 역사학을 한다는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기자·삼한·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3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대단군조선과 불·신·말의 3조선설에는 문제가 많지만, 그가 이러한 체계를 위해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 무대를 중국 동북쪽 지역과 랴오시(遼西) 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 지역을 경영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 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 때문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일부에 국한되었다.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했던 식민주의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들에 반대하고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삼국 이전이요, 활동 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랴오시·발해만 유역·직예성·산둥·산시·화이허(淮河)·양쯔강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한사군의 반도내존재설에 반대하고, 한사군이 실재하지 않았거나 요하(遼河)지역에 존치(存置)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사관에서 고구려는 우리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 국가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고구려 900년설을 내세우면서 앞부분 200여 년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무제와 대결한 세력이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였다. 즉,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대외투쟁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경우 당(唐)세력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통설로서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김유신(金庾信)의 음모’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접기/펼치기의의와 평가

이 책은 종래의 우리나라 고대사 인식과 다른 특이한 면을 제시했지만 문제점도 포함하고 있다. 교설적(敎說的)인 성격이 많이 나타나면서 민족주의 의식이 지나치게 투영되어 역사 서술과 그 가치 평가의 공정성을 감소시킨 것도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가 애써 강조한 실증성이 결여된 곳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서부국 서평가입력 2023. 2. 10. 03:03

평화 탈 쓴 국제사회…자강·자립 못하면 ‘구한말 데자뷔’

# 한국통사

- 뼈아픈 근대사 세밀한 기록
- 안중근·장인환 의사 열전도

# 조선상고사

- 중화사상·사대주의 경계
- 삼국역사 등 바로잡기 애써

 

지금도 우리나라 주변국인 일본·중국·러시아·북한은 분쟁을 일으킨다. 그럴 때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열이 떠오른다. 가까운 역사에선 백암(白岩) 박은식(朴殷植),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다. 한국인으로서 정신을 가다듬어야겠다면, 두 분이 쓴 한국통사(1915년)와 조선상고사(1948년)를 읽는 게 좋겠다. 우리 처지를 재확인하고, 마음을 다잡게 되니까.

백암은 ‘한국통사’ 3편 56장에서 안중근 의사가 191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권총 3발을 모두 맞혀 사살한 장면을 자세히 그렸다. 안 의사는 이날 6발을 쏘았다. 4탄은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5탄은 총영사 비서관 모리, 6탄은 철도총재 다나카를 맞추었다. 백암은 안 의사가 거사 후 라틴어로 “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썼다. 1978년 박영선 화백 역사 기록화.


▮ ‘태백광노(太白狂奴)’의 비장함

한국통사(3편 114장)는 망명한 백암이 중국 상하이에서 지은 우리 근대사이다. 1864년 흥선대원군 섭정(攝政, 12세인 조선 26대 왕 고종을 대신해 나랏일을 봤다)이 글머리다. 105인 사건(일제가 윤치호 선생을 포함한 한국인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을 마지막 글로 다뤘다. 그 사건이 1911년 일어났으니 우리 근대 역사 47년을 훑었다.

3편 58장 ‘일본의 한국 병합’은 통사(痛史) 중 통사다. 합병 늑약 1~8조를 실었고, 홍범식 이범진 이만도 황현 같은 자결 열사들을 기렸다. 이어 총독부 관제와 명단(을사오적 포함), 일제가 내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민족 반역자들의 이름을 적었다.

들어가는 글에 백암의 필명이자 또 다른 호인 ‘태백광노(太白狂奴)’가 보인다. ‘태백산(현재 백두산)이 자리 잡은 곳에서 태어났거늘 나라 잃어 미쳐버린 노예’라는 뜻이다. 한 대목이다. “…나라는 형체, 역사는 정신이다. 한국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은 보존하는 게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백암 심경이 짚인다. “정신이 보존돼 사라지지 않으면 반드시 형체는 부활할 때가 온다.” 국권을 되살리는 의지를 강철처럼 세웠다. 상하이에서 간행된 이 책, 국내에 반입돼 필사본으로 읽혔다.

 

1편은 한반도 지리와 도시·유적, 상고사·조선사를 더듬었다. 2편(1~51장)부터가 근대사, 뼈아픈 역사다. 흥선대원군 섭정(1장),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 남연군(흥선대원군 부친) 분묘 도굴 사건(미국 상인 오페르트가 자행), 신미양요, 명성황후 일가 득세(흥선대원군 퇴진), 조일수호조규 체결, 임오군란, 흥선대원군 복귀, 청·일 군대 국내 주둔, 갑신정변, 흥선대원군 환국, 동학란, 명성황후 시해, 청일 전쟁, 의병 봉기, 아관파천, 외국인의 철도부설권 침탈(마지막 51장)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세밀한 기록이다. 백암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도 많으니까. 냉정하게 분석하고 반성한 대목은 독자가 역사를 이해하는 눈을 밝혀준다. 국제 정세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는지 백암은 그 중요성을 잘 보여줬다. 외세가 우리 강토와 정신을 좀먹는 과정, 국내 무리가 외세와 결탁하는 비열한 현장, 조정 대신들이 보이는 무기력과 무지에 독자는 숨이 막힌다. 백암은 외친다. “흥선대원군이 강행한 지나친 통상 거부 정책,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외세 의존 정치가 통사를 빚어냈다.”

안일에 젖어, 먹지 않으면 먹히는 국제 정세에 휘둘렸다. 우리가 자력 자강을 이룬 나라였다면 어림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잘 꾸려가는 길은 한결같다. 백암 한탄이 깊다.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는 외교를 잘하며, 문약(文弱)을 떨쳐내고 무강(武强)으로 변화시키고, 요해처(要害處)를 단단히 방어해야 하거늘….” 지금 한국이 맞은 국내외 현실에도 적중한다.

마지막 3편은 대한제국 성립을 1장, 열사 120명이 옥에 갇힌 ‘105인 사건’을 61장으로 짰다. 일제가 우리 입법 사법 행정권을 빼앗고, 정치 문화 경제 국방 경찰 전반을 손에 넣었다. 광산 어업 벌채 포경권과 개성 인삼까지 훔쳤다. 제일은행권을 강제 발행하고 통신기관을 주물렀다. 일인에게 황무지 개간권을 쥐여줬고, 일본 선박은 우리 항구를 제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을사늑약 전후로 열사 자결이 잇달았다. 주영서리공사 이한응, 시종무관장 민영환, 원임의정대신 조병세, 참판 홍만식, 경연관 송병선, 학부주사 이상철, 평양진위대 김봉학, 중국인 반종례. 헤이그 특사 이준은 울분으로 숨졌다. 군대 해산 후 참령 박승환이 목숨을 버렸다. 일제가 양민을 학살한 사례는 차마 읽기가 힘들다(51장). “…어느 지방에서는 추격한 의병을 찾아내지 못하자 일본 병사들이 우리 양민 수백 명을 땅에 반쯤 묻은 뒤 장검으로 풀 베듯 목을 친 뒤 서로 쳐다보며 웃어댔다.”

3편 뒷부분은 일제 원흉 처단을 보여줬다. 일제 앞잡이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장인환 전명운, 권총 탄환 세 발로 이토 히로부미를 거꾸러트린 안중근 의사, 이완용과 데라우치를 각각 살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이재명과 안명근 열사가 나온다.

▮ 한국인 정신 벼린 ‘단재 사관’

일본 러시아 중국이 물고기로 상징된 조선을 낚으려 하고 있다. 프랑스 삽화가인 조르주 페르디난도 비고가 그린 풍자화(1887년, 고종 24년).


단재는 1931년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일간지에 연재한 글을 묶어 1948년 초판본으로 낼 때 책 제목을 ‘조선상고사’(12편 47장)로 바꿨다. 기존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한국인 정신을 벼리는 ‘단재 사관(史觀)’을 펼쳤다. 한국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 애썼다. 잘못투성이 사료에서 인용돼 잘 살펴봐야 한다는 시각. 고려 정치가·학자인 김부식(1075~1151)이 쓴 ‘삼국사기’가 그렇다.

중화사상과도 싸웠다. 중국 역사서가 특히 위작이 많으니 경계하랬다. “그들은 자기네에 유리하게 다른 나라 역사까지 거리낌 없이 뜯어고친다. …위략(魏略)은 서양 백인종인 대진(大秦, 로마)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고 기록한, 중국의 병적인 자존심을 가장 잘 나타낸 글이니….”(3편 1장 삼조선 총론). 지금도 그들은 김치를 자기네 고유 음식이라고 우긴다.

역사에 스민 ‘사대주의 노예근성’을 집어 올렸다. 전한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90?) ‘사기’를 노려봤다. 가짜 기록을 끌어와 쓸 수밖에 없었으니. 열전 중 조선 편(55)도 믿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836)은 역사서도 여러 권 냈다. 여기서도 중화주의 냄새가 난다며 안타까움을 보였다.

유교 윤리관을 좇아 인물과 역사를 재단하는 문제를 들여다봤다. 고구려 정치가이자 장군 연개소문(?~665)을 빛과 그림자로 나눠 바라본다. “혁명을 이룬 큰 인물이다.” ‘빛’에 해당한다. 옹호가 따른다. “후대가 임금을 죽인 신하로 업적은 무시한 채 깎아내리는 건 크게 원통하다.” 고구려가 강성할 때 그 강역이 얼마나 넓었는가 꼼꼼히 다뤘다. 반면 후임을 제대로 못 만들어 나라를 망친 건 ‘그림자’.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썼다. 지도층 골수에 스민, 중국을 받드는 사대주의 노예근성이 파국을 불렀다.

그는 사실(事實)이 역사로 온전히 기록되기가 어렵다는 사관을 받들었다. 같은 왕조에서도 전대 역사가 바르게 기록되지 않는 사례가 허다하다. 새 나라가 들어설 때도 그렇다. 하물며 이민족 역사를 왜곡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를 걸러내는 게 역사가에게 지워진 책무. 훈몽자회 처용가 훈민정음 삼국유사 같은 고서에서 고대사 진실을 찾으려 애썼다. 오랜 망명 생활은 녹록잖았다. “해외로 나간 후로는 책 한 권 얻기가 어려웠다.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보았으면 했지만, 또한 얻어 볼 수 없었다.”

백암과 단재가 보여준 공통된 항일 시기 민족사관은 ‘자강(自强) 자립(自立)’, 두 낱말로 요약된다. 단재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며 국가 앞엔 존망이란 두 선택지가 놓였을 뿐이라고 믿었다. 21세기, 국제사회는 평화를 내세우나 그 초석은 자강과 자립이다. 그걸 가지지 못한 국민은 난민으로 전락하는 게 국제 사회 현실이다. 이 두 고전은 그런 점에서 일찍 쓴 현대 역사서이다.

 

 

[한국통사]

박상현입력 2021. 5. 15. 11:04

한국통사 초반본 [코베이옥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박은식(1859∼1925)이 민족주의 사관으로 쓴 역사서 '한국통사' 초판본이 경매에 나왔다.

경매회사 코베이옥션은 오는 26일 오후 3시에 열리는 경매에 1915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판된 한국통사가 시작가 1천만원에 출품됐다고 15일 밝혔다.

책 크기는 가로 15㎝·세로 22㎝이며, 판권 부분에 저자가 '태백광노'(太白狂奴)로 인쇄됐다. 앞부분에는 경성 풍경과 민영환·안중근 사진 등이 실렸다.

코베이옥션은 "1915년 당시 국내에서는 이 책이 검열 때문에 배포될 수 없었다"며 "수집가 오한근 소장본으로,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강조했다.

경매에는 시인 이상화(1901∼1943)의 청년 시절 사진도 나왔다. 사진 옆에 '1920년 5월 7일, 한국 서울'을 의미하는 영어와 심정을 기록한 글이 있다. 시작가는 300만원이다.

경매는 온라인 참가도 가능하다. 출품 자료는 경매 전까지 종로구 코베이옥션 전시장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이상화 사진 [코베이옥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sh59@yna.co.kr

 

 

이기욱 기자입력 2021. 12. 15. 03:02수정 2021. 12. 15. 03:06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100년 전 하와이서 발행된 까닭은.. (daum.net)

 
1900∼1945년 출간된 책 44권, 한국학 사서 이효경씨가 소개
'워싱턴대학의 한국 책들' 펴내
"일제의 감시 피해 美서 발행.. 우리 문화 명맥 잇고자 한 증거"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 정신이 보존돼 멸망치 아니하면 형상은 자연히 다시 살아남을지라.”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이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 한국 근대사를 다룬 ‘한국통사(韓國痛史·사진)’ 서문 일부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믿었던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1915년 한문본으로 이 책을 냈다. 초판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 발행된 이 책의 한글본이 100여 년이 지나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 동아시아도서관에서 발견됐다.

14일 발간된 ‘워싱턴대학의 한국 책들’(유유)은 워싱턴대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사서로 20여 년을 일한 저자 이효경 씨(50)가 도서관 소장 한국 자료 중 1900∼1945년 출간된 책 44권을 소개한 책이다. 동아시아도서관은 북미 지역 14개 한국학 도서관 중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약 20만 종) 다음으로 많은 한국 자료를 소장(약 15만 종)하고 있다. 44권 중 5권은 출판의 자유를 박탈한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를 피해 미국에서 발행된 책이다. 36권은 한국에서, 3권은 일본에서 각각 발행됐다. 이 씨는 “오랜 기간 도서관 서고에서 누군가 찾아 주기만을 묵묵히 기다린 책들이 드디어 독자를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도서관은 독립운동가였지만 친일파로 돌아선 윤치호(1866∼1945)의 ‘우순소리’도 소장하고 있다. 제목이 우스운 이야기라는 뜻인 이 책은 윤치호가 71편의 우화를 재창작해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았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우화를 전하며 “백성을 죽여 가며 재산을 한 번에 빼앗다가 필경 재물과 백성과 나라를 다 잃어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며 국민을 수탈하는 일제와 매국노를 비판했다. 이 책은 1908년 국내에 출간됐다 금서 처분을 받았고, 1910년 하와이에서 재출간됐다.

이 씨는 “일제 무단통치기 해외에서 출간된 책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 문화의 명맥을 잇고자 안간힘을 쓴 증거”라며 “광복 이후에 나온 책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입력 2012. 6. 27. 03:16수정 2012. 6. 27. 10:06

"약기편람은 박은식의 '한국통사 초고본' 맞다" (daum.net)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실장 확인

[서울신문]작자 미상으로 1904년 쓰인 것으로 알려진 '약기편람'(略記便覽)이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의 '한국통사 초고본'으로 최종 확인됐다. <서울신문 3월 14일자 2면> 쓰인 시기는 '한국통사'(韓國痛史)가 출간되기 5년 전인 1910년 12월 이후인 것으로 밝혀졌다.

 

'약기편람'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학수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 실장은 26일 "연구원이 소장한 약기편람은 박은식 선생이 1915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통사의 초고본이 맞다."면서 "써 내려갈 목차에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사건,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 기도 사건 등을 잡아놓은 것을 볼 때 아무리 빨라도 1910년 12월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통사 출간 5년 전 작성… 1915년 출판"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서 서양의 근대적 역사서술 방식을 받아들여 쓴 역사책이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했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달았다.

약기편람은 한국통사 가운데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동학란, 명성황후 폐비 후 복위, 지방의병, 아관파천과 김홍집 정권 등장 등을 써 놓았고, 박승환 순국, 장인환·전명운 의거, 안중근 의거 등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작은 책자다.

김학수 실장은 "지난 3월 14일 서울신문이 보도한 이후 약기편람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해제도 필요 없고, 망설일 것도 없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다만, 백암이 손수 약기편람을 정서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켜 정성스럽게 필사한 것인지는 더 검토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백암의 글씨는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그의 후손들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밝혀, 친필 여부를 감정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기획처장은 "약기편람의 글씨가 아주 가지런한 것이 행서나 초서체로 흘려쓴 백암의 글씨체와는 아주 달라 보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직접 쓴 초고본들도 해서체로 정서해서 아주 가지런하므로, 평소 글씨체와 다르다고 친필이 아니라고 성급하게 단정지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수록 내용 대부분 한국통사와 동일

 

서울신문은 지난 3월 14일자에서 "약기편람은 현재 저자 미상으로 알려졌지만, 수록 내용 대부분이 한국통사와 동일한 만큼 저자는 박은식이 분명하다."는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의 주장을 보도한 바 있다. 김 교수는 한국통사(아카넷 펴냄)를 번역해제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우연히 발견해 번역해제본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

김 실장은 "이번에 발견한 초고본은 백암 선생의 한국통사 저술의 과정을 밝힐 수 있으며, 백암 전집을 총체적으로 꾸밀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약기편람에 대한 서지정보(저자, 출판사명, 출간연도 등 책에 관한 정보)도 이른 시일 안에 바꿔놓겠다고 약속했다. 김 실장은 "학자들을 위해 무엇보다 약기편람에 대한 서지정보를 빨리 바꿔놓고, 열람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면서 "장서각의 보유목록 인쇄물의 수정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터넷 서지정보는 빨리 바꿔놓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입력 2023. 7. 8. 00:21

고종·순종실록, 1만여 종 공문서 자료 빼 일제 통치 정당화 (daum.net)

[근현대사 특강] 일제 식민주의가 남긴 멍에 〈하〉

고종 시대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대립하기도 하여 혼란스럽다. 필자처럼 긍정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대표적인 실패의 역사로 보는 견해와 해석도 많다. 필자는 국왕의 위상이 바닥으로 실추한 상황을 그대로 두는 것은 곧 머리 없는 역사로서 바른 역사상이 될 수 없다는 견지에서 고종과 그 정부의 치적을 새롭게 주목하는 것일 뿐인데 국왕 중심 역사관이란 소리를 듣는다. 한국 근대사,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학문으로서의 요건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2 일본인들이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근대 학문으로서 한국사는 ‘근대’와 함께하지 못했다. 1895년부터 정부가 신식 역사 교과서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나 역사 연구 인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을 발족시키기도 전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국권 상실 후에는 뜻있는 지식인들이 대부분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나서게 됨으로써 온전하게 역사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가 나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하여 조선 민족의 주체적 역사 인식을 초장에 제압하기 위해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힘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한 뒤에 시베리아에서 상해로 와서 중국 지식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문체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12)를 간행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민족사에 대한 이만한 성과가 잇달아 나온 것은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로서 근대 역사학의 체계를 온전하게 갖춘 역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개인적으로 일본 대학에 유학하여 신식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나오기는 했으나 그들 가운데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록』 영인본 덕에 60년대 ‘국학 붐’

1945년 광복 후 1960년대 후반에 ‘국학 붐’이 일어났다. 대학교 제도가 안정을 찾으면서 일제 식민주의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다. 이때 근·현대사 분야에서 위 두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학 붐’도 초기에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위 두 책의 영향으로 근대사 연구자들 다수가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썼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사학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류로서 그것이 근대 역사학의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구미의 근대 역사학은 흔히 “과거를 평가하려고 하기 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n)’를 먼저 밝히라”라는 랑케의 명언으로 대변된다. 과학으로서 역사학은 곧 근거 있는 역사의 서술로서 사료 편찬 작업이 필수라는 뜻이다. 우리의 ‘근대’에는 그런 기초를 닦을 시간이 없었으며 이 결함을 채울 때까지 학문으로서의 한국 근대사를 말하기 어렵다.

 
3 고종 황제. 4 순종 황제.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사는 일제 치하의 치명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학 붐’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이 신빙성 높은 사료로서 연구자들에게 영인본으로 일찍 제공된 것이 빠른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록』은 한 왕의 시대가 끝나면 그 재위 기간에 생산된 각급 기관의 기록을 모아 취사선택하고 편년체로 정리하여 후대에 그 왕의 정사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한 편찬물이다. 편찬이 완료되면 너댓 벌을 활자로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은 편찬 후 어떤 후손 왕도 볼 수 없는 원칙을 세워 편찬의 객관성을 보장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의 『실록』은 편찬 후 공개가 허용되어 기록의 객관성이 훨씬 떨어지고 분량도 우리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조는 왕이 바뀔 때마다 근대성을 지닌 ‘사료 편찬’ 사업을 해온 세계 역사상 유일한 나라였다.
 

필자가 1990년대 초 서울대 ‘규장각 도서’ 관리 책임자로 소규모 견학단을 인솔해 일본 도쿄대학의 ‘사료편찬소’를 공식 방문하였다. 그때 국제부장직의 교수가 8층 건물의 자료 보관실을 위층에서 아래로 안내해 주었다. 4층인가 『대마도종가문서』와 영인본 『조선왕조실록』이 함께 비치되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필자는 일본 교수에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저 종가문서와 같은 1차 문서자료가 많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씀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오히려 『실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1869년 창설 후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1차 문서자료를 가져와서 뒤늦게 일본식 『실록』을 편찬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당황스러움과 감격을 동시에 느꼈다. 제집의 보석 귀한 줄을 제대로 깨닫는 견학이었다.

일본 비중 높이고, 미국과의 기록 축소

그렇다! 저 독일의 랑케 사학도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Historical Monuments of the Germans, 1826~)』 편찬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제1차 세계대전 후 구미 인문학계는 1920년 국제연맹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국제학술원 연합(UAI)을 창설하여 인류 평화 공존에 이바지하는 인문학을 표방하여 ‘문명’ 연구를 제일 과제로 삼았다. 그리스-로마, 비잔틴, 이슬람, 게르만 등 문명권 상호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해 연구에 필요한 문명권 관련 자료 편찬사업을 지원 과제(Patronized Project)로 삼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편찬사업이 각 회원국 학술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속에서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이 나오고 아놀드 토인비의 ‘문명 사학’이 출현하였다.

미국은 국제연맹과 국제학술원연합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서도 상원이 국제연맹 가입을 허용하지 않아 정작 회원국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 역사학은 그래서 유럽 역사학에 뒤지는 형세를 면치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규모 전사(戰史) 편찬사업을 일으켜 사료를 다루는 전문 인력을 대폭 양성하고 연구력을 갱신하여 유럽 역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어느 것이나 사료 편찬을 거치지 않은 역사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5 『조선왕조실록』. 태조~철종 간 총 1893권 888책. 6 박은식의 『한 국통사』. ‘통사’는 아픈 역사란 뜻이다.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는 1980년대 『실록』의 영인본을 간행하여 국내외 연구자들이 이를 쉽게 이용하게 함으로써 한국사는 조선 시대 연구를 중심으로 짧은 시간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록』이 각 왕대의 1차 사료를 정리한 성과물이었으므로 연구자들에게 그만큼 시간 단축의 효과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근대사는 그렇지 못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의 편찬 자체에 깊게 박힌 일제 식민주의 골조가 멍에로 남은 탓이다. 1926년 순종 황제 붕어 후 1927년부터 8년간 고종, 순종의 실록 편찬사업이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이왕직(李王職)’ 사업으로 조선사편수회가 수행한 장기 사업이었다. 어느 모로나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사업이었다.

두 『실록』 편찬사업은 고종 시대 국제 관계에서 일본의 비중을 높이고, 조선이 중시한 미국과의 수교 기록은 의도적으로 줄였다. 1882년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하여 이루어진 왕궁 내 전기 시설 관련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1898년 황실 자금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콜브란-보스트윅사 기술제휴로 서울 시내에 전기를 시설하고 전차를 달리게 한 엄청난 근대화 사업도 전차에 사람이 치인 사고 기사에 세주(細註)로만 설립 사실을 간단히 밝혔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정부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여 황제가 침략행위에 앞장선 일본 군인과 관리에게 손수 훈장을 내린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두 『실록』은 이에 관한 기록을 빠짐없이 실어 국가 원수가 저들의 활동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남겼다. 두 『실록』 편찬사업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이 편찬사업이 정작 고종 시대 근대화 사업 추진 중에 생산된 정부 공문서 1만10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실을 밝혔다.(중앙일보 2022년 7월 11일자 14면) 두 『실록』 편찬사업은 후세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튼튼한 골조 구축 작업이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실록』의 온라인 제공에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미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본까지 갖추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 비전공자를 상대로 양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제가 고의로 제외한 정부 공문서 자료를 모두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료 편찬사업만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필자 사정으로 이번 주 쉽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박정호입력 2021. 7. 26. 00:31수정 2021. 7. 26. 06:34

독립운동 분열 비판한 임정 수반
유학자서 혁명가로 끝없는 변화
사욕만 챙기는 '가짜 지사' 질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도 활동한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박은싀. [중앙포토]

 

“독립운동은 오족(吾族·우리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別·구별)이 없어야 된다.”
독립신문 1925년11월 11일 자에 실린 백암 선생의 유언이다. 백암(白巖)은 독립지사 박은식(1859~1925)의 호다. 기사가 실리기 열흘 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타계한 백암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을 불러 이런 뜻을 남겼다. 최후의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이 묵직하기만 하다.
백암의 또 다른 호는 ‘겸곡(謙谷)’이다. 그의 삶과 사상을 압축한 단어로 보인다.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나온 말로, ‘땅 아래에 산이 있는 것이 겸(謙)이니, 군자는 많은 데서 덜어 적은 데에 더해 주어 사물을 저울질해 고르게 베푼다’는 의미다. 요즘 우리 사회 화두인 공정과도 통한다.
역사학자 노관범 교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풀이가 흥미롭다. 그는 “박은식은 편파성과 편중성을 없애는 이 말을 평천하(平天下)의 중요한 길로 봤다”며 “겸곡이 생각한 평(平)은 고통받는 인민과 탐학한 양반 사이의 평이자 재래의 구학문과 외래의 신학문 사이의 평이었다”고 설명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 [중앙포토]

 

시대의 명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로 이름난 겸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1919년 어렵게 출범한 임시정부가 내부 균열로 깊은 수렁에 빠지자 1925년 3월 23일 면직된 이승만에 이어 2대 대통령에 올랐다. 반면 재임 기간은 채 넉 달이 안 됐다. 그해 7월 개정 임시헌법에 따라 통치권이 국무령(이상룡)과 국무회의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대통령이 8개월 재임한 것과 견준다면 겸곡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짧은 임기를 마친 셈이다.
‘박은식 대통령’의 행적을 임기로 따질 일은 아니다. 나라를 잃었던 100년 전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오늘을 직접 비교할 순 없다. 그런데 지치(至治·가장 잘 다스려진 정치)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겸곡이 임정 마지막 대통령으로 출발한 첫날의 마음가짐은 내년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이 새길만 하다. 그가 취임 당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오늘날 우리 독립운동의 제일 요소는 각방(各方)의 인심을 통일하여 내부의 결속을 견고케 함이라. (…) 내부 결속이 박약하면 서로 원수로 여겨 죽이는 참극까지 연출케 되나니 (…) 3·1운동 이후에는 각방의 단체가 우후춘순(雨後春筍)과 같이 발생하여 경제의 곤란으로 운명이 장구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독립이란 대명제 앞에서 분열한 여러 세력을 비판한 글이다. 한 세기 전의 외침이건만 지금 우리의 눈앞을 짚어보는 데도 유용하다. 정당의 1차 목표가 집권인 것은 분명하나 여야 없이 볼썽사나운 비방과 모략이 득실대는 현실은 정치에 대한 혐오만 증폭시킬 뿐이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마저 나올 지경이다.

2015년 10월 서울대 사범대 역사관 앞에 세워진 백암 박은식 선생 흉상. [중앙포토]

 

겸곡의 화살은 내부로만 향하지 않았다. 세계정세에 대한 통찰을 촉구했다. 그는 1925년 7월 7일 임시 대통령에서 물러나며 인류 역사는 세계주의를 향하는 시대이기에 한국의 독립운동도 민족 단독으로 한정 짓지 말고 세계 민족과 연합주의로 행동해야 한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노관범 교수는 “독립운동이 국권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등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혜안”이라고 평했다.
노 교수의 신간『유학자 겸곡 박은식』은 시사성이 크다. 30년 전 대학생 시절 겸곡과 처음 만난 저자가 그간의 연구와 생각을 정리해 박은식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되살렸다. 황해도 시골 선비로 태어난 겸곡이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 파란의 세월을 거치며 언론인·역사학자·독립운동가·혁명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망라했다.
겸곡의 삶은 한마디로 한국 근대사 자체였다. 노 교수는 특히 겸곡의 세계성을 주목했다. “박은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다”고 정의했다. 조선의 멸망과 독립운동을 각각 다룬『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또한 동아시아 혁명의 역사, 군국주의와 인도주의가 대결하는 세계사의 극적인 발현이었다고 해석했다.
책 내용 가운데 ‘구유(拘儒)’와 ‘통유(通儒)’란 단어가 확 들어왔다. 각각 시무(時務)에 어둡고, 밝은 유생을 가리킨다. 과거에 갇힌 자와 미래에 열린 자의 대비다. ‘가지사(假志士)’도 눈에 띈다. 대한제국 말기 유행한 말인데, 겉으론 국민·국가를 외고 다니지만 속으론 제 잇속만 채우는 이들을 말한다. ‘구유’와 ‘가지사’를 솎아내는 시민들의 혜안이 절실한 요즘이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지혜는 성경에만 나오는 비유가 아닐 것이다.

박정호 논설위원

 

 

입력 2020. 5. 28. 00:15수정 2020. 5. 28. 07:12

"나라 멸망해도 역사는 살아남아"
청일전쟁 패한 중국인 마음 울려
시대·지역 뛰어넘는 고통의 기억
혼란의 5월 새롭게 돌아보게 해


근대 고전 『한국통사』 읽는 법

박은식 선생의 유해가 1993년 8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되고 있다.

 

화창한 5월에는 기념일이 많다. 가정을 위한 기념일도, 나라를 위한 기념일도 있다. 전자로는 어린이날이 있다. 3년 뒤 100주년을 맞이하는 어린이날은 본래 어린이 해방을 외치며 시가행진하는 날이었다. 지금은 모든 어린이의 생일 같은 날이 됐다.

후자로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전통에서 5·18은 현행 민주주의 헌정의 출발점이 된다. 3·1의 피 흘림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듯이 5월의 영령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 공교롭게 5월에는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과 연결되는 기념일이 모여 있다. 11일 동학 농민혁명기념일은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에게 승리한 날, 10일 유권자의 날은 해방 후 처음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한 날이다.

5월에는 또 다른 기념일이 있다. 달력에는 나오지 않지만 7일이 어떤 학회의 창립일이다. 여느 학회와 달리 이 학회는 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 진단학회다. 1934년 학회 창립 회칙에는 ‘본회는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함’이라는 조항이 있다. 진단(震旦)의 말뜻이 본디 동방이니 ‘동방학’에 어울리는 학문을 추구했다고 하겠다. 참고로 진단은 한국사의 어떤 나라 이름이기도 하다. 궁예가 세운 마진(摩震)은 마하진단의 줄임말로 대동방이라는 뜻이다.

1960~70년대 일어난 한국고전 연구

1960~70 년대 한국 고전 및 선각자를 돌아본 책과 신문 기사. 사진은 중앙일보에 연재된 ‘근대화의 여명’. [중앙포토]

 

진단학회는 해마다 한국 고전을 검토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왔다. 1973년 ‘『삼국유사』의 종합적 검토’를 제목으로 제1회 대회를 시작했다. 『삼국유사』 지은이 일연의 선불교에 관한 고찰(민영규), 『삼국유사』의 신화에 대한 고찰(김열규),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에 대한 고찰(이기백), 이렇게 세 발표가 있었고 종합토론이 뒤따랐다. 세월이 흘러 이태 후면 제50회 심포지엄을 맞게 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에서 시작해서 최근에는 『임하필기』 『한국통사』 『징비록』에 미쳤다.

『근대한국명논설집』(신동아). [중앙포토]

 

진단학회가 고전 연구를 시작할 무렵 우리 사회에는 한국 고전에 대한 관심이 상승하고 있었다. 민족문화 진흥을 목적으로 65년 민족문화추진회가 설립돼 초대 회장에 박종화가 선임됐다. 민족문화추진회가 고전 국역 사업에 주력했고, 2007년 출범한 한국고전번역원의 모태가 됐다. 한국 고전 목록도 만들어졌다. 잡지 ‘신동아’는 학계 추천을 받아 한국 고전 100선 해제집을 69년 신년 별책부록으로 냈고(『한국을 움직인 고전백선』), 출판사 현암사도 69년 전문가 추천을 받아 한국 고전 100선 해제집을 출판했다.(『한국의 명저』)

진단학회의 『한국고전심포지움』(일조각). [중앙포토]

 

민족문화를 상징하는 고전 정선 작업과 함께 한국의 근대정신을 적시하는 명문 정선 작업도 병행됐다. ‘신동아’는 해방이 되기까지 100여년간 민족을 지도한 ‘오피니언 리더’의 명문 모음집 66편을 66, 67년 잇따라 신년 별책부록으로 냈고(『근대한국명논설집』), 중앙일보도 같은 기간 『지봉유설』의 이수광부터 갑신정변의 서재필까지 근대화 운동 선각자 37명의 행적을 소개한 유홍렬의 글을 절찬리에 연재했다.(‘근대화의 여명’ 66년 3월 5일~67년 5월 13일)

『한국의 명저』(현암사). [중앙포토]

 

한국의 고전은 대개 전근대 문헌에서 멈추었다. 근대는 고전이 아닌 명저의 세계였다. 『현대 한국의 명저 100권』(신동아·1985)은 해방 후 문사철 및 사회·정치·경제·법학 분야에서 한국학 학술 서적을 골랐다. 20세기 지성사의 시각에서 고른 『우리 시대의 명저 50』(생각의나무·2009)의 첫 번째 책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렇지만 전근대 고전과 근대 명저 사이의 장벽을 뚫고 ‘근대 고전’이라는 영역을 창출한 진귀한 문헌이 있다. 바로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다.

『한국통사』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머리말에 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고 했다. 나라는 형체다. 역사는 정신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망가졌지만 정신이라도 보존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돼 멸망하지 않는다면 형체도 때가 되면 부활할 것이다.’ 박은식이 지은 글이 많지만 오직 이 머리말이 ‘신동아’의 근대 명 논설 66편에 들어간 것도 나라와 역사의 관계를 논한 이 구절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통사』를 잘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라의 형체가 없어져도 민족의 정신이 역사에 잘 보존돼 있으니 민족의 역사를 깨우쳐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결심을 했다면 가장 잘 읽은 사람이다. 하지만 고전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한국통사』 독법이 그 한 가지일 뿐일까. 예로부터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한국통사』 역시 눈물의 독서 이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한국통사』의 얼굴은 제목의 키워드 ‘통(痛)’이다. 단순히 나라 잃은 아픔이었을까. 지은이가 느낀 ‘통’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유학자는 인통함원(忍痛含怨·아픔을 참고 원한을 머금다)을 말했을 뿐이지만 대한제국의 멸망을 겪은 지은이는 끝내 아픔을 참지 못하고 국외로 망명하고 말았다. 둘의 ‘통’은 서로 달랐을까. 지은이는 양명학에 심취해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아픔이 타인의 아픔이 되는 감성의 유학을 지향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것은 고통받는 세인을 보고 치밀어 오르는 아픔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는데 둘의 ‘통’은 서로 같았을까.

한국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통사’

『한국통사』의 ‘통(痛)’은 지은이의 ‘통’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통’이기도 하다. 서간도에 망명한 이건승(李建昇)은 이 책을 읽고 ‘숨김없이 마음껏 말한 참 좋은 역사책’이라고 기뻐하고 시를 지었는데, 이 책이 간행돼 중국인이 수천 질을 구매했고 우리나라 문자 중에 중국에서 이렇게 유행한 것이 없다고 밝혔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이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 가한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로 중국 인심이 비등한 때, 한국의 ‘통사’를 읽고 지은이의 ‘통’과 만난 수많은 중국인 독자의 ‘통’은 무엇이었을까. 청일전쟁의 아픔을 생각해 중국 인민이 마음을 고쳐먹고 진보해야 한다고 말한 지은이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국통사』의 ‘통(痛)’은 지은이와 독자의 ‘통’이기도 하지만 출판사의 ‘통’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전통 문집이든 근대 매체이든 한국 문헌에서 ‘통사’라는 말을 찾을 수 없다면 ‘통사’라는 제목을 만들어낸 것은 출판사의 기획이었을까.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 중국 작가 우젠런(吳趼人)은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는 남송 말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역사소설 『통사(痛史)』를 지었다. 『한국통사』의 지은이는 감히 정사를 자처할 수 없어서 ‘통사’라고 이름한다고 고백했는데, 이것은 출판사의 제안을 수용한 결과일까. 『한국통사』가 출판될 무렵 중국에서는 『조선망국연의(朝鮮亡國衍義)』 『조선통사(朝鮮痛史)』 등 한국 국망을 테마로 하는 역사소설이 유행했다.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일까.

한국통사의 키워드는 아픔이다. 진정한 고전은 변화하는 세월 속에서도 불변의 화두를 기억한다. 한국은 이미 민주화운동을 기념일로 갖고 있고 지나간 근대사를 이제 더 이상 아픔의 역사로 가두지는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의 사태를 보며 여전히 아픔의 역사 속에 있음을 절감한다. 통사를 다시 읽어야 할까.

■ 장대비 같은 눈물 흘린 박은식

시조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중국인과 만나면 『한국통사』를 증정하고 통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1916년 6월 중국 근대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의 어떤 문인이 회고한 기록이다.

“하루는 한국 유자(儒者) 박은식 군이 와서 만나 보니 창연한 노인이었다. 인사한 후 그가 지은 『안중근』 및 『한국통사』를 선물 받았다. 함께 말하려 하니 두 손 모으고 알아듣지 못한다 사양했다. 종이와 먹을 꺼내 서로 마주하며 필담했다. 당시 한국은 멸망했다. 매번 종사의 통한을 건드리면 그때마다 장대비 같은 눈물을 흘렸다. 중간에 이완용(李完用)의 일을 물으니 다시 발끈하여 분개를 견디지 못했다. 쌓인 종이가 한 치나 됐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박은식은 조선 유학자 율곡 이이의 노래라 소개하며 시조 한 수(사진)도 한글과 한자로 써 주었다.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박은식의 유묵인데 그가 율곡을 존모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원래 조선 중기 양사언의 시조인데, 박은식이 잘못 알았던 것 같다. 최남선은 한국 근대 잡지 ‘소년’에서 이 시조를 율곡의 작품이라 소개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30회]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하였다

[김삼웅 기자]

 
  박은식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사진)
ⓒ 국가보훈처
 
나철과 대종교가 특히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국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시기에 발간된 대종교의 각종 경전은 민족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1914년 그가 망명하여 정착한 만주 화룡현 청파호의 대종교총본사는 민족사학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 또는 순례의 코스가 되었다. 이런 모습은 김교헌ㆍ윤세복으로 이어진 후계자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1859~1926)은 개화파 지식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각종 계몽ㆍ항일논설과 많은 사론을 집필하였다. 1911년에 국경을 넘으면서 "나라는 망해도 역사만 지키면 반드시 부흥한다"는 신념으로 망명길을 택하였다. 나철의 '국망도존'과 같은 인식이었다. 

 

망명한 박은식은 윤세복의 집에 1년간 머물며 대종교 교도가 되었고, 고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답사하는 한편 다수의 고대사 저술을 하였다. 박은식이 언제부터 대종교에 가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는 유근이나 김교헌과의 교유를 통해 망명 이전부터 대종교를 체득하고 있었으며, 망명을 전후하여 정식으로 입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그가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에는 단군의 의미를 거론하지 못하였고, 강역인식도 한반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망명 직후 서술한 고대사 저술에서는 커다란 인식의 차이와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하였다.

언론인ㆍ민족사학자ㆍ독립운동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은식은 『한국통사』ㆍ『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는 『동명왕실기』, 『몽배 김태조』,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는 한편 단군의 신교(대종교)에 관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한 기록이다.

 단군의 신교(檀君之神敎)

시조 단군은 신도(神道)로써 교를 베풀고 제천(祭天)으로써 보본(報本)하였으니,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고려가 대대로 그 교를 준수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삼신(三神)께 제사하여 생산의 신을 위한다고 하노니, 삼신은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을 말함이다. 

 

기자조선 때에 단군묘(檀君廟)를 세우고 받들었으며, 삼국시대에 와서 불교가 홍기해도 환인제석을 높여 화엄경중에 게재하여 국내 사찰들이 모두 환인제석으로 받들었으니 이제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제석(帝釋)이란 곧 인도어로 상제(上帝)를 칭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묘향산에 3백 6십여 개의 암자를 지었으니 단군시조가 정치하던 3백 6십여 사를 상징한 것이며, 중 무극 일연(無極一然)이 『삼국유사』를 찬하매 삼신의 이화(理化)한 사적을 논했고, 본조(朝鮮時代)에 와서 명유 이익(李瀷 號는 星湖)이 말하되 우리 나라의 종교는 단군에서 나왔다고 했고, 다산 정약용이 삼신을 말하되 인민의 시조라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신교의 원류(源流)를 고증함에 족하다. 제천ㆍ보본함으로써 배천교(拜天敎)라고도 하며 또한 대종교(大倧敎)라고도 하니, 종(倧)이란 것은 상고시대에 신인(神人)을 칭하는 말이다. (주석 5)

주석
5> 박은식, 『백암 박은식전집』제1권, 1062쪽, 동방미디어, 200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뉴스엔입력 2019. 9. 9. 08:46

[뉴스엔 박수인 기자]

배우 이희준이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박은식의 정신을 되새긴다.

이희준은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에서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을 기록한다.

백암 박은식은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독립운동가이자 학자.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사상을 전파했다. 경술국치 후에는 동제사, 노인동맹단 등을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은식은 분열된 임시정부의 결집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과 같은 역사서들을 저술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이희준은 박은식의 국혼 정신을 직접 목판에 새기며 그를 기억했다. 이희준은 “직업이 배우이다 보니 시나리오로 주로 접하는 독립운동가분들 외에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이런 분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으면서 또 그동안 몰랐다는 것에 부끄럽기도 했다“는 감회를 밝혔다. 또한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에 저의 목소리를 보탤 수 있다는 게 뜻 깊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캠페인 다큐 ‘1919-2019, 기억록’ 은 매일 수시 방송되며, ‘이희준의 기억록’은 9일부터 일주일간 MBC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MBC 제공)

뉴스엔 박수인 abc159@

 

 
고충열입력 2016. 11. 2. 11:34
11월 1일 박은식 선생 91주기를 추모하며

[오마이뉴스고충열 기자]

11월 1일. 무슨 날일까? 안타깝게도 이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백암 박은식 선생(아래 박은식)의 서거일이다. 올해로 91주기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의 저자로 대중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박은식의 다른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혹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한국통사>의 저자'로 기억될 뿐이다.

실제로 박은식은 <한국통사> 하나로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거의 노년에 쓴 책이다. <한국통사>만을 기억한다면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그렇다면 박은식은 무슨 일을 했을까? '유학자'부터 '임시정부 2대 대통령'까지. 그는 정말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언론활동에 투신한 '유학자'

 

  박은식 선생(1859~1925).
ⓒ wiki commons
1859년 음력 9월 30일. 박은식은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신동으로 불렸을 만큼, 유학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이후 참봉으로 벼슬을 지내며 여러 행보를 보였다.
여기서 나는 의아스러운 부분을 찾았다. 당시 1894년,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동비(東匪)들의 반란'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에 대해서도 사설(邪說), 즉 그릇되고 간사한 말로 여겼다. 오히려 박은식은 조선시대에 어울릴 법한 유학자였던 셈이다. 

이런 보수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개혁에 비판적이던 박은식도 격동하는 정세에 눈을 뜬 걸까? 청일전쟁·을미사변·아관파천 등의 위기를 겪은 후, 박은식은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위정척사를 표방하던 그가 독립협회에 가입했을 만큼, 나라에 위기가 온 것이다.

 

독립협회 가입을 기점으로 그는 활발하게 언론활동도 병행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을 창간·보급에 힘을 쓴 것도 박은식이다.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이 돼 의병활동에 대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후일 박은식은 저서 <한국통사>에서 동학운동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동학당은 본래 정치사상과 혁명 성질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것이 비적 무뢰배나 어리석고 무지한 무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처럼 난폭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잔인했던 종래의 계급관념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졌으니 또한 개혁의 선구자라 말할 수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동학운동과 갑오개혁에 부정적이던 유학자가 이렇게나 변한 것이다.

 

역사책 집필과 독립운동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10만의 애국지사가 지키려고 했던 나라가, 10명도 안 되는 매국노에 의해 외세에게 넘어갔다. 나라가 없어지자 박은식은 중국으로 망명해 역사책을 집필했다.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의 역사책이 세상에 나왔다. 가장 유명한 저서인 <한국통사>도 이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수많은 저서 중에서 특히 <한국통사>가 유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가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박은식을 단순히 '역사학자'로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를 역사학자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무렵 박은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노인동맹단은 강우규 의사를 파견해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투척 의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즉, 그는 '얌전한 샌님'이 아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해서 투쟁한 '노익장'인 셈이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3·1운동으로 국외 곳곳에 임시정부가 수립했을 시기의 일이다.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한성 등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60세의 고령임에도 박은식은 임시정부 통합에 힘썼다. 그 덕분일까? 다행스럽게도 임시정부는 통합에 성공했다. 즉 독립운동의 역량 집중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감탄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만 국한시킬 수가 없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바로 아래에 나와 있다.

 

위기의 임시정부를 수습한 '2대 대통령'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요원들의 단체사진.
ⓒ 국가보훈처
통합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누구일까? 당시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박사' 이승만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석·박사 학위를 갖춘 명성보다 그의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결국 불성실한 활동과 분열을 야기한 '위임통치 청원'으로 탄핵당했다. 신채호가 이에 대해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결국 이승만은 쫓겨났으나, 임시정부는 공중분해의 위기를 겪는다. 임시정부는 가망이 없으니 해체하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기도 했다. 이때 공중분해를 당할 임시정부를 수습한 것이 바로 박은식이다.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은 제일 먼저 개헌을 실시했다. 이승만이 고집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으로 내각책임제를 선택했다. 이후에 박은식은 뭘 했을까? 놀랍게도 스스로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국무령이 선출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아무런 미련도 없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것이다. 대통령에 연연해 임정에 고집을 피우던 이승만과 달리 말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뭘 했을까? 제일 먼저 그가 미국에서 벌인 행동은 무엇일까? 재미교포들의 임시정부 후원을 바로 차단했다. 그리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가 벌어졌을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참으로 '졸렬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대통령을 사임한 1925년. 박은식은 이미 병색이 완연했다. 인후염과 기관지염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렵게 통합시킨 임시정부가, 해체의 위기를 맞이한 상황 속에서 그걸 수습하기에 분주했다. 그 때문에 병을 치료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향년 6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나는 이 점이 대단히 안타깝다. 나이든 몸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까지….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은식은 서거 직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의 병세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오.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어야 하오.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別)이 없어야 하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 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 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겠소."

본인의 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조국독립을 염려하는 말이다. 정말로 사리사욕이 아닌, 조국독립을 위해 힘쓴 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으로 애석한 점이 많다. 이렇듯 많은 행적을 보이고, 임시정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박은식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식의 인지도는 너무나도 낮은 게 현실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박은식을 '한국통사'의 저자로만 기억할 뿐이다. 서글픈 일이다. 이는 교과서에서 <한국통사>만을 다루고, 기타 활동은 다루지 않은 영향이 크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임정 2대 대통령'인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와는 다르게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려던 박은식을 누구도 '임정 2대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올해로 벌써 서거 91주기다. '민족반역자'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그런 민족반역자들을 옹호하는 자가 대통령까지 하는 현실이다. 현재의 이런 모습은 타국에서 눈을 감은 박은식 선생에게 떳떳할 수가 있을까? <한국통사>로만 국한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영웅, 박은식.

그런 영웅에게 떳떳할 수가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 모두 '떳떳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한국통사(韓國痛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박은식이 우리나라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1915년에 간행한 학술서. 역사서.
접기/펼치기정의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박은식이 우리나라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1915년에 간행한 학술서. 역사서.
접기/펼치기서지적 사항

한문본. 1915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출판하였다.

1915년 상해에서 간행된 초판본은 현재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46년삼호각(三乎閣)에서 출간한 책이 유포되고 있으며, 1975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동양학총서 제4집으로 간행한 『박은식전서』 3권 중 상권에 초판본이 그대로 영인, 수록되어 있다.

접기/펼치기내용

한국통사는 한 나라의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결코 망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서술된 것이다.

체재는 범례·목록·서·서언·삽화·제1편 2장·제2편 51장·제3편 61장·결론·후서·발 등으로 되어 있다. 삽화는 모두 12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은 광개토왕비문에서 집자한 제사(題辭), 제2항은 백두산 천지, 제3항은 고적으로 신라태종묘비 등 12점, 제4항은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구선(鐵甲龜船), 제5항은 금강산, 제6항은 궁전의 명소, 제7항은 서울의 명소, 제8항은 한국황실, 제9항은 순종, 제10항은 황실의장과 경내명소, 제11항은 을사조약·한일신협약 때의 한국대신 및 일본대표, 제12장은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인물 등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본문은 3편 114장으로 1864년 고종 즉위로부터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 발생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중요 부분은 각 장 뒷부분에 저자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1편은 서설편으로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적었다. 제1장은 한반도의 위치와 산천, 각 지방의 중요도시와 명승지 및 특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종 즉위 전까지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실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성립 직전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제1∼10장에서는 대원군이 집정해 하야하기까지의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서술하였다.

즉, 대원군이 집정하게 된 경위와 경복궁 중건―서원 철폐―세제 개혁―국방대책과 풍속 교정―천주교 탄압―병인양요―신미양요―일본과의 통상교섭 거부―대원군의 하야 경위 등이 그 내용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대원군의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강화를 위한 내정개혁은 높이 평가했지만,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어두워 쇄국정책으로 한국이 중흥할 기회를 잃었다고 하면서 통사(痛史)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제11∼13장에서는 민씨정권에 의한 문호개방과 그에 따르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문호개방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부강해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뒤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14∼17장에서는 임오군란과 그 결과로 일어난 청나라의 군사적 개입 및 일본측과의 제물포조약 체결, 청일 양국의 군대주둔 문제에 관해, 제18장에서는 구미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에 관해 서술하였다.

제19∼25장에서는 갑신정변에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소극적이었던 것은, 개화당이 성공해 계속 집권하면 한국이 지나치게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고 하였다.

제26∼44장은 동학혁명에서부터 청일전쟁·갑오개혁을 거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사실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동학혁명의 책임은 정부에 있고, 갑오개혁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제45∼47장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의병운동을, 제48∼51장은 아관파천과 그 뒤에 일어난 열강의 이권쟁탈에 관한 내용이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때부터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제1장은 대한제국 성립 때의 국내사정과 독립협회 활동상을, 제2∼13장은 열강의 이권쟁탈,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술하였다.

제14∼32장에서는 일제의 통신기관 강점, 일본선박의 내해항해의 자유권, 황무지개간 요구와 이의 반대운동, 압록강변의 삼림채벌권, 각 지방 광산채굴권 등의 장악 및 정치적으로 경찰권을 빼앗고 고문정치를 실시하는 과정과 러일전쟁과 강화조약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제33∼44장은 일제의 침략 앞에 매국과 애국에 관계된 인물들을 서술하였으며,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경위와 일본의 이권침탈 및 문화재 약탈상 등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기(李沂)·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김인식(金寅植) 등의 일본천황에게 보낸 항의문, 『황성신문』의 폐간과 장지연(張志淵)의 언론활동, 이상설(李相卨)·이유승(李裕承)·안병찬(安秉瓚)·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 등의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민영환·조병세·홍만식(洪萬植)·송병선(宋秉璿)·이상철(李相哲)·김봉학(金奉學) 등의 순국, 최익현(崔益鉉)의 격문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목적으로 이용한 한국인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 영선군(永宣君)이준용(李埈鎔) 등 황족, 박영효(朴泳孝) 등 당시의 국사범, 송병준(宋秉濬)·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一進會) 간부들이라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제45∼61장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국권상실, 1911년 105인사건까지의 내용을, 제45장에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의 농토를 약탈한 사실을, 제46장에서는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제47장은 고종의 퇴위사실을, 제48장에서는 정미7조약의 진상을, 제49장에서는 군대해산과 박승환(朴勝煥)의 순국 사실, 제50장에서는 군대해산 후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을, 제51∼58장에서는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상,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의거, 이재명(李在明)의 의거,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등을, 제59∼61장에서는 국권상실 이후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접기/펼치기의의와 평가

한국통사는 국권상실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필자가 투철한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통사로서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서술한 점, 우리나라 근대사를 가장 먼저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자료>

 

한국통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상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우리겨레력사와 문화 > 우리겨레 력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도지  (1) 2020.05.05
규원사화/단기고사  (0) 2019.08.18
신단민사/대동사강  (0) 2018.10.15
삼국유사  (0) 2018.10.02
삼국사기  (0) 2017.03.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