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6)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 본문

안정복은 조선후기 「치통도」·「동사강목」·「천학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2년(숙종 38)에 태어나 1791년(정조 15)에 사망했다. 어려운 초년을 보내며 독학으로 유교 경전과 병서·불교·노자·소설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독서했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5세에 이익의 문인이 되면서 학문이 더욱 깊어졌고 실학적 경세론을 펴기도 했다. 1772년에 세자익위사 관원으로 세손의 교육을 맡은 인연으로 정조 집권 후 지방관으로 나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기회도 가졌다. 천주교가 사회문제가 되자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조선 후기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 한산병은(漢山病隱) · 우이자(虞夷子) · 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 안신행(安信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안서우(安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극(安極)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였다. 고조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다.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더욱 영락한 환경으로 전락하였다. 안정복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처사(處士)로 지낸 부친 안극을 따라 오랜 동안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 결과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소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 · 외가의 족적인 범위 내에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茂朱)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편, 외가인 전라남도 영광에도 부친과 함께 자주 왕래하였다. 외가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관계로 외가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안정복은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안정복의 일가는 1735년 조부의 사망으로, 이듬 해 고향인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慶安面 德谷里: 현재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 덕곡리, 일명 텃골)로 돌아와 살았다. 텃골로 돌아와 ‘순암(順菴)’이라는 소옥(小屋)을 짓고 학문 생활에 몰입하였다.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 음양(陰陽) · 성력(星曆) · 의약(醫藥) · 복서(卜筮)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孫子) · 오자(吳子) 등의 병서, 불교 · 노자(老子) 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1737년에는 중국의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道統圖)』를 지었다. 이듬해에는 『치현보(治縣譜)』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鄕社法)』을 지었다. 그 뒤 1740년 29세에는 안정복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下學持南)』 상 · 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안정복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온 정렬을 기울였던 저술이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井田說)』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內範)』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구해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1775년에 「반계연보(磻溪年譜)」를 찬하였다.
1746년에는 광주 안산면 성촌리(安山面 星村里: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찾아 문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연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익과의 만남은 안정복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익의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진지하게 하였다. 윤동규(尹東奎) · 이병휴(李秉休)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權哲身) · 이기양(李基讓) · 이가환(李家煥) · 황덕일(黃德壹) · 황덕길(黃德吉)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여기에서 형성된 자기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성호를 비롯한 문인들과의 교류에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안정복이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도 이러한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49년 문음(門蔭)직인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해 이듬 해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 해에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해 1756년 「이리동약(二里洞約)」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1759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 1767년에는 중국의 당 왕조의 역사인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저술하는 한편, 1753년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62년에는 이익이 일생 정열을 바쳐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목차 ·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정복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으며,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翊贊)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 · 향약(鄕約) · 향사례(鄕射禮)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司馬所)의 복설 등이다.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보냈다.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 혹은 이택재)라는 재실을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여택재는 그 뒤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말년에는 정주학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의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785년(정조 9)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名分論的)인 위계질서의 옹호이며,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성리학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안정복은 생전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사후인 1801년에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부친의 평생 처사 생활로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하였다.
안정복은 18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익을 만나기 전인 1746년까지는 자신의 학문적인 경지를 스스로 형성해 갔던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와 『하학지남』은 안정복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관정요』는 후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학지남』은 주자의 『소학』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밝히면서 기초학문인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적으로 반박하였다. 1744년에 접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안정복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에 대해 관심을 경주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1746년 이익을 방문해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이익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특히 안정복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인 이병휴 및 경기 안산의 이익의 자인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 이구환(李九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기 남부와 충청도에 거주했고, 전통적으로는 퇴계학통을 이었다. 이들은 영남남인들과도 교류를 유지했는데,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1715년경에 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이 때 접하여 보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정이 · 정호 · 주희 · 이황의 계제적인 이론의 근원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한편,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역사서인 『동사강목』은 유형원→이익→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안정복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다. 따라서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면서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의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상적인 갈등을 보였다. 이에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 · 권철신 등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그 이단성을 경계하였다. 이어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리의 이단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경계시켰다. 따라서 안정복의 역사상의 위치는 성리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안정복은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안정복의 학문적인 성과는 많은 저술로 나타났다. 안정복의 저술은 20여 편이 전하며, 『잡동산이(雜同散異)』나 『사론(史論)』 등은 일정한 형식을 갖춰 정리된 저술은 아니지만, 안정복의 경학관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1)
안정복은 우리 나라의 정통이 단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계통을,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고려 태조라하였다. 위만은 권력을 찬탈한 도적이기에 제외시켰다. 우리 사서에서 단군을 시조로 하고 삼한정통론을 제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아쉬운 대목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 김삼웅 [겨레의 인물 100선 47] 안정복 '삼한정통론' 첫 사학자 안정복
2023. 12. 26.
단재 신채호가 망명길에 나서면서 짊어지고 갔던 유일한 책이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이다. 저자의 후손으로부터 자료를 빌려 손수 필사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저자와 가치에 대해 말했다.
안정복은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백년 이래 유일한 사학전문가라 할 수 있다.(…)연구의 정밀함은 선생의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지리의 잘못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가장 공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숙종 38년 12월 25일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순(百順)이고 호는 순암(順庵)이다. 아버지는 미관말직을 지낸 안극(安極)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참의를 지낸 할아버지(안취)가 울산부사를 지냈다.
안정복은 부모가 제천과 서울, 어머니의 고향인 영광과 울산·무주 등지를 오가며 살았기에 그도 잦은 이사를 하며 새로운 풍물을 접하며 유년기를 보내었다. 15살 때 할아버지가 울산부사를 사임하면서 전북 무주에 은거하여 그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그후 25살이 될 때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두루 배우고 성장하면서 독습으로 주자학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은 이웃에 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과의 만남이었다.
순암이 35세 때인 1746년, 이웃 안산에 사는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을 찾아 나섰다. 젊은 순암을 대한 성호는, 가을 바람과 샅이 같이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순암 역시 그때에야 참다운 스승을 만나 많은 담론을 나누었고 의견을 교환했다.
순암은 학문에 의문이 있을 때에는 직접 찾아 물어보기도 하였고, 편지로 질문하기도 하였다. 성호는 21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다를 때에는 재삼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입장을 취했다.(이이화, <안정복>,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그는 벼슬길보다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호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학문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관직이 있어야 했다. 스승의 추천으로 38살 때에 만녕전 참봉으로 부임하고, 43살 때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그의 가계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계열이어서 능력에 비해 미관말직이었다. 그나마 부친상을 당하면서 관직을 떠나 광주로 퇴거하여 다시 학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역사연구에 매진했다. 우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 등에서 나타난 모화사상을 배격하고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제시하였다.
내가 여러 사서(史書)를 읽어보고, 개연히 바로 잡을 뜻을 가지고, 동사(東史)를 널리 취하고, 중국사에서 동쪽의 일을 기록한 것을 가지고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대저 사가의 대법(大法)은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을 엄히 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전장(典章)을 상고하는 것이다.(<동사강목>)
그는 45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동사강목>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동사강목>의 범례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계통은, 사가가 책 머리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데, <동국통감>은 단군·기자의 사적을 별도의 외기(外記)로 삼았으니 그 의의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정통을 기자에서 시작하고 단군을 기자가 동래(東來)한 아래에 붙였는데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편수 삼진(三晋)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안정복은 우리 나라의 정통이 단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계통을, 단군―기자―마한―신라 문무왕―고려 태조라하였다. 위만은 권력을 찬탈한 도적이기에 제외시켰다. 우리 사서에서 단군을 시조로 하고 삼한정통론을 제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아쉬운 대목은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동사강목>에 담긴 민족사상의 대강을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외래 침략자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을 특히 서술하고, 충신과 명장들의 빛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고구려의 대 수당전쟁과 고려의 대 거란·몽고 전쟁 등에서 조국의 수호를 위한 민중의 분투와 을지문덕·강감찬·서희 등 뛰어난 인물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우리 민족의 용감성을 자랑하는 한편, 신라 통일 이후 문치를 숭상하고 국방에 관심을 돌리지 않아 나라가 약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2. 봉건국가의 대민정책이 착취에만 치중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것을 비평하였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진대법(賑貸法) 시행에 관한 만설(挽說)에서, 무상으로 주는 것은 좋지만 빌려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고, 빌려주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국가의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논파하였다.
또 고려 광종 때의 노비안진법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문종 때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옥사에 분격하여 옥사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과 그 개혁을 주장하였다.(이우성, <해제 동사강목>)
안정복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 사관을 탈피하여 단군을 국조로하는 사관을 정립하면서 <동사강목>을 편찬하였다. 4년여 동안 오로지 여기에 매달렸다. 전체 17권이지만 각 권은 상하로 나누어져 실제는 34책이나 된다. <고려사절요>가 30여 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편찬한 책이 35책인 것에 비해 <동사강목>은 순전히 개인의 힘으로 펴낸 것이다.(2)
오마이뉴스, 김삼웅, '삼한정통론' 첫 사학자 안정복, 2023. 12. 26.
그래서일까. 순암은 <동사강목> ’지리고·강역연혁고정’에서 당시의 조선강역인 8도와 함께 요동과 영고탑의 연혁을 기록했다.
순암은 “요동은 본래 구이(동이)의 땅이었다”고 했으며, “영고탑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차지했다가 요(거란)에 병합됐다”고 소개했다. <동사강목> 수권의 ‘지도’에도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 등의 위치를 표시했다.
영고탑은 현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시절 지명이다.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었던 요충지다. 순암은 훗날에 일어날지 모를 국경선분쟁을 위해 근거사료를 제시해놓은 것이다.
“강역과 경계는 나라에서 자세하게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어두워 잘못이 많으니 만약 사변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개탄할 노릇이다.”
“고려 때 무왕(誣枉·생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움)한 사필(史筆·역사 기록)을 씻는다면 (조선)왕조가 빛날 것 같습니다.”
1781년(정조 5) 정조 임금이 승선(국왕 비서) 정지검(1737~1784)에게 특별한 명을 내렸다. 순암 안정복(1712~1791)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동사강목>의 필사본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이때 순암은 정지검에게 “‘고려 말의 일’을 이제와서는 기휘(忌諱·꺼리고 싫어함)할 만한 이유가 없으니 당시 잘못 기술된 역사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이 말을 반드시 성상(정조)께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순암이 언급한 ‘생사람 잡은 일’은 무엇인가. 우왕(재위 1375~1388)과 창왕(1389~1399)을 공민왕(1351~1374)이 아닌 신돈(?~1371)의 아들·손자(‘신우와 신창’)로 기록한 <고려사>를 일컫는다.
마침 김문식 단국대 교수의 논문(‘순암 안정복의 우왕·창왕 이해’, <성호학보> 24호, 성호학회, 2022년 12월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을 통해 왜 순암이 400년 가까이 ‘조선의 국시’처럼 여겨진 ‘신우·신창’설을 고치고자 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또 단재 신채호(1880~1936)가 왜 1910년 4월 블라디보스톡 망명길에 오르면서 <동사강목> 1권만 들고 갔는지 가늠해본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 맞나
문제의 <고려사>를 보자.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의 역사를 군주의 사적인 ‘세가’에 다루지 않고 ‘열전·반역전’에 신돈-신우-신창으로 이어지게 했다. <고려사>가 세종 연간에 편찬(1449~1451)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신우·신창’설을 주장한 이가 다름 아닌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였기 때문이다.
즉 1389년(창왕 원년)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우왕과 창왕이 쫓겨나 죽임을 당한다. 이때 차기 국왕을 결정하는 논의에서 이성계가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을 촉구한다. “우왕과 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고려사> ‘열전·신우’조)
이성계의 주장대로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손일까. <고려사> ‘세가·공민왕’조의 편찬자는 “자식이 없던 공민왕이 다른 사람(신돈을 가리킴)의 자식(우왕)을 데려다 대군으로 삼았다”는 평론을 달았다. ‘열전·신우’조도 “신돈의 비첩 반야가 모니노(牟尼奴·우왕)를 낳았는데, 공민왕이 자기 자식으로 여겼다”고 언급했다. ‘우왕=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열전·신우전’에 이상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돈의 비첩인) 반야가 낳은 아이를 친구인 능우의 모친에게 맡겼지만 아이가 첫 돌이 되지 않아 죽었다. 능우는 이웃 병졸의 아이를 훔쳐 반야의 아이(모니노·우왕)라고 속였다.”
무슨 소리인가.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해놓고, 다시 이웃집 병졸이 낳은 아이로 고쳐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왕은 신돈의 아들도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공민왕의 직접 발언을 기술한 다음 기사도 헷갈린다.
“공민왕이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가서 그 집 여종에 성은을 입혀 아들(우왕)을 낳았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잘 보호하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역사서, 그것도 같은 ‘열전·신우’조에서 우왕이 ‘신돈→이웃집 병졸→공민왕’의 아들로 둔갑했다가 결국 태조 이성계에 의해 ‘신돈의 아들’로 낙인찍힌다.
■‘우왕=공민왕의 아들’ 주장은 대표적인 직필
<고려사>를 읽은 조선의 식자들은 일관성없는 ‘우왕·창왕’ 기사에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폐가입진’을 주장한 이가 다름아닌 태조 이성계인 이상 대놓고 문제를 삼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고려사>의 ‘폐가입진’설을 둘러싼 수근거림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우선 퇴계 이황(1501~1570)이 재미있는 평가를 내렸다. 즉 제자들이 “(조선조 성리학의 사표인) 포은 정몽주가 신씨(우·창왕)의 조정에서 관리로 활동함으로써 충절을 잃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황은 “왕위를 계승한 것은 신씨지만 왕씨의 종사가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몽주가 벼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나라 여씨 등이 이성(異姓)으로서 권력을 휘두른 것과 같다”고 옹호했다. 진나라 여씨는 진시황을 가리킨다.
원래 진나라 군주의 성씨는 영(영)씨인데, 진시황이 본래 ‘여불위(呂不韋)’라는 인물의 소생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진시황’이 ‘영정(영政)’이 아니라 ‘여정(呂政)’으로서 즉위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진나라의 왕통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몽주가 우왕·창왕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변호한 것이다.
이황의 변론은 성리학의 기틀을 쌓은 정몽주를 감쌌지, ‘우·창왕=신씨’라는 <고려사>의 기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왕·창왕이 비록 신씨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고려의 왕통이 끊긴 것은 아니라고 보기는 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알려진 상촌 신흠(1566~1628)은 한발 더 나아갔다.
대표적인 이가 상촌 신흠(1566~1628)이다.
신흠은 “고려말 인물인 원천석(1330~?)이 ‘우왕=공민왕의 아들’이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면서 “이것이 가장 뛰어난 직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고려말 정도전(1342~1398)과 윤소종(1345~1393)의 무리가 ‘우왕=왕씨’라 하면 역적으로 낙인찍어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역사서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임상덕(1683~1719)의 <동사회강>은 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 이후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사의 각주에서 ‘신우·신창’이 아니라 ‘폐왕 우·폐왕 창’이라는 절충의 표현을 썼다.
임상덕 보다 한 세대 뒤에 깃발을 들고 나선 이가 바로 순암 안정복이다. 순암은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과 야은 길재(1353~1419)가 우왕을 위해 3년상을 지냈고, 우왕의 아들(창왕)을 국왕으로 옹립한 것을 예로 들었다.
“천명을 받아 건국한 조선에서 왕씨·신씨가 무슨 대수인가. 조준(1346~1405)·정도전 무리가 옛 신하들을 넘어 뜨리려고….”
그랬으니 정조가 “<동사강목>을 가져와보라”는 명을 내렸을 때 순암이 “제발 우·창왕대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동사강목>은 우·창왕을 ‘전 폐왕 우’와 ‘후 폐왕 창’으로 표현하고 ‘공민왕’ 다음의 정사로 다루었다.
■안정복이 ‘골골 80’했던 이유
사실 순암은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은 약골이었다. 40대들어 자주 혼절하고 언어장애까지 일으키는 병에 걸려 3번이나 유서를 쓰는 등 악전고투했다. 게다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재야사학자’의 향기가 짙게 풍긴다.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35살이 돼서야 성호 이익(1681~1763)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평생 과거시험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눈에 들어 세손 시절부터 3차례나 부름을 받고 출사했다. 그것도 61살의 나이에 처음 세손을 지근거리에 모시게 되었으니 참 기막힌 인연이다. 그런 순암이 온갖 병치례의 와중에도 ‘골골 80’ 했던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내용이 소략해서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고, <고려사>는 내용도 번잡하고 요점이 적으며…역사가는 계통을 밝히고(明統系), 반역을 엄하게 다루고(嚴簒逆), 옳고 그름을 바르게 하며(正是非), 충절을 포양하고(褒忠節), 전장(국가의 통치제도)을 자세히 서술하는 것(詳典章)이다.”(<동사강목> ‘자서’)
이것이었다. 제대로된 역사서를 편찬하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다.
순암의 <동사강목>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바탕으로 주자(1130~1200)가 편찬한 <통감강목>을 벤치마킹했다.
주자는 특히 “역사서에는 난신적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엄정한 포폄(평가)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통감강목>은 주-진(秦)-한-진(晋)-수-당나라 등 단지 몇나라만을 정통왕조로 취급하고 있다. 나머지는 열국·찬적·건국·무통·불성군·원방소국 등 7가지로 분류했다. 한나라의 여후와 왕망, 당나라의 무측천 등은 왕위를 찬탈한 ‘찬적’으로 분류했다.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을 엄격히 함으로써 강상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단군조선을 둘러싼 순암의 고민
순암의 <동사강목>도 그랬다. 조선 역사의 정통계보는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문무왕 9년(669년)부터의 신라-태조 19년(936년)부터의 고려-조선’이다. 그외에 정통으로 볼 수 없는 왕조를 ‘무통·참국·도적·소국’ 등으로 분류했다.
순암은 ‘단군조선’을 정통의 첫머리로 삼았다. <동사강목>의 ‘동국역대전수도’와 ‘단군·기자 전세도’ 등은 ‘단군조선’부터 시작한다.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첫 군주인 단군이 신성한 덕을 베풀었기 때문”(<동사강목> 제1상)이라 했다.
여기서 착안점이 있다. <동사강목>이 단군조선을 ‘정통의 첫머리’로 두었으면서 정작 본문에서는 ‘기자조선’부터 서술했다는 것이다. 즉 <동사강목> ‘제1상’은 ‘기묘년 조선 기자 원년·주 무왕 13(기원전 1122)’부터 시작한다.
‘단군조선’ 기사는 ‘기자조선’을 설명하면서 두번째 기사에 상당히 길게 붙여놓았다.
여기서 순암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순암 본인은 ‘정통 단군조선’을 본문의 첫머리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단군·기자조선의 이야기를)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 ‘외기’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멘트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순암은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그런 순암이 불가(일연 스님)의 입장에서 쓴 <삼국유사> 내용을 고증없이 담아내기가 주저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순암은 <삼국유사>의 환인과 환웅의 이야기는 서술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다.
“단군이라는 신인(神人)이 스스로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왔을 뿐 환인·환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환인제석’은 불경(법화경)에 등장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삼국시대는 계통 없는 시대”
앞서 밝혔듯이 순암은 ‘처음으로 문물을 일으켜 신성한 정치를 한 기자’를 정통으로 여겼다. “기자가 단군조선이 쇠망한 지 196년 후 나타나 ‘홍범구주(洪範九疇·세상을 다스리는 9가지 도리)’에 따라 신성한 교화의 정치를 폈다”는 것이다.
사실 기자라는 인물은 “고구려는 음식을 먹을 때 기자의 유풍이 남아있으며, 기자신을 모시기도 한다”는 <구당서> ‘동이전’의 기록처럼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역사에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성리학의 발전과 함께 소중화 의식이 강했던 조선 때 더더욱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순암은 ‘위만조선’은 ‘참국(僭國)’으로 평가절하했다. 정통(기자조선)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순암은 위만조선 대신 마한을 적통으로 삼았다. “위만의 반란으로 남쪽으로 망명한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고 금마군에 도읍했다”는 기원전 192년을 ‘마한왕 기준 원년’으로 삼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통인 기자의 제사’를 이은 기준(준왕)이 적통이라는 것이다.
순암이 본 마한의 정통기간은 기준 원년(기원전 192년)~온조 27년(기원후 9년)까지 202년이다.
백제 온조왕의 마지막 공격으로 마한의 원산과 금현이 항복한 때(기원후 9)를 마한의 멸망연도로 본 것이다.
반면 마한정통론에 따라 마한 멸망 전인 기원후 9년까지의 초기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은 ‘참국’으로 분류됐다.
또 기원후 10년(마한 멸망) 이후~668년(고구려 멸망)까지의 삼국시대를 ‘무통’으로 분류했다. 삼국이 팽팽한 접전을 벌였던 시기니 만큼 ‘무통(無統)’ 즉 ‘정통이 없던 시기’라는 것이다.
이밖에 918년(고려 태조 원년)~935년(후삼국 통일)까지의 고려 18년은 ‘참국(僭國)’으로 분류했다. 왕건이 ‘도적’인 궁예의 부하였을 뿐 아니라 여전히 정통인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야 ‘겨우’ 정통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밖에 진한·변한·예·맥·옥저·가야·발해 등은 소국(부용국)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봉은 ‘도적’으로 각각 분류됐다.
■“애석하다 요동을 잃다니…”
물론 300년 전의 시대를 살았던 순암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이 100% 옳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역사와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동이의 옛 땅인) 요동을 회복하지 못해 압록강이 커다란 깰 수 없는 경계가 되어 마침내 천하의 약한 나라가 되었구나. 애석하다.”(‘지리고·요동군고’)
천하를 더불어 다투는 땅(요동)인데, 세차례의 기회(통일신라 문무왕·고려 태조·조선 태조 때)를 모두 잃었음을 한탄했다.
백두산정계비를 두고도 코멘트 했다.
“1712년(숙종 38) 백두간 꼭대기에 돌을 세워놓고 분계강의 경계로 삼았다. 분계강은 두만강 북쪽 300여 리에 있는데 그 때의 당국자들이 깊은 생각없이 공공연히 그곳을 버려 이제 야인의 사냥터가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순암집> 권7)
그래서일까. 순암은 <동사강목> ’지리고·강역연혁고정’에서 당시의 조선강역인 8도와 함께 요동과 영고탑의 연혁을 기록했다.
순암은 “요동은 본래 구이(동이)의 땅이었다”고 했으며, “영고탑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차지했다가 요(거란)에 병합됐다”고 소개했다. <동사강목> 수권의 ‘지도’에도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표기하면서도 그 북쪽에 영고탑 등의 위치를 표시했다.
영고탑은 현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성(寧安縣城)의 청나라 시절 지명이다. 청나라의 발상지이자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었던 요충지다. 순암은 훗날에 일어날지 모를 국경선분쟁을 위해 근거사료를 제시해놓은 것이다.
“강역과 경계는 나라에서 자세하게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어두워 잘못이 많으니 만약 사변을 당하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개탄할 노릇이다.”
어떤가. 단재 신채호 같은 이가 눈물을 머금고 망명길에 나서면서 ‘원픽 서적’으로 동사강목 한 권을 들고 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이 기사를 위해 김문식 단국대 교수와 강세구 순암 안정복 연구가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현상철 성균관대출판부 기획팀장, 이광훈 광주시청 문화예술과 주무관이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3)
<참고자료>
강세구,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연구>(순암연구 총서1), 순암선생 탄신 300주년 기념사업회, 성균관대 출판부, 2012
김문식, ‘순암 안정복의 우왕·창왕 이해’, <성호학보> 24호, 성호학회, 2022
김문식, ‘순암 안정복의 정조 보좌 활동’, <성호학보> 23호, 성호학회, 2021
국립중앙도서관, <실학자의 서재, 순암안정복의 책바구니>(순암 안정복 탄신 300주년 특별전 도록), 2012
경향신문,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기자, '망명길' 신채호가 짊어지고간 '원픽' 역사서…"생사람 잡지마라"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23. 2. 14.
<자료출처>
(1) 안정복(安鼎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삼한정통론' 첫 사학자 안정복 (daum.net) 2023. 12. 26.
(3) '망명길' 신채호가 짊어지고간 '원픽' 역사서…"생사람 잡지마라"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 2023. 2. 14.
<참고자료>
동사강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사강목(東史綱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안정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허연의 책과 지성] 순암 안정복 (1712~1791) (daum.net) 2019. 8. 23.
안정복과 이익의 편지로 역사서 '동사강목'을 재구성하다 (daum.net) 2017. 7. 3.
[READERS CAFE]역사서의 본보기 '동사강목' (daum.net) 2015. 10. 15.
중국 사관의 봉인 깬 '동사강목' 재조명한다 (daum.net) 2012. 11. 8.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1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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