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7) 한백겸(韓百謙)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본문
한백겸(1552년(명종 7)~1615년(광해군 7))은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강원도안무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천군수(文川郡守)한여필(韓汝弼)이고,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호조참의 등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江原道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거하였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다.
또한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수정해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다. 그 결과 『동국지리지』의 저술과 『기전고(箕田考)』 가운데 실린 「기자도(箕子圖)」·「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밖에 저서로 『구암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1)
동국지리지는 1615년경 한백겸이 부족국가·삼국·고려에 관하여 서술한 역사 지리서이다. 1책 60장의 목판본이다. 내용은 부족국가·삼국·고려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로 삼국과 고려의 수도·봉토·형세·국경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부족국가에서는 우리나라 자료 인용이 없으며 단군조선에 대한 서술도 없다.
삼국시대 부분에서는 『동사』·『고구려지』·『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가 인용되고 있다. 고려시대 부분에서는 한두 차례 외에 대부분 사서 인용 없이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1책 60장. 목판본. 내용은 중국 사서(史書)의 열전(列傳)에 기록된 부족국가에 대한 서술을 인용하여 쓴 부분, 삼국(三國)에 대한 서술 및 부록으로 붙인 서술 부분, 고려에 대한 서술 부분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부족국가에 대한 기록은 『전한서(前漢書)』의 조선전(朝鮮傳), 『후한서(後漢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 · 동옥저전(東沃沮傳) · 예전(濊傳) · 부여전(扶餘傳) 등의 원전을 약간 생략하여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사론적(史論的) 성격의 견해는 우안(愚按: 자신의 생각이나 안(案)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표현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부족국가의 위치 · 강역 · 종족 및 사실(史實)의 신빙성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삼국에 관한 부분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순서로 국도(國都) · 봉강(封疆) · 형세(形勢) · 관방(關防)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국도는 각 나라의 옛 국도를 시대순으로 쓰고 그 국도를 잡게 된 연혁을 밝히고 있는데, 첫 국도에는 개국 전설을 싣고 마지막 국도에는 왕들이 몇 대에 걸쳐 몇 년만에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봉강 부분에서는 그 나라의 영역 내에 흡수된 부족국가나 역사적 유래가 있는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있다.
삼국의 형세 · 관방에 대한 부분에서는 당시의 역사에서 전투 지역으로서 요충지였던 강(江) · 현(峴) · 영(嶺) · 성(城) · 책(柵) · 진(鎭)이 적혀 있고,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저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려시대에 관해서는 국도에서 개성부(開城府) · 서경(西京) · 남경(南京) · 동경(東京) · 강도(江都) · 중흥전(重興殿) · 신경(新京) · 북소궁(北蘇宮)에 대한 설명과 봉강 · 형세 · 관방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 책에 인용된 사서는 부족국가에 대해서는 주로 『전한서』 · 『후한서』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이며, 그 밖에 『위씨춘추(魏氏春秋)』 · 『두씨통전(杜氏通典)』 · 『동관서(東觀書)』 등이 인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군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단군조선에 대한 서술은 없다.
삼국시대 부분에서는 『동사(東史)』,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지(高句麗志)』, 『고려사』 · 『동국여지승람』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송사(宋史)』 · 『한서(漢書)』 등이 인용되었으나, 사서의 인용 없이 서술한 부분이 많다. 고려시대에 대하여서는 『고려사』 본기(本紀), 『여지승람』의 인용이 한두 차례 있을 뿐 사서의 인용 없이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즉,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의 지리지(地理志),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疆界考)』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疆域考)』,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의 지리고(地理考)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자료출처>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634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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