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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6) 북애자(北崖子) 규원사화(揆園史話)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1)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6) 북애자(北崖子) 규원사화(揆園史話)

대야발 2025. 3. 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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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애자(北崖子)는 조선후기 『규원사화』의 저자로 알려진 은사(隱士)이다.

북애는 별호이며, 본명 등은 미상이다. ≪규원사화 揆園史話≫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전국 각처를 순방하였다.

 

 

이 때 지리와 역사, 특히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나 그 강역(疆域)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그의 저서로 전하여지고 있는 ≪규원사화≫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와 중국의 사서(史書)를 참고로 하여 단군고사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고조선의 실존과 그 고증에 기여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그는 모화사상에 물들어 사대주의만을 능사로 알았던 그 당시 통치자들의 기존 역사관을 과감히 비판하고 새로운 민족사관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1)

 

 

 

 

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 말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고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간단하게 언급되었다.(2)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1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규원사화》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일부가 인용된 것이 최초로 여겨진다. 그 내용은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도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위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2년에 고서심의위원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의 3인이 심의하여 조선 왕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이라 판정하였다.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 조판기(肇判記)
  • 태시기(太始紀)
  • 단군기(檀君紀)
  • 만설(漫說)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淸平 李茗)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원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원사화서

서문에 해당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다.

 

조판기

〈조판기〉는 수백만 년간의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시기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며 1만 1천 년에 해당되는 ‘궐천년’ 간의 일이 설명된다.

 

탁록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 해 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

 

단군기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세우고 이후의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리는 1천 2백여 년간의 치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달이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으로 지금의 지린시 방면'이라는 북애자의 의견이 포함되었다.

 

〈단군기〉의 각 임금의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다.

  1. 단군(檀君) 임금 : 재위 93년 - 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우수하의 벌판에 수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임검성(壬儉城)이라 하였다.
  2. 부루(夫婁) 임금 : 재위 34년 - 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3. 가륵(嘉勒) 임금 : 재위 51년 - 기원전 2206년 즉위
  4. 오사(烏斯) 임금 : 재위 49년 - 기원전 2155년 즉위
  5. 구을(丘乙) 임금 : 재위 35년 - 기원전 2106년 즉위
  6. 달문(達文) 임금 : 재위 32년 - 기원전 2071년 즉위
  7. 한율(翰栗) 임금 : 재위 25년 - 기원전 2039년 즉위
  8. 우서한(于西翰) 임금 : 재위 57년 - 기원전 2014년 즉위
  9. 아술(阿述) 임금 : 재위 28년 - 기원전 1957년 즉위
  10. 노을(魯乙) 임금 : 재위 23년 - 기원전 1929년 즉위
  11. 도해(道奚) 임금 : 재위 36년 - 기원전 1906년 즉위
  12. 아한(阿漢) 임금 : 재위 27년 - 기원전 1870년 즉위
  13. 흘달(屹達) 임금 : 재위 43년 - 기원전 1843년 즉위
  14. 고불(古弗) 임금 : 재위 29년 - 기원전 1800년 즉위
  15. 벌음(伐音) 임금 : 재위 33년 - 기원전 1771년 즉위
  16. 위나(尉那) 임금 : 재위 18년 - 기원전 1738년 즉위
  17. 여을(余乙) 임금 : 재위 63년 - 기원전 1720년 즉위
  18. 동엄(冬奄) 임금 : 재위 20년 - 기원전 1657년 즉위
  19. 구모소(緱牟蘇) 임금 : 재위 25년 - 기원전 1637년 즉위
  20. 고홀(固忽)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612년 즉위
  21. 소태(蘇台) 임금 : 재위 33년 - 기원전 1601년 즉위
  22. 색불루(索弗婁) 임금 : 재위 17년 - 기원전 1568년 즉위
  23. 아물(阿勿)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551년 즉위
  24. 연나(延那) 임금 : 재위 13년 - 기원전 1532년 즉위
  25. 솔나(率那) 임금 : 재위 16년 - 기원전 1519년 즉위
  26. 추로(鄒盧)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503년 즉위
  27. 두밀(豆密) 임금 : 재위 45년 - 기원전 1494년 즉위
  28. 해모(奚牟) 임금 : 재위 22년 - 기원전 1449년 즉위
  29. 마휴(摩休)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427년 즉위
  30. 나휴(奈休) 임금 : 재위 53년 - 기원전 1418년 즉위
  31. 등올(登兀) 임금 : 재위 6년 - 기원전 1365년 즉위
  32. 추밀(鄒密) 임금 : 재위 8년 - 기원전 1359년 즉위
  33. 감물(甘勿)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351년 즉위
  34. 오루문(奧婁門) 임금 : 재위 20년 - 기원전 1342년 즉위
  35. 사벌(沙伐)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322년 즉위
  36. 매륵(買勒) 임금 : 재위 18년 - 기원전 1311년 즉위
  37. 마물(麻勿) 임금 : 재위 8년 - 기원전 1293년 즉위
  38. 다물(多勿)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285년 즉위
  39. 두홀(豆忽) 임금 : 재위 28년 - 기원전 1266년 즉위
  40. 달음(達音) 임금 : 재위 14년 - 기원전 1238년 즉위
  41. 음차(音次) 임금 : 재위 19년 - 기원전 1224년 즉위
  42. 을우지(乙于支) 임금 : 재위 9년 - 기원전 1205년 즉위
  43. 물리(勿理) 임금 : 재위 15년 - 기원전 1196년 즉위
  44. 구홀(丘忽) 임금 : 재위 7년 - 기원전 1181년 즉위
  45. 여루(余婁) 임금 : 재위 5년 - 기원전 1174년 즉위
  46. 보을(普乙) 임금 : 재위 11년 - 기원전 1169년 즉위
  47. 고열가(古列加) 임금 : 재위 30년 - 기원전 1158년 즉위해서 1128년까지 30년간 통치하였다.
  •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1205년간 지속되었다.

 

만설

북애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풀어 서술하였다.

 

진위논란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른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년간 47대 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

 

위서론

 

《규원사화》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환단고기》류'로서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한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진서론

 

 

위서론에 반박하고 진서임을 주장하여 《규원사화》의 내용의 실제 역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규원사화》는 다른 단군관계비사들에 비해 과장이나 가필이 적다고 판단, 일부 내용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라는 설에 동의하지만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1975
  •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1981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비주류사상인 선가(仙家)의 역사인식에 주목하였다.

  • 심백섭,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3

 

국립중앙도서관의 인증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귀중본 《규원사화》의 지질을 비롯한 사항을 심의한 결과,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9] 그러나 이병도, 조인성, 송찬식 등 한국사학계의 상당수 학자들은 여전히 위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2003년 3월 서지 전문가들이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재감정을 실시한 바 있는데 대체적으로 그것이 진본이 아니며 일제 때 필사되어 제본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

 

위서론 및 반론의 주장

다음은 현재까지 제시되어 있는 규원사화의 위서론 및 반론이다.

위서론                                                          반론

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특히 文化는 당시의 의미인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culture의 의미로 쓰였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13] 조인성 교수가 말하길 先民,民氣라는 단어는 중국 고전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고, 天主또한 숙종 이전에 알려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 교수의 [culture가 문화로 번역되어 사용된 것이 일본에서부터]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숭녕 박사의 [한국언어발달사]를 제시했으나,일제 이후 각 분야에 새로운 일본식 한자어가 침투했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 [culture를 뜻하는 문화라는 글자가 원래 일본에서 사용되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주장과 거리가 있다.
후대에 출간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사>에서 잘못 인용한 내용이다. 《규원사화》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럼 둘 중에 하나는 다른 하나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해동역사》에는 전거가 된 문헌을 모두 밝히고 있지만 《규원사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전거가 된 다른 문헌에서 이 잘못된 인용구를 찾을 수 없다.[14] 규원사화의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기존의 역사책을 인용하여 내용을 서술하고, 쟁점이 되는 사항을 비교한 다음,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순서로 책을 쓰고 있다. 규원사화는 인용할 때 대부분 曰을 넣고 이따금 按,云으로 표시한다. 조인성 교수의 의견처럼 고려사를 인용했다면, [高麗史 曰] 또는 [高麗史 云]으로 시작되는 [고려사에 의하면]의 형태를 띄어야한다. 하지만[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라는 문장형식을 띄고 있고, [의하면]에 해당하는 云자가 白頭山外居之 다음에 씌여 있다. 해동역사에서는[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 女眞 於白頭山外居之]로 씌여있는데, 여기에도 고려사 다음에 云이 들어있지 않다. 규원사화나 해동역사의 저자들이 직접 고려사를 인용하지 않고, 고려사 광종 10년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 라고 쓰인 다른 책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15]
저자는 〈만설〉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으나 숙종 원년은 전란과 같은 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문맥을 고려하면 문제 없는 내용 전개이다. 빼앗긴 강토는 발해의 영토인 만주와 요동을 의미한다.
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다르다. 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 산속에 숨겨둔 도교 계열의 책이어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없다.
  • 고려 시대에 저술된 《삼국유사》에서도 '治'자는 쓰이고 있다.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이후 2백여 년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자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애자의 생각을 적은 만설에 '경주의 첨성대는 천수백 년이 지났는데 우뚝 솟아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규원사화가 저술했다고 주장하는 시기는 1675년이고 첨성대는 선덕여왕대(632년~647년)에 건립 되었으니 맞지 않다. 송호정 교수가 말하기를 [관자23권][경중갑]편에서 조선이 제나라와 8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거리는 8000리가 안되는데,이 말은 곧, 고전 특유의 과장법으로 그만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16] 위의 예에서 보듯이, 북애자의 [천수백년이 지났다는] 말 또한 과장법으로 오래되었다라는 뜻이다.
1889년 일제 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만주지지(滿洲地誌)》를 구절을 인용한 1914년에 김교헌이 쓴 《신단실기》의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을 가지셨으나 그 형제를 드러내지 않고 최상지천에 앉아 계시니(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구절이 《규원사화》에 들어있다.[17]  
 
역사적 인식

민족주의사학과 관련하여 민족 중심의 역사 이해, 사대모화사상의 비판, 북방 중심의 역사 인식, 단군의 민족의 기원으로서의 인식 등과 같은 역사적 인식을 주목하기도 한다.(2)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1)단군정신 일깨운 종교사화서 『규원사화』

2022.06.28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19) 『규원사화(揆園史話)』

 

『규원사화』는 1675년(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서문(序文)과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揆圓)’이라는 이름은 저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라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강력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었지만, 저자는 유학자들은 주체성 없는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 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라 주장한다.

우선 이 책을 형태서지학적으로 살펴보자.

 

가. 『규원사화』의 형태서지학적 검토

 

 

『규원사화』 개장한 표지, 최고본,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국중본). 중국식(中國式)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 국중본의 원래의 앞표지. 사침선장의 흔적과 서명 일부가 보인다. 능화문 흔적이 없고, 표지도 중국 종이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는 서문 3장과 본문 68장으로 이루어진 고서이다. 한 장의 중심부를 접어 판심(版心)을 만들며 장수(張數)를 적고, 접힌 반면(半面)의 종이에는 붓으로 10행의 칸을 대충 그린 후, 한 칸에 20자를 적어 넣었다. 즉 이 책은 10행20자본으로, 모두 26,814자로 되어있다.

책의 목차(目次)는 아래와 같다.

 

揆園史話序 1~3장(5면)
(이후 본문의 장 번호를 다시 1번으로 시작함)
揆園史話卷之 (지운 흔적 있음) (본문 1번 장 앞면의 1행)
一. 肇判記 (본문 1번 장 앞면의 2행~본문 3번 장 앞면의 1행)
二. 太始紀 (본문 3번 장 앞면의 2행~본문 13번 장 앞면의 2행)
檀君記 (본문 13번 장 앞면의 3행~본문 49번 장 앞면의 6행)
漫說 (본문 49번 장 앞면의 7행~본문 68번 정 앞면 1행)

 

이 목차에서 “一. 肇判記”와 “二. 太始紀”에서는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데, “檀君記”와 “漫說”에서는 일련번호를 적어 넣지 않았다. 이것은 내용서지학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문제점을 유추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중본 『규원사화』 이외의 다른 이본(異本)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국중본 『규원사화』의 형태는, 근래에 책 전장(全張)에 걸쳐 얇은 저지(楮紙)로 배접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오침선장(五針線裝)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고, 국중본 『규원사화』는 능화문이 들어간 새로운 표지로 개장했음에도, 개장하기 이전의 원 표지는 능화문(菱花紋)이 없다. 즉 개장(改裝)하면서 사침선장을 한 것은 개장하기 이전부터 사침선장본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중본 『규원사화』의 바탕 종이는 저지(楮紙, 닥종이)나 피지(皮紙)가 아니라 중국산 선지(宣紙)의 특성을 보인다. 즉 닥의 섬유질이 안 보이고 있으므로, 나는 국중본 『규원사화』는 중국산 종이에 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국중본의 필체는 다른 『규원사화』보다는 예상외로 훨씬 양호한 필체였다. 그런데 필사(筆寫) 시(時)의 오기(誤記)를 교정한 것을 보면, 이 책은 초고(初稿)이거나 원저자(原著者)의 자필본(自筆本)이 아니다. 이 책은 기존의 책을 베껴 쓴 것이다.

 

 

『규원사화』 「서문」 끝의 기명(記名) 부분, ‘규원초당’에서 ‘규(揆)’자를 틀리게 썼다가 수정하고 있다. 원저자가 자신의 기명을 직접 썼다면 좀처럼 잘못 쓸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이러한 수정된 예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예를 들자면, 저자가 자신의 기명(記名)을 쓰면서 잘못 써서 수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국중본 『규원사화』의 서문 마지막에 “상지이년을묘삼월상한북애노인서여규원초당(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北崖老人書于揆園草堂)”이라 하고 있는데, “규(揆)”자를 수정을 거듭한 흔적이 보인다. “규”자를 잘못 써서 고쳤었다가 다시 종이를 잘라 붙인 후에 “揆”라 쓴 것이다. 본문 33장 뒷면 7행19번째 자를 “교(敎)”라고 썼다가 면(面) 천부(天部)에 “교(交)”라고 써서 교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베껴 쓰기 실수를 보면 국중본은 사본(寫本)이지,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 같이 1675년에 쓰인 원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국중본의 필체를 보면 상상외로 매우 감각이 좋다. 누군가가 상당한 공부를 한 인물이 베껴 쓴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까지 『규원사화』에 대해서는 이러한 형태서지학적 검토가 전혀 시도되지 않았는가? 아니면 검토한 연구자가 있으나 발표를 애써 외면한 것일까? 나는 후자일 것으로 본다. 발표해 보았자 괴롭힘을 당하여 귀찮게 되었을 것이다.

 

나. 『규원사화』의 내용서지학적 검토

 

『규원사화』의 저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에 청명산인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라고 주장하는데, 『진역유기』는 고려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강하게 쓰인 책이라고 주장한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 5월 26일 戊子 3번째 기사에 팔도의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私處)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는데, 그 대목에서 『조대기』란 서명이 우리 역사상 단 한 번 등장한다. 이를 두고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지만, 만약 『규원사화』가 후일 저술된 책으로 규명한다면 『규원사화』와 『조대기』의 연결성은 허구가 된다.

 

내가 보기에는 『규원사화』의 편자(編者)는 북애자 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세 사람 정도가 나누어서 편술(編述)한 것으로 여겨진다. ①서문의 저자가 있고, ②「조판기」와 「태시기」의 저자가 있으며, ③「단군기」와 「만설」의 저자가 달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서문의 저자가 가장 늦게 개입한 것으로 본다.

 

(1) 『규원사화』 「서문」의 문제점

 

『규원사화』 「서문」 첫 면, 최고본,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국중본). 실물은 예상보다는 매우 양호하였다. 저지(楮紙)로 배접을 하였고, 원(原) 지면(紙面)에서 닥 섬유를 발견할 수 없는 중국산 선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치는 양호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역사 서술에서 기년법을 쓸 때 조선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쓰고, 일본은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이다. 『규원사화』를 검토하면서 내용서지학적 측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문에서의 기년(紀年) 문제이다. “상지이년을묘삼월상한북애노인서여규원초당(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北崖老人書于揆園草堂)”이리고 한 부분으로, 제2기 후기의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이 서문의 기년(記年)을 1675년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상지이년’과 ‘을묘’년은 일치하지 않고 서로 다른 연도가 된다. ‘을묘’는 1675년이 맞다. 그러나 ‘을묘’는 ‘숙종1년’이다. ‘을묘’를 ‘상지’로 할 경우에는 ‘상지일년’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상지이년’이라면 ‘병진(1676)’이 된다. 즉 『규원사화』 「서문」의 저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기년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이제 기년법을 언급하고자 한다. 『춘추』에 의하면, 선왕(先王)이 죽은 뒤 그해를 새왕의 원년(元年)으로 치지 않고 다음 해를 원년으로 쳤는데, 이는 선왕의 뜻을 이루고 중도에서 바꾸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사용하여 앞의 왕이 죽은 해에 달(月)이 바뀌면 새로 즉위한 왕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시대까지도 그대로 유월칭원법을 사용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춘추』를 따라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새 왕이 즉위한 해에는 앞 왕의 연호를 그대로 쓰고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했다.

나는 북애자를 의문의 인물로 판단한다. 조선시대의 기년법이 유년칭원법이었음을 볼 때 ‘북애자’란 인물은 조선인이 맞는가? 아니면 가공한 인물인가?

 

또한 『규원사화』의 서문에는 이 책을 1675년으로 볼 경우 당시의 시제(時制)가 동떨어지는 표현이 일부 있다. 그 부분은 이미 학계에서 지목한 바 있어 여기에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2) 『규원사화』의 「조판기」와 「태시기」

 

 

『규원사화』 「1. 조판기」, 국중본. 첫 행에 “揆園史話卷之”라하고 한 글자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다음 행에 “一 肇判記”라 하였는데, 이는 이 책은 처음 구성할 때 4권1책으로 구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조판기」는 태고적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고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내용이 『성경전서』의 「창세기」 천지창조와는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마치 그처럼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동아시아의 철학과 설화가 『성경전서』 「창세기」 천지창조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즉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규원사화』의 「조판기」는 개신교가 전래한 이후의 저술로 판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규원사화』 「2. 태시기」, 국중본. “二 太始紀”라 하였는데, ‘조판기’처럼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태시기」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창조한 후,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천왕(桓雄天王,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탁록(涿鹿)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 해 동안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 해 만에 열두(12) 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설명하였다.

 

즉 『규원사화』의 「태시기」는 중국의 신화 및 전설적 사화(史話)를 다룬 고문헌을 『규원사화』 아래에 두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조판기」와 「태시기」는 중국사와 조선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의 편술(編述)로 판단된다.

 

(3) 『규원사화』의 「단군기」

 

『규원사화』 「단군기」, 국중본.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임금(壬儉)들의 치적을 아래와 같이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1. 단군(檀君) : 재위 93년-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
2. 부루(夫婁) : 재위 34년-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3. 가륵(嘉勒) : 재위 51년-기원전 2206년 즉위
4. 오사(烏斯) : 재위 49년-기원전 2155년 즉위
5. 구을(丘乙) : 재위 35년-기원전 2106년 즉위
6. 달문(達文) : 재위 32년-기원전 2071년 즉위
7. 한율(翰栗) : 재위 25년-기원전 2039년 즉위
8. 우서한(于西翰) : 재위 57년-기원전 2014년 즉위
9. 아술(阿述) : 재위 28년-기원전 1957년 즉위
10. 노을(魯乙) : 재위 23년-기원전 1929년 즉위
11. 도해(道奚) : 재위 36년-기원전 1906년 즉위
12. 아한(阿漢) : 재위 27년-기원전 1870년 즉위
13. 흘달(屹達) : 재위 43년-기원전 1843년 즉위
14. 고불(古弗) : 재위 29년-기원전 1800년 즉위
15. 벌음(伐音) : 재위 33년-기원전 1771년 즉위
16. 위나(尉那) : 재위 18년-기원전 1738년 즉위
17. 여을(余乙) : 재위 63년-기원전 1720년 즉위
18. 동엄(冬奄) : 재위 20년-기원전 1657년 즉위
19. 구모소(緱牟蘇) : 재위 25년-기원전 1637년 즉위
20. 고홀(固忽) : 재위 11년-기원전 1612년 즉위
21. 소태(蘇台) : 재위 33년-기원전 1601년 즉위
22. 색불루(索弗婁) : 재위 17년-기원전 1568년 즉위
23. 아물(阿勿) : 재위 19년-기원전 1551년 즉위
24. 연나(延那) : 재위 13년-기원전 1532년 즉위
25. 솔나(率那) : 재위 16년-기원전 1519년 즉위
26. 추로(鄒盧) : 재위 9년-기원전 1503년 즉위
27. 두밀(豆密) : 재위 45년-기원전 1494년 즉위
28. 해모(奚牟) : 재위 22년-기원전 1449년 즉위
29. 마휴(摩休) : 재위 9년-기원전 1427년 즉위
30. 나휴(奈休) : 재위 53년-기원전 1418년 즉위
31. 등올(登兀) : 재위 6년-기원전 1365년 즉위
32. 추밀(鄒密) : 재위 8년-기원전 1359년 즉위
33. 감물(甘勿) : 재위 9년-기원전 1351년 즉위
34. 오루문(奧婁門) : 재위 20년-기원전 1342년 즉위
35. 사벌(沙伐) : 재위 11년-기원전 1322년 즉위
36. 매륵(買勒) : 재위 18년-기원전 1311년 즉위
37. 마물(麻勿) : 재위 8년-기원전 1293년 즉위
38. 다물(多勿) : 재위 19년-기원전 1285년 즉위
39. 두홀(豆忽) : 재위 28년-기원전 1266년 즉위
40. 달음(達音) : 재위 14년-기원전 1238년 즉위
41. 음차(音次) : 재위 19년-기원전 1224년 즉위
42. 을우지(乙于支) : 재위 9년-기원전 1205년 즉위
43. 물리(勿理) : 재위 15년-기원전 1196년 즉위
44. 구홀(丘忽) : 재위 7년-기원전 1181년 즉위
45. 여루(余婁) : 재위 5년-기원전 1174년 즉위
46. 보을(普乙) : 재위 11년-기원전 1169년 즉위
47. 고열가(古列加) : 재위 30년-기원전 1158년 즉위~1128년까지 30년간 통치.

 

 

이상 단군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1205년간 지속되다가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단군기」의 기년법을 분석하여 보면, 「단군기」는 조선시대의 예와 같이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고조선에서 유년칭원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규원사화』 이외의 다른 기록은 전혀 없다. 확실한 것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까지는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북애자가 썼다는 「서문」과 「단군기」는 기년법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서문」과 「단군기」가 같은 저자라 볼 수 있을까?

 

‘국혼의 재발견’ (13)회 연재,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에서 나는 “홍만종은 기자의 생존연대는 BC 1173년에서 BC 1083년으로 주장”하였다고 하였다. 이른바 기자조선이라는 가공된 왕조의 기록, 즉 1879년(고종 16)에 정인기(鄭璘基) 등이 증보(增補)한 『기자지(箕子志)』에 수록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왕대(王代)‥‥‥, 그 왕대의 원류로 볼 수 있는 1840년에 필사한 『고금역대보감』 권지이‥‥‥, 그 연재에서 나는 “1840년까지도 단군조선의 왕대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840년 이후에 나온 책일” 수 있음을 제시하며 “단군조선과 이른바 기자조선의 왕대가 합쳐진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시도한 일”로 규정하였다. 『규원사화』를 보면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기자지』의 이른바 기자조선 왕대의 상한(上限) 연도에 단군조선의 하한(下限) 연도를 끼어 맞춘 듯한 감을 느끼게 한다. 기자조선의 왕대가 먼저 만들어지고, 단군조선의 왕대를 만든 것 같다.

 

(4) 『규원사화』의 「만설(漫說)」

 

 

『규원사화』 「만설」, 국중본. 소제목(小題目) 앞에 숫자를 붙이지 않았다. 이 「만설」은 편자의 의중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의 「만설」은 저자 개인이 품고 있는 주관적인 생각을 서술하였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고 있다.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를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는 1910년대, 그 망국시대의 대종교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事大思想)의 근원(根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나는 신교(神敎)란 단어가 마음에 거슬린다. 대종교(大倧敎)적인 표현이라면 ‘선교(仙敎)’, 또는 ‘선도(仙道)’라야 옳다.

 

다. 『규원사화』의 본질과 가치

 

 

『규원사화』 번역본, 신학균(申學均)이 번역하여 1968년에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1974년 8월 15일 자로 서울 인사동 89의 대동문화사에서 재판본을 발행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제국의 대학자 김교헌이 남긴 『규원사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는 1914년 『신단실기』를 출간하게 한 이후 1923년 타계하기까지 이 책에 대하여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알려지고 난 이후 민족사학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왔다. 사실(史實)과 사회주의 철학을 추구하는 민족사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고, 대종교를 위시한 신앙적 측면을 추구하는 민족사학자들은 긍정적이었다.

 

나의 『규원사화』의 형태서지학적 및 내용서지학적 고찰은 혹독하다. 그러한 혹독한 평가위에서 이 책의 본질과 가치를 논한다. 『규원사화』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神敎, 仙道)의 입장에서 쓰인 일종의 종교사화서(宗敎史話書)로서, 그 문화사상적 가치는 매우 높다. 우리는 『규원사화』를 역사책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우리 민족 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역사 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 주는 종교성이 짙은 책이다. 이런 정신사적(精神史的) 영역에서 평가해야 한다.

 

한의학의 고전적 불후의 명작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이 있다. 이 책은 서지학적으로는 위서(僞書)로 지목되지만, 한의학에서는 기독교의 『성서(聖書)』와 같은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다. 『성서』의 「창세기」는 상당 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사서(史書)로 인정하는 역사학자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유태인은 「창세기」를 절대적인 역사서로 믿는다.

 

 

『규원사화‧청학집』 영인본, 1976년 4월 10일, 아세아문화사 발행. 일백부 한정판. 이 영인본은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소장본을 손진태(孫晋泰, 1900~1950)가 필사한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영인한 책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규원사화』는 상당한 부분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성서』의 「창세기」와 같이 사서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규원사화』를 사서로 보는 것은 민족종교의 관점이지, 비교종교학이라든가 역사학의 관점이 아니다.

 

『규원사화』에서 단군시대 47대 왕명(王名)을 열거하고, 나아가 동이(東夷)라고 총칭되었던 동방의 여러 종족을 단군조선의 주민인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웅대한 대제국으로 재구성한 것은 대체로 구한말의 대종교(大倧敎) 성립 이후부터이다. 물론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은 『규원사화』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규원사화』는 김교헌 이후에 나온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정신은 구한말과 항일투쟁시기의 대종교 사상과 단군민족주의의 근간으로서 단군정신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라. 『규원사화』의 출현 시기 및 저자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903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찬집위원(纂輯委員), 1909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 간인위원(刊印委員)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학자이다. 그는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에도 간여하였다. 그는 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의 교리와 역사를 연구한 대종교 최고의 이론가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단군신앙을 이론화시키기 위하여 각종 기록을 수집하였고, 또한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신단실기(神檀實記)』(1914년 발행)를 편술하였다. 그런데 『신단실기』의 「단군세기」에는, “一千二百十七年庚子三月十五日에 入阿斯達山하샤(今文化九月山) 化神御天하시니 開天이 二百十七年이오 在君位가 九十三年이오 傳不知幾世오 歷一千二百十二年이라”라고 하여 단군조선의 역대 왕명과 재위 기간, 치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

 

 

『대동사강(大東史綱)』, 김광(金洸), 1929년 3월 15일, 대동사강사 발행. 『규원사화』 「단군기」의 단군조선 왕대를 처음으로 공식 인용한 책이다. 김광(金洸) 편차(編次)라고 되어있으나, 판권 면에는 저작자를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진율리 440의 “김용학(金龍學)”으로 밝히고 있고, 저작 겸 발행자를 경성부 낙원동 210번지의 ‘정석채(鄭錫采)’로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즉 『규원사화』는 『신단실기』를 포함하여 1910년대 말까지 나온 어떤 책에도 인용되고 있지 않다. 『규원사화』를 처음으로 인용한 책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내놓은 『대동사강(大東史綱)』이다. 이를 보면 『규원사화』는 『신단실기』(1914년) 이후에, 『대동사강』(1929년)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최고본(最古本) 『규원사화』로 알려진 국중본은 중국산 종이에 중국식 사침선장(四針線裝)을 하고 있으며, 「조판기」와 「태시기」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고대의 세계관과 창조관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1915~1928년 사이에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2인이 공동(共同) 편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중본 『규원사화』는 초고본을 정서(淨書)한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이다. 그 필치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규명이 후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눈에 낯선 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 나의 넋두리

내 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엇갈린다. 이쯤에서 밝혀야 할 것 같다. 나의 조부는 유학자셨지만, 나의 증조부는 천도교 계열의 독립운동가셨다. 증조부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일제 강점기에 돌아가셨으므로 나는 증조부를 뵌 적이 없고, 나의 조부는 유학자로서 유년 시절의 나에게 천자문을 가르쳤지만, 의외로 내 삶의 형성과 민족주의적 신념에 지대한 영성(靈性)을 남긴 분은 증조부였으니, 내가 유교를 넘어서서 천도교와 대종교 보천교 원불교에 우호적인 마음을 갖는 이유가 바로 증조부 때문이다. 증조부는 3.1운동 직전에 포천과 가평의 재산을 상당량 처분하여 천도교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썼다. 그분의 재판기록에는 그러한 천도교의 그림자가 얼른거린다. (중략)

 

나는 청소년기를 벗어나 주민등록증을 받게 되자 반갑게 달려간 곳은 지금의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장 자리로, 당시에 그 자리에는 국립중앙도서관(흔히 國中이라 줄여 부른다)이 있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소공동 국중을 롯데그룹에 넘겼고, 국중은 1974년에 남산에 있던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건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어린이회관은 광진구 능동으로 이전하였다. 국민의 가장 소중한 장소를 일본에서 국내 투자를 기웃거리던 친일 재벌에게 넘기고, 여기서 박정희와 육영수의 육영재단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당시 국중의 소공동 말기와 남산시절 초기는 민족사학자들의 둥지였다. 한국고전연구회의 시작점이 남산의 국중 열람실에서 태동되었고, 거기서 임승국 등이 민족사관에 대하여 세미나를 하다가 독지가를 만나 교통이 편리한 종로구 낙원동 낙원빌딩 5층으로 (한국고전연구회는) 이전하였고, 이들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지원한 분이 교사 출신의 박의근이었다. 여기서 국사찾기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박정희 정권은 제2기 민족사학의 태동지를 친일 재벌 롯데에게 매각하는 망동 저지른 것이다. 벌써 48년이나 지났으니 지금 이러한 1970년대 중반의 민족사학계 사정을 아는 사람은 당시 청년이었던 나 외에는 없을 것이다.

 

당시까지 내가 보아온 불경이나 성경 등은 모두는 외래의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구약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그러한 존재가 우리 민족에게 나타남은 없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 당시에 내가 우리 민족의 경전으로 접하게 된 것은 천도교의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대종교의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단실기』, 『신리대전』 등등이었다. 나의 20세쯤의 일이니, 아마도 1975~6년 일 것이다.

 

내가 민족주의 사학자 최인(崔仁)을 처음 만난 곳도 여기 소공동 시절의 국중이었다. 차츰 나는 최인의 민족주의 사상에 심취하였고, 안호상(安浩相) 임승국(林承國)과도 가까워졌으며, 문정창(文定昌) 박시인 등 제2기 민족사학자들과의 안면을 넓혀 갔다. 이런 일은 이유립의 『환단고기』가 나오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찾아 대종교 청년들과 대담을 하며 그들의 교리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실체를 배웠고, 수년 후에는 헛걸음이기는 했지만 홍은동 산꼭대기로 이전한 대종교 총본사를 다시 찾은 바도 있다. 당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종교는 우리나라에서 번성하여야 할 종교였지만 매우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대종교인들의 독립운동과 자주적 민족주체성에 매료되었지만 대종교는 나의 신앙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단군을 대종교 만의 것으로 가두어 둔다면, 단군과 우리 민족사상은 고립될 수도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다는,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종교와 종파 종단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역사의 실체적 인물로 숭모(崇慕)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종교는 그러한 것을 거부하고 단군을 자신들의 신앙 대상으로 가두어 놓았다. 당시 내가 만났던 대종교 청년들 일부는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둥 말로만 단군을 신으로 신봉하였지, 실제로는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라는 무신론적 관념에 빠져 있었다. 대종교인들의 신관(神觀)은 그토록 허약하였고, 교세가 약해진 것이 그 때문임을 간파하였다.(3)

 

 

 

 

 

 

 

<자료출처>

 

 

(1) 북애자(北崖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규원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 단군정신 일깨운 종교사화서 『규원사화』 <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통일뉴스 (tongilnews.com)2022.06.28 

 

 

 

<참고자료>

 

 

"상고사 문헌의 가치 재조명 필요" (daum.net) 2008. 12. 10. 

 

 

SBS 민족 시조 '단군' 프로젝트 가동 (daum.net) 2006. 12. 27.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daum.net) 200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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