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입력 2024. 1. 14. 17:12수정 2024. 1. 16. 08:06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가 서기까지... 한반도 역사지리의 뿌리를 읽다 (daum.net)

 
[김성호의 독서만세 213] 박인호 지음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김성호 기자]

한때는 역사란 그저 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하나쯤으로 여겼을 때였다. 그 시절 역사는 간명했다. 책에 쓰인 옛 이야기였고, 그 책이란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명확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를 거쳐 여러 나라가 일어서고 쇠망했다. 그로부터 반도체를 팔아 지구 반대편에서 에너지를 사오고 K-Pop 스타를 배출해내는 이 작지만 강한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편 끝자락에서 고조선부터 삼한, 삼국시대가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 나아가 오늘에 이르는 역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유구한 시간 속 기록해 마땅한 순간들이 내가 아는 역사였다.

 

언제쯤이었을까. 내가 배운 역사가 의심스러워진 순간이 있었다. 교과서를 두고서 편향논란이 제기되고, 심지어는 역사왜곡이냐 아니냐 열띤 토론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였다. 누군가는 역사교과서가 편향되었으므로 올바로 새로 써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구는 이 같은 발언이 치우쳤다며 일갈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부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배워 아는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저 유명한 문장,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배운 역사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채택된 것일 터였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했던 모든 사실이 유의미한 역사가 되지는 못한다. 어느 것은 취해지고 어느 것은 버려진다. 이를 가르는 것은 학자들이다. 때로는 정치적 득실과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학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어떤 사실은 택하고 다른 사실은 버린다. 역사 또한 결국은 사람의 일인 것이다.

내가 아는 역사는 언제 역사가 되었을까. 시간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대신, 오늘을 사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 마땅한 과거의 사실이 된 건 언제부터인가 말인가. 문득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역사가 역사가 되기까지는
 
▲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책 표지
ⓒ 동북아역사재단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본래 그러했다'고 가벼이 지나치는 지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책이다. 박인호 교수가 지난 2021년 발표한 이 책은 저자가 과거 저술한 논문을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정리한 교양도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선 중후기 실학자들이 당대로서는 생소한 역사지리적 인식을 갖고 나름의 학문을 펼치는 과정을 정리해 나열했다. 16세기를 산 한백겸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이익과 정약용을 거쳐 서구열강과 직접 맞닥뜨린 19세기 사람 이유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를 소환해 그들의 역사지리학적 성과를 풀어놓는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와 지리가 별개의 영역이라 여긴다. 역사란 과거의 일과 그 의미를 배우는 학문이며, 지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지표 위 공간을 이해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통시적인 것이고, 지리는 공간을 넘어 분석돼야 할 공시적인 것이어서, 둘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사는 지리 가운데서 태동하고, 지리는 역사 가운데서 의미를 가진다. 지리의 영향 없이 발전하는 역사는 없고, 역사와 따로 떨어진 지리는 생동감을 잃는다. 따라서 둘을 서로 결합해 이해하는 건 앎을 넓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역사 속에서 지리를 이해하는 것, 말하자면 역사지리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론 역사와 지리가 처음부터 함께 하는 건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고, 둘의 관련성을 한 번에 꿰뚫어보는 데는 나름의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역사 가운데 지리의 중요성을 알아가기까지는 긴 시간과 외래 학문의 도움이 필요했던 듯 보인다. 이전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에 그쳤다. 국가와 사람, 업과 제도의 흥망성쇠가 주요한 대목을 이루었고, 지리는 그를 보조하며 필요한 경우 지명으로써만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마저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역은 지명이나 실제 위치가 누락되고 혼동되기 십상이었다. 어느 사료에는 한반도 안에 있다 하는 것이 다른 사료에는 요동에 있다 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역사와 지리의 긴밀한 관계맺음

고증과 실측이 역사서술의 주된 방법론으로 등장하기 이전엔 저술의 의도에 따라 지리를 제멋대로 서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후대 조선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 원나라 대의 사서 <요사>는 거란족의 역사를 요동 지역의 주류로 부각하려는 의도 아래 작성됐다. 한반도 일원에서 발호한 세력들을 요동 주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표현한 것도 그래서였다. 삼한과 삼국의 옛 지명이 난 데 없이 요동 일원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됐고, 후대의 사서 중 상당수가 먼저 있었던 이 사료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앞선 나라와 그 시대를 산 이가 이미 사라진 세상에서 후대가 이를 바로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다. 고대사 서술에선 이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아 후대에서 고대 국가의 영토를 비정하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 될 밖에 없었다.

책은 조선조 여러 학자가 남긴 저술을 통해 역사지리에 대한 인식과 기록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살았던 실학자들, 모두 40명 가까운 학자들이 남긴 저서를 비교분석하여 기록할 만한 특징을 따로 떼어 실었다.

저자는 조선 학자 가운데 역사지리학을 독립적 학문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물로 1615년 세상을 떠나는 한백겸을 이야기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 완성돼 1640년 간행된 <동국지리지>가 최초로 역사지리에 대한 내용을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기초적인 논증을 거쳐 실었기 때문이다. 책이 나라 안 강역의 변화와 관방의 실태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쓰였기에 고대 국가의 흥망을 역사지리 안에서 담아내게 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한백겸은 여기서 '남자남북자북'이란 논리로써 상고사를 살핀다. 조선이 계승하는 이 나라의 상고사는 남쪽과 북쪽으로 양분돼 별개로 발전해왔다는 이야기다. 또한 삼국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부터 연결돼 나타났다는 이전의 해석에서 탈피해 삼한 모두 남북 중 남쪽의 역사로 구별한다. <요사>의 서술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시각을 뒤집는 획기적 관점으로 이후부터는 한백겸의 시각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된다.

17세기를 산 유형원 또한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동국여지지> 등의 책에서 고대 국가들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벗어나 요동 지역까지 확장해 비정한다. 기자조선이 요하의 동쪽에 있었고, 진번 또한 요동에 있었다고 하는 식이다. 여전히 과거 여러 서적을 비교해 그중 합당하다 여겨지는 설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부이지만, 유형원은 생애 전반에 걸쳐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고대사의 무대를 합리적으로 정착시키려 노력한다.

 

진취와 경계 사이에서

성호 이익 또한 인상적이다. 저자는 이익의 역사지리 인식에 대해 '요동 땅에 대한 강한 복구의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자들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 또한 그러해서, 단군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산동반도까지 확장하거나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에 두는 등 조선이 계승한 역사를 한반도 너머까지 넓히려는 일관된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하며 계승할 역사 안에 받아들인 유득공의 <발해고> 또한 흥미롭다. 그는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적은 관심으로 불명확한 지명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요사>와 <대청일통지> 등이 잘못 기록한 위치를 비평하고 바로잡는다.

반면 역사지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약용은 한반도 고대 역사를 한반도 내로 끌어들인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만주 존재설을 부정하고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끌어들이는 시도 또한 비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요동 지역의 문화가 청에 의해 함몰되어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정약용이 보인 여진과 말갈의 역사를 우리의 것과 철저히 구분하고 집요하게 역사서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고정하려는 모습 안에 시대적 흐름과 이에 대응하려는 목적성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온다.

실학자들의 변화하는 역사지리학적 연구로부터 단순히 고증을 통해 사실에 다가서는 모습 이상을 읽게 된다는 점은 각별히 흥미롭다. 결국 역사란 시대 안에서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로부터 더 낫거나 못한 미래에 가 닿게 된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주변 상황 가운데 우리는 역사를 대하는 더 나은 태도를 요구받고 있으므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입력 2017. 2. 26. 22:27

'발해고: 우리가 버린 제국의 역사' (daum.net)

'풀뿌리 한국사: 다시 살아 숨쉬는 역사' 등 역사 신간 2권
 
1784년, 조선의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일하던 37살 청년 유득공은 '발해고'를 세상에 내놓는다. '발해고'는 청나라가 중화질서의 중심으로 등장한 뒤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에 안주하고 있던 조선을 뒤흔들었다.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반도 바깥의 발해를 자국의 역사라 여기지 않았다. 기자 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반도의 마한이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로 통일되었다는 성리학적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이 같은 역사관에 반발했다. '발해고'에서 유득공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이자, 삼국시대 이후에도 신라와 발해가 병립했다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했다. 이는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이자, 한민족의 강역을 대륙까지 확장시킨 혁명적인 역사관이었다. 이후 《발해고》는 한치윤ㆍ홍석주ㆍ정약용ㆍ김정호 등 당대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이들이 발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근대 이후에는 신채호ㆍ박은식ㆍ장도빈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학의 역사 왜곡에 맞서는 데 필수적인 저서로 자리매김한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출간한 후에도 발해에 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출간 이후 당대 최고의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국내의 여러 역사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입수한 각종 문헌들을 검토하고 발해 관련 사료들을 발굴했다. 또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연행길에 참가해 발해의 강역이었던 만주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에 관한 연구가 축적될수록 유득공은 '발해고' 개정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발해고'를 작성하고 이를 자신의 문집인 '영재서종'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발해고' 4권본이다.

이 새로운 수정본은 기존에 출간된 '발해고' 1권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9고(考)로 구성된 '발해고' 1권본과 달리, '발해고' 4권본은 5고(考)로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내용도 대폭 추가되었다. 발해의 역대 신하들을 다루는 〈신하고〉에는 '발해고' 1권본에는 없었던 32인이 등장했다. 발해의 지리를 설명하는 〈지리고〉의 경우, 완전히 새로 썼다고 여길 만큼 고금의 지리지와 역사서들을 비교 분석해 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을 치밀하게 규명하고 있다. 발해의 외교문서를 다루는 〈예문고〉에서는 당나라 현종이 발해 무왕에게 보내는 네 개의 서한을 추가해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유득공의 논평이 크게 늘어났다. 이를 통해 발해사에 관한 그의 인식을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유득공 지음 | 김종성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16쪽 | 13,000원

 
'풀뿌리 한국사'는 반만년 한국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고조선 이후 우리 역사를 구성한 수많은 인물, 사건 그 모두가 ‘민본’에 근거한 것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민본’이라는 기준을 씨줄로 하고 개별 사건들을 날줄로 해서 전체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개별 사건들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고 분석하는 대신 우리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했다.

 

역사는 ‘민초’ 즉 백성의 삶이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삶의 주인공,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한다. 생계를 꾸려 나가는 과정에서나 정치의 영역에서나 피동적인 존재로만 취급받던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주인공으로 역할을 확대해 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곧 역사 학습의 요체라는 것이다. 백성이야말로 모든 생산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할 것 없이 세상을 사람의 것으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백성에게 속해 있다. 세상의 변화가 바로 그들에게서 연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권력은 그들을 위하고 그들에 기반하지 않으면 ‘썩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풀뿌리 한국사'는 이런 점에 근거해서 만들었다. 고조선 이후 우리 역사를 구성한 수많은 인물, 사건 그 모두가 ‘민본’에 근거한 것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국가’라는 것 역시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거꾸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퇴행도 있었고 전진도 있었다. 하지만 ‘민본’을 위한 노력은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 이 책을 통해 민본을 위한 중단 없는 노력과 이에 역행하는 시도가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져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고성윤 지음 | 나는나다 | 392쪽 | 17,000원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 great@cbs.co.kr

 

 

입력 2017. 2. 16. 10:03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바탕을 둔 실학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재위 1776∼1800) 때 융성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실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홍대용은 모두 정조 때 활동했다. 당시 이들과 교류했던 학자인 유득공(1748∼1807)과 서호수(1736∼1799)가 쓴 '발해고'(渤海考)와 '열하기유'(熱河紀遊, 일명 연행기<燕行記>)를 우리글로 옮긴 책이 잇따라 출간됐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펴낸 '발해고, 우리가 버린 제국의 역사'는 서얼 출신의 북학파 학자인 유득공이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해 통일신라와 발해가 남북국시대를 이뤘다는 사실을 밝혀낸 '발해고'의 번역본이다.

이번에 출간된 '발해고'는 2000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된 필사본이 저본이다. 유득공의 문집인 '영재서종'(영<삼수변에令>齋書種)에서 나온 새로운 '발해고'는 기존에 알려진 '발해고'보다 분량이 많고 구성도 다르다.

새로운 '발해고'는 4권으로 구성돼 4권본으로 불린다. 이는 유득공이 1784년 1권짜리 '발해고'를 내고 시간이 흐른 뒤 내용을 덧붙이고 논평을 추가한 일종의 증보판이다. 글자 수는 38% 더 많다.

'발해고' 4권본은 군주고, 신하고, 지리고, 직관고, 예문고 등 5개 고(考)로 나뉜다. 1권짜리 '발해고'와 비교하면 지리고가 대폭 보강됐다.

번역 작업을 맡은 김종성 씨는 "발해고 4권본이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유득공은 미완성의 원고라고 생각해 책명을 '발해사' 대신 '발해고'라고 부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권본에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관계로 파악한 서문이 있지만, 4권본에는 서문이 없다"며 "그렇다고 해서 유득공이 남북국 관념을 철회했거나 보류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216쪽. 1만3천원.

출판사 아카넷이 출간한 '열하기유'는 서호수가 '열하'(熱河), 오늘날의 허베이(河北)성 청더(承德)를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

 

조선시대 중국 사절단이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는 열하를 방문한 것은 1780년과 1790년 두 번뿐이었다. 그중 연암 박지원은 1780년에 열하를 갔고, 서호수는 1790년 유득공과 함께 열하 땅을 밟았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살피고 조선의 현실을 비판한 것과 달리, 서호수는 '열하기유'에서 사실을 전달하는 데 힘썼다. 특히 천문, 역산(曆算), 음악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특징이다.

'열하기유'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내용은 중국의 연극이다. 서호수는 새벽에 시작해 7∼8시간씩 이어진 청나라 궁중 연극을 관람한 뒤 날카로운 시선으로 쓴 감상평을 남겼다.

서호수는 정승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육조 판서를 여러 번 지낸 인물이다. 그의 아들인 서유구는 백과사전인 '임원십육지'를 썼다.

역자인 이창숙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해제에서 "열하기유는 중국 각 지역의 연혁과 당시 수비 병력 등 현황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해 일종의 정탐 보고서로도 읽힌다"고 평가했다. 432쪽. 2만5천원.

psh59@yna.co.kr

 

 

임종명입력 2021. 1. 19. 13:23

[서울=뉴시스]유득공의 '고운당필기' 번역본 표지. (사진 =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2021.01.19.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인 유득공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를 최초로 번역, 출간했다고 19일 밝혔다.

유득공은 1784년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발해고'의 저자이자 규장각 4검서, 백탑파와 사가시인의 한 사람 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고운당필기'는 유득공의 비망기이자 일기다. 서얼 출신인 그가 정조의 파격 인사 정책으로 관료가 됐을 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20여년의 세월을 담고 있다. 이 기간 그가 작성한 약 300편에 달하는 글로 구성됐다.

 

소재는 역사, 언어, 풍속, 지리, 문학, 괴담, 동·식물, 신변잡기적 사물 등 다양하고 형식도 소설이나 만담, 시, 역사 평론 등 다채롭다고 고전번역원 측은 설명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 지인이나 동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친구와 나눈 대화 등이 고루 담겼다.

고전번역원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운당필기에 담긴 글들을 ▲발해고 ▲경도잡지 ▲이십일도회고시 등 유득공의 저서들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고전번역원은 학술적 가치가 낮지 않음에도 고운당필기 번역이 늦어진 점에 대해 "일부는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일부는 유실되는 등의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미국, 일본 세 나라에 흩어진 여러 이본을 수집하고 대조해 최대한 원본에 가까운 모습을 회복하고자 했다"며 "총 295편 중 미확인된 41편을 제외한 254편을 교감·표점하고 번역해 교감표점서와 번역서를 출간했다"고 덧붙였다.

번역에는 계명대 한문교육과 김윤조 교수와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김성애, 선임연구원 김종태 등이 참여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mstal01@newsis.com

 

 

발해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발해고》(渤海考)는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규장각검서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주해 1] 이 발해에 관해 저술한 역사서이다. 1권본과 4권본의 두 종류가 있다.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칭하는 남북국사관을 창조한 서적이다.[1] 《발해고》는 발해 전문 자료휘문집으로 의의가 크다.[2]

개요[편집]

《발해고》는 조선 정조 때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일하던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발해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서가 없음을 통탄하며, 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하여 직접 저술한 발해에 관한 역사서이다. 조선 정조 8년(서기 1784년)에 1권본을 완성했고, 나중에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4권본을 완성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으나, 나중에 펴낸 4권본은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구성도 많이 달라지고 내용도 약 35% 정도 증가하였다.[3]

구성[편집]

《발해고》는 서문(序文) 외에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해고》 1권본은 서문과 총9개의 고(考)로 구성되어 있다.[4]

  1. 군고(君考): 발해의 왕에 대한 고찰. 진국공 걸걸중상과 고왕 대조영으로부터 발해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주요 치적을 기록하였다.
  2. 신고(臣考): 발해의 신하에 대한 고찰. 대문예 등 발해의 여러 이름 있는 신하들의 주요 업적을 기록하였다.
  3. 지리고(地理考): 발해의 지리에 대한 고찰. 《신당서》, 《요사》,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 인용하였다.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다.
  4. 직관고(職官考): 발해의 주요 관직에 대한 고찰. 문관 직제와 무관 직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5. 의장고(儀章考): 발해의 의식 및 복장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직관고에 편입되어 있다.
  6. 물산고(物産考): 발해에서 생산되는 물건에 대한 고찰. 토끼, 다시마, 된장, 사슴, 돼지, 말, 베, 면, 명주, 철, 벼, 붕어, 오얏, 배, 은에 대한 설명이 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7. 국어고(國語考): 발해의 언어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8. 국서고(國書考):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
  9. 속국고(屬國考): 발해를 계승한 나라인 정안국에 대한 고찰.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

내용[편집]

책의 내용은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어고(國語考) ·국서고(國書考) ·속국고(屬國考) 등 9고(考)로 나누어 정사(正史)의 체계로 엮었다. 군고는 발해 역대 왕에 관하여 기술한 본기(本紀)이며, 신고는 83명에 해당하는 발해국의 문신과 무신 및 학자들에 관하여 정리한 열전이다. 지리고는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에 관한 내용이며, 직관고는 문무 관직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였고, 의장고는 품계에 따른 문무관의 복식과 수도 동경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물산고는 발해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에 대한 기록이며, 국어고는 발해에서 사용된 각종 칭호의 예를 기록하였고, 국서고는 외국에 보낸 국서를 정리하였으며, 마지막 속국고는 정안국(定安國)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특히 국서고에는 일본과 주고받은 국서가 주로 실려 있는데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한 나라이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한 나라라는 점을 일본에 강조하면서 고구려의 후예국임을 대외에 알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박제가의 서문[편집]

조선 정조 때 실학자로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는 친구인 류득공이 저술한 《발해고》에 대해서 자신이 예전에 검토했던 바와 부합한다고 하면서 이 책을 크게 칭찬하였다.[5]

내 친구 류혜풍(→류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중략)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 왕씨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내가 전에 검토한 바와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왕도와 패도의 지략을 엿볼 수 있는 류혜풍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류득공의 서문[편집]

류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이 책을 짓게 된 동기를 직접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씨[주해 2] 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류득공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망하고 그것을 계승한 고려가 《삼국사[주해 3]를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남쪽의 신라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발해도 계승하였으므로 마땅히 남북국사를 지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다. 발해는 고려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망했기 때문에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못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왜냐하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므로 반드시 사관이 있었거나 역서사라도 있었을 것이며, 만약 없었더라면 세자에게 물어보아서라도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10여 만 명이나 되는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서도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통탄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류득공이 규장각검서로 일하면서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9고(考)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를 세가(世家), 전(傳), 지(志)로 삼지 않고 고(考)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6]

군고(君考)[편집]

군고(君考)는 발해의 역대 임금에 대한 고찰이다. 진국공(震國公)은 성이 대씨(大氏)이고 이름이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다.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大祚榮)은 진국공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아버지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이해고의 공격을 받아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해 도망하다가 천문령에서 고구려와 말갈 군사를 이끌고 이해고를 크게 격파하였다.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성력 원년(서기 698년)에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고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震國王)이 되었다. 당나라 현종 2년(서기 713년)에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자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왕 대무예(大武藝)는 고왕 대조영의 아들로서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개원 20년(서기 732년)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주해 4]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무왕 대무예의 아들로서 당나라에서 안녹산과 사사명이 내란을 일으키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소탕하는데 협조하였다. 이 공로로 보응 원년(서기 762년)에 발해국왕에 책봉되었다.[주해 5] 문왕의 뒤를 이어 폐왕성왕강왕정왕희왕간왕선왕이 있었으며, 계속하여 왕 이진, 왕 건황, 왕 현석, 왕 인선에 이르렀다.[주해 6] 왕 대인선(大諲譔) 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는 신책 4년(서기 925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천현 원년(서기 926년) 발해의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을 동란국(東丹國)으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인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으며,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발해 지역의 동란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신고(臣考)[편집]

신고(臣考)는 발해의 이름 있는 신하들에 대한 고찰이다. 대문예(大門藝)는 무왕 대무예의 동생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당나라로 도망을 갔다. 무왕이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야발은 고왕 대조영의 동생이다. 장문휴는 무왕 때의 대장이다. 이진몽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활쏘기를 보여주고 발해 음악을 연주하였다. 양승경은 문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으로부터 정3위의 벼슬을 받았다. 일만복은 문왕 때 325명을 데리고 배 17척에 나누어 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왕은 일만복이 가져온 발해의 국서에서 발해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한 점, 그리고 일본에 대해 고구려 때는 형과 동생의 나라라고 부르다가 발해 때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라고 부른 점을 들어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였다. 사도몽은 문왕 때 187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겨우 46명만 살아남았다. 여정림은 강왕 때 68명을 이끌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하여 오랑캐의 땅인 지리파촌에 도착하여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고다불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월중국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 왕문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 앞에서 격구 경기를 해 보였다. 고모한은 고송이라고도 하는데,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자 고려로 피신하였다가 나중에 요나라로 돌아와 중대성 좌성을 지냈다. 대광현(大光顯)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의 세자로서 고려 태조 17년(서기 934년) 7월에 무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도망하였다. 태조 왕건이 발해의 세자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붙여주었으며 그에 딸린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병사들에게는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대광현의 아들은 대도수인데 고려 현종 때 대장이 되었다. 그 후손 대금취(大金就)는 고려 고종 때 대장이 되어 몽고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영순군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영순 태씨의 시조가 되었다. 박승은 고려 태조 21년(서기 938년)에 발해의 유민 3천여 호를 이끌고 고려로 도망을 왔다.

지리고(地理考)[편집]

지리고(地理考)는 발해의 주요 지리에 관한 고찰이다. 《신당서》, 《요사》,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 인용하였다. 4권본에서는 내용이 대폭 증가하였다. 류득공은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5경, 15부, 62주에 대해 인용하였다. 발해의 5경은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이고, 15주는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이다. 류득공은 《발해고》 1권본에서 발해의 5경 중 상경 용천부는 지금의 영고탑이고, 중경 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 동경 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고, 남경 남해부는 지금의 해성현이며, 서경 압록부는 지금의 압록강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러나 류득공은 《발해고》 4권본에서 상경을 영고탑, 중경을 길림, 동경을 경성, 남경을 함흥, 서경을 강계 동북 200리의 압록강 건너편으로 다르게 비정하였다.[주해 7] 류득공은 《요사》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도 인용하였으나, 《요사》에 기록된 많은 오류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동일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류득공은 《청일통지》에 기록된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도 인용하여, 용천부, 현덕부, 용원부, 남해부, 부여부, 심주, 개주, 부주, 삼로군, 홀한하, 상경성, 평양, 곽주, 모주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직관고(職官考)[편집]

직관고(職官考)는 발해의 주요 관직에 대한 고찰이다. 문관 직제로서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과 충부, 인부, 의부, 작부, 창부, 선부, 지부, 예부, 신부, 융부, 계부, 수부,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에 대해 서술하고, 무관 직제로서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하였다.

의장고(儀章考)[편집]

의장고(儀章考)는 발해의 주요 의식과 복장에 대한 고찰이다. 3질[주해 8] 이상은 자줏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금어대를 휴대한다. 5질 이상은 주홍빛 관복을 입고 상아홀과 은어대를 휴대한다. 6질과 7질은 옅은 주홍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8질은 녹색 관복을 입고 나무홀을 휴대한다.

물산고(物産考)[편집]

물산고(物産考)는 발해의 주요 생산물에 대한 고찰이다. 태백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오얏, 악유의 배, 부주의 은에 대한 설명이 있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국어고(國語考)[편집]

국어고(國語考)는 발해의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부르며, 왕의 명령을 교(敎)라 한다. 왕의 아버지를 노왕, 어머니를 태비, 처를 귀비라 하고, 맏아들을 부왕(副王), 나머지 아들을 왕자라 한다. 관품은 질(秩)이라 한다. 4권본에서는 삭제되었다.

국서고(國書考)[편집]

국서고(國書考)는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대한 고찰이다. 4권본에서는 예문고라고 하였다. 발해의 왕이 일본 일왕에게 보내는 국서 총6편이 실려 있는데, 《속일본기》, 《일본일사》, 《일본후기》, 《유취국사》 등에 실린 국서를 인용한 것이다. 총6편으로서 발해 무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발해 문왕이 일본국 성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발해 강왕이 일본국 환무왕에게 보내는 국서 4편이 실려 있다. 무왕 대무예가 보낸 국서에는 "무예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였다.

속국고(屬國考)[편집]

속국고(屬國考)는 발해를 계승한 나라인 정안국에 대한 고찰이다. 4권본에서는 정안국고(定安國考)라고 하였다.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주해 9] 종족으로 발해가 거란에 격파되자 그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정안국 왕 오현명(烏玄明)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거란이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할아버지가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렀다고 한다. 정안국 왕 오현명은 송나라 태종 6년(서기 981년)에 여진 사신을 통하여 표문을 올리고 근래에 부여부가 거란에서 등을 돌리고 정안국에 귀순하였으니 곧 거란이 쳐들어올 것이라면서, 송나라와 정안국이 힘을 합쳐 거란을 토벌하자고 제안하였다.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정안국 사람 골수(骨須)가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인용 서적[편집]

류득공의 《발해고》는 다음 24종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작성했다.[7]

구당서》, 《신당서》, 《오대사》, 《송사》, 《요사》, 《자치통감》, 《삼국사[주해 3], 《고려사》, 《동국통감》, 《속일본기》, 《일본일사》, 《일본후기》, 《유취국사》, 《통전》, 《통지》, 《문헌통고》, 《문헌비고》, 《대명일통지》, 《청일통지》, 《성경통지》, 《만성통보》, 《영순태씨족보》, 《여지승람》, 《전당시》.

1권본과 4권본 비교[편집]

류득공의 《발해고》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수정 보완되었다. 류득공은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1권본을 완성한 후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이후 4권본을 지었다. 비록 《발해고》 4권본은 류득공의 사망으로 인해 단독 서적으로 출판되지 못하였으나, 이후 《영재서종(泠齋書種)》에 합본되어 출판되었다. 류득공은 《발해고》 1권본에서 9고(考)로 되어 있던 구성을 크게 변경하여 4권본에서는 5고(考)로 통폐합하고, 그 대신 상대적으로 부실하였던 지리고(地理考)를 대폭 정비하였다. 특히 발해의 강역에 대해 1권본에서는 《요사》의 기록에 따라 요동을 중심으로 비정하였으나, 4권본에서는 조선 북부 지방과 길림 및 아무르강(흑룡강) 일대로 비정함으로써 현대 역사학계의 의견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8] 또한 1권본에서는 발해의 멸망 시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4권본에서는 발해 멸망과 그 이후 시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으며, 신고(臣考)의 뒷부분에 흥료국 관련 인물들을 추가하여 발해 멸망 이후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에 대해서 1권본에서는 발해의 속국으로 잘못 보아 속국고(屬國考)에 넣었으나, 4권본에서는 오류를 인식하고 제목을 정안국고(定安國考)로 수정하였다. 이와 같이 《발해고》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많은 자료가 추가되고 오류가 수정되었는데, 이를 통해 류득공의 발해에 대한 인식이 더욱 정확하고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평가[편집]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류득공의 《발해고》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하고 발해를 한국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의 강역이 한국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수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이론적 근거는 『발해고』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혀 우리 민족사의 범주로 끌어들였고, 또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이라고 불러서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여진·거란에 대해 영토적 권리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발해고』의 사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1] 발해고의 1권본에 실린 지리고(地理考) 부분은 오류가 많은 중국 《요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많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후 4권본에서 오류를 대폭 수정하여 발해의 위치를 현대 역사학계에서 비정하는 위치와 거의 동일하게 이해하였다.[9]

류득공이 《발해고》에서 주장한 남북국시대론은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사학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10] 반면 중국학자 쑨위량(孫玉良, 손옥량)은 남북국시대론을 만들어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킨 사람이 류득공이라고 혹평하면서, 발해와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았다.[11] 박시형, 김혁철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후기 신라와 발해가 병립하였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고 있다.[12]

류득공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세워진 발해는 고구려나 신라처럼 당당한 제자리를 가지고 우리 민족사에 포함되어야 할 나라라는 의미에서 후기 신라의 병립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왕조사의 시기구분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사 편찬에서 특기할 만한 기여를 한 것으로 된다.

한국어 번역서[편집]

《발해고》를 한국어로 옮겨진 책은 다음과 같다.

  • 1권본: 송기호[주해 10]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21년 2월 1일.[13]
  • 4권본: 김종복[주해 11] 옮김, 《정본 발해고》, 책과 함께, 2018년 3월 30일

관련 서적[편집]

  •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년)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이다. 최초로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로 보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발해국기(渤海國記)》: 당나라 장건장(張建章)이 지은 발해에 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신당서》〈발해전(渤海傳)〉에서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발해의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주요 내용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1935년 만주 랴오둥(遼東)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 김육불)가 저술한 발해의 역사서이다.
  •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 말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기전체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발해를 고구려·백제·신라·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조선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순조 11년(1811년)에 편찬한 우리나라 강역에 관한 역사지리서이다.
  • 규원사화(揆園史話)》: 조선 숙종 원년(서기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하였다고 하는 역사서이다. 후대에 조작된 위서(僞書)라는 주장도 있고, 진서(眞書)라는 주장도 있다.
  • 단기고사(檀奇古史)》: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大野勃)이 8세기 경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후대에 조작된 위서(僞書)로 보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유득공(柳得恭)은 '유득공'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柳를 '류'로 통일시켜 표기했다.
  2.  여기서 부여씨는 백제의 왕족을 말한다.
  3. ↑ 이동:가  여기서 《삼국사》란 고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말한다. 현전하는 《삼국사기》의 표지에는 '삼국사(三國史)'라고 적혀 있다.
  4.  등주(登州)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에 있는 봉래, 용구 등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5.  당나라는 서기 76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명목적이기는 하지만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였다.
  6.  왕 대현석(大玄錫)과 왕 대인선(大諲譔) 사이에 적어도 왕 대위해(大瑋瑎)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러나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할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194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만주의 역사학자인 진위푸(金毓黻, 김육불)에 의해 왕 대위해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7.  오늘날 발해의 상경 영고탑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으로 보고 있고, 중경 길림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이고, 동경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이고, 남경은 논쟁 중으로 대표적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8.  질(秩)이란 발해에서 신하들의 등급을 표시하는 말이다. 발해에서는 정1품, 정2품 등의 품(品)이라는 용어를 질(秩)이라고도 하였다.
  9.  여기서 마한(馬韓)은 고구려를 일컫는 말로서, 정안국이 고구려 종족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마한은 백제에 흡수된 것으로 보지만,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이고, 변한이 백제이며, 진한이 신라라고 하였다.
  10.  송기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서 발해사 전공이다.
  11.  김종복은 현 안동대학교 사학과 부교수로, 발해사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 및 사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참조주[편집]

  1. ↑ 이동:가  송기호, 〈류득공과 『발해고』〉,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28쪽.
  2.  박인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보》 6권, 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월, 35쪽.
  3.  송기호, 〈류득공과 『발해고』〉,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23쪽.
  4.  류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5.  박제가, 〈박제가의 서문〉,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37~39쪽.
  6.  류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42쪽.
  7.  류득공 지음, 송기호 옮김, 《발해고》, 홍익출판사, 2000년 1월 10일, 44쪽.
  8.  박인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보》 6권, 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월, 59쪽.
  9.  박인호, 〈『발해고』에 나타난 류득공의 역사지리인식〉, 《한국사학사학보》 6권, 한국사학사학회, 2002년 9월, 58쪽.
  10.  이원희, 〈사서로서 『발해고』에 대한 고찰〉, 울산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년, 1쪽.
  11.  孫玉良, 〈柳得恭與渤海考〉, 《學習與探索》, 1986년.
  12.  김혁철, 〈실학자 류득공의 발해 역사관〉, 《력사과학 론문집》 16, 력사편집부 편, 평양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1년, 35쪽.
  13.  2000년과 2020년에 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참고자료>

 

발해고(渤海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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