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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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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내륙의 바다’ 역할을 한 영산강 물길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고대 문명 교류의 거점이자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마한의 핵심 지역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나주는 국보 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보물 금동신발과 같은 마한 관련 지위와 권세를 나타내는 금은 장식 위세품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다.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 복원 최적지 ‘급부상’금동관 금동신발 마한 유적·유물 전국 최다반남고분 옹관가마 ‘마한 실리콘밸리’ 주목 마한사 재인식의 출발점이자 상징적 유적인 나주 반남 고분군 국가사적. 나주시 제공 윤병태 나주시장은 “나주를 빼놓고 영산강 유역 마한 역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주는 마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며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를 나주에 유치..
2022년 9월 28일 평양에 낙랑 박물관을 준공했다는 KBS [요즘 북한은] 낙랑 박물관 준공.."평양이 고조선 중심" 기사입니다. ■ [요즘 북한은] 낙랑 박물관 준공.."평양이 고조선 중심" [앵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설화를 담은 북한의 만화입니다.낙랑은 역사서 에도 나오는데요.그런데 북한은 이 낙랑국이 중국 한나라가 세운 게 아니라,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웠다고 주장합니다.최근 평양에 박물관까지 만들어 문을 열었는데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같은 무력 증강에 열을 올리는 북한이 한편으론 역사 문제에 공을 들이는데 그 이유와 의도가 있습니다., 첫 소식 입니다. https://tv.kakao.com/v/432574192 [리포트]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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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사 명장면-5] 낙랑공주가 살았던 그곳 요동·요서·한반도 어디쯤 때는 32년 4월, 낙랑국의 도성. 군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낙랑왕 최리(崔理)에게 고구려군이 바로 성문 앞까지 쳐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아니 자명고각(自鳴鼓角)이 어찌 울리지 않았단 말인가?" 최리는 부랴부랴 무기고로 달려갔다. 북은 찢겨 있고, 뿔피리는 깨져 있었다. 이내 자신의 딸이 저지른 것임을 깨닫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딸을 찾아내 죽이고는 성문을 열고 고구려군에 항복하였다. 애비로서 어여삐 키운 딸을 죽일 때는 결코 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딸을 충동해서 자명고각을 부수게 한 고구려 왕자 호동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내가 저 녀석을 믿고 사위 삼았다가 딸도 잃고 나라도 잃었구나"...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라羅직물과 견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겸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많은 양의 누에천(실크)이 출토되었다. 직물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복식유물의 한 구성부분으로 출토되었는데, 누에천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출토된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자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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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왜(倭)가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키가 작다'는 의미의 '왜(矮)'라는 말과 결합하여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습니다.그러나 왜인(倭人)이라는 말은 현재 산동(山東)·베이징(北京)이나 요동(遼東) 지역, 황해 도서지역, 한반도 남부 해안 및 도서지역,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아온 사람들로 결국은 말갈이나 물길의 다른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왜(倭), 한국인들의 이름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겨울 연가(冬のソナタ)』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방영할 당시에는 시시콜콜한 남녀간의 사랑 얘기라고 생각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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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동부여 지역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근초고왕(부여계)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고(『日本書紀』神功 49年), 37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입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近肖古王).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반도 부여인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즉 4~5세기 경 대륙의 부여인들이 한반도로 거쳐 바다를 건너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4세기 전반에 규슈로 갔고, 이 지역을 정벌하고 야마도 왕조를 건설하는데 대략 1세기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 ***백제와 왜, 영원한 부여의 아들**"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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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敦煌)은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둔황에는 모두 4개의 석굴군이 있다. 막고굴(천불동), 서천불동, 유림굴, 수협구굴(소천불동) 등이다. 이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명사산 자락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데 동굴만 700여개, 이 중 불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이 492개다. 둔황 석굴사원 하면 대개 막고굴을 이른다. 북위 시대에 건축된 석굴은 36개다. 이어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했던 수나라도 막고굴 조성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110개, 당나라는 247개를 각각 만들었다. 석굴 내 벽화들이 대부분 황제나 지역 제후, 대형 사찰에 대한 그림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건축비를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 둔황 석굴사원건축비 낸 황제·제후 벽화 많아지금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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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伊水)가 흘러가는 양쪽에 용문산과 향산(香山)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수 양쪽에 솟은 두 산을 멀리서 보면 마치 문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을 ‘이궐(伊闕)’이라고 불렀다. ‘궐’은 문이라는 뜻이니, 이궐은 이수가 흘러가는 곳의 문을 의미한다. 서쪽 문에 해당하는 게 용문산(서산)이고 동쪽 문에 해당하는 게 향산(동산)이다. 이 두 산의 암벽에 마치 벌집을 뚫어 놓은 듯한 수많은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남북으로 1㎞에 달하는 구간에 2300여개의 석굴과 감실, 10만존(尊)에 달하는 불상, 2800여개의 비각제기(碑刻題記)가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엄청난 규모를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비율로 따지자면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이고, 당나라 때 조성된 석굴이 60%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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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석굴은 황제가 곧 부처라는 국가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중원에 들어온 이민족 왕조의 권력자들에게 서역의 포교승이 전해준 불교는 매혹적인 종교사상이었다. 이민족을 차별하지 않고 세상 만물에 대한 부처의 자비와 포용을 강조했기에, 절묘한 통합의 통치이념으로 변용이 가능했다. 5세기 중엽 북위의 황제 문성제는 이런 배경에서 불교를 국가의 핵심적인 통치 종교 문화로 만들었다. 그는 부처로 격상된 선대 황제와 자신의 자태를 형상화해 거대한 실물로 남기길 원했다. 문성제의 치세인 화평 1년(460년)에 승려 담요가 주도해 선대 황제 5명의 자태를 모델로 이른바 담요 5굴을 뚫어 만든 것은 바로 그 결실이었고, 윈강석굴의 시초가 되었다. 북위 왕조가 만든 중국의 대표적 석굴사원 윈강석굴의 16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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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8일 충남 천안 소재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 37) 교수는 중국 역대왕조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일대 출토 고대 묘지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100여 점을 헤아리는 고대 한인(韓人) 계통 사람들의 묘지명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왕조인 북위(北魏.386-534)에 들어가 후궁을 거쳐 황태후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출신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과 그의 딸과 사위이자 조카, 또 다른 조카 묘지명도 아울러 밝혀졌으며, 이외에도 주로 북위 왕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혹은 요동(遼東) 출신자나 그 후예 9명의 묘지명도 아울러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2006년 1월 2일 민경삼 교수는 고구려 이주민으로 중국 북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