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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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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 민족이 광대한 중원 대륙에서 중국 한족(漢族)과 투쟁하며 전개해온 자랑스러운 실제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안에서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ㆍ조작된 엉터리 역사를 배우다 보니 우리 국민은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아무런 자긍심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자기들의 위대했던 역사를 축소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자기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엉터리 역사를 배우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심백강 원장은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20여 년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앞선 중국측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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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합니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웁니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습니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
임기환교수는 각저총(씨름무덤)의 축조 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하고, 광개토대왕 · 장수왕 때로 고구려인들의 활달한 기운이 넘치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역시 씨름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각저총의 씨름그림 한 장면에는 고구려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갖춘 문화를 향유하였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 임기환교수 [고구려사 명장면-33] 각저총 씨름도가 말하는 고구려의 전통과 개방성 무용총과 마치 쌍둥이 무덤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벽화고분이 각저총(씨름무덤)이다. 각저총의 축조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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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 백산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한국고대사)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도 드러나듯 간도는 명백한 우리 영토였고, 1909년의 청·일 간 간도협약은 국제법상으로도 무효”라며 “만일 정부가 제기하지 못한다면 국회와 학계에서라도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국제법)는 “중국이 국가 주도로 자신의 국익에 유리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 정부는 ‘외교적 마찰’ 운운하며 이런 논의를 스스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중국 정부와의 ‘조용한 조율’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삼음으로써 중국에 대한 ‘카드’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간도협정은 무효’ 명기된 국감자료집 수거후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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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통상 남부 만주 지역 중 두만강 북쪽 땅(동간도)을 뜻하지만, 압록강 북쪽도 서간도로 불려왔습니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과 청 나라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만들 때 합의한 것처럼 조선 영토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는 한국인이 급증, 간도협약 당시 동간도에만 10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습니다.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노무현 정부 때 중국 “간도 영유권 거론 말라” 요구 후“외교부가 왜 국감 자료집 회수하느냐” 제보 전화신구 자료집 비교해 보니 간도 협약 기술 바뀌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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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고종 황제가 황제 즉위식을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환구단(또는 원구단)에 다녀왔습니다.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여간 생활한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8월 14일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정하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습니다.다음 날 고종황제는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습니다.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은 ‘고종실록’에 ..
창덕궁 바로 옆에 있는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창경궁 전경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에 다녀왔습니다. 창덕궁 전경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