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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2) - 남북국시대론(1) 본문

남북국시대

남북국시대(2) - 남북국시대론(1)

대야발 2024. 7. 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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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2018. 3. 10. 03:36

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유학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유학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동이족 여러 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로 보이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요, 금, 청 백성들은 모두 고구려와 발해 백성들 후예였으니 이들 역사가 우리 역사일 수밖에 없다.

 

신라와 발해, 금과 고려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서로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의 대상으로 보았다. 요는 송(宋)을, 청은 명(明)을 정복하기 전에 배후 정지 작업으로 각각 고려와 조선에 침입했다. 3차에 걸친 요의 고려 침입은 실패했다. 조선과 청나라는 전쟁 없이 공존할 길이 있었다. 광해군이 실제 그런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과 조선 사이에는 병자호란이 있었고 조선이 항복했다. 조선의 자업자득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기 1623년 인조반정 명분은 사실상 망한 명(明ㆍ1368~1644)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였다. 인조 정권은 힘도 없으면서 사대주의에 찌들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명을 멸망시킨 불구대천 원수로 삼았다. 그러니 청은 조선을 손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국제 정세에 어둡고 사대주의 명분론이 불러온 참화였다. 그러나 청은 조선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 조선 지배층은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1910년 일제에 나라가 망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사림 영수로서 태두가 된 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창하는 힘으로 애국의 의리를 주창했다면 어찌 나라가 망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반성이다. 그랬기에 ‘꿈에 금 태조 아골타를 뵙고 절하다’(夢拜金太祖)라는 글을 남겼다.

 

사대주의는 중국인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자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여진족 금 태조 아골타가 박은식 선생에게 우리의 영웅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교헌 선생은 조선이 1910년에 일제에 망하고 청나라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하자 “배달민족 국가가 남북조에 걸쳐 한꺼번에 끊어짐은 초유의 일이다”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을 개척했고 대종교 2세 교주로서 대일항쟁 선두에 서신 분이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역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자 오랑캐 역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역사가는 광복 후 남북 분단을 남북국 시대로 부를 것이다. 지난 세월 남한과 북한은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보다 더 심한 이념 대결로 일관해 왔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도 있었다. 최근 극우 정권은 남한과 북한 관계를 6·15 선언 이전 대결 국면으로 돌려놓았다.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여 평화와 공존을 이룩한 우리 선조의 남북국 시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결과다.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 간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남북한이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서로 인정하여 공존하면 전쟁 위험은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남과 북의 동질성이 회복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먼저 남북국 간에 오고 감에 제한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평화적 공존을 통해 번영하는 신남북국 시대를 기대해 본다.(1)

 

 

 

심백강

 

"淸 태조 누르하치는 신라인 후손"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인터뷰(下)- 동아시아의 문명의 시작과 끝


이상흔조선pub 기자   |2015-03-25

 
중원 대륙에서 발견되는 삼한시대 관련 유적

 

......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손들
-금나라 역사서에 금태조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1115~1234)의 시조인 함보(函普)가 신라인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신라와 금나라와의 관계는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요.
“금나라는 전성기에 북송을 멸망시키고, 남송과 서하를 굴복시키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120년간 중원을 다스렸습니다. 금나라에 대한 현재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여러 중국민족 가운데 하나인 여진족이 수립한 정권으로 기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금나라는 여진족, 거란족, 한족, 발해족, 고려족 등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통치세력은 신라족 계통이었습니다. 따라서 금나라는 신라족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진족이 주요 구성원인데 어떻게 그렇게 보시는지요.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와 노나라의 건국을 주도한 통치 집단은 서주로부터 이주해온 세력이었지만, 먼 옛날부터 토착민으로 이 지역에 거주한 원주민은 우이(嵎夷)와 내이(萊夷)였습니다. 이 두 민족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민족을 구성하는데 주체 성분이지만, 제나라와 노나라를 우이족 내이족 정권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함보가 신라의 선진문명을 가지고 여진 지역으로 가서 추대를 받아 수령에 취임했고, 그 후손이 여러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운 게 금나라입니다. 당연히 신라인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면 여진족 중에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보와 그 후손 아골타는 신라인이라는 것이 청나라 이전 중국문헌에 보이는 공통된 견해입니다.”
-함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함보는 신라가 망할 무렵에 여진으로 터전을 옮겼으니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고려사》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김극수(金克守)라는 분이 바로 함보와 동일인이 확실합니다. 이 분은 고려에서 망명한 신라왕족의 후예인 김행의 아들입니다.
《고려사》에는 금나라 시조의 후손들, 즉 아골타를 비롯하여 금의 초창기 왕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호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때 나온 《흠정만주원류고》는 금나라 국호도 신라왕의 김씨 성에서 유래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청나라 당대 최고 학자들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거친 끝에 내린 최후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후손들이 청나라(1616~1912)를 세웠다. 심백강 원장은 “동북 백두산 지역에 근거지를 두었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리장성 너머 중국의 동북지방이 모두 중국의 강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족이 중원을 다스리던 한ㆍ당ㆍ송ㆍ명 시대에는 만리장성 너머 동북방을 제대로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선비ㆍ말갈ㆍ거란ㆍ여진 등 동이(東夷) 민족들이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만 또한 청나라의 강희 황제가 중국에 편입시킨 땅입니다.
오늘날 거대한 중국의 기초를 닦은 것은 한나라도 당나라도 송나라도 명나라도 아닌 바로 동이민족이 세운 청나라 왕조였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애신각라(愛新覺羅) 누루하치가 세운 나라로 원래 국호는 대금(大金)이었으며 그 아들 황태극에 이르러 비로소 국명을 청으로 개정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심백강 원장은 청나라 황실의 성(姓)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애신’은 만주어로 ‘금(金)’을 의미하며, ‘각라’는 여진어에서 ‘원방(遠方)’을 의미하는데 후에 ‘원지(遠支)’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국 만주어 애신각라는 김원지(金遠支)인데 우리말로는 ‘김씨의 먼 지손’이 된다는 것이다. 심 원장의 부연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는 남송과 몽고의 협공으로 멸망했으나, 잔존세력들이 중국의 동북방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명이 부패하고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누루하치가 분열된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웠습니다. 앞서 조상들이 세운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죠. 2대 황제인 황태극이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꾸면서 국명에 내재된 신라왕실 김씨의 흔적은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성씨인 ‘애신각라’ 네 글자에는 청나라가 신라 김씨의 후예라는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원장님 말씀을 들으니, 우리 역사를 대하는 시각부터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신라왕실의 김씨 후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 김씨 왕조인 금나라를 세웠고, 이 금나라가 발전하여 중국 천하를 완벽하게 통일한 것이 바로 청나라 왕조입니다. 반만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밝달족에 의해 요서의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최후의 국가 역시 밝달족 신라의 후손들에 의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밑을 발상지로 하여 건국된 것입니다.”(2)

 

 

 

이도학

 

"여진족 역사, 한국사에 넣어야"

황윤정2012. 7. 15. 07:38

 

이도학 교수 주장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장백산 문화론'을 내세워 고구려·발해사가 여진족(만주족)의 금·청나라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펴는 가운데 여진족의 역사를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오는 20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고대사의 시공간적·문헌적 범위'를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연구논문 '한국사의 확대과정과 여진사(女眞史)의 귀속 문제'를 발표한다.

 

이 교수는 이 논문에서 청나라 이전의 여진족의 역사는 중국사로 볼 수 없다면서 한국사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만주 지역에서 생성과 성장·소멸을 거듭했던 종족의 역사 가운데 부여와 고구려, 발해는 한국사에 편입됐는데 동일하게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여진족의 역사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여진족의 역사는 숙신(肅愼)→읍루(邑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산해관 이남으로 진격해 중원 대륙을 제패하고 청(淸)이 되었을 때는 중국사인 것이 분명하다"면서 하지만 그 이전의 여진사는 "중국사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사료와 문헌을 제시하면서 12세기 이후 정치적으로 만주 지역의 지배 종족이 된 여진족의 국가 기원이 한국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려사'는 물론 '이역지'(異域志)와 '신록기'(神麓記) 등 중국 문헌들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역사학자 손진태가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의 역사 인식을 이어받아 금나라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시켰지만 이러한 역사 인식이 계승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여진의 존재는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의해 우리 역사로 인식됐으며 해방 후 출간된 손진태의 저작물에선 숙신 이래 여진의 금사(金史)까지 한국사에 편재했다"면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후금의 역사까지도 한국사 체계에 편제하는 작업이 유효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간도 문제와 엮어져 있는 이 사안과 관련해 후금의 역사를 한국사에 편제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3)

 

 

 

김위현

 

"금나라는 우리 역사, 요하문명은 '고조선문명'"

송고시간2012-10-31 11:52

한중연, '한국사 시공간적 범위·정체성' 세미나 개최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금나라는 어느 모로 보나 고구려와 발해 못지않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와 함께 3국 정립시대에 한 축이었으며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을 이루었다. 또 금나라는 고려와 다시 남북국을 이루었다."(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만주와 몽골초원 더 넓게는 중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넓혀서 교류와 이동의 역사관으로 새롭게 바라보아야한다."(우실하 항공대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한민족공동체연구소가 다음 달 2일 주최하는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와 정체성을 재검토하는 연속 세미나'에서 발표될 연구 논문의 주요 내용이다.

 

중국이 동북공정 등을 통해 역사 왜곡의 강도를 높여나가는 지금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역사학계에는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에 대해 주류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이른바 '비주류 학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 비주류 학자들은 주류학계 관점이 식민사학이 만든 틀 안에 갇혀 한민족 역사의 전모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중연은 31일 "비주류 학자들의 이론과 입장을 중심으로 토론의 자리를 만들고 한국사의 진정한 범위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단절되지 않았으며 금나라도 우리나라 역사의 범주 내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는 '요하문명과 한민족 고대사 - 단군신화 다시 읽기와 고대사 연구방향'이란 연구논문에서 "이제까지 신화로만 보던 '단군시대'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홍산 문화의 토템은 곰"이라면서 홍산 문화의 주도세력인 곰 토템족이 단군신화의 웅녀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중국은 최근 홍산문화를 포함한 만주 지역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그는 "요하일대에 중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제5의 문명권이 있었다"면서 "그 주도 세력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바탕으로 동북 고대사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수 천 년 전 요하문명이 탄생할 때에는 중국도 한국도 없었으며 요하문명은 동북아 모든 국가의 '공통의 시원(始原) 문명'으로 봐야 한다고 우 교수는 분석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복식과 예술로 본 홍산문화와 고조선'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소하서 문화의 뒤를 이은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낸다"면서 "이 문화유적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은 옥기와 새김무늬 질그릇으로, 신석기 초기부터 한반도지역의 유물과 성격을 같이해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요하문명을 '고조선 문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4)

 

 

박성수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 박성수
  • 입력2006-10-25 13:41:00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두 가지 가설을 이상하게 보는 독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의태자 문제에 관한 한 또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엄연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0년 전에 만주 영고탑(寧古塔)으로 알려진 발해진을 탐방한 일이 있다. 발해진은 발해의 상경이요, 요의 상경이기도 한 역사의 고장일 뿐만 아니라 금 태조가 공격하여 되찾은 우리의 서울이었다. 가던 날 발해진 광화문 위에는 구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그곳 조선족 한 사람이 한 말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이 땅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우리 땅입니다. 중국 사람 말 듣지 마시구레.”

또 다른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보고가 들어왔다. 다행히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 것도 같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금준(今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금씨란 우리나라에 드문 성이니 김씨가 맞을 것이고,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이야말로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혁명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대륙을 통일하는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여진으로 떠난 마의태자 후손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족보 문제는 나중에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그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금나라 세워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5)
 

 

 

신완순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예

  • 기자명신완순 
  • 입력 2016.04.05 11:31
  • 수정 2018.11.19 23:04

금나라는 대륙 북부를, 청나라는 모두 차지했다.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여진 금(金)나라...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소위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의 이분법적 세계관 틀 속에서 모든 사물과 역사를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주의에 몰입된 비자주적이며 편협한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으며 우리의 역사와 얼의 싹을 잘라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광복 70 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중국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자기들이 천하의 중심인 중화이며 우리는 변방의 오랑캐로 치부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라고 부르고 야만인이라 생각하는 흉노나 선비, 거란, 말갈 등을 우리도 중국이나 우리보다 못한 천박하고 비루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여진(女眞)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고려시대에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내몰고 아홉 성을 쌓은 곳이 두만강 이북 7백리 선춘령 일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사하고 여진이라는 말의 뜻이나 여진의 역사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다. 여진하면 함경도 일대부터 그 북쪽 변경에 살던 부족으로 고려를 괴롭힌 오랑캐 정도로 인식하는 막연한 역사인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진, 고조선 후예.... 야만스런 오랑캐 아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금나라의 본래 이름은 주루준(珠嚕凖)이었는데 설음(舌音)이 와전이 되어 여진이 되었으며 혹은 루르진(魯爾錦)이었다고 한다. 혹은 발해의 별족(别族)이라고도 하고 또는 삼한의 하나인 진한(辰韓)의 후예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대금국지>에서 주리진(珠里眞)이라 하였다. 만주어에 소속(所屬)을 주신(珠申)이라 하는데 주리진과 음이 서로 가까우며 완급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모두 숙신(肅愼)이 바뀐 음이다. 후에 여진 혹은 려진(慮眞)으로 와전이 되었다. 숙신의 후예이며 발해의 별족이다.”라고 하여 여진이라는 말의 유래와 뿌리를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북애자가 편찬한 <규원사화>에도 “여진은 숙신의 후예이다. 그 옛 풍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벗을 믿음에 예의와 정성으로 한다.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여진이 야만스런 오랑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옛 성스러운 임금’은 단군을 말한다. 그런데 청나라 서건학(徐乾學)이 편찬한 <자치통감후편>과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이 모두는 모두 옛 성스러운 임금께서 펼친 가르침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 대신 ‘개출자연(皆出自然)’이라 바뀌어 있다. 개출자연은 “대개 자연스럽게 생긴 풍속”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골타(阿骨打, 1068년 ~ 1123년)이며 <요사>와 <송사>는 아고달(阿古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만주어 ‘아구다(Aguda)’를 가차한 것이며 ‘너그럽고 넓은 아량이나 모양(寛濶)’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구다는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9년(1115년 ~ 1123년) 동안 재위하였으며 한자식 휘는 민(旻)이다. 그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이었으며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하고 요나라를 공격하였다.

▲금나라 태조 김아구다의 모습. 조우(鳥羽)로 된 모자 깃이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임을 말해 주고 있다.

 

신라의 9주, 현 만주 지역 포함

금나라의 시조에 대하여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기록되어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는 “<통고>와 <대금국지>에는 모두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고려와 더불어 옛 땅이 서로 맞물려 있어서 <요사>나 <금사>에서는 왕왕 두 나라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덧붙여서 “사전(史傳)의 기록으로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의 왕은 김(金)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여 온 것인즉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건국한 나라의 이름 또한 당연히 이것을 취하였다. <금사지리지>에서 나라 안에 금이 있는 물줄기가 있어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며, 전거로 삼기에 부족할 따름이다.”라고 하여 금나라의 시조와 국명의 연원이 신라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이처럼 금나라의 연원이 신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부족’편과 ‘강역’ 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9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사습유(遼史拾遺)>와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録)>을 인용하여 신라산(新羅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동주(同州)에 이르면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보이는데 신라산이며 산의 깊은 곳과 더불어 고려와 경계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이 신라산은 오늘날(청나라 건륭제 당시)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의 사이’라고 하고 있어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으며 고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를 뜻하는 ‘계림(鷄林)’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한자 독음으로는 ‘길림’과 ‘계림’이 서로 다르지만 현 중국어 발음으로도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다. 김함보가 추장으로 있었으며 아구다가 금나라를 세운 요나라의 완안부가 신라의 강역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완안(完顔)’이라는 말은 <대금국지>에서 한어(漢語)로 왕(王)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신라왕의 후손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금나라의 시조인 김함보는 신라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라 이름을 정함에 있어서도 <금사>에서 “완안부 사람들이 밝은(白) 것을 숭상하고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금(金)을 취하여 ‘대금(大金)’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어 성(姓)과 그 뜻을 취하였음이 분명하다.

 

금나라, 대부분 고구려와 발해 부족들로 구성

완안부 세력을 규합하고 금나라를 세운 태조 김아구다(완안아골타)는 요(遼)나라를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서성의 대동(大同), 하북성의 연경(燕京)으로 진출하였다.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하남성의 변경(卞京)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임금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나라는 만주 전역과 내몽골, 하북성, 하남성, 섬서성, 산서성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제3대 희종(熙宗,재위 1135∼1149)때에 회수(淮水), 섬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남송의 임금은 신하의 예로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 필을 매년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의 대부분과 만주와 유라시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금나라의 강역을 표시한 중국역사지도집 - 금나라는 회수 이남을 제외한 중원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금나라가 이처럼 요나라에 이어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금나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군사 조직으로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는 맹안모극을 군사 행정 제도로 실시한 금태조의 강력한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금나라의 군사제도는 후대에 금나라를 이었다고 하여 후금(後金)으로 불린 청나라의 8기(旗) 군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1115년 건국하여 1234년 몽골에게 망할 때까지 120년간 존속한 금나라는 정복전쟁만 일삼은 것이 아니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문화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제5대 세종(世宗, 재위 1161∼1189)때는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였으며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여진 문자는 1119년에 태조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 11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존속기간 만에 금나라가 멸망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규원사화>의 ‘만설’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나라의 폐단은 한 때의 이익에 급급하여 오랜 폐악을 답습한데 있었으니, 그 중엽에 이르러 요(遼)의 검소하고 소박함을 깔보고 송(宋)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글을 따랐으며, 송(宋)의 너그럽고 부드러움은 제재하고 요(遼)의 엄격한 정치만을 더하게 되었다. 이는 두 나라의 장점을 버리고 그 단점들을 아울러 쓴 격이다. 그러한 까닭에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기승을 부리니 재정은 바닥이 나고, 엄격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백성들은 피해를 입었다. 무릇 나라의 살림이 고갈되고 백성의 마음이 떠났는데 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여 같은 고조선의 후예인 금나라 멸망을 한탄하고 있다.

금나라가 흑수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요동과 만주를 석권하고 장성을 넘어 변경을 도륙한 뒤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내쫓았다. 그랬더니 송나라의 군신이 신하를 자칭하고 목숨을 구걸하고 아첨을 떤 일은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을 통탄한 것이다.

 

여진이던 말갈이던 우리의 '사둔(一家)'

금나라는 멸망 이후 4백 년이 흐른 17세기 중반에 청나라의 중원대륙 제패로 다시 한 번 부활하였으나 금나라를 바라보는 고려의 시각이나 청나라를 바라보는 조선의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부모의 나라에서 형제의 나라로 바뀌었으며 나아가 청나라의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진 말 중에 ‘사둔(Sadu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친척 집안(親家)’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사둔’ 또는 ‘사돈’과 음과 뜻이 같은 말이다. 원래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사돈을 맺는다.’는 말로서 남녀 개인 간의 결합뿐만이 아닌 다른 집안끼리 친척이 되기로 맺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한집안(一家)이 되는 것이다. 말갈이라 부르든 여진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배달 고조선 고구려를 거쳐 이어온 같은 강역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는 ‘친척 집안’이며 일가(一家)이다. 금나라의 뿌리가 신라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이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었고 그 땅이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전향적인 연구와 인식이 절실하다.(6)

 

 

성헌식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

성헌식의 ‘대고구리’

입력 2013-08-03 16:21:08

 
5천년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통일국가는 한·송·명 세 나라로 이들의 존속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천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즉, 중국 역사의 대부분이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왜 수·당나라가 포함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비록 수·당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으나 한족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수·당의 왕실이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봄으로서 과연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중국의 역사인지 우리와 동족의 역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통일국가 송나라(960~1279)의 역사
 
통일국가였던 당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5대 10국 시대가 된다. 그 중 5대 최후의 왕조였던 후주(後周)의 근위대장군이었던 조광윤이 왕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세운다.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이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송나라의 북방 요나라와 서쪽 위구르에 탕구트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가 통일국가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은 당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강화도 마니산 개천각에 모셔져 있는 금태조 아골타. 개천각은 환웅, 치우,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 24분의 조상을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 아골타가 포함돼 있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1004년 북쪽에 있던 요나라가 공격하자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굴욕적인 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개조이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또한 송나라는 서쪽 탕구트족이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공격하자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는다.
 
여진족은 처음에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이라 했다. 송 휘종은 종전에 요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금나라로 보내면서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자, 금나라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1126년 멸망시킨다. 당시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했다. 워낙 전투력이 없었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자 금나라가 분노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다. 그러자 송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떠넘긴다. 휘종은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 군대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약조가 잘 지켜지지 않자 다시금 금나라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126년 11월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만다. 금나라는 송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무릎을 꿇리고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라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 금나라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이미지=필자제공>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고종이다. 1127년 금나라에게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를 남송으로 구분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아비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지위에 올라있던 터라 형인 흠종은 포로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친다.
 
남송은 장군 악비의 선전으로 한때 금나라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으나 힘이 부친 남송은 전쟁 대신 강화를 간절히 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강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금나라의 강압에 남송의 진회는 악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린다. 악비가 죽고 얼마 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조건이 남송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1.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할 것
2.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할 것
3.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칠 것
4.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할 것
 
이로써 남송은 생명을 140여년 더 연장하지만, 결국 금·송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요나라의 1차 침입과 서희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을 무너뜨린 요나라는 2대 황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 들어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연의 맹’의 대가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하여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 때 고려를 3차례나 공격했다. 993년 1차 침입 때 요나라 장수 소손녕에게 고려군의 선봉이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파와 땅을 분할하여 요나라에게 주자는 파로 갈리게 된다. 그러자 서희가 항복이나 땅을 주는 것은 만고의 치욕이라고 하면서 먼저 자신이 나서 일전을 겨룬 후로 그 결정을 미루어달라고 하고는 요나라 진영으로 달려갔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에게 상견의 예를 청하자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는 당장 뜰에 엎드려 절을 올려라”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양국의 대신 간에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高句麗 땅은 우리가 다 소유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땅을 침식하는 것이며, 또 너희 나라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해(海)를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너희 고려가 땅을 분할하여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요를 철군시키고 강동6주까지 반환받는다. <이미지=필자제공>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뒤를 이었기에 국호도 고려이며 도읍지도 평양에 정한 것이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 준다면 어찌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서희의 논리가 정연하고 강경하여 소손녕은 더 이상 강압이 불가함을 알고, 군대를 돌릴 것을 결정하고는 연회를 베풀어 서희를 위로한 후 돌려보냈고, 강동 6주까지 반환받게 된다.
 
이렇듯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는 高句麗의 정통성을 누가 가졌느냐를 놓고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요나라의 역사가 어찌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진국의 오성장군 겸 요왕에 봉해진 야율아보기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을 내부쿠데타로 무너뜨리고는 高句麗와 대진국(발해)의 황족과 대신들을 중용해 국가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요나라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돌아간다. 막강했던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와 군사를 잃고는 국력이 약해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승전파티를 송의 수도 개봉에서 연다.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고려는 하남성 개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고, 아마 송이 고려의 속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 고려가 송나라 수도에서 요나라와의 전쟁 승전파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7)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성헌식의 ‘대고구리’
입력 2013-08-12 00:02:18

 

중국의 통일왕국 송나라의 두 황제를 사로잡아 무릎 꿇린 여진족의 금나라는 당시 중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각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조선왕조 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했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서는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의 항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엄연한 단군의 후예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리(高句麗)의 후예가 대진국(발해)이고 또 대진국의 후예가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이며, 금나라를 이은 것이 청나라인데 어찌 대진국(발해)까지만 우리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록의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금나라의 뿌리는 우리와 같다
 
<금사세기>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신라)에서 왔다”고 했으며, 금 태조 아골타가 요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 발해인을 초유하면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사강목>에 고려의 윤관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공적문에 “여진은 본시 고구리의 부락이다. 본디 고구리가 영유한 곳이어서 옛날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고 돼 있어 고려에서도 여진이 고구리의 후예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사세기>에 “금의 선조는 말갈로부터 나왔다. 옛 숙신의 땅이다. 5대 때에 거란에 복속되었다. 강의 남쪽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어 숙여진이라 불렀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 지역은 이른바 백산과 흑수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생(生)과 숙(熟)은 곧 신(新)과 구(舊)의 뜻이라고 한다. 
 
 ▲ 금나라 황실 가계도 및 금 태조 아골타의 동상. <사진=필자제공>

말갈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를 구성하는 주요부족이었다. 그렇기에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말갈은 15만 군대로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과 함께 싸웠던 것이며, 고구리가 망하자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는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리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왕의 성은 대씨이다”라는 기록과, <요동행부지>에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있으며 실제로는 말갈의 속말부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대진국(발해)가 말갈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말갈에 대해 <대금국지>에는 “여진은 말갈의 후예이다. 북위·제·주나라 때에는 물길로 불렸고 수나라에 이르러 말갈로 불렀다. (중략) 거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말갈은 옛 숙신씨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원사지리지>에 “흑수말갈이 발해에 복속되고 발해가 약해지자 흑수가 다시 그 땅을 회복하니 금나라 시조의 부락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금국지>에는 “금나라 시조 1세 함보(函普)는 처음에 신라에서 왔고, 완안부에 살았기에 성을 완안(完顔)씨라 했다. 신라왕의 성은 김씨로 수십 대를 이어졌다.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나라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따왔다”라는 기록과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珠里眞)으로 숙신(肅愼)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것이 뒤에 잘못 전해져 여진(女眞, 慮眞)으로 불렸으며 숙신씨의 후예로 발해의 별족이다.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어 2세 오로, 3세 아랍, 4세 소혁, 5세 실로, 6세 호란, 7세 화륵박으로 이어졌고, 8세인 금 태조 아골타는 화륵박의 둘째 아들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이다. 1115년 태조가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고치고 연호를 천보(天輔)라고 했다가 수국(收國)으로 바꿨다. 이후 금나라는 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 송나라를 공격해 두 황제를 사로잡는 전성기를 누리다 건국 120년 후인 1234년 칭기즈칸의 몽골에게 멸망당한다.
 

 ▲ 감숙성 경안현에 있는 금태조 아골타의 4째 아들 김올출의 비문 .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서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했다”고 말하고 있다. 금 태조의 4째 아들 완안올출의 후손들이 현재 감숙성 경안현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모시는 사당의 비석에는 ‘김올출’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금나라 황족은 김씨였으며, 감숙성 경안현까지 금나라 영토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에 누루하치라는 만고의 영웅이 나타나 1616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나라를 세우고는 금(金)이라 했다가 아들 태종 때 대청(大淸)으로 바꾼다. 태종은 명나라를 도모하기 전 후한을 없애고자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임금에게 항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청 태종이 인조임금을 죽이고 조선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은 서로 동족이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어 처음으로 일어났던 동방은 왕조를 일으킨 기반으로서 땅이 신령하고 상서롭다”고 하면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말갈, 발해, 신라, 백제, 금을 만주족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즉, 그들의 조상이 우리와 같다는 말이다.
 
책 서두에 있는 황제가 내리는 유지에서는 당시 한족들이 명나라를 없애고 들어선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반청의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건륭황제는 “그렇다. 우리는 소위 너희가 말하는 동이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순임금과 주무왕도 모두 이족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너희가 존경하는 맹자가 직접 ‘순임금은 동이사람이요, 주무왕도 서이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건륭황제는 “즉 동이·서이는 단지 동서 지역을 가르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명나라 출신들은 주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니 서이사람이고, 우리 청나라 사람들은 동이사람이다. 동이사람 순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서이의 후예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말했다.
 
 ▲ 동이족의 땅이었던 산서성 남부 명조가 원의 1시 방향에 그려져 있다. <이미지=필자제공>

건륭황제 유지의 근거로는 맹자가 <이루장구 하>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라고 했으며, 또한 맹자가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사람이었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족들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로 흔히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만주어로 애신은 금이라 금원(金源) 또는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즉 우리말로 ‘김씨네“라는 뜻이다.
 
 ▲ 건륭황제의 7대손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KBS방송 화면캡처>

약 300년간 중원을 지배했던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문을 닫는다. 이는 대제국 고구려가 그때까지 이어지다가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려면 고구리와 대진국의 후예인 요, 금, 청나라의 역사를 잘 밝혀야 할 것이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8)

 

 

 

주몽예

06 2015 MAGAZINE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王家의 후손이다!

글 : 주몽예  북방민족사학자·법률학 박사  

⊙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고구려 3대 ‘大武神王’에서 유래, ‘칭기즈 칸’은 ‘震國王’
    즉 ‘발해왕’이라는 의미
⊙ ‘몽골’은 ‘말갈(靺鞨)’, 즉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이라는 의미
⊙ 몽골족의 역사 다룬 《집사》 등에 나오는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발해 武王 때 발해와
    羅唐연합군의 전쟁을 다룬 것
⊙ 칭기즈 칸의 조상 엘 콘은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둘째 아들 일한
⊙ 《칭기스의 서(Da’ftari-Cingiz-nama’)》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황금의 칸’)’은
    金나라 태조 아골타의 조상인 金幸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 페르시아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004)》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왜일까? 바로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칭기즈 칸 관련 역사책들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다.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이다. 이 이름은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는 대조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공(震國公)’ 또는 ‘진국왕(震國王)’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k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자처한 것이다. 칭기즈 칸이 자신의 종족 이름으로 채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몽골’이라는 말은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골(馬忽)’에서 나온 것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
 
《집사》를 지은 라시드 웃딘의 동상.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지금의 이란 및 이라크 지역에 있던 몽골제국의 칸국 중 하나-편집자 주)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모든 튀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 책은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튀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필자 주)에 다른 튀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김호동 역주의 라시드 웃딘의 집사 부족지》, 파주, 2005, 252~256쪽)
 
몽골, 타타르, 튀르크
 
  칭기즈 칸은 스스로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일컬었다. 원래는 칭기즈 칸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것이었지만, 후일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튀르크·페르시아 등에는 ‘모골’, 인도에는 ‘무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타타르(韃靼)’는 칭기즈 칸의 몽골 종족과 대립하다가 칭기즈 칸에게 정복된 종족 중 하나였지만, 중동이나 서방세계에는 몽골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이후에는 몽골족을 ‘달단’이라고 칭했다.
 
  ‘튀르크(突厥)’는 6세기 이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족으로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튀르크로 알려졌다. 후일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등이 중동 지역의 패자(覇者)가 됐다. 중동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튀르크족은 물론 몽골족과 타타르족을 통틀어서 ‘튀르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생존자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튀르크의 계보》(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야트’는 ‘클(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인데, 《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걸’씨는 우리말 ‘크다’에서 나온 ‘클’씨를 음차(音借)한 것이고, ‘대(大)’씨는 그 뜻(의미)을 따른 한자를 성으로 삼은 것으로,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이었지만, 대조영은 왕조를 세우면서 ‘대’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는데, ‘걸’이나 ‘대’는 모두 ‘크다’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얘기가 된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쓰면 ‘산골 물 간(澗)’이다. 키얀을 한자로 표기하면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 된다.
 
  《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의 양자 누쿠즈(《집사》의 ‘네쿠즈(Nequz)’, 《튀르크의 계보》 등의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텡기즈 콘’ 대야발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쯔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 《대씨대동보》 등을 종합해 보면,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텡기즈 콘은 대야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집사》에서 ‘튀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발해 大씨는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발해를 세운 대조영.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랴오닝성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을 보자. 이 기록들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孽=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대문예의 망명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튀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발해-唐 전쟁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문예가 쳐들어오자 무예는 발해군을 몸소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유명한 오늘날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 부근의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城邑)을 공격했다. 이때 오늘날 당나라 장액(張掖·장쑤성) 출신 오승자(烏承玼)가 요로(要路)를 막고 큰 돌들을 깨어 ‘400리’의 석성(石城)을 구축(構築)했다.
 
  이 때문에 발해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고, 발해군의 진격으로 흩어졌던 당나라 백성들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승자가 구축했다는 석성의 규모로 보아 당나라 군사는 기록상의 ‘1만명’이 아니라, 발해 남쪽 국경으로 출동한 신라군 10만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사상자도 매우 컸을 것이다. 이 싸움의 자세한 경과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튀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 부랴트(몽골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 김호동 서울대 교수 등은 일반적으로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빌렉트는 그 땅을 ‘에르군 콘(Ergun Kun)’으로도 읽으면서, 러시아 측에 있는 ‘아무르강(흑룡강) 상류의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튀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튀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今幸의 등장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있다. 또 조선 시대 김세겸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집사》에 의하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逎=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지만, 두 가지는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황금항아리’의 失地 회복
 
金나라 태조 완안아골타.
  《집사》에 의하면, 이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은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왔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튀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 혹은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서 묘사한 칭기즈 칸의 즉위식 장면. 칭기즈 칸은 그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고구려-발해의 후예임을 드러냈다.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와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한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칭기즈 칸의 후예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남북한과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져오고 있다.⊙(9)
 

 

 

 

<주>

 

 

(1)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daum.net) [서울신문]  2018. 3. 10. 

 

 


(2) "청 태조 누르하치는 신라인 후손"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下)- 동아시아의 문명의 시작과 끝 (archivesnews.com) 2015-03-25

 

 

 

(3) "여진족 역사, 한국사에 넣어야" (daum.net)  2012. 7. 15. 

 

 

 

(4) "금나라는 우리 역사, 요하문명은 '고조선문명'" | 연합뉴스 (yna.co.kr) 2012-10-31 

 

 

 

(5)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신동아 (donga.com)박성수.2006-10-25

 

 


(6)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예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8.11.19 

 

 

 

(7)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 (skyedaily.com)2013-08-03 

 

 

 

(8)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skyedaily.com)  2013-08-12 

 

 

 

(9) [역사탐험] 한 古代史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월간조선 (chosun.com)2015.06

 

 

 

 

<참고자료>

 

 


터키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 혈통  - 한국NGO신문 (ngonews.kr)
 2015.11.13

 

 

 

"淸 태조 누르하치는 신라인 후손" (chogabje.com) 이상흔(조선pub) [ 2015-03-27]

 

 


아리랑의 고향, 알타이와 몽골 초원 (pressian.com)  
2014.02.13

 

 

 

“몽골 시조 알랑 고아는 고구려 주몽의 딸”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선데이  2009.05.31 

 

 

 

유라시아 경영한 한국.고구려 후예 몽골: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7/12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금나라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역사의 계승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 Daum 카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 고구려가 나중의 몽골이 되었다 - 즉, 고구려와 몽골은 원래 같은 민족 - 김정민 박사 - Daum 카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아리랑고개-"북대흥안령", 몽·한 분족의 천년 석별 고개 - Daum 카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 주몽, 칭기즈칸의 선조 - Daum 카페

 

 

 

몽골어학당 | [책] 고구려-발해인, 칭기즈 칸 - Daum 카페

 

 


삼태극 | 금나라 청나라, 과연 한국사인가, - Daum 카페

 

 

 

 


오종홍 기자
 입력 2021.06.21 22:54수정 2021.07.20 19:53

https://cms.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08

상해 임시정부 승계한 대한민국은 요, 금 나라를 우리 역사로 가르쳐야 한다.

 

조병현 박사 상해임시정부 국사 교과서 최초 분석,

2021년 국제학술문화제 발표 예정

상해임시정부 요(遼)·금(金)·청(淸) 모두 우리 역사로 가르쳐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모두 요서 지역에 위치

고조선의 면적은 한반도의 6.3배 크기

중국 동북공정 대응‘배달민족통일론’이론 확립 주장

 

▲ 구한말 고위관리를 지낸 무원 김교헌 선생이 <신단민사>에 수록한 우리 역사의 강역이다.  자료 : 김교헌, <신단민사> 한빛 제2권 제1호 통권 제2호 (1928. 1), p. 9.

 

6월 21일부터 5일 동안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문화제에 발표 논문 중에서 단재학당 교장 조병현 박사의 ‘상해임시정부 편찬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에 관한 연구’가 화제이다.

조 박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편찬, 가르친 국사교과서의 대륙사관을 조사ㆍ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시사점을 도출함으로써 대륙사관 확립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그 동안 우리가 잘 몰랐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학생과 한인, 해외동포에게 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상해임시정부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과 민주국민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표를 설정하고, 국사교과서로 <신단민사神檀民史>와 <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를 편찬하여 무료로 보급, 국사 교육을 시킨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는 식민사학계와 민족사학계로 나뉘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의식이 없는 재판관들의 반국가적 판결은 식민사관에 기초한 잘못된 교육에 기인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국사교과서는 대륙사관을 어떻게 기술하고 가르쳤는지, 고조선의 지리적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대륙사관은 어떻게 확립하여야 하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이다.

조 박사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지적(地籍)을 연구하면서 강역의 변천사와 북방영토 회복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계속해 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을 연구하면서 상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대사 연구에 눈을 뜬 것이다.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해임시정부를 승계한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역사관과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을 지금부터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 무원 김교헌의 배달족역사 내용 일부

 

발표 논문에 의하면,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은 <조선강역도>의 강역 안에서 일어난 모든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는 전부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요(遼)·금(金)·청(淸)의 역사도 모두 우리 역사로 자세히 기술하여 가르쳤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위치는 모두 요서지역에 순차적으로 위치하였고, 공험진의 고려지경비, 윤관의 9성과 6진 개척, 서희담판, 남북극시대, 명의 정벌과 위화도회군, 백두산정계비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을 나타낸 <조선강역도>의 경계선을 추출하여 인공위성영상에 복원하여 우리의 고토, 고조선의 지리적 범위를 산정했다. 고조선 강역의 4극점의 위치와 고조선 면적, 모양을 최초로 밝힌 것이다. <고조선강역도> 상의 고조선 면적은 약 1,397,482㎢로 한반도 전체 면적 223,404km²의 6.3배에 해당된다.

▲ 자료 : 상해임시정부 역사교과서, 무원 김교헌의 신단민사 내용 일부.

 

조 박사는 “상해임시정부 국사교과서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자료가 이렇게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왜 대륙사관 연구에 소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가장 먼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륙사관에 기반하는 ‘(가칭)배달민족통일론’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인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배달민족의 강역을 우리의 정신적인 문화영토로 인식하는 ‘생활권적 잠재적 영토관’을 확립하고, 실천 이론으로 ‘배달민족통일론’ 확립을 제안하고, 이에 대한 논리와 이론 개발에 대한 연구 계획도 밝혔다.

그리고, 세계사와 융합하는 국사교육의 강화를 위한 국사 교과서 개편과 함께 한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한 정신사관 확립을 비롯하여 단국기원 복원을 위한 법률 제정을 촉구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역사교과서 발행 연도를 대만민국 연호를 쓰고, 그 외 연도는 ‘단군기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단군기원’을 사용하면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식민사관과 친일사관, 중국의 동북공정을 단번에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 박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재야사학자와 강단사학자, 교육 당국과 민간, 정부 및 관련 단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정한다면 대륙에서 일어난 배달민족의 역사를 우리역사에 편입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논리와 식민사관 청산 연구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번 국제학술문화제에서는 백범기념관 컨벤션홀에서 4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는데 조 박사는 22일 11시부터 발표할 예정이다. 토론에는 재야사학자 우창수 선생이 나선다.

 

 

 

[오재성칼럼]

여진족 한민족이라는 민족사관으로는 안된다. 족보사관이어야 한다

지나역사는 한족의 역사로 알고 있는데 정리된 것을 보면 한족역사만이 아니다. 지나25사를 보면 한족이 아닌 주변의 역사도 모두 지나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송나라이전 짧은 건국과 패망으로 반복된 역사를 통하여 항상 통합의 역사를 위하여 노력한 사관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건국과 패망의 순환이 오백년에서 천년사이의 오랜 기간의 역사를 이어 오다보니 통합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高麗이후 국가사관에 빠지기 쉬순 상태에서 신채호의 ‘我와 非我’의 분류에서 삼국후예가 조선민족과 여진족으로 분리됨으로서 씻을수 없는 왜곡의 민족사관이 만들어지고 현재의 국가사관에 충실하려다 보니 유구한 역사를 포기하는 듯 비쳐지게 되고 스스로 사서를 부정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는 아주 나뿐 버릇으로 채워져도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있다.

  삼국후예가 하나되지 못하는 신라통일사관이 판을 치고 여진족과 한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역사를 오도하게 되어 스스로 고구려 발해를 포기하는 듯 보여지게 된 것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라는 말은 19세기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지므로서 시작된 것인데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스스로 왕정시대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간 민족사관이 아니라 족보사관 즉 최초의 후예는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식으로 삼국후예인 만주인을 여진족이라 하고 高句麗(고구리) 발해 후예이지만 여진족이라며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시각으로는 우리역사를 바로 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사기에서 나타내듯 삼국인이 전통의 기준으로 했던 전전국가 九黎(구리)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족보사관에서 우리역사의 전통을 정립해야 한다.

남북이 싸웠어도 하나로 보듯 병자전쟁(병자호란)도 역시 하나로 보고, 원나라와 고리전쟁도 하나로 보고, 요나라와 고리도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정립할때야 비로소 삼국사기의 후예들은 하나로 될 것이다. 秦漢이전의 역사도 한무제 이전은 우리역사였다. 한무제가 독립하겠다고 정리하였지만 동이에서 분리된 것은 틀림이 없다. 삼국이 전통계승의 모델로 했던 九黎(구리)의 후예는 하나의 역사로 정립해야 한다.

출처;우리역사의 진실

http://www.coo21.rgro.net/bbs/zboard.php?id=hanou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9

 

 

 

 

한국·터어키 고구려국제학술대회,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의 혈통"

 

왜는 고구리의 식민지, 아시아의 지배자 고구려는 고구리로 불러야

 

기사입력: 2015/11/10 [11:11]  최종편집: ⓒ greatcorea.kr

 


  고구려의 기상이 시정구호인 구리시가 후원하고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이사장 김진만)과 이스탄불문화원, (사)한배달이 공동주최한 제2회 한국·터키 高句麗국제학술대회가 11월 7일(토) 오후에 성황리에 열렸다. 많은 시민·학생들과 역사메니아들의 지대한 관심 속에 열린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준비된 초록집과 기념품이 조기에 동나고 좌석이 모자라 상당수가 서서 경청할 정도로 붐볐다.

▲   250석 좌석이 모자라 서서 경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룬 한국.터키 고구려국제학술대회                      © 편집부

구리시의회 신동화 의장은 축사에서 터키의 6.25 참전과 2002년 월드컵 3·4위전의 감동을 회상하며 향후 한국·터어키 간에 우호친선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서, 본인도 돌궐(터키)와 고구려가 어떤 관계였는지 배우고 싶다면서 학생들과 함께 늦게까지 강연을 경청하기도 했다. 

윤호중 국회의원은 고구리는 고씨의 구리라고 운을 떼고는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몽구리 인도의 무굴제국은 무구리라고 하면서, ~~스탄이 들어간 중앙아시아 민족은 모두 단군의 후예이며 고구리와는 형제였던 투르크족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상호 존중과 융화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박창식 국회의원은 주몽과 태왕사신기와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역사가 책보다 훨씬 파급력이 크다고 전제하고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도 스토리텔링을 잘하면 동북공정에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역사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먼저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세계 속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초점은 우리와 서쪽으로 12,000km나 멀리 떨어져있는 터키와 한국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인연 때문에 서로 형제국이라고 하는 지에 있었다. 

후세인 이지트 이스탄불문화원장의 터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소개 후 터키전문가인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터어키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이것이 ‘피끌림’이라고 하면서, 예전부터 터키 국민들은 한국인을 아주 가까운 형제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터키의 짝사랑에 화답할 때라고 말하면서, 이번 국제학술대회가 자칫하면 잊고 잃어버릴 뻔 했던 지구상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역설했다.

 


주몽이 세운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불러야
학술계의 노벨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흄볼트상을 4번이나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이스탄불대학교의 오스만 세르트카야 교수는 서울대 이용성 교수의 통역을 통해 한국어와 터키어는 친척이라고 설명하면서, 돌궐비문에 뵉클리(bök li)로 새겨진 나라는 ‘맥고리(貊高麗=맥족들이 사는 고구리)’로 지금의 한반도보다 10배 이상 넓은 초원과 사막지대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면서, 당시 돌궐은 황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성헌식 학술위원장은 “주몽이 세운 나라 高句麗는 고구려가 아닌 고구리로 불렸다는 중요하고도 확실한 단서”라고 하면서, “나라이름 高句麗를 고구리로 올바르게 불러야 역사가 바로 설수 있다. 구리시가 고구리의 도시를 표방한 것도 이러한 인연 때문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과 칭기즈칸은 고구려 왕족의 혈통
얼마 전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라는 책을 출간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고 20여개국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전원철 박사는 족보 연구를 통해 예전부터 터키가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한 이유를 확실하게 밝혔다.


전 박사는 터키의 선조 오구즈칸은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4대조가 되며, 또한 대야발의 19대손이 바로 세계의 정복자 칭기즈 칸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아울러 과거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뿐만이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오히려 왜고구려부일 가능성 크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사)한배달 박정학 회장은 올해 광복 70주년이라는 주제에 맞게 일제가 호태왕 비문을 조작해 만든 임나일본부(가야=임나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설은 한마디로 허구라고 하면서, 일제의 소행으로 보이는 글자가 깨어지고 없어진 부분을 복원해보면 “호태왕이 기마병 5만을 보내 왜를 유린하자 왜국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는 高句麗의 식민지가 되었다.”라고 해설했다. 

즉 임나일본부가 아니라 오히려 ‘왜고구리부(왜가 고구리의 식민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이유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당시 왜왕이 인덕으로 교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사)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김진만 이사장은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우리의 역사 고구려에 대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표되었고, 터키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되어 향후 한국·터키간의 우호증진 및 학술교류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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