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남북국시대 (4) 금 ·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본문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 성헌식의 ‘대고구리’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
입력 2013-08-03
5천년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이 세운 통일국가는 한·송·명 세 나라로 이들의 존속기간을 다 합쳐도 겨우 천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즉, 중국 역사의 대부분이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왜 수·당나라가 포함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비록 수·당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으나 한족의 역사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는 수·당의 왕실이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어봄으로서 과연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여진족의 금(金)나라가 중국의 역사인지 우리와 동족의 역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통일국가 송나라(960~1279)의 역사
통일국가였던 당나라가 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5대 10국 시대가 된다. 그 중 5대 최후의 왕조였던 후주(後周)의 근위대장군이었던 조광윤이 왕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세운다.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태종이 마침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송나라의 북방 요나라와 서쪽 위구르에 탕구트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가 통일국가였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은 당시 중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04년 북쪽에 있던 요나라가 공격하자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겠다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굴욕적인 화의 조건은 아래와 같은 3개조이다.
1.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한다.
또한 송나라는 서쪽 탕구트족이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공격하자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는다.
여진족은 처음에는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1115년 족장 아골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이라 했다. 송 휘종은 종전에 요나라에 바치던 세금을 금나라로 보내면서 양국이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자, 금나라는 이 제안을 수용하여 대군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1126년 멸망시킨다. 당시 송나라 군대의 전과는 미미했다. 워낙 전투력이 없었고, 송나라 스스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생각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자 금나라가 분노하여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다. 그러자 송 휘종은 제위를 아들인 흠종에게 물려주고 사태의 책임 및 처리를 떠넘긴다. 휘종은 개봉을 포위한 금나라 군대와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후 약조가 잘 지켜지지 않자 다시금 금나라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126년 11월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만다. 금나라는 송 흠종과 휘종 이하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북쪽으로 개처럼 끌고 갔다. 금 태종은 휘종과 흠종의 무릎을 꿇리고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으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각각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라 이를 역사적으로 중국역사 최대의 치욕인 ‘정강의 변’이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에서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이가 고종이다. 1127년 금나라에게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를 남송으로 구분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은 금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생모와 아비 휘종의 유해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지만, 고종이 이미 황제의 지위에 올라있던 터라 형인 흠종은 포로송환대상에서 제외되어 쓸쓸하게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친다.
남송은 장군 악비의 선전으로 한때 금나라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으나 힘이 부친 남송은 전쟁 대신 강화를 간절히 원했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강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금나라의 강압에 남송의 진회는 악비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여 버린다. 악비가 죽고 얼마 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는데, 조건이 남송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1.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다할 것
2. 금나라 왕이 송나라 왕을 황제로 책봉할 것
3. 송나라는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을 세공으로 금나라에 바칠 것
4. 국경선은 동쪽으로는 회수, 서쪽으로는 대산관(섬서성 보계)을 연결하는 선으로 할 것
이로써 남송은 생명을 140여년 더 연장하지만, 결국 금·송 모두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요나라의 1차 침입과 서희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을 무너뜨린 요나라는 2대 황제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 들어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연의 맹’의 대가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하여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 때 고려를 3차례나 공격했다. 993년 1차 침입 때 요나라 장수 소손녕에게 고려군의 선봉이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파와 땅을 분할하여 요나라에게 주자는 파로 갈리게 된다. 그러자 서희가 항복이나 땅을 주는 것은 만고의 치욕이라고 하면서 먼저 자신이 나서 일전을 겨룬 후로 그 결정을 미루어달라고 하고는 요나라 진영으로 달려갔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희가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에게 상견의 예를 청하자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는 당장 뜰에 엎드려 절을 올려라”라고 요구하자, 서희는 “양국의 대신 간에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高句麗 땅은 우리가 다 소유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땅을 침식하는 것이며, 또 너희 나라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해(海)를 건너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으니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너희 고려가 땅을 분할하여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高句麗의 뒤를 이었기에 국호도 고려이며 도읍지도 평양에 정한 것이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 준다면 어찌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서희의 논리가 정연하고 강경하여 소손녕은 더 이상 강압이 불가함을 알고, 군대를 돌릴 것을 결정하고는 연회를 베풀어 서희를 위로한 후 돌려보냈고, 강동 6주까지 반환받게 된다.
이렇듯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는 高句麗의 정통성을 누가 가졌느냐를 놓고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요나라의 역사가 어찌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진국의 오성장군 겸 요왕에 봉해진 야율아보기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발해)을 내부쿠데타로 무너뜨리고는 高句麗와 대진국(발해)의 황족과 대신들을 중용해 국가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요나라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돌아간다. 막강했던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많은 영토와 군사를 잃고는 국력이 약해져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요나라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승전파티를 송의 수도 개봉에서 연다. 만일 고려가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고려는 하남성 개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고, 아마 송이 고려의 속국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진다.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1)
청나라 건륭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어 처음으로 일어났던 동방은 왕조를 일으킨 기반으로서 땅이 신령하고 상서롭다”고 하면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말갈, 발해, 신라, 백제, 금을 만주족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즉, 그들의 조상이 우리와 같다는 말이다.
■ 성헌식의 ‘대고구리’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입력 2013-08-12
중국의 통일왕국 송나라의 두 황제를 사로잡아 무릎 꿇린 여진족의 금나라는 당시 중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각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조선왕조 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했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서는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의 항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원에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엄연한 단군의 후예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리(高句麗)의 후예가 대진국(발해)이고 또 대진국의 후예가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이며, 금나라를 이은 것이 청나라인데 어찌 대진국(발해)까지만 우리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록의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금나라의 뿌리는 우리와 같다
<금사세기>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신라)에서 왔다”고 했으며, 금 태조 아골타가 요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나서 발해인을 초유하면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사강목>에 고려의 윤관 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공적문에 “여진은 본시 고구리의 부락이다. 본디 고구리가 영유한 곳이어서 옛날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고 돼 있어 고려에서도 여진이 고구리의 후예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사세기>에 “금의 선조는 말갈로부터 나왔다. 옛 숙신의 땅이다. 5대 때에 거란에 복속되었다. 강의 남쪽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어 숙여진이라 불렀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란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 지역은 이른바 백산과 흑수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생(生)과 숙(熟)은 곧 신(新)과 구(舊)의 뜻이라고 한다.
말갈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를 구성하는 주요부족이었다. 그렇기에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말갈은 15만 군대로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과 함께 싸웠던 것이며, 고구리가 망하자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는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의 전신인 후고구리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왕의 성은 대씨이다”라는 기록과, <요동행부지>에 “발해는 흑수말갈의 남쪽에 있으며 실제로는 말갈의 속말부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대진국(발해)가 말갈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말갈에 대해 <대금국지>에는 “여진은 말갈의 후예이다. 북위·제·주나라 때에는 물길로 불렸고 수나라에 이르러 말갈로 불렀다. (중략) 거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말갈은 옛 숙신씨이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은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한다. <원사지리지>에 “흑수말갈이 발해에 복속되고 발해가 약해지자 흑수가 다시 그 땅을 회복하니 금나라 시조의 부락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대금국지>에는 “금나라 시조 1세 함보(函普)는 처음에 신라에서 왔고, 완안부에 살았기에 성을 완안(完顔)씨라 했다. 신라왕의 성은 김씨로 수십 대를 이어졌다. 금나라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나라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따왔다”라는 기록과 “금나라의 본명은 주리진(珠里眞)으로 숙신(肅愼)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것이 뒤에 잘못 전해져 여진(女眞, 慮眞)으로 불렸으며 숙신씨의 후예로 발해의 별족이다. 남쪽으로 고려와 이웃하고 서쪽은 발해와 경계를 하고 동쪽은 바닷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어 2세 오로, 3세 아랍, 4세 소혁, 5세 실로, 6세 호란, 7세 화륵박으로 이어졌고, 8세인 금 태조 아골타는 화륵박의 둘째 아들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이다. 1115년 태조가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으로 고치고 연호를 천보(天輔)라고 했다가 수국(收國)으로 바꿨다. 이후 금나라는 1125년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127년 송나라를 공격해 두 황제를 사로잡는 전성기를 누리다 건국 120년 후인 1234년 칭기즈칸의 몽골에게 멸망당한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에서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했다”고 말하고 있다.
금 태조의 4째 아들 완안올출의 후손들이 현재 감숙성 경안현에 살고 있는데, 그들이 모시는 사당의 비석에는 ‘김올출’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금나라 황족은 김씨였으며, 감숙성 경안현까지 금나라 영토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에 누루하치라는 만고의 영웅이 나타나 1616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나라를 세우고는 금(金)이라 했다가 아들 태종 때 대청(大淸)으로 바꾼다. 태종은 명나라를 도모하기 전 후한을 없애고자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임금에게 항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삼전도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당시 청 태종이 인조임금을 죽이고 조선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은 서로 동족이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편찬한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우리나라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열어 처음으로 일어났던 동방은 왕조를 일으킨 기반으로서 땅이 신령하고 상서롭다”고 하면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말갈, 발해, 신라, 백제, 금을 만주족의 뿌리로 여기고 있다. 즉, 그들의 조상이 우리와 같다는 말이다.
책 서두에 있는 황제가 내리는 유지에서는 당시 한족들이 명나라를 없애고 들어선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반청의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건륭황제는 “그렇다. 우리는 소위 너희가 말하는 동이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숭상해 마지않는 순임금과 주무왕도 모두 이족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너희가 존경하는 맹자가 직접 ‘순임금은 동이사람이요, 주무왕도 서이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건륭황제는 “즉 동이·서이는 단지 동서 지역을 가르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명나라 출신들은 주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니 서이사람이고, 우리 청나라 사람들은 동이사람이다. 동이사람 순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서이의 후예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말했다.
건륭황제 유지의 근거로는 맹자가 <이루장구 하>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라고 했으며, 또한 맹자가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사람이었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족들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신라인이라는 이유로 흔히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만주어로 애신은 금이라 금원(金源) 또는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즉 우리말로 ‘김씨네“라는 뜻이다.
약 300년간 중원을 지배했던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문을 닫는다. 이는 대제국 고구려가 그때까지 이어지다가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려면 고구리와 대진국의 후예인 요, 금, 청나라의 역사를 잘 밝혀야 할 것이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2)
<자료출처>
(1)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 (skyedaily.com)2013-08-03
(2) 중국 중원을 지배한 금·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동족 (skyedaily.com)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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