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남북국시대 (1)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본문

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유학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유학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동이족 여러 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로 보이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요, 금, 청 백성들은 모두 고구려와 발해 백성들 후예였으니 이들 역사가 우리 역사일 수밖에 없다.
■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유학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유학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동이족 여러 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로 보이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요, 금, 청 백성들은 모두 고구려와 발해 백성들 후예였으니 이들 역사가 우리 역사일 수밖에 없다.
신라와 발해, 금과 고려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서로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공존의 대상으로 보았다. 요는 송(宋)을, 청은 명(明)을 정복하기 전에 배후 정지 작업으로 각각 고려와 조선에 침입했다. 3차에 걸친 요의 고려 침입은 실패했다. 조선과 청나라는 전쟁 없이 공존할 길이 있었다. 광해군이 실제 그런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과 조선 사이에는 병자호란이 있었고 조선이 항복했다. 조선의 자업자득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기 1623년 인조반정 명분은 사실상 망한 명(明ㆍ1368~1644)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였다. 인조 정권은 힘도 없으면서 사대주의에 찌들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을 오랑캐로 멸시하고 명을 멸망시킨 불구대천 원수로 삼았다. 그러니 청은 조선을 손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국제 정세에 어둡고 사대주의 명분론이 불러온 참화였다. 그러나 청은 조선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 조선 지배층은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1910년 일제에 나라가 망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사림 영수로서 태두가 된 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창하는 힘으로 애국의 의리를 주창했다면 어찌 나라가 망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반성이다. 그랬기에 ‘꿈에 금 태조 아골타를 뵙고 절하다’(夢拜金太祖)라는 글을 남겼다.
사대주의는 중국인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자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여진족 금 태조 아골타가 박은식 선생에게 우리의 영웅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교헌 선생은 조선이 1910년에 일제에 망하고 청나라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하자 “배달민족 국가가 남북조에 걸쳐 한꺼번에 끊어짐은 초유의 일이다”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을 개척했고 대종교 2세 교주로서 대일항쟁 선두에 서신 분이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역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자 오랑캐 역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세 역사가는 광복 후 남북 분단을 남북국 시대로 부를 것이다. 지난 세월 남한과 북한은 성리학 도그마와 사대주의보다 더 심한 이념 대결로 일관해 왔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도 있었다. 최근 극우 정권은 남한과 북한 관계를 6·15 선언 이전 대결 국면으로 돌려놓았다.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여 평화와 공존을 이룩한 우리 선조의 남북국 시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결과다.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 간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남북한이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서로 인정하여 공존하면 전쟁 위험은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남과 북의 동질성이 회복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먼저 남북국 간에 오고 감에 제한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평화적 공존을 통해 번영하는 신남북국 시대를 기대해 본다.(1)
상해 임시정부 승계한 대한민국은 요, 금 나라를 우리 역사로 가르쳐야 한다.
조병현 박사 상해임시정부 국사 교과서 최초 분석,
2021년 국제학술문화제 발표 예정
상해임시정부 요(遼)·금(金)·청(淸) 모두 우리 역사로 가르쳐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모두 요서 지역에 위치
고조선의 면적은 한반도의 6.3배 크기
중국 동북공정 대응‘배달민족통일론’이론 확립 주장
■ 조병현 박사, ‘요, 금, 청’ 나라는 우리 역사
기자명오종홍 기자 입력 2021.06.21 22:54 수정 2021.07.20 19:53

6월 21일부터 5일 동안 백범기념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문화제에 발표 논문 중에서 단재학당 교장 조병현 박사의 ‘상해임시정부 편찬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에 관한 연구’가 화제이다. 조 박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편찬, 가르친 국사교과서의 대륙사관을 조사ㆍ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시사점을 도출함으로써 대륙사관 확립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그 동안 우리가 잘 몰랐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학생과 한인, 해외동포에게 국사를 가르쳐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상해임시정부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과 민주국민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표를 설정하고, 국사교과서로 <신단민사神檀民史>와 <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를 편찬하여 무료로 보급, 국사 교육을 시킨 것이다.
현재 역사학계는 식민사학계와 민족사학계로 나뉘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의식이 없는 재판관들의 반국가적 판결은 식민사관에 기초한 잘못된 교육에 기인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국사교과서는 대륙사관을 어떻게 기술하고 가르쳤는지, 고조선의 지리적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대륙사관은 어떻게 확립하여야 하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이다.
조 박사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지적(地籍)을 연구하면서 강역의 변천사와 북방영토 회복 방안에 대하여 연구를 계속해 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을 연구하면서 상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대사 연구에 눈을 뜬 것이다.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해임시정부를 승계한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역사관과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을 지금부터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발표 논문에 의하면,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대륙사관은 <조선강역도>의 강역 안에서 일어난 모든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는 전부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요(遼)·금(金)·청(淸)의 역사도 모두 우리 역사로 자세히 기술하여 가르쳤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위치는 모두 요서지역에 순차적으로 위치하였고, 공험진의 고려지경비, 윤관의 9성과 6진 개척, 서희담판, 남북국시대, 명의 정벌과 위화도회군, 백두산정계비 등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을 나타낸 <조선강역도>의 경계선을 추출하여 인공위성영상에 복원하여 우리의 고토, 고조선의 지리적 범위를 산정했다. 고조선 강역의 4극점의 위치와 고조선 면적, 모양을 최초로 밝힌 것이다. <고조선강역도> 상의 고조선 면적은 약 1,397,482㎢로 한반도 전체 면적 223,404km²의 6.3배에 해당된다.

조 박사는 “상해임시정부 국사교과서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자료가 이렇게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왜 대륙사관 연구에 소홀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가장 먼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륙사관에 기반하는 ‘(가칭)배달민족통일론’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인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배달민족의 강역을 우리의 정신적인 문화영토로 인식하는 ‘생활권적 잠재적 영토관’을 확립하고, 실천 이론으로 ‘배달민족통일론’ 확립을 제안하고, 이에 대한 논리와 이론 개발에 대한 연구 계획도 밝혔다.
그리고, 세계사와 융합하는 국사교육의 강화를 위한 국사 교과서 개편과 함께 한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한 정신사관 확립을 비롯하여 단국기원 복원을 위한 법률 제정을 촉구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역사교과서 발행 연도를 대만민국 연호를 쓰고, 그 외 연도는 ‘단군기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단군기원’을 사용하면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식민사관과 친일사관, 중국의 동북공정을 단번에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 박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재야사학자와 강단사학자, 교육 당국과 민간, 정부 및 관련 단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정한다면 대륙에서 일어난 배달민족의 역사를 우리역사에 편입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논리와 식민사관 청산 연구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2)
<자료출처>
(1)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 (daum.net) [서울신문] 2018. 3. 10.
(2) https://cms.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08 오종홍 기자 입력 2021.06.21 수정 2021.07.20
<참고자료>
우리역사의 진실
[오재성칼럼]
여진족 한민족이라는 민족사관으로는 안된다. 족보사관이어야 한다
지나역사는 한족의 역사로 알고 있는데 정리된 것을 보면 한족역사만이 아니다. 지나25사를 보면 한족이 아닌 주변의 역사도 모두 지나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송나라이전 짧은 건국과 패망으로 반복된 역사를 통하여 항상 통합의 역사를 위하여 노력한 사관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건국과 패망의 순환이 오백년에서 천년사이의 오랜 기간의 역사를 이어 오다보니 통합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高麗이후 국가사관에 빠지기 쉬순 상태에서 신채호의 ‘我와 非我’의 분류에서 삼국후예가 조선민족과 여진족으로 분리됨으로서 씻을수 없는 왜곡의 민족사관이 만들어지고 현재의 국가사관에 충실하려다 보니 유구한 역사를 포기하는 듯 비쳐지게 되고 스스로 사서를 부정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는 아주 나뿐 버릇으로 채워져도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있다.
삼국후예가 하나되지 못하는 신라통일사관이 판을 치고 여진족과 한민족이라는 이분법으로 역사를 오도하게 되어 스스로 고구려 발해를 포기하는 듯 보여지게 된 것이다.
한민족과 여진족이라는 말은 19세기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지므로서 시작된 것인데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 스스로 왕정시대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간 민족사관이 아니라 족보사관 즉 최초의 후예는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식으로 삼국후예인 만주인을 여진족이라 하고 高句麗(고구리) 발해 후예이지만 여진족이라며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시각으로는 우리역사를 바로 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사기에서 나타내듯 삼국인이 전통의 기준으로 했던 전전국가 九黎(구리)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족보사관에서 우리역사의 전통을 정립해야 한다.
남북이 싸웠어도 하나로 보듯 병자전쟁(병자호란)도 역시 하나로 보고, 원나라와 고리전쟁도 하나로 보고, 요나라와 고리도 하나로 보는 사관으로 우리역사를 정립할때야 비로소 삼국사기의 후예들은 하나로 될 것이다. 秦漢이전의 역사도 한무제 이전은 우리역사였다. 한무제가 독립하겠다고 정리하였지만 동이에서 분리된 것은 틀림이 없다. 삼국이 전통계승의 모델로 했던 九黎(구리)의 후예는 하나의 역사로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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