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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전태일의 분신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형 산업화에 의한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장기간 저임금 노동착취의 현실에 대한 처절한 고발이다. 그의 조사결과가 잘 보여주듯이, 평화시장의 시다들은 평균 15살의 소녀들로 살인적인 노동조건에서 하루 14시간씩 일요일도 없이 일하면서도 기본 생활도 어려운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다. 한강의 기적은 이 같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있었기에, 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완만한 학살'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둘째, 그가 분신한 이유, 분신을 하며 외친 요구사항이다. 그것은 '노동해방'도 '사회주의혁명'도 아니다.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이미 있는 법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미 존재..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기도하여 1967년에 3.15를 무색케 하는, 제7대 총선은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구축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사육된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1967년 7월 중정은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이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는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동백림 간첩단사건'은 규모나 등장인물의 면면에서 역대급으로 부정선거 규탄 등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다. 중정은 7차에 걸쳐 수사 결과를 발표, 사건 관계자들은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오마이뉴스 김..

해방 전후로 시작된 우리나라와 미군의 관계는 6·25 전쟁에 이어 베트남 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4년 7월. 베트남 해외 파병을 위한 제1차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된 우리나라 국군 장병의 수는 약 32만명. 그 중 5099명이 전사하고 1만 1232명이 부상을 당했다. 31만여명은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 중 절반인 약 15만명의 장병들이 고엽제로 인한 전쟁 후유증을 앓았다. 정부는 파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됐다. 고속도로는 한국 경제 발전의 분수령이 됐지만, 참전용사들은 전투근무수당을 보상받기는커녕 타 국가유공자에 비해 줄곧 소외돼 왔다. 유족에 대한 처우도 마찬가지다. 전쟁 후유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