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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8) 제3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6일)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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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8) 제3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6일)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

대야발 2025. 6. 13. 14:45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기도하여 1967년에 3.15를 무색케 하는, 제7대 총선은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구축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사육된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1967년 7월 중정은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이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는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동백림 간첩단사건'은 규모나 등장인물의 면면에서 역대급으로 부정선거 규탄 등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다. 중정은 7차에 걸쳐 수사 결과를 발표, 사건 관계자들은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5. 3. 30. 18:24

 

 

[광복80주년명문100선 81] "나에게는 조국과 음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깊은 상관관계 속에 있다"

 

 

 

  윤이상이 1988년5월 독일 연방 대공로훈장을 받을 때 모습입니다.
ⓒ 윤이상평화재단
 
 
 

국민의 신뢰를 잃은 독재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든다.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기도하여 1967년에 3.15를 무색케 하는, 제7대 총선은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을 구축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사육된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1967년 7월 중정은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이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는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동백림 간첩단사건'은 규모나 등장인물의 면면에서 역대급으로 부정선거 규탄 등 모든 정치 이슈를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다. 중정은 7차에 걸쳐 수사 결과를 발표, 사건 관계자들은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윤이상은 191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음악 이론과 첼로를 배우고, 18세 때에 피아노 반주 민요곡집을 펴내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 반일활동으로 오사카에서 구속되어 2개월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을 맞아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음악사를 가르치고 고풍의상·달무리 등 가곡집을 펴냈다.

 

 

1956년 서베를린 음악대학에 유학하여 서양음악의 기교와 한국의 궁중제례음악 등을 통해 고유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의 북한 방문은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닌 예술 활동을 위한 길이었다고 재판에서 설명했다.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끌려와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국제적인 비판과 예술인들의 항의로 1969년에 풀려났다.

 

 

윤이상은 1980년 서독으로 돌아가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고, 광주민주항쟁의 소식을 들었다. 10일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를 지었다. 이듬해 서독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이 되고 미국과 유럽 각국, 일본에서 연주하였다.

 

 

여러 차례 고국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끝내 그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1995년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유해는 현지에 묻혔다가 2018년 고향 통영으로 이장되었다.

 

윤이상은 1989년 한국의 <음악동아> 3월호에 '나의 조국, 나의 음악'을 기고했다. 그의 예술관과 조국사랑이 오롯이 담겨 있다.

 
 
 
  생전 윤이상의 모습.
ⓒ 윤이상평화재단
 
 
 

나의 조국, 나의 음악

 

나에게는 조국과 음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깊은 상관관계 속에 있다. 나의 음악은 나의 조국 속에서 태어났고, 나의 조국은 나의 음악을 그 자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더 풍요한 음악을 낳을 수 있는 소지를 만들 것이다.

 

 

'조국'이란 말은 쓰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과 무게가 다르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이 말을 쓰기에는 착잡한 심정일 것이고, 일본 사람들은 금권(金權)의 세력 때문에 벌써 이 말의 진가를 모르고, 서유럽의 안정된 국가들에서는 예술가나 젊은 세대까지도 이 말을 쓰지 않고 오히려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유린당한 민족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티나, 라틴아메리카 등등의 민족들에게는 '조국'이라는 이 말은 다시 없는 귀중한 정신적인 원천(源泉)이다.

 

 

나에게는 이 '조국'이란 말을 다른 많은 우리 동포들처럼 깊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우리 땅에서 태어난 지 70여 년 동안 한 번도 조국의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했었다. 조국이란 말의 알맹이가 대부분 '민족'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은 이민족에게도 종노릇하고, 같은 민족의 어느 특수권력에게도 또한 무참히 짓밟혀왔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도 배웠고, 또 아름다운 예술의 유산도 배웠다.

 

 

그리고 최근까지 내 동족에 의해 우리 순결한 민족은 마치 숫처녀가 폭한에게 강간을 당하듯 맹목적으로 유린당했고, 게다가 병적인 사디스트들에게 칼부림을 당하여 만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만 예민했던 것이 아니라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일제 때에 일본에 항거하려다 감옥살이를 하였고, 박정권(朴政權) 때에는 정권의 폭력에 의해 납치와 고문을 거쳐 생사를 헤매었고, 또 전정권(全政權) 때에도 많은 민주항쟁과 구명운동에 가담하였었다. 그래서 나는 내 평생을, 특히 유럽생활 33년을, '조국'은 깨어졌지만 귀중한 보물을 등에 업고 동분서주하면서, 한쪽으로는 나의 조국의 생명의 안전과 분단된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또 한쪽으로는 조국이 나에게 남겨준 귀중한 예술적 보물을 아끼고 갈고 닦아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새시대의, 음악의 표현과 정신적 알맹이를 추구한 것이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식탁 위의 금잔(金盞)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내가 1950년대 말에 유럽 현대 음악계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세계의 작곡계는 한창 전통의 파괴와 극도의 추상성의 추구와 개성의 부인 그리고 기법의 고도의 지능화로, 말하자면 무한한 '전위적' 태도와 음(音)의 '계산화'가 한창이었다. 거기에는 '영감' '감성', '민족성', '인간성' 따위의 용어들은 배척되고 음악 속에서도 그것들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우선 작곡가로서의 나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 12음 기법으로 작품을 썼으나, 나의 '모국(母國)의 전통'에서 귀중한 음악적 요소를 찾아 조심스럽게 작품을 써나갔다.

 

 

그리하여 1966년에 서독의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나의 '예악'(禮樂)을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그때에 가능한 모든 작곡적인 환경 속에서 나의 조국이 나에게 준 음악적인 보재(寶材)에 최선을 다한 곡으로, 후일 나의 작곡노선에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예술가는 누구도 한번 도달한 영역에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다. 항상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문제에 부닥쳐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때 도달한 '예악'으로서의 성공이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설정한 평면적인 '주요음'(主要音) '주요음향'을 사향적(斜向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또 이것을 절단시켜서 시간적으로 '디딤돌'처럼 연결시켰다. 이리하여 나의 음악이 우리 민족 속에 오래 흘러오는 선적(線的)인 미(美)를 탐구한 지 약 15년 만인 1975년경부터 나는 나의 정신상에 오래 맺혀 있던 '인간성의 탐구'로 전진했다.

 

 

나는 그때 서유럽의 어느 작곡가보다도 앞장서서 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인간성'에의 호소와 접근은 먼저 계속된 '협주곡'으로 자리를 굳혔다. 첼로협주곡, 이중협주곡, 플루투협주곡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때에는 나의 정신세계가 내가 느낀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에서 치른 심한 인간적 상처가 개인감정에서 순화되던 때이고 또 세계정세가 원폭 경제 속에서 많은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첨예화된 때이다.

 

 

서유럽의 작곡계는 나의 이런 '사회참여적' 또는 '인간성'에의 접근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젊은 작곡가들이 이에 따랐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전 세계의 작곡계가 '옹색한 자기세계'를 탈피 또는 해방하여 모든 양식과 모든 정신적 태도가 자유롭게 경험하고 있다.

 

 

나의 5개의 교향곡은 나의 생애에서 이룬 나의 음악의 집대성이라 할 수가 있다. 여기에는 내가 1960년대에 토대를 굳힌 기법적·미학적 민족의식에서 꾸준히 전향(前向)하여 동양의 '지역성'에서 '세계에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나, 나의 작품의 근본적 위치는 포기하지 않고 그 근저에 깔려 있다.

 

 

서양의 음악사를 볼 때 어느 저명한 작곡가이건 다 그들의 조국(이 말은 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포괄하는 말로서)에 그들의 예술을 뿌리박고 있다. 대별한다면 이탈리아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러시아 음악 등등.

 

 

어느 나라의 작곡가도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독일 사람이 진정한 러시아 작품을 소화하기는 힘들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의 연주가들이 독일의 고전이나 낭만을 완전히 소화하려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앞에 쓴 바와 같이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민족)의 모든 예술적·철학적·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格調)와 순도(純度)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강한 힘이 있는 것이다. 1989년 1월 서베를린에서(1)

 

 

 

중앙정보부는 7월 3일부터 17일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유럽 거주 지식인들과 유럽에 유학한 바 있는 국내 교수들, 이들 교수들과 연결된 학생운동 지도자 등 20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203명에는 윤이상, 이응로,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등 해외 거주 교민 30명과 황성모 서울대 교수,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이외에 시인 천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 '간첩' 누명에 떠돌다 귀천 후에야 고향땅 밟은 세계적 작곡가

 

[손호철의 발자국] 13. 경남 통영 :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 윤이상 이곳에 잠들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4.05. 08:28:46 최종수정 2021.04.05. 14:43:08
 

 

'한국의 나폴리'. 개인적으로 전남의 강진·해남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인 통영의 별명이다. 통영은 개인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 2학년 때, 수배를 피해 도망을 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직행한 슬픈 추억을 가진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도해와 세월을 비껴간 것 같은 아담한 도심, 그리고 한국 최대의 굴 생산지답게 싱싱한 굴 요리로부터 충무김밥, 중앙시장의 시락국 등 풍부한 먹거리와 좋은 지인(고 노회찬 의원의 고등학교 동기이며 이곳에서 '건강한 굴양식'을 하는 시인 장석 씨) 때문에 자주 찾는다.

 

 

▲ '한국의 나폴리' 통영의 야경 ⓒ손호철

 

 

 

이 같은 매력과는 별개로, 통영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2018년부터 찾게 된 미륵도 관광특구의 언덕에 서면 그러하다. 이 언덕에 서있는 멋진 현대식 건물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천연석으로 만든 묘비석이 통영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돌에 새겨진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는 뜻의 글 밑에는 '윤이상 1917~1995'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통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해외간첩단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희생자였던 윤이상의 고향이다. 따라서 이곳에 서면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동백림 사건이 웅변적으로 보여준 분단의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2000년대 들어 그가 우리 사회에서 '복권'이 되어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은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8년에는 독일에 있던 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 윤이상 묘가 있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내려다본 통영의 모습 ⓒ손호철
 
 
 
▲ 통영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이상의 무덤 ⓒ손호철

 

 

 

 

충남 예산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암자가 있는 수덕사가 있다. 그 앞에는 초가지붕을 한, 풍치 있는 수덕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수덕여관 앞에는 땅에 누운 커다란 바위에 글자를 닮은 특이한 암각들이 눈에 띈다. 윤이상과 함께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응로 화백(1904~1989)의 흔적들이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그는 해방 후 귀국해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들도 그의 작품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두 명의 세계적인 예술가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의 누명'을 쓰고만 것이다.

 

 

▲ 충남 수덕사 앞 바위에 새겨진 이응로 화백의 글씨. 그 역시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다. ⓒ손호철

 

 

 

"나는 공산당이 아니다." "아이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다." 1967년 6월 말. 윤이상을 심문하던 조사관이 조사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서 보니, 벽에는 피로 이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윤이상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사관이 잠든 사이 윤이상은 책상에 있던 사각형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해를 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7월 3일부터 17일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유럽 거주 지식인들과 유럽에 유학한 바 있는 국내 교수들, 이들 교수들과 연결된 학생운동 지도자 등 20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203명에는 윤이상, 이응로,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등 해외 거주 교민 30명과 황성모 서울대 교수,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이외에 시인 천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독일에서 공부한 서울대 문리대 교수이자 한일회담 반대투쟁 등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지도교수였던 황성모 교수를 통해 북한이 학생운동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고 총선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이던 학생운동은 풍비박산 났다. 중앙정보부가 공작원들을 파견해 독일과 프랑스에 윤이상, 이응로 등을 사실상 불법적으로 납치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백림 사건 당시의 윤이상 모습 ⓒ손호철

 

 

 

 

 

윤이상과 이응로는 공통점이 많다. 서양 예술에 각각 동양적 음악과 동양화 기법을 도입해 주목을 받은 것이 그러하고, 둘 다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이상이 통영의 죽마고우로 월북한 음악가 친구의 소식을, 이응로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 소식을 물어보려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도 비슷하다.

 

 

서베를린에 살고 있던 윤이상은 이후 북한대사관을 10여 차례 방문했고 여비 등의 명목으로 금품도 받았다. 자신의 작품 테마로 구상하고 있던 고구려 강서고분도 보고 북한의 실상을 보고 싶어 1963년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재판과정에서 "북한의 노동당 가입 권유는 일언지하에 거부했으며 북한과 접촉한 것은 결코 사상적으로 동조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부인 이수자는 윤이상이 돈을 받은 의리 때문에 북한대사관에서 전화가 오면 몸서리를 치면서도 찾아갔고, 다녀와서는 "내가 백림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괴로워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윤이상 등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대접을 받고 금품도 받았으며 일부는 북한은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간첩죄에 대해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고, 다만 '적국'인 북한 방문 등에 관해서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이에 화가 난 박정희는 유신 후 판사 재임명제를 도입해 사법부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질시켰다).

 

 

윤이상, 이응로는 국제예술가들의 서명운동과 독일, 프랑스 등의 압력으로 석방되어 독일과 프랑스로 돌아갔다. 황성모 교수와 김중태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 같은 민비연 관련자들도 가벼운 형을 받는데 그쳤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이들 유럽의 지식인들은 국내와 달리 국가보안법 등을 잘 몰랐고 북한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고, 외화송금 제한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유학생 등은 북한의 호의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많은 유학생 등이 북한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도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문제는 독일 유학 시절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임석진 교수가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정보기관에 자수를 하면서 불거졌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임 교수를 직접 청와대로 불러 설명을 듣고 공작팀을 만들어 유럽 등에서 관련자들을 잡아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 반공에 목을 매고 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이들을 좌시할 수 없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판단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이들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잡아 온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국내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동서독 간 교류를 보고 동백림을 왕래해서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사전에 한국대사관이 경고라고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 무리하게 간첩죄를 씌워 상처를 주었지만 대법원이 간첩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을 간첩으로 발표해버림으로써, 그가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평생 쓰고 살도록 했다. 그 결과 윤이상, 이응로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소위 '반한친북인사'로 만들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동백림 사건의 해외 불법납치공작의 경험이 197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을 잉태했다는 점이다. 1973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김형욱 살해사건'이 그것들이다, 유신 선포 당시 외국에 있었던 김대중은 일본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서 서울로 끌고 왔다. 김형욱 사건은 더욱 극적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동백림 사건을 터트린 김형욱은 권력에서 밀려나자 해외로 도주, 미국에서 반(反)박정희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프랑스로 유인해 비밀리에 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동백림 사건은 이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불법해외공작의 효시이다.

 

 

 

 

▲ 통영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곡 중인 윤이상의 모습이 담긴 사진 ⓒ손호철

 

 

 

윤이상은 1969년 독일로 돌아간 뒤 독일로 귀화했고 1972년 오페라 '심청'으로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여는 등 세계적인 작곡가로 주가를 날렸다. 동백림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숙해진 그는 1980년 광주학살을 보고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했다. 1988년에는 자신이 직접 옥고를 치르며 체험한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 남북한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해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 간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켰다.

 

 

▲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식에 '심청'을 공연해 서구음악의 정상에 섰다. ⓒ손호철

 

 

 

윤이상은 통영을 무척이나 사랑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1994년 서울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윤이상음악축제가 열리면서 귀국을 준비했으나, 한국 정부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옹졸하게 요구하자 귀국을 거부했다. 윤이상은 독일 예술에 기여한 공으로 독일 대공로훈장과 괴테상 등을 받았다.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목숨을 거둔 그는 이제 윤이상 생가터에 세워진 윤이상공원의 동상으로 우리를 맞는다. 공원에 세워진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의 천재성과 분단과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의 아픔 등 그의 체취를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음악관을 배울 수 있다.

 

 

"우주에는 항상 흘러 다니는 음(音)이 존재한다." "음악은 작곡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음을) 낳는 것이다." 음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서양음악과 달리 그는 도교적 관점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그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의 음악언어는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더 가깝습니다. 나의 음악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단결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음이 하나의 우주라는 윤이상의 음악관에 대한 설명 ⓒ손호철

 

 

 

▲ 윤이상기념관 앞에 세워진 윤이상 동상 ⓒ손호철
 
 

천의무봉한 시인 천상병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 '귀천'을 생각한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 친구에게 막걸리를 얻어먹은 죄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받고 나와 쓴 '소풍'이란 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통영을 떠나려는데 '소풍'의 슬픈 구절이 생각났다.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귀천'의 시인까지도 이처럼 절규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저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

(중략)

오늘 / 반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 바람이 바뀌었다고 /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

(중략)

홀로 밤길을 걷고 /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 이곳이 아름답다고?(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330182408792

 

 

(2)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041256063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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