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20) 제3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6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본문
대한민국 (20) 제3공화국 : 박정희정부(1963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6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대야발 2025. 6. 15. 16:20

1964년 봄부터 시작된 대학가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6월 3일을 기해 전국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박정희는 즉각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이 조기방학에 들어가면서 투쟁 동력도 꺾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8월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인민혁명당’ 사건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을 결성해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한일회담 반대를 획책하며,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혐의였다.
이렇듯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혁신계 인사들과 서울, 대구의 시위 주동 학생 등 40여 명이 줄줄이 구속됐다. 이재문 선생도 함께 구속됐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 기록을 넘겨받은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검사들은 ‘증거가 충분치 않은 데다가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건의 실체가 과장되었다’며 반발했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북의 지령과 지하당 건설까지 엮어내는 것은 자신들이 보기에도 해도 너무 했다는 것이다. 해방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고,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못 한 상황에서 한일수교를 서두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상당했다. 결국 구속된 학생들은 대부분 석방됐다.
■ 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④ 6.3 투쟁과 1차 인혁당 사건
[연재]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34)
- 기자명 안영민 입력 2024.08.27 00:00 수정 2024.08.28 13:07

1964년 봄, 대학가는 다시 시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1963년 10월의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15만여 표 차로 간신히 꺾고 당선됐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최소 득표 차이였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군정 시절부터 추진해 온 한일수교를 서둘러 타결하려고 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에서 가져오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이에 야당과 재야 세력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정권에 맞섰다. 학생들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그 무렵 아버지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교수들의 서명에 앞장서고 있었다. 서명은 경북대에서 시작해 대구대와 청구대(두 학교는 1967년에 영남대로 통합됐다), 계명대와 효성여대(현재 대구가톨릭대)로 확산됐다.
이재문 선생도 대구매일신문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대구지역 대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경북대에는 ‘맥령’(麥嶺, 보리고개)이라는 서클이 학생운동의 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맥령은 1960년의 대구 고등학생 2.28 시위와 4.19를 경험한 경북대 학생들이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맥령을 이끈 인물은 이재형 선생이었다. 경북대 정치학과 58학번으로 이재문 선생의 직계 후배였던 이재형 선생은 4.19 당시 경북대 시위를 주도했다. 그 뒤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복학하여 다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64년에 경북대와 대구지역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이끈 이재형 선생은 대학 졸업 후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때 구속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82년에 석방됐다. 출소 후에도 대구지역에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당시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2004년에 65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재형 선생을 통해 경북대와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지도했던 사람이 바로 이재문 선생이었다. 이재문 선생은 4.19 이후 열린 공간에서 기자라는 신분을 활용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와 혁신정당 등 재야운동과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의 청년운동, 그리고 대학생과 고등학생 운동에 이르기까지 핵심 운동가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러면서 우리 운동의 전망과 방향을 그들과 함께 논의해 나갔다. 아버지와도 마찬가지였다.
“1964년 5월과 6월에 연구실에서 몇 차례 만났을 때, 우리 운동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함께 토론했어. 당장은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4.19와 같은 민중항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먼저였지만, 민족자주와 민주주의, 통일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
아버지는 과거 남로당 운동이 왜 실패했는지 제대로 평가하고, 대중투쟁을 통해 검증되고 단련된 핵심을 새롭게 발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특히 해방 이후 밀양에서 아버지가 직접 겪은 남로당의 운동 방식을 이재문 선생에게 설명하면서, “대중들과 괴리된 채 책상머리에 앉아 말로만 하는 운동의 후과가 어떤지 남로당을 보면 똑똑히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문 동지는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변혁운동을 고민했기에 해방 직후의 남로당 운동을 경험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재문 동지가 만나는 혁신계 인사 중에는 남로당 출신들이 적지 않았어. 남로당이 오랫동안 탄압만 받아왔기에 다들 객관적인 평가를 해내기가 어려웠지. 그래서 남로당의 문제점을 이재문 동지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이재문 선생은 아버지의 문제 제기에 공감했다. 이제는 4.19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세대 속에서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그런 문제의식 속에 이재문 선생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동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앞으로 안 교수가 경북대 운동 핵심들의 교양 사업을 좀 맡아 주세요.”
“내가요? 교수인 내가 그 일을 맡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이재문 선생은 그렇지 않다며, 세 가지를 근거로 댔다고 한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론적 수준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학습하면서 변증법과 유물론 철학,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당사, 코민테른 역사, 중국혁명과 모순론 철학, 일본어판 자본론, 조선민족해방투쟁사 등을 꼼꼼하게 정리한 노트를 본 이재문 선생은 탄복했다고 한다. 그 노트만으로도 충분한 학습 교재였다. 실제로 사회과학책을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라 아버지의 노트를 비밀리에 돌려 읽으며 학습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둘째는 대학교수라는 신분이었다. 오래전에 졸업한 이재문 선생이 학교를 드나들며 후배들을 만나면 누가 봐도 이상하겠지만, 아버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문리대 교수로서 연구실에서 학생을 만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같은 이유로 학생운동 지도부에 투쟁 지침을 전달하기도 편하다는 것이다. 정보과 형사나 학교 측의 동향도 파악하기 쉽고, 이에 맞게 현실적인 투쟁 방법을 모색하는 데도 아버지의 존재가 더 유리했다.
“그때까지 나는 혼자서 정세를 분석하고 학습해 왔어. 조직적으로 연계된 선이 없었지. 그런 내게 이재문 동지가 과업을 주니 오히려 고마웠어. 그때 내가 이재문 동지에게 했던 말은 하나였어.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조직적 상부라고 생각하겠소.’ 나는 그 생각을 평생 잊지 않았어. 이재문 동지와 많은 토론을 하고, 간혹 의견 차이도 있었지만, 그가 나의 ‘상부’라는 생각은 절대 잊지 않았지.”
하지만 이재문 선생의 제안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버지는 당시에 제안받은 임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1964년 봄부터 시작된 대학가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6월 3일을 기해 전국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박정희는 즉각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이 조기방학에 들어가면서 투쟁 동력도 꺾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8월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인민혁명당’ 사건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을 결성해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한일회담 반대를 획책하며,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혐의였다.

이렇듯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혁신계 인사들과 서울, 대구의 시위 주동 학생 등 40여 명이 줄줄이 구속됐다. 이재문 선생도 함께 구속됐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 기록을 넘겨받은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검사들은 ‘증거가 충분치 않은 데다가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건의 실체가 과장되었다’며 반발했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북의 지령과 지하당 건설까지 엮어내는 것은 자신들이 보기에도 해도 너무 했다는 것이다. 해방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고, 친일파 청산도 제대로 못 한 상황에서 한일수교를 서두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상당했다. 결국 구속된 학생들은 대부분 석방됐다.
“이재문 동지는 5개월간의 재판을 거쳐 1심에서는 무죄로 석방됐어.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2심까지 끌고 가 집행유예이기는 해도 기어이 유죄를 선고했지. 석방되고 난 뒤 이재문 동지는 감옥 뒷바라지를 해준 김재원 선생과 1965년 봄에 결혼했어.”
김재원 선생은 1935년에 원산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모두 서울로 이주한 뒤 1941년에 계성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경기여중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나면서 대구로 피난한 뒤에는 효성여고를 졸업했다. 효성여대에 입학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대학 졸업 후 1958년부터 가톨릭출판사에서 근무했고,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사)로 옮겨 기자로 활동했다. 이재문 선생이 1961년 2월에 창간된 민족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할 때, 김재원 선생도 가톨릭시보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서로 알게 됐다. 하지만 민족일보 사건으로 이재문 선생이 수배받으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2년도 더 지나서였다. 이재문 선생은 수배 해제 후, 박정희 정권이 고령의 병역미필자 구제와 국토건설사업의 수행을 위해 만든 ‘국토건설대’에 들어가 군 문제를 해결했다. 그 뒤 대구매일신문에서 다시 기자 생활을 이어갔고, 국회와 청와대 출입 기자로 서울에서 일하면서 김재원 선생과 재회했다. 가톨릭계인 대구매일신문의 서울 사무실이 가톨릭신문사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이재문 선생이 구속되자, 김재원 선생은 옥바라지를 자청하고 나섰다. 당시만 해도 구속자의 면회는 가족만 가능했다. 옥바라지를 하겠다는 건 곧 결혼을 약속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김재원 선생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을 금하기도 했지만, 끝내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2000년 무렵 내가 『말』지 기자 시절에 김재원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이 대목을 물어보았다.
“이재문 선생님의 옥바라지를 결심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기자로 일할 때 가까이서 지켜본 이재문 선생은, 불의 앞에서는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배려가 몸에 밴 성품이었죠. 기자로서 실력도 탁월했어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미국 방문 일정이 잡혔을 때, 청와대 출입 기자 중에서 수행 기자로 거론되기도 했죠. 본인이 거절하는 바람에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에게 기회가 넘어갔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박정희한테 더 밉보였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구속됐을 때, 왠지 내가 이 사람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 사람은 1965년 봄에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큰딸이 태어났다. 그 뒤 이재문 선생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살림집은 봉덕동에 구했다. 김재원 선생은 효성여대에서 학교 신문사 일을 하면서 집안 경제를 책임져 나갔다.
대구로 내려온 이재문 선생은 아버지에게 연락했다.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에게는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토론해야 할 주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1960년 4.19 혁명과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거치면서 남쪽의 변혁운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 속에 숨죽이며 살아가던 운동가들은 민중의 항쟁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남쪽의 변혁운동을 제대로 이끌어 갈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토론했다. 이때 아버지와 이재문 선생이 나눈 이야기는 훗날 남민전 결성의 실마리이자 남민전 활동의 큰 방향이 되었다.(1)
<자료출처>
(1) 4장 이재문과 여정남 ④ 6.3 투쟁과 1차 인혁당 사건 < 안영민의 「아버지, 안재구」 < 연재 < 특집연재 < 기사본문 - 통일뉴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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