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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2) 제4공화국 : 박정희정부(1972년 10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1972년~1979년 유신체제 본문
대한민국 (22) 제4공화국 : 박정희정부(1972년 10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1972년~1979년 유신체제
대야발 2025. 6. 16. 16:18

군인이 점령한 서울 도심… 유신 체제의 시작
1972년 10월 17일, 대한민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된 ‘10월 유신’ 당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대통령의 특별선언이 발표되던 날,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군인들이 배치되고 탱크가 등장했다. 이를 본 리스너들은 “서울에 탱크가 있었던 거야?”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당시 뉴스 화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라는 멘트가 흘러나오며, 당시 정권이 유신 체제를 어떤 식으로 홍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 '꼬리에꼬리를무는이야기' 유신과 긴급조치(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곡점 중 하나로 꼽히는 ‘1972년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집중 조명한다. 13일 방송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는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를 주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 선포된 유신 체제와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 그리고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다.
이번 회차에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리스너로 출연해, 70년대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의 전말을 듣고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민주주의가 철저히 통제되던 시절, 국민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직접 확인하며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던 시대”… 박효주의 의미심장한 발언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의 주제를 소개하던 MC 장도연은 “오늘의 회차는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자 박효주는 "요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서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해, 그녀가 이 주제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실제로 1972년 10월 유신 체제가 선포된 이후, 정부는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했다.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강력한 법적 조치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안겼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감옥에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박효주의 이 같은 반응은, 당시 얼마나 강력한 억압이 있었는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군인이 점령한 서울 도심… 유신 체제의 시작
미리 공개된 예고 영상에서는 1972년 10월 17일, 대한민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된 ‘10월 유신’ 당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대통령의 특별선언이 발표되던 날,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군인들이 배치되고 탱크가 등장했다. 이를 본 리스너들은 “서울에 탱크가 있었던 거야?”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당시 뉴스 화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라는 멘트가 흘러나오며, 당시 정권이 유신 체제를 어떤 식으로 홍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긴급조치 1호, 2호, 4호, 그리고 9호…”
이날 방송에서는 유신 헌법이 시행된 이후, 박정희 정권이 내놓았던 강력한 통제 수단인 ‘긴급조치’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MC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은 각각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긴급조치 4호가”,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어”라고 말하며,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긴급조치의 세부 내용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이를 들은 박효주와 이인권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는 의미에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조치였다. 당시 정부는 국민들의 사소한 대화조차 감시하고 통제했으며,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사람들은 즉시 체포되기도 했다. 이는 국민들의 일상생활마저 위축시키며, 철저한 공포정치를 가능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앙정보부와 언론 통제, 그리고 ‘부마민주항쟁’
이날 방송에서는 긴급조치로 인해 언론이 어떻게 통제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공개된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철저한 검열을 통해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을 압박했고, 이에 저항한 일부 매체들은 강제 폐간되거나 기자들이 투옥되는 사태를 겪었다.
뿐만 아니라,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도 다뤄진다. 이는 긴급조치 9호로 억눌려 있던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앞당긴 중요한 사건이었다. 방송에서는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증언과,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적인 일들도 조명할 예정이다.
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박효주는 "와, 나 소름 돋았어"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홍석천은 장현성에게 "너랑 나랑은 좋은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졌다.
70년대 한국 사회의 민낯을 파헤친다
제작진은 “이번 방송은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라는 주제를 통해, 당시 국민들이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를 집중 조명하는 시간”이라며 “민주주의가 철저히 억압된 시절, 국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으며,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곡점으로 평가되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깊이 있게 다루며, 민주주의가 어떻게 억압되었는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은다. 특히 서울 도심에 배치된 군인들과 탱크, 그리고 언론을 통해 미화되던 유신 체제의 모습이 당시의 실제 화면과 증언을 통해 생생히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이 집중된다. 또한, 긴급조치 9호로 인해 국민들이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실상이 드러나며,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부마민주항쟁의 과정도 함께 조명된다고 알려져 기대감을 높인다. 출연진들의 생생한 반응과 함께, 오늘날에도 유신 체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되짚어볼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70년대 한국 사회의 숨겨진 진실을 어떻게 풀어낼지, 방영 후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과연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국민들은 이 억압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모든 이야기는 13일 밤 10시 20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한국판 'Z', 금지의 '끝판왕' 박정희
[손호철의 발자국] 61. 서울 장충체육관 : 국가가 머리카락과 치마길이까지 지시했던 유신체제
<Z>.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정치영화감독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한 그리스 인권운동가의 암살을 주제로 만들어서 최고의 외국영화상 등 아카데미상을 두 개나 받은 1960년대의 명화이다. 이 영화의 끝에는 1967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부가 집권 후 금지한 목록들이 나온다. 그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미니스커트다. 미국 유학시절 이 영화를 보다가 이 부분을 보고 "어쩌면 군사독재는 똑같은가" 하고 무릎을 쳤다.

박정희가 1972년 유신을 선포하며 시작된 유신시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이 유신시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군화발도, 중앙정보부 지하실도 아니고, '자'다. 그렇다. 유신체제는 머리카락 길이와 치마 길이까지 법으로 규정해 처벌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할 수 있도록 경범죄를 개정한 뒤, 귀를 덮는 머리와 무릎 위 17센티미터보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단속 대상으로 삼아 경찰들이 자를 들고 다니며 단속했다. 이 결과 1973년에만 1만2870명이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에게 머리를 깎였다.
이제는 극우논객이 된 한 유명 교수는 명동에 나갔다가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를 깎인 뒤 분노해 반정부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명동 파출소 앞바닥에는 '미니스커트 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현장'이라는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유신시대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것은 반상회다. '반'은 일제가 국민들을 조직, 통제하기 위해 만든 최말단 조직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선포 후 주민통제를 위해 이 같은 반을 정기적으로 소집해 주민들을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한 것이 바로 반상회다.
1976년 5월 31일 오후 6시,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동시에 반상회가 열렸다. 전국 671만 가구에서 한 명씩 참석하게 했는데, 526만 명이 25만5000 곳에 모여 참석율이 78.4%였다.
이렇게 시작된 반상회는 매달 1일인 새마을의 날 전날 저녁에 열려 반장과 구청직원이 참석해 출석을 점검했고 불참에 대해서는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이 모임은 정부의 주민통제 수단으로 정부 홍보에 주로 이용됐지만, 북한의 5호감시제처럼 주민들이 서로 감시하고 수배중인 학생운동 지도자 등을 색출하는 목적으로도 이용됐다.
정치학은 비민주적인 정부를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로 구분한다. 권위주의는 많은 군사독재들처럼 국민들을 탈정치화시킨다면,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구 사회주의 체제와 북한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같은 공식적인 통치이데올로기(반공과 같은 부정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데올로기로 국민들을 적극적으로 의식화, 정치화시키고 동원하며, '사적 영역'이라는 것을 아예 허용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이 영역까지 침투해 통제한다.
이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졌던 우리의 독재체제들은 기본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였지만, 유신은 장발 단속과 반상회 등이 보여주듯이 전체주의에 가까웠던 체제였다. 즉 국가가 머리카락 길이와 치마 길이 같은 개인의 취향까지도 통제했던 체제가 바로 유신이다.
"제적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찬성 99.9%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유신의 흔적을 만나려면, 우리는 장충단공원에서 가까운 장충체육관에 가야 한다. 이곳은 유신의 또 다른 상징인 '체육관 선거'가 치러진 곳이다. 1972년 12월 23일 이곳에서 제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했는데, 대의원 정수 2359명 중 전원이 참석하여 단일후보인 박정희는 아마도 잘못 찍은 무효표 2표를 제외하고 99.9%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99.9%의 지지라니, 북한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사실상의 전체주의 체제였다.
"아니 이게 진짜란 말이야?"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분노와 경악이 합쳐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총선 결과 공화당이 승리하긴 했지만 득표율(48.8%)이 야당인 신민당(44.4%)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에서 5석 중 무려 4석을 야당이 차지한 것이다. 국회의장 이효상 등 자신의 심복들이 다 떨어진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으로 민정 이양 후 1963년 선거에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됐고 1967년 재선했다. 대통령 4년 연임제였던 헌법에 의해 1971년에는 권력을 내놓게 된 박정희는 야당과 여당 내 내각제 세력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을 강행해 1971년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를 볼 때, 선거에 의해서는 앞으로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다음 해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에서 빌려온 이름에서부터 친일파시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과 정치활동 등을 중지시키며,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해 1개월 내에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내용이다. 대만의 영구집권 총통제를 모델로 만들어진 유신헌법은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전환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고 연임 제한을 없애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회의원의 1/3(유정회)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이 헌법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가지며,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법관임명권을 가짐으로써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평생 동안 제멋대로 나라를 운영하게 만든 사실상 세습만 없는 '현대판 왕정체제'였다.
유신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80% 투표에 찬성 73%로 통과됐다. 하지만 이에 대한 찬반토론을 금지하고,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언론을 통제한 상황에서 관권선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투표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이장희의 '그건 너', 조용남의 '불 꺼진 창',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공통점은 모두 유신시대 금지곡이었다는 점이다.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지금은 행복하지 않냐는 이유로, '그건 너'는 불신풍조 조장을 이유로, '불 꺼진 창'은 왜 불이 꺼져 있느냐는 이유로, '키다리 미스터 김'은 작은 키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뿐만 아니라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분식의 날로 지정해, 음식점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으며, 평일에도 밥에는 보리쌀 등을 25%이상 섞어 팔도록 의무화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부여된 긴급조치 발동권을 발동해,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금지하고 유언비어 배포를 처벌하는 등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발표해 국민들 삶의 구석구석을 통제했다. 소위 '긴조(긴급조치)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에 대한 재판은 비상군법회의가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589명을 기소했다. 특히 긴급조치 4호는 반유신 학생운동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대한 것으로, 박정희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조작해 사법살인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유신체제는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을 놓고 벌어진 박정희·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갈등 속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12‧12군사쿠데타와 5‧18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박정희 없는 유신헌법'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체육관 선거에 99.4%의 지지를 받아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장충체육관을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궁금해졌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보수청년들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끌려가고, 머리카락이 길다고 바리캉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깎이고, 좋아하는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새마을 노래' 등 건전가요들만 들을 수 있고, 수요일과 토요일은 밥을 먹고 싶어도 분식 이외에는 사먹을 수 없고, 매달 한 번씩 반상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하면, 그래도 박정희를 존경할까?
10월 유신의 흔적들
진해는 한국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자처하는 '벚꽃의 도시'다. 그러나 진해, 그것도 미래를 꿈꾸는 어린이도서관 앞에 가면,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10월 유신 기념탑'이다. 중원로터리의 진해문화원 옆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앞에는 젊은 해군 등이 유신헌법 책을 들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높이 들고 있는 10월 유신 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얼마 되지 않은 1973년 초에 만든 것이다.

진해에서 마산을 거쳐 고성으로 넘어가는 구 도로에는 동진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창원공원묘원 입구에 있는 이 고개에도 어두운 역사의 유산이 남아 있다. '조국의 무궁한 발전과 평화적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우리들은 삼가 여기에 동산을 세우노라. 1977년 12월 19일 통일주최국민회의 마산지역 대의원 백찬기 등.' 이같이 쓰여 있는 '유신동산'이라는 기이한 기념돌이다.(1)
<자료출처>
(1) '꼬리에꼬리를무는이야기' 유신과 긴급조치(꼬꼬무)